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동국은 화를 내기는커녕 웃으며 말했다.“그러니까 자네처럼 패기 넘치는 젊은 피가 한의과를 일으켜 세워야 하지 않겠나.”이 말은 내 예상을 많이 벗어났다.솔직히 생각해 봐도 내가 조금 너무한 감은 없지 않아 있었다. 그 여의사 때문에 화가 난 건데 마동국한테 풀었으니.마동국은 나를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말이다.하지만 사과하려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마 교수님, 돌아가세요. 제가 진 원장님 찾아가서 말씀드릴게요.”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태도도 누그러뜨렸다.“자네가 좋은 인재라는 거 난 알 수 있네. 솔직히 자네가 떠나기를 바라지 않아.”나는 마동국이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솔직히 감동했다.하지만 이런 감정도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마 교수님,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 더 이상 남고 싶지 않아요.”“그래, 사람마다 지향하는 바가 다르니 강요하지는 않겠네. 하지만 오늘은 이미 왔으니 오늘치 일은 하고 가게.”한참 생각한 뒤 나는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마동국과 다시 한의과에 도착했을 때 여자는 이미 떠났다.물론 내 눈앞에서 사라졌지만 내 화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나는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꺼내 윤지은이 나에게 보냈던 사진을 다시 보냈다.그리고는 이름을 윤미영에서 얼음 마녀로 바꾸었다.싸늘하고 차가운 게 꼭 냉미녀 같았으니까.그때 여자가 나에게 문자를 보내왔다.[나한테 왜 사진은 보내요?][또 보고 싶어서요. 하고 싶어요.][당나귀예요? 허구한 날 어쩜 그 생각뿐이에요?][내가 당나귀면, 그쪽은 암컷 당나귀예요. 얼른 당나귀 소리 내봐요.]나는 마음속에 화가 쌓인 터라 무례한 요구를 해댔다.[미쳤어요? 나 지금 출근 중이에요. 어떻게 소리 내라는 거예요?][그럼 출근할 때 아니면 낼 수 있다는 거예요?][내 소리 듣고 싶으면 그쪽이 먼저 소리 내던가요.]‘밝히긴.’나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아까는 도도하고 깨끗한 척 내가 쓰레기네 뭐네 욕하더니 바로 뒤돌아서 카톡으로 낯선 남자와
나는 한참 동안 생각하고 나서 조심스럽게 물었다.[왜요? 혹시 남자 친구랑 헤어졌어요?][아니요. 그 개자식은 아직도 내 앞에 나타난 적 없어요. 그래서 납득했거든요. 그 자식이 나랑 헤어지자고 해도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왜요?][그 자식을 두고 바람피우고 비위 상하게 해야 하니까요. 평생 괴롭혀 줄 거예요.]나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이 여자 너무 잔인한 거 아니야? 쓰레기 남친한테 복수하려고 자신을 희생하다니.’‘내가 현실 생활의 정수호라는 걸 알면 나한테 복수하려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거 아니야?’‘아니야, 나만 자 숨기면 절대 발견할 리 없어.’[싫어요. 지금 나더러 기생오라비 노릇 하라는 거잖아요. 난 그런 거 싫어요. 그쪽이 남자 친구와 정말 헤어지면 모를까.][싫으면 말고요. 그쪽이 싫다면 다른 사람 찾을 수 있으니까.]지은이 다른 사람을 찾는 걸 상상하니 나는 마음이 괴로웠다.그도 그럴 게, 윤지은이 내 여자라고 생각해 왔으니까. 내 여자가 다른 남자를 찾게 두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나는 순간 소유욕이 불타올랐다.[안 돼요. 허락 못해요.][그쪽이 뭔데 상관해요? 보러 오라고 했더니 그것도 못 하겠다면서 어디서 참견이에요? 꿈 깨요!]나는 지은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아무튼 안 돼요. 그쪽은 이제 나 혼자만의 사람이에요.][미친.]지은은 이 말을 보내온 뒤로 나를 무시하기 시작했다.순간 나는 너무 우울해졌다.분명 내가 상대를 희롱하고 복수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내가 괴로워지다니.나는 결국 너무 불안해 여자에게 문자 하나를 보냈다.[절대 다른 놈 찾지 마요. 알아들었어요?]지은은 결국 나에게 답장하지 않았다.그 때문에 내 마음은 더욱 조마조마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그렇게 겨우 퇴근 시간이 되었을 때 나는 곧바로 떠나지 않고 일부러 병원 대문 앞에서 기다렸다.지은이 정말 다른 남자를 찾는지 보고 싶어서.하지만 내가 한참 기다렸지만 지은의 그림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오히려 형수
