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동안 술을 마시다 모니 목구멍으로 쑥쑥 잘도 넘어갔다. 심지어 나는 여자보다 더 많이 마셔 흐릿한 정신으로 물었다.“대체 이름이 뭐예요?”“말했잖아요, 유미영이라고.”“거짓말하지 마요. 분명 다른 분이 윤 쌤이라고 부르는 거 들었어요. 유 씨가 아니잖아요.”“아, 유 씨가 아니라... 윤 씨였지... 윤지은이에요. 어때요? 이름 이쁘죠?”“예뻐요. 듣기 좋아요. 윤지은. 부모님이 많이 배우신 분인가 봐요. 이름 너무 잘 지으셨다.”지은은 술에 취해 양 볼이 사과처럼 발그레해져서는 눈을 부릅뜨고 나를 바라봤다.“그러는 그쪽은 이름이 뭐예요? 안철수 아니죠?”“네, 정수호예요.”나도 술에 취한 지라 무방비한 상태로 내 이름을 솔직하게 말해버렸다.“뭐, 흔한 이름이에요. 우리 부모님은 지은 씨 부모님처럼 배우신 분들이 아니라 그냥 흔한 이름 지었어요.”지은은 나와 잔을 기울이며 몸을 흔들거리며 말했다.“그래도 부모님이 엄청 사랑하고 아껴줄 것 같은데.”“그럼요. 우리 부모님은 이 세상에서 나를 제일 사랑하는 분들이에요.”나는 말을 마치고 난 뒤 흐리멍덩한 눈으로 지은을 바라봤다.“지은 씨 부모님은 그쪽 안 사랑해요? 아닐 것 같은데. 지은 씨는 딱 봐도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티가 나는데, 그러면 부모님이 아껴주지 않을 리가 없는데.”내 말에 지은은 갑자기 불만조로 말했다.“우리 부모님 얘기하지 마요. 난 부모임이 없으니까. 난 세상에서 제일 외로운 여자예요.”지은은 말하면서 갑자기 내 목에 팔을 둘렀다.“오늘 하고 싶어서 나 부른 거죠? 우리 해요. 하지만 요구가 하나 있어요. 우리가 하는 과정 영상으로 찍고 싶어요, 괜찮겠어요?”나는 많이 취하긴 했지만 이런 판단도 못 할 만큼 취하지는 않았기에 다급히 말했다.“당연히 안 되죠. 우리가 한 영상으로 남자 친구 열받게 하려고 그러죠? 난 지은 씨 남자 친구와 원한 관계가 아니에요. 그런데 이 일로 나중에 나한테 보복이라도 하면 어떡해요?”지은은 순간 내 다리를 꽉 꼬집었다
지은은 말하다가 결국 목청껏 울기 시작했다.그 울음소리를 들으니 나조차 마음 한구석이 괴로워 결국 참지 못하고 지은을 꼭 안았다.“그냥 쓰레기잖아요. 그런 놈 때문에 슬퍼할 가치가 없어요.”“이 세상에 좋은 남자는 많아요. 지은 씨만 괜찮다면 내가 남자 친구 해줄게요. 신변도 보호해 주고.”지은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안고 말했다.“정말 내 남자 친구가 되어줄래요? 그럼 나랑 영상 찍어요.”“왜 또 그 화제예요?”“수호 씨가 매번 그렇게 꽁꽁 싸매고 얼굴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처럼 구는 바람에 난 아직도 수호 씨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영상으로 찍으면 다르잖아요.”지은은 말하면서 아기 고양이처럼 내 품에 파고들더니 일부러 몸을 배배 꼬았다.“네? 그렇게 해도 되죠?”지은의 동작 때문에 내 아래는 또 서버렸다.게다가 술 때문에 어지러워 자제력도 많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심지어 마음속에서 자꾸만 ‘동의해, 동의해’ 하는 속삭임이 나를 유혹했다.내가 한참 동안 머뭇거리고 있을 때 지은은 갑자기 내 목을 끌어안고 내게 입 맞추었다.지은의 말캉하고 뜨거운 입술에 나는 끝내 자제력을 잃었다.그때 지은이 웃으며 나를 밀어내더니 비틀거리며 캐비닛 앞에 가 핸드폰을 켜고는 침대 쪽으로 카메라 렌즈를 돌렸다.“오빠, 딱 기다려요...”...다음 날 아침 9시에 깨어났을 때 내 머리는 여전히 무거웠다.게다가 어제 일이 별로 기억도 나지 않았다.하지만 지은이 우리의 동영상을 찍었던 기억이 흐릿하게 났다.‘동영상!’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벌떡 일어났다.지은은 이미 떠나 방에는 나 혼자뿐이었다.심지어 한 순간 내가 혼자 술을 마셨나? 아니면 그 여자와 함께 술을 마셨나 의심됐다.그러다 나는 곧바로 답을 얻었다. 그도 그럴 게, 바닥에 찢긴 여자의 스타킹이 보였다.‘내가 어젯밤 정말 그 여자와 같이 있었던 거였어.’‘그렇다는 건 동영상을 찍은 것도 사실이라는 거잖아.’게다가 어젯밤 끝까지 마신 터라 완전히 취해 모자도 마
“수호 씨,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아침에 전화를 5통도 넘게 했는데, 왜 계속 안 받았어요?”그 말에 나는 가슴이 콕콕 찔려 말했다.“형수, 저 어제 늦게 자서 아침에 벨 소리를 못 들었어요. 무슨 일로 찾았어요? 형 일로 도와드릴 거 있나요?”“아니요. 그냥 애교한테 들었는데 어제 집에서 자지 않고 호텔에 갔다면서요? 왜 호텔에 갔어요?”그 말을 들으니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아, 그 일이라면 애교 누나한테 물어봐요.”“애교가 말해준다면 내가 수호 씨한테 물어볼 필요 없었죠. 혹시 남주가 수호 씨 어떻게 했어요?”“그런 건 아니고, 어제 남주 누나가 자꾸 저를 희롱하는 게 불편해서 애교 누나 집에서 지내는 게 싫었어요.”