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왕의 폭탄발언에 위왕비의 평온하던 얼굴이 일그러지고 온 몸이 덜덜 떨렸다. 그녀의 눈에는 충격과 공포가 가득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아채더니 악을 썼다. “다시 한번 말해봐!”위왕비는 자신의 아이가 유산된 이유가 위왕 때문이라는 말에 머리가 터질 것 같이 아프고 귓속에 삐-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의 입에서 나올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그런 그녀가 우습다는 듯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그녀에게 말했다. “똑똑히 들어. 딱 한 번만 다시 얘기해 줄 테니까. 너와 청양군 사이에서 생긴 그 아이는 본왕이 직접 죽인 것이야.”그녀는 마음 저 구석에 있던 마지막 희망이 산산조각 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저 말이 칼이 되어 그녀의 심장을 찔렀고, 그녀는 살아있는 것이 부질없다고 느껴졌다. 그녀는 천천히 그의 손목을 놓고 부들거리는 몸을 진정하며 그를 노려보았다.그녀는 충격으로 몸을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고, 순식간에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쓰러진 위왕비를 보며 위왕은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그의 마음 속에 긴 시간 동안 억눌려있었던 한과 억울함이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본왕이 부황께 보고를 하겠노라. 너를 폐비시킬 것이니 너는 친정으로 갈 채비를 하거라. 본왕은 다시는 너를 보지 않을 것이야. 그 자리는 고지가 앉게 될 것이야.”말을 마친 그는 위왕비의 상태는 확인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시녀와 하인들이 서둘러 위왕비에게 다가와 그녀를 일으켜 맥박을 확인했다. “아이고, 왕야께서 어쩜 저렇게 현명하지 못하실까!”“왕비님 괜찮으십니까?” 시녀와 하인들이 울먹거렸다.쓰러진 위왕비의 눈밑이 파르르 떨렸다. “왕비님! 왜 그러십니까? 오씨 어멈이 여기 있습니다!”파자가 울며 그녀를 안았다.위왕비는 천천히 파자를 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어멈…… 저…… 여기는 너무 춥습니다……” 위왕비가 가는 목소리로 부르르 떨며 말했다.파자는 황급히 하인들에게 “빨리 온도를 높일 수
사식이는 위왕부 옥상에서 귀를 기울여 내부상황을 파악했다. 사식이는 위왕이 나간 뒤 돌아오지 않자 원경릉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사실대로 말했다.“위왕이 위왕비를 때렸습니다. 제가 내려가서 상황을 제지해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관여하지 않았습니다.”이 말을 들은 원경릉은 한숨을 내쉬었다.“위왕비를 다치게 한 것은 폭력보다 어쩌면 그의 말 때문이 아닌가 싶구나.”“위왕비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펴서 아이를 낳다니요……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사식이가 말했다.“아무래도 위왕이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야. 어찌 되었든 지금 둘 사이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무리 오해라고 해도 그들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겠지. 위왕은 어쩌면 자신의 자식일지도 모르는 뱃속의 아이를 죽였어.”원경릉은 같은 엄마의 마음으로 뱃속의 자식을 잃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위왕비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을지 걱정이 됐다. 위왕비는 위왕이 자신을 폐비시키겠다고 말을 했을 때보다 오늘이 더 충격적이었을 것이다.원경릉은 위왕비가 걱정되어 밤새도록 뒤척였다. 그녀는 사건이 벌어진 위왕부에 위왕비를 혼자 두는 것이 신경이 쓰였다. 위왕비는 지금까지 한 번도 왕부내에서 말썽을 일으킨 적이 없는 착하고 얌전한 사람이다. 하지만 고지는 다르다. 위왕비가 자신을 그렇게 만든 고지와 함께 위왕부에서 지낸다는 것을 말도 안 된다. 그래서 원경릉은 만아를 손왕부에 보내 손왕비에게 이 사실을 태후께 전하라고 했다. *손왕비가 궁에 들어가 태후에게 문안인사를 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황조모께서 셋째 며느리를 도와주셔야 합니다!”태후는 원래부터 셋째 며느리인 최씨를 가엾게 여기었으며 게다가 작년에 아이도 유산했으니 태후도 최씨가 이만저만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였다. 게다가 손왕비까지 입궁해 최씨의 억울함을 호소하니 태후는 얼빠진 셋째 위왕이 야속했다. 태후는 위왕이 부중에 다른 여인을 데리고 들어왔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손왕비의 말을 들은 태후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당장 사람을 시켜 고지를 명월암으로 보내거라! 명월암에서 아이를 낳을 때까지 데리고 있다가 아이를 낳자마자 아이를 받고, 고지는 자유롭게 해 주거라! 그리고 위왕을 당장 입궁하라고 해라!”