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릉은 우문호의 말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너 모비(母妃)를 뵈면 어떻게 해?”“문안인사를 드리지.”“그리고 또?”“다른 거 없는데? 모비께서는 다 가지고 있으니, 난 그저 인사만 드려.”우문호가 머리를 긁적였다.“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환심? 태자 자리를 오르려면 환심을 사야겠지. 내 생각엔 안부인사를 제외하고는 뭐든 과한 것 같아. 그런 가식은 불필요해.”원경릉은 그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 현비는 우문호를 태자로 만드려고 혈안이 돼있다. 그녀는 은근 우문호에게 미안했다. 다른 친왕의 부인들은 집안이 좋아서 친왕들에게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데, 정후부는 그럴 힘도 돈도 없기 때문이다. “날 잡고 입궁해서 부황과 장기도 두고 술도 마시고 곁에 있어드려. 그게 가장 큰 효도야.” 원경릉이 말했다.“그럼 부황께서는 내가 당신 비위를 맞춘다고 생각하겠지.” 우문호가 한숨을 내쉬었다.“그가 뭐라고 생각하든 네가 해야 할 일만 하면 돼! 만약에 네 아들이 너랑 데면데면하고 관계가 소원해진다면 넌 기분이 어떻겠어?” 원경릉이 발끝으로 우문호를 한 번 찼다.“아들은 그러든지 말든지 상관없는데, 딸은 절대 그럼 안 돼.”“참 나.”“경릉아, 나 결심했어. 우리는 세 딸을 낳는 거야. 아들들은 말썽만 피우고 크면 야심이 커서 무슨 사건을 일으킬 줄 몰라.”“그걸 네가 결심해서 뭐 해?” 원경릉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우문호의 시큰둥한 반응에 우문호가 툴툴거렸다. “세 명이니까 공주가 하나쯤은 있겠지.”“물론 그럴 수 있지. 근데 남아 3명 또는 여아 3명일 가능성이 훨씬 높아.”“남자, 여자가 섞일 수는 없는 거야?” 우문호의 눈이 동그래졌다.“그럴 가능성도 있긴 한데 지극히 적어.”“남자 셋이면 정말 눈물 날 것 같은데…… 공주 하나는 있어야지!”“우리가 이렇게 논해도 소용없어. 성별은 이미 정해졌어.”원경릉의 말에 우문호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 아이를 내가 결정하지! 누가 결정해
기왕은 감옥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이 모든 것이 우문호의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전에 기왕부에서 우문호와 싸움이 일어났을 때, 자신이 기왕부 부병을 동원해 그를 공격했던 것에 앙심을 품고 자신을 모함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심문을 하는 관리가 기왕부에서 일어난 싸움에 대해 묻자 그는 끝까지 함구하다가 우문호와 의견충돌이 있었다고 말했다. 명원제는 계속해서 심문을 하라고 했고 관리들은 더 이상 심문할 내용이 없어 난감해했다.‘단죄하든지 처벌하든지 해야 하는데…….’명원제도 계속 심문하라고 지시했지만, 그 역시도 기왕을 더 어떻게 심문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머릿속으로 어떻게 이 사건을 처리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고, 시간을 조금 더 가지고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리하여 기왕은 감옥에 다시 갇혔다.기왕은 중죄를 저지른 죄인이었지만 면회가 제한되지는 않았다. 그는 면회 소식만 기다리며 줄곧 주명양이 오길 바랐다. 주수보가 몇 마디 해주는 게 다른 사람이 백 마디 하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주명양은 오지 않았다. 감옥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는 조바심이 났다. 예전에는 무슨일이 생겨도 밖에서 자신을 빼내줄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왕의 심복과 외가를 제외하고는 기왕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초엿새날, 기왕의 모친인 진비(秦妃)와 기왕비가 기왕의 면회를 왔다. 진비는 그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멍청한 것! 왜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야! 부황께서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기왕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모비, 소자 참으로 억울합니다. 소자를 믿어주십시오. 범인은 제가 아닙니다! 모비께서 부황께 잘 말씀드려 주세요.”라고 말했다.“본궁이 부황께 부탁을 해봤자 소용없어! 기왕비가 본궁에게 말하길 네가 했다는 것을 증명할 증인도 있다고 하더라! 네가 한 것이 확실해졌다고! 너는 부황이 어떤 처벌을 내려도 할 말이 없다는 말이야!”모친의 말에 기왕은 충격을 받았다. “그럼 주수보를 부를까요
