‘젠장, 역시나 여자 셜록 홈즈가 따로 없네.’‘이렇게 중요한 증거도 바로잡아낸다고?’내가 마침 어떻게 답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을 때 형수가 끼어들었다.“수호 씨 몸에 있는 향은 제가 묻힌 거예요. 믿지 못하겠으면 맡아봐요.”형수는 말하면서 제 팔을 내밀었지만 지은은 동성과의 접촉을 싫어하는지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쳤다.그러자 형수가 웃으며 말했다.“윤 선생님, 수호 씨 정말 여자 친구 없어요, 이성과 성행위를 할 가능성도 없고요. 너무 얌전해서 여자 꼬시는 법을 내가 직접 가르쳤는데 아직도 몰라요. 그런데 여자와 그런 짓이라니요.”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핸드폰으로 목발 사진을 꺼내 들며 말했다.“이것 봐요. 이거 정수호 환자분 거 맞나요?”나는 당황한 나머지 형수의 눈치를 살폈다.지금 걱정되는 건 지은한테 들키는 게 아니라 형수가 나와 지은 사이에 벌어진 일을 알까 봐 두려웠다.지은의 기분 따위는 아무렴 상관없지만 형수의 기분은 상관있었다.형수의 앞에서 나쁜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았으니까.그런데 의외로 형수는 사진을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이건 수호 씨 거 아니에요. 우리 수호 씨 건 화장실에 있거든요.”“그걸 화장실에 왜 두나요?”지은이 퉁명스럽게 묻자 형수가 대답했다.“목발이 더러워져서 방금 옷 씻을 때 씻었거든요. 내가 좀 깔끔 떨어서. 무슨 문제 있어요? 혹시 잃어버렸을까 봐 배상하라고 꺼낸 얘기인가요?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잃어버려도 배상할 돈은 충분히 있어요.”“그런 뜻이 아니에요. 시간도 늦었으니 일찍 쉬세요.”지은은 나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떠나갔다.하지만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형수를 바라봤다.형수는 방금 분명 나를 도와 거짓말을 한 거다.지은이 떠나면 반드시 나한테 심문할 텐데, 나는 더 이상 형수에게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다.때문에 형수가 물어보면 사실대로 대답할 생각이었다.“수호 씨, 수호 씨와 윤 선생님 간단한 사이 아니죠?”형수가 침대 옆에 앉으며 묻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
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태연의 마음도 복잡했다.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수호가 다른 여자와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니.저도 모르게 수호와 지은이 뒤엉켜 있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마음이 미어질 것만 같았다.하지만 수호는 남편의 동생이니 밖에서 어떤 여자를 만나든 태연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질투할 자격은 더더욱 없고.이러한 복잡한 마음 때문에 태연은 너무 괴로웠다.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나는 형수가 진실을 알고 나를 모른 체한다고만 생각했다.“형수, 말 좀 해봐요, 네?”나는 형수의 팔을 잡고 애원하듯 말했지만 형수는 깊은숨을 들이켜더니 핸드폰을 나에게 돌려주었다.“늦었는데 일찍 자요.”형수가 말을 마친 뒤 바로 떠나버리자 나는 너무 불안해 났다.이 상태로 뒤쫓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저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한편, 태연은 복도를 나와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한시 빨리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은 마음뿐이었다.사실 이건 수호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애초에 수호가 자기 집에 얹혀살기 시작했을 때 겁 많은 남자였는데, 본인이 나서서 개발했으니.매번 화끈하고 섹시한 형수와 다정하고 우아한 애교를 만나는데 아무도 손대게 하지 않으니 수호는 그저 혼자 풀 방법을 찾은 것뿐이다.이제 고작 20대라 한창 혈기 왕성할 때니까.한참 동안 생각한 태연은 마침내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깊이 자책했다.애초에 저와 남편이 이런 일에 수호를 끌어들이지 않았으면, 아직도 다른 대학생들처럼 평범한 생활을 했을 테니까.애교는 결국 다시 병실로 돌아갔다.형수가 돌아올 때까지 나는 자지 않았다.형수가 돌아오지 않으면 잠들 수가 없었으니까.“형수.”그러다 형수가 돌아오자 벌떡 일어났다.형수는 얼른 나더러 다시 누우라며 입을 열었다.“다리도 불편한데 누워요.”“형수, 아직도 화 났어요?”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형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왜 화내겠어요? 수호 씨도 성인이고 사생활이 있는데 내가 화낼 권리는
