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나리는 숨소리가 점점 골라지고 온 몸에 긴장이 풀리며 수면 상태에 들어갔다. 안풍 친왕비가 살짝 불러도 반응이 없어 그녀는 한참동안 사랑이 넘치는 눈빛으로 물끄러미 이리 나리를 바라보다가 문을 열고 나갔다.원경릉은 밖에서 기다리다가 안으로 들어갔고 안풍 친왕비가 문 앞을 지켰다.원경릉은 창문을 다 닫고 사랑채 안의 휘장을 전부 내려 어둡게 했다. 방안은 마치 황혼을 지난 어두운 밤 같았다.원경릉은 방금 안풍 친왕비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는데, 엷은 침향이 느껴지며 마음이 아주 고요해졌다.은은한 안개가 온천지를 뒤덮자, 혼란스러운 미로에 빠진 듯 눈앞에 구불구불한 샛길이 보이고 의식을 연장하자 수많은 촉감이 생겨났다. 원경릉이 못 들어갈 곳이 없어서 앞으로 뚫고 나가며 모든 정보를 수집했다. 어떤 건 이리 나리의 기억이고, 또 어떤 건 사건이 있었던 후에 알았던 정보로, 이것으로 당시 진상을 복기하기에 충분했다.36년 전, 풍도성.풍도성은 북당 건국 초기 이미 북당에 귀순했으나 계속 자치권을 인정받아 매년 조공만 바치기면 조정은 상관하지 않는 지역이었다.성주 안지여는 안 씨 집안에서 가장 뛰어난 후계자로 젊은 나이에 성주의 자리를 이어받아 이리 집안 큰 아가씨를 아내로 맞았다.이리 집안은 풍도성에서 명성이 자자한 천문 세가인데, 천문이란 별의 형태를 보고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파악하는 것으로, 천문 세가는 하늘의 뜻에 순행하는 집안을 말한다.그런 이리 집안의 가주가 누군가를 위해 하늘을 거슬러 운명을 바꾼 탓 때문에 참혹한 횡액을 당해, 큰 아가씨인 이리봉청이 가주가 되었다. 그렇게 이리봉청이 가주가 된 지 3년 만에 풍도성 성주 안지여에게 시집을 갔고, 그해 그녀의 나이는 18세였다.이리봉청은 천문 능력을 이어받아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역천개명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 능력을 갖춘 자는 하늘의 뜻에 순행해야 하는데, 역천개명 할 경우 그 저주가 역천개명을 행한 사람에게 돌아오게 된다. 이리봉청의 아버지가 바로 그렇게
따뜻했던 안지여가 극도의 냉혈한으로 돌변해 이리봉청에게 한 가지를 제안했는데, 바로 어떤 사람을 위해 역천개명을 시행하라는 것이었다.역천개명은 이리봉청의 수명을 깎아야 했고 참혹한 횡액을 당할 것이 분명했지만 안지여는 그런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고, 그녀가 죽고 싶지 않으면 역천개명의 저주를 곧 태어날 아이에게 넘겨야 한다고 협박까지 했다.안지여의 이러한 협박은 이리봉청을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뜨리기 충분했다. 슬픔과 분노로 흽싸여 금방이라도 미쳐버릴 지경이었지만 마음의 고통을 겨우 누르고 안지여에게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는지만 무를 뿐이였다. 이리봉청의 뱃속에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안지여의 아이였기 때문이었다!안지여는 성주 저택 본관 태사의에 앉아 두 손으로 의자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조금의 자비도 없이 차갑게 말했다. “맞아. 걔도 내 아이지. 그래서 그 아이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나한테 있는 거야. 내 아이가 역천개명의 저주를 받는 거니까 내가 너한테 빚진 건 이제 없는 셈이군.”이 말은 원경릉의 가슴을 다시금 후벼팠다. 분명 이리 나리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은 것이겠지만 이리 나리의 뇌리에 깊게 박혀있었고, 원경릉도 이 말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이 말이 이리봉청에게 얼마나 큰 상처였을지 상상이 갔다.이리봉청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당장 선택해야 했다. 사실 선택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게 이리봉청에게는 오직 한가지 선택지만 있을 뿐이었다. 안지여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천문 세가의 사람은 전부 죽음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북당 황제는 너무 멀리 있었다. 실질적으로 풍도성 황제는 안지여로 안지여가 죽이겠다면 죽이는 거였다. 하지만 천문 세가 백성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고 있어 일반적인 경우라면 민심이 두렵기에 안 지어가 천문 세가 사람을 건드릴 수는 없었다. 그런 안지여가 누군가를 위해 민심을 잃고 천하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더라도 역천이하겠다는 것이다.안지여가 아끼는 사람은 바로 소여쌍으로, 안지여의 사촌 여동생이자
