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내릴거야원경릉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후안무치 하게 떼를 쓰며 바닥에 드러누울 수도 없으니 안보면 안보는 대로 선선히 물러 갔다.상선이 놀라서 이렇게 선선히?상선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니, 삼대 거두와 명원제가 술을 마시고 있는 가운데 상선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명원제가 얼른 묻길: “왔어? 갔나?”상선이: “황제 폐하께 아룁니다, 왕비가 왔다가 갔습니다.”명원제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시 묻길: “너는 뭐라고 했느냐? 이렇게 금방 간다고 했어?”상선이: “그저 황제 폐하께서 여기 계시지 않는다고 했고, 다음엔 왕비가 태상황 폐하를 뵙겠다고 했으나 소인이 태상황 폐하께서는 술을 드셔서 아무도 만나지 않으신다고 하니 왕비는 가셨습니다.”다들 마주보더니, 이거…… 이거 원경릉 스타일이 아닌데.“정말 갔나?” 태상황이 믿기지 않는 눈치다.“정말 갔습니다.” 상선 자신도 상당히 의아했다.태상황이 오늘 사실 원경릉을 보고 싶었고 며칠을 못 봤지만……태상황은 담담하게 황제를 흘끔 보더니 이 놈은 오면 안돼, 살풍경하다니까.주재상이 느긋하게 술을 마시다가, 갔다고? 짐작컨대 아닐 걸.과연 잠시 후 금군이 바람같이 달려오느라 멈추지 못하고 거의 돌계단에 부딪힐 듯, 허둥지둥하며: “태상황 폐하, 황제 폐하, 초왕비가 문창각(文昌閣)에 올라가셨습니다. 난간에 앉아 계신데, 더 살수가 없다고 하십니다.”명원제가 격노해서, “고약한 놈! 오냐오냐 하면 할아버지 수염을 잡아당긴다 더니, 짐을 위협하려 해, 신경 쓰지 마라, 네가 어디 감히 뛰어내려?”세명의 어르신이 황제를 보고 아무도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지 않았다.명원제가 속이 타서: “아바마마, 초왕비가 위협을 해서 만약 원하는 대로 되면 앞으로 아주 큰일입니다.”태상황이 담배를 뻑뻑 빨며 담담한 말투로: “됐어, 뛰어내리라고 해, 다음에 다른 아들한테 증손자 셋을 낳아서 과인에게 보여 달라고 하면 되지. 과인은 이 일에 상관하지 않겠다.”명원제가 이 말을 듣고 기세가 일시에 약해지
원경릉은 사람들이 오는 것을 보고 허리를 숙여 머리를 내밀었다. 명원제는 원경릉이 뛰어내리기라도 하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지금 왜 할아버지께서 오시지 않는 거지?’“내려와! 빨리 내려오라고!”명원제가 위를 보며 소리를 지르다가 답답한 표정으로 금군들을 보며 “뭐 하고 있느냐! 당장 올라가거라!”라고 말했다.“황상, 소신들이 계단으로 올라가려고 하니, 초왕비께서 한 걸음이라도 다가오면 바로 뛰어내리겠다고 하십니다.”금군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새해부터 초왕비가 소란을 피우자 명원제는 몹시 화가 났다. “명을 전하거라! 초왕비에게 어서방으로 오라고 해!” 명원제가 손을 저으며 금군에게 말했다.어서방으로 향하는 명원제의 뒷모습은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했다. 자식 농사를 잘 못 지은 명원제는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나에게 이런 아들들을 내린 겁니까!’원경릉이 어서방에 들어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눈은 퉁퉁 부었고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분노로 가득했던 명원제의 마음은 원경릉을 보자마자 슬픔으로 바뀌었다.‘어쩌다 이 아이가 거기까지 치닫게 되었을까.’명원제는 차분한 표정으로 원경릉을 보았다.“할 말이 있다면 말해보거라.” 명원제는 문창각(文昌閣)에서의 일이 떠올라 가슴이 서늘해졌다.원경릉은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명원제를 바라보았다.“부황, 악한 자가 거짓을 고할 수 없도록 며느리가 진실을 고하겠습니다.”“일어서서 말하거라.”“일어설 수 없습니다!” 원경릉은 울부짖으며 명원제를 직시했다.“……” “방금 너무 놀라서 다리가 후들거립니다.”명원제는 한숨을 내쉬더니 희상궁에게 원경릉을 부축하도록 했다. “이제 무서울 게 없느냐. 뱃속의 아이들을 방패로 짐에게 소리까지 지르고 말이다.”원경릉은 희상궁의 부축에도 다리가 덜덜 떨렸다. 그녀는 벅차오르는 감정에 숨을 가다듬으려 노력했다.“아니요. 사식이와 희상궁께서 허리띠를 뒤에서 끈으로 잡고 있습니다.”명원제는 탁자를 ‘쾅’ 내리치며 눈을 부라
원경릉의 말은 명원제를 놀라게 했다. 명원제는 빠르게 지나는 시간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는 이제 북당의 군왕으로 왕자들의 싸움을 바라볼 때가 된 것 같았다.하지만 이대로 두었다가는 자식들끼리 황태자의 자리를 두고 싸우다가 모두 죽을 것 같았다.“돌아가봐.”명원제가 말했다.원경릉은 명원제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그녀가 걸을 때마다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고 명원제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원경릉은 궁을 나오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도 명원제의 슬픔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원경릉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답지 않게 무식하게 일을 해결하려고 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상황이 그녀를 문창각에서 뛰어내리게끔 만들었다.