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시간에 겨우 잠이 들어 오늘 아침 지각까지 했어요.]그 말에 애교 누나한테서 바로 답장이 도착했다.[혹시 나 원망해요?][제가 왜 애교 누나를 원망하겠어요?][내가 수호 씨를 붙잡지 않았잖아요.][그건 누나 집인데, 남으라고 할지, 나가라고 할지는 누나 마음이죠.]애교 누나는 나한테 입술 이모티콘을 보내왔다.[애교 누나, 혹시 누나 친구 중에 포스터 디자인할 줄 아는 사람 있어요?][내가 알아요.][정말요? 그럼 잘됐네요. 혹시 한의원 홍보 책자 디자인해 줄 수 있어요? 여기 참고 자료가 있으니 바로 사진으로 보내줄게요.]나는 얼른 남아 있는 홍보 책자를 사진 찍어 애교 누나한테 보냈다.그걸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애교 누나한테서 답장이 돌아왔다.[너무 어려운 거 아니네요. 바로 끝낼 수 있어요. 그런데 이거 딱 봐도 아마추어가 한 것 같은데, 내가 더 다듬어줄까요?][그래주면 고맙죠. 그럼 부탁할게요.][나한테 내외할 거 뭐 있어요?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뿐이지, 마음속에 수호 씨가 없는 건 아닌데.]애원하는 듯한 애교 누나의 말투를 보니 나는 왠지 마음이 따뜻해졌다.이로써 애교 누나가 나를 아직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게 증명됐으니까.[그럼 누나 사진 찍어줘요.][어, 어디를 보고 싶은데요?]나는 애교 누나의 문자에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누나가 검은색 슬립 원피스를 입은 모습을 보고 싶어요. 속옷 안 입으면 더 좋고.][기다려요.]애교 누나가 나한테 사진을 보내주려 하자 내 마음은 순간 먹구름 걷힌 듯 밝아졌다.나는 의자에 기대앉아 애교 누나가 사진을 보내오기를 기다렸다.잠시 후, 알람음이 들리자마자 나는 다급히 핸드폰을 확인했다.애교 누나가 보내준 사진은 감탄을 자아낼 만큼 아름다웠다.누나가 직접 찍은 셀카였는데, 검은색 레이스 슬립 원피스를 입고 안에 속옷을 입지 않아 흰 가슴이 보일 듯 말 듯했고.등 뒤에서 흘러든 한줄기 햇빛은 사진의 분위기를 단숨에 끌어올렸다.그 순간 내 눈에
[그래요. 영화야 언제든지 볼 수 있죠. 하지만 낯부끄러운 짓은 절대 하면 안 돼요.]‘19금 영화를 보면서 누나가 참을 수 있는지 보자고요.’나는 속으로 자신만만하게 생각했다. 게다가 내가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면 끝까지는 하지 못해도 분명 재미 볼 수는 있을 거다.애교 누나와 그런 영화를 볼 생각을 하니 나는 벌써부터 기대됐다.그도 그럴 게, 애교 누나는 그런 영화를 보며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했으니까.아마 부끄러워 당장 영화를 끄라고 할지도 모른다.하지만 나는 끝까지 끄지 않고 같이 보자고 애교 누나를 유혹하는 장면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흥분됐다.나는 애교 누나와 한참 동안 더 얘기하다가 홍보 책자를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대화를 종료했다.잡담만 하다가 일에 영향 줄 수는 없었으니까.할 일도 없는지라 나는 물을 몇 번 마시고 화장실로 향했다.그리고 마침 민규와 마주쳤다.민규는 나를 보자마자 잔뜩 흥분하며 내 앞길을 막았다.“가긴 어딜 가? 내 핸드폰이나 물어내.”“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물어내라고? 그래요, 그럼 증거를 내놔요. 없으면 당장 비키고.”나의 싸늘한 말에 민규는 나를 삿대질하며 윽박질렀다.“정수호, 너무한다는 생각 안 들어? 나 건드리면 어제 네가 했던 짓 다 폭로할 거야.”“해 봐요. 남이 믿어줄지는 모르겠지만.”말을 마친 나는 민규를 지나 화장실에서 나왔다.하지만 민규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나를 끈질기게 따라왔다.“가지 마, 거기 서!”나는 걸음을 멈추고 정수호를 가리켰다.“경고하는데 그만 따라와요. 안 그러면 나도 참지 않을 거니까.”민규는 다른 과 주임 교수의 소개로 들어왔지만, 나는 부원장의 소개로 들어왔으니, 신분으로 따져도 내가 한 수 위였다.때문에 민규는 아무리 억울하고 달갑지 않아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정수호, 나중에 나를 탓하지 마!”민규는 화가 난 듯 퉁명스럽게 말하고 떠나갔다.화장실에서 돌아오기 바쁘게 애교 누나는 본인이 디자인한 파일을 나한테