태후의 명령을 들은 손왕비는 위왕과 마주치기 싫어서 재빠르게 태후에게 인사를 하고 궁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바로 정후부로 가서 태후의 결정을 원경릉에게 알렸다. 원경릉은 그 말을 듣고도 안도하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시종일관 불길함 예감이 사라지지 않았다.그녀는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고지가 집을 나가면 자연스레 위왕도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갈 테니 그 두 사람이 또다시 위왕비를 자극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다행으로 여겼다.엄마가 되고 나서야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원경릉은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당시 위왕비가 슬펐을 것을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아 눈물이 주륵주륵 흘렀다. 원경릉은 엄마가 되고 나서야 알았다. 일평생 세상에서 제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내 뱃속의 아이라는 것을……위왕비는 이성적인 사람이지만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아이를 잃은 엄마라면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에 죽을 만큼 아팠을 것이다. 게다가 그런 아이를 자신이 사랑하는 남편이 죽인 것이라니……지금 위왕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원경릉은 손왕비를 보았다.“손왕비님, 지금 가서 위왕비를 만나보고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게 어떻습니까?” “좋아요. 안 그래도 한 번은 가봐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위왕도 입궁해서 위왕부에 없을 테니 지금 가면 딱 좋을 겁니다.”그들이 정후부를 나서려고 하자 우문호가 도착했다. 진북후는 아직 경도로 돌아오지 않았으며 아마 며칠은 더 걸릴 것 같았다. 손왕비와 원경릉이 위왕부로 간다고 하자 우문호도 그들과 동행했다. 방에 들어가자 침상에 돌아누운 위왕비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들어가 헛기침 소리를 내자 위왕비가 고개를 돌리고
원경릉은 위왕비의 손을 잡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우리에게 얘기해도 됩니다. 손왕비님과 둘이 얘기하고 싶다면 제가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원경릉의 말을 듣고 위왕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초왕비, 전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해요.”“제가 한 게 뭐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닙니다.” 원경릉이 말했다. “아뇨.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따듯하게 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위왕비가 한숨을 내쉬며 원경릉의 손을 꼭 잡고는 “이제부터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제 인생에 바닥을 쳤으니 이제 남은 것은 올라오는 것 뿐입니다. 전 괜찮을 겁니다.”라고 말했다.그녀의 말을 듣고 원경릉은 안심은커녕 걱정이 더 됐다. 하지만 위왕비의 얼굴을 보니 휴식이 더 필요한 것 같아서 손왕비와 함께 위왕부에서 나와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정후부로 돌아온 원경릉이 계속해서 한숨을 내쉬자 우문호는 그녀에게 “내가 나중에 둘째 형님과 셋째 형님을 불러다가 얘기를 좀 해봐야겠어. 셋째 형님이 뭐 때문에 위왕비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아볼게.”라고 말했다.“오해를 하면 뭐 하고 해명을 하면 뭐 해? 이미 막장까지 갔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어? 솔직히 말해서 아무리 자기가 기분 나쁘다고 해도 뱃속에 아이를 유산시킨 것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야.”우문호는 처음보는 원경릉의 진지한 표정에 깜짝 놀랐다.“나는 셋째랑 달라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절대 너와 아이를 다치게 하지는 않을 거야.”“그 말을 듣고 평소 같았으면 너의 볼에 뽀뽀라도 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운이 없네. 지금 위왕비가 걱정돼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너무 걱정하지 마. 태후께서 셋째 형님을 부르셨으니, 태후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위왕도 궁에서 나올 때는 새 사람이 되어있을 거야. 셋째는 어릴 적부터 정모비의 말을 잘 들었으니까 말이야.”“내가 지금 걱정하는 것은 위왕이 그녀를 어떻게 할까 봐 걱정이 되는 게 아니야. 난 그냥 위왕비가 아무렇지 않은