사식이는 원경릉이 겁을 먹은 것처럼 보였다.“원누이 걱정 마세요. 황상께서도 화가 많이 난 것 같지는 않아요.”“사식아, 황상께서는 화는 내시지 않았지만…… 크게 상심하신 거다.”“황상께서 왜 상심을 하셨습니까?” 사식이는 명원제와 원경릉 사이에서 아무런 기운을 느끼지 못했다.옆에 있던 희상궁이 한숨을 내쉬며 “왜 상심하지 않겠어? 위왕부는 혼란스럽지 제왕도 생사를 넘나들지, 기왕은 감옥살이 중이지…… 게다가 우리 왕야와 안왕도 소란을 피우고 있으니 황상 마음이 편하시겠어?”라고 말했다.사식이는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으며 원경릉의 배를 보았다.“만약에 초왕께서 황태자가 돼서 나중에 북당의 황제가 된다면 원누이의 뱃속의 아이들도 황태자가 되기 위해 싸우겠지요?” 사식이가 물었다.그 말을 들은 원경릉의 표정이 잿빛으로 변했다.“사식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방금 네가 한 말이 큰 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왕야께 큰 화를 입힐 수 있어!”희상궁이 큰소리로 꾸짖었다.“아! 제가 실언했습니다.” 사식이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원경릉은 한숨을 쉬며 바깥을 보았다. 희상궁은 사식이를 노려보며 허벅지를 꼬집었다. *건곤전.
“태상황님께서는 내심 초왕비 뱃속의 아이들이 사내이길 바라시죠?”주수보가 물었다.“그건 중요하지 않다. 아들이든 딸이든 마찬가지야.” 태상황이 말했다.“거짓말을 하시는군요. 전에는 꿈에 초왕비가 아들을 낳았다고 하셨으면서!” 소요공이 코웃음을 쳤다.“꿈은 꿈이고! 꿈이 내 마음을 완벽히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그래도 조금이라도 손자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에 그런 꿈을 꾸는 게 아닙니까?” 주수보가 말을 하며 옆에서 소요공을 힐끗 보았다.“그래? 짐이 어젯밤에 너희 둘이 비렁뱅이가 된 꿈을 꿨는데 말이야.”태상황이 반격했다.“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소요공과 주수보의 미간이 좁아졌다.태상황은 두 사람의 반응이 웃기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초왕비가 편안하게 출산을 하는 것이다. 그다음이 아이들의 성별이지.”“전에 유명한 고승(高僧)이 말하길,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면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소요공이 말했다.“넌 그런 말을 믿느냐? 그렇게 해서 만사가 손바닥 뒤집히듯 뒤집히면 이 세상이 잘 돌아가겠느냐?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고 있어!” 태상황이 코웃음을 쳤다.그 말을 들은 소요공은 조금 부끄러워졌다. 주수보와 소요공은 마저 술잔을 비우고는 늦었다며 건곤전 밖으로 나갔다.태상황은 취한 눈빛으로 상선을 바라보며 물었다.“초왕비는 왕부로 돌아갔느냐?”“예, 갔다고 합니다. 이제 태상황님께서도 쉬시지요.”상선이 말했다. “아니다. 오늘 날씨가 아주 좋으니 태후 쪽으로 걸어가 봐야겠다.”태상황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더니 취기가 올라오는지 약간 비틀거리며 태후가 있는 곳으로 갔다.“괜찮다. 짐이 언제 술 마시고 쓰러지는 걸 본 적이 있느냐? 만약 초왕비가 지금 짐을 봤다며 아주 야단법석을 떨었겠지 말이다.”“초왕비께서는 태상황님을 걱정하는 마음에 그러시는 거죠.”상선이 말했다.“지금 너는 이해하지 못한다. 짐의 나이가 되면 그런 말이 하나도 소용이
“그럼 짐이 바라는 모든 게 이뤄진다는 말이냐.”태상황이 물었다.“예, 하지만 욕심이 과하면 부처님께서도 아시고,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적당한 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태후가 대답했다.“사람이 욕심이 있으니 법당에 와서 기도를 하는 게 아니겠느냐? 참 모순적이구나.”태상황은 입을 삐죽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상선은 그를 대신해 향을 올리고 그를 바라보았다.“태상황, 간절히 원하시는 것을 큰 소리로 말씀하십시오.”태후가 말했다.“묵념을 하면 안 되겠느냐?”“태상황, 무슨 일을 하든 먼저 상대의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고 입이 닳도록 말씀하셨잖아요. 원하는 것을 큰소리로 외치지 않으면 바쁘신 부처님께서 어찌 들으시겠습니까?”태후의 말에 태상황이 한참을 망설였다. “그럼, 딱 한 가지만 말하면 되는가?”“예, 일단 한 가지만 말씀하세요.”태상황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일단 초왕비가 순조롭게 출산하는 것, 부처님께서 초왕비를 잘 돌봐주십시오.”태상황의 말을 듣고 상선이 조용히 태상황에게 다가갔다.“태상황님, 아들을 낳아달라고 빌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태상황은 인상을 쓰고 기침을 하더니 상선을 보았다. “초왕비의 안위가 최우선이고 그건 다음에 부탁할 것이다.”‘차갑게만 보이던 태상황도 사람이었구나.’ 태후는 태상황을 보며 웃었다. 태후의 법당에서 돌아온 태상황은 침전으로 가서 잠을 청했고, 상선을 왕부로 보냈다.* 원경릉도 우문호도 모두 왕부에 일찍 돌아왔다. 서일은 우문호에게 약주를 발라주고 있었다.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마. 걔가 나보다 더 많이 다쳤다고!”원경릉이 웃으며 우문호에게 약주를 발라주려고 하자 서일이 그녀의 앞을 막았다. “왕비께서는 약주를 만지면 안 됩니다. 이 약주는 피를 맑게 하고 어혈을 없애주지만, 뱃속에 태아가 있을 때는 위험할 수 있습니다.”“누가 그랬죠?” 원경릉이 물었다.“조어의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약주는 혈액순환을 촉진하는 약물로 절대로 왕비께서는 만지셔서는 안 됩니다. 이미 희상궁