“역시, 남주 그 계집애가 수호 씨한테 집적거린 거였네. 잘했어요, 남주는 수호 씨가 감당할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남주 남편이 점잖은 사람이지만 권력 있는 사람이라 수호 씨가 자기 아내랑 잔 걸 알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나도 솔직히 남주 누나와 한번 자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어제의 일이 있고 나니 그런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다.남주 누나는 예쁘고 섹시하지만 사람이 너무 짓궂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다.그러니 차라리 멀리하는 수밖에.“참, 어제 출근한 소감은 어때요?”형수의 말에 나는 그제야 출근해야 한다는 게 떠올랐다. 분명 9시에 출근해야 하는데 벌써 9시가 넘었다.출근 이튿날부터 지각한다는 건 너무 말도 안 되는 거였기에 나는 다급히 바지를 올리며 말했다.“형수, 저 급해서 그러는데 나중에 얘기해요.”전화를 끊은 뒤, 나는 얼른 정리를 마치고 아침도 거른 채 병원으로 향했다.아무리 급하게 서둘러봐도, 지각하는 건 막지 못했지만.내가 도착했을 때, 시간은 벌써 오전 10시였다.늘 그렇듯 핸드폰을 보고 있는 마동국 앞에 도착한 나는 숨을 헐떡이며 사과했다.“마 교수님, 죄송합니다. 오늘 늦잠 잤습니다.”마동국은 온 정신이 핸드폰에 팔려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늦은 시간에 겨우 잠이 들어 오늘 아침 지각까지 했어요.]그 말에 애교 누나한테서 바로 답장이 도착했다.[혹시 나 원망해요?][제가 왜 애교 누나를 원망하겠어요?][내가 수호 씨를 붙잡지 않았잖아요.][그건 누나 집인데, 남으라고 할지, 나가라고 할지는 누나 마음이죠.]애교 누나는 나한테 입술 이모티콘을 보내왔다.[애교 누나, 혹시 누나 친구 중에 포스터 디자인할 줄 아는 사람 있어요?][내가 알아요.][정말요? 그럼 잘됐네요. 혹시 한의원 홍보 책자 디자인해 줄 수 있어요? 여기 참고 자료가 있으니 바로 사진으로 보내줄게요.]나는 얼른 남아 있는 홍보 책자를 사진 찍어 애교 누나한테 보냈다.그걸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애교 누나한테서 답장이 돌아왔다.[너무 어려운 거 아니네요. 바로 끝낼 수 있어요. 그런데 이거 딱 봐도 아마추어가 한 것 같은데, 내가 더 다듬어줄까요?][그래주면 고맙죠. 그럼 부탁할게요.][나한테 내외할 거 뭐 있어요?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뿐이지, 마음속에 수호 씨가 없는 건 아닌데.]애원하는 듯한 애교 누나의 말투를 보니 나는 왠지 마음이 따뜻해졌다.이로써 애교 누나가 나를 아직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게 증명됐으니까.[그럼 누나 사진 찍어줘요.][어, 어디를 보고 싶은데요?]나는 애교 누나의 문자에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누나가 검은색 슬립 원피스를 입은 모습을 보고 싶어요. 속옷 안 입으면 더 좋고.][기다려요.]애교 누나가 나한테 사진을 보내주려 하자 내 마음은 순간 먹구름 걷힌 듯 밝아졌다.나는 의자에 기대앉아 애교 누나가 사진을 보내오기를 기다렸다.잠시 후, 알람음이 들리자마자 나는 다급히 핸드폰을 확인했다.애교 누나가 보내준 사진은 감탄을 자아낼 만큼 아름다웠다.누나가 직접 찍은 셀카였는데, 검은색 레이스 슬립 원피스를 입고 안에 속옷을 입지 않아 흰 가슴이 보일 듯 말 듯했고.등 뒤에서 흘러든 한줄기 햇빛은 사진의 분위기를 단숨에 끌어올렸다.그 순간 내 눈에
[그래요. 영화야 언제든지 볼 수 있죠. 하지만 낯부끄러운 짓은 절대 하면 안 돼요.]‘19금 영화를 보면서 누나가 참을 수 있는지 보자고요.’나는 속으로 자신만만하게 생각했다. 게다가 내가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면 끝까지는 하지 못해도 분명 재미 볼 수는 있을 거다.애교 누나와 그런 영화를 볼 생각을 하니 나는 벌써부터 기대됐다.그도 그럴 게, 애교 누나는 그런 영화를 보며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했으니까.아마 부끄러워 당장 영화를 끄라고 할지도 모른다.하지만 나는 끝까지 끄지 않고 같이 보자고 애교 누나를 유혹하는 장면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흥분됐다.나는 애교 누나와 한참 동안 더 얘기하다가 홍보 책자를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대화를 종료했다.잡담만 하다가 일에 영향 줄 수는 없었으니까.할 일도 없는지라 나는 물을 몇 번 마시고 화장실로 향했다.그리고 마침 민규와 마주쳤다.민규는 나를 보자마자 잔뜩 흥분하며 내 앞길을 막았다.“가긴 어딜 가? 내 핸드폰이나 물어내.”“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물어내라고? 