난 형수 알기를 바란다. 내가 형수의 몸과 마음을 원한다는 걸.그러다 순간 얼굴이 달아오른 형수를 보자 나는 가슴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형수도 이 순간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나는 참지 못하고 형수를 와락 끌어안았다.그러자 형수는 두려웠는지 다급히 말했다.“이거 놔요, 누가 보면 어떡해요.”“안 놓을 거예요. 형수가 제 물음에 대답하기 전까지는.”나는 일부러 이런 거다.내가 일부러라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형수는 절대 내 질문에 답하지 않을 테니.“내 마음속에도 수호 씨가 있어요. 됐죠? 이거 놔요.”형수는 황급히 대답했지만 나는 여전히 손을 놓지 않고 오히려 더 집요하게 물었다.“안 돼요. 방금 대답은 너무 성의 없었어요. 진지하게 대답해요.”그때 옆 침대에 누운 어르신이 깨어날 것처럼 굴자 형수는 더 겁이 나 끝내 입을 열었다.“그래요, 인정할게요. 내 마음속에도 수호 씨가 있어요.”만족스러운 답변에 나는 겨우 손을 풀었다.옆 병상의 어르신은 화장실에 깨어나자마자 화장실로 향했고, 아내 되는 분이 어르신을 부축했다.그걸 본 형수는 나를 매섭게 쏘아보았다.하지만 나는 오히려 헤실 웃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솔직히 형수한테서 그런 말을 들은 게 지은과 만족스러운 관계를 가진 것보다 더 만족스럽다.그도 그럴 게, 형수는 내가 마음에 둔 여자니까.나는 슬그머니 형수의 손을 잡았다.“오늘 형수를 안고 자도 돼요?”“안 돼요. 질문에 답도 했는데 어디서 은근슬쩍 더 요구해요?”“형수의 마음을 알았으니 이러는 거잖아요. 형수의 마음속에도 제가 있고, 제 마음속에도 형수가 있는데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게 너무 답답하지 않아요?”“그럼 수호 씨도 내 물음에 진지하게 대답해요. 만약 내가 정말 수호 씨한테 몸을 내어주면 나 책임질 수 있어요?”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할 수 있어요.”“그럼 어떻게 책임질 건데요? 직접 수호 씨 형한테 나랑 잤다고, 나와 결혼하겠다고 말할 거예요?”“그건...”나는
“그러다가 변하지 않으면요? 왕정민처럼 되지 않으면요? 그때는 어떻게 할 건데요?”형수의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솔직히 내가 지금 색안경을 끼고 형을 보고 있다는 걸 나도 인정한다.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형수가 이렇게 귀띔하는 것도 내가 일시적인 쾌락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라서일 거다.나는 점점 더 망설여지고 모순되었다.형수를 내 여자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지고 있지만 우리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벽이 있으니까 너무 괴로웠다.그때 형수가 웃으며 내 볼을 꼬집었다.“수호 씨는 누구랑 만나든 다 되지만 유독 나와는 안 돼요. 내가 수호 씨 형수니까.”형수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마치 내 누나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바라봤다.하지만 형수의 이런 따스함과 부드러움이 오히려 나를 더 반하게 한다는 걸 형수는 모르는 듯하다.사실 나도 우리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이에 나는 머리를 형수의 품에 파묻고 풀이 죽어 말했다.“그럼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니까 그냥 안고 자면 안 돼요?”형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건 형수도 망설이고 있다는 뜻이기에 나는 더 이상 형수를 강요하지 않았다.만약 여전히 거절하면 앞으로 다시는 이런 요구를 제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하지만 의외로 형수는 나를 거절하지 않고 이불을 들춘 뒤 안으로 들어왔다.나는 일순 마음이 따뜻해졌다.이 순간 형수도 분명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나는 형수의 등 뒤에서 형수를 백허그 하고는 머리를 형수의 어깨에 파묻었다. 그러니 오히려 더 떨어지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인지 오늘이 지나면 나와 형수 사이에는 이런 상황조차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그날 저녁 형수의 마음도 싱숭생숭했는지 우리는 한참 동안 제 고민을 안고 잠들지 못했다....오늘 밤은 평범하지 않은 밤임이 틀림없다.한편, 애교의 집.애교와 남주는 왕정민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낚을지 궁리하고 있었다.결국 애교는 특별히 술