원경릉은 우문호의 말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너 모비(母妃)를 뵈면 어떻게 해?”“문안인사를 드리지.”“그리고 또?”“다른 거 없는데? 모비께서는 다 가지고 있으니, 난 그저 인사만 드려.”우문호가 머리를 긁적였다.“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환심? 태자 자리를 오르려면 환심을 사야겠지. 내 생각엔 안부인사를 제외하고는 뭐든 과한 것 같아. 그런 가식은 불필요해.”원경릉은 그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 현비는 우문호를 태자로 만드려고 혈안이 돼있다. 그녀는 은근 우문호에게 미안했다. 다른 친왕의 부인들은 집안이 좋아서 친왕들에게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데, 정후부는 그럴 힘도 돈도 없기 때문이다. “날 잡고 입궁해서 부황과 장기도 두고 술도 마시고 곁에 있어드려. 그게 가장 큰 효도야.” 원경릉이 말했다.“그럼 부황께서는 내가 당신 비위를 맞춘다고 생각하겠지.” 우문호가 한숨을 내쉬었다.“그가 뭐라고 생각하든 네가 해야 할 일만 하면 돼! 만약에 네 아들이 너랑 데면데면하고 관계가 소원해진다면 넌 기분이 어떻겠어?” 원경릉이 발끝으로 우문호를 한 번 찼다.“아들은 그러든지 말든지 상관없는데, 딸은 절대 그럼 안 돼.”“참 나.”“경릉아, 나 결심했어. 우리는 세 딸을 낳는 거야. 아들들은 말썽만 피우고 크면 야심이 커서 무슨 사건을 일으킬 줄 몰라.”“그걸 네가 결심해서 뭐 해?” 원경릉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우문호의 시큰둥한 반응에 우문호가 툴툴거렸다. “세 명이니까 공주가 하나쯤은 있겠지.”“물론 그럴 수 있지. 근데 남아 3명 또는 여아 3명일 가능성이 훨씬 높아.”“남자, 여자가 섞일 수는 없는 거야?” 우문호의 눈이 동그래졌다.“그럴 가능성도 있긴 한데 지극히 적어.”“남자 셋이면 정말 눈물 날 것 같은데…… 공주 하나는 있어야지!”“우리가 이렇게 논해도 소용없어. 성별은 이미 정해졌어.”원경릉의 말에 우문호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 아이를 내가 결정하지! 누가 결정해
기왕은 감옥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이 모든 것이 우문호의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전에 기왕부에서 우문호와 싸움이 일어났을 때, 자신이 기왕부 부병을 동원해 그를 공격했던 것에 앙심을 품고 자신을 모함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심문을 하는 관리가 기왕부에서 일어난 싸움에 대해 묻자 그는 끝까지 함구하다가 우문호와 의견충돌이 있었다고 말했다. 명원제는 계속해서 심문을 하라고 했고 관리들은 더 이상 심문할 내용이 없어 난감해했다.‘단죄하든지 처벌하든지 해야 하는데…….’명원제도 계속 심문하라고 지시했지만, 그 역시도 기왕을 더 어떻게 심문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머릿속으로 어떻게 이 사건을 처리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고, 시간을 조금 더 가지고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리하여 기왕은 감옥에 다시 갇혔다.기왕은 중죄를 저지른 죄인이었지만 면회가 제한되지는 않았다. 그는 면회 소식만 기다리며 줄곧 주명양이 오길 바랐다. 주수보가 몇 마디 해주는 게 다른 사람이 백 마디 하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주명양은 오지 않았다. 감옥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는 조바심이 났다. 예전에는 무슨일이 생겨도 밖에서 자신을 빼내줄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왕의 심복과 외가를 제외하고는 기왕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초엿새날, 기왕의 모친인 진비(秦妃)와 기왕비가 기왕의 면회를 왔다. 진비는 그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멍청한 것! 왜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야! 부황께서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기왕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모비, 소자 참으로 억울합니다. 소자를 믿어주십시오. 범인은 제가 아닙니다! 모비께서 부황께 잘 말씀드려 주세요.”라고 말했다.“본궁이 부황께 부탁을 해봤자 소용없어! 기왕비가 본궁에게 말하길 네가 했다는 것을 증명할 증인도 있다고 하더라! 네가 한 것이 확실해졌다고! 너는 부황이 어떤 처벌을 내려도 할 말이 없다는 말이야!”모친의 말에 기왕은 충격을 받았다. “그럼 주수보를 부를까요