“최남주가 지금 애교와 왕정민한테 패를 드러내서 왕정민이 아까 전화 왔거든요. 수호 씨더러 속도 내라고. 꼭 애교 자빠뜨려야 한다면서. 마침 남주도 애교를 자빠뜨리라고 했고 도와주겠다고 했으니 수호 씨도 쉬울 거예요.”“하지만 기억해요. 애교를 자빠뜨리는 건 괜찮지만 남주는 절대 손 대면 안 돼요.”“오늘 밤 해야 해요?”“당연히 바를수록 좋아요. 남주는 쉬운 상대가 아니에요. 왕정민이 바람피우는 걸 알고 있으니 무조건 왕정민을 처리할 방법을 생각할 거예요. 남주가 반격하면 왕정민도 기회가 없고, 우리도 시간이 없기에 서둘러야 해요.”나는 순간 바짝 긴장했다.문제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아직 어떻게 해야 좋을지 생각지도 못했는데 말이다.결국 나는 할 수 없이 대충 얼버무렸다.“네, 알았어요.”형수와 통화를 끝낸 뒤 나는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애교 누나에게 문자를 보냈다.[애교 누나, 형수가 방금 전화 와서 나더러 오늘 밤 누나를 자빠뜨리래요.]애교 누나는 곧바로 나에게 답장했다.[나도 남주가 단번에 왕정민이 바람 피운 증거를 잡을 줄은 몰랐어요. 수호 씨, 나 시간이 좀 필요한데 혹시 시간 좀 더 끌 수 없어요?]애교 누나의 답장을 보니 나는 곧바로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생각났다.내 마음은 당연히 애교 누나에게 향하기에 무조건 애교 누나를 돕고 싶다.하지만 또 형수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그때 병원 앞을 오가는 차가 눈에 들어오면서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교통사고....이애교네 집.남주는 잔뜩 분노한 듯 씩씩거렸다.“왕정민 이 개자식. 너 뭘 더 망설이는 거야? 당장 패를 까고 이혼해.”애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혼은 당연한 거지만 이렇게 쉽게 왕정민과 이혼하는 건 너무 봐주는 처사니까.하지만 남주 생각은 달랐다.남주는 절대 눈에 흙이 들어가는 걸 참지 못하고 하면 한다는 사람이기에 왕정민이 대가를 치르도록 하고 싶었다.애교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전화한 사람
“아니면 뭔데?”애교는 차갑게 웃었다.“전소혜가 나를 꼬신 거야. 당신도 알잖아. 나 요즘 사업도 잘되고 잘 나가는 거. 그러니까 나 좋아한다는 여자 널리고 널렸어. 전소혜가 자기 미모를 믿고 자꾸만 나를 꼬셨었거든, 당신 친구가 왔을 때도 가슴이 아프다면서 나더러 주물러 달라고 했어.”왕정민의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들은 남주는 왕정민의 얼굴을 찢어버리고 싶어 발을 동동 굴렀다. 그에 반해 애교는 오히려 덤덤했고 오히려 남주를 진정하라고 달래기까지 했다.그러고는 다시 핸드폰에 대고 말했다.“그래서? 주물러줬어? 왕정민, 거짓말하기 전에 생각이란 걸 좀 해. 세 살짜리 애도 아는 걸 당신이 모른다는 게 말이 돼?”“당연히 눈치챘지. 하지만 일부러 그랬어. 왜인 줄 알아?”왕정민은 정말 너무 대단하다. 이런 속임수로 위기를 헤쳐 나가려고 하다니.만약 왕정민의 음모에 대해 진작 듣지 못했다면 애교의 단순한 성격에 아마 진작 왕정민에게 속아 넘어갔을 거다.하지만 지금, 애교는 왕정민의 말을 들을수록 역겹기만 해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왜 그랬는지 말해 봐.”왕정민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했다.“전소혜 아버지 전승빈 때문에 그래. 전승빈이 부동산 회사를 하나 크게 차렸거든, 그분과 손잡으면 내 사업도 무조건 더욱 발전할 수 있어. 전소혜가 나를 좋아하고 심지어 들러붙으니 전소혜를 이용해 전승빈한테 줄을 대야 하지 않겠어?”“하지만 걱정하지 마. 난 그 여자한테 아무 감정도 없어. 당신도 사진 봤을 거 아니야. 전소혜의 얼굴과 몸매 모두 당신보다 못해.”“여보, 내 마음속엔 당신뿐이야. 내가 밖에서 무슨 짓을 하든 내가 사랑하는 건 영원히 당신 하나뿐이야.”애교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그럼 오늘 밤 집에 와, 한동안 나랑 같이 지내는 거 괜찮지?”그 말이 떨어지자 전화 건너편에서 긴 침묵이 흘렀다.이에 애교는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왜? 싫어?”왕정민은 얼른 웃으며 말했다.“싫긴, 당연히 좋지. 당신이 내 아내고
내 한쪽 다리는 약간 골절되어 깁스한 상태로 매달려 있었다.그걸 본 형수는 이내 안타까워하며 다가왔다.“수호 씨, 아파요?”“형수. 죄송해요.”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바보, 미안할 거 뭐 있어요?”“얼른 집에 돌아가 어떻게 할지 상의하려고 했는데 이런 일이...”나는 일부러 미안한 척 연기했다.그러자 형수는 나를 안타까워하며 내 손을 잡았다.“그건 급할 거 없어요. 우선 몸조리부터 해요. 다 내 잘못이에요. 그렇게 큰 부담 안겨주면 안 되는 건데. 수호 씨가 이러니까 마음이 아파요.”나는 형수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형수의 표정이 다 말해주고 있으니.그걸 인지한 순간 나는 오히려 미안해졌다.