“그럼 저는 밖에서 모비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말을 마친 기왕비가 기왕을 쳐다보지도 않고 휙- 밖으로 나갔다. 기왕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한없이 바라보았다.‘가라고 했다고 진짜 간다고?’눈물을 흘리던 진비도 기왕비의 매몰찬 태도에 기왕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지금 저거 제정신이 아닌 게지?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쌩 나가버린다고?”기왕은 주명양과 짜고 기왕비를 폐비시키려고 했다는 사실을 진비에게 말하지 못했다.“명양이가 입궁한 이후로 기왕비가 좀 이상합니다.”“너는 후궁 주명양은 애지중지 여기면서 정비는 왜 푸대접을 한 거야? 그건 왕부가 망하는 길이다. 절대 그러면 안 돼. 넌 지금 동씨 집안의 힘이 필요하다고!” 진비는 인상을 쓰며 그를 보았다.“언제 적 동가(佟家)입니까?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습니다. 동씨 집안도 부황에게 푸대접을 받고 있다고 하던데요?” 기왕이 말했다.“넌 참 근시안적이구나! 동씨 집안사람들이 궁 안에 얼마나 많은데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리고 동씨 집안은 태생부터 돈이 많다고! 넌 기왕비를 잘 달래 보거라. 그리고 기왕비의 큰 오빠인 동안(佟安)이 얼마나 많은 공을 세웠는지 너도 잘 알지 않느냐? 부황께서 시국이 이러니 동안을 냉대하겠지만 그의 능력은 높게 사고 계셔.”진비의 말을 들은 기왕이 창백한 얼굴로 우물쭈물했다.“그럼 모비께서 기왕비를 좀 설득해 주세요. 동씨 집안사람들 중에 조정에서 일하는 관리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상소문을 써달라고 해주세요.”“이래서 집에 여자가 잘 들어와야 한다니까? 후궁이 들어오자마자 그 계집에게 눈이 돌아서 정비를 홀대하다니…… 옥에 있는 동안 잘 생각해 봐. 네가 온전히 네 힘으로 기왕부를 이끌었는지 말이야. 기왕비가 없었으면 넌 그저 황제의 큰 아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것이야.”모비의 말을 듣기 싫었던 기왕은 인상을 썼다. “모비께서는 소자를 참 우습게 보십니다. 그럼 제가 여자 치마폭에 쌓여있기라도
기왕비는 진비의 말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모비, 그건 불가능합니다. 오라버니께서 기왕부의 일은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그게 무슨 뜻이냐? 기왕부의 일을 관여하지 않겠다니? 혹시 네 오빠가 조정에서 줄을 갈아탄 것이냐? 설마 새로 줄을 탄 것이야?” 진비의 눈빛이 싸늘했다.“모비, 그 말씀은 좀 이상하네요. 오라버니는 줄곧 황상을 모셨습니다. 모비의 뜻은 제 오라버니가 조정을 배반하고 외세와 결탁했다는 뜻입니까?”“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네 남편이 감옥에 있으니 어떻게 해서든 그를 빼내!” 진비가 분노했다.기왕비는 마차 밖을 보며 “며느리가 최선은 다해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그 말을 듣고 진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노력은 해보겠으나 기왕을 빼줄 수 있을 만한 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모르겠네요.’진비는 기왕비의 속내를 모른 채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했다.“너처럼 머리가 좋은 사람이 기왕의 억울함을 모를 리 없지 않느냐. 이 일은 우문호가 기왕을 모함하려고 판을 짠 거야. 사람을 시켜 우문호가 했다는 증거만 찾는다면 기왕은 혐의를 벗을 수 있을 거야.” “모함을 당했건, 정말 기왕이 저질렀건 모두 중요하지 않습니다. 현장에서 잡은 두 자객 모두 기왕의 사주를 받았다고 자백했고, 그들이 쓴 휘어진 칼도 기왕부 것이 맞습니다. 만일 자객의 진정한 배후가 기왕을 모함하려고 했다면, 아주 철저하게 준비했을 겁니다. 지금 상황에선 기왕이 결백을 주장해도 믿어줄 사람 하나 없을 겁니다.”“그럼 어떻게 하냐고! 설마 황상께서 기왕을 처리해 버리기 위해 일부러 이런다는 거야?”“음…… 폐하께서는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생각 중이실 겁니다. 이때 누구든 이 이야기를 꺼내면 판단하는 데 해가 될 겁니다.”“어째서 해가 된다는 거야?”기왕비는 진비를 비웃었다.“모비께서는 제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범인이 기왕이라는 증거가 확실한데 그가 어찌 빠져나오겠습니까?”“……”기왕비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
