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풍 친왕비 말대로 이리 나리의 대뇌를 통해 과거 사건 전체를 복기한다는 뜻은, 이리 나리 대뇌에서 기억 저장을 담당하는 부분에 침투한다는 말이다. 비록 지금의 원경릉이라면 못 할 것도 없지만 그러려면 상대가 원경릉에게 아무런 경계심도 느끼지 않고 잠이 들어야 했다. 최면은 보통 피최면자의 말을 통해 대뇌에 침투하는 것인데, 원경릉이 하려는 것은 이리 나리의 기억 영역에서 해당 기억을 찾아내는 것으로 이리 나리 본인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기억까지 다룰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반인들은 아기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아기 때 기억은 사실 대뇌의 깊숙한 곳에 잠재되어 있지만 끊임없이 들어온 정보에 덮여 기억조차 할 수 없게 된다.보통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대뇌에 침투할 수 없지만 원경릉은 가능했다. 원경릉의 뇌파는 다른 사람과 달라서 다른 사람의 대뇌에 침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사고를 제어하고 심지어 기억을 이식할 수도 있었다. 원경릉이 사고의 과도한 발달을 제어하는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쉽게 가능한 일이지만. 약을 복용한 뒤로 대뇌를 상당 수준 억제해 자신의 초능력에 천천히 익숙해질 수 있도록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다.이때 원경릉이 안풍 친왕비에게 물었다. “왕비 마마께서는 제가 뭘 하길 바라세요?”안풍 친왕비가 답했다. “이리율이 겪었던 일을 새로운 기억으로 이식하는 걸 시도해 봤으면 해. 너한테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넌 최면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까.”원경릉이 고개를 흔들었다. “최면술을 통해 기억을 심는 건 다른 사람에게는 가능할지 몰라도 이리 나리에게는 안 돼요. 이리 나리의 방어 기제는 일반인과 비교할 수 없어요. 기억을 제대로 심지 못하면 오히려 정신적으로 상당한 혼란을 일으킬 거고, 과거에 겪었던 일들이 이리 나리의 지금 모습에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어요. 제 생각이 기우(기나라 사람들이 하늘이 내려앉는 것에 걱정하였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일까요?”그리고 실질적으로 원경릉이 최면으로 기억을 이식
이리 나리는 숨소리가 점점 골라지고 온 몸에 긴장이 풀리며 수면 상태에 들어갔다. 안풍 친왕비가 살짝 불러도 반응이 없어 그녀는 한참동안 사랑이 넘치는 눈빛으로 물끄러미 이리 나리를 바라보다가 문을 열고 나갔다.원경릉은 밖에서 기다리다가 안으로 들어갔고 안풍 친왕비가 문 앞을 지켰다.원경릉은 창문을 다 닫고 사랑채 안의 휘장을 전부 내려 어둡게 했다. 방안은 마치 황혼을 지난 어두운 밤 같았다.원경릉은 방금 안풍 친왕비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는데, 엷은 침향이 느껴지며 마음이 아주 고요해졌다.은은한 안개가 온천지를 뒤덮자, 혼란스러운 미로에 빠진 듯 눈앞에 구불구불한 샛길이 보이고 의식을 연장하자 수많은 촉감이 생겨났다. 원경릉이 못 들어갈 곳이 없어서 앞으로 뚫고 나가며 모든 정보를 수집했다. 어떤 건 이리 나리의 기억이고, 또 어떤 건 사건이 있었던 후에 알았던 정보로, 이것으로 당시 진상을 복기하기에 충분했다.36년 전, 풍도성.풍도성은 북당 건국 초기 이미 북당에 귀순했으나 계속 자치권을 인정받아 매년 조공만 바치기면 조정은 상관하지 않는 지역이었다.성주 안지여는 안 씨 집안에서 가장 뛰어난 후계자로 젊은 나이에 성주의 자리를 이어받아 이리 집안 큰 아가씨를 아내로 맞았다.이리 집안은 풍도성에서 명성이 자자한 천문 세가인데, 천문이란 별의 형태를 보고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파악하는 것으로, 천문 세가는 하늘의 뜻에 순행하는 집안을 말한다.그런 이리 집안의 가주가 누군가를 위해 하늘을 거슬러 운명을 바꾼 탓 때문에 참혹한 횡액을 당해, 큰 아가씨인 이리봉청이 가주가 되었다. 그렇게 이리봉청이 가주가 된 지 3년 만에 풍도성 성주 안지여에게 시집을 갔고, 그해 그녀의 나이는 18세였다.이리봉청은 천문 능력을 이어받아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역천개명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 능력을 갖춘 자는 하늘의 뜻에 순행해야 하는데, 역천개명 할 경우 그 저주가 역천개명을 행한 사람에게 돌아오게 된다. 이리봉청의 아버지가 바로 그렇게