“그럼 저는 밖에서 모비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말을 마친 기왕비가 기왕을 쳐다보지도 않고 휙- 밖으로 나갔다. 기왕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한없이 바라보았다.‘가라고 했다고 진짜 간다고?’눈물을 흘리던 진비도 기왕비의 매몰찬 태도에 기왕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지금 저거 제정신이 아닌 게지?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쌩 나가버린다고?”기왕은 주명양과 짜고 기왕비를 폐비시키려고 했다는 사실을 진비에게 말하지 못했다.“명양이가 입궁한 이후로 기왕비가 좀 이상합니다.”“너는 후궁 주명양은 애지중지 여기면서 정비는 왜 푸대접을 한 거야? 그건 왕부가 망하는 길이다. 절대 그러면 안 돼. 넌 지금 동씨 집안의 힘이 필요하다고!” 진비는 인상을 쓰며 그를 보았다.“언제 적 동가(佟家)입니까?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습니다. 동씨 집안도 부황에게 푸대접을 받고 있다고 하던데요?” 기왕이 말했다.“넌 참 근시안적이구나! 동씨 집안사람들이 궁 안에 얼마나 많은데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리고 동씨 집안은 태생부터 돈이 많다고! 넌 기왕비를 잘 달래 보거라. 그리고 기왕비의 큰 오빠인 동안(佟安)이 얼마나 많은 공을 세웠는지 너도 잘 알지 않느냐? 부황께서 시국이 이러니 동안을 냉대하겠지만 그의 능력은 높게 사고 계셔.”진비의 말을 들은 기왕이 창백한 얼굴로 우물쭈물했다.“그럼 모비께서 기왕비를 좀 설득해 주세요. 동씨 집안사람들 중에 조정에서 일하는 관리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상소문을 써달라고 해주세요.”“이래서 집에 여자가 잘 들어와야 한다니까? 후궁이 들어오자마자 그 계집에게 눈이 돌아서 정비를 홀대하다니…… 옥에 있는 동안 잘 생각해 봐. 네가 온전히 네 힘으로 기왕부를 이끌었는지 말이야. 기왕비가 없었으면 넌 그저 황제의 큰 아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것이야.”모비의 말을 듣기 싫었던 기왕은 인상을 썼다. “모비께서는 소자를 참 우습게 보십니다. 그럼 제가 여자 치마폭에 쌓여있기라도
위왕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혹시 복수하려는 것이냐?”“복수가 아니라, 그저 사실을 말할 뿐입니다.”안왕은 그에게 책임을 떠넘겨 혼자 감당하게 한 위왕을 보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위왕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어찌 다섯째에게 설명할지 생각해 보거라. 보책은 아직 네 손안에 있잖냐.”안왕은 여전히 두꺼운 보책을 손에 쥐고 있었다. 잃어버릴 수 없는 귀한 것이지만, 가만히 들고 있기도 거슬렸다.이렇게 골치 아픈 상황이 생길 줄 알았다면 차라리 꾀병을 부리고 위왕 혼자 오게 한 것이 더 나았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각자 방으로 돌아가 목욕을 한 후, 막 침대에 누웠을 때 택란이 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두 사람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바로 택란을 만나러 나갔다.안왕은 보책을 가지려 했으나, 택란에게 넘겨받으면 곧 금나라 황후임을 인정하는 셈이 되므로, 절대 넘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적어도 어린 황제는 아직 그들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택란은 두 분 큰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린 후 자리에 앉아 말했다.“큰아버지, 오늘 일은 아바마마께 절대 말하지 마십시오.”안왕도 원하던 바였기에 다급히 답했다.“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먼저 네 아버지한테 숨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예. 저도 그것이 걱정입니다.”택란의 가장 큰 걱정은 바로 아버지였다.“어린 황제도 참, 어린 시절의 약속마저 진지하게 받아들이다니… 설령 너와 혼사를 약속했다 해도, 네가 승낙하지 않을 것 아니더냐.”안왕이 말하자 택란은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그때 이미 동의했었습니다.”다만 그때는 그저 그를 달래, 그의 상처가 심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 뿐이었다.“승낙했다니?”안왕과 위왕은 서로 놀란 표정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면 이 일은 전적으로 어린 황제의 탓도 아니다.“하지만 넌 그때 겨우 여덟, 아홉 살이었다. 그저 아이들의 장난일 뿐일 테니, 동의했다고 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위왕이 재빨