그때 남주가 일부러 화난 듯 말했다.“요 며칠 애교가 몸이 불편해요. 그날이라서 술 못 마신다고요. 그것도 몰랐어요? 아니면 알면서 일부러 애교 취하게 하려는 거예요?”“그게 무슨 소리예요? 내가 일부러 내 아내를 취하게 하려 하다니? 나는 그저 우리 부부가 오랫동안 술 마시면 얘기 나눈 적이 없어 함께 분위기 좀 만들려는 거지.”왕정민이 다급히 설명하자 남주는 아예 애교 앞에 놓인 술잔을 가져가 버렸다.“그래도 안 돼요. 얘기할 시간은 앞으로도 많잖아요. 이런저런 핑계로 집에 안 들어오지만 않으면. 정 술이 마시고 싶으면 내가 같이 마셔줄게요.”남주의 말에 답답해하던 왕정민은 마지막 한마디에 바로 흥분했다.남주를 취하게 하면 더 재밌을 테니까.왕정민은 남주를 처음 본 순간 섹시하고 농염한 남주에게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남주가 애교의 절친이라 그동안 남주한테 아무 짓도 하지 못했을 뿐.하지만 지금은 지위도 권력도 있으니 남주와 하룻밤 보낼 능력쯤은 얼마든 있다고 자부했다.정말 무슨 일이라도 나면 뒷수습할 능력도 있고.이에 왕정민은 헤실 웃으며 대답했다.“그래요, 남주 씨와도 안 지 몇 년이 되는데 함께 술 마시며 얘기한 적이 없네요. 오늘 제대로 마셔보자고요.”남주 곧바로 마음속으로 왕정민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이 개 같은 쓰레기 자식, 역시 꿍꿍이가 있었잖아.’왕정민의 눈에는 욕망이 가득했다. 그때 남주는 애교와 눈빛을 교환하고는 계획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남주는 그동안 정계 인사들을 만나며 주량은 많이 단련되었다.이에 곧바로 술잔을 들고 왕정민과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그 결과 남주를 거뜬히 이길 거라고 생각한 왕정민은 오히려 두 시간 뒤 완전히 고주망태가 되어버렸다.애교는 그 틈에 미리 준비해 둔 계약서를 가져와서는 작은 소리로 남주에게 말했다.“어떡해? 너무 많이 먹어서 사인도 어려울 것 같은데?”남주는 힘껏 왕정민을 밀쳐 왕정민이 아예 꼼짝도 하지 않는 걸 보고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이 개자식은 무슨 주량
왕정민은 너무 화나고 열 받았다.자기가 애교를 모해하는 건 괜찮지만 애교가 저를 모해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애교와 결혼한 7년 동안 왕정민은 비굴한 구애자에서 고고한 위치에 섰다.사실 애초에 왕정민이 애교한테 구애한 것도 애교가 예뻐 제 체면을 살려줄 거라고 생각해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애교의 가정 형편이 좋아 제 사업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왕정민은 애교를 통해 자기가 원하는 걸 얻었고,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심지어 졸업한 뒤에도 시행착오를 줄여 줄곧 성공의 길을 걸어왔기에 이미 저를 구애자가 아닌 통치자라고 생각했다.대학 때 여신도 더 이상 그의 욕망을 만족시켜 줄 수 없이 이번 이혼 계획을 세웠던 거다.그런데 그렇게 단순하고 귀엽기만 하던 아내가 자기를 상대로 계략을 꾸미다니.왕정민은 그걸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점차 애교가 밖에 내연남을 두고 있다고 확신했다.‘분명 그럴 거야. 안 그러면 이렇게 똑똑해질 리 없어. 어쩐지 이번에 털끝 하나도 대지 못 하게 하더라니.’“이 여편네가!”왕정민은 화가 나서 욕설을 퍼부었다.이윽고 뭔가 생각난 듯 동성에게 문자를 보냈다.[네 동생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우리 마누라랑 관계는 맺었대?]그 시각 동성은 혼자 집에서 야한 영화를 보며 혼자 해결하고 있었다.왠지 요즘 동성은 점점 이런 느낌에 빠져들고 있었다.분명 영화 속 여주인공이 태연보다 예쁘지도 않고 몸매도 별로지만 오히려 흥분했다.“아...”동성은 신음을 뱉으며 소파에 완전히 드러누웠다.그러다 한참 이 지난 뒤에야 핸드폰을 켜고 왕정민의 문자를 확인했다.동성은 다급히 소파에서 일어나 앉고는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내가 말하는 걸 깜빡했는데, 어제 내 동생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있어. 그 일은 좀만 뒤로 미룰 수 없을까?][미루기는 개뿔! 애교가 나를 상대로 계략을 꾸미고 있어. 시간 끌면 나한테 불리하다고. 네 동생이 안 되면 네가 직접 하던가
하지만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바로 그러겠다고 하면 왕정민이 분명 그가 애교를 오랫동안 마음에 푸고 있었다고 생각할 테니까.동성은 왕정민에게 밀당하듯 대답했다.[네가 내 마누라를 좋아하는 거면 내가 기회를 만들어줄 수는 있지만 마누라는 됐어. 내가 어떻게 감히 그래.]심지어 본인은 자세를 낮추어 왕정민을 마치 윗사람인 것처럼 떠받들었다.그러면서 제 아내를 바치면서 왕정민의 욕망을 일부러 건드렸다.동성은 왕정민이 그동안 엄청 더럽고 다양하게 놀았다는 걸 알고 있기에 자기 아내 태연처럼 얼굴 예쁘고 몸매 좋은 여자와 분명 하룻밤을 보내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다.