그래요, 그럼 증거를 내놔요. 없으면 당장 비키고.”나의 싸늘한 말에 민규는 나를 삿대질하며 윽박질렀다.“정수호, 너무한다는 생각 안 들어? 나 건드리면 어제 네가 했던 짓 다 폭로할 거야.”“해 봐요. 남이 믿어줄지는 모르겠지만.”말을 마친 나는 민규를 지나 화장실에서 나왔다.하지만 민규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나를 끈질기게 따라왔다.“가지 마, 거기 서!”나는 걸음을 멈추고 정수호를 가리켰다.“경고하는데 그만 따라와요. 안 그러면 나도 참지 않을 거니까.”민규는 다른 과 주임 교수의 소개로 들어왔지만, 나는 부원장의 소개로 들어왔으니, 신분으로 따져도 내가 한 수 위였다.때문에 민규는 아무리 억울하고 달갑지 않아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정수호, 나중에 나를 탓하지 마!”민규는 화가 난 듯 퉁명스럽게 말하고 떠나갔다.화장실에서 돌아오기 바쁘게 애교 누나는 본인이 디자인한 파일을 나한테
나는 영상을 보내기 바쁘게 핸드폰을 꺼버렸다.그도 그럴 게, 애교 누나가 그 영상을 보면 반드시 나를 원망할 걸 알고 있었으니까.그 시각, 애교의 집.애교는 수호가 보낸 영상을 유심히 들여다봤다.젊은 남녀가 기차역에서 뜨겁게 포옹하는 지극히 평범한 초반 화면에 애교는 수호가 저를 보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며 영상을 클릭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분위기가 바로 바뀌며 후반 부분이 재생되더니 야릇한 소리와 함께 남녀가 뒤엉킨 화면이 나타나자 애교는 순간 넋이 나갔다.“애교야, 너 지금 뭐 해?”더 무서운 건, 남주가 그걸 들어버렸다는 거다.애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난감한 듯 대답했다.“아, 아니야.”“거짓말! 네 얼굴과 표정이 이미 너를 배신했거든. 게다가 내가 야동을 얼마나 많이 봤는데, 소리만 들어도 네가 무슨 영상을 보고 있는지 다 알 수 있어.”그 순간 애교는 얼굴과 목, 심지어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지금껏 보수적으로 지내왔고 이런 영상은 한 번도 본 적 없었는데, 지금 그걸 본 것도 모자라 친구한테 들켜 버렸으니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었다.결국 애교는 뻔뻔하게 말했다.“정말 아니야. 네가 잘못 들었어.”“흥. 못 믿겠는데? 아니면 핸드폰 내놔 봐.”애교는 당연히 핸드폰을 내놓을 수 없었다.방금 너무 당황한 나머지 바로 핸드폰을 꺼버렸는데, 다시 켜면 보던 화면이 그대로 재생될 게 뻔했으니까.이에 애교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나 갑자기 배가 아파서 화장실 좀 다녀올게.”“그래, 그 전에 핸드폰 두고 가. 내가 검사해 볼 거야.”“너무한 거 아니야? 지금 내 말 못 믿어?”“얼씨구? 네가 그런 영상 본다고 해도 문제 될 거 없어. 남자한테 치료받기 싫다면 혼자서라도 치료해야 할 거 아니야. 그런데 재미있고 주인공들 마스크가 받쳐주는 영상을 보는 걸 추천해. 그래야 기분이 좋아지거든. 내가 괜찮은 거 많이 아는데, 추천해 줄까?”그 말에 애교의 얼굴은 아예 홍당무가 되어 버렸다.“난 그렇게 심신 건강에 해로운
“나 안 볼래, 화장실 다녀올게.”애교는 더 이상 볼 엄두가 안 났다. 남주가 보여준 단톡방 안에는 모두 19금 동영상이었다.그걸 보다 보니 애교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개졌다.그 사이, 남주는 애교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았다.“남주, 안돼...”“아아아!”남주가 핸드폰을 켜기 바쁘게 애교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하하하, 아니긴. 딱 걸렸네?”애교는 너무 부끄러워 당장이라도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심지어 고개를 푹 숙인 채 남주의 앞에서 도망치려 했다.하지만 남주는 애교의 팔을 잡아끌었다.“엥, 가지 마. 감상 좀 말해 봐.”“최남주, 너 진짜!”애교는 부끄럽고 화가 나서 울컥했다.그때 남주가 헤실 웃으며 말했다.“나 원래 이래. 네가 고쳐줄래?”“됐어, 너랑 얘기 안 할래. 나 정말 화장실 가고 싶어.”애교는 당장이라도 도망치려 했지만 남주는 애교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화장실 가고 싶어? 그럼 우선 감상부터 말해. 보면서 너도 하고 싶었지?”남주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그 순간 애교는 몸이 찌릿찌릿하며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아니야. 실수로 클릭한 거라 제대로 보지 않았어.”“정말? 그럼 아래 만져봐도 돼?”“남주, 그만해.