형수는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데 나는 형수를 속이기나 하고.나는 너무 찔려 형수의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수호 씨,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몸조리 잘해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의사 한 명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하지만 맨 앞에 선 여의사를 본 순간 그대로 넋이 나갔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윤지은이었으니까.“어떻게 그쪽이 여기 왔어요? 비뇨기과 닥터 아니었어요?”“그곳에 조금 타박상이 있어 검사하러 왔어요.”지은은 싸늘하게 대답했다.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오므렸다.이 여자더러 내 그곳을 검사하게 하면 나를 괴롭혀 죽일지도 모르니까.형수는 나와 여의사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수호 씨, 두 사람 알아요?”“우리 다 이 병원에서 근무하니 동료라고 할 수 있죠.”“누가 동료라는 거예요? 색마 같은 게.”지은은 귀찮다는 듯 중얼거렸다.나는 그 말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형수가 옆에 앉아 있어 억지로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삼켰다.형수도 나와 지은 사이에 모순이 있다는 걸 보아냈을 거지만 나를 위로했다.“수호 씨는 지금 환자이니 의사 말에 따르고 협조해요.”내 그곳은 정말 다쳤는지 조금만 움직여도 아팠다. 결국 나는 할 수 없이 여자에게 검
“환자분, 다리 벌리세요. 이렇게 끼면 우리가 어떻게 봐요?”지은이 일부러 높은 소리로 말했다.‘젠장, 나중에 두고 봐.’나는 속으로 욕하면서도 고분고분 다리를 열었다.그때 손 하나가 내 그곳을 잡고 이리저리 잡아당기며 단단한지 검사하는 듯했다.이런 수치심은 평생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내가 최선을 다해 참고 있을 때 지은은 한참 검사하고는 인턴들에게 말했다.“봤죠? 조금만 다쳐도 반응하는 건 별문제 없다는 거예요. 하지만 아무 반응도 없으면 큰 문제가 있다는 뜻이에요.”“아아.”인턴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지은은 말을 이었다.“다들 한 번씩 만져봐요. 겸사겸사 단단한지 검사도 해보고. 힘써야 해요. 망가질까 봐 걱정하지 말고.”나는 화내지 않으려고 계속 참고 있다가 이 말을 들은 순간 결국 터져버렸다.“지은 쌤, 이만하면 됐잖아요. 일부러 이러는 거죠?”지은은 마스크를 벗으며 나를 차갑게 쏘아보았다.“이게 뭐가 복수라는 거예요?”“복수하는 거 맞잖아요. 그곳을 마구 잡아당긴 것도 모자라 인턴들한테도 똑같이 하라고 시키기나 하고. 나를 실험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잡아당기는 건 그곳이 괜찮은지 검사하는 거예요. 인턴들한테 시키는 것도 병원 승인받았고요. 내 행동에 불만 있으면 병원에 고소해요.”“다들 멍해 있지만 말고 한번 손으로 느껴봐요.”지은은 내 기분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인턴들에게 직접 만져보라고 권유했다.그 순간 나는 당장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심지어 복수고 뭐고를 떠나 당장 이 상황부터 끝내고 싶었다.그렇게 약 반 시간 뒤, 지은은 인턴들을 데리고 떠나갔다.그러자 형수가 안쓰러워하면 내 손을 잡았다.“수호 씨, 괜찮아요?”“형수, 저 정말 죽고 싶어요.”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나올 엄두도 내지 못했다.그때 형수가 내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알아요. 다 알아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둘러싸고 구경하고 주무르고 만지는데 당연히 난감하겠죠. 하지만 입장 바꿔 생각해요. 수호 씨는 환자고 그 사람들은
내 손은 점점 더 대담해져 아예 형수의 옷 안으로 들어갔다.“수호 씨, 이러지 마요.”그때 형수가 나를 막는 바람에 나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괜찮아요, 조심하면 발각될 리 없어요.”“그래도 안 돼요. 여기 사람들 지나다니는데 발각되기라도 하면 얼마나 난감해요.”“형수는 아까 제 바지도 벗겨줬잖아요.”“그건 다르죠. 그때는 병을 보여야 해서 그런 거고, 지금은 그냥 바람피우는 거잖아요.”형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목소리를 내리깔았다.그러자 나는 얼른 형수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이래야 스릴 있잖아요. 안 그래요? 형수도 지금 원한다는 거 알아요.”형수는 나를 흘끗 째려봤다.“알면서 그래요? 일부러 나 괴로운 거 보려고 그러는 거예요?”“이따가 어두워지면 와요.”