“폐하, 공주께서 폐하가 드리신 선물을 받지 않으신 것입니까?”언제 올라온 건지, 진이는 어느새 그의 곁에 서 있었다.“응.”경천은 뒤돌아 상자와 두 개의 옥패를 바라보았다. 그가 오랜 시간 동안 배우며 수많은 옥을 망친 끝에 겨우 지금과 같은 모습을 조각해 낸 것이었다.하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속상해하지 마십시오. 공주께서 아직 어리셔서 폐하의 노고를 다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깐요.”진이가 위로하자 경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어서 받지 않는 것이다.”진이가 잠시 멈칫했다.“너무 잘 안다니요? 그런 것 같진 않아 보였는데요.”경천은 이미 실망한 기분을 떨쳐버렸고, 대신 굳건한 의지를 다졌다.“진아, 나는 그녀의 뜻을 완전히 이해했다. 그녀는 먼저 좋은 황제가 되어주기를 바란단다. 이곳을 떠나기 전, 나에게 한 나라의 군주라 하지 않았냐? 황제로서 역할을 다하기를 바라는 것이다.”“아... 그런 것입니까!”진이는 비록 이해하지 못했지만, 황제가 속상해하지 않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택란 일행은 궁을 나섰다. 냉명여가 그녀에게 물었다.“누나, 어찌 황제가 주신 옥패를 받지 않으시나요? 그를 싫어하시는 것입니까?”택란은 웃으며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는 절대 그를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강단 있는 황제이고, 뛰어난 통치로 금나라가 정권 이양 위기를 넘길 수 있도록 했다. 게다가 그는 두 나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두 나라에 평화를 가져왔다.”“그럼, 어찌 그의 선물을 받지 않으셨습니까?”냉명여는 다른 사람의 선의를 함부로 거절하면 안 된다고 배웠기에, 그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택란이 답했다.“그 옥패가 약속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명여야, ‘약속’이라는 말은 무거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약 네가 그것을 이행할 능력이 없다면, 함부로 약속하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하지만 그도 누나와 혼사를 올리겠다고 한 말에 대한 약속을 지키려는 것 아닙니까?”“그래. 하지만 나
경천은 그녀의 말을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택란이 말했다."어쩌면 5년 후에는 오늘 한 모든 일이 어리석고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좋아하는 여인을 만나게 될 때, 그 감정이 단순한 사모인지 은혜 때문인지 알게 되실 것이고, 오늘의 행동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경천은 단 한 마디만 응한 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태도가 이렇게나 분명하니, 절대 그런 말로 그녀를 얽매여 부담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늘 한 모든 일은 그의 결정이며 그의 태도였다. 그녀는 몰라도 되고,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긴 하지만, 그는 언제나 그녀를 기다릴 것이었다.그리고 그녀의 인정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택란은 한숨 놓은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해한다니 다행입니다.""알고 있다."경천의 얼굴은 약간 창백했지만, 애써 미소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삼 태감이 책자를 가져왔다. 경천은 그것을 택란에게 건넸고, 택란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았다. 그가 제시한 조건은 매우 공정했으며, 심지어 약도성에 이익을 양보한 정도였다.책자를 접은 후, 그녀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약도성을 생각해 줘서 고맙습니다. 두 나라의 원한을 풀기 위해 애써줘서, 그리고 약도성의 백성과 조정이 화해할 수 있도록 도와줘서 고맙습니다.""알고 있었던 것이냐?"경천이 다소 놀라며 묻자, 택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 알아봤습니다.""오해하지 마라. 그저 너를 위하여 한 일이 아니니, 부담 갖지 않아도 된다."그는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해명했다.택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오해하지 마시지요. 저는 정말 부담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를 위해 이렇게 많은 일을 해줘서 고마울 뿐입니다. 오늘도 사실 많이 감동했습니다. 다만, 저는 아직 혼사에 대해 논할 나이가 아니고, 사적인 감정보다는 다른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어리고, 앞으로 혼사를 하더라도 반드시 아바마마
