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시도 여기 더 머물고 싶지 않았다.여기 더 있다가는 이 요물 같은 여자한테 또 놀림거리나 될 것 같았으니 이 기회에 떠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어차피 먹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데 남아 있어봤자 득 될 게 없었으니까.결국 나는 결심을 내리고 애교 누나에게 말했다.“애교 누나, 저 호텔에 묵을게요.”“왜 호텔에 묵어요?”“여기서 잘 수도 없는데 호텔에 묵는 게 차라리 좋아요.”애교 누나는 나를 붙잡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남주 누나가 나를 만류했지만 나는 남주 누나의 말을 들을 리 없었다.이 시간부로 이 여자를 멀리하기로 했으니까.아주 악마가 따로 없는 거 같다.결국 나는 내 짐을 챙겨 애교 누나의 집을 나와 근처에서 호텔을 구했다.푹신푹신한 호텔 침대에 누우니 나는 너무 기분이 좋았고 심지어 상쾌하기까지 했다.애교 누나를 보며 애써 참느라 괴로운 걸 견디지 않아도 되고, 남주 누나한테 놀림당하지 않아도 되니까.특히 남주 누나한테 놀림당하던 장면만 떠올리면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내가 그때 얼마나 어색했는지 아무도 모를 거다.심지어 당장이라도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었다.호텔이 이렇게 혼자 있는 게 무척이나 편하고 행복했지만 한참이 지나 마음이 진정되니 나는 갑자기 외로워지기 시작하며 여의사가 생각났다.지금 호텔에 묵고 있으니 언제든 약속 잡을 수 있는 상황이다.다만 낮에 대화하다가 내가 일부러 답장하지 않아 상대가 나와 하려고 할지가 문제였다.나는 그래도 조심스럽게 여의사에게 문자 하나를 보냈다.[낮에 바빠서 이제야 답장해요. 미안해요.]여의사는 곧바로 나한테 답장을 보내왔다.[세 살짜리 애를 놀려요? 아무리 바빠도 답장할 시간이 없다는 게 말이 돼요? 남자들은 역시 믿을 게 못 돼요.][나 원래 좋은 놈 아니에요. 안 그러면 그쪽과 그런 일 했을 리도 없잖아요. 오늘 하고 싶다면서요. 지금 호텔로 와요.][왜 호텔이에요? 집에서는 안 되나 봐요?]나는 진작 생각한
“유미영이에요.”이 대답을 듣고 나서야 나는 문을 열었다.여자는 오늘 정갈하고 단정한 노란색 원피스를 입었는데, 수수한 옷차림도 여자의 미모는 가릴 수 없었다.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고 뭘 입으나 다 예뻤다.나는 얼른 몸을 옆으로 틀었다.“들어와요.”여자가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나는 여자를 뒤에서 덥석 안으며 본론으로 들어가려 했다.“잠깐!”“왜요?”“벌써 몇 번 했는데 아직 나만 그쪽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잖아요. 모자와 마스크 벗어요, 어떻게 생겼는지 보게.”여자의 말에 나는 순간 당황해 났다.지난 이틀 동안 여자는 한 번도 이런 요구를 한 적 없는데 오늘 왜 갑자기 이런 요구를 하는지 의아했다.‘설마 뭔가를 발견했나?’가뜩이나 생각이 논리적이고 눈썰미가 날카로워 걱정하고 있었기에, 나는 얼른 여자를 놓고 경계했다.“뭐예요? 설마 내 뒷조사라도 할 생각이에요? 서로 원하는 것만 주고받자고 했잖아요.”“그건 맞지만 적어도 내가 바람피우는 상대가 어떻게 생긴 줄은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잘 생겼는지 아니면 못생겼는지 정도라도. 그래야 여준휘 그 개자식한테 뭐라도 말하죠. 이렇게 모두 감추고 있으면 내가 어떻게 그 자식 기분 긁어요?”‘그런 거구나.’하지만 나는 역시 내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잘 생겼어요. 걱정하지 마요. 그쪽과 할 때 처음이었고.”“네?”여자는 놀랐는지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설마 아직 미성년자거나 학생인 건 아니죠?”“아니에요, 올해 23살이고 이미 성인이에요.”“23살이면 대학도 다녔을 텐데 여자 친구 안 사귀어 봤어요?”“아니요.”“그럼 왜 얼굴 못 보게 해요? 내가 그쪽 식구한테 말하기라도 할까봐요?”여자의 끈질긴 질문에 나는 당황해났다.“오늘 할 거예요 말 거예요? 안 하려면 그냥 가요.”“나도 모르겠어요.”‘모르겠다고?’‘이건 또 뭔 대답이래?’나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무슨 뜻이에요?”내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을 내비치자 여자는 고개를 푹