나는 형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뭐예요. 여기 병원이에요. 설마 여기서 하려는 건...”“저 아직 병원에서 해본 적 없어요. 형수도 해본 적 없죠? 해보고 싶지 않아요?”형수는 내 말에 무척 흥분하고 기대하는 눈치였다.그도 그럴 게, 너무 오랫동안 이런 짜릿함을 느껴본 적 없을 테니 솔직히 기대하고 있을 거다.하지만 형수는 끝내 거절했다.“안 돼요. 그런 생각 하지 마요.”형수는 나한테 희망을 주는 게 싫은 모양이다. 내가 희망을 품고 계속 잊지 못할까 봐.나는 순간 흥미가 사라졌다.하지만 여전히 단념하지 않고 손을 형수에게 뻗었다.형수를 건드리다 보면 참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아니나 다를까 형수는 내 꼬드김에 괴로워졌는지 투덜거렸다.“됐어요, 그만해요.”하지만 나는 형수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했다.“왜 이렇게 나빠요? 계속 이러면 나도 안 참을 거예요?”형수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노려보아도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계속 형수를 건드렸다.“어떻게 가만있지 않을 건데요? 형수, 말해 봐요. 저도 들어보게.”그 순간 내 아래가 갑자기 꽉 조여왔다.“아!”나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가 다급히 입을 막았다.그도 그럴 게 주위 사람들이 나를
“남주 누나 여기 병원이에요. 이러지 좀 말아요.”나는 다급히 바지를 꽉 잡았다. 그러지 않으면 남주 누나가 아예 나를 벗겨버릴까 봐 걱정되었으니까.“뭘 그렇게 부끄러워해? 네 거기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 절대 너 가만 안 둬.”“그렇게 심각한 거 아니에요. 그냥 찰과상일 뿐이에요.”“못 믿어. 어디 봐 봐.”내 거절에도 남주 누나는 집요하게 말했다.내가 너무 시달리고 있는 걸 본 형수가 보다 못해 나섰다.“최남주, 지금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거야?”“아, 고태연, 너도 있었어? 미안해, 마음이 급해서 못 봤어.”남주 누나는 역시나 많이 얌전해져서는 헤실거리며 형수에게 말했다.그랬더니 형수는 콧방귀를 뀌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사는 뭐래요?”애교 누나가 걱정스러운 듯 내 침대 머리맡에 앉아 물었다.애교 누나의 걱정은 남주 누나와 달랐다.애교 누나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거고, 남주 누나는 내 거기를 걱정하는 거니까.나를 이토록 관심하는 애교 누나를 보니 나는 무척 기뻤다.“괜찮아요. 살짝 골절된 것뿐이라 며칠만 휴식하면 괜찮아요.”애교 누나는 뭔가 더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형수와 남주 누나 때문에 입밖에 내지 않았다.하지만 나는 대충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사고가 일부러 낸 것인지 묻고 싶었을 거다.나는 몰래 애교 누나의 손을 잡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그랬더니 애교 누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요, 나 때문에.”“그러지 마요. 제가 원해서 한 일이에요. 누나랑 아무 상관도 없어요.”나는 입만 벙긋거리며 내 뜻을 전했다.“두 사람 무슨 얘기해?”그때 남주 누나가 갑자기 우리 쪽을 바라보자 애교 누나는 다급히 내 손을 놓았다.“아무것도 아니야. 수호 씨 관심 좀 했어.”애교 누나는 덤덤하게 말했다.“괜찮을 거야. 찰흙으로 빚은 것도 아니고 그렇게 쉽게 망가지면 안 되지.”나는 그 말에 순간 화가 치밀었다.“남주 누나, 그 말은 너무 한 거 아니에요? 찰흙으로 빚은 게 아
민우는 우리 셋 중에서 인내심이 가장 부족했다. 그도 그럴 게, 민우는 가장 돈에 쪼들렸기에 가게가 망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들어가.”나는 민우를 강제로 밀며 약재 정리를 시켰다.건너편 약방은 여전히 가격 전쟁을 하고 있었으며 고객 유입도 점점 많아졌다.나도 정 사장님처럼 여유로운 자세를 유지하고 싶었지만, 사실 나도 더 이상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서윤기는 나를 괴롭히는 게 목적일 테니, 이렇게 쉽게 맞은편 가게의 가격 전쟁을 끝내지 않을 거다.만약 이대로 간다면 우리 가게는 버티지 못한다.때문에 무조건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가게로 돌아온 나는 현성을 내 사무실로 끌어들였다.“잠깐 와 봐. 너랑 할 얘기 있어.”“뭔데 이렇게 비밀스럽게 얘기해? 민우는 왜 안 부르고?”“민우는 성격이 불같아서 말하면 못 참을 것 같아. 그리고 이 일이 조금 위험한 거라 우리 셋이 한꺼번에 무슨 일을 당하면 안 돼. 한 명은 가게에 남아야지.”현성은 내가 큰일을 벌일 거라는 걸 눈치채고 곧장 물었다.“무슨 계획 있어?”“맞은편 가게 뒤에 누군가가 있어. 우리 가게를 일부러 우리를 겨냥하는 거야. 우리도 이대로 있을 수 없어.”