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애교가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울먹이자 남주는 얼른 애교를 끌어안았다.“울지 마. 네가 이러면 내가 미안하잖아. 그래서 대체 어떤 느낌이었는데?”애교는 하마터면 뒷목을 잡고 쓰러질 뻔했다.그와 동시에 어제 수호가 얼마나 억울했을지 직접 경험했다.“남주야, 제발. 나 정말 화장실 가고 싶어. 우선 화장실 좀 다녀올게.”애교는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그제야 남주는 핸드폰을 애교에게 돌려주었다.“그래, 이번에는 한 번 봐준다. 가 봐.”그 말을 듣는 순간 애교는 도망치듯 화장실로 달려갔다.그리고 애교가 떠난 뒤, 남주는 핸드폰을 꺼내 수호에게 문자를 보냈다.[수호, 대단한데? 이런 방법으로 애교를 농락하다니.]그 시각,
얼마 지나지 않아 내 핸드폰은 다시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이번에 나에게 문자를 준 연락처는 애교 누나의 것이었다.애교 누나가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아니기에, 이런 문자를 보낸 사람은 무조건 남주 누나가 틀림없다.내가 아무리 남주 누나를 마음대로 삭제할 수 있다고는 해도, 애교 누나의 연락처만은 지울 수 없었다.게다가 이건 그저 남주 누나의 수단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내가 애교 누나의 연락처를 삭제한다고 해도 남주 누나는 아마 다른 방법으로 나를 상대할 거다.결국 나는 마지못해 한발 물러났다.[남주 누나, 그만 보내요. 저 일해야 해요.][네가 보내지 말라면 내가 들어야 해? 감히 내 연락처를 지워? 아주 죽을 때까지 괴롭혀 줄게.][저만 탓하면 안 되죠. 계속 문자 보내면 제가 어떻게 일해요?][지금 날 탓하는 거야. 계속 보낼 거야. 계속 괴롭힐 거라고.]남주 누나는 곧바로 이모티콘 테러를 해댔다.결국 나는 패배를 인정하고 답장을 보냈다.[누나, 죄송해요. 연락처 다시 추가할게요.][네가 추가한다면 내가 받아줘야 해? 네가 뭔데? 내 연락처가 그렇게 쉽게 추가할 수 있는 건 줄 알아?][그럼 대체 뭘 원하는데요?][헤헤, 애교가 방금 너한테 셀카 요구했잖아. 다시 보내, 난 얼굴 사진 싫어, 네 아래를 찍어.][미쳤어요? 이건 애교 누나 핸드폰이에요.][나도 알아, 애교한테 보여주려고 보내라는 거니까.][애교 누나가 알면 화낼 거예요.]나는 이제 나 자신이 점점 존경스러워질 지경이다. 거짓말하면서 얼굴도 붉히지 않게 되다니.예전에 처음 도시에 왔을 때는 낯선 여자를 보기만 해도 얼굴을 붉혔었는데, 이제는 마녀 같은 남주 누나도 이렇게 여유롭게 상대하다니.확실히 실천이 최고의 선생님이란 말이 맞나 보다.남주 누나는 나와 애교 누나의 사이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전 누나 못 믿어요. 어제 그렇게 놀려댔으면서.][믿어야 할 거야. 너한테 선택지는 없어. 얼른 사진 찍어 보내, 애교한테 장난칠 거니
나는 겨우 걱정을 덜어내고 윤미화에게 전환해 모든 것을 자백했다.내 말을 들은 윤미화는 고막이 터질 정도로 나에게 욕설을 퍼부었다.“정수호, 미쳤어? 전승빈이 어떤 사람이고 왕정민은 또 어떤 사람인데? 감히 두 사람을 이용하려고 들어?”윤미화는 내가 왕정민이 전승빈 조사를 의뢰했다는 걸 누설했다고 탓하는 게 아니라 내 안위를 걱정했다.그 때문에 나는 윤미화에게 더 미안했다.“윤 사장님, 일은 이미 벌어져서 돌이킬 수 없어요. 제가 전화드린 건 장비 좀 빌려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예요. 오늘 저녁 제가 왕정민 약점을 잡을 거거든요.”“빌리긴 뭘 빌려? 내 직원한테 일이 생겼다는데 내가 설마 모른 척하겠어?”윤미화의 말에 나는 너무 감동하였다.“윤 사장님, 정말 너무 좋은 분이셨군요.”윤미화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알면 됐어. 앞으로 한 번만 더 속였다간 봐. 수호 씨는 내가 스카우트한 사람이니까 난 수호 씨 안전을 책임질 의무가 있어.”“왕정민한테 미움 살까 봐 두렵지 않아요?”“두렵지. 그걸 말이라고. 하지만 내가 탐정 사무소를 차린 건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야. 내 소원은 이미 이뤘으니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내가 돈 벌 방법이 이것뿐인 것도 아니고.”그 말에 나는 더욱 감동했다.“사장님, 저 울고 싶어요.”윤미화는 그런 내가 쪽팔리다니는 듯 말했다.“남자가 울긴 뭘 울어? 난 그런 남자 제일 싫어.”윤미화는 오늘 밤 직접 오겠다면서 주소를 보내라고 했다.내 계획은 왕정민을 아무도 없는 골목으로 끌고 가는 거다. 그렇게 하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으니까.물론 왕정민이 무조건 나타나게 하기 위해 도관에서 나오기 전 나는 일부러 그에게 전화해 자극했다.“왕정민, 네가 뭘 모르는 게 하나 있는데. 나 지금껏 애교 누나네 집 열쇠를 가지고 있었어.”[개자식이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데?]왕정민은 분노에 차 버럭 욕설을 퍼부었다.예상했던 반응에 나는 피식 웃었다.“별 건 아니고. 그냥 네가 예전에 샀던 그 집은 지금 내가 살