한참 동안 술을 마시다 모니 목구멍으로 쑥쑥 잘도 넘어갔다. 심지어 나는 여자보다 더 많이 마셔 흐릿한 정신으로 물었다.“대체 이름이 뭐예요?”“말했잖아요, 유미영이라고.”“거짓말하지 마요. 분명 다른 분이 윤 쌤이라고 부르는 거 들었어요. 유 씨가 아니잖아요.”“아, 유 씨가 아니라... 윤 씨였지... 윤지은이에요. 어때요? 이름 이쁘죠?”“예뻐요. 듣기 좋아요. 윤지은. 부모님이 많이 배우신 분인가 봐요. 이름 너무 잘 지으셨다.”지은은 술에 취해 양 볼이 사과처럼 발그레해져서는 눈을 부릅뜨고 나를 바라봤다.“그러는 그쪽은 이름이 뭐예요? 안철수 아니죠?”“네, 정수호예요.”나도 술에 취한 지라 무방비한 상태로 내 이름을 솔직하게 말해버렸다.“뭐, 흔한 이름이에요. 우리 부모님은 지은 씨 부모님처럼 배우신 분들이 아니라 그냥 흔한 이름 지었어요.”지은은 나와 잔을 기울이며 몸을 흔들거리며 말했다.“그래도 부모님이 엄청 사랑하고 아껴줄 것 같은데.”“그럼요. 우리 부모님은 이 세상에서 나를 제일 사랑하는 분들이에요.”나는 말을 마치고 난 뒤 흐리멍덩한 눈으로 지은을 바라봤다.“지은 씨 부모님은 그쪽 안 사랑해요? 아닐 것 같은데. 지은 씨는 딱 봐도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티가 나는데, 그러면 부모님이 아껴주지 않을 리가 없는데.”내 말에 지은은 갑자기 불만조로 말했다.“우리 부모님 얘기하지 마요. 난 부모임이 없으니까. 난 세상에서 제일 외로운 여자예요.”지은은 말하면서 갑자기 내 목에 팔을 둘렀다.“오늘 하고 싶어서 나 부른 거죠? 우리 해요. 하지만 요구가 하나 있어요. 우리가 하는 과정 영상으로 찍고 싶어요, 괜찮겠어요?”나는 많이 취하긴 했지만 이런 판단도 못 할 만큼 취하지는 않았기에 다급히 말했다.“당연히 안 되죠. 우리가 한 영상으로 남자 친구 열받게 하려고 그러죠? 난 지은 씨 남자 친구와 원한 관계가 아니에요. 그런데 이 일로 나중에 나한테 보복이라도 하면 어떡해요?”지은은 순간 내 다리를 꽉 꼬집었다
지은은 말하다가 결국 목청껏 울기 시작했다.그 울음소리를 들으니 나조차 마음 한구석이 괴로워 결국 참지 못하고 지은을 꼭 안았다.“그냥 쓰레기잖아요. 그런 놈 때문에 슬퍼할 가치가 없어요.”“이 세상에 좋은 남자는 많아요. 지은 씨만 괜찮다면 내가 남자 친구 해줄게요. 신변도 보호해 주고.”지은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안고 말했다.“정말 내 남자 친구가 되어줄래요? 그럼 나랑 영상 찍어요.”“왜 또 그 화제예요?”“수호 씨가 매번 그렇게 꽁꽁 싸매고 얼굴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처럼 구는 바람에 난 아직도 수호 씨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영상으로 찍으면 다르잖아요.”지은은 말하면서 아기 고양이처럼 내 품에 파고들더니 일부러 몸을 배배 꼬았다.“네? 그렇게 해도 되죠?”지은의 동작 때문에 내 아래는 또 서버렸다.게다가 술 때문에 어지러워 자제력도 많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심지어 마음속에서 자꾸만 ‘동의해, 동의해’ 하는 속삭임이 나를 유혹했다.내가 한참 동안 머뭇거리고 있을 때 지은은 갑자기 내 목을 끌어안고 내게 입 맞추었다.지은의 말캉하고 뜨거운 입술에 나는 끝내 자제력을 잃었다.그때 지은이 웃으며 나를 밀어내더니 비틀거리며 캐비닛 앞에 가 핸드폰을 켜고는 침대 쪽으로 카메라 렌즈를 돌렸다.“오빠, 딱 기다려요...”...다음 날 아침 9시에 깨어났을 때 내 머리는 여전히 무거웠다.게다가 어제 일이 별로 기억도 나지 않았다.하지만 지은이 우리의 동영상을 찍었던 기억이 흐릿하게 났다.‘동영상!’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벌떡 일어났다.지은은 이미 떠나 방에는 나 혼자뿐이었다.심지어 한 순간 내가 혼자 술을 마셨나? 아니면 그 여자와 함께 술을 마셨나 의심됐다.그러다 나는 곧바로 답을 얻었다. 그도 그럴 게, 바닥에 찢긴 여자의 스타킹이 보였다.‘내가 어젯밤 정말 그 여자와 같이 있었던 거였어.’‘그렇다는 건 동영상을 찍은 것도 사실이라는 거잖아.’게다가 어젯밤 끝까지 마신 터라 완전히 취해 모자도 마
“수호 씨,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아침에 전화를 5통도 넘게 했는데, 왜 계속 안 받았어요?”그 말에 나는 가슴이 콕콕 찔려 말했다.“형수, 저 어제 늦게 자서 아침에 벨 소리를 못 들었어요. 무슨 일로 찾았어요? 형 일로 도와드릴 거 있나요?”“아니요. 그냥 애교한테 들었는데 어제 집에서 자지 않고 호텔에 갔다면서요? 왜 호텔에 갔어요?”그 말을 들으니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아, 그 일이라면 애교 누나한테 물어봐요.”“애교가 말해준다면 내가 수호 씨한테 물어볼 필요 없었죠. 혹시 남주가 수호 씨 어떻게 했어요?”“그런 건 아니고, 어제 남주 누나가 자꾸 저를 희롱하는 게 불편해서 애교 누나 집에서 지내는 게 싫었어요.”“역시, 남주 그 계집애가 수호 씨한테 집적거린 거였네. 