전신에 흰옷을 입고 병색이 완연한 얼굴에 가냘프기 그지없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눈빛은 우아하고 단아해 보였다. 소여쌍은 장의자에 기대 이리봉청이 들어올 때 기침을 몇 번 하더니 도자기처럼 하얀 피부에 약간 붉은 기운이 돌며 가냘픈 자태로 이리봉청을 바라봤다.이리봉청은 극도로 고통스러운 마음을 누르고 안지여가 자신을 위해 한 일을 아는지 소여쌍에게 묻자 소여쌍은 이미 알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안지여는 이리봉청과 혼인하고 1년 동안이나 잘 대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소홀하게 한 적이 없어, 역천개명의 저주는 당신이 받는 게 아니라 뱃속의 아이가 받는다고 했다.소여쌍의 말은 안지여와 똑같이 뱃속의 아이는 안지여의 아이니 그 애를 어떻게 할지 결정권은 안지여에게 있다고 했다. 따라서 그 둘 모두 안지여가 이리봉청에게 해를 끼치는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이리봉청은 이 아이는 자신의 아이기도 하다며 분노했다. 하지만 소여쌍은 이 말을 듣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기만 했다. 아이의 목숨을 사용하기 싫으면 본인 목숨으로 하면 되지 않냐고 그건 당신의 선택이지 안지여의 선택이 아니라고 했다. 안지여는 여전히 당신에게 빚진 게 없고, 빚진 건 뱃속의 애라고만 말할 뿐이였다. 이리봉청은 결국 화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소여쌍의 따귀를 갈겼다.그러자 안지여 또한 격분해서 이리봉청의 여동생 이리봉우를 죽이고 그녀의 시체를 성문에 걸어 이리봉청에게 징벌로 삼게 하라고 명령했다.원경릉은 여기서 그들을 엿보는 것을 그쳤다.…한편, 이리 나리가 드디어 깨어났다. 이리 나리가 눈을 뜨는 순간, 눈엔 핏발이 서 있어 원경릉은 이리 나리가 내뿜는 분노와 증오를 느낄 수 있었다. 환타가 말했던 것처럼 피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하지만 곧바로 안정을 되찾더니 약간 멍한 표정에 쉰 목소리로 말했다. “… 왜 여기 계시는 거죠?”원경릉은 슬픈 눈빛을 거둘 수가 없었다. 이리 나리의 기억 속에서 엿본 일은 그와 관계없는 원경릉에게도 절망과 고통을 느끼게 하는데 이리봉청은
안풍 친왕비가 냉엄한 눈빛으로 말했다. “뭔가 찾아낸 거야?”원경릉은 자신이 엿본 기억을 하나도 빠짐없이 안풍 친왕비에게 이를 악물며 얘기했다. 의식을 엿본 탓에 원경릉은 정말로 의식 속에서와 같은 고통을 온 몸으로 느낀 것이었다.안풍 친왕비는 다 듣고는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리고 속았다는 사실에 경악하며 놀라했다. “결국 그런 거였어?!”원경릉이 의아해하며 안풍 친왕비에게 물었다. “모르셨어요..?”빛이 창문 귀퉁이로 안풍 친왕비의 얼굴에 쏟아지며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안풍 친왕비의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내 주었다. “좀 알고 있다고는 생각했는데 네 얘기를 듣고 보니 몰랐다고 밖에 말할 수 없네. 이리율도 몰랐어.”“정말 모르셨다고요? 하지만 이 것을 몰랐다면 이리 나리 마음속의 증오심과 피비린내는 어디서 온 걸까요?”안풍 친왕비가 탄식했다. “이리율은 어릴 때부터 계속 악몽을 꿨지. 기억의 일부 단편을 꿈으로 꿨던 거야. 이리율 어머니는 아이를 낳을 때 어떤 방법으로 일부 의식을 이리율 머릿속에 남겨뒀을지도 몰라. 전에 이리율 꿈속 상황에 근거해서 조사해 봤는데 풍도성에 대해 조사하자 이리율의 부모가 누구인지는 알 수 있었지만, 천문 세가 사람이 다 죽어서 풍도성 백성 모두 이 일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지. 천문 세가는 지난 가주가 다른 사람을 위해 역천개명한 탓에 천문 세가 전체가 횡액을 당하고 말았다는 말만 들었지. 그리고 이리율의 어머니 이리봉청은 이리율을 낳을 때 난산으로 죽었다고 했어. 하지만 그러는 동안 이리율 마음속에 증오는 갈수록 커져 널 찾은 거야. 깊이 좀 엿봐달라고. 사실 이리율 머릿속 깊이 감춰져 있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의식은 그 사건이 해결돼야 진정으로 평온해질 수 있을 거야.”안풍 친왕비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사실 전에 안지여 문제를 짐작하긴 했어. 하지만 안지여가 이리율의 목숨을 가지고 사랑하는 여자의 목숨을 구할 줄 생각도 못 했네. 그 녀석 꿈에 나타나는 어머니가 난산한 게 이리율 마음에 걸림돌이
이리 나리는 정신이 약간 멍해 보이는 것이 원경릉이 전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리 나리는 진정 속세를 벗어난 사람이라 언제든 담담하고 시원시원했는데 말이다. “사부님, 피곤하시면 회의에 가지 마시고 집에서 좀 쉬시지요.”이리 나리가 고개를 저었다. “잠이 안 오네요.”“불면증 아닌가요? 약 처방해 드릴까요?”“됐습니다. 자고 싶지도 않고.”원경릉이 놀라서 물었다. ”왜요?”이리 나리가 몇 걸음 앞으로 가다가 우뚝 멈춰서서 원경릉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주 사실 같은 꿈 꿔본 적 있어요?”원경릉이 이리 나리의 질문에 답했다. “있어요.”“내가 말하는 사실은…. 꿈속의 희로애락의 감정이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여전히 남아서 꿈은 기억 못 하지만 느낌은 기억하는 거예요. 그런 적 있나요?”갑자기 바람이 불자 이리 날의 하얀 겉옷이 휘날렸다. 여전히 옥을 깎아 놓은 듯 잘생긴 모습을하고 있는 이리 나리였지만 원경릉에겐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원경릉이 작게 말했다. “.. 있었어요.”그러자 이리 나리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령이가 아이를 낳은 뒤로 자기만 하면 똑같은 꿈을 꾸는데 그 꿈은…. 뭐라 할까..? 