“고지랑 초왕비가 어떻게 같은 급이라는 말이야?” 태후는 화가 나서 손바닥으로 위왕의 뺨을 때리고 위왕을 죽일 듯 노려보며“그 계집의 몸에 들어있는 아이와 초왕비의 아이가 어찌 같은 급이라는 것이야! 신원 확인이 된 초왕비와 정체불명의 어디서 굴러먹던 여자가 어찌 같을 수 있겠어?”라고 말했다.“결론은 황조모께서 고지의 출신이 마음에 안 드신다는 거죠?”“출신?”태후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위왕을 보며 “전에 정비 최씨가 그 계집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지? 그 은혜를 이 따위로 갚는 것이야?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그 계집이 아이를 낳는 순간 내쫓아 버릴 것이니 그렇게 알거라! 왕부에 들일 꿈도 꾸지 마!”라고 말했다.위왕은 태후의 말에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지만, 한 입으로 두 말하는 황조모가 아니기에 내심 두려웠다. 하지만 황조모가 손주를 바라왔기에, 아이만 태어나면 황조모도 고지를 아이의 어미로 받아줄 것이라는 생각 했다. 그는 최씨가 바람을 핀 사실을 황조모에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지금 그가 최씨에 대해 뭐라고 말해도 황조모가 믿을 것 같지 않았다. 출궁 한 후, 그는 위왕부에 공급되는 은사탄(銀絲炭)을 끊고, 음식도 입에 풀칠할 정도만 제공했다. 그는 왜 사람들이 위왕비를 감싸고도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위왕비를 싸고돌 때마다 그의 마음속에는 반감이 들었다. 위왕은 위왕부에 가서 오씨 어멈에게 차갑게 말했다. “이 정도면 먹고 살만 하잖아. 추우면 이불 더 꺼내서 덮으면 되고, 명이 길다면 죽지는 않겠지.”오씨 어멈은 냉혈한 위왕의 태도에 화가 나서 눈시울이 붉어졌다.“왕야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정말 너무하십니다!”“난 이제 저 사람과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위왕이 말했다.*다음날 손왕비가 위왕부로 왔다. “태후께서 며칠 후에 고지를 명월암으로 보내라고 명을 내렸답니다!”손왕비의 말에 위왕비가 멍하니 그녀를 보며 “왜 명월암으로 가라고 하셨을까요?”라고 물었다.
위왕부에 다녀온 이후 원경릉은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며칠 내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진북후가 드디어 경도에 왔다는 소식이 들리자 이번에도 황제는 친왕과 백관들로 하여금 성문으로 진북후를 마중하라고 명령했다. 진북후의 방문으로 친왕들이 분주하자 위왕은 고지를 명월암으로 데려다줄 수 없었다. 고지가 명월암으로 가는 것이 하루 늦춰지자 위왕은 은근히 기뻤다. 원경릉도 친왕과 백관들이 성문으로 가서 진북후를 마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진북후는 마치 유니콘 같은 존재였다. 소문으로만 듣던 이름을 현실세계에서 보게 되다니, 원경릉은 긴장이 된 나머지 한동안 위왕비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시각 위왕부.잠에서 일찍 깬 고지는 위왕이 나간 후 몸을 일으켜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눈이 떠지지 않았다. 한참동안이나 물 먹은 솜처럼 축 늘어진 채 잠과의 사투를 벌였다. 고지는 속으로는 일어나야지 하면서도 자꾸만 정신이 몽롱해져 잠에서 깨어날 수 없었다. 잠깐 정신이 든 그녀는 귓가에 들리는 소음 때문에 자신이 마차 안에 누워있는 것은 아닌가?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감기는 눈꺼풀 때문에 점점 깊은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지는 피부로 느껴지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며 잠에서 깼다.찬바람에 뼈가 시렸고 귓가에는 윙윙 바람 소리가 들렸다. “고지, 정신이 드는 게냐?”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고지는 눈을 번쩍 뜨고 주위를 살폈다. “위왕비……?”고지는 깜짝 놀라 목소리가 떨렸다.순간 그녀는 자신이 공중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느끼고 바닥을 내려다보며 놀라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성벽에 묶여 있었고 발아래에는 군중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으며 멀리 서는 진북후를 영접하는 무리가 성안으로 줄지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상황을 파악한 고지는 비명을 질렀다. “고지, 무서워할 필요 없어. 내가 왕야에게 이 소식을 전했으니 그가 금방 너를 구하러 올 것이야.”위왕비의 손에는 부
위왕비가 한 손으로 치마를 살짝 들추니 다리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그녀는 소매주머니에서 흰 천을 꺼내 다리에 단단히 묶었다. 고지는 담담한 위왕비의 행동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왕야 저를 빨리 구해주세요!”고지의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말 한 마리가 성문으로 달려들어왔다. 위왕은 말에서 내리자마자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듯 빠르게 고지가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최씨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고 목에 핏대가 서있었다. 고지는 위왕을 보고 긴장이 풀렸는지 울기 시작했다. “왕야! 