변석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버렸다.한참 뒤 윤지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도 내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저 자식 얼마나 연습했어?”“아가씨, 벌써 3시간째 저러고 있어요.”“죽으려고 작정했나? 어제도 밤을 새웠으면서 오늘 이렇게 무리하면 어쩌자는 건지.”윤지은은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걸어왔다.“정수호, 지금 당장 휴식해.”나는 윤지은을 흘긋거리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연습했다.윤지은은 내 행동에 화가 났는지 내 뺨을 후려갈겼다.“네가 이런다고 누가 감동할 것 같아? 넌 지금 스스로 감동에 취해 있는 거야. 전에는 연습을 게을리하고 이제 와서 발등에 불이 떨어졌나 봐? 네가 뭐 소설 주인공인 줄 알아? 지금 당장 휴식해!”나는 화끈거리는 얼굴도 신경 쓸 새 없이 심호흡하며 말했다.“누구 감동하라고 이러는 거 아니에요. 이런 식으로 화를 풀려는 것도 아니고요. 그냥 짬 내서 연습해서 하루빨리 실력을 끌어올리려는 거예요.”변석훈은 나에게 고작 한 달이라는 시간밖에 주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서두르지 않으면 그 시간 안에 다 배우지 못할 거다.윤지은은 씩씩거리며 말했다.“벽석훈이 너 안 가르친다면 내가 양동준더러 너 가르치라고 하면 될 거 아니야. 뭐 그리 큰일이라고 이렇게 네 몸을 가혹하게 대해?”나는 너무 놀라 윤지은을 바라봤다.“뭐라고요? 동준 형님이 저 가르치는 거 동의하는 거예요?”“네가 내 말 잘 들으면.”윤지은의 요구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지금 당장 휴식할게요.”나는 말을 마치자마자 두말없이 뒤돌아섰다.윤지은은 내가 이렇게 고분고분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예전에는 항상 개와 고양이처럼 만나면 싸워댔는데 내가 갑자기 고분고분해지니 윤지은은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윤지은은 이내 나에게 걸어와 나를 꿰뚫어 볼 것처럼 훑어봤다.“정수호. 너 아무 일 없는 거 맞지?”나는 물을 마시며 땀을 닦았다.“저한테 뭔 일 있겠어요? 보다시피 저 멀쩡해요.”“그렇다면 다행이고. 난
진소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만 봐도 흔들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고작 몇 마디 사탕 발린 말에 흔들린다니, 이 여자가 참 한심했다. ‘머리가 비었나? 하긴, 그러니까 진동성한테 제대로 속았겠지.’하지만 예전의 나도 진소민과 다를 게 없었다.태어날 때부터 계략에 능하고 총명하며 위선과 악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나는 진소민을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쌍했다. 진동성의 눈빛만 보면 그가 진소민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그저 이 바보 같은 여자를 농락하고 있는 거였다.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내가 짐작이 맞았다.진동성이 진소민을 떠나지 못하게 한 건 그가 진소민한테서 만족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진소민은 워낙 민감한 몸이라 진동성의 사이즈가 아무리 작아도 쉽게 절정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런 느낌은 그동안 아내인 고태연한테서 느껴보지 못했다. 때문에 진소민을 만난 뒤에 그는 진정 자기가 남자가 된 것 같았다.진동성은 아직 사업에서도 큰 성공을 이룩하지 못하고 결혼도 실패했는데, 유독 진소민 앞에서만은 성취감을 얻을 수 있고 빈자리가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되든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진동성의 목적은 이 바보 같은 여자를 붙잡는 거였다.나는 더 이상 끼어들지 않았다. 진소민이 떠나든 말든 관심 없었다. 난 오직 이런 방법으로 기름을 부어 진동성이 하루빨리 나를 처리하라고 왕정민을 꼬드기게 하고 싶었다.나는 진동성을 보며 냉소했다.“이 여자는 속이기 쉬워 참 좋겠어. 어디 평생 속여 봐. 하지만 네놈이 한 짓을 부모님이 알면 어떨지 궁금하네.”말을 마친 나는 일부러 깔깔거리며 떠나갔다.이 순간 진동성이 뒤에서 이를 갈며 나를 죽일 듯 노려볼 거라는 걸 알고 있다.이건 바로 내가 원하는 효과였다.