잘했어요, 남주는 수호 씨가 감당할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남주 남편이 점잖은 사람이지만 권력 있는 사람이라 수호 씨가 자기 아내랑 잔 걸 알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나도 솔직히 남주 누나와 한번 자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어제의 일이 있고 나니 그런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다.남주 누나는 예쁘고 섹시하지만 사람이 너무 짓궂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다.그러니 차라리 멀리하는 수밖에.“참, 어제 출근한 소감은 어때요?”형수의 말에 나는 그제야 출근해야 한다는 게 떠올랐다. 분명 9시에 출근해야 하는데 벌써 9시가 넘었다.출근 이튿날부터 지각한다는 건 너무 말도 안 되는 거였기에 나는 다급히 바지를 올리며 말했다.“형수, 저 급해서 그러는데 나중에 얘기해요.”전화를 끊은 뒤, 나는 얼른 정리를 마치고 아침도 거른 채 병원으로 향했다.아무리 급하게 서둘러봐도, 지각하는 건 막지 못했지만.내가 도착했을 때, 시간은 벌써 오전 10시였다.늘 그렇듯 핸드폰을 보고 있는 마동국 앞에 도착한 나는 숨을 헐떡이며 사과했다.“마 교수님, 죄송합니다. 오늘 늦잠 잤습니다.”마동국은 온 정신이 핸드폰에 팔려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늦은 시간에 겨우 잠이 들어 오늘 아침 지각까지 했어요.]그 말에 애교 누나한테서 바로 답장이 도착했다.[혹시 나 원망해요?][제가 왜 애교 누나를 원망하겠어요?][내가 수호 씨를 붙잡지 않았잖아요.][그건 누나 집인데, 남으라고 할지, 나가라고 할지는 누나 마음이죠.]애교 누나는 나한테 입술 이모티콘을 보내왔다.[애교 누나, 혹시 누나 친구 중에 포스터 디자인할 줄 아는 사람 있어요?][내가 알아요.][정말요? 그럼 잘됐네요. 혹시 한의원 홍보 책자 디자인해 줄 수 있어요? 여기 참고 자료가 있으니 바로 사진으로 보내줄게요.]나는 얼른 남아 있는 홍보 책자를 사진 찍어 애교 누나한테 보냈다.그걸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애교 누나한테서 답장이 돌아왔다.[너무 어려운 거 아니네요. 바로 끝낼 수 있어요. 그런데 이거 딱 봐도 아마추어가 한 것 같은데, 내가 더 다듬어줄까요?][그래주면 고맙죠. 그럼 부탁할게요.][나한테 내외할 거 뭐 있어요?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뿐이지, 마음속에 수호 씨가 없는 건 아닌데.]애원하는 듯한 애교 누나의 말투를 보니 나는 왠지 마음이 따뜻해졌다.이로써 애교 누나가 나를 아직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게 증명됐으니까.[그럼 누나 사진 찍어줘요.][어, 어디를 보고 싶은데요?]나는 애교 누나의 문자에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누나가 검은색 슬립 원피스를 입은 모습을 보고 싶어요. 속옷 안 입으면 더 좋고.][기다려요.]애교 누나가 나한테 사진을 보내주려 하자 내 마음은 순간 먹구름 걷힌 듯 밝아졌다.나는 의자에 기대앉아 애교 누나가 사진을 보내오기를 기다렸다.잠시 후, 알람음이 들리자마자 나는 다급히 핸드폰을 확인했다.애교 누나가 보내준 사진은 감탄을 자아낼 만큼 아름다웠다.누나가 직접 찍은 셀카였는데, 검은색 레이스 슬립 원피스를 입고 안에 속옷을 입지 않아 흰 가슴이 보일 듯 말 듯했고.등 뒤에서 흘러든 한줄기 햇빛은 사진의 분위기를 단숨에 끌어올렸다.그 순간 내 눈에
[그래요. 영화야 언제든지 볼 수 있죠. 하지만 낯부끄러운 짓은 절대 하면 안 돼요.]‘19금 영화를 보면서 누나가 참을 수 있는지 보자고요.’나는 속으로 자신만만하게 생각했다. 게다가 내가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면 끝까지는 하지 못해도 분명 재미 볼 수는 있을 거다.애교 누나와 그런 영화를 볼 생각을 하니 나는 벌써부터 기대됐다.그도 그럴 게, 애교 누나는 그런 영화를 보며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했으니까.아마 부끄러워 당장 영화를 끄라고 할지도 모른다.하지만 나는 끝까지 끄지 않고 같이 보자고 애교 누나를 유혹하는 장면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흥분됐다.나는 애교 누나와 한참 동안 더 얘기하다가 홍보 책자를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대화를 종료했다.잡담만 하다가 일에 영향 줄 수는 없었으니까.할 일도 없는지라 나는 물을 몇 번 마시고 화장실로 향했다.그리고 마침 민규와 마주쳤다.민규는 나를 보자마자 잔뜩 흥분하며 내 앞길을 막았다.“가긴 어딜 가? 내 핸드폰이나 물어내.”“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물어내라고? 그래요, 그럼 증거를 내놔요. 없으면 당장 비키고.”나의 싸늘한 말에 민규는 나를 삿대질하며 윽박질렀다.“정수호, 너무한다는 생각 안 들어? 나 건드리면 어제 네가 했던 짓 다 폭로할 거야.”