저를…… 구해주세요!”“고지야!” 위왕은 매달려있는 고지를 보고 고개를 휙 돌려 성난 눈으로 위왕비를 노려보았다. 위왕비는 치마를 툭툭 내리며 천천히 일어나 날뛰는 위왕을 보았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만약 조금이라도 다가온다면 저 여자 몸에 바로 불을 붙일 겁니다.”“최씨, 고지를 건들기만 해 봐! 본왕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겨울바람이 세차게 불자 성벽을 이루는 돌 사이 구멍으로 바람이 나왔다. 바람소리가 마치 귀신들이 울부짖는 것 같아 간담이 서늘해졌다. “날 죽이든 살리든 전 상관없습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위왕비가 어깨를 으쓱했다. “최씨, 너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고지는 임신을 했다고!”위왕은 위왕비에게 말을 하며 조심스럽게 다가가려고 하다가 그녀의 비녀가 고지의 목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위왕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왕비, 저를 풀어주세요. 제가 꼴 보기 싫으시다면 바로 떠나겠습니다. 제가 왕야 옆에 있는 게 싫으시다면 제가 왕야도 떠나겠습니다!”고지가 소리쳤다.위왕비는 고지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지야, 내가 물어볼 게 있는데 바로 대답하거라. 그렇지 않으면 바로 불을 붙여버릴 것이니까……”“예, 왕비님 물어보세요.”“위왕이 내 아이를 유산하게 했던거 혹시 너는 알고 있었느냐?”고지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스치더
“무슨 환술? 환술에 누가 능하다고?”위왕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환술…… 참 웃기죠? 저도 환술에 걸려봤지만, 그때도 저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위왕비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바람에 일렁였다.“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위왕이 소리를 질렀다. 위왕비는 그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고지를 바라보았다.“고지야. 혹시 나한테 환술을 쓴 적이 있느냐?”고지는 눈물을 흘리며 “왕비, 없습니다. 제가 멍청하게 남의 남자를 넘본 것입니다. 미안합니다. 제발 저를 놓아주세요.”라고 말했다. “너는 멍청해서 내 남자를 넘본것이 아니다. 그리고 난 너와 위왕이 같이 살든 뭘 하든 상관없어…… 네가 멍청하다고? 너는 머리가 좋아. 처음에 내가 널 봤을 때 난 네가 그런 여우 같은 여자인 줄은 몰랐지, 내가 너에게 환술에 대해 물었을 때 네가 나에게 했던 말 기억나니?”위왕은 눈물을 흘리는 고지의 모습을 보고 격분하여 주머니에 있던 은 덩어리를 들어 위왕비에게 던졌고, 위왕비는 속수무책으로 위왕이 던진 은 덩어리에 맞아서 이마에 피가 줄줄 흘렀다. 그러나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버텼다. 은덩어리가 땅에 떨어지자 밑에 있던 백성들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그것을 줍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위왕비의 비녀가 고지의 손등을 찔렀다. 뾰족한 것이 피부를 관통하자 피가 튀었고 고지는 비명을 지르며 위왕비를 노려보았다. 위왕비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까만 눈으로 고지의 눈을 응시했다.고지의 손목에서 난 피가 위왕비의 얼굴에 튀었는데도 위왕비는 눈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위왕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입을 떡 벌리고 위왕비에게 소리를 질렀다. “최씨, 네가 이렇게 악독한 사람인 줄 내가 꿈에도 몰랐구나! 본왕은 네가 인자하고 덕이 있는 사람으로 여겼어!”위왕의 말에 위왕비가 조소를 띄었다. “인자하고 덕이 있다고? 지난 몇 년간 전 그런 사람이었죠.”“쓸데없는 소리 말고 고지를 풀어주거라! 도대체 원하는 것이 뭐야!”위왕은
혼담을 꺼낸 당일에 모든 일을 결정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하지만 원가는 세속적인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혼수도 원하는 대로 준비하게 했고, 잔칫상만 제대로 차리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잔칫상은 일곱째 아가씨가 결코 시집을 못 가는 것이 아니라고 세상에 알리는 용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혼인 상대가 황제가 가장 신임받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자리였다.따라서 잔칫상만큼은 빠질 수 없었다.이 부분은 탕양도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나름 저축해둔 돈이 있었기 때문에, 잔칫상을 준비하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하객 문제에 대해서도, 탕양은 아는 사람이 정말 많았기에 문제없었다. 다른 곳은 말할 것도 없고, 경성에만 백 상 이상은 문제없이 마련할 수 있었다.황제를 곁에서 모시는 자로서, 조정의 문무백관 중 그와 친분이 없는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되겠는가?