따뜻했던 안지여가 극도의 냉혈한으로 돌변해 이리봉청에게 한 가지를 제안했는데, 바로 어떤 사람을 위해 역천개명을 시행하라는 것이었다.역천개명은 이리봉청의 수명을 깎아야 했고 참혹한 횡액을 당할 것이 분명했지만 안지여는 그런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고, 그녀가 죽고 싶지 않으면 역천개명의 저주를 곧 태어날 아이에게 넘겨야 한다고 협박까지 했다.안지여의 이러한 협박은 이리봉청을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뜨리기 충분했다. 슬픔과 분노로 흽싸여 금방이라도 미쳐버릴 지경이었지만 마음의 고통을 겨우 누르고 안지여에게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는지만 무를 뿐이였다. 이리봉청의 뱃속에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안지여의 아이였기 때문이었다!안지여는 성주 저택 본관 태사의에 앉아 두 손으로 의자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조금의 자비도 없이 차갑게 말했다. “맞아. 걔도 내 아이지. 그래서 그 아이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나한테 있는 거야. 내 아이가 역천개명의 저주를 받는 거니까 내가 너한테 빚진 건 이제 없는 셈이군.”이 말은 원경릉의 가슴을 다시금 후벼팠다. 분명 이리 나리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은 것이겠지만 이리 나리의 뇌리에 깊게 박혀있었고, 원경릉도 이 말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이 말이 이리봉청에게 얼마나 큰 상처였을지 상상이 갔다.이리봉청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당장 선택해야 했다. 사실 선택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게 이리봉청에게는 오직 한가지 선택지만 있을 뿐이었다. 안지여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천문 세가의 사람은 전부 죽음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북당 황제는 너무 멀리 있었다. 실질적으로 풍도성 황제는 안지여로 안지여가 죽이겠다면 죽이는 거였다. 하지만 천문 세가 백성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고 있어 일반적인 경우라면 민심이 두렵기에 안 지어가 천문 세가 사람을 건드릴 수는 없었다. 그런 안지여가 누군가를 위해 민심을 잃고 천하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더라도 역천이하겠다는 것이다.안지여가 아끼는 사람은 바로 소여쌍으로, 안지여의 사촌 여동생이자
전신에 흰옷을 입고 병색이 완연한 얼굴에 가냘프기 그지없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눈빛은 우아하고 단아해 보였다. 소여쌍은 장의자에 기대 이리봉청이 들어올 때 기침을 몇 번 하더니 도자기처럼 하얀 피부에 약간 붉은 기운이 돌며 가냘픈 자태로 이리봉청을 바라봤다.이리봉청은 극도로 고통스러운 마음을 누르고 안지여가 자신을 위해 한 일을 아는지 소여쌍에게 묻자 소여쌍은 이미 알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안지여는 이리봉청과 혼인하고 1년 동안이나 잘 대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소홀하게 한 적이 없어, 역천개명의 저주는 당신이 받는 게 아니라 뱃속의 아이가 받는다고 했다.소여쌍의 말은 안지여와 똑같이 뱃속의 아이는 안지여의 아이니 그 애를 어떻게 할지 결정권은 안지여에게 있다고 했다. 따라서 그 둘 모두 안지여가 이리봉청에게 해를 끼치는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이리봉청은 이 아이는 자신의 아이기도 하다며 분노했다. 하지만 소여쌍은 이 말을 듣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기만 했다. 아이의 목숨을 사용하기 싫으면 본인 목숨으로 하면 되지 않냐고 그건 당신의 선택이지 안지여의 선택이 아니라고 했다. 안지여는 여전히 당신에게 빚진 게 없고, 빚진 건 뱃속의 애라고만 말할 뿐이였다. 이리봉청은 결국 화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소여쌍의 따귀를 갈겼다.그러자 안지여 또한 격분해서 이리봉청의 여동생 이리봉우를 죽이고 그녀의 시체를 성문에 걸어 이리봉청에게 징벌로 삼게 하라고 명령했다.원경릉은 여기서 그들을 엿보는 것을 그쳤다.…한편, 이리 나리가 드디어 깨어났다. 이리 나리가 눈을 뜨는 순간, 눈엔 핏발이 서 있어 원경릉은 이리 나리가 내뿜는 분노와 증오를 느낄 수 있었다. 환타가 말했던 것처럼 피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하지만 곧바로 안정을 되찾더니 약간 멍한 표정에 쉰 목소리로 말했다. “… 왜 여기 계시는 거죠?”원경릉은 슬픈 눈빛을 거둘 수가 없었다. 이리 나리의 기억 속에서 엿본 일은 그와 관계없는 원경릉에게도 절망과 고통을 느끼게 하는데 이리봉청은
안풍 친왕비가 냉엄한 눈빛으로 말했다. “뭔가 찾아낸 거야?”원경릉은 자신이 엿본 기억을 하나도 빠짐없이 안풍 친왕비에게 이를 악물며 얘기했다. 의식을 엿본 탓에 원경릉은 정말로 의식 속에서와 같은 고통을 온 몸으로 느낀 것이었다.안풍 친왕비는 다 듣고는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리고 속았다는 사실에 경악하며 놀라했다. “결국 그런 거였어?!”원경릉이 의아해하며 안풍 친왕비에게 물었다. “모르셨어요..?”빛이 창문 귀퉁이로 안풍 친왕비의 얼굴에 쏟아지며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안풍 친왕비의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내 주었다. “좀 알고 있다고는 생각했는데 네 얘기를 듣고 보니 몰랐다고 밖에 말할 수 없네. 이리율도 몰랐어.”“정말 모르셨다고요? 하지만 이 것을 몰랐다면 이리 나리 마음속의 증오심과 피비린내는 어디서 온 걸까요?”안풍 친왕비가 탄식했다. “이리율은 어릴 때부터 계속 악몽을 꿨지. 