때문에 초반에 재미 좀 보게 한다면 왕정민도 애교를 저에게 넘겨줄 거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고 여겼다.심지어 왕정민의 의심도 사지 않은 채로 말이다.아니나 다를까 왕정민은 동성의 대답을 보고 입꼬리를 비틀었다.태연은 너무 괜찮은 여자다. 게다가 몸매는 그가 지금껏 본 여자 중에서 가장 좋고.‘그런 여자와 몸을 섞는 건 어떤 기분일까?’왕정민은 당장 시도해 보고 시었다.‘진동성이 내 기분을 꽤 잘 맞춰주네. 아내를 나한테 바치겠단.’[그건 네가 원하는 거지, 네 마누라는 원해?]동성은 왕정민의 대답에서 희망을 가졌다.‘걸려들었네.’[솔직히 말하자면 나랑 태연 오랫동안 하지 못했어. 태연은 아이를 원하는데, 너도 알잖아 내가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는 거. 만약 네가 그걸 도와준다면 우리 부부도 너한테 무척 고마워할 거야.][조금 미덥지 못한데? 내 아내더러 내 아이를 갖게 하라고? 그리고 둘이 내 아이를 키워주겠다는 거야? 너는 괜찮고?]동성은 당연히 괜찮지 않아. 하지만 입 밖에 내지 않고 계속 말했다.[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네 아이면 내 아이인 거지, 그렇게 나눌 필요 뭐 있어?]왕정민은 동성의 대답을 보자 크게 웃었다.두 사람이 친구라고는 하지만 사실 왕정민은 항상 동성을 무시해 왔다.그런데 오늘 동성이 바닥에 바싹 엎드려 개처
“젠장, 개 같은 자식, 공짜로 내 마누라를 먹으려고? 맛보겠으면 미리 나한테 성의 표시라도 해야지.”동성은 화가 나서 욕설을 퍼부었다.동성이 화가 난 건 왕정민이 자기 아내와 자겠다는 게 아니라 자기 아내와 자겠다면서 애교를 저한테 주지 않는 거다.마침 혼자 집에 있는 지금, 왕정민은 애교를 꼬드겨 여기로 보낼 수 있는데 그러지 않았다.그러니 애교와 자라고 처음에 얘기했던 말이 그저 말뿐일 지 아닐지는 알 수 없었다.하지만 동성은 이 일을 진짜로 밀어붙이고 싶었다.‘태연을 잘 설득해서 왕정민한테 협조하라고 해야겠네.’다음 날.형은 아침 일찍 병원에 찾아왔다. 나는 당연히 나를 보러 왔다고 생각했는데 형수를 불러내 뭔 대화를 하는지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그걸 보니 나는 조마조마했다.그도 그럴 게, 형이 병실에 들어왔을 때 형수가 내 몸을 닦아주고 있었으니까.형이 나와 형수 사이를 의심할까 봐 두려웠다.때문에 자꾸만 목을 빼 들고 밖을 내다봤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그 시각, 동성은 태연을 아무도 없는 복도 끝으로 끌어가서는 관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계속 수호 케어하느라 그동안 고생 많았어. 오늘부터 내가 수호를 돌볼 테니 돌아가서 휴식해.”“괜찮아, 힘들지 않아. 당신은 출근해야 하잖아. 남아서 수호 씨 보살피면 일은 어떡해?”동성은 진작 계획해 둔 대로 말했다.“요즘 회사에 일이 별로 없어서 부하직원더러 하라고 하면 돼. 자기가 힘들까 봐 마음 아파서 그러지.”“수호는 내 동생인데 형수인 너더러 매일 보살피라고 하는 게 좀 아닌 것 같아서, 돌아가서 휴식해. 하루만이라도 잘 휴식하고 내일 다시 와.”태연은 떠나기 매우 아쉬웠지만 동성의 의심을 살까 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알았어. 당신 말대로 할게.”태연이 떠난 뒤, 동성은 바로 왕정민한테 문자를 보냈다.[정민아, 내가 병원에 와서 태연이랑 교대했어. 오늘부터 내일 아침까지 계속 혼자 집에 있을 테니까 기회 잘 잡아.]왕정민이
어르신은 내가 보인 자신감에 매우 만족해했다. 하지만 주의할 점을 귀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침술 하기 전에 모든 서약을 끊고 한동안 몸보신해야 해. 지금 너의 사장님 몸은 너무 나약해서 기혈이 거의 다 사라진 거나 다름없어. 이 상태로 침술 할 수 없어. 이 일은 먼저 환자 가족들과 상의하고 동의를 구한 뒤 진행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때마침 윤지은이 회진하러 와서 나는 그녀더러 사장님을 잠시 봐달라고 하고는 어르신을 모시고 밖으로 나갔다.“됐어. 데려다 줄 필요 없어. 이 부근에 마친 공원이 있으니 나도 좀 산책하다가 택시 타고 가면 돼. 네 사장님 상황은 서둘러서 가족과 상의해. 더 지체되면 천지신명이 와도 어쩔 수 없어.”어르신의 긴박한 말투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 할아버지.”나는 진심으로 어르신께 감사했다. 90세가 넘는 분이 내 전화 한 통에 아무 이유 없이 도와준 거니까.이 은혜는 꼭 마음에 새길 거다.어르신은 허허 너털웃음을 지었다.“사람을 구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이건 나를 위해 덕을 쌓는 거야. 너도 얼른 가 봐. 이 일은 지체하면 안 된다는 거 잊지 말고.”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어르신이 뒤돌아 떠난 뒤에야 나는 병실로 돌아갔다.다른 사람은 이미 떠나고 윤지은만 병실에 남아 있었다.나는 얼른 윤지은과 사장님께 방금 전 상황을 말씀드렸다.“수호 씨, 한의학 치료법으로 정말 내 병을 완화할 수 있어?”사장님은 나를 조금 믿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한번 확인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설명했다.“아까 보신 분이 우리 마을에서 엄청 유명한 명의세요. 젊을 때 저희 할아버지랑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람들 병을 치료해주셔서 엄청 유명해요. 저도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 건데 정말 방법이 있다더라고요.”“사장님이 입원한 뒤 몸 상태가 확실히 점점 나빠지셨잖아요. 이 부분은 제가 말하지 않아도 사장님도 느끼셨을 거예요. 서약은 비록 효과는 빠르지만 부작용도 커요. 사장님 몸은