이 모든 것을 논의한 후, 탕양은 마침내 의문을 물어볼 수 있었다.“노태군, 만약 일곱째 아가씨께서 동의하지 않으면 어찌해야 합니까?”“동의할 것이다. 원가는 혼사를 치르거나 상을 치르거나 내릴 결정을 둘 뿐이니, 그렇게 알고 있거라. 다른 선택은 없다.”노태군이 단호하게 말했다.“그건...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탕양이 초조해하며 말했다. 왠지 일곱째 아가씨를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혼사는 본디 두 사람이 마음이 맞아야 하는 것 아닌가.돌아가는 길에 탕양이 여전히 불안했해 하자, 원경릉이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너무 많은 생각은 하지 말고, 그저 신랑이 될 마음의 준비만 해두시게. 일곱째 아가씨는 원가 식구들이 설득할 것이오.”“그녀가 원하지 않으면 어찌합니까? 곤란하게 하거나, 억지로 결혼하게 해서 그녀가 상처받는 건 싫습니다.”“아가씨도 동의할 것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약도성에서 자네를 뿌리치고 떠났을 것이네. 하지만 곁에 남아 자네를 보살폈잖나? 그것만 봐도 자네에 대한 마음이 있는 것이오.”“정말입니까?”탕양이 놀랐는데, 얼굴에 은은하게 빛이 맴돌았
원경릉은 원가에서 이 혼사를 분명히 찬성할 것이라 생각했다. 노태군이 일곱째 아가씨를 시집보내고 싶어 안달이 난 상황에서 혼담을 꺼내는 것은 단지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원가의 유일한 문제는 일곱째 아가씨 본인이었는데, 그녀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일은 십중팔구 성공할 것이다.역시나, 다음 날 탕양과 함께 원가로 향한 원경릉은 원가에서 심지어 점쟁이까지 청해 두 사람의 사주를 확인하겠다고 하는 것을 보았다.두 사람의 사주를 본 점쟁이는 한참 확인하더니,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두 사람의 사주가 다소 상충합니다.”원 노태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어디가 상충하는가?”“한 사람은 닭띠, 한 사람은 개띠입니다. 이는 닭과 개가 편치 않은 사주라, 혼사를 치른 후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노태군은 탁자를 쾅 치며 말했다.“그럼 바꾸면 되지! 이제 보니 우리 딸은 말띠다. 방금 헷갈렸었다.”“말띠요? 말띠라면 괜찮습니다. 말띠는 올해 연분이 따르는 해 입니...”노태군은 점쟁이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괜찮다니 됐다. 이제 길일을 골라주게.”그러자 점쟁이는 다시 손을 펴고 계산하더니 말했다.“올해 좋은 날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무리 빨라도 연말쯤이어야...”“좋다. 이번 달 15일로 하지. 보름달이 뜨는 날, 사람도 오붓이 모이는 날이니, 좋지 않겠나?”점쟁이가 책자를 닫고,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예.”혼사는 원가에서 준비하니, 제시간에만 준비 된다면 안 될 것도 없었다.15일까지 남은 시간은 단 5일, 원가에서 딸을 시집보내는 일을5일 안에 끝낼 수 있을까 걱정 되었다. 준비할 시간도 아직 부족했는데, 혼례복을 만드는 일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하지만 원가는 이미 일곱째 아가씨를 위해 혼례복을 준비해 두었다. 3년마다 한 번씩 새로 만들었기에, 지금껏 서랍 속에 쌓여 있는 혼례복만 해도 7~8벌이나 되었다.혼수도 일찌감치 마련해 두고, 혼담을 꺼낼 자가 나타나기만 기다리
사식이는 다들 일곱째 고모의 안부를 걱정하지 않는 것이 이상해 의아해하며 물었다.“일곱째 고모께서 편지를 보내신 겁니까?”그러자 셋째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그래. 편지가 왔단다. 며칠 놀다가 곧 경성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구나.”사식이는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일곱째 고모께서 돌아오고 나서 혼담을 꺼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일곱째 고모가 동의하지 않으면 일이 난감해질 텐데요.”노태군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이미 모든 일을 저질렀느넫 이제 와서 동의하지 않는다니? 감히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냥 목을 매겠다!”노태군은 일곱째 고모가 열여덟 살이 되던 때부터 그녀의 혼사를 기다려 왔다. 계속 기다리다가 이미 머리카락이 다 하얘져 버렸지만, 그녀는 아직 혼인 기약조차 없었다. 이번에도 혼사를 정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는게 더 나았다.그녀 뿐만 아니라 모두가 일곱째 아가씨가 빨리 시집가기를 바라고 이씩 때문에, 이 일은 서둘러 진행하기로 했다.“사식아, 네 고모에게 편지를 보내, 내가 갑작스레 병에 걸려 거의 죽게 생겼다고 전해라!”노태군이 단호히 명령했다.딸을 집으로 불러들이기 위해서 스스로 저주까지 불사하는 그녀는 정말 독한 늙은이었다.서일은 탕양을 데리고 서둘러 궁으로 향했다. 중매인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기에, 바로 황후를 찾아가야 했다.