나는 영상을 보내기 바쁘게 핸드폰을 꺼버렸다.그도 그럴 게, 애교 누나가 그 영상을 보면 반드시 나를 원망할 걸 알고 있었으니까.그 시각, 애교의 집.애교는 수호가 보낸 영상을 유심히 들여다봤다.젊은 남녀가 기차역에서 뜨겁게 포옹하는 지극히 평범한 초반 화면에 애교는 수호가 저를 보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며 영상을 클릭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분위기가 바로 바뀌며 후반 부분이 재생되더니 야릇한 소리와 함께 남녀가 뒤엉킨 화면이 나타나자 애교는 순간 넋이 나갔다.“애교야, 너 지금 뭐 해?”더 무서운 건, 남주가 그걸 들어버렸다는 거다.애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난감한 듯 대답했다.“아, 아니야.”“거짓말! 네 얼굴과 표정이 이미 너를 배신했거든. 게다가 내가 야동을 얼마나 많이 봤는데, 소리만 들어도 네가 무슨 영상을 보고 있는지 다 알 수 있어.”그 순간 애교는 얼굴과 목, 심지어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지금껏 보수적으로 지내왔고 이런 영상은 한 번도 본 적 없었는데, 지금 그걸 본 것도 모자라 친구한테 들켜 버렸으니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었다.결국 애교는 뻔뻔하게 말했다.“정말 아니야. 네가 잘못 들었어.”“흥. 못 믿겠는데? 아니면 핸드폰 내놔 봐.”애교는 당연히 핸드폰을 내놓을 수 없었다.방금 너무 당황한 나머지 바로 핸드폰을 꺼버렸는데, 다시 켜면 보던 화면이 그대로 재생될 게 뻔했으니까.이에 애교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나 갑자기 배가 아파서 화장실 좀 다녀올게.”“그래, 그 전에 핸드폰 두고 가. 내가 검사해 볼 거야.”“너무한 거 아니야? 지금 내 말 못 믿어?”“얼씨구? 네가 그런 영상 본다고 해도 문제 될 거 없어. 남자한테 치료받기 싫다면 혼자서라도 치료해야 할 거 아니야. 그런데 재미있고 주인공들 마스크가 받쳐주는 영상을 보는 걸 추천해. 그래야 기분이 좋아지거든. 내가 괜찮은 거 많이 아는데, 추천해 줄까?”그 말에 애교의 얼굴은 아예 홍당무가 되어 버렸다.“난 그렇게 심신 건강에 해로운
“나 안 볼래, 화장실 다녀올게.”애교는 더 이상 볼 엄두가 안 났다. 남주가 보여준 단톡방 안에는 모두 19금 동영상이었다.그걸 보다 보니 애교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개졌다.그 사이, 남주는 애교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았다.“남주, 안돼...”“아아아!”남주가 핸드폰을 켜기 바쁘게 애교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하하하, 아니긴. 딱 걸렸네?”애교는 너무 부끄러워 당장이라도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심지어 고개를 푹 숙인 채 남주의 앞에서 도망치려 했다.하지만 남주는 애교의 팔을 잡아끌었다.“엥, 가지 마. 감상 좀 말해 봐.”“최남주, 너 진짜!”애교는 부끄럽고 화가 나서 울컥했다.그때 남주가 헤실 웃으며 말했다.“나 원래 이래. 네가 고쳐줄래?”“됐어, 너랑 얘기 안 할래. 나 정말 화장실 가고 싶어.”애교는 당장이라도 도망치려 했지만 남주는 애교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화장실 가고 싶어? 그럼 우선 감상부터 말해. 보면서 너도 하고 싶었지?”남주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그 순간 애교는 몸이 찌릿찌릿하며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아니야. 실수로 클릭한 거라 제대로 보지 않았어.”“정말? 그럼 아래 만져봐도 돼?”“남주, 그만해.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애교가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울먹이자 남주는 얼른 애교를 끌어안았다.“울지 마. 네가 이러면 내가 미안하잖아. 그래서 대체 어떤 느낌이었는데?”애교는 하마터면 뒷목을 잡고 쓰러질 뻔했다.그와 동시에 어제 수호가 얼마나 억울했을지 직접 경험했다.“남주야, 제발. 나 정말 화장실 가고 싶어. 우선 화장실 좀 다녀올게.”애교는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그제야 남주는 핸드폰을 애교에게 돌려주었다.“그래, 이번에는 한 번 봐준다. 가 봐.”그 말을 듣는 순간 애교는 도망치듯 화장실로 달려갔다.그리고 애교가 떠난 뒤, 남주는 핸드폰을 꺼내 수호에게 문자를 보냈다.[수호, 대단한데? 이런 방법으로 애교를 농락하다니.]그 시각,
얼마 지나지 않아 내 핸드폰은 다시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이번에 나에게 문자를 준 연락처는 애교 누나의 것이었다.애교 누나가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아니기에, 이런 문자를 보낸 사람은 무조건 남주 누나가 틀림없다.내가 아무리 남주 누나를 마음대로 삭제할 수 있다고는 해도, 애교 누나의 연락처만은 지울 수 없었다.게다가 이건 그저 남주 누나의 수단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내가 애교 누나의 연락처를 삭제한다고 해도 남주 누나는 아마 다른 방법으로 나를 상대할 거다.결국 나는 마지못해 한발 물러났다.[남주 누나, 그만 보내요. 저 일해야 해요.][네가 보내지 말라면 내가 들어야 해? 감히 내 연락처를 지워? 아주 죽을 때까지 괴롭혀 줄게.][저만 탓하면 안 되죠. 계속 문자 보내면 제가 어떻게 일해요?][지금 날 탓하는 거야. 계속 보낼 거야. 계속 괴롭힐 거라고.]남주 누나는 곧바로 이모티콘 테러를 해댔다.