“그럼 왜 진작 데려오지 않았어?”소여정은 나를 나무라는 듯 노려봤다.“저도 어제저녁에 갑자기 생각난 거예요. 외지에서 학교 다니다 보면 고향에 내려갈 일이 적잖아요.”나는 얼른 설명했다.그때 소여정이 크게 하품했다.“하, 피곤해. 난 먼저 휴식하러 테니 여기 지키고 있어.”“네, 먼저 들어가 쉬세요.”소여정은 정말 피곤했는지 얼굴에 피곤함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사실 소여정도 따지고 보면 참 좋은 사람이다. 친구 남편이 아프다고 이렇게 고생도 마다하고 밤새도록 환자 곁을 지켜줬으니 말이다. 그것도 임천호한테 그렇게나 예쁨 받는 사람이.이렇게 의리 있는 친구를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소여정이 가니 정태곤도 따라 나갔다.정태곤은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없이 수문장처럼 꿋꿋이 소여정을 지키기만 한다.다행히 요즘 두 번이나 만났는데 정태곤은 나에게 싸움을 걸어오지 않아, 나도 정태곤을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다.나는 얼른 병상 앞에 와서 진료 과정을 묵묵히 관찰했다.어르신이 진료할 때 우리 할아버지와 매우 닮았다. 모두 진지하고 엄격해 나는 감히 뭘 물어보지도, 방해하지도 못했다.나도 한의학을 전공한 사람이기에 한의사가 환자의 맥을 짚어보는 과정에 누군가 물어보면 짜증 난다는 걸 잘 안다.얼마 뒤 어르신이 맥을 짚던 손을 내리자 나는 얼른 물었다.“할아버지, 어때요?”어르신은 제 수염을 한번 쓸며 말했다.“상황이 좋지 않아. 만약 계속 서의학 방법으로 치료하면 상태가 더 나빠질 거야.”나도 사실 처음에 똑같은 의견이었다. 다만 이제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이 한 말에 얼마나 힘이 있을까? 아마 말해도 믿는 사람이 없을 거다.그런데 어르신의 말이 내 추측을 증명한 셈이다.“침술과 한약 치료를 병행하는 게 더 좋은 거죠? 그래야 근본을 다지고 원기를 북돋울 수 있어 간의 손상을 줄일 수 있는 거죠?”나는 내 견해를 말했다. 무엇보다 어르신처럼 의술이 대단한 분이 앞에 계시는데, 이 기회에 잘 배워둘 작정이었다.그때 어르
어르신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네 할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너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너도 한의학을 배울 좋을 인재라고 하면서 나더러 나중에 많이 도와주라고 한 적도 있어.][요즘 젊은 사람들은 우리 같이 이리저리 떠돌며 의학을 배운 사람을 믿지 못하잖니. 대부분 학교에서 정식적인 교육을 받아서. 하지만 나한테 있는 방법이 민간요법이고 이상한데 받아들일 수 있겠어?]“우리 사장님 병만 고칠 수 있다면...”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르신이 끼어들었다.[고칠 수는 없어. 간병은 억제할 수 있을 뿐이지 완치는 어려워.]내가 말실수했다는 걸 깨달은 나는 얼른 말을 바꾸었다.“억제해도 괜찮아요. 적어도 고통을 줄여 주시면 돼요.”[그래. 날 믿으면 됐어.]나는 순간 너무 감격스러워 다급히 말했다.“그럼 지금 어디 계세요? 제가 모시러 갈게요.”어르신은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 주소는 유미 사모님 집과 그리 멀지 않았다.나는 이 소식을 서둘러 사모님께 알리지 않았다. 어르신이 정말 사장님의 고통을 줄여줄 수 있을지 아직은 몰랐으니까.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지금 말해봤자 오히려 실망만 할 거다. 게다가 사모님께 서프라이즈도 해주고 싶었다.때문에 나는 아침을 사러 가는 척 말하고 차를 몰고 어르신을 모시러 갔다.20분 뒤, 나는 어르신을 만났다.하지만 어르신을 보는 순간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분명 90이 넘는 노인이었는데 놀랍도록 정정했다. 이러니까 이 어르신이 선단을 드셨다며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떠들어 댄 거였다.물론, 나는 사람을 장생불로 하는 선단 같은 게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어르신은 그저 보양할 줄 아는 거다. 게다가 자식들이 모두 효도하니 뭘 해도 기분이 좋을 거고, 그러니 자연스레 고민 없이 사는 거다.“봉섭 할아버지, 저 정수호예요.”나는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어르신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위라래로 살펴봤다.