“해 봐요. 남이 믿어줄지는 모르겠지만.”말을 마친 나는 민규를 지나 화장실에서 나왔다.하지만 민규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나를 끈질기게 따라왔다.“가지 마, 거기 서!”나는 걸음을 멈추고 정수호를 가리켰다.“경고하는데 그만 따라와요. 안 그러면 나도 참지 않을 거니까.”민규는 다른 과 주임 교수의 소개로 들어왔지만, 나는 부원장의 소개로 들어왔으니, 신분으로 따져도 내가 한 수 위였다.때문에 민규는 아무리 억울하고 달갑지 않아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정수호, 나중에 나를 탓하지 마!”민규는 화가 난 듯 퉁명스럽게 말하고 떠나갔다.화장실에서 돌아오기 바쁘게 애교 누나는 본인이 디자인한 파일을 나한테
나는 영상을 보내기 바쁘게 핸드폰을 꺼버렸다.그도 그럴 게, 애교 누나가 그 영상을 보면 반드시 나를 원망할 걸 알고 있었으니까.그 시각, 애교의 집.애교는 수호가 보낸 영상을 유심히 들여다봤다.젊은 남녀가 기차역에서 뜨겁게 포옹하는 지극히 평범한 초반 화면에 애교는 수호가 저를 보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며 영상을 클릭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분위기가 바로 바뀌며 후반 부분이 재생되더니 야릇한 소리와 함께 남녀가 뒤엉킨 화면이 나타나자 애교는 순간 넋이 나갔다.“애교야, 너 지금 뭐 해?”더 무서운 건, 남주가 그걸 들어버렸다는 거다.애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난감한 듯 대답했다.“아, 아니야.”“거짓말! 네 얼굴과 표정이 이미 너를 배신했거든. 게다가 내가 야동을 얼마나 많이 봤는데, 소리만 들어도 네가 무슨 영상을 보고 있는지 다 알 수 있어.”그 순간 애교는 얼굴과 목, 심지어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지금껏 보수적으로 지내왔고 이런 영상은 한 번도 본 적 없었는데, 지금 그걸 본 것도 모자라 친구한테 들켜 버렸으니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었다.결국 애교는 뻔뻔하게 말했다.“정말 아니야. 네가 잘못 들었어.”“흥. 못 믿겠는데? 아니면 핸드폰 내놔 봐.”애교는 당연히 핸드폰을 내놓을 수 없었다.방금 너무 당황한 나머지 바로 핸드폰을 꺼버렸는데, 다시 켜면 보던 화면이 그대로 재생될 게 뻔했으니까.이에 애교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나 갑자기 배가 아파서 화장실 좀 다녀올게.”“그래, 그 전에 핸드폰 두고 가. 내가 검사해 볼 거야.”“너무한 거 아니야? 지금 내 말 못 믿어?”“얼씨구? 네가 그런 영상 본다고 해도 문제 될 거 없어. 남자한테 치료받기 싫다면 혼자서라도 치료해야 할 거 아니야. 그런데 재미있고 주인공들 마스크가 받쳐주는 영상을 보는 걸 추천해. 그래야 기분이 좋아지거든. 내가 괜찮은 거 많이 아는데, 추천해 줄까?”그 말에 애교의 얼굴은 아예 홍당무가 되어 버렸다.“난 그렇게 심신 건강에 해로운
“게다가 이제 곧 매년 열리는 서화 대회가 있는데, 연 선생님이 협회 회장으로써 무대 위에서 연설을 해야 하거든요. 만약 무슨 문제가 생기면 책임질 수 있어요?”이 순간 중년 남자의 말투는 매우 날카롭고 엄숙했고 목소리도 살짝 높아졌다.그러자 연상철이 막아섰다.“태진 씨, 그만해.”중년 남자의 이름은 손태진이었다.나도 손태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때문에 진지하게 설명했다.“저도 손 선생님 마음 이해합니다. 하지만 의사로서 충분한 확신이 없으면 저도 이런 말씀 안 드립니다.”“제 나이가 어리지만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곁에서 의학을 배웠어요. 할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의사는 맹목적으로 진료하면 안 된다고 가르쳤고요.”“연 선생님 손목은 제가 자세히 봤는데 치료할 수 있어요. 심지어 100퍼센트 확신해요. 그렇게 많은 유명 한의사들은 안 되는데 제가 치료할 수 있다고 하는지 궁금하죠?”손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나도 그 점이 걱정돼요.”나는 몸에 지니고 다니던 의서 복사본을 꺼내 연상철과 비슷한 증세를 설명한 페이지를 펼쳤다.“연 선생님, 손 선생님, 이것 보세요. 이건 저희 할아버지께서 남긴 의서의 복사본이에요. 이 위에 적힌 사례가 연 선생님 증상과 똑같죠?”“손목에 힘이 없고 흐린 날씨에 뼛속까지 시리고 아프고 붓기까지 하고, 붓도 들 수 없고...”연상철과 손태진은 그걸 보더니 놀란 듯 말했다.“정말 똑같네.”“수호 군, 혹시 이 의서 때문에 자신 있다고 말한 거예요?”연상철은 감격해서 물었다.나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방금 진찰한 뒤 연 선생님 증상을 보니 의서에 기록된 증상과 똑같더라고요. 