소월궁에서 우문호 부부는 탕양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우문호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짐이 보기엔, 일찍 일곱째 아가씨에게 네 마음을 고백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이리 일을 저지를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탕양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고,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갔다. 하루라도 빨리 그녀를 만나지 못한다면 불안에 휩싸여 버릴 것 같았다. 그는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폐하,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하실 때가 아닙니다… 제발 사람을 보내 그녀가 어디 있는지
오래전의 악몽이 마음속에서 되살아나, 탕양은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녀가 혹시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스스로 뺨을 몇 대 때리고는 다시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아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으면 죽어도 죄를 씻을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를 따라잡으려 죽자고 달려도, 끝내 그녀를 볼 수 없었다.그렇게나 빨리 도망간 건가?그렇게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쉬지도 않고 곧장 원가로 달려갔다.마침 서일과 사식이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와 있던 참이었는데, 대문 앞에 도착하니, 탕 대인이 거지처럼 문지기 앞에 쓰러지다시피 주저앉아 먼지투성이의 얼굴에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문지기의 옷깃을 움켜쥔 채 다급히 묻고 있었다. “일곱째 아가씨는? 너희 일곱째 아가씨는 대체… 어디 있느냐?”그러자 문지기는 놀라 얼어붙고 말았다. 그는 이렇게나 사나운 탕 대인을 본 적이 없어 더듬거리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일곱... 일곱째 아가씨께서... 탕 대인과 함께 약도성에 가신 거 아니셨습니까…?”“그럼 아직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탕양이 소리쳤다.“아직... 아직 못 뵈었습니다…!”바로 그때, 서일이 다가와 문지기한테서 탕 대인을 떼어놓으며 말했다.“무슨 일이십니까?! 우선 손부터 놓으십시오. 옷이 다 찢어지겠습니다.”탕 대인은 그만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며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큰일이야… 내가 그녀를 망쳐 버렸네! 죽어도 이 죄를 씻을 수 없을 것이네…!”“무슨 일입니까? 저희 고모께서 지금 어디 계십니까?”사식이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탕 대인은 비참한 표정을 지으며, 눈물 투성이가 된 얼굴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모르네… 나는 돌아온 줄 알고 있었네...”바로 그때, 무거운 발소리와 함께 지팡이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원가의 노태군이 부축을 받으며 다가오는 것이었다! 탕양이 고개를 들자, 노태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탕
냉정언은 자기도 모르게 죄책잠이 들어 미간을 찌푸렸다.‘이번에 정말 큰일을 저지른 것인가?’그는 그저 탕양에게 술을 먹여 일곱째 아가씨에게 진심 어린 말을 꺼낼 용기를 주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동안 탕양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황제뿐만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었고, 다들 그를 안타까워했었다.탕양은 다섯째가 초왕이었을 때부터 초왕부와 다섯째, 그리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많은 일을 해왔다. 그렇게 반평생을 북당을 위해 헌신했으나, 그를 진정으로 주목한 이는 많지 않았다. 특히 과거에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탓에 평생을 스스로도 용서하지 못한채, 조정을 위해 뛰어난 공을 세우고도 관직이나 봉록을 거절하며 죄를 속죄하듯 살았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누구나 실수를 범할 수 있는 법이니까. 탕양은 이미 그 누구보다 훌륭히 잘해왔고, 게다가 정과 의리에 발목 잡힌 것은 많은 영웅이 저지르는 흔한 실수였다. 고금의 역사를 통틀어, 결코 그 혼자만이 저지른 행동이 아니었다.탕양은 일곱째 아가씨와 벗이라는 관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늘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술에 취하지 않은 이상, 맑은 정신으로는 절대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을 것이기에, 술에 취하게 하면, 경성이 아닌 변방의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몇 마디 속마음 정도는 털어놓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하지만 예상외로, 탕 대인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쌓였던 건지... 만취 상태에서 무슨 일을 저지른 것 같았다. 대체 이 마음을 얼마나 오랫동안 품었던 것일까?상황이 아주 복잡해졌다.‘탕 대인 아주 못 쓰겠구먼! 이를 어찌 마무리 짓는단 말이냐…?!’원가의 상대하기 쉽지 않은 여장군들을 떠올리니, 냉정언은 순간 뒷골이 땡겨 머리를 쥐어뜯었다.그러고 나서 고개를 돌리니, 냉명여가 눈 앞에 서 있었다. 냉명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버지, 탕 대인은 어찌 일곱째 아가씨와 그런 일을 벌인