진동성은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어 직접 움직일 수 없으니 분명 왕정민한테 연락할 거다.왕정민이 나에게 손을 쓴 순간 내 계획은 성공한 셈이다.나는 아무도 없는 구석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될 때 나는 부모님께 그 의서가 어디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부터 의서를 찾지 못했다.아마 그전에 진동성이 이미 몰래 훔쳐 갔을 거다.‘진동성 이 개 같은 자식. 진짜 뼛속까지 악질이네.'우리 가족은 너무 착해서 그놈의 가면에 깜빡 속아 넘어갔다.여진수가 형수의 상태를 확인한 뒤 나는 곧장 외과 병동으로 향했다.진소민이 와서 진동성을 간호하고 있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진동성의 손은 진동성의 치마 속에 있었다.형수는 아직도 의식불명의 상태인데 이 개자식은 병원에서까지 여자와 꽁냥거리고 있다니. 이런 놈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라 하는 게 맞다.진동성은 나를 보자마자 비아냥거렸다.“넌 또 왜 왔어? 내 마누라 돌보지 않고 내가 다른 여자랑 즐기는 거 구경 왔어?”나는 피식 웃었다.그러자 진동성의 미간이 푹 파였다.“뭘 웃어?”나는 의자 하나를 끌어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사실 나는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고 있었다.난 형수가 갑자기 교통사고가 난 게 분명 단순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이 함께 교통사고가 났는데 형수는 크게 다쳐 의식불명이 되고 진동성은 고작 피부가 까진 전도로 끝났다는 게 너무 이상하다.게다가 이 자식은 형수가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진소민과 어울리고 있다니. 이걸 찍어두면 분명 형수에게 유리한 증거가 될 거다.“네 놈 목숨이 참 질겨서 웃는다. 형수는 저렇게 됐는데 넌 고작 찰과상이라니. 어떻게 했어?”진동성은 이미 대답을 준비한 것처럼 빈틈없이 대답했다.“그걸 나한테 물으면 난 누구한테 물어봐? 교통사고가 갑자기 나서 나도 미처 반응하지 못했어. 내가 깨어났을 땐 이미 병원에 있었고. 그런데 나한테 어떻게 했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당연히 모른다지.”진동성이 이렇게 대답할 거라는 걸 난 진작 예상했다.때문에 나는 방법을 바꾸어 진소민을 바라봤다.“그럼 당신한테 묻지. 그쪽은 대체 무슨 신분으로 그 남자를 돌보는 거야?”진소민은 워낙 말주변이
“왕정민이 요즘 사람을 찾아 저를 죽이려 하고 있어요. 저랑 함께 연기해서 왕정민을 낚죠.”역시나 늙은 너구리가 아니랄까 봐 전승빈은 단번에 내 의도를 파악했다.“지금 나더러 왕정민 주변에 사람 심고 함정을 만들어 걸려들게 하자는 건가?”“네.”전승빈은 의자에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지금 자네가 스스로 미끼가 되어 함정을 파겠다는 건가? 왕정민이 자네를 정말 죽일까 봐 두렵지도 않나?”나는 분노에 이를 갈며 말했다.“이렇게 하지 않으면 왕정민이 함정에 어떻게 빠져요? 제가 물론 왕정민을 죽일 순 없지만 회장님은 왕정민에게 평생 족쇄를 채울 수 있어요. 그러면 저한테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에요.”전승빈은 내 말에 직접적인 답변을 주지 않고 뭔가를 고민했다. 그한테 거절당할까 봐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무척 긴장했다.그때 고민을 마친 전승빈이 겨우 입을 열었다.“좋네. 자네와 손을 잡지.”그 말을 들으니 그동안의 긴장감이 겨우 풀렸다. 그때 전승빈이 이내 말을 이었다.“하지만 이번 협력 나한테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닌가? 자네가 미끼로 나서지 않아도 난 내가 알고 싶은 거 충분히 조사할 수 있어. 그런데 자네는 내 도움 없이 왕정민을 잡을 수 없지. 다시 말해서 내가 자네를 도와주는 거지 협력이 아니야. 그러니 자네가 나한테 빚지는 거나 마찬가지지.”나는 전승빈이 이런 말을 하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내 목적은 왕정민을 잡는 것이기에 다른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네. 그럼 제가 회장님께 빚지는 셈 치죠. 준비 다 되면 연락 주세요. 제가 왕정민을 끌어들이죠.”나는 내 연락처가 적힌 쪽지를 전승빈 앞에 건네고 뒤돌아 사무실을 떠났다.내가 물론 진동성과 왕정민을 한꺼번에 해결하지는 못해도 한 명씩 무너뜨릴 수는 있다.왕정민의 뒷배는 전승빈이고 진동성의 뒷배는 왕정민이다. 그러니 왕정민이 없으면 진동성을 상대하기는 매우 쉬워진다.전승빈의 회사를 나와 나는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애교 누나. 아침 사 왔어요.”“수호 씨.