이 의서에 나온 치료 방법도 마침 제가 다 아는 거고 해서 자신 있다고 말한 거예요.”민우도 기뻤는지 가슴을 팍팍 두드렸다.“그렇구나. 놀랐잖아. 난 네가 허풍 떠는 줄 알았어.”연상철은 참지 못하고 하하 웃었다.“좋아요. 하늘이 나를 돕네요. 정 선생, 내 팔목은 그럼 정 선생한테 맡길게요.”“안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서지예 씨한테서 들었는데, 연 선생님이 오랫동안 허리와 다리 통증으로 고생했다고 하더라고요. 저희는 한의학을 전공하다가 함께 한약관을 꾸렸거든요. 그래서 대신 상태 좀 봐 드리러 왔어요.”“만약 저희 치료 효과가 괜찮다면 고객 좀 소개해 주셨으면 좋겠어요.”정말 목적을 내뱉으니 나는 왠지 좀 미안했다.하지만 연상철은 오히려 통쾌하게 웃었다.“그런 이유로 찾아왔군. 지예 그 계집애가 나를 다 기억하다니.”“마침 나도 요즘 팔목이 아팠는데 한번 봐줘요.”연상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친절했다.나는 얼른 도구를 꺼내 연상철의 맥을 짚었다.나는 이번 진찰에 매우 집중했다. 어찌 됐든, 이건 우리 천수당이 위기를 넘길 수 있는지와 직결되어 있으니까.진찰을 마친 뒤 나는 속으로 어느 정도 답을 얻었다.“연 선생님 팔목 통증은 오래 간 것 같네요. 1, 2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적어도 10년은 걸린 것 같아요.”“하하. 맞아요. 고질병이긴 하지. 어디 보자, 적어도 12년이 됐나?”“그렇게 오래됐다고요? 어쩌다 이렇게 됐는데요?”민우는 놀란 듯 물었다.그러자 연상철이 말했다.“우리처럼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매일 서예와 그림을 연습해야 하거든요. 시간이 오래 지나다 보니 자연스레 병이 생긴 거고.”“처음 이런 증상이 생겼을 때 병원에 가 봤는데 나으려면 그림을 그리지 말라고 하더라고. 그런데 내가 그림을 안 그리면 두 손을 해서 뭐하겠나 싶어 아예 치료를 안 했죠.”“젊은 총각인 것 같은데, 내 손목을 치료하면서 그림도 계속 그리게 할 수 있나요?”“할 수만 있다면 치료를 맡기고, 만약 방법이 없다면 됐어요. 평생 그림 그리는 게 취미인데, 그림도 못 그리면 차라리 손이 필요 없지.”나는 취미를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처음 봤다. 그 때문에 너무 존경스러웠다.나는 연상철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연 선생님, 제가 약속드릴게요. 그림도 그리면서 치료할 수 있어요.”연상철은 놀란 듯 눈을
나와 민우는 함께 서화협회에 도착했다.우리는 이런 곳에 처음 걸음 하는지라 한참을 찾아다닌 끝에 겨우 정문을 찾았다.서화협회는 한 건물의 1층 전체를 차지했다. 우리는 서화협회가 이렇게 널찍한 줄은 꿈에도 몰랐다. 민우는 놀랐는지 가는 내내 작은 소리로 종알거렸다.“너무 큰 거 아니야? 그림 그리는 어르신들은 다 이렇게 돈이 많아?”나도 이 분야에 대해 아는 게 없기에 대충 얼버무렸다.“그렇겠지. 소설에서 보면 유명한 화가의 그림은 한 점에 수십억 수백억 하는 것도 있다더라. 현실에서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아마 비슷할 거야.”“우리 이따가 무조건 조심해야 해. 여기 있는 작품 망가뜨리면 우리 둘을 팔아도 안 돼.”민우는 내 말에 바짝 긴장하더니 그림이 걸려진 벽 쪽에 가까지 하지도 않았다.우리는 꼭 붙어서 조심스럽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그 모습은 우리 스스로 봐도 너무 웃겨 웃음이 터질 지경이었다.하지만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 우스워지는 것쯤은 상관없었다.우리는 얼마 뒤 서화협회 내부에 도착했다.건물 내부에는 각양각색의 서화가 가득했다.나와 민우는 서화에 대해 아는 게 없지만, 이곳에 걸어놓은 작품이 절대 일반적인 작품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서화 외에 이곳에는 많은 골동품들도 있었다. 때문에 나와 민우는 더욱 조심했다. 심지어 들어오지 말았어야 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이곳은 다른 의미로 너무 무서웠다. 실수로 물건 하나라도 망가뜨리면 우리를 팔아도 배상하지 못하니까.“두 분, 혹시 누구를 찾아왔나요?”그때 한 중년 남성이 우리 쪽으로 걸어와 물었다.나는 다급히 명함을 꺼냈다.“연상철, 연 선생님 뵈러 왔습니다. 이 명함은 S시 서씨 가문 서지예 씨가 준 겁니다.”이곳 사람들은 책향기가 나는 듯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 너무 불편했다.왠지 우리가 이곳에 어울리지 않고, 이 사람들과 같은 수준이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었다.중년 남성은 명함을 보더니 싱긋 웃으며 말했다.“연 선생님은 사무실에 계세요. 따라와요.”