탕양은 지금까지 살면서 술에 취해 저지른 잘못이 단 하나뿐이었다. 비록 그 일도 나중에 사실이 아니었음이 밝혀졌지만, 그 일로 그는 술에 취하면 정말로 이성과 기억을 잃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렇기에 그 후로 술을 마시더라도 되도록이면 취하지 않게 애썼다. 하지만 어젯밤은 예외였다. 그는 이곳 사람 모두를 믿고 있었기에 경계를 풀었던 것이다.남녀 간의 일도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가 되어서 어젯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의부님! 의부님!"바로 그때, 문밖에서 호명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탕양은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호통쳤다."일단 들어오지 말거라!"그는 급히 이불을 걷어내고, 바닥에서 옷을 찾아 황급히 입은 후, 이마를 문지르며 정신을 가다듬은 뒤에야 문을 열어 주었다.문밖에서 호명이 물었다."이제 막 일어나신 겁니까? 아직도 취기로 힘드십니까?"탕양은 머릿속이 어지럽고 복잡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다."괜찮다. 무슨 일이더냐?""식사하시라고 부르러 왔습니다. 아! 일곱째 아가씨께서 경성으로 돌아간 것을 알고 계십니까? 같이 가실 줄 알았는데 먼저 떠나셨더군요.""… 돌아갔다고?!"탕양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예!"호명이 그의 얼굴을 보다가 잠시 멈칫하며 말했다."의부님… 혹시 어젯밤 누구에게 맞으셨습니까?"탕양은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만져 보았는데, 그제야 얼굴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황급히 동경을 찾아 얼굴을 비춰보았는데, 왼쪽 뺨에 여러 개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누군가에게 뺨을 맞은 것 같았다.그러자 어렴풋이 한 여인이 세게 뺨을 때리며 욕설을 퍼붓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떠올랐다.하지만 여전히 머릿속이 텅 비어 있어 창백해진 안색으로 생각에 잠겼다.‘설마 내가 취기를 빌어... 그래서 떠난 것이었구나...’이번 사건은 목숨을 내놓고 속죄해도 부족할 정도였다."말을 준비하거라! 어서!"탕양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소리
연회는 계속 진행되었고, 냉정언은 술잔을 들고 계속 탕양에게 술을 권했다. 잔을 몇 번이나 주고 받자, 탕양은 머리가 머리가 어지러워져 말조차 똑바로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연회가 끝난 후, 냉정언이 일곱째 아가씨에게 말했다."술을 꽤 마셨다 보니, 탕양이 좀 취한 것 같네. 정원에 나가 산책을 조금 하면서 술기운을 가시는 것이 어떻소?"일곱째 아가씨도 약간 취한 상태였기에, 바람을 쐬며 땀을 내면 술이 깰 것 같다며 동의했다."예. 그럼 다들 돌아가서 쉬시지요. 제가 호명과 함께 탕 대인을 돌보겠습니다.""좋소. 수고하시게나!"냉정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자, 어서 돌아가시게!"그렇게 사람들은 모두 새가 흩어지는 것 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일곱째 아가씨는 호명과도 함께 산책할 생각이었는데, 빠르게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이 어이가 없는듯 웃음을 터뜨렸다.그러고는 탕양의 붉게 상기된 얼굴을 보고 물었다."괜찮습니까? 걸을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탕양이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났는데, 술에 많이 취한듯 몸을 심하게 휘청거렸다."어찌 못 걷겠습니까? 취하지 않았습니다!""예. 그럼, 몇 걸음 더 걸어보시지요. 정말 못 걸으시겠으면 방으로 돌아가 쉬시고요. 취기를 덜어줄 탕을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그러자 탕양은 허리에 손을 얹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나갔다. 곧게 뻗은 직선을 그리며 터벅터벅 걷고는 뒤돌아 일곱째 아가씨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보시지요. 얼마나 똑바로 걷는지! 안 취했습니다. 이제 믿을 수 있습니까?"일곱째 아가씨는 그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하하하. 예, 안 취하셨네요. 그럼 이만 나가서 함께 산책하시지요."그녀는 그가 오래 걷지 못할거라고 생각해, 방으로 데려가 쉬게 하기로 했다.역시나 문을 나서자마자 탕양은 난간을 붙잡고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하도 휘청거리는 탓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기에, 일곱째 아가씨는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를 부축했다.그러자