손에 쥐니, 차가운 촉감이 느껴졌다. 그 옥의 차가운 느낌이 서서히 스며들자,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놀라운 표정을 지었을 때, 그는 미세하게 안도하며, 그녀가 좋아할 것이라 믿었다."직접 만든 것입니까?"택란은 마음에 든 듯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그녀의 밝은 눈동자에는 존경이 가득했다."응!"그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마음에 드냐?""예. 정말 마음에 듭니다!"택란도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빛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러자 그가 약간 흥분된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이걸 직접 나에게 선물해 줄 수 있느냐?""예?"택란이 잠시 멈칫하며, 놀라 물었다."저에게 준 선물이 아닙니까?"그가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으로 소매 주머니에서 또 다른 옥 조각을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으며, 진지하게 말했다."이건 내가 네게 직접 주고 싶은 것이다."택란은 그가 손에 든 것을 바라보았다. 옥질도 동일하게 맑고 투명했고, 손바닥의 선도 보일 정도였는데, 그 조각에는 경천의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옥에는 미소를 짓고 있는 준수한 그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고,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있던 옷이 새겨져 있었다. 비록 색은 알 수 없었지만, 자수가 명확하게 새겨져 있었다.그녀는 기억력이 매우 좋았기에, 그때의 기억이 선명히 떠올랐다.그녀는 두 개의 옥을 손바닥에 놓았다. 그제야 그녀는 옥에 3년 전 그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가 시간을 되돌려 3년 전 만남을 담은 것이었다!경천은 택란을 바라보며, 애써 차분함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심장은 거의 목구멍까지 올라올 듯했다.택란이 두 개의 옥을 서둘러 상자에 다시 넣으며 말했다."두 개 모두 오라버니께서 먼저 가지고 있으세요."경천은 눈시울을 붉히며 다시 건네받은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내리깔며, 애써 실망이 드리운 눈빛을 숨겼다.삼 태감이 정교한 음식을 올려놓았고, 모두 택란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알 수 없는 작은 흥분을 억누르고, 표정을 고쳐서 천천히 돌아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북당 백성인 란이 언니와의 혼사는 다 거짓인 겁니까?"경천의 동공이 흔들렸다."혹시... 화가 난 것이냐?""아닙니다."택란이 고개를 젓자, 밝은 빛이 그녀의 깨끗한 얼굴에 비쳤고, 고르게 정리된 이마 밑의 눈동자는 다시 차분해졌다."그런데 어찌 사람을 시켜 저를 찾고 있다고 직접 저게 소식을 전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편지를 보냈다면, 저도 오라버니를 만나러 왔을 것입니다. 심지어 혼사에 하객까지 청하며 일을 이렇게나 크게 벌였는데, 대체 어떻게 수습하려고 하십니까?"그는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천천히 그녀 앞에 섰다. 그러고는 그녀의 까만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수습할 필요 없다. 나는 이미 천하에 나의 황후가 우문택란이라고 선언했다. 나는 그녀가 어서 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택란은 순간 놀라하며,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경천은 그녀가 화가 난 것 같아,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의 눈동자엔 어두운 그림자가 깔렸고, 이내 조심스레 물었다."응할 수... 있겠느냐?"택란은 잠시 망설였다. 기억 속의 그 소년이 지금 별빛을 받으며 그녀 곁으로 돌아왔다. 이전의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10년 후 그가 죽지 않으면 돌아와서 그녀를 부인으로 맞겠다고 열정적으로 말했었다. 그 열정이 가득한 목소리는 지금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런 과거와 현재가 얽혀 버리자,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저는..."경천은 그녀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반응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얼굴을 조금 숙이며 말했다."지금 바로 대답할 필요 없다. 몇 년 후라도, 10년, 아니 20년 후라도 괜찮다.""하지만...""아니, 말하지 말거라."그는 방금까지만해도 가득찼던 자신감을 더 이상 보여줄 수 없