“초대? 어디?”“다연 식당을 승호 도련님이 샀거든. 오늘 새로 개업하는 날이라 승호 도련님이 나더러 너 데려오래.”다연 식당을 구매한 사람이 연승호였다니. 이건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연승호는 백연우 때문에 나랑 엮이게 되었고, 항상 찾아와서 시비를 걸며 자기의 우월함을 드러내곤 한다.그런데 내가 만약 순순히 가면 분명 또 한껏 들떠서 뽐낼 거다.때문에 나는 핑계를 둘러댔다.“안 될 것 같아. 가게에 처리해야 할 일이 좀 있어서.”여준휘는 주위를 빙 둘러보더니 피식 웃었다.“요즘 천수당에 손님이 없다던데, 뭐가 그렇게 바빠?”민우는 그 말에 순간 욱해서 다가왔다.“개자식이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 봐!”“얼씨구,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설마 사람 때리게? 천수당은 영업 이렇게 하나?”여준휘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나는 얼른 민우를 막아섰다.“가게에 손님이 없지만 다른 잡다한 일을 처리해야 해서 못 가.”“알았어. 그럼 승호 도련님한테는 그렇게 말할게. 천수당이 너무 바빠서 네가 올 시간이 없다고.”여준휘는 뒷짐을 쥔 채 떠나갔다.여준휘가 떠난 뒤 민우는 끝내 참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젠장. 그냥 잘난 체하러 온 거잖아.”“저 자식들이 다연 식당을 샀으면 우리 여기랑 거리도 가까운데, 앞으로 하루하루가 참 고역이겠어.”민우는 참지 못하고 불평을 늘어놓았다.“이건 진짜 너무하잖아. 맞은편 가게에서 우리 손님 뺏는 것도 모자라 이젠 저 자식들까지 열받게 한다니. 앞으로 장사 어떻게 해?”“이런 풍파도 못 참고 어떡해?”나는 민우를 바라봤다.그러자 민우는 불만 섞인 투로 말했다.“못 차는 게 아니라 우리 이제 개업한 지 며칠 안 됐는데 너무 많은 일이 있으니까, 이렇게 장사 하다간 망할 것 같아.”“그런 말 하면 안 되지. 희망은 우리 스스로 가지는 거야. 우리가 포기하면 가게 정말 망해.”비록 조금 꼰대 같은 말이긴 하지만 사람이 안 좋은 상황에서 이런 말로나마 위로해야 버틸 수 있다.가게가 연달아
음식을 먹고 있던 나는 하마터면 목이 멜 뻔했다.다행히 물을 마셔 겨우 음식을 삼켜버렸다.나는 다급히 고수연을 바라봤다.“지금 장난해요? 저더러 아이들 아빠를 하라고요? 무슨 생각인 거예요?”고수연은 서둘러 설명했다.“제 아이가 아직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거든요. 그런데 이혼해서 아빠의 사랑이 부족하게 클까 봐 그래요. 매일 같이 있어 줄 필요는 없어요. 가끔 가서 아이한테 아빠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면 돼요.”나는 힘껏 손사래를 쳤다.“안 돼요. 절대 안 돼요. 이건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당분간 속일 수 있다고 평생 속일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앞으로 모든 걸 알게 되면 어떻게 설명할 건데요?”“아이가 조금만 더 크면, 사장님이 아이 아빠가 아니라는 거 알려줄 거예요.”“이건 억지잖아요.”고수연은 너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어쩐지 식사 대접까지 하면서 살갑게 군다 했더니 목적이 있어서였다.나는 입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밥은 됐어요. 그건 도와줄 수 없을 것 같네요.”“사장님, 우선 가지 마요.”고수연은 내 손을 잡았다.그 순간 나는 고수연의 손을 뿌리쳤다.“그만해요. 무슨 말을 하든 동의 안 해요.”“알았어요. 아무 말 안 할게요. 식사마저 해요.”나는 의심의 눈초리로 고수연을 바라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수연이 이렇게 쉽게 포기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하지만 고수연은 계속 내 손을 잡아당겼다.“얼른 앉아요. 다른 사람들이 보잖아요.”나도 사람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우리를 보는 게 싫어 결국 다시 자리에 앉았다.하지만 이내 경고를 날렸다.“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앞으로 하지 마요. 안 그러면 지금 하는 일도 계속하지 못하게 될 수 있어요.”고수연은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나도 아이가 심리적으로 안 좋은 영향을 받을까 봐 그래요.”“다른 방법 많아요. 하지만 이 방법은 절대 안 돼요. 그리고 나 어떻게 해볼 생각도 하지 마요.”고수연은 형수 동생이다. 그런데 내가