결국 나는 패배를 인정하고 답장을 보냈다.[누나, 죄송해요. 연락처 다시 추가할게요.][네가 추가한다면 내가 받아줘야 해? 네가 뭔데? 내 연락처가 그렇게 쉽게 추가할 수 있는 건 줄 알아?][그럼 대체 뭘 원하는데요?][헤헤, 애교가 방금 너한테 셀카 요구했잖아. 다시 보내, 난 얼굴 사진 싫어, 네 아래를 찍어.][미쳤어요? 이건 애교 누나 핸드폰이에요.][나도 알아, 애교한테 보여주려고 보내라는 거니까.][애교 누나가 알면 화낼 거예요.]나는 이제 나 자신이 점점 존경스러워질 지경이다. 거짓말하면서 얼굴도 붉히지 않게 되다니.예전에 처음 도시에 왔을 때는 낯선 여자를 보기만 해도 얼굴을 붉혔었는데, 이제는 마녀 같은 남주 누나도 이렇게 여유롭게 상대하다니.확실히 실천이 최고의 선생님이란 말이 맞나 보다.남주 누나는 나와 애교 누나의 사이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전 누나 못 믿어요. 어제 그렇게 놀려댔으면서.][믿어야 할 거야. 너한테 선택지는 없어. 얼른 사진 찍어 보내, 애교한테 장난칠 거니
‘그러게 왜 나를 얕봐요?’나는 매우 으쓱했다.심지어 남주 누나와 복무를 받을 때보다 더 만족스러웠다. 그도 그럴 게, 이건 신체적인 쾌락이 아니라 심리상의 만족감이기 때문이다.내가 기대하고 있을 때 남주 누나가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기대에 부풀어 핸드폰을 클릭했더니 늘씬하고 아름다운 다리가 보였다. 주요 부위만 가릴 수 있는 짧은 치마를 입어 보일 듯 말 듯해 더 예뻤다.‘그런데 이 치마 왜 이렇게 익숙하지?’‘헐, 이거 애교 누나 치마잖아?’남주 누나는 본인을 찍은 게 아니라 애교 누나 사진을 보내왔다.또 농락당했다는 걸 인지한 순간 나는 화가 났다.[난 누나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왜 애교 누나 사진을 보내왔어요?][헐, 이게 애교 사진인지 어떻게 알았어?]‘이런, 들켰네.’나는 가슴이 콕콕 찔려 어쩔 줄 몰랐다.그때 남주 누나의 문자가 도착했다.[이상하네, 아주 수상해. 정수호, 너 애교랑 뭐 있지? 안 그러면 이게 애교인지 어떻게 단번에 알았어? 내가 얼굴을 찍은 것도 아닌데.]나는 제 발이 저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이 순간 애교 누나의 몸매에 대해 너무 잘 아는 내가 원망스러웠다.나는 애써 진정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문자 했다.[누구를 바보로 알아요? 누나와 애교 누나 몸매가 완전히 다르거든요. 애교 누나는 여리여리하고 누나는 글래머러스하고.][그렇구나. 난 또 둘이 뭐 있는 줄 알았지.]남주 누나의 답장에 나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곧바로 따져 물었다.[남주 누나, 진짜 너무하네요. 매번 사람을 속이고, 다시는 누나 안 믿어요.][아이고, 우리 푸들 화 났어? 누나도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네가 애교를 공략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거잖아.]‘진짜 요물이 따로 없네. 본인 사진 보내기 싫어서 애교 누나 사진을 보냈으면서 변명은.’[변명하지 마요. 본인 사진 보내기 싫어서 그런 거잖아요. 사진도 보내지 못 할 거면서 뭐 하러 날 자꾸 유혹해요? 돌아가서 관리 남편 내조나 잘해요.]내가 이 말을
나도 민규를 무시하고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확인했다.하지만 내 눈에 들어온 건 ‘삭제된 메시지입니다’라는 문자 하나였다.“아아아!”나는 화가 치밀었다.어렵게 받은 사진을 미처 볼 새도 없이 삭제해 버린 거였다.[방금 대체 뭘 보낸 거예요? 저 아직 보지 못했어요.][못 본 건 네 사정이고. 난 약속대로 보냈어. 이제 네 사진 보내 봐.][방금 어떤 미친놈이 밖에서 문을 걷어차는 바람에 놀라서 못 봤어요. 다시 한번만 보내 줘요. 한 번만 보고 삭제할게요. 제발.][빌어도 소용없어. 난 이번에 약속 지켰어, 네가 기회를 놓친 거지. 푸들, 이제 네 차례야.][사진 없어요. 아래도 잠잠해요.][지금 날 속였어? 잘 생각해야 할 거야. 나중에 감당할 수 있겠어?][뭘 하려는데요? 어디 들어나 봅시다. 저도 궁금하니까.][네 형수 집에 달려가서 우리가 한 대화 보여줄 거야.][미쳤어요? 형수 집엔 왜 가겠다는 거예요?][네 형수랑 얘기하러. 왜 안돼? 말 돌리지 마, 보낼 거야 안 보낼 거야? 네 형도 오늘 집에 있는 것 같던데, 우리 대화 기록 다 같이 감상한다?]나는 절대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형수는 늘 나더러 남주 누나를 멀리하라고 했는데, 내가 멀리하기는커녕 오히려 야릇한 대화를 주고받았으니.형수가 알면 화낼 게 뻔했다.게다가 형이 아는 건 더 최악이었다.형은 나를 점잖은 사람이라고 보는데 내가 사적으로 이렇게 행동한다는 걸 알면 형수까지 넘본다고 의심할 수 있으니까.‘형수랑 있었던 일 절대 형한테 들키면 안 돼.’나는 분명 남주 누나를 내 손에 주무르고 있다 생각했는데, 결국 모든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너무 어이없어 나는 결국 숙이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그래요, 제가 졌어요.]남주 누나는 나에게 야릇한 표정을 짓는 이모티콘을 보냈다.고개를 숙여 봤더니, 내 아래는 오늘 의외로 아주 잠잠했다. 하지만 억지로 흥분하게 해야 하는 상황이라니.결국 내가 생각해 낸 방법은 영상을 보는 거였다.