“네가 어릴 적에 네 할아버지가 너를 우리 집에 자주 데려왔었는데, 눈 깜짝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고용주가 까라면 까야지.”윤미화는 옷을 갈아입고 서둘러 문을 나섰다.한순간 집에는 나와 사모님 둘만 남게 되었다.나는 사모님 방 쪽을 한번 확인했다. 문이 꼭 닫혀 있는 데다 아무 인기척도 안 들리는 걸 봐서는 이미 자는 모양이었다.나는 다시 객실로 가지 않고 아예 거실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면 사모님 방에서 인기척이 들리면 바로 알 수 있으니까.소파에 누운 지 얼마되지 않아 사모님 방 쪽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얼른 사모님을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야심한 밤에 여자 방을 들락거리는 건 좀 아닌 듯했다.하지만 아무것도 못들은 척하자니 또 소리가 너무 또렷하게 들려 순간 모순이 됐다.결국 나는 결심을 내리고 노크했다.“사모님, 괜찮아요?”“괜, 괜찮아요. 상환 말고 얼른 자요.”사모님은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더 이상 울지 마요. 더 울면 몸 상해요. 그러면 사장님은 어떡해요?”내 말에 큰 힘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나는 사모님을 위로하고 싶었다.그때 안에서 ‘네’라는 나지막한 소리가 들리더니 더 이상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내 위로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때문에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다시 소파 쪽으로 돌아갔다.이 상황에서 아무리 위로해 봤자 소용이 없다.하지만 그 순간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그분은 나와 한 동네에 살았던 어르신인데, 젊을 적에 내 할아버지와 어울려 지내며 의술을 익혔다.올해로 90살쯤 됐는데 이상하게 그분은 한 번도 앓은 적이 없다. 마을 사람들 말로는 그 어르신이 스스로 몸조리해서 건강한 몸을 유지했다고 한다.그 어르신한테 사장님을 고칠 방법이 있는지는 모르나 나는 한번 시도해 보고 싶었다. 그래도 시도해 보는 게 손 놓고 있는 것보다 나을 테니까.다음 날 아침, 나는 어머니한테 전화해 사장님 상황을 대충 말씀드리고 어머니더러 그 어르신한테 슬쩍 물어보라고 부탁했다.어머니도 우리 사장님이 좋은 분이라는 걸 알았기에 아침 일찍 식사도 하지 않고 어르신
‘장난하나? 주머니에 들어간 돈을 다시 토해내라니. 절대 안 돼.’나는 돈도 없는 주머니를 무의식적으로 꽉 쥐었다.“그건 안 돼요.”“그럼 얌전히 여기 있다가 내가 없을 때 유미 대신 좀 돌봐 줘.”난 여전히 살짝 거부감이 들었다.“윤 사장님, 제가 싫은 게 아니라, 유미 사모님 평판이 나빠질 거예요.”“수호 씨가 유미를 노리지 않는 이상 평판이 나빠질 일은 없잖아. 오래전부터 유미를 노리고 있다면 말이 달라지겠지만...”나는 얼른 도리질했다.“그런 적 없어요. 전 사모님을 항상 존경해 왔어요.”“그럼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남아.”윤미화의 태도가 너무 강경한 바람에 나는 마지못해 동의했다.두 사람은 나에게 객실을 내주었다.유미 사모님의 집은 윤미화 집 못지않게 널찍하고 사치스러웠다. 방 4개에 거실 2개인 데다 인테리어가 화려했다.객실 침대에 누워 보니 평범한 침대와는 차원이 달랐다. 보아하니 가격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었다.하지만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사로잡혀 잠이 오지 않았다.천수당, 이태웅, 왕정민이 하나하나 내 뇌리를 스치다가 결국에는 동성 형까지 떠올랐다.동성 형을 떠올리니 내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용천 호텔에서 돌아온 뒤로 동성 형과는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다.형수는 동성 형이 이제는 대놓고 밖으로 나돌고 있다고 했었다.형수도 지금 여러 가지 일 때문에 머리가 복잡할 거다.나는 얼른 문자로 형수 동생은 어떻게 됐는지 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형수한테서 답장이 왔다.[아직도 싸우고 있어요. 이제는 아예 각자 변호사를 고용해서 소송을 진행 중이에요. 결과가 빨리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난 집에 돌아왔고요.][그럼 형은요? 형은 요즘도 집에 안 들어와요?][들어왔어요. 하지만 계속 각방 써요.]그 말에 나는 너무 놀라 되물었다.[왜요?][왜긴요, 요즘 일이 바쁘다면서 밤 늦게 들어오는데, 나를 방해하기 싫다면서 따로 자요.]그건 다 핑계일뿐이다. 사실 형수는 누구 보다도 그걸 잘 알고 있지만 티를 내지