견딜 만하지 않아요. 그런 꿈을 꾸고 싶지 않아서 자고 싶지 않은 겁니다.”원경릉은 멍해져 뭐라고 답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아직 모든 일이 다 밝혀진 것이 아니라 이리 나리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엿보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이리 나리는 곧바로 풍도성에 안지여를 찾아가 복수할 것이 틀림 없었기 때문이다.잠시 후 궁으로 돌아온 원경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문호를 안고 엉엉 울기만 했다.본인도 뭐가 그렇게 괴로운지 말로 설명하기 힘든데 마치 자신이 이리봉청인 것처럼 배신감, 분노, 슬픔이 가슴 저 밑바닥을 칭칭 감싸며 예리한 칼로 가슴을 난도질하듯 아파왔다.원경릉도 이렇게 강렬하게 느끼는 데 이리 나리가 꿈꿀 때 원경릉보다 훨씬 강렬하게 느낄 게 틀림없었다. 따라서 날이 갈수록
원경릉은 진정하게 되었다. 우문호가 아무 걱정도 안 했으면 했지만 그를 속일 수 없는 데다 이렇게 대성통곡까지 했으니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 잠도 못 잘 게 분명했다.결국 원경릉은 안지여가 이리봉청에게 저지른 짓을 얘기해주었다. 우문호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더니 눈가가 붉어졌다. 그리고 이를 갈며 소리쳤다. “천하에 어떻게 그런 악독한 인간이 있을 수가 있지? 개돼지만도 못한 것들!”“당신, 풍도성 성주 안지여를 만나본 적이 있어?” 원경릉이 물었다.“예전에 경성에 온 적이 있어서 한 번 보긴 했어. 거의 얘기도 안 나눴지만, 그에 대해 인상에 남은 게 있어. 부부가 같이 경성에 왔는데 서로 정말 사랑하는 모습이었거든. 그때 안 성주는 아내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며, 많은 내명부 여자가 성주 부인은 행복하시겠다고 부러워했지.”우문호가 차갑게 웃으며 매서운 눈빛을 보였다. “소위 끔찍하게 아끼는 사랑 뒤에 이런 악독한 심사가 숨어 있을 줄 몰랐어. 다른 사람의 목숨과 피눈물을 자신의 사랑을 이루는 데 쓰는 인간에게 어떻게 원한을 가지지 않을 수가 있어?”우문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벌떡 일어나 당장이라도 나갈 채비를 했다. “안 되겠어. 성지를 내려 안지여를 경성으로 불러들여 죄를 묻고 이리 나리를 대신해 원수를 갚아야겠어!”원경릉이 눈물을 닦고 얼른 말렸다. “안 돼. 절대 안 돼. 우리가 아직 전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얘기하면 안 되기도 하고, 알아도 원수를 갚는 건 이리 나리가 직접 해야 하는 거야.”우문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원경릉의 말이 맞다는 건 알지만 여전히 분이 사그라지지 않았다.천천히 자리에 앉아 원 경릉을 한참 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두 눈 멀쩡하게 뜨고 이리 나리가 괴롭힘당하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어. 그리고 이리 나리 모자가 당한 만큼 피 맺힌 원한을 이리 나리가 다 못 갚으면 이리 나리 모자를 위해 반드시 정의를 바로 세우고 말겠어.”원경릉이 우문호의 손을 잡았다. “알아, 나도 가만있지
이리 나리는 우문호를 보고 의외라고 생각해 얼른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정무 보셔야 하는 것 아닌지요?”우문호는 이리 나리의 피곤함에 절은 얼굴과 눈 밑에 다크서클을 보고 마음이 시큰거렸지만, 일부러 대충 말했다. “정무는 봐도 봐도 끝이 없으니, 우리 천행이 보면서 한숨 돌려볼까 해서 왔지.”“무리하지 마세요. 그러다 몸 상하지 마시고!” 이리 나리가 웬일로 자상한 말을 했다.그러자 우문호는 살짝 눈시울이 붉어져 이리 나리와 안으로 들어갔다.셋이 본관에 들어가니 마침 안풍 친왕비가 차를 끓이고 있다가 그들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잘됐네, 막 고산운무차를 우리는 참이였는데, 다들 먹을 복은 있네!”이리 나리가 의아해했다. “차를 우리셨다고요?”“내가 차를 우리면 안 돼?” 안풍 친왕비가 뿌루퉁하게 반문했다.이리 나리가 웃음을 지었다. “목이 마르면 우물 물을 드시지 않나요? 혼자 차를 다 우리시고 정말 해가 서쪽에서 뜨는 일이네요.”안풍 친왕비가 이리 나리에게 살짝 눈을 흘겼다. “사람이 즐길 줄 알아야 한다던 때는 언제고, 자신을 함부로 하지 말라며? 네 말대로 한 건데 별론가 봐?”이리 나리가 안풍 친왕비 곁에 앉고는 왕비 어깨에 비스듬히 기대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게 잘하시면 저야 물론 기쁘죠.”안풍 친왕비는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웃으며 우문호와 원경릉에게 인사했다. “이리 와, 황제, 황후, 너희들도 와서 한잔하면서 차 끓이는 솜씨가 어떤가 봐줘. 좀 진전이 있지 않아?”우문호와 원경릉은 전에도 안풍 친왕비의 차를 마셔본 적이 없어서 솜씨가 늘었는지 어쨌는지 전혀 알 도리가 없지만 안풍 친왕비가 차에 뭘 넣었는지는 알겠다. 이리 나리를 재우려하는 것이었다.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과연 안풍 친왕비가 이리 나리에게는 공도호에 들어 있는 차를 따라주고, 원경릉 부부에게는 자사호에 들어 있는 차를 따라주었다. 안풍 친왕비는 차를 따르며 이리 나리의 주의를 끌기 위해 계속 주절거렸다. 이리 나리는 안풍 친왕비를 절