나는 남주 누나가 장난치는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저도 모르게 기대하고 싶어졌다.[누나가 온다면 저야 너무 좋죠.][그럼 나랑 호텔 갈래?][누나가 원한다면 언제든지요.][그럼 일은 어떡해?][일이 쉽고 자유로워 괜찮아요.]그 말을 하고 나니 남주 누나가 정말 찾아올 것만 같다는 생각에 나는 갑자기 설레고 기대됐다.[그럼 누나가 갈 테니까 딱 기다려.][거짓말 마요. 안 믿어요.][거짓말 아니야. 약속할게.]한편, 애교의 집.남주는 애교의 핸드폰을 들고 답장하면서 히죽히죽 웃으며 중얼거렸다.“난 거짓말 안 했어. 하지만 난 내 핸드폰으로 대화한 게 아니니까 지금 대화하는 사람은 애교지 내가 아니야. 속여도 애교가 속인 거라고.”그때 마침 애교가 화장실에서 걸어 나왔다.“너 지금 내 핸드폰으로 뭐해?”“별거 아니야. 네 핸드폰으로 수호 씨랑 대화 중이었어.”“네 핸드폰으로 대화할 것이지 왜 남의 핸드폰으로 대화해?”애교는 뭐가 켕기는 거라도 있는 듯 다급히 말했다.남주가 뭔가 발견하고 제 핸드폰으로 수호한테 뭔가를 캐내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수호 씨가 나 삭제해서 할 수 없이 네 핸드폰 좀 빌린 거야.”애교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수호 씨가 왜 널 삭제해?”“왜긴 왜겠어? 내가 자기를 속였다고 그러지. 푸들 같아가지고 아주 쪼잔하다니까. 그것 외에 큰 게 하나도 없어.”애교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이제 핸드폰 돌려줄 수 있지?”남주는 헤실 웃으며 얼른 핸드폰을 건넸다.“그래. 그런데 수호가 나랑 무슨 대화했는지 봐 봐.”“싫어, 누가 본대? 야한 얘기했겠지, 말 안 해도 알아.”“아니거든, 잘 봐. 내가 어떤 걸 건졌는지. 수호 씨의 비밀을 캐냈는데, 알고 싶지 않아?”그 말에 애교는 이내 호기심이 발동했다.“그렇게 말하니 보고 싶네.”애교는 얼른 핸드폰을 확인했다.그리고 다음 순간.“아! 최남주, 너 죽을래? 또 나 속이는 거야?”화면에 나타난 건 다름 아닌 커다
내가 노랑머리한테 준 것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족히 10만 원 가까이는 됐으니까. 백수들한테는 이것도 큰돈이나 다름없다.노랑머리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결국 입을 다물었다.아직 대답을 못한 사람들은 얼른 다른 질문을 하라고 나를 재촉했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두 번째 질문을 했다.“그럼 혹시 이연화 혹은 조금희가 요즘 낯선 사람과 만난 걸 본 사람이 있어요?”그 물음에 모든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나는 실망했다.“세 번째 질문, 혹시 누가 나 대신 이연화를 감시할래요?”모든 사람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그럼 다 같이 해요.”“그럼 돈은 어떻게 계산하는 거예요?”노랑머리가 물었다.나는 가방에서 또 돈 두 뭉치를 꺼냈다.“세 명이 감시해요. 한 사람당 200씩 줄게요.”세 사람의 눈은 커다래지더니 급기야 반짝반짝 빛이 났다.나는 세 사람에게 귀띔했다.“이 돈은 수고비예요. 누가 만약 유용한 단서를 제공하면 이 외에도 큰 보상을 받게 될 거예요.”‘역시 돈이 있으니 뭐든 쉽게 되네.’이 사람들이 나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게 하려면 이 사람들 마음을 매수하는 게 우선이다.몇백만 원은 지금의 나한테 큰돈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장님과 사모님을 도울 수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모든 일을 마친 뒤 나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의 말을 들어보니 사모님은 이미 잠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모님 정서가 여전히 불안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기분이 다운된 사람은 쉽게 졸리고 무기력해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나는 방금 전 일을 윤지은에게 말했다.“이번 일 조사하기 엄청 어려울 거예요. 언제 진실이 밝혀질지도 모르겠고. 장기전을 할 준비는 됐어요?나는 윤지은을 보며 말했다.그러자 윤지은이 나를 째려봤다.“그걸 말이라고 해? 유미는 내 베스트 프렌드야. 유미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데 내가 같이 있어 주지 않으면 누가 같이 있어 줘? 그러는 너야말로,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데? 설마