시종일관 담담했던 전승빈의 얼굴에 노기가 드리웠다.“지금 나를 협박하는 건가?”“협박이 아니라 귀띔입니다. 회장님이 손에 왕정민이 바람피운 증거를 갖고 있는데도 왕정민은 쓰게 보지 않고 계속 밖에서 몸을 함부로 굴리고 다닙니다. 이 상황이 계속 유지된다면 따님분이 아는 건 시간문제 아닐까요?”전승빈은 화가 난 듯 테이블을 탕, 내리쳤다.“왕정민, 그 개 같은 자식. 그놈은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 놓아야 말을 들을 모양이군.”“전 회장님, 왕정민은 회장님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있습니다. 회장님이 왕정민 다리 몽둥이를 분지른다면 당분간은 겁을 먹겠지만 나중에는요? 만약 나중에도 개 버릇 남 주지 못하고 회장님께 살의라도 품는다면 어떡하실 생각이죠? 그러면 따님은 또 어떡하고요?”“왕정민을 죽이는 건 회장님께 식은 죽 먹기라는 거 압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따님은 어떡하고 따님 뱃속의 아기는 또 어떡하나요?”전승빈은 어두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놨다.“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가?”나는 전승빈에게 다가가 한 글자 한 글자 침착하게 말했다.“왕정민 같은 부류를 상대하려면 계속 강하게 밀어붙이기만 하면 안 됩니다. 요구를 들어주는 척 구슬리기도 해야 합니다. 회장님이 왕정민을 찍어 누르려 할수록 왕정민은 불만을 품고 회장님께 반기를 들 겁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우선 마비시키고 천천히 공제하는 겁니다.”전승빈은 피도 안 마른 어린놈이 이런 말을 하는 게 믿기지 않았는지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그건 너무 번거로워. 차라리 이 세상에서 치워버리면 그만이지.”“물론 회장님 능력이라면 한 사람을 소리 소문 없이 처리하는 건 쉬운 일이겠죠. 하지만 이런 일을 평생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만약 따님분이 남편 어디 갔냐고 하면 어떻게 대답하실 건데요? 손자가 아빠 어디 갔냐고 물으면 그때는 또 어떻게 대답하실 거고요?”“백번 양보해서 따님분이 만약 회장님이 자기 남편을 죽였다는 걸 알면 고마워할까요? 미워할까요?”전승빈은
“안녕하세요. 저는 타노스 탐정 사무소 정수호라고 합니다. 한번 만나 뵀으면 해서요.”[나를 말인가? 나는 왜 보려는 거지? 일 얘기라면 자네 사장더러 찾아오라고 하게.]전승빈은 말을 마치자마자 전화를 끊으려 했다.“잠깐만요. 전 회장님 사위 왕정민에 관한 일인데 정말 듣고 싶지 않나요?”[난 시간 없네.]전승빈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왕정민의 일이라고 했는데도 전승빈이 이런 태도를 보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하지만 괜찮았다. 이왕 이렇게 처리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끝까지 밀어붙일 생각이었으니까.나는 아예 운전을 해서 전승빈의 회사로 찾아갔다.전에 윤미화가 전승빈을 조사하라는 의뢰를 나한테 맡긴 터라 나도 전승빈에 관한 일을 많이 알아냈다. 그걸 마침 이렇게 써먹게 되었다.나는 전승빈의 회사 앞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그때 BMW 한 대가 눈에 띄었다. 나는 그 차가 바로 전승빈의 차라고 확신했다.회사 앞에서 한참 동안 진을 치고 기다렸는데 비싼 외제차는 처음 봤으니까.나는 다급히 그 뒤를 따라갔다.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전승빈이 차에서 내렸다.전에 전승빈의 실물을 본 적은 없지만 그의 사진을 본 적은 있다.나는 전승빈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다급히 붙잡았다.“전 회장님. 10분만 시간 내 주실 수 있나요?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전승빈의 기사는 거칠게 나를 밀어냈다.“저리 비켜요!”“왕정민이 탐정 사무소에 전 회장님을 조사해달라고 의뢰했습니다. 제가 현재 어떤 증거를 확보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나는 전승빈이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아 결국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아니나 다를까 전승빈은 내 말에 걸음을 우뚝 멈췄다.“따라오게.”나는 전승빈을 따라 회장 사무실로 향했다.나는 사무실이 큰지 작은지 전승빈의 기세가 강한지 약한지 관찰할 겨를도 없이 온통 전승빈과 손잡을 생각뿐이었다.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제가 왕정민과 개인적인 원한이 좀 있어 전 회장님과 손을 잡고 싶습니다.”전승빈은