진용진이 나를 미워하는 건, 내가 전에 형수와 함께 그를 모함했기 때문이고, 고수연을 미워하는 건 아무 이유가 없다.사랑해서 결혼한 부부가 이혼할 때 원수가 되는 경우는 허다하다.고수연과 진용진이 그런 축에 속했다.재판 현장에 나도 따라갔다.진용진은 바람피운 사실을 인정하고 고수연에게 보상해 줄 것도 약속했지만 두 아이 중 한 아이의 양육권을 무조건 가지겠다고 요구했다.고수연이 아무리 발악해 봐도 달리 방법은 없었다. 이건 법률로 규정된 것이니까.“변호사님, 정말 방법이 없나요?”고수연은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그 말에 연재혁은 단호하게 대답했다.“없어요. 인제 그만 싸워요. 의미 없어요.”고수연은 이를 악물고 최후의 결정을 내렸다.결국 고수연은 진용진과 재산을 분할하고 아이도 한 명씩 키우기로 결정 났다.이건 가장 좋은 결과였다.고수연의 권익도 보장했을 뿐만 아니라, 너무 힘들게 살 필요도 없으니까.그리고 진용진이 고아다 보니 일 때문에 아이를 볼 여력이 없는 걸 고려해, 법원에서는 평소 고수연이 아이를 대신 돌봐주라고 판결했다.이렇게 되니 고수연은 자기가 받아야 할 재산도 받고, 아이도 동시에 키울 수 있게 되었다.재판이 끝난 뒤, 고수연은 나에게 4백만 원을 이체했다.“사장님, 이건 전에 빌린 돈이에요.”“힘들 텐데 먼저 써요. 전 급하지 않아요.”“아니에요. 쓸 거 충분해요. 진용진이 그동안 돈을 그렇게 많이 번 줄도 몰랐어요. 이혼하면서 받은 위자료만 해도 몇천만 원이에요.”진용진이 지금 사는 집을 고수연은 갖지 않았지만 모두 현금화해서 계산했다. 때문에 위자료와 집값을 합치면 족히 1억 6천만 원 정도 된다.이건 고수연한테 큰돈이나 다름없다.고수연은 연재혁에게 변호사 비용을 준 뒤 우리에게 식사 대접을 하겠다고 나섰다.“저는 됐어요. 따로 일이 있어 앞으로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요.”“네. 그럼 조심히 살펴 가세요.”연재혁이 떠난 뒤, 고수연은 나를 바라봤다.“사장님, 우리끼리 식사하러 갈까요?”“
윤지은은 끝까지 나한테 관심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지만, 매번 삐지거나 화를 낼 때면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티를 내곤 한다.부잣집 귀한 아가씨라 나처럼 능력도 없고 돈도 없는 남자를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는 게 무엇보다 싫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나만 윤지은의 마음을 알면 그만이다.윤지은은 아직 건드리지 않은 아침을 보며 살짝 망설였다.“그럼 이따 서지예가 와서 물어보면 어떡해?”“지은 씨가 먹은 건 지은 씨 거고, 내가 서지예 씨 걸 실수로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할게요. 그럼 저를 탓하지 지은 씨를 의심하지 못할 거예요.”“그래. 그렇게 해.”윤지은은 그제야 아침을 들어 한입 베어 물었다.“맛없어. 길가에서 산 거야?”“저기요. 입원한 사람이 무슨 음식을 그렇게 가려요?”윤지은은 음식을 가리는 게 아니라 사실은 일부러 반대로 말한 거다.윤지은은 평소 혼자 있을 때 항상 대충 끼니를 때우거나 컵라면을 대충 먹곤 한다.하지만 이번에 입원해 있으면서 내 덕에 오히려 하루 세 끼 꼬박 챙겨 먹었고, 오늘 아침 식사도 사실 맛이 괜찮았다. 다만 윤지은 입에서 맛있다는 말이 나올 리가 없다. 워낙 예쁨 받고 자란 부잣집 아가씨라, 무엇보다 체면을 중요시했으니까.윤지은이 한창 먹고 있을 때 서지예가 들어왔다.“어? 내 아침은 어디 갔지?”나는 쓰레기통을 가리키며 말했다.“죄송해요. 제가 실수로 떨어뜨렸어요. 직접 내려가서 사 먹어요.”서지예는 화가 나서 팔짱을 낀 채 나를 노려봤다.“정수호, 일부러 그랬지?”“이런 걸 왜 일부러 그러겠어요? 정말 실수였어요...”“그럼 아가씨 잘 보살펴. 나 금방 갔다 올 테니까.”서지예는 씩씩거리며 병실을 나섰다.그 순간 눈이 마주친 나와 윤지은은 동시에 웃음이 터져 버렸다.우리의 계획이 성공적으로 먹혀들었다.서지예가 돌아온 뒤 나는 바로 병원을 떠났다. 나도 해야 할 일이 있는 몸이니까.그때 고수연이 법원에 혼자 가기 무섭다며 전화를 걸어왔다.고수연은 가게 직원이기도 하고 형수 동생