나와 윤지은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우리는 사모님 마음이 편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사모님, 비록 어렵지만 아무 희망도 없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끝까지 견지하면 분명 수확이 있을 거예요. 게다가 사장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줄 거예요.”사장님을 언급하자 사모님의 정서는 드디어 조금 안정되었다. 사모님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호섭 씨, 정말 우리를 지켜줄 거야?”“당연하지.”윤지은도 사모님을 위로했다.그때 내가 분석했다.“제가 볼 때 이연화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요. 그 여자가 한 말 진짜 아니에요.”“너도 그래?”보아하니 윤지은도 똑같은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넌 어떻게 보아냈는데?”“느낌이 그래요. 이연화가 그렇게 드센데 남편 일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게 말이 안 돼요. 게다가 조금희 카드에 입금된 2억이 이연화랑도 연관된 것 같아요.”이건 내 직감이다.나는 왠지 이연화 같은 신분과 배경에 성깔 있는 여자라면 통제욕이 엄청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여자가 자신을 배신했던 남자를 나 몰라라 방치할 수 있을 리가 있을까?그건 그 여자 성격에 부합되지 않는다. 윤지은의 관점 역시 나와 어느 정도 비슷했다. 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며 맞장구치면서 보충했다.“그리고 또 이연화가 2억을 얘기할 때 자꾸 눈빛을 피했어. 그건 거짓말한다는 표현이야.”“문제는 그 여자가 진실을 말하지 않으려 한다는 거예요.”이건 가장 골치 아픈 부분이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그건 간단해. 내가 사람을 시켜 그 여자를 감시하라고 할 거야. 그러면 분명 허점을 보일 거야.”이런 건 역시 돈이 많아야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다.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진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나는 얼른 맞장구쳤다.“만약 그곳 주민을 감시자로 붙여두면 더 좋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이연화 행적을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윤지은은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봤다.“그건
사모님의 기세에 눌린 이연화는 오만하고 안하무인이던 태도가 싹 사라지고 다급히 대답했다.“말할게, 말한다고. 이거 먼저 놔.”사모님은 그제야 이연화 머리채를 놔주었다.이연화는 머리를 마구 문질러댔다. 심지어 얼굴까지 시뻘게진 걸 봐서는 사모님의 공격에 적지 않게 다쳤음을 알 수 있었다.이연화는 한참 동안 머리를 쓰다듬은 뒤 그제야 입을 열었다.“그 2억은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그 인간이 우리 모자한테 주는 보상이라면서 줬어요.”“당신은 그 사람 아내인데 모른다는 게 말이 돼?”우리는 여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자 이연화가 조급히 말했다.“내 말 다 사실이에요. 난 정말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우리가 부부인 건 맞지만 명의상 부부나 다름없었어요. 그 인간이 나 몰래 불여우를 만나다가 잡힌 적도 있어요.”“그때 그 인간이 이혼만 하지 말자고 싹싹 빌지 않았으면 진작 헤어졌을 거예요.”여자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그 2억이 어디서 났는지 몰랐다면, 조금희 씨가 불치병이라는 건 알았겠죠?”이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알아요. 그 인간이 오래전에 내 앞으로 보험을 들어 놓을 걸 줬었거든요. 자기가 가면 보험사에서 돈이 나올 거라면서.”이건 모두 일가 조사했던 내용이었다. 다만 이연화가 말한 사실이 모두 진짜인가 하는 게 문제였다.나는 이연화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그날 장례식장에서 화장을 미뤄달라고 했는데 왜 안 들었어요?”“나 할 일 많아요. 당신들과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 인간이 당한 사고가 단순 사고든 인위적인 사고든 난 관심 없어요. 그 인간이 내 앞으로 돈을 남겼으니 난 그 돈을 얼른 받아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이연화는 조금희와 더 이상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아 조금희 일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하지만 2억의 존재를 모른다는 게 진짜일지 의문이었다.만약 진짜라면 사건의 실마리는 또 끊기게 된다.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질