우문호는 이전까지 이리 나리가 눈 늑대를 가지고 싶어 했던 게 같이 놀고 싶어서라고 생각했으나, 눈 늑대에게 안정감을 찾으려 했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았다.이리 나리가 경성에 온 뒤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신뢰하는 대상이었고 어떤 견고한 것도 다 부술 수 있는 강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해 왔다. 그래서 이리 나리도 희로애락을 가지고 칠정육욕에 시달리는 평범한 사람임을 잊었다.우문호는 이리 나리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진 것을 한탄하며 순간 가슴이 먹먹해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안풍 친왕비는 찻잔을 돌리며 마음을 모질게 먹으며 말했다. “이미 섬전위를 풍도성에 보내 안지여를 지켜보게 했어. 지금 풍도성은 안지여의 생일연회를 준비 중이었다. 다음 달은 안지여의 대수 외에도 두 사람이 혼인한 지 36주년 기념으로, 흥청거리며 들뜬 분위기는 너희들 혼례 때에 절대 못 미치지 않더라. 진상을 전부 똑똑히 밝혀낸 뒤 반드시 이리율이 풍도성에 가야 해. 섬전위와 흑영위가 도와줄 거고 늑대파도 있으니 이 원수는 갚고 말겠어.”원경릉과 우문호는 눈을 마주치며 원한과 아픔을 공유했다. 36주년 기념으로 대수를 올린다는 말은 이리봉청이 죽자마자 바로 혼례를 올렸다는 말이었다.이것이야말로 진정 죽어야 마땅한 죄였다!우문호는 밖에 앉아 접객실 안의 사람을 지키고 눈 늑대도 우문호 곁에서 늘어지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안풍 친왕비는 마당에 앉아 있었는데, 그 곁에는 눈 늑대 한 마리가 엎드려 있었다. 안풍 친왕비는 눈 늑대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으며 마당 담장을 타고 올라가는 장미 덩굴을 보고 있었다. 햇살이 안풍 친왕비의 싸늘한 눈에 비춰들었다.방안은 어제처럼 침향에 불을 붙이고 연한 향기가 코끝을 감쌌다. 원경릉은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자신의 머릿속 생각을 비우고 천천히 사고의 촉수가 펼쳐지는 대로 놔뒀다.…36년 전 풍도성.천문 세가의 둘째 아가씨 이리봉우의 시체는 풍도성 성문에 걸렸다. 15살 앳된 소녀는 꽃처럼 아름다웠고 올해 막 급계를 한 뒤라 성 중의
잔뜩 긴장한 채로 앞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있었던 주 지부는 우렁찬 상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중심을 잃은 듯 비틀거렸다. 그는 이내 팔을 뻗어 망루의 기둥을 붙잡으려 했지만, 허공에서 멈추고 말았고, 그대로 몸이 앞으로 쏠려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말에서 빠르게 날아올라,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그에게 달려갔다. 상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주 지부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를 안고 빙 돌아서 바닥에 착지했다.주 지부는 깜짝 놀라서 그만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를 구해준 사람은 반짝거리는 눈망울에, 품위 있는 모습의 젊고 잘생긴 사내였다. 주 지부는 그를 황제의 호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의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새도 없이 그에게 예를 올렸다.“대인,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그때 말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서일이 먼저 말에서 내려, 다급히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으십니까?”우문호도 매우 놀란 듯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주 지부는 정말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숨을 들이쉬었다.“괜찮다.”그러고는 주 지부를 보며 물었다.“자네는 누구요?”주 지부는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며, 누가 황제인지 추측했다.황제는 올해 마흔에 가까운 나이로 알려져 있었기에 위엄이 넘쳐 보일 것이었다. 그는 일행 중, 냉 수보와 홍엽을 만난 적 있었기에, 거친 모습을 한 이 인물은 아마도 호위로 추측된다. “묻지 않았소? 자네는 누구요? 어찌 죽으려고 하는 것이오?”서일은 그가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큰 소리로 다시 물었다.주 지부는 울 지경이었다. 냉 수보가 그를 보고 있으니, 예를 올려야 하지만, 황제도 자리에 있으니, 바로 냉 수보에게 예를 올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황제란 말인가?그는 황제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어, 결국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고는 그들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