“사모님, 제가 모셔다드릴게요.”사모님은 정말 초췌했다. 그렇게 밝던 얼굴에 지금은 피곤함만 묻어 있었다.우리의 고집을 꺽지 못한 사모님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조수석에 앉은 뒤 유미 사모님은 기분이 다운되는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니 너무 안타까웠다.가는 내내 사모님은 방향을 가리키는 외에 그 어떤 대화도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차 안 분위기는 매우 무거웠다.다행히 30분 뒤 목적지에 도착했다.유미 사모님이 사는 곳은 고급 주택단지였는데, 주위 시설과 환경이 매우 좋았다.사모님을 집까지 바래다주고 바로 떠나려 했지만 소파에 앉아 멍 때리는 그녀를 보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게다가 이곳은 사장님과 사모님이 깨 볶으며 지내던 집이라 모든 물건에 추억이 깃들어 있다. 그걸 보면 아마 건강하던 사장님이 더 그리워질 거다.나는 결국 다시 돌아왔다.“사모님, 그러지 마세요. 사장님 아직 살릴 방법이 있을 거예요. 사모님이 먼저 무너지면 사장님은 어떡해요?”사모님은 끝내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나도 알아요. 하지만 주체가 안 돼요.”‘하...’그 누구라도 이런 상황이 닥치면 똑같을 거다.나는 결국 사모님을 혼자 집에 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려 윤미화한테 전화했다.“윤 사장님, 혹시 유미 사모님 집에 와서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당연하지. 바로 갈게.]윤미화가 사는 곳은 이곳과 그리 멀지 않았기에 10분 내로 도착했다.“유미야. 내가 뭘 가져왔는지 봐 봐.”윤미화는 마술하는 듯 갑자기 예쁜 옷 한 벌을 꺼냈다.“그동안 남편 돌보느라 고생해서 옷 한 벌 사 봤어. 내일 병문안 갈 때 이 옷 입고 가. 그러면 네 남편도 분명 좋아할 거야. 병이 나을지도 모르지.”상대가 저를 위로한다는 걸 안 사모님은 자기의 우울한 기분 때문에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애써 미소를 짜냈다.“고마워.”“에이. 뭘 이런 걸 가지고.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에 뭘 그렇게 내외해? 요즘 남편이 곁에 있지 못할 테니 내가 자주 보러
겨우 며칠 못 본 사이에 사장님은 전보다 더 핼쑥해졌다. 그 모습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하지만 그 누구도 우울한 티를 내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환자를 격려해야 한다. 주변에서 우울함을 드러내면 환자에게 안 좋다.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꼭 나을 수 있다며 사장님을 격려했다.다행히 정 사장님도 매우 낙관적이었다.“그동안 다들 수고 많았어. 내가 다 나으면 한텍 제대로 쏠게.”다들 그날을 기대했다.사람이 많다 보니 시끄러워져 오히려 정 사장님 휴식에 방해되었다. 때문에 우리는 병실에 잠깐만 있다가 떠날 준비를 했다.유미 사모님은 직접 문 앞까지 위를 배웅했다.그때 내가 넌지시 물었다.“B시 병원 쪽에는 연락했어요? 언제 가요?”사모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아직 남은 병실이 없대요. 부모님이 직접 병원에 찾아갔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어요.”이건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사모님의 초췌한 모습에 약간 마음이 아팠다.“사모님, 오늘 저녁은 제가 지킬 테니 사모님은 돌아가서 쉬세요.”“아니에요. 가게 돌보는 것도 바쁜데 이런 것까지 부탁할 순 없어요.”“사장님은 제 능력을 알아봐 준 분이에요. 정 사장님이 아니라면 지금의 저도 없었어요. 가게가 어려우면 도와주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오히려 사모님이 매일 여기서 지키고 있느라 제대로 주무시지도 못했죠?”“소여정과 윤지은이 있어 괜찮아요.”사모님은 말하다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사장님의 병세와 그동안 있었던 일을 떠올리니 마음이 괴로운 모양이었다.이때 사장님이 쾌차해서 일어나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 사장님이 나아야 사모님도 미소를 되찾을 텐데 말이다.그때 익숙한 그림자 두 구가 가까이 다가왔다.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소여정과 윤지은이었다.윤지은은 퇴근했는지 의사 가운을 입지 않고 있었다. 다만 두 사람 역시 사모님 못지않게 초췌해 보였다.절친한 친구의 남편이 갑자기 병을 앓으니 두 사람 역시 최선을 다해 도와주었다.백연우도 가끔 병문안 하곤 하는