그렇다면 우리의 추측이 거의 맞는 거로 증명이 된 셈이다. 게다가 이연화는 분명 뭔가를 알고 있을 거다.“이러면 이연화 모자만 찾으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칠 수 있겠네요.”우리는 일이 이렇게 순조로울 줄 몰랐다.심지어 사모님은 마음이 급해 벌떡 일어섰다.“더는 못 기다리겠어. 나 지금 당장 이연화 만나러 갈래.”“유미야. 아직 조급해하지 마. 지금 이연화 모자가 어디 있는지 모르잖아. 이렇게 해, 내가 한나한테 조사해 보라고 할게.”윤지은은 강한나에게 전화해 이연화 모자가 사는 곳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직무상 편의를 이용해 강한나는 곧바로 이연화 모자의 거주지를 찾아냈다.[미리 말하는데, 이연화 모자 좋은 사람 아니야. 이연화 아버지는 판자촌 터줏대감이라 되도록 갈등을 만들지 마.]“알았어.”이연화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지만 우리는 무조건 가봐야 했다. 그건 사모님한테는 더더욱 간절했다.아무리 그곳에 불바다라도 사모님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이연화 집 주소를 알아낸 우리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판자촌은 낡은 건물 지역이라 외지고 낡은 곳에 있는 데다 교통도 불편했다. 다만 이연화의 집은 그 판자촌에서 가장 큰 집이었다.우리가 이연화의 집을 찾았을 때 이연화는 집에서 화투를 치고 있었다.남편이 죽은지 얼마 되지 않는 여자가 이곳에서 한가하게 화투나 치고 있다니 침 한심했다.“이연화 씨,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어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러자 이연화는 나를 흘긋 보더니 말했다.“나 지급 바빠서 시간 없어요.”“이건 당신 남편 조금희 씨와 관련된 일이라 이연희 씨가 저희랑 반드시 가주셔야 해요.”기분이 살짝 언짢아진 나는 당연히 다정한 목소리가 나가지 않았다.하지만 이연화는 자기 구역에 있어 무서울 게 없어 심지어는 나에게 소리까지 질렀다.“반드시? 내가 왜? 당신들이 누군데? 경찰이야? 내가 왜 당신들 말을 들어야 해? 당장 꺼져. 화투 치는 거 방해하지 말고.”여자는 말하면서 다시 화투 치는 데
“보아하니 두 사람 모두 조금희 씨 몸에 종양이 퍼지고 있어 곧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네요.”“혹시 조금희 씨가 뒤에서 꼼수 부린 거 아닐까요?”나는 문득 뭔가 떠올라 의문점을 제기했다.현재 상황으로 분석해볼 때 조금희의 혐의가 가장 높았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자세한 건 조사해 봐야 하지만 나도 조금희 씨가 이상한 것 같아.”사모님은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다음에 조사할 때 나도 끼워줘. 나도 같이 조사하고 싶어. 두 사람 말 맞아. 호섭 씨가 억울한 죽임을 당했는데, 나라도 진실을 밝혀 억울함을 풀어줘야 해. 이게 내가 살아갈 유일한 동력이야.”사모님은 말하면서 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슬픔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와 윤지은은 항상 사모님 곁을 지킬 거다.그날, 우리는 곧장 종양 전문 병원에 가 조금희의 병력을 조사했다.조금희 몸에서 종양이 발견된 건 1년 전인데, 처음에 양성이었다가 악성으로 번지기까지 적지 않은 돈을 들였던 거로 확인되었다.게다가 조금희는 불치병에 걸리기 전에 아내와 갈등을 겪었다.“자세한 건 저도 모르는데, 조금희 씨가 우리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젊은 여자가 항상 와서 돌봐줬어요. 그러다가 부인이 병원에 찾아와 그 아가씨를 때렸고요. 그 일은 병원 사람들 다 알아요.”‘그렇다는 건 조금희가 바람을 피웠다는 거네?’조금희가 이런 사람일 주은 생각지도 못했다.윤지은은 여간호사에게 돈다발을 건넸다. 그러자 간호사는 아주 기뻐하며 떠나갔다.조사를 마친 뒤 우리는 밖에서 식당을 찾았다.식당에 도착한 윤지은은 분석을 시작했다.“조금희 씨가 불치병에 걸렸고, 예전에 아내와 아들한테 잘못을 저질렀다면 혹시 자기가 얼마 못 살 걸 알고 호섭 씨를 배신해 돈을 챙겼던 건 아닐까?”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럴 가능성이 커요. 만약 조금희 씨 계좌에 큰돈이 입금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아쉽지만 이곳은 강북이 아닌 Y시다. 안 그랬다면 윤지은의 인맥