원경릉의 말은 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자리에 있던 관리들은 기쁨과 동시에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 대인은 땅에 엎드려 온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는 살아생전에 자신이 황제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평소 차분하고 신중한 주 지부도, 그도 감정이 격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했다.황후를 만난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라 생각했는데, 황제까지 오신다는 소식에 그의 마음은 흥분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원경릉은 평생을 경성에서 다섯째와 함께 있었기에, 그녀는 그저 그가 온다는 사실을 간단히 전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녀는 다들 걱정 없이 역병을 치료하고, 언제나 황제가 그들의 뒤를 든든히 지켜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을 보니, 황제가 직접 오는 것이, 지방 관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다.원경릉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폐하게서는 그저 역병 때문에 온 것이니, 모두 각자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하면 되네.”“예, 예, 마마의 명을 따르겠습니다.”주 지부가 눈물을 닦으며 답했다.그렇게 관아와 의서가 협력하여, 오계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원 할머니는 역병을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을 몇 가지 내렸다. 경증 환자는 약차를 계속 마시고, 증상이 악화하거나 중증 환자는 그녀의 처방을 사용하도록 했다.전에 이미 근처 주부에 연락해 약을 보내라 명했고, 오계부에서 구비한 약까지 있으니, 이번 역병을 대처할 수 있었다.오계부 의서는 이번 역병을 과거의 역병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소홀히 한 것 외에는 준비가 충분했다.원경릉은 황제 일행이 저녁 무렵 오계부에 도착할 것이라 예상했다.주 지부는 원래 여러 관리와 함께 황제를 맞이할 예정이었지만, 원경릉이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녀는 황제가 미복 순행 중이니, 과하게 맞이하여 백성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그 말에 주 지부는 당황했다.황제가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맞이하지 않는다니, 어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그러나 그는 황
약을 쓰자, 주 지부의 열이 단번에 내려갔다.열이 내려가니 정신이 맑아져, 그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애써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마마에게 예를 올리겠다고 고집 피웠다.원경릉은 그에게 누워 있으라고 말한 후, 역병에 관해 이야기하며 주 지부에게 이를 중시할 것을 당부했다.주 지부는 이를 듣고 깜짝 놀라 말했다.“소신은 매일 의서에 사람을 보내, 역병의 상황을 보고받고 있사옵니다. 매일 보고된 상황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역병이 발생했지만, 작년과 비슷한 정도였고, 약재도 충분한데, 어찌 이렇게 심각해진 것입니까?”“매년 역병이 발생했으나, 대대적으로 퍼지지 않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네.”원경릉이 답했다.“의서의 이 대인을 불러, 상황을 확인하겠습니다.”주 지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어제 이미 그를 찾아가, 환자 수와 사망자 수를 조사하라 명했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것이네. 자네가 사람을 보내, 관아에 와서 상황을 보고하도록 하게.”“예!”주 지부는 곧바로 사람을 보냈다.푸른 옷을 입은 남자는 관아에서 일하는 관리였기에, 그는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아, 관아 내에서 병에 걸린 자가 얼마나 되는지 통계해냈다.관아 내에서 역병 증상을 보인 사람은 총 열여덟 명이었고, 그중 두 명은 병세가 심각하여 이미 집에서 쉬고 있는 상태였다. 주 지부는 관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병에 걸린 줄 몰랐고, 관리의 보고를 들은 후, 큰 충격을 받았다.의서의 이 대인은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바삐 움직였다. 서관 대인이 직접 오셨으니, 어떻게든 시키는 일을 완성해내야 했다.그는 사실 역병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고, 그저 작년과 비슷하다고 여겼었다.