진비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면 앞으로 아들을 낳을 수도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북당을 빼앗기게 될 텐데.’진비는 기왕비의 말을 애써 무시했다. 기왕비는 전부터 누군가에게 기왕의 오랜 비밀을 발설하고 나면 속이 시원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이의 치부를 발설하고 나니 예상과 반대로 마음에 돌덩이라 들어앉은 듯 무거웠다. 하지만 기왕비는 기왕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진 지 오래이기에 돌덩이 같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녀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딸이었다. 만약 기왕이 중죄인으로 처벌을 받게 된다면 딸마저도 죄인의 딸로 낙인이 찍히게 된다. 마음 같아서는 기왕이 죽든 살든 관여하고 싶지 않았지만, 딸 때문이라도 처벌은 막아야 했다. *제왕의 상태는 점점 나아졌지만 상처 부위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보름 넘게 밖에 나가지 못했다.원용의는 제왕 곁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수발을 들었다. 제왕은 그런 원용의에게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불편했다. 제왕은 수차례 어의의 진료를 받았다.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이 아프다고 거짓말한 것을 혹시 원용의가 알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사실 원용의도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를 모른척했다. 날이 갈수록 제왕은 더 불안해졌다. 결국 제왕은 용기를 내어 원용의에게 마음을 털어놓았다.“용의야, 본왕이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여기 앉아서 내 말을 듣거라.”제왕은 그녀가 준비해 온 약을 마시며 원용의를 바라보았다.원용의는 침상 옆에 앉아 의아한 표정으로 제왕을 보았다.제왕은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 죄책감이 물밀듯 밀려왔다.“본왕이 병을 앓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던 건 너를 속이기 위한 것이지만,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어.”“저를 속이려고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설마…… 내가 널 속인 거 몰랐니?” 제왕은 깜짝 놀랐다.“몰랐는데……” 원용의가 쏟아지는 눈물을 참아
제왕은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감정에 눈물이 흘렀다. ‘이래서 주수보가 하루 만에 백발이 되었구나……’늘 있던 사람이 곁에 없자 제왕의 마음은 괴로웠다.*다음날 아침. 잠깐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억겁의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제왕이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눈을 뜨자 어떤 여인이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밤새 잠을 잘 못 잔 그는 눈앞이 뿌옇게 보였다. 정신이 몽롱하니 제왕은 자신이 꿈을 꾸는 건가 싶었다.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이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구나 깨달았다. “잘 잤습니까?”그녀의 한 마디에 그의 코끝은 시큰해졌고, 눈물이 터질 뻔했다.원용의는 따끈따끈한 죽을 침상 옆 탁자에 놓고 “왜 울려고 그래요? 어디 아픕니까?”라고 물었다.“왜 여기 있어? 친정에 갔다고 하던데……”그의 목소리는 하루사이에 많이 쉬어있었고 눈에는 눈물이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조모님 생신이라 어제 오후에 갔다가 밤늦게 돌아왔습니다. 그나저나 이것 보십시오! 조모께서 저랑 제왕에게 선물을 준비해 주셨다니까요? 이게 당신 겁니다!”그녀는 싱그럽게 웃으며 소매주머니에서 복주머니를 꺼내 그 안에 손을 넣어 기다란 금괴를 꺼냈다.“조모님의 생신이라고? 그걸 내가 왜 몰랐지?” 제왕은 눈을 비볐다.“다치고 경황이 없었잖아요. 저도 깜빡했다가 어제서야 생각이 났습니다. 죽만 준비하고는 금방 또 가봐야 합니다.”원용의는 죽을 후후 불어서 제왕에게 줬다. “참, 방금 상궁이 그러던데, 어젯밤에 탕약도 안 마셨다면서요? 왜 그랬어요?”“그건…… 상궁이 약과를 준비해주지 않아서 안 마셨어.”“은근히 까다롭다니까?” 원용의가 웃으며 그에게 죽을 먹였다. 제왕은 두어 술 먹고는 그녀를 조심스레 쳐다보았다.“난 네가 친정으로 갔다길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어.”“왜 그렇게 생각했죠? 제 물건들이 아직 여기 있는데 제가 돌아오지 않을 수 있겠어요?”“전에 나를 떠나서 여기저기 여행하며 살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제왕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