“혹시 상대가 가짜 약 쓴다는 거 까발리려고?”현성이 잔뜩 흥분해서 물었다.이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그건 너무 번거로워. 나는 간단하지만 거친 방법을 사용할 생각이야.”현성은 더 흥분했다.“무슨 방법인데? 얼른 말해 봐.”나는 현성의 귓가에 대고 내 계획을 말했다. 그러자 현성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정말 이렇게 일 크게 벌이려고?”“일 크게 벌이지 않고 그 사람들 어떻게 혼내?”사람이 독하지 않으면 제대로 설 수 없다.이 바닥에서 지내려면 그만큼 수단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현성은 조금 걱정하는 듯 말했다.“그러다가 잡히면 형벌 받아.”“무서워?”나는 현성을 보며 물었다.현성은 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현성은 조금 무
고수연이 나간 뒤 나는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려고 했다.그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리더니 서윤기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나는 전화를 받지 않고 그대로 꺼버렸다. 하지만 서윤기는 끈질기게 전화를 걸었다.결국 참다못한 나는 서윤기의 연락처를 차단했다.그러자 서윤기는 이번에 내 카톡으로 문자를 보냈다.[정수호, 아주 대단하던데. 언제 또 필사본을 만들었더라. 내 손에 있는 책은 필요 없어 보이니 망가뜨릴게.]그 아래에 영상 하나도 도착했다.서윤기는 할아버지가 나에게 남겨준 의서를 화로에 넣었고, 불길은 순식간에 의서를 집어삼키며 활활 타올랐다.비록 내 손에 필사본이 있다지만 할아버지의 심혈이 이대로 망가지니 마음이 안 좋았다.나는 그 아래에 바로 답장했다.[그런다고 당신한테 뭐가 도움이 돼?]서윤기의 답장이 곧바로 도착했다.[아무 도움도 안 돼. 하지만 네 기분 불쾌하게 만들 수 있잖아.]‘진짜 미친놈이네.’나는 결국 서윤기의 카톡까지 지워버렸다.그날 오후, 나는 화인당에 들러 정 사장님한테 서윤기와 있었던 일을 말했다.정 사장님도 내 말을 듣더니 미간을 찌푸렸다.“서윤기가 지금 이규진과 전광진과 손을 잡고 가짜 약재를 강북 시장에 유통하고 있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약방에 가짜 약재가 흘러들었는지 몰라.”“경찰에 신고하면 되지 않아요?”이게 바로 내가 떠올린 생각이었다.하지만 정 사장님은 고개를 저었다.“서윤기의 구매 루트가 기밀이라 증거가 없거든. 경찰들도 사건 접수 안 해줄 거야.”“그럼 어떡해요? 그냥 이렇게 내버려둬요? 아니면 가짜 약재를 얻어다가 검사 맡겨 볼까요?”나는 다시 건의했다.그러자 정 사장님이 고개를 저었다.“그 약재들이 진짜 가짜 약재인 건 아니야. 그저 날짜가 지난 약재를 특수처리하거나 약효가 그리 뛰어나지 않는 약재들이야.”“아무리 특수 기관에 의뢰해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거야. 그래서 가짜 약재를 만드는 사람들이 교활하다고 하는 거고.”나는 순간 무기력해졌다. 분명 상대가 가짜 약을 만
나는 내 대답에 매우 흡족했다. 두 사람의 장점과 특징을 각자 잘 얘기했다고 생각했으니까.하지만 이태웅과 윤해철은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수호 군, 한 명을 선택하라고 했지, 다항선택을 하라고 한 건 아닌데.”이태웅도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한 명을 선택하라고 하면 한 명을 선택해야지.”“선택을 왜 해요? 전 안 해요. 두 사람 모두 좋아요.”‘성인이면 왜 선택을 하지? 둘 다 좋은데, 난 다 갖고 싶어.’물론 이 말까지 내뱉을 순 없었기에 나는 속으로 삼켰다.말을 마친 나는 곧바로 도망쳤다. 이런 위험한 곳에 나는 1초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다는 두 사람이 또 나를 부를까 봐 단숨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윤지은의 부모님도 왔으니 내가 계속 이곳에 남아 있을 필요는 없었기에 그대로 병원을 떠났다.그 길로 나는 천수당으로 향했다.민우는 나를 보자 아침에 왜 안 왔냐며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봤다. 하지만 두 사람을 걱정하게 하기 싫어 나는 경찰서에 잡혔던 일은 함구했다.이제 막 물 한 모금 마셨을 때 고수연이 찾아왔다.“사장님, 연재혁 변호사님 말로는 모레가 재판일이래요. 그런데 너무 걱정되는데 어떡하죠?”“마음 편하게 먹어요. 연재혁 변호사님 대단한 분이에요. 그분을 믿어야 해요.”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겨우 위로밖에 없었다.그때 고수연이 갑자기 내 옆에 털썩 앉았다.“만약 재판에서 지면 어떡하죠? 다른 건 다 빼앗겨도 상관없는데, 아이들은 절대 안 돼요. 아이들은 내 정신적 지주예요.”“지금 일자리도 있잖아요. 법원에서 아이를 그놈한테 두 아이를 주지 않을 거예요.”“그런데 난 한 명도 주고 싶지 않아요. 진용진은 책임감 없는 쓰레기예요. 아이들이 그런 인간을 따라가면 인생 망쳐요.”사실 나는 고수연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혼자 지내는 것도 여유롭지 못한데, 아이들의 양육권을 모두 자기가 가져오겠다고 하다니. 굳이 그렇게 자신을 혹사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예전에 우리 마을에 있던 한 여자가