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배고픔을 느낀다는 건 좋은 일이다.윤지은이 아침을 사 오자 사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그걸 본 윤지은은 나를 향해 엄지를 추켜들었다. 그건 내 실력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이번 치료 방법이 확실히 효과적이었으니까.나는 사모님을 한참 동안 관찰했다.비록 컨디션이 많이 안 좋은데도 사모님은 음식 드실 때 여전히 우아하고 단아했다. 살짝 슬픔을 띄고 있어 살짝 비극의 여주인공 같기도 했다.내가 한창 사모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윤지은의 날카로운 눈빛이 갑자기 나를 쏘아봤다. “짐승!”윤지은은 욕지거리를 퍼부었다.그 욕에 나는 억울함을 호소했다.“제가 뭘 했다고 짐승이라는 거예요?”“아무튼 짐승 맞아. 이런 상황에서 훔쳐보기나 하고.”윤지은은 나를 째려봤다.난 그저 사모님을 몇 번 본 것뿐인데 나를 짐승 취급하다니, 너무 어이없었다.하지만 이러다 또 싸움 나겠다 싶어 나는 얼른 아침을 들고 다른 곳에 가서 배를 채웠다.식사를 마친 뒤 사모님은 자발적으로 나와 윤지은을 찾아왔다.“알고 있는 거 사실대로 다 알려줘요. 난 호섭 씨 사고에 대한 모든 사실이 알고 싶어요.”사모님은 너무 평온해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때문에 나는 사모님 상태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사모님, 우선 맥 좀 짚어봐도 될까요?”“그럴 필요 없어요.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나도 알아야. 걱정할 거 없어요. 어젯밤 많이 생각해 봤고, 호섭 씨가 떠난 사실을 받아들였어요.”“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건 호섭 씨처럼 착한 사람이 남한테 죽임을 당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억울함을 풀어줄 거예요.”“난 강해져야 하고 호섭 씨처럼 용감해져야 해요. 그래야 호섭 씨가 마음 놓고 갈 수 있어요.”사모님은 애써 슬픔을 참으려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또 흐느꼈다.그 말을 들으니 나도 코끝이 시큰거리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같은 목표가 생겼다. 바로 진실을 밝히는 것.나는 얼른 마음의
나는 사모님 팔을 힘껏 잡으면서 사모님과 눈을 마주쳤다.“사모님!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마세요. 사장님이 이런 사모님 보고 편히 가지 못하길 원하시는 건 아니잖아요.”내 말이 사모님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줬는지, 사모님은 순간 울음을 터뜨렸다.윤지은은 내가 강제로 사모님을 자극했다며 나를 탓했다.“유미 지금 안 그래도 나약한 상태인데, 왜 그런 말을 직접 해?”나는 너무 난감했다.“누구는 뭐 이러고 싶은 줄 알아요? 하지만 사모님이 계속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환상 속에 살고 있는데, 계속 이러면 상태가 점점 악화해요.”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인정했지만 그와 동시에 사모님이 또 상처받을까 봐 걱정했다.나도 사모님이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다. 하지만 사모님을 절망 속에서 끄집어내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나는 윤지은에게 말했다.“정말 사모님을 돕고 싶다면 모질어야 해요. 이럴 때 마음 약해지면 오히려 해치는 거예요.”윤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내 말에 동의하는지, 내가 치료할 수 있도록 묵묵히 자리를 비켜줬다. 나는 나른하게 힘이 쭉 빠진 사모님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올 수 없어요. 사모님이 속사한 건 알겠어요 하지만 지금 속상해할 때가 아니에요. 우리 할 일이 있어요.”“사장님 사고 단순 사고가 아니에요. 누군가 인위적으로 사고 낸 거예요. 사모님, 정신 차리고 우리와 함께 진실을 조사해요.”사모님은 텅 빈 눈으로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사모님을 깊은 슬픔에서 꺼내는 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무엇보다 중요한 건, 서두르지 않고 그녀가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다.나는 말투를 부드럽게 하며 방금 한 말을 또다시 반복했다.“사장님 교통사고에 수상한 점이 발견됐어요. 사모님도 사장님이 억울하게 돌아가시는 거 원하지 않죠? 우리 함께 진실을 알아내 사장님이 억울하게 죽임당하