하지만 여러 지역과 의원을 돌아보고 나서야, 이번 역병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처음엔 그저 서관 대인에게 보고만 하려고 했지만, 병세가 심각해지자 그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인원수를 통계하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다섯째 일행은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다.그래서 원경릉과 할머니는 다른 의관을 더 둘러보기로 하고, 몇 군데 더 돌아본 뒤 관아에도 갈 계획을 했다.그런데 한 의관에 들어서자마자, 푸른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다급히 뛰어오며 말을 걸었다. “수 의원, 대인께서 병세가 위중합니다. 어서 봐주셔야 합니다.”의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약상자를 집어 들고 다른 환자들을 그냥 남겨둔 채, 푸른 옷의 중년 남자와 함께 나가려 했다.원경릉이 그를 막아 세우며 말했다.“의관에 있는 환자들을 돌봐야 하지 않소? 우리 할머님께서도 의원이니, 지부 대인의 병은 할머님께서 봐 드릴 것이오.”푸른 옷의 사내는 초조한 듯 원경릉을 향해 소리쳤다.“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대인의 병세가 급박한데, 혹여라도 지체되면 당신들이 책임질 수나 있겠소?”바로 그때, 원 할머니가 호패를 꺼내, 그의 눈앞에 들이밀며 단호하게 말했다.“길을 안내하거라!”조급한 표정을 짓던 푸른 옷의 사내는 호패를 보자마자 표정이 얼어붙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곧장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며 말했다.“서관 대인께서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무례를 범해 송구하옵니다.”“그만 사과하고 길 안내나 하시오.”원경릉이 말했다.“예, 예!”사내는 급히 물러서서, 예를 갖춰서 길을 가리켰다.“마차가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서관 대인, 이쪽으로 오시지요.”원경릉은 할머니를 부축해 마차에 올랐고, 곧장 관아로 향했다.지부 대인은 따로 사저가 없어 관아의 뒷마당에서 거주 중이었다. 혼자 지내는 데다 관아가 워낙 가까워 편리했기 때문이다.관아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안으로 들어갔다.주 지부는 병세가 꽤 심각해져 있었다. 그는 어지럼증과 흉통에 시달려, 침대에 누운 채 말을 꺼낼 힘도 없었다.원경릉은 직접 치료에 나섰고, 약상자를 열어 체온 측정기와 청진기를 꺼냈다.푸른 옷의 사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가씨께서도 의원이십니까?”그러자 곁에 서
이 대인이 원경릉에게 의학을 잘 모른다고 반박할 틈도 없이, 원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대로 하게. 하루만 줄 테니, 그 안에 역병에 관한 모든 자료를 가져오게. 사망자 수도 포함되어야 하네." 이 말까지 듣자, 이 대인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비록 조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서관 대인이 멀리서 오계부까지 왔으니, 시키는 일은 해야지 대인의 마음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을 보내 조사를 명한 후, 이 대인은 거처를 마련해 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원경릉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의서에 의원이 많지 않으니, 대인도 바쁘실 텐데요. 저희가 직접 오계부를 돌아보겠습니다." 이 대인은 그녀가 원 할머니의 힘을 빌려 위세를 부린다고 생각해,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말에 답도 하지 않고, 원 할머니에게 예를 올렸다. "어르신께서 머무실 계획이 있으시면, 부디 저에게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 대인을 잘 대접하라, 명을 내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일이나 보게." 원 할머니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원경릉에게 말했다. "먼저 좀 돌아보다, 객사를 찾아 머물자꾸나." "예!" 두 사람은 역병을 조사하기 위해 다급히 이곳을 찾아왔기에, 먼저 각지의 의원을 직접 돌아보려 했다. 아마 다섯째 일행은 빨라야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것이었다. 두 사람이 의서를 나서자, 이 대인은 뒤따라 나오려다 원 할머니의 날카로운 눈빛에 움찔하며 발길을 멈췄다. 두 사람은 오계부의 거리로 향했다. 거리가 꽤 번화했고, 사람들도 제법 많아, 대낮에는 조금 붐볐다. 그들은 곧장 의원으로 향했다. 의원 앞에는 약차가 많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환자는 얼마 없었다. 겉보기엔 역병이 퍼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원경릉은 안으로 들어가 의원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의원은 요즘 들어 약차가 잘 팔리고 있고, 하루에 천 봉지가 넘게 팔린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도 역병