이건 꼭 무슨 성공한 여자의 발언 같았다.애교 누나는 항상 연약하고 다정한 이웃집 누나 같은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바뀌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나는 누나의 이런 변화에 매우 기뻤다.“누나 주변에 빛이 한 층 생긴 것 같아요. 더 멋있고 매력 있어졌어요.”나는 애교 누나의 또 하나의 빛나는 점을 발견했다.누나는 내 말이 재밌었는지 피식 웃었다.“말은 참 잘한다니까요. 또 나 기쁘라고 하는 말이죠?”“아니요. 진심이에요.”나는 복도 쪽을 흘겨봤다. 그곳에서 이태웅은 아직도 윤해철과 말다툼하고 있었다.그 모습에 나는 의아해서 물었다.“그런데 아버님은 어떻게 된 거예요? 그동안 저 마음에 안 들어 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윤 회장님한테 와서 저를 빼앗아요?”“그게 어디 수호 씨를 빼앗는 거예요? 우리 아빠 원래 아저씨랑 말싸움하는 거 좋아해요.”‘어쩐지.’난 또 애교 누나뿐만 아니라 이태웅도 변한 줄 알았는데, 그건 너무 기상천외한 생각이었다.하지만 성공한 두 어르신이 말다툼하는 걸 보는 게 꽤 재밌었다.욕설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데, 상대를 할 말 없게 만들고 있었으니까.역시 배운 사람들은 말다툼에도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다.“애교 누나, 누나는 언제 집에 돌아가요?”두 사람이 언제까지 싸울지 몰라 나는 조심히 애교 누나 손을 잡았다.그러자 애교 누나는 얼굴을 붉히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내가 요즘 부모님 설득 중이라 아마 얼마 안 걸릴 거예요. 왜 내가 집에 빨리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무슨 나쁜 짓을 하려고?”나는 애교 누나의 다른 손을 꼭 잡았다.“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누나가 보고 싶고 안고 싶어서 그래요.”“그럼 지금 안아요. 안 갈게요.”“정말요? 그럼 진짜 안아요?”나는 정말 단지 누나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그때 나에게 장난치려던 애교 누나는 내가 정말 저를 안으려 하자 깜짝 놀라며 뒤로 피했다.“안 돼요. 아빠한테 들키면 끝장나요.”“누나가 지금 안아도 된다고 했잖아요.”“장난친 건데 수호 씨 진짜 대담하
“지은이가 그동안 나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 나도 도움이 돼야지. 지은이한테 돈은 부족하지 않은 거 알아. 수호 씨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이건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거야.”하정현은 요즘 막 취직하여 이곳에 남아 윤지은을 돌봐 줄 수 없기에, 미력하나마 자기 최선을 다할 생각인 듯했다.나도 더 이상 하정현과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결국 카드를 받았다. 나중에 그걸 쓸지 말지는 나중에 결정할 일이다.“지은이한테 절대 말하지 마.”하정현은 또다시 당부했다. 그러다 내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안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그로부터 얼마 뒤, 윤해철과 하정현도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은 이미 사람으로 가득 찼다. 내가 병실에서 나온 건 정확한 결정이었다.하지만 사람들은 한 명도 남지 않고 결국 하나둘씩 떠나갔다.윤해철도 나에게 당부했다.“수호 군. 수호 군이 그래도 우리 지은이 마음 쓰는 게 보여. 이번 기회에 서로 좀 잘해 봐. 난 두 사람 응원해.”이영미도 따라서 맞장구쳤다.“나도 두 사람 응원해. 내가 볼 때 두 사람 아주 천생연분이야.”“두 사람이 천생연분이면, 내 딸은 뭐지?”이게 무슨 상황인지, 애교 누나가 아버지인 이태웅과 함께 나타났다.순식간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윤해철은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자네 딸과 수호 군의 결혼 반대한 거 아니었어? 자네는 수호 군을 싫어하겠지만, 난 좋아해.”이태웅은 냉담한 얼굴로 걸어왔다. 그 강력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나는 순식간에 찬 숨을 들이켰다.하지만 이건 가장 무서운 게 아니었다. 이보다 더 무서운 건, 내가 애교 누나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였다.나는 내가 윤지은한테 마음이 흔들린 게 애교 누나한테 미안했다.그때 애교 누나가 나에게 먼저 다가왔다.“수호 씨, 우리 저쪽에서 얘기 좀 할래요?”나와 애교 누나는 사람이 없는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애교 누나, 제 말 좀 들어봐요...”나는 애교 누나에게 설명하고 싶었다.하지만 애교 누나는 웃으