나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식은땀이 송골송골 솟아올랐다.사모님 상태는 살짝 이상해 보였다. 아마도 의식이 혼미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를지도 몰랐다.나는 사모님이 바보 같은 짓을 할까 봐 서둘러 사모님 팔을 꼭 잡았다. 그러면서 계속 따라오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데려올 생각이었다.“수호 씨, 이거 놔요. 난 남아서 호섭 씨랑 같이 있을래요...”사모님은 마구 버둥대며 소리쳤다.이러다가 사고가 날 것 같아 나는 아예 사모님을 어깨에 두러 업었다. 그러자 사모님은 곧바로 버둥거리며 소리쳤다.벼랑 끝에 서 있는지라 조금만 실수하면 함께 아래로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결국 사모님을 손날로 기절시켰다.내가 가드레일 안쪽으로 다시 넘어왔을 때 윤지은의 차가 마침 도착했다.“왜 그래?”윤지은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나는 사모님을 차에 앉히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사모님 지그 정신이 이상해서 현실과 환각을 구분하지 못해요. 방금 사장님이 춥다고 한다면서 옷 주러 내려가겠다고 했어요. 제가 제때 나타나지 않았으면 뛰어내렸을지도 몰라요.”윤지은은 내 말을 듣더니 미간을 찌푸렸다.“계속 이럴 순 없어. 우리가 잠깐은 지켜볼 수 있지만 평생 지켜볼 순 없잖아.”그때 내 머릿속에 문득 방법이 떠올랐다.“사모님께 사장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려드리는 건 어때요?”“미쳤어? 이번 일로도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또 자극하자고?”윤지은은 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이에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제 할아버지가 남긴 의학 서적에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옛날에는 환자가 가족을 잃고 감정을 통제하지 못할 때 치료가 안 된다면 환자한테 희망을 줘야 한대요. 그 희망이 의학에서 말하는 기예요.”“그 기를 가진 환자가 음식 치료와 약물 치료를 함께 진행하면 서서히 회복할 수 있대요.”“사장님의 죽음에 수상한 점이 있잖아요. 그래서 사모님과 함께 그 사건을 수사하는 거예요. 아마 사모님도 사장님이 죽은 진실을 알고 싶을 거예요.”
장례식장 안을 모두 뒤져 봤지만 사모님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리 조급하지 않던 내 마음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불안해졌다.사모님은 현재 몸 상태도 안 좋고 정서도 매우 불안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족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걱정됐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내 마음은 점점 불안해졌다.그러다 결국 방법이 없어 나는 문득 사모님 번호를 떠올려 그쪽으로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계속 긴 연결음만 들릴 뿐 아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포기하려고 할 때 연결음이 꺼졌다. 액정을 확인하니 전화가 연결되었다.“사모님?”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수호 씨, 나 괜찮으니까 좀 내버려둬요.]사모님 목소리는 매우 우울해 보였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한테는 너무 듣기 좋았다. 나는 다급히 물었다.“사모님, 어디 있어요? 너무 걱정돼요.”[혼자 있고 싶어요.]“알아요, 아는데 어디 있는지만 알려줘요. 사모님이 안전하다는 거 확인해야 해요.”전화 건너편에서 한참 침묵이 흘렀다.그때 갑자기 차 경적음이 들려왔다.그렇다는 건 사모님이 장례식장에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나는 문득 사모님이 있을 수 있는 곳이 떠올랐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물었다.“사모님, 알려주시면 안 돼요?”사모님은 아예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지만 이미 대충 답을 얻은 나는 장례식장을 뛰쳐나가 택시를 잡고 사장님이 사고를 당한 곳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사모님을 찾았냐는 윤지은의 전화를 받은 나는 내 추측을 말했다.“아니요. 사모님 아마도 사장님 사고 난 곳에 있는 것 같아요.”[거긴 왜?]윤지은은 이해가 되지 않아 무의식적으로 물었다.“사장님 죽음이 수상해 직접 조사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단순히 사장님이 그리웠을 수도 있고... 아무튼 저 지금 가는 중이에요.”[그럼 먼저 건너가. 나 이따 바로 갈게.]나는 윤지은과 상의한 뒤 먼저 사장님이 사고 난 곳으로 향했다.사고가 난 곳은 절벽인데, 사모님은 마침 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