제왕의 시간은 자객의 습격을 받았을 때에서 멈춘 것 같았다. 기왕이 범인이라는 모든 증거물을 제출하였으나 그는 아직 처벌받지 않았고 명원제 쪽에서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수사에는 진전이 없는 듯했고, 자객 검거에 힘을 쓰지 못했다며 우문호는 또 면직을 당했다. 두 번의 면직에 우문호는 조정에 웃음거리가 되었다. 짓궂은 사람들은 우문호를 보고 복직 후 최단 면직 기록을 세웠다며 조롱하기도 했다. 임신한 부인도 지키지 못하고 안왕에게 구박을 받다 못해 두 번째 면직이라는 수치를 겪다니.그런 말들은 쉬이 당사자의 귀에 흘러들어 갔다. 우문호는 하도 욕을 먹어서 자신이 장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그의 실직은 원경릉에게 행복이었다. 원경릉은 속으로 명원제가 우문호의 안전을 위해 일부러 그를 면직시킨 게 아닌가 생각했다. 출산까지 두세 달 남은 순간 매일 우문호와 붙어있을 생각에 그녀는 너무나도 행복했다.*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벌써 2월 중순이 되었다. 조어의는 원경릉에게 누워만 있어야 한다고 당부했고, 그 때문에 원경릉은 방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최대인이 소개해준 산파는 이미 경중에 도착했고, 그들은 왕비 뱃속의 아이가 셋이라는 말을 듣고 기함을 토했다. 탕양은 산파들에게 궁중에서 대기하라고 했으며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니 각종 상황에 대비할 수 있도록 대응방법을 가르쳤다.원경릉은 우문호를 불러 왕부 안에 수술실을 만들어놓았다.수술실 안에 밤에도 빛을 낼 수 있는 야광주(夜光珠)를 4개 박아 두고, 외부 공기가 쉽게 통하지 못하도록 공기가 통하는 구멍은 4개만 뚫었다. 원경릉은 수술실이 완성되는 동안 수술침대, 들것, 휠체어, 아기 침대, 유모차 등 직접 도면을 그려 기술 관리에게 만들도록 했다.모든 것이 순리대로 준비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원경릉은 최악의 상황을 그렸다. 아이가 달을 다 못 채우고 나올 경우. 그녀는 첫 출산이고, 세 쌍둥이이기에 조산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태어난 아이들이 저체중일 가능성이 높은데, 산파들이 아이를
다시 말해서 그날 제왕과 원경릉의 암살 작전은 소규모 집단의 행동이 아니라 사전에 계획된 행동이었다.만약 금군과 부병의 도움이 없었다면 제왕과 원경릉은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이를 알고 있음에도 명원제는 여전히 아무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친왕들도 조정의 신하들도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기왕은 옥중에서 만언서를 써서 명원제에게 올렸다. 하지만 그 만언서(萬言書)는 명원제의 심기를 건드렸고 그는 만언서를 갈기갈기 찢으며 “개소리를 열심히도 적어놨네.”라고 말했다.진비는 그 사실을 알고 두려움에 떨었고 그 길로 곧장 기왕비를 보러 갔다.“이게 다 너 때문이야! 무슨 생각으로 만언서를 쓰라고 해서 황상을 분노하게 만든 게냐!”기왕은 한 달 동안 옥에 갇혀있었고, 만언서를 쓰기에는 돌아가는 정세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부황께서 화가 나셨나요? 제가 의도하던 바입니다.”기왕비가 대답했다.“의도했다고? 황상을 실망시킨 게 네 의도였다고? 넌 기왕을 사지로 몰아넣을 셈이야?”“모비, 부황께서 기왕에게 실망을 해야 기왕이 풀려날 수 있습니다. 만언서 내용을 보고 부황께서는 기왕의 머리로는 절대 제왕과 초왕비를 해칠 계획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아셨겠죠.”기왕비의 말을 듣고 진비가 가만히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비는 진비를 안심시킨 후 초왕부로 가서 원경릉을 만났다.*초왕부.우문호는 아침 일찍부터 주지스님을 마중하기 위해 나갔다. 그는 원경릉이 왜 주지스님을 만나려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최대한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리 않으려고 그녀의 말에 토 달지 않고 순순히 따랐다.‘내가 아이를 낳아봤어야 알지…… 내가 모르는 일이니 경릉이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우문호는 원경릉의 안정을 위해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일언반구 말이 없었다.그래서 기왕비가 때가 되면 원경릉을 찾아와 바깥 소식을 전해주는 역할을 했다.초왕부에 도착한 기왕비는 원경릉에게 인사 몇 마디를 건네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