나는 머리를 문질렀다.“백 쌤, 너무 세게 때렸잖아요. 머리통 날아갈 뻔했어요.”“흥. 그러게 누가 지은이 노리래? 감히 지은이까지 넘봐?”젠장.좋은 분위기가 그대로 망해버렸다. 만약 다음번에 또 물어보려면 이런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윤지은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웃는 얼굴로 백연우와 임유미를 바라봤다.“연우야, 유미야, 왔어?”유미 사모님은 창가에 앉아 다정하게 윤지은의 손을 잡았다.“어쩌다 이렇게 됐어?”“실수로 데였는데 큰 문제 없어.”“내가 들은 건 아예 달랐는데? 네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다던데.”백연우는 히죽거리며 물었다.그 말에 윤지은은 마음이 찔려 시선을 피했다.“누구한테서 들었는데?”“강한나지. 네 그 교통경찰 하는 친구. 오는 길에 마침 만났는데 말해주더라고.”“걔가 헛소리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윤지은이 해명했다.하지만 백연우는 마치 신대륙을 만난 사람처럼 신기해했다.“오호라. 이거 봐. 네 말투가 이미 너를 배신했어.”화들짝 놀라는 백연우의 모습에 윤지은이 오히려 멍한 얼굴을 했다.“내 말투가 어때서?”백연우는 마치 윤미화에게 빙의 된 것처럼 탐정놀이를 시작했다.“너 평소 얼음장처럼 싸늘하고 남이 말하면 몇 배 욕해주잖아. 그런데 네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내가 놀려댔는데 나를 욕하지도 않았잖아. 이거 이상해.”‘헐.’백연우의 관찰력은 확실히 대단했다.사실 방금 윤지은이 말할 때 나도 그 점을 눈치채 백연우와 유미 사모님한테 들킬까 봐 걱정했다.그런데 정말 이런 식으로 들킬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무엇보다 백연우는 사실 나와 윤지은의 사이를 진작 알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모른 척하고 있다는 거다.아마 연기했으면 오스카상 감이다.나는 더 이상 이곳에 있었다가 나한테까지 불똥이 튈까 봐 슬금슬금 도망칠 각을 쟀다.물론 서둘러 떠나지는 않았다.백연우와 유미 사모님은 윤지은의 병문안을 온 거라 이따가 떠날 텐데, 침대도 내리지 못하는 윤지은을 돌봐 줄 사람은 필요하다.윤
윤지은은 부족함 없지 자랐다. 부잣집 외동딸인 데다, 아버지는 강북에서 유명한 대기업 회장이라 주변에 구애자가 끊이지 않았다. 그중에는 부잣집 도련님도 있고, 실력 좋은 보디가드들도 있었다.그렇게 우수한 남자들을 많이 봐왔기에 윤지은은 나한테 이성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게 맞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나한테만은 자꾸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윤지은은 마음이 복잡해 갑자기 짜증이 솟구쳤다.“정수호, 내려줘.”얌전히 안겨 있던 윤지은이 갑자기 또 이러자 나는 순간 어리둥절했다.“왜요? 아프게 했어요?”“그런 거 아니야!”윤지은은 또 쌀쌀맞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더니 차갑게 쏘아붙였다.“네 돌봄 따위 필요 없어. 나가.”“왜요?”“이유 없어. 그냥 나가.”“요즘 지은 씨 무척 이상한 거 알아요?”나는 해답을 찾으려고 일부러 떠나지 않았다.하지만 윤지은은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이에 나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윤지은이 그동안 보인 이상 행동을 열거했다.“갑자기 연락처를 삭제했다가, 아예 차단해 버리고. 이제는 또 뜬금없이 쫓아내기까지. 설마 나 좋아해요?”나는 이 기회에 윤미화의 말이 진짜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말을 내뱉은 순간 내 마음도 무척 두근거렸다.이런 일은 진지한 태도로 얘기할 수 없기에 나는 결국 농담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리고 마침 분위기가 무르익어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그 말을 들은 순간 윤지은은 심장이 벌렁거려 극구 부인했다.“무슨 헛소리야? 내가 왜 너를 좋아하겠어?”“그럼 왜 뜬금없이 나한테만 화내요? 합당한 설명을 해줘요.”나는 포기하지 않고 캐물었다.결국 윤지은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렸다.“내가 왜 설명해야 하는데? 네가 뭔데?”“전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지은 씨가 자기 목숨도 돌보지 않고 나를 몇 번이나 구해줬잖아요.”“저한테 아무 마음도 없으면 계속 도와줄 리 없잖아요. 본인이 다친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와주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고요. 나를 좋아한다고