기억의 일부 단편을 꿈으로 꿨던 거야. 이리율 어머니는 아이를 낳을 때 어떤 방법으로 일부 의식을 이리율 머릿속에 남겨뒀을지도 몰라. 전에 이리율 꿈속 상황에 근거해서 조사해 봤는데 풍도성에 대해 조사하자 이리율의 부모가 누구인지는 알 수 있었지만, 천문 세가 사람이 다 죽어서 풍도성 백성 모두 이 일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지. 천문 세가는 지난 가주가 다른 사람을 위해 역천개명한 탓에 천문 세가 전체가 횡액을 당하고 말았다는 말만 들었지. 그리고 이리율의 어머니 이리봉청은 이리율을 낳을 때 난산으로 죽었다고 했어. 하지만 그러는 동안 이리율 마음속에 증오는 갈수록 커져 널 찾은 거야. 깊이 좀 엿봐달라고. 사실 이리율 머릿속 깊이 감춰져 있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의식은 그 사건이 해결돼야 진정으로 평온해질 수 있을 거야.”안풍 친왕비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사실 전에 안지여 문제를 짐작하긴 했어. 하지만 안지여가 이리율의 목숨을 가지고 사랑하는 여자의 목숨을 구할 줄 생각도 못 했네. 그 녀석 꿈에 나타나는 어머니가 난산한 게 이리율 마음에 걸림돌이
이리 나리는 정신이 약간 멍해 보이는 것이 원경릉이 전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리 나리는 진정 속세를 벗어난 사람이라 언제든 담담하고 시원시원했는데 말이다. “사부님, 피곤하시면 회의에 가지 마시고 집에서 좀 쉬시지요.”이리 나리가 고개를 저었다. “잠이 안 오네요.”“불면증 아닌가요? 약 처방해 드릴까요?”“됐습니다. 자고 싶지도 않고.”원경릉이 놀라서 물었다. ”왜요?”이리 나리가 몇 걸음 앞으로 가다가 우뚝 멈춰서서 원경릉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주 사실 같은 꿈 꿔본 적 있어요?”원경릉이 이리 나리의 질문에 답했다. “있어요.”“내가 말하는 사실은…. 꿈속의 희로애락의 감정이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여전히 남아서 꿈은 기억 못 하지만 느낌은 기억하는 거예요. 그런 적 있나요?”갑자기 바람이 불자 이리 날의 하얀 겉옷이 휘날렸다. 여전히 옥을 깎아 놓은 듯 잘생긴 모습을하고 있는 이리 나리였지만 원경릉에겐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원경릉이 작게 말했다. “.. 있었어요.”그러자 이리 나리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령이가 아이를 낳은 뒤로 자기만 하면 똑같은 꿈을 꾸는데 그 꿈은…. 뭐라 할까..? 견딜 만하지 않아요. 그런 꿈을 꾸고 싶지 않아서 자고 싶지 않은 겁니다.”원경릉은 멍해져 뭐라고 답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아직 모든 일이 다 밝혀진 것이 아니라 이리 나리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엿보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이리 나리는 곧바로 풍도성에 안지여를 찾아가 복수할 것이 틀림 없었기 때문이다.잠시 후 궁으로 돌아온 원경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문호를 안고 엉엉 울기만 했다.본인도 뭐가 그렇게 괴로운지 말로 설명하기 힘든데 마치 자신이 이리봉청인 것처럼 배신감, 분노, 슬픔이 가슴 저 밑바닥을 칭칭 감싸며 예리한 칼로 가슴을 난도질하듯 아파왔다.원경릉도 이렇게 강렬하게 느끼는 데 이리 나리가 꿈꿀 때 원경릉보다 훨씬 강렬하게 느낄 게 틀림없었다. 따라서 날이 갈수록
원경릉은 진정하게 되었다. 우문호가 아무 걱정도 안 했으면 했지만 그를 속일 수 없는 데다 이렇게 대성통곡까지 했으니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 잠도 못 잘 게 분명했다.결국 원경릉은 안지여가 이리봉청에게 저지른 짓을 얘기해주었다. 우문호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더니 눈가가 붉어졌다. 그리고 이를 갈며 소리쳤다. “천하에 어떻게 그런 악독한 인간이 있을 수가 있지? 개돼지만도 못한 것들!”“당신, 풍도성 성주 안지여를 만나본 적이 있어?” 원경릉이 물었다.“예전에 경성에 온 적이 있어서 한 번 보긴 했어. 거의 얘기도 안 나눴지만, 그에 대해 인상에 남은 게 있어. 부부가 같이 경성에 왔는데 서로 정말 사랑하는 모습이었거든. 그때 안 성주는 아내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며, 많은 내명부 여자가 성주 부인은 행복하시겠다고 부러워했지.”우문호가 차갑게 웃으며 매서운 눈빛을 보였다. “소위 끔찍하게 아끼는 사랑 뒤에 이런 악독한 심사가 숨어 있을 줄 몰랐어. 다른 사람의 목숨과 피눈물을 자신의 사랑을 이루는 데 쓰는 인간에게 어떻게 원한을 가지지 않을 수가 있어?”우문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벌떡 일어나 당장이라도 나갈 채비를 했다. “안 되겠어. 성지를 내려 안지여를 경성으로 불러들여 죄를 묻고 이리 나리를 대신해 원수를 갚아야겠어!”원경릉이 눈물을 닦고 얼른 말렸다. “안 돼. 절대 안 돼. 우리가 아직 전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얘기하면 안 되기도 하고, 알아도 원수를 갚는 건 이리 나리가 직접 해야 하는 거야.”우문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원경릉의 말이 맞다는 건 알지만 여전히 분이 사그라지지 않았다.천천히 자리에 앉아 원 경릉을 한참 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두 눈 멀쩡하게 뜨고 이리 나리가 괴롭힘당하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어. 그리고 이리 나리 모자가 당한 만큼 피 맺힌 원한을 이리 나리가 다 못 갚으면 이리 나리 모자를 위해 반드시 정의를 바로 세우고 말겠어.”원경릉이 우문호의 손을 잡았다. “알아, 나도 가만있지