아이들이 없는 황궁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해졌다. 계란이마저 울적해 보이는 게, 전에는 매일 오빠들이 와서 서로 안아주려고 난리였는데, 이제 아침부터 밤까지 그들이 보이지 않으니 종일 시무룩해져 있었다.아빠가 안아주는 게 좋긴 했지만 그는 종일 조정 일로 바쁜탓에 자기 전에 겨우 와서 안고 놀아주는 거라 이전과 비교가 됐다. 계란이 뿐 아니라 눈 늑대와 호랑이도 심심해서 꼬마 주인들 방 복도에 엎드려 이리 뒹굴 저리 뒹굴하며 나가 놀지도 않는 게, 계속 이런 식이면 다들 기분이 축 처져 안 되겠다 싶었다.원경릉은 친목 이벤트를 기획해 각 집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궁으로 놀러 오라고 하자, 친왕들이 알았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입궐해 궁중은 다시 시끌벅적해졌으나 우문호는 오히려 전부 다른 사람 아이란 생각에 거의 울 뻔했다.하지만 계란이는 이렇게 많은 아이를 보자 기분이 좋아졌고, 늙은 아빠 우문호도 따라서 즐거워했다. 우문호는 계란이가 종일 시무룩하게 있을까 봐 걱정이 들었다.딸이 좋으면 우문호도 뭐든 다 좋았다.천행이의 백일이 되자 보상의 의미로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천행이는 이제 할머니도 있는 몸이니 할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게 도리다.잔치는 굉장히 성대했다. 이리 나리는 은자를 조금도 아끼지 않았다. 천금으로 아내와 엄마를 즐겁게 할 수 있다면야.백일 잔치에 모두가 아주 기쁜 마음으로 참석했다. 마지막에 손님들이 식사를 마치고 간 뒤 같이 둘러앉아 술을 홀짝일 때 약간의 에피소드가 터지며 다들 웃기며 슬픈 상황에 부닥치고 말았다. 숙왕부 어르신이 그릇을 가져와서 음식을 싸서 온 것이었다. 사실 지금 숙왕부는 전혀 궁색해 보이지 않았지만, 수십 년간 몸에 밴 습관이 무서운 게 음식 낭비를 두고 보지 못하는 것이었다.전에 원경릉은 이리 나리 일이 해결된 뒤 안풍 친왕 부부가 떠날 줄 알았는데, 백일 잔치까지 가지 않고 있길래 개인적으로 안풍 친왕비에게 물었다. 그러자, “전엔 돌아가고 싶었지, 꿈에라도 간절히 돌아가고 싶었어. 하지만 돌아간
게다가 엄마, 아빠, 휘종제 일행이 모두 여기 있어 안심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제일 큰 문제는 바로 떼어놓지 못하는 아쉬움이었다.특히 우문호는 계란이를 손바닥 위에 보석처럼 대해서 하루도 떨어져 있지를 못하는데 몇 년씩이나 떨어져야 있으면, 가끔 올 수 있다고 해도 곁에 두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으니, 원경릉이 돌아가서 얘기하면 우문호가 울부짖을 게 불 보듯 훤했다.원경릉은 마침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북당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밟았다.서일은 경호에서 며칠을 기다리다가 황후가 물건을 가져오는 것을 보고 감동받았다.원경릉이 트렁크를 서일에게 주고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필요하다고 한 건 다 사 왔으니까. 가져가서 처자식이나 기쁘게 해 줘.”“황후 마마는 역시 세상에서 제일 좋은 분이세요!” 서일은 사람을 칭찬하는 어휘가 한정적이지만 최대한의 감사와 감격을 담아 표현했다.“사식이랑 아이를 이렇게 끔찍하게 챙기다니 의왼데.” 원경릉이 엷은 미소를 띠고 농담했다. 이 멍청이는 정말이지 사람 마음을 잘 아는 좋은 남자다.궁으로 돌아오니 이미 밤이 되었다. 우문호는 아마 오늘쯤 원경릉이 돌아올 거라고 예상해서 서둘러 일을 끝내고 소월궁으로 돌아와서 그녀를 기다렸다. 저녁 수라를 들고 나자, 짧은 이별은 신혼보다 짜릿해서 격렬한 사랑을 나눈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우문호가 뒤에서 원경릉을 끌어안고 침대에서 아이들의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물어보자, 원경릉이 뭔가 감추면서 아이들이 엄마와 헤어지며 아주 아쉬워했고 특히 아빠랑 헤어지기 아쉬워해서 방학하면 바로 아빠 보러 돌아온다 말했다고만 전해주었다. 선의의 거짓말을 해 우문호를 기쁘게 해주는 것으로 마무리 했다. “역시 아낀 보람이 있네!”“애들이…. 철 들었어.” 원경릉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머릿속으로는 아이들이 엄마 아빠의 간섭에서 벗어나 맘대로 난장판을 치는 영상이 떠올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양심이라고는 없는 녀석들.우문호가 말했다. “눈앞에 닥친 일을 마치면… 얼추 며칠은 갈
현대로 돌아가 가족과 한자리에 모이니 모두 즐거워 보였다. 원경릉은 집안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뒤, 아이들을 데리고 휘종제와 건종 태자를 알현하러 갔다.휘종제와 건종 태자도 매우 기뻐했는데, 특히 아이들이 유학하러 와서 앞으로 여기서 산다는 얘기에, 휘종제는 너무 좋아서 펄쩍펄쩍 뛰며 앞으로 아이들에게 드는 모든 비용은 전부 자기들이 대고 방학에 북당으로 보내고, 개학 때 맞이하는 것도 자기들이 하겠다고 큰소리쳤다. 외갓집엔 모두 출근하는 분들 뿐이라 불편할 거라는 것이었다.원경릉은 일단 감사드리고 북당에서 가져온 술과 검, 궁에서 가져온 흙 한 줌과 돌 하나를 꺼내놓았다. 이건 우문호가 준비한 것으로 고향을 오래 떠나 있는 사람은 고향의 흙과 돌이 그리운 법이라고 했다.휘종제와 건종 태자가 흙과 돌을 보더니 손에 들곤 통곡하기 시작했다.원경릉이 두 사람을 위로한 뒤, 그들은 슬퍼하며 ‘언제 한 번 가볼까, 딱 한 번 보더라도, 아무도 만날 수 없어도 좋을 텐데.’라고 한탄했다.“긴 세월 고향 강산을 꿈에도 잊지 못했으나 돌아갈 수는 없었네..”