냉명유는 팔짱을 낀 채 검을 가슴 앞으로 옮기며, 차갑게 말했다."누님께서 어디로 가든, 저도 무조건 함께 갈 것입니다."“하… 하지만."삼 태감이 무척 난감해했다."그래. 함께 가자. 이 거월통천각이 정말 달을 딸 수 있는지 어디 가서 보자꾸나!"그러자 택란이 웃으며 말했다.주 아가씨는 조금 의심스러웠다. 정말 공주가 만나고 싶다면, 어찌 공주한테 이렇게 높은 계단을 오르게 할 수 있는가?그러고는 계단 위에 새겨진 난초꽃을 힐끗 보고는 순간 멈칫했다. 시선을 위로 올려보니, 계단의 각 층마다 난초꽃이 새겨져 있었다.황제가 자신의 그리움을 돌계단에 새긴 것이었다!택란도 계단을 오르며, 이 사실을 눈치챘다.게다가 각 난초의 형태와 크기는 매우 똑같았다. 처음에는 선이 조금 거칠게 느껴지긴 했지만, 후에는 점점 더 섬세하고 부드러워 보였다.이건 분명 같은 사람이 새긴 것 같았다. 그가 직접 조각한 것일까? 금나라가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지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잠시 후, 그들은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에 도착했다. 다행히 냉명여는 문 앞에서 멈추고 안까지 들어가지 않았다.택란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는데, 안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네개의 용 모양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네 모서리에는 각각 올라가 쉴 수 있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었으며, 가운데에는 탁자와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떠힌. 네 면에 걸려져 있는 대나무 커튼이 걷혀 있어, 사방에서 밖을 볼 수 있었다.그 사이에서 청색 비단옷 차림의 남자가 통천각 옆 난간에 기대어 택란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매우 긴장한 듯 손과 발을 살짝 떨고 있었다. 별빛처럼 맑은 눈동자에 약간 숨이 가쁜 듯 보였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녀를 보자마자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재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며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 만남을 특별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반짝이는 별들도 그중 하나였다.하지만
손님들이 하나둘씩 떠나자, 경천 황제는 서둘러 궁으로 돌아가 푸른 비단옷으로 갈아입었다.옅은 청색 옷자락에, 소매 끝에는 난초꽃이 수놓아져 있었고, 나머지 부분은 어두운 구름 문양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이 옷감은 북당에서 온 것이었다."폐하, 꼬마 은인께서 궁문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삼 태감이 와서 보고했다."좋소."그는 거울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깊은숨을 내쉬었다."택수운천으로 가겠네."택수운천은 그가 즉위한 후, 궁궐 안에 지은 새 궁전으로, 세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궁전 옆에는 거월통천각이 있었는데, 이는 량주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거월통천각 안에 있으면 마치 손바닥에 달을 담을 수 있을정도로 웅장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거월통천각에서 멀게는 약도성과 량주가 인접한 산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가 생각날 때면, 늘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가 풍경을 멀리 바라보곤 했다."진이야, 너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 본 적이 있느냐?"그가 준수한 옷차림으로 난간에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바람이 서서히 불며 청색 옷자락이 휘날리자, 옷자락의 네 끝에 박힌 고급스러운 야명주가 그의 선명하고 잘생긴 얼굴을 비추었다.그때, 저 멀리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궁 시위를 따라, 아치과 복도를 지나 거월통천각으로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젊은 금군 통령 진이가 그의 모습을 보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런 적 없습니다.""사모의 마음을 품어보거라. 떨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느낌만큼 좋은 것이 없다."그는 그녀를 멍하니 보며 말했다. 천천히 다가오는 탓에 그녀의 얼굴이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13세 전까지의 그의 인생에는 나라와 백성들 뿐이었지만, 13세 이후 그의 인새은 온통 그녀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금 그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진이는 황제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다가오는 세 명을 보며