이리 나리는 우문호를 보고 의외라고 생각해 얼른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정무 보셔야 하는 것 아닌지요?”우문호는 이리 나리의 피곤함에 절은 얼굴과 눈 밑에 다크서클을 보고 마음이 시큰거렸지만, 일부러 대충 말했다. “정무는 봐도 봐도 끝이 없으니, 우리 천행이 보면서 한숨 돌려볼까 해서 왔지.”“무리하지 마세요. 그러다 몸 상하지 마시고!” 이리 나리가 웬일로 자상한 말을 했다.그러자 우문호는 살짝 눈시울이 붉어져 이리 나리와 안으로 들어갔다.셋이 본관에 들어가니 마침 안풍 친왕비가 차를 끓이고 있다가 그들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잘됐네, 막 고산운무차를 우리는 참이였는데, 다들 먹을 복은 있네!”이리 나리가 의아해했다. “차를 우리셨다고요?”“내가 차를 우리면 안 돼?” 안풍 친왕비가 뿌루퉁하게 반문했다.이리 나리가 웃음을 지었다. “목이 마르면 우물 물을 드시지 않나요? 혼자 차를 다 우리시고 정말 해가 서쪽에서 뜨는 일이네요.”안풍 친왕비가 이리 나리에게 살짝 눈을 흘겼다. “사람이 즐길 줄 알아야 한다던 때는 언제고, 자신을 함부로 하지 말라며? 네 말대로 한 건데 별론가 봐?”이리 나리가 안풍 친왕비 곁에 앉고는 왕비 어깨에 비스듬히 기대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게 잘하시면 저야 물론 기쁘죠.”안풍 친왕비는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웃으며 우문호와 원경릉에게 인사했다. “이리 와, 황제, 황후, 너희들도 와서 한잔하면서 차 끓이는 솜씨가 어떤가 봐줘. 좀 진전이 있지 않아?”우문호와 원경릉은 전에도 안풍 친왕비의 차를 마셔본 적이 없어서 솜씨가 늘었는지 어쨌는지 전혀 알 도리가 없지만 안풍 친왕비가 차에 뭘 넣었는지는 알겠다. 이리 나리를 재우려하는 것이었다.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과연 안풍 친왕비가 이리 나리에게는 공도호에 들어 있는 차를 따라주고, 원경릉 부부에게는 자사호에 들어 있는 차를 따라주었다. 안풍 친왕비는 차를 따르며 이리 나리의 주의를 끌기 위해 계속 주절거렸다. 이리 나리는 안풍 친왕비를 절
그녀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알 수 없는 작은 흥분을 억누르고, 표정을 고쳐서 천천히 돌아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북당 백성인 란이 언니와의 혼사는 다 거짓인 겁니까?"경천의 동공이 흔들렸다."혹시... 화가 난 것이냐?""아닙니다."택란이 고개를 젓자, 밝은 빛이 그녀의 깨끗한 얼굴에 비쳤고, 고르게 정리된 이마 밑의 눈동자는 다시 차분해졌다."그런데 어찌 사람을 시켜 저를 찾고 있다고 직접 저게 소식을 전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편지를 보냈다면, 저도 오라버니를 만나러 왔을 것입니다. 심지어 혼사에 하객까지 청하며 일을 이렇게나 크게 벌였는데, 대체 어떻게 수습하려고 하십니까?"그는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천천히 그녀 앞에 섰다. 그러고는 그녀의 까만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수습할 필요 없다. 나는 이미 천하에 나의 황후가 우문택란이라고 선언했다. 나는 그녀가 어서 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택란은 순간 놀라하며,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경천은 그녀가 화가 난 것 같아,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의 눈동자엔 어두운 그림자가 깔렸고, 이내 조심스레 물었다."응할 수... 있겠느냐?"택란은 잠시 망설였다. 기억 속의 그 소년이 지금 별빛을 받으며 그녀 곁으로 돌아왔다. 이전의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10년 후 그가 죽지 않으면 돌아와서 그녀를 부인으로 맞겠다고 열정적으로 말했었다. 그 열정이 가득한 목소리는 지금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런 과거와 현재가 얽혀 버리자,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저는..."경천은 그녀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반응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얼굴을 조금 숙이며 말했다."지금 바로 대답할 필요 없다. 몇 년 후라도, 10년, 아니 20년 후라도 괜찮다.""하지만...""아니, 말하지 말거라."그는 방금까지만해도 가득찼던 자신감을 더 이상 보여줄 수 없