원경릉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가슴이 시큰해졌다. 휘종제와 건종 태자의 슬픔을 원경릉은 아주 잘 아는 것이 자신도 전에 이방인이었기 때문이었다.단지 그들이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 원경릉도 뭐라고 단정내리기 어려웠다. 어쨌든 이건 안풍 친왕이 진행한 일로 정말 돌아가고 싶으면 아마도 안풍 친왕이 준비해 줄 수 있었다. 북당으로 돌아가면 안풍 친왕에게 상황을 봐서 물어봐야겠다고 결심했다.입학 준비를 마친 뒤, 원경릉은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아이들과 떨어지기 싫었지만, 아이들은 새로운 생활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가 충만했기에 그녀와 헤어지는 걸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원경릉은 그 점이 씁쓸했다.아이들이 크면 놔줘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얘들은 아직 다 안 컸잖아.돌아가기 전에 원경릉은 양여혜에게 만나자고 했는데 양여혜가 기화를 데리고 올 줄 몰랐다.원경릉은 기화를 보자 머리가 아픈 게, 기화는 또
‘이제 어머니가 계시니 술 먹으면 몸 상한다고 말해? 예전에는 왜 말 안 했어?’다행히 누군가 같이 마셔주는 사람이 있었다. 회왕은 벼슬에 오른 뒤로 술을 조금 하기 시작했는데, 많이는 안 마시고 한두 잔만 마실뿐, 석 잔째면 아내를 보러 집에 갔다.즐겁게 박원과 소홍천을 보낸 우문호와 원경릉은 만두와 아이들을 유학 보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비록 환타와 칠성이는 아직 어려서 2년 정도 더 남아있었지만, 유치원 다니고 싶다고 소리를 지르며,형들이랑 꼭 같이 가겠다고 하도 고집을 부려 원경릉과 우문호는 골치가 아파졌다.그나마 우문호에게 약간 위로가 된 건 딸만큼은 곁에 있다는 사실로, 칠성이와 환타가 하도 졸라대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가가가, 다 가.”아이들은 기뻐했으나 눈 늑대와 호랑이도 여전히 성깔을 부리며 따라가겠다며 소란을 피웠다.현대에서 어떻게 호랑이와 눈 늑대를 키울 수가 없으니 미칠 노릇이였다. 게다가 이 동물들은 아주 영민해서 사람 일을 이해해, 꼬마 주인들이 이번에 가면 열흘 보름이 아니라 몇 년 있다가 온다는 걸 알고 아무리 혼을 내도 말을 안 들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만두가 이리저리 구슬려서, 동물들에게 자기들에겐 여름방학, 겨울 방학이 있고 학기 중에도 쉬는 날이 있어서 1년에 합치면 적어도 4개월은 이쪽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 적어도 1년에 절반 가까이는 같이 있는 거라고 위로하자 겨우 잠잠해졌다. 비록 시공간은 떨어져 있어도 같이 자라기를 원할 것이다. 유학을 가는 일이기 때문에 원경릉이 직접 따라가서 진학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이 일은 전에 현대에서 언급한 적이 있어, 로양이 아이들에게 호적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물론 아이들을 호적에 올리려면 원경릉 부부도 호적에 올려야 하는 것이, 아이들을 오빠 이름 아래 입적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이 일은 로양이 원만하게 처리해 원경릉 가족 모두 호적을 가지게 되었다.게다가 원래 집을 사뒀기 때문에, 부근 학군에 진학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원경릉은 다섯
대오가 경성으로 돌아올 때 홍엽도 원숭이와 같이 돌아왔는데, 그도 풍도성에서 힘을 보탰다. 사실 홍엽이 안 가도 안풍 친왕이 모든 걸 다 준비해 둬서, 안풍 친왕 능력이면 안지여 정도 상대하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이리 나리 일행은 경성에 도착해, 우선 집으로 돌아가 공주와 천행이를 보고 가족이 함께 밥을 먹은 뒤 입궁해서 경과를 보고했다.사적인 원한은 한두 마디로,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은 지금 받아야 할 벌을 받고 있으며 아직 죽이지 않았다고 했다남은 건 정사를 논하는 것이었다.“어머니와 같이 풍도성에서 보름 정도 지내며 기본적인 민심을 파악했는데, 천문 세가는 백성들 사이에서 아직 명망이 높아 보입니다. 풍도성 백성들은 사실 세금이 너무 많고 경제가 번영한 성과가 전부 안지여 수중에 떨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어 안지여의 통치에 불만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정에서 풍도성을 접수한 것에 백성들 대부분은 찬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천하태평이냐 하면 그럴 순 없는 것이, 일부는 성주가 자기들의 황제라 여기고, 조정이 풍도성을 접수한 것이 풍도성이 침략당했다고 여겨 나중에 약간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부를 임명하실 때 신중하셔야 할 것입니다.”