안왕은 보책을 받아 든 순간, 갑자기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정확히 어떤 점이 이상한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일이 다 이상하게 느껴졌다.보책을 펼쳐 안에 적힌 이름을 본 순간 그는 드디어 이상한 점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게 되었다.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굳어진 표정으로 경천 황제를 바라보았다.경천 황제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조사를 통해 드디어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소. 그녀의 이름은 우문택란이오. 금나라 황후의 이름은 우문택란이네. 난 반드시 그녀를 찾아낼 것이오. 만약 그녀가 황후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황후의 자리는 그녀를 위해 계속 비워둘 것이네.”위왕은 온몸에 식은땀을 흐르는 탓에 두 손을 급히 움켜잡았다. 방금 황제가 보책을 그의 손에 올리지 않아, 그가 받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정말 다섯째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안왕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자리에서 물러나 이를 악물고 낮은 소리로 위왕에게 말했다.“방금까지도 어린 황제에게 어리석다고 했건만. 이렇게 계책에 능하고 이따위 교묘한 계책으로 우리 형제를 그와 같은 편에 서게 만들다니...!”위왕은 또 한 걸음 물러서며 아무런 표정 없이 말했다.“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방금 술을 두 잔 마셔 조금 취한 터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아니, 지금 들고 있는 그건 무엇이냐?”안왕은 단단한 그의 팔을 비틀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하지만 이 상황 속에서 연회는 계속되었고, 사람들의 감정은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북당 황제의 작은 공주도 우문택란이라는 말을 꺼냈다.그 말에 다들 그 당시 금나라 황제를 구한 사람이 북당의 작은 공주가 맞는지 추측하기 시작했다.정말 북당 공주가 맞는다면, 금나라 황제도 참 배짱이 큰 것이다. 사실상 북당 황실이 금나라 황제를 구했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만약
경천은 위왕의 말을 듣자, 마치 마음속 큰 돌덩이가 내려간 듯 후련해 보였다. 그는 그러고는 궁인에게 술을 올리게 해 술잔을 여러 차례 돌린 후, 아래를 둘러보며 말했다.“오늘 여러분께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오늘 정혼연이 어찌 열리게 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오.”그러자 모두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말에 당황을 금치 못하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혼연이든 혼례든,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이때, 위왕이 안왕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섯째에게 서신을 보내야겠다. 금나라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자가 황제가 아닐 수도 있다. 진국왕이 아직 살아 있고, 이 황제가 꼭두각시일지도 모른다.”“맞소. 확실히 조금 병신같아 보이네.”안왕도 동의했다.참고로 ‘병신같다’는 표현은 안왕이 조카에게서 배운 단어였다.“이 이야기는 3년 전쯤에 있었던 일이오.”이내 경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담겨져 있었다.“당시 금나라는 진국왕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그는 나를 대신해 금나라의 군주가 되려 했소. 이 사실은 여러분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때 난 진국왕과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소. 진국왕이 왕위를 빼앗으려 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하기에, 나도 어쩔 수 없이 반격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소. 그때 나를 구해준 이가 바로 란이라는 소녀이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난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오. 그 당시 나는 란이의 정체도 몰랐고, 그저 약도성 사람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소. 상처를 치료하며 그녀와 며칠을 함께 보냈고, 황권을 되찾으면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했네. 하지만 그녀가 나를 구했다는 사실이 진국왕에게 알려졌고, 진국왕이 사람을 보내 그녀의 집에 불을 질렀소. 그리고 그곳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소.”모두가 진국왕이 불을 질렀다는 말에 멈칫했다.금나라 황제가 이렇게 비극적인 황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