냉명유는 팔짱을 낀 채 검을 가슴 앞으로 옮기며, 차갑게 말했다."누님께서 어디로 가든, 저도 무조건 함께 갈 것입니다."“하… 하지만."삼 태감이 무척 난감해했다."그래. 함께 가자. 이 거월통천각이 정말 달을 딸 수 있는지 어디 가서 보자꾸나!"그러자 택란이 웃으며 말했다.주 아가씨는 조금 의심스러웠다. 정말 공주가 만나고 싶다면, 어찌 공주한테 이렇게 높은 계단을 오르게 할 수 있는가?그러고는 계단 위에 새겨진 난초꽃을 힐끗 보고는 순간 멈칫했다. 시선을 위로 올려보니, 계단의 각 층마다 난초꽃이 새겨져 있었다.황제가 자신의 그리움을 돌계단에 새긴 것이었다!택란도 계단을 오르며, 이 사실을 눈치챘다.게다가 각 난초의 형태와 크기는 매우 똑같았다. 처음에는 선이 조금 거칠게 느껴지긴 했지만, 후에는 점점 더 섬세하고 부드러워 보였다.이건 분명 같은 사람이 새긴 것 같았다. 그가 직접 조각한 것일까? 금나라가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지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잠시 후, 그들은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에 도착했다. 다행히 냉명여는 문 앞에서 멈추고 안까지 들어가지 않았다.택란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는데, 안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네개의 용 모양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네 모서리에는 각각 올라가 쉴 수 있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었으며, 가운데에는 탁자와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떠힌. 네 면에 걸려져 있는 대나무 커튼이 걷혀 있어, 사방에서 밖을 볼 수 있었다.그 사이에서 청색 비단옷 차림의 남자가 통천각 옆 난간에 기대어 택란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매우 긴장한 듯 손과 발을 살짝 떨고 있었다. 별빛처럼 맑은 눈동자에 약간 숨이 가쁜 듯 보였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녀를 보자마자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재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며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 만남을 특별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반짝이는 별들도 그중 하나였다.하지만
손님들이 하나둘씩 떠나자, 경천 황제는 서둘러 궁으로 돌아가 푸른 비단옷으로 갈아입었다.옅은 청색 옷자락에, 소매 끝에는 난초꽃이 수놓아져 있었고, 나머지 부분은 어두운 구름 문양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이 옷감은 북당에서 온 것이었다."폐하, 꼬마 은인께서 궁문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삼 태감이 와서 보고했다."좋소."그는 거울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깊은숨을 내쉬었다."택수운천으로 가겠네."택수운천은 그가 즉위한 후, 궁궐 안에 지은 새 궁전으로, 세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궁전 옆에는 거월통천각이 있었는데, 이는 량주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거월통천각 안에 있으면 마치 손바닥에 달을 담을 수 있을정도로 웅장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거월통천각에서 멀게는 약도성과 량주가 인접한 산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가 생각날 때면, 늘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가 풍경을 멀리 바라보곤 했다."진이야, 너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 본 적이 있느냐?"그가 준수한 옷차림으로 난간에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바람이 서서히 불며 청색 옷자락이 휘날리자, 옷자락의 네 끝에 박힌 고급스러운 야명주가 그의 선명하고 잘생긴 얼굴을 비추었다.그때, 저 멀리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궁 시위를 따라, 아치과 복도를 지나 거월통천각으로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젊은 금군 통령 진이가 그의 모습을 보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런 적 없습니다.""사모의 마음을 품어보거라. 떨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느낌만큼 좋은 것이 없다."그는 그녀를 멍하니 보며 말했다. 천천히 다가오는 탓에 그녀의 얼굴이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13세 전까지의 그의 인생에는 나라와 백성들 뿐이었지만, 13세 이후 그의 인새은 온통 그녀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금 그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진이는 황제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다가오는 세 명을 보며