나는 우연히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분노가 활활 타올랐다.진동성이 형수에게 미약을 써서 형수를 왕정민에게 데려가려 했다니.문제는 이게 처음이 아니라 두 번째라는 거다.나는 급발진하지 않고 계속해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으며 동시에 핸드폰 녹화 기능을 켰다.나는 이 둘의 파렴치한 짓을 똑똑히 찍을 생각이었다.왕정민은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언짢은 듯 말했다.“이제 사람이 저 지경이 됐으니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야? 젠장. 내가 저 고태연을 보며 입맛 다신 게 몇 년인데. 하필 이 지경이 될 건 뭐야?”진동성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동영상 많이 보내줬잖아. 그 영상으로 먼저 해결해. 나중에 고태연 상태가 좀 괜찮아졌다 싶으면 다시 너한테 데려갈게. 어쨌든 내 마누라잖아. 내가 보살피는 건 당연해. 그때가 되면 네 마음대로 놀아도 돼. 고태연은 어차피 식물인간이라 움직이지 못해서 반항도 못하잖아.”왕정민은 키득키득 웃으며 좋아했다.“네가 나보다 저 변태였네. 식물인간도 안 놔준다니.”진동성은 담배 연기를 동그랗게 말아 뱉어내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나한테는 고작 도구일 뿐이야. 가치가 있으면 쓰고 가치가 없으면 버리는 거지. 고태연도 그걸 영광으로 여겨야 해.”영상을 모두 녹화한 뒤 나는 침착한 얼굴로 나갔다.“맞아. 참 영광이지. 네 놈이 식물인간이 되면 나도 너를 그렇게 대해도 돼?”나는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도 침착했다. 마음이 너무 평온하다 못해 나조차 무섭게 느껴질 정도였다.이런 상황에 당연히 화를 내야 하는 게 맞는데 나는 왠지 화가 나지 않았다.화가 극에 달해 오히려 차분해진 것일 수도 있고, 진동성 같은 인간 때문에 화낼 가치가 없다고 여겨서일 수도 있다.어쨌든 나는 이 순간 무서우리만치 냉정했다.진동성과 왕정민은 나를 본 순간 흠칫 놀라더니 이내 비릿한 미솔르 지었다.특히 진동성은 눈에 즐거움이 가득했다.“네가 사실을 알면 어쩔 건데? 고태연은 아직도 내 와이프야. 앞으로도
나는 이 모든 게 위로의 말이라는 걸 알지만 누나들한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다.나는 머릿속으로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만약 형수가 평생 깨어나지 못한다면 나는 평상 형수를 돌봐줄 거다.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나는 절대 형수를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다.나는 온 신경이 형수한테 쏠려 다른 사람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그날 저녁 남주 누나의 전남편 고정훈도 병원에 왔다.남주 누나는 놀란 듯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야?”중산이 말했다.“자기 친구한테 일이 생겼다는 소식에 와 봤어.”“우리 이미 이혼했어...”“자기도 알잖아. 난 처음부터 이혼은 원하지 않았어. 자기는 내 마음속에 영원한 아내야.”고정훈은 그윽한 눈빛으로 남주 누나를 바라봤다.하지만 남주 누나는 마음이 불편해 얼른 고개를 돌렸다.“이러지 마. 그럴수록 난 죄책감만 커져 가.”“그래. 아무 말 하지 않을게. 난 자기 협박하려는 거 아니야. 외압을 강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앞으로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든 전화해. 난 언제든 나타날 거야.”남주 누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남주 누나가 이혼을 한 이유는 여한 없이 자기 삶을 살면서 고정훈에게 미안한 짓을 하지 않기 위해서다. 하지만 고정훈이 너무 잘해주는 바람에 자꾸만 스스로 쓰레기 같아 보이곤 한다.결국 남주 누나는 마음이 편해지려고 그 생각을 떨쳐내려고 애를 썼다.그날 저녁 나는 여전히 형수 옆을 지켰고 애교 누나는 나와 함께 병원에 남아 주었다.고수연은 아이들을 돌봐야 하기에 집으로 돌아갔고 고아연도 바쁜 일이 있는지 어느새 사라졌다.남주 누나도 결국에는 고정훈과 함께 떠났다.애교 누나는 먹을 걸 사 와서 내 앞에 내밀었다.“수호 씨, 뭐 좀 먹어요.”나는 아무 말도 없이 음식을 받아 깨끗이 먹었다.아무리 슬프더라도 절대 내 몸으로 장난쳐서는 안 된다. 나는 왠지 폭풍우가 아주 무서운 방식으로 닥치고 있다는 게 은연중에 느껴졌다. 나는 나 자신과 내 주변 사람들을 지키고 싶다. 그러려면 강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