우문호가 말했다. “흠, 큰할아버지께서 천거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박원이라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그러자 이리 나리의 눈빛이 빛났다. “제 아버지가 추천한 사람이니 전 찬성입니다!”“아버지?” 우문호가 의아해하며 이리 나리를 쳐다봤다. ‘안풍 친왕비가 사부님이면 안풍 친왕은 사부의 남편 아닌가? 어떻게 아버지가 되지? 사부님의 배우자니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게 더 맞지 않나?’“흠, 안풍 친왕은 제 아버지십니다!” 이리 나리는 더 설명할 생각이 없는지 어쨌든 그렇다고 주장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그를 아버지라 부른 적 없지만, 마음속에서만큼은 진정한 아버지였다.“하하하!” 우문호도 그저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다.이리 나리가 퇴청할 때 우문호가 이리 나리를 부르자 고개를 돌렸다. “무
“우선 박원이랑 소홍천 의사부터 물어보자. 억지로 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동안 그들이 날 많이 도와줬으니 전부 원하는 대로 하자고.” 우문호가 말했다.“그러자!” 원경릉이 일어서며 말했다. “오늘 저녁 애들 데리고 어머님께 가서 수라를 들려면 빨리움직여야 해. 꾸물대면 늦을거야.”그러자 우문호도 계란이를 안고 일어섰다. “그래, 우리 황조모한테 가서 맘마 먹자.”우문호가 나가서 부르자 아이들이 달려와, 같이 왁자지껄하게 수라를 들러 황태후 전으로 갔다.황태후는 원래 우문호에게 할 말이 있었지만, 식사 자리에 아이들이 있어서 기다렸다가 저녁을 다 먹은 뒤 우문호와 아이들이 나가서 놀고, 원경릉이 황태후와 얘기를 나눌 때 말을 꺼냈다.“천행이가 태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부마를 풍도성으로 보낼 수가 있지.. 공주가 얼마나 괴로웠을까.”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공주는 사정을 훤히 알고 있어서, 이리 나리께서 풍도성에 가는 걸 지지하셨는걸요.”“말은 그렇게 해도, 출산 후에 여자 곁엔 남편이 있어야 하는 법이야. 하지만 이것도 단지 우리 가족끼리 하는 얘기일 뿐이고, 조정 일을 내가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는 노릇이지.”황태후는 이리 나리가 풍도성으로 간 진정한 목적을 전혀 몰랐으며, 단순히 어지러운 형국을 정리하러 갔다고만 알았기 때문에 순수하게 공주를 아끼는 마음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어마마마, 걱정하지 마세요. 이리 나리는 이미 돌아오는 중이래요.” 원경릉이 위로하자 황태후가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거 잘됐네!”온 가족이 별빛을 받으며 천천히 소월궁을 거닐었다.계란이는 아빠 품에서 잠이 들었고, 아이들은 놀다 지쳐서 아빠 엄마를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으며, 목여 태감이 궁인 둘을 데리고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는 가운데, 궁 안은 인적이 드물어 밤이 되자 상당히 고요했다.“어마마마께서 공주를 아끼셔서, 이리 나리가 하필 이때 풍도성에 보냈냐고 하셨어.” 원경릉이 말했다.“날 원망하셨어?” 우문호는 품에 있는 아이가 깰
늑대파 사람이 안지여와 소여쌍을 질질 끌고 나가는데, 소여쌍은 여전히 미친사람처럼 웃어대기만 했다.이리봉청은 그들이 끌려 나가는 것을 보자, 눈앞에 안지여가 자신을 데리고 소여쌍의 침대 앞으로 가서 소여쌍의 그 악랄한 말을 듣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여리여리하고 아름답던 그녀가 이렇게 변해 버린 게 꿈처럼 느껴졌다.풍도성을 접수한 뒤 안풍 친왕은 관리들을 새롭게 임명했고, 더 이상 성주 같은 것을 두지 않고 조정과 이부에 적합한 인사를 선발해 풍도성 지부로 앉힐 것을 요청했다. 풍도성은 더 이상 이전의 독립 자치 지역이 아닌, 다른 주나 현과 마찬가지로 조정에 귀속되어 통일서 있게 다스리게 되었다.더불어 안풍 친왕은 별도로 서신을 써서 황제인 우문호에게 보냈는데, 풍도성을 추천하지만, 이건어디까지나 건의와 추천이니 황제가 생각하는 마땅한 사람이 있으면 안풍 친왕의 추천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동시에 안지여의 잔당들이 계속 나타났다.안풍 친왕이 이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려오고, 호랑이와 눈 늑대, 회색 늑대까지 출동시킨 건 바로 모든 세력을 강화하고, 신속하게 진압해 풍도성을 조정에 복귀시키고 보름 만에 비적을 토벌하며 기본적인 숙청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박원은 잔당의 남은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안풍 친왕의 영패를 가지고 부근에 5천 명의 군사를 파견시켜 풍도성을 지켰다. 이리 나리는 자금을 지원해 천문 세가의 묘를 이장하였는데, 이전 무덤은 안지여가 고른 곳으로 폐허에 가까워, 그는 천문 세가 사람들이 그런 곳에서 안식을 취하기를 원하지 않았다.