안왕은 보책을 받아 든 순간, 갑자기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정확히 어떤 점이 이상한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일이 다 이상하게 느껴졌다.보책을 펼쳐 안에 적힌 이름을 본 순간 그는 드디어 이상한 점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게 되었다.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굳어진 표정으로 경천 황제를 바라보았다.경천 황제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조사를 통해 드디어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소. 그녀의 이름은 우문택란이오. 금나라 황후의 이름은 우문택란이네. 난 반드시 그녀를 찾아낼 것이오. 만약 그녀가 황후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황후의 자리는 그녀를 위해 계속 비워둘 것이네.”위왕은 온몸에 식은땀을 흐르는 탓에 두 손을 급히 움켜잡았다. 방금 황제가 보책을 그의 손에 올리지 않아, 그가 받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정말 다섯째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안왕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자리에서 물러나 이를 악물고 낮은 소리로 위왕에게 말했다.“방금까지도 어린 황제에게 어리석다고 했건만. 이렇게 계책에 능하고 이따위 교묘한 계책으로 우리 형제를 그와 같은 편에 서게 만들다니...!”위왕은 또 한 걸음 물러서며 아무런 표정 없이 말했다.“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방금 술을 두 잔 마셔 조금 취한 터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아니, 지금 들고 있는 그건 무엇이냐?”안왕은 단단한 그의 팔을 비틀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하지만 이 상황 속에서 연회는 계속되었고, 사람들의 감정은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북당 황제의 작은 공주도 우문택란이라는 말을 꺼냈다.그 말에 다들 그 당시 금나라 황제를 구한 사람이 북당의 작은 공주가 맞는지 추측하기 시작했다.정말 북당 공주가 맞는다면, 금나라 황제도 참 배짱이 큰 것이다. 사실상 북당 황실이 금나라 황제를 구했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만약
경천은 위왕의 말을 듣자, 마치 마음속 큰 돌덩이가 내려간 듯 후련해 보였다. 그는 그러고는 궁인에게 술을 올리게 해 술잔을 여러 차례 돌린 후, 아래를 둘러보며 말했다.“오늘 여러분께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오늘 정혼연이 어찌 열리게 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오.”그러자 모두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말에 당황을 금치 못하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혼연이든 혼례든,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이때, 위왕이 안왕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섯째에게 서신을 보내야겠다. 금나라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자가 황제가 아닐 수도 있다. 진국왕이 아직 살아 있고, 이 황제가 꼭두각시일지도 모른다.”“맞소. 확실히 조금 병신같아 보이네.”안왕도 동의했다.참고로 ‘병신같다’는 표현은 안왕이 조카에게서 배운 단어였다.“이 이야기는 3년 전쯤에 있었던 일이오.”이내 경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담겨져 있었다.“당시 금나라는 진국왕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그는 나를 대신해 금나라의 군주가 되려 했소. 이 사실은 여러분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때 난 진국왕과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소. 진국왕이 왕위를 빼앗으려 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하기에, 나도 어쩔 수 없이 반격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소. 그때 나를 구해준 이가 바로 란이라는 소녀이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난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오. 그 당시 나는 란이의 정체도 몰랐고, 그저 약도성 사람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소. 상처를 치료하며 그녀와 며칠을 함께 보냈고, 황권을 되찾으면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했네. 하지만 그녀가 나를 구했다는 사실이 진국왕에게 알려졌고, 진국왕이 사람을 보내 그녀의 집에 불을 질렀소. 그리고 그곳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소.”모두가 진국왕이 불을 질렀다는 말에 멈칫했다.금나라 황제가 이렇게 비극적인 황권