나한테 다른 선택지가 있기는 한 걸까?이태웅한테 1년 안에 성과를 내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성과를 이루지 못하면 애교 누나 곁을 떠나겠다고 했는데.나는 애교 누나와 헤어지는 게 너무 아쉽기도 하고 이대로 등신처럼 사는 게 싫었다.나도 자존심이 있고, 무시당하고 싶지 않다. 나도 체면 있게 살고 싶다.“당연히 하고 싶지.”나는 한참 숨을 참고 있다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그러자 민우는 이내 흥분했다.“그럼 우리도 해보자고. 하지만 내 말에 화내지 마.”“뭔데? 말해.”“나 사실 의욕만 넘쳤지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몰라.”1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피가 끓은 것처럼 호기롭게 말하는 민우의 모습에 나는 그가 이미 방법을 생각해 두고 리드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저 생각만 있을 뿐 상세한 계획이 없다니.시실 나도 혼자 일해볼 생각을 했었다. 천수당이 화인당을 모함할 때부터 그런 마음이 들었다. 다만, 내가 워낙 현실에 타협하는 성격이라 그걸 실천에 옮기지 않았을 뿐이다.그런데 민우가 이 일을 먼저 꺼내니 나는 내 생각을 말했다.“우리 천수당을 빼앗아 오자.”민우는 나에게 방법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얼른 캐물었다.“어떻게 할 생각인데?”나는 상세하게 분석했다.“천수당이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어. 장사도 항상 안 되고. 지금은 오히려 적자가 나는 상황이야. 천수당은 지리적으로도 위치가 좋은 데다 단골이 있으니 빼앗아 올 수만 있다면 수고를 덜게 될 거야.”민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계속 물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해? 천수당은 김진호랑 관련 있잖아. 김진호가 극구 반대할걸. 게다가 지금은 김진호 형과 척을 졌으니 그쪽에서 절대 천수당을 순순히 내놓지 않을 거야.”이건 확실히 문제가 된다.하지만 천수당은 장사가 안돼 적자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 언젠가는 가게를 내놓아야 할 판국이다.“우리 전 재산을 모아봤자 고작 2천만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게 문제야.”“천수당을 생각할 시간에 우선 돈부터 모으자.”민우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 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기 마련이다.누나들도 나한테 흥미를 잃을 거고 점점 잊을 거다.때문에 지금 이 상황을 즐기기만 할 수는 없다. 나는 반드시 강해져야 한다.예전에는 사실 한의관 직원으로 지내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한 달에 200 정도씩 받는 것도 꽤 만족스러웠다.하지만 일련의 일을 겪고 나니 이 상황에 만족하면 발전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물론 어떻게 강해질지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한참 뒤 민우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아까 그 사람 강북시 부시장이라던데, 네 여자 친구 아버지야?”“응.”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그러자 민우가 내 옆에 아예 자리 잡고 앉았다.“이런 장인어른이 있는 거 압력 심하지? 임설아도 가정 형편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부시장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네. 난 임설아 가족 형편도 부담되는데. 지금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 매달 그래도 만족스럽게 벌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해. 우리가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 게 부자들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수호야. 넌 혹시 스타트업 시작해 볼 생각 없어? 우리 같이 한 건 제대로 해볼래?”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민우를 바라봤다. 민우가 이토록 야심가인 줄은 생가지도 못했다.전에는 분명 화인당에서 일하게 된 것만으로도 기뻐 날뛰었는데 말이다.내가 궁금한 걸 물어보자 민우는 담배 한 대를 태우더니 웃으며 말했다.“사람은 원래 이래. 어쩔 수 없어. 일자리조차 구하지 못했을 때는 좋은 직장이 있다고 만족했는데, 이제 좋은 직장에서 일하니 남 밑에서 일하기보다 내가 사장이 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원래 좀 욕심이 많아. 그게 내 약점이기도 해. 그래서 한의원에서 오래 못 버텼잖아.”나는 민우의 말을 대충 이해했다. 그는 예전에 자기 야심을 펼치지 못한다고 아쉬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야심이 너무 커서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했었다.그러다가 화인당에서 일하기 시작해서는 직원들과 잘 지냈지만 이 정도로 욕심이 차지 않는 눈치였다.민우는 자존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