"탕 대인이 저를 예쁘다고 말해 주셔서 정말 기쁩니다. 그러니 일곱째 아가씨께도 예쁘다고 말해 보십시오. 분명히 기뻐하실 것입니다!"하지만 탕 대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다를 겁니다. 일곱째 아가씨는 이제 그런거에 좋아할 나이를 지났습니다. 지금 그녀에게 예쁘다고 말하면, 그저 무미건조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어찌 그럴 리 있습니까? 누구나 칭찬받는 것을 좋아하는 법입니다. 탕 대인, 대인께서 정말 재능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십니까?"탕 대인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예? 하하하. 그렇습니까?""예! 모두가 그렇게 말했습니다!"탕 대인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미소를 지었다."과찬입니다.""기분 좋으십니까?"택란이 묻자 탕 대인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뜻을 알아차리고 멈칫하며 말했다."이 녀석!"택란은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탕 아저씨도 누군가에게 꼭 사랑받으시길 바랍니다."탕 대인은 이 말에 크게 감동해서 택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예. 고맙습니다."저녁엔 계약이 성공한 기념으로 연회가 열렸다.소박한 술자리긴 했지만, 커다란 술통들이 준비되어 있어 모두 마음껏 마시며 즐길수 있었다.택란은 술을 마시지 않기에, 주 아가씨가 매실청을 대신 준비해 주었다. 새콤달콤한 맛이 택란의 마음에 쏙 들었다.술잔을 주고받으며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모두 패기 있게 약도성을 북당에서 제일가는 도성으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다.일곱째 아가씨는 벌써 독산을 어떻게 개발할지부터 고민하고 있었는데, 독산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막막했기에 사람들에게 의견을 구하기 시작했다.각자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지만 대부분이 경치를 개발하자는 내용이었다.반면, 택란은 새로운 생각을 제안했다. 독산에 온천이 있으니 오두막을 지어 온천을 끌어들여 돈을 받고 여러 개의 탕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냐며, 온천수가 몸에 좋다는 점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자고 제의하였다.택란의 생각은 이 시절
탕양은 자신이 여자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자부했었다. 특히 일곱째 아가씨처럼 강인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을 더 선호하기에 굳이 자신과 인연을 맺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는 그의 큰 착각이었다.여인의 마음은 늘 갈대처럼 변덕스럽고, 아무리 강인한 사람이라도 다정함이 필요한 순간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일곱째 아가씨는 오랫동안 혼자 외롭게 지내왔는데, 중년에 접어들며 그 외로움이 더욱 깊어진 것이다.누군가 곁에 있다면, 삶의 방식도 달라질 수 있지만, 물론 잘못된 연으로 나빠질 가능성도 있었다.원가의 가훈은 항상 군주에게 충실하며, 엄청난 용기도 있었다. 심지어는 원가에서 키운 닭조차 남의 집의 닭보다 더욱 용감할 정도였다.하지만 한 번의 좌절로 인해 사랑을 믿지 않겠다는 것이 과연 용기있는 행동 일까?물론 그녀가 반드시 탕양을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 다시 한번 용기를 내볼 수도 있었다.하지만 탕양이 먼저 용기를 내어 말한다면, 그녀 역시 그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여태껏 그녀의 마음에 들어온 사람은 오직 탕양뿐이었다.그리고 어쩌면 시도해 봐야만 서로 맞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탕양과 잘 맞는다고 느끼는 건 그녀가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아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착각일지도 모르니 말이다.경성으로 돌아간 후에도 탕양이 말을 꺼내지 않는다면, 그녀는 공개적으로 구혼에 나설 생각이었다. 한편, 택란이 주 아가씨와 함께 밖으로 나가며 물었다."탕 대인이 왜 나쁜 사람인 것이오?""여인을 훔쳐봤습니다.""탕 대인이 아가씨를 좋아하지 않소? 어찌 못 보는 것이오?"주 아가씨는 택란이 이런 부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공주에게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사내가 여인을 사모하면 상대의 시선을 바라보지, 다른 곳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러니 탕 대인은 일곱째 아가씨를 사모하는 것이 아닙니다.""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