한편, 안왕과 위왕은 이미 명월전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부하들과 함께 말을 타고 달려왔기에 피곤하지는 않았지만, 몸 전체가 먼지투성이였다.하지만 오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바로 궁에 들어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정혼 연회가 예정보다 앞당겨 열리게 되었다고 했다.그들은 의아해하며 금나라가 막무가내라고 투덜거렸다. 처음에는 혼례라더니, 이제는 정혼식이라 하고, 심지어 약속했던 날도 지키지 않고 앞당겼으니 말이다.혼사라는 중대사가 이렇게 어린아이 장난처럼 진행될 수 있단 말인가?하지만 신부가 북당 사람이니, 그들은 신부의 친정과도 마찬가지였기에 금나라의 일정을 따르며, 금나라의 계획을 지지하는 것이 맞았다. 다른 나라 사절들이 함께 있었기에, 그들은 무관의 신분으로도 가능한 한 많은 사람과 친구를 사귀고 주변 무역 문제를 논의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래전에 다섯째가 특별히 당부한 적이 있었다. 그는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다른 나라의 사신을 만나면 국사를 논하지 않더라도, 상업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라고 말했었다. 장사는 대화로 시작되는 일이니, 이야기를 많이 나누다 보면 결국 성사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들은 비록 처음에 다섯째의 이런 태도가 약간 뻔뻔하다고 느꼈었지만, 지난 10여년간 나라 경제가 눈에 띄게 번영했다는 사실을 차마 부인할 수는 없었다.다섯째의 말처럼 경제를 앞서게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한 덕분에, 돈이 끊임없이 북당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렇게 그들이 다른 나라 신하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황제가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안왕과 위왕은 금나라의 황제에 대해 호기심이 가득했다. 이 젊은 황제는 올해 열여덟도 되지 않는 어린 나이라 들었다. 어린 나이에 유명한 진국왕을 몰락시켰으니, 얼마나 대단한 결단력과 꾀를 가졌을까?내시의 우렁찬 소리와 함께, 밝은 황금빛 용포를 입은 젊은 황제가 시위에게 둘러싸여 등장했다.혼례복이 아닌 용포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역시나 혼례를 올리는 것은 아닌 듯했다
세 사람은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그 중, 택란은 베일을 쓴 채 궁에서 준비한 마차에 올랐다.때마침 불이 하나둘씩 밝혀질 시간이라, 거리는 무척 떠들썩했다. 금나라 수도의 번화함은 약도성이 비교할 수 없는 정도였다.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통행금지가 없어, 백성들이 밤늦게까지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택란은 마차의 가림막을 살짝 들어 올려 거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장사에 열중하는 상인들, 주루나 주막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상인들로 북적이고 있었다.이런 활기 넘치는 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그러고는 순간 어린 황제를 본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3년이나 지났으니, 지금은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해졌다.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3년 사이에 자신도 많은 변화를 겪었으니 말이다. 키도 훤칠해졌고 이제 얼굴도 아이 같은 모습이 아닌 한층 성숙하고 침착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약도성이 지난 몇 년간 겪어온 일들이 많았기에 당연히 성숙해질 수밖에 없었다.한편, 금나라 황궁에서는 이미 정혼 연회의 준비를 마쳤으나, 중요한 두 사람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바로 안왕과 위왕이었다.북당의 두 친왕이 도착해야만 연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한편, 경천 황제는 내내 택란을 만나고 싶어 했다.지난 3년 동안, 그는 그녀와 재회할 순간만을 간절히 기다렸다.3년간 간절히 바랐던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들떴지만, 첫 만남은 너무도 중요했다.그는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준비된 상태에서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그리고 지금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그것이 사랑인지 아닌지도 정의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가 자신의 눈앞에 생생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그는 사실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조정을 되찾아 그녀와 혼사를 올리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었다.