늦게 출발한 원경릉은 신속하게 오계부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계부 근처 주현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가 현지 혜민서로 가야 한다며 잠깐 멈추자고 했다. 그러고는 혜민서에 오계부로 약을 공급할 준비를 하게 했고, 명을 받으면 바로 오계부로 보낼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당부했다. 혜민서 산하의 의료기관들은 지난 몇 년간 개혁을 통해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고, 지역 간의 연결도 긴밀해졌다. 특히 역병을 상대하는 체계가 가동되면 상부에서는 전력을 다해 의원과 약을 지원해줄 수 있었다. 신신당부한 뒤에야 원경릉과 할머니는 오계부로 재빨리 향했다. 곧이어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우문호 일행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계부는 인구가 500만 명에 이르는 곳으로, 두 개의 주부가 통합된 지역이었다. 열대에 있어, 경작지가 많고 산이 많아 농업을 위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조정은 이곳을 서부의 주요 곡창지대로 삼고 있었던 것이었다. 농업이 발달한 지역은 상대적으로 경제도 번화했고, 현지 백성들은 벼 외에도 감, 자두, 리치 등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었다. 리치는 신선할 때 먹을 수도 있고, 말려서 건과로 만들어 팔 수도 있기에, 어느 정도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었다. 오계부는 백월국과 인접해 있었는데, 백월국은 북당의 속국으로 사이가 우호적이며 경제 교류도 활발했다. 이는 양국의 번영을 촉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계부의 지부는 장씨 성을 가진 오계부 출신이었다. 장 지부는 훌륭한 관리이며 지역 백성들로부터 존경받고 있었다. 원경릉과 원 할머니는 오계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지역 혜민서를 찾았다. 할머니는 혜민서의 서관(署館) 신분을 밝혔다. 그녀는 북당 각 주부의 의서를 총괄하는 인물이고,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혜민서의 이 의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두 사람을 안으로 청한 후, 바로 예를 올렸는데, 마치 신선이라도 본 것처럼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 "소인은 이자옥이라 합니다. 어르신께서 친히 오신 줄도
그녀는 일단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냉 대인이 자세한 상황을 묻는 사이에 제 대인의 피를 뽑았다. 약상자는 기능이 꽤 다양하기에, 바이러스 검사도 문제없었고, 안에는 양여혜가 준 소형 현미경도 있었다. 하지만 바이러스 관찰이나 세균 배양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오계부로 향하고, 그녀는 이곳에 남아 제 대인을 치료하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면 바이러스든, 세균 감염이든, 결과가 나와야 제대로 된 치료 방안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미색이 말했다. "저도 이곳에 함께 남겠습니다. 제가 환자를 돌보는 것 정도는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괜찮으니 먼저 가거라. 어쩌면 내가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으니깐." 원경릉이 말했다. 그녀는 혼자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미색까지 데리고 가는 건 무리였다. "우리가 먼저 출발하는데, 어찌 더 일찍 도착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미색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가능한 일이다. 원 선생은 늘 기적을 만들어내니." 우문호가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원경릉에게 다가가 조심하라고 몇 마디 당부했다. "알았소. 지체하지 말고, 어서 떠나시오. 오계부에 도착하면 곧바로 관아를 찾아가, 의원의 빠른 대처를 명하라 하시오. 만약 내가 먼저 도착한다면, 내가 관아를 찾아가겠소." "알겠소. 그럼, 먼저 가겠소!" 우문호는 그녀와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보는 이가 많으니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서일은 황후를 홀로 두고 가는 것이 걱정되어, 우문호를 따라나서며 계속 물었다. "정말 황후를 이곳에 혼자 남겨도 되는 것입니까?" "그럼, 네가 남을 것이냐?" 우문호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너도 원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 회왕 부부도 걱정은 되었지만, 다섯째의 여유로운 모습에 자신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다섯째 부부는 늘 비밀이 많은 사람들이라, 그들은 더 이상 신경