얼마 뒤 윤미화도 떠나는 바람에 병실에는 나와 윤지은 둘뿐이었다.윤지은은 눈을 감고 있었는데 자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그런 윤지은의 마음을 읽을 수도 꿰뚫어 볼 수도 없어, 나는 결국 사과를 깎아 건넸다.“사과 좀 먹어요.”“안 먹어.”“그럼 귤은요?”“안 먹어.”“포도는요?”“좀 조용히 할 수 없어?”나는 윤지은이 말하는 틈에 포도 한 알을 그녀의 입에 넣고는 씩 웃으며 말했다.“아플 때 많이 먹어야 빨리 나아요.”“미친놈.”윤지은은 나를 욕하면서도 순순히 포도를 씹어 먹었다.심지어 하나를 다 먹고 난 뒤 또 하나를 요구했고. 그걸 먹고 나니 또 요구했다.윤지은은 늘 이렇듯 말은 누구보다 날카롭게 하면서 마음은 항상 여리다.이번에 윤지은의 도움이 컸기에 나는 윤지은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곁에서 세심하게 돌봐 주었다.사람을 돌보는 건 나한테 어려울 게 없었다. 딱 한 가지만 빼면 말이다. 그건 바로 화장실 문제였다.윤지은도 부끄러워 화장실을 가고 싶으면서 계속 참았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니 한계에 다다랐다.“나, 나 좀 화장실로 부축해 줘.”윤지은은 끝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하지만 방광이 터질 것 같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나는 서둘러 윤지은을 부축한 채 화장실로 향했다.윤지은이 입원한 병실은 1인실이었기에 안에 화장실도 딸려 있었다.화장실 문 앞까지 부축한 나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자 윤지은은 벽을 짚으며 조심스럽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한 발에만 힘을 줘야 했기에 변기에 앉는 것도 어려웠다. 어렵사리 변기에 앉으니 또 바지를 벗는 게 문제였다.나도 윤지은이 불편할 걸 알았기에 밖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도움 필요해요?”“필요 없어. 훔쳐보지 마.”‘그럴 필요 있나? 우리 사이에 안 본 곳이 어디 있다고.’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밖에서 기다렸다. 그때 갑자기 안에서 ‘아’하는 비명이 나더니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보아하니 윤지은이 넘어진 모양이었
나는 윤지은이 그동안 나를 미워하고 싫어한다고만 생각했다. 가끔 외로울 때 나를 찾아 외로움을 달래는 것 외에는 아무 감정이 없다고 여겼다.때문에 윤지은이 나를 좋아하고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그래서인지 이 순간 나는 모든 게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현실적인 느낌과 비현실적인 느낌이 한데 섞여 나는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그때 윤미화가 팔꿈치로 나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거 봐. 내 말 맞지? 지은 씨가 수호 씨를 좋아한다니까.”“윤 사장님도, 지은 씨가 저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나는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아 되물었다.그러자 윤미화는 화가 난 듯 나를 째려봤다.“더 사람이 하는 대화 못 들었어? 또 어떻게 해야 믿을 건데?”“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믿기지 않아서요. 제가 전에 지은 씨한테 고백했는데 아주 대차게 차였거든요.”“우리 평소에 만나면 항상 다투기만 해요. 누구도 서로 양보하지 않아요. 게다가 연인끼리 하는 달콤한 말은 한 번도 한 적 없고, 서로 좋아한다는 고백을 한 적도 없어요.”“너무 사랑하면 미워지고 너무 미워하면 사랑한다는 거 몰라?”윤미화는 아주 철학적인 말을 했다.나는 그 말을 한참 곱씹었다.“확실히 일리가 있네요.”만약 정말 그렇다면 나는 너무 기쁘다. 그러면 윤지은의 마음속에 내가 있다는 뜻이니까.하지만 한편으로 골치 아팠다. 나한테 이미 애교 누나가 있기에 나는 윤지은을 책임질 수 없고 사랑을 받아줄 수도 없다.윤미화는 마치 내 뱃속에 들어왔다 나온 것처럼 농담조로 말했다.“평생 결혼하지 마. 그러면 부담 없잖아.”“어떻게 그래요?”“안 될 거 뭐 있어? 결혼은 종잇장으로 한 약속에 불과해. 누구한테 잘해주고 싶으면 그런 게 없이도 잘해줄 수 있잖아. 요즘 연애만 하고 결혼하지 않는 사람 많아. 난 그것도 괜찮다고 봐.”‘대체 뭐라는 거지?’나는 그 정도로 개방적이진 않다.나는 우선 마음을 가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