물론 지금 그녀는 아직 어리기에, 혼담을 논하기엔 이르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처럼 아쉬워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생각이 훨씬 개방적이었고,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장 큰 행복이라 여겼기에 의식 자체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그래도 아버지의 아쉬움을 덜어주기 위해 현대에서 한 번, 즉위 후에 또 한 번 의식을 치렀다.주 아가씨는 객사로 돌아오자마자, 객사 일꾼에게 소식을 물었다.그러자 일꾼은 황제가 곧 혼례를 올린다는 말을 듣고는 잠시 멈칫했다.“혼례요? 정혼 아니었습니까?”“정혼? 정혼이라니? 그럼 이미 혼사를 올릴 나이가 되었는데, 어찌 바로 혼례를 하지 않다는 것이냐?”“그건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정혼한다는 소문만 들었습니다.”“미래의 황후가 북당 사람이 맞느냐?”일꾼이 말했다.“예. 북당 출신의 아가씨라고 합니다. 게다가 황제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들었습니다.“택란은 이 말을 듣고 고개를 저으며 경천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그가 정말 은인의 언니라는 말을 믿다니 말이다.설사 그렇다고 해도 굳이 그녀와 혼례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혼사를 어찌 장난처럼 다룰 수 있단 말인가?택란은 경천 황제에게 크게 실망했다. 그저 정치적인 판단에서만큼은 어리석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택란은 원래 이틀 정도만 량주를 둘러본 뒤 바로 궁으로 들어가 알현할 생각이었지만, 아직 혼례 날짜가 다가오지 않았으니 며칠 더 머물며 시간을 보냈다. 궁으로 들어가 정체를 드러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그리고 그녀가 생명의 은인인 것을 알아차리면, 정혼식을 진행할지 말지 애매해질 것이기에, 택란은 며칠 동안 객사에 머물며 량주의 풍습과 문화를 살펴보는 한편, 참고할 만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했다.그렇게 살펴보던 중, 주 아가씨가 정보를 알아보러 나갔다가 안왕과 위왕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며칠 동안 다른 나라 사절들은 계속 장관에 묵고 있었는데, 택란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삼촌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저녁 무렵 장관으로 갔다.그런데 도착하고 나서야 그들이 이미 황
량주는 금나라의 수도가 된 이후 지난 2년간 크게 발전했다. 또한,금나라와 북당이 우호적인 교류를 시작하면서, 북당 변방 도성의 백성들도 장사를 위해 많이 찾아왔다.이전에 택란도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 위해 금나라에 왔었다. 하지만 그때의 량주는 지금처럼 북당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택란은 객사에 머문 뒤 주 아가씨와 냉명여를 데리고 거리로 나가 량주의 풍습과 문화를 살폈다.여기도 어쨌든 금나라의 수도 아닌가!진국왕은 물러나기 전까지 나라를 잘 다스렸고, 특히 발전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야망이 지나친 탓에 늘 약도성을 되찾겠다고 욕심을 부렸다.그리고 동시에 북막을 두려워하기도 했다.경천이 즉위한 후, 광산 자원 개발 외에도, 그는 농경지와 산지를 개간하려고 노력했다. 금나라의 서북부에는 농사에 적합한 땅이 있었지만, 사람이 드물었다. 그래서 그는 북당의 다른 도성을 본받아 사람들을 개간지로 보내고 그들에게 이익을 나누어주었다.나라가 상승세일 때, 그 분위기는 눈에 띄기 마련이다. 백성의 긍정적인 에너지는 숨길 수 없는 법이었다.택란은 경천이 황제로서 매우 적합하다고 느꼈기에, 그가 이끄는 금나라는 분명 빠르게 발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발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기에,그가 광산을 함께 개발하자는 제안에 동의할 가능성이 높았다.택란은 이내 자신감을 얻었다. 궁에 들어가 알현하는 것을 서두르지 않고, 량주 백성들이 북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과거, 약도성과 량주의 관계는 다소 안 좋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금나라가 약도성에 사람을 침투시켜 많은 폭동을 일으켰기에, 약도성 백성들도 그들을 매우 싫어했다.그렇기에 지난 2년간의 교류를 통해, 택란은 그들의 원한이 천천히 사라지기만을 바란 것이었다.이제 북당 쪽은 문제가 없으니, 량주 백성들의 생각을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에, 택란은 물건을 사면서 점포 주인과 상인들에게 북당 약도성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곤 했다.그 중,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