원경릉은 밖으로 나가, 오계부에 역병이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오계부는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기후가 더운 탓에 가끔 역병이 생기긴 했었지만 백성들은 고뿔 치료에 쓰이는 약초로 끓인 차를 즐겨 마시기에, 대규모로 역병이 돈 적은 없었다. 냉 대인이 말했다. "오계부에서는 이 상황을 조정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해마다 역병이 생기긴 하지만, 빠르게 통제해 왔으니, 이번에도 예전과 같은 상황이지 않겠습니까?" 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 대인의 형도 역병으로 돌아가셨고,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도 병에 걸렸습니다. 이렇게 관아에만 역병에 걸린 자들이 많으니, 예전보다 더 심각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해마다 역병이 생겼으니, 그에 대한 대응책도 이미 있을 것입니다." 원경릉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역병이 생겼지만, 대대적으로 유행하지 않았기에, 현지 관리들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쉽게 통제될 것이라 생각하고, 방심할 수도 있으니깐요." 우문호가 물었다. "원 선생, 역병을 어떻게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역병 상황이 안 좋을 것이라 추측할 뿐, 정말 오계부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네. 제 대인은 여전히 고열에 시달리고 있어, 수액을 맞히고 해열제를 먹였소. 냉 대인과 함께 들어가 상황을 자세히 물어봐야겠소. 하지만 꼭 마스크를 끼고, 병을 막아야 하오." 원경릉은 유행성 독감이나 변이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일 것이라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살던 세계에서는 A형 독감의 대규모 변이가 십수 년마다 한 번씩 발생했는데, 그런 변이 독감은 현대에서도 의료 체계에 큰 부담이 되곤 했다. 그러니 지금 이곳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만약 역병이 다시 시작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통제해야만 했다. 원경릉의 말을 우문호와 냉 대인은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도
원경릉은 청진기를 꺼내 그의 폐를 확인해 보았는데, 남녀가 가까이 접촉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제 대인은 이내 손을 뻗어 그녀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병세가 심해 아픈 데다가,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묘한 위압감을 풍기는 의원의 단호한 눈빛과 기운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원경릉은 앞쪽을 청진한 뒤, 그에게 옆으로 돌라고 한 다음에 꼼꼼히 살피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며칠을 아프신 것입니까?" 제 대인은 꽉 막힌 코 때문에 콧소리를 내며 천천히 몸을 돌리고 답했다. "며칠 사이의 일입니다. 오계부를 떠날 때도 멀쩡했는데, 밤새 달리고, 말을 오래 타다 보니 고뿔에 걸렸나 봅니다." "기침 말고, 가슴 통증도 있습니까?" "예. 이곳이 아픕니다!" 제 대인은 가슴 근처를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가, 숨쉬기가 어려운 듯 손바닥을 움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도 아프고, 온몸 뼈마디도 다 아픕니다." 그러자 원경릉은 더 자세히 증상을 확인한 뒤 말했다. "약을 준비할게요. 수액을 좀 맞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액이요?" 제 대인은 멍하니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예. 질문은 하지 마시고, 그저 치료에 협조만 해주십시오. 병세가 꽤 심각한 편입니다." 원경릉은 제 대인이 폐렴이라 확신했고, 중증 폐렴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대인은 병이 심하다는 말에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말했다. "의원 나리, 제발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십시오… 저에게는 아직 모셔야 할 노모가 있습니다. 지난달 병으로 형님께서 세상을 떠난 터라, 형님의 자식들도 제가 돌봐야 하니, 절대 이대로 목숨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원경릉이 답했다.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치료에만 집중하시지요!" 제 대인은 감동을 받은 듯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원경릉은 곧바로 약을 지어 수액을 준비했다. 수액을 맞는 동안, 제 대인은 여전히 놀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