“왜 또 이러는데요? 내가 또 지은 씨 심기 건드렸어요?”나는 윤지은 때문에 미쳐버릴 지경이다. 어쩜 사람 기분이 이렇게 변덕스럽고 얼굴이 수시로 변하는지.그때 윤지은이 이상야릇하게 말했다.“넌 잘못한 거 없어. 내가 쓸데없는 희망을 품지 말았어야 했어.”“말 좀 제대로 해줄 수 있어요? 대체 무슨 일인데요? 저 지금 지은 씨 때문에 어지러워요. 내가 뭐 말실수했어요? 아니면 뭐 잘못했어요?”아마 대부분 남자는 나처럼 감정이 둔하고 여자처럼 섬세하지 못할 거다. 때문에 여자가 갑자기 화를 내거나 삐질 때 남자는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그동안 윤지은과 오랫동안 함께 지냈기에 나도 어느 정도 윤지은의 성격을 파악했다. 윤지은은 화를 내지 않을 때는 속내를 알기 쉬운데, 삐지거나 화를 내면 분명 자기만의 이유가 있다. 그것도 대부분 너무 작아서 예상치도 못한 이유.나는 방금 내가 한 행동을 모두 떠올려봤다.내가 서지예와 함께 나가기 전까지 윤지은의 태도는 그나마 좋았다. 그런데 내가 서지예와 얘기하고 돌아오니 윤지은은 이렇게 되었다.‘설마 내가 서지예와 몰래 나가서 얘기해서 삐졌나?’나는 웃으면서 윤지은 옆에 앉았다.“또 질투해요?”윤지은은 단번에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누가 질투했다고 그래? 내가 넌 줄 알아?”“모르죠. 제가 볼 때 지은 씨 분명 질투해요. 서지예 씨를.”나는 일부러 윤지은을 놀려댔다.그러자 윤지은이 나를 홱 쏘아봤다.“자기애가 대단하네! 얼굴이 벽보다 더 두꺼워.”“맞아요. 저 얼굴이 원래 벽보다 더 두꺼워요. 그래서 아무리 쫓아내도 안 갈 거예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사 올게요.”사내대장부는 여자와 싸우지 않는다고, 이렇게 사소한 일에서 윤지은한테 따질 필요는 없었다.윤지은은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보지 않았다.“안 먹어. 앞으로 네가 산 건 다 안 먹어.”“그럼 서지예 씨더러 사 오라고 하고 저는 여기서 지은 씨 돌봐 줄게요.”“네가 돌봐 줄 필요 없다고. 꺼져!”“안 가요. 난 지은 씨
윤지은의 상처는 제때 치료된 편이라 감염의 흔적은 없었다. 때문에 안정을 취하면 그만이었다.“이봐, 잠깐 와 봐. 할 말 있어.”서지예는 나를 병실 밖으로 불러냈다.한편 윤지은은 내가 오자마자 서지예에게 불러 나가자 기분이 언짢았다.다만 나는 그것도 모르고 서지예를 따라 나갔다.“무슨 일이죠?”“내가 아빠한테 얘기했어. 아빠가 오늘 오후 우리 언니를 강북에 데려온대.”“아, 그럼 도착하면 우리 한의관으로 와요.”나는 덤덤하게 말했다.그러자 서지예가 미간을 팍 구겼다.“우리 언니가 협조를 안 해. 우리 아빠가 이쪽에 별장 하나 빌렸거든, 그래서 그동안 수호 씨더러 그 별장에서 우리 언니 치료했으면 해.”“우리 미리 말했잖아요. 그쪽 언니를 우리 한의관에 불러서 치료받게 하자고.”나는 무엇보다 서씨 가문 사람과 비밀리에 접촉해 불필요한 번거로움을 더하고 싶지 않았다.전에 서지예는 분명 약속했으면서 이제 와서 변덕을 부리고 있었다.서지예는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나도 약속 지키고 싶었는데 우리 언니 상황 알잖아. 언니가 사람 만나는 걸 거부해. 우리 언니가 환자인 걸 봐서 사정 좀 봐줘.”내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자 서지예는 명함 한 장을 건네며 말했다.“이 사람은 강북 서화계의 거장이야. 아래에 제자들도 많고. 오랫동안 허리로 고생했는데, 만약 이분 눈에 들면 강북 전체 서화계 쪽 유명 인사들이 수호 씨 고객이 될 거야.”서지예는 나를 잘 안다는 듯 너무나도 달콤한 제의를 해 거절할 수 없었다.나는 명함을 받으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때 서지예가 손을 피하며 생글생글 웃었다.“우선 내 요구부터 응해. 내 요구에 응하면 명함 줄게.”나는 너무 어이없었다.“다른 선택지가 있어요? 언니가 오면 위치 보내줘요.”“좋아. 약속한 거야.”서지예는 곧바로 나에게 명함을 건넸다.명함을 확인해 보니 위에 연상철이라고 적혀 있었다.“또 연씨네?”연승호도 연씨고, 연재혁도 연씨인데, 또 연상철이라니?‘설마 이 세 사람이 무슨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