풍도성에 온지 거의 한 달가량 될 때쯤, 대군은 경성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돌아가기 전에 미색이 안지여와 소여쌍을 보러 갔다가, 돼지우리에서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사는 것을 보고 그제야 비로소 맺혀 있던 한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미색은 이리 나리와 어머님에게 알리지 않은 것이, 두 사람은 이미 안지여가 누군지 잊은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리봉청에게 있어 모든 건 지나가지 않았고, 36년 전 일은 여전히 어제 일 같이 느껴졌다.“어머니, 그를 어떻게 처분하시겠어요?” 이리 나리는 이리봉청의 마음을 넘겨짚을 수 없어 함께 걷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생각은 어떠니?” 이리봉청이 다시 되묻자 이리 나리가 원한에 사무친 눈빛으로 말했다. “제게 처분하라고 하면 전 그를 죽여 버릴 겁니다.”이리봉청은 알았다며 대답만 했다가, 다시 30분쯤 걷다가 정자에 앉아 을 때 말을 덧붙였다. “난 안 죽일 거야.”이리 나리가 약간 놀라서 물었다. “어머니, 또 마음이 약해지신 겁니까?”이리봉청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반대야. 그 인간을 죽이는 게 마음이 약해진 거지. 사실 며칠 동안 이전의 원한을 내려놓을 수 있을지 생각해 봤는데,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 인간을 백번이라도 죽이겠지만, 난 그럴 수 없더구나. 아들아, 게다가 오늘 천문 세가 대문을 들어서는 그 순간, 더욱 마음을 굳혔단다.”이리봉청이 일어나 집안을 둘러봤다. 이곳은 그녀의 가족들이 살아 원래 온통 사람 소리로 가득한 곳이였다. 그들의 웃던 광경이 눈앞에 비치는가 하더니, 눈 깜박할 사이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천문 세가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없는데 멸문지화를 당했고, 가엾게도 그 중엔 아이들이 많아서 제일 어린아이는 이제 태어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었다.이리봉청의 얼굴에 눈물이 타고 흐르며 가슴이 미어졌다. “그자와 소여쌍을 밖에 내버리고 사람을 시켜 지켜보도록 해. 죽게 두지 말고 계속 살려둬. 36년은 더 살면서 이 세상의 고생을 모두 겪어야, 내 마음에 맺힌 한이 풀리고 억울한 망자들도 안식에 들지!”이리 나리는 온몸으로 그 마음이 느껴져, 어머니가 눈물 흘리는 것을 더는 볼 수 없었다. “네, 전부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대로 할게요.”안지여와 소여쌍은 버려졌다. 짧은 며칠 사이에 안지여는 의기양양하던 성주에서 시궁창 쥐로 변해, 사람들이
안지여는 풍도성 지하감옥에 갇혔다. 빛 한 줄기 없는 지하감옥에서 사방에 끝없는 어둠과 절망만이 안지여를 삼키고 있었다.훼천의 형벌은 12 시진 후면 사라져서, 앞으로 안지여는 그저 한 명의 폐인일 뿐이었다.안지여의 결사대가 성으로 공격해 들어오기 전에, 이리봉청은 오 선생을 찾아내 안지여가 저지른 모든 죄를 고백하게 하고 안풍 친왕이 친필로 받아 적었다. 안지여가 당시 천문 세가를 해친 경위를 소상히 써 내려간 뒤, 오 선생과 안풍 친왕의 직인을 찍고 인쇄해서 대중에게 공개했다.안지여의 죄악은 하늘을 찔러 백성들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안지여의 결사대의 옛 부하들이 본래 성을 공격해 들어가 안지여를 구출할 계획을 세워놓았으나, 안지여의 죄상이 공포된 뒤로 많은 사람들이 해산하였다. 유일하게 무대장군만이 수천 명을 데리고 성으로 쳐들어왔지만, 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가 이미 대비해둔 덕분에, 경성에서 굴러온 돌이 무대장군의 박힌 돌을 빼내는 전투를 벌였다.풍도성에 온 지 7일째, 안풍 친왕은 풍도성을 접수하고 성에 살던 사람을 쫓아내며 서민으로 강등시켰다.안지여와 소여쌍에 대한 처분은 이리봉청에게 넘겼다.안지여는 캄캄한 지하감옥에서 6일을 지내는 동안, 처음엔 침착한 척 가장했으나 사흘째가 되자 울부짖으며 악독한 저주의 말을 내뱉더니, 나흘째가 되자 용서해달라고 애원하며 참회했다.손발의 힘줄이 끊어진 안지여는 일어나 걸을 수도 없고 심지어 스스로 몫숨을 끊을 힘도 없었다.그 와중에 매일 누군가가 먹고 마시도록 해주고, 상처도 치료해 주어 살 수 있다는 부질없는 희망을 품게 했다.훼천의 말에 따르면, 진정한 절망은 살아도 죽느니만 못하고,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것으로, 온 마음으로 죽기를 바라지만 살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가, 안간힘을 쓴 뒤 다시 절망에 빠지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사람을 한없이 죽였다 살렸다 괴롭힌다고 했다.결국 안지여를 죽일지 말지 여부는 이리봉청에게 달렸는데, 그녀는 안지여를 단번에 죽여 천문 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