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야의 추태와 탕양의 조언과연 바람같이 한 사람이 복도에 나타나 날쌔게 숨는 게 흡사 미행하는 것 같다.서일과 탕양은 눈을 부릅떴다가 자신의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이게 왕야라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우문호는 전신에 실 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작은 차 마시는 탁자로 거기를 가리고 잽싸게 뛰어 왔다. 곧 눈을 부라리며 두 사람에게, “오늘밤 일이 밖에 새나갔다간 둘의 혓바닥이 남아 나지 않을 줄 알아라!”“왕야, 문턱이!” 너무 늦었다. 급한 나머지 차 마시는 탁자가 시선을 가려 우문호는 발이 걸려 꽈당 넘어지고 말았다.“아이고머니나, 서일. 어서 가서 왕야 부축해드리고, 아, 아니다, 넌 가서 옷을 가져오너라, 우선 덮어드려야지. 아이고, 상궁이 오는 구만…… 희상궁 일단 거기 멈춰요. 오면 안돼. 일 났어…….”희상궁은 왕비마마께서 왜 화가 나셨는지 물어보러 왔다가 뭔가 일이 터진 소리가 나서 황급히 달려온 것이다.소월각은 잠시 아수라장이 되었다.우문호는 이불을 감싸고 발로 서일에게 약주를 닦게 시키고 등을 꼿꼿하게 세우는 이 동작을 오랫동안 유지했다.화가 난 건지 부끄러운 건지 아니면 다른 기분인지 모르겠으나 하여튼 우문호의 심경은 지금 상당히 복잡했다.복잡한 나머지 서일, 탕양은 물론 희상궁까지 잘게 다져서 개 먹이로 주고 싶을 정도다.희상궁이 비록 흘깃 봤으나 바로 봉의각으로 돌아갔다.우문호는 역시 한 둘을 죽여서 마음 속의 감정을 해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서일과 탕양은 슬쩍 마주보며 ‘어째 왕야의 몸에서 살기가 느껴지지?’ 하는 눈빛을 교환한다.“왕비는?” 우문호는 천천히 냉정을 되찾고 물었다.“왕비마마는 왕야와 함께 목욕하신 게 아니셨습니까?” 서일이 물었다.우문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래, 그런데 도중에 갔지. 소월각엔 돌아온 적이 없지?”“없습니다. 마마께서 왜 중간에 가셨나요?” 서일이 궁금해서 물었다.우문호는 서일의 배를 한 대 걷어차며 분풀이를 하더니, “꺼져.”서
원경릉을 찾아 봉의각으로 간 우문호우문호가 화를 내며: “어째서 오늘밤 이렇게 낭패를 본 건 난데, 결국 잘못한 것도 내가 되는 건데??”“왕야께선 잘못 하신 게 없으시지요.” 탕양이 내숭의 최고 경지를 시전하며, “하지만 왕비마마도 틀리지 않으셨습니다. 잘못된 건 이 일 자체지요. 이 일 자체가 거론돼서는 안되는 일인 겁니다. 예를 들자면 왕비마마께선 왕야께서 이전에 어떤 여인이 있었는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고 하실 때 왕야는 마음속으로 기쁘셨습니까?”우문호는 잠시 생각하더니, “별로 안 기뻤지, 하지만 적어도 오늘밤처럼 이렇게 처참한 기분은 아니었어.”“처참한 기분은 잠깐입니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건 왕비마마께서 왕야를 진심으로 중시하신 다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왕야가 계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소인 생각에는 왕야께서 고분고분 왕비께 가서 잘못을 인정하시는 게 나을 것으로 사료됩니다.”우문호가 눈을 부라리며, “잘못을 인정해? 방금 내가 잘못한 거 아니라며.”“이건 잘잘못과 상관없습니다. 부부사이에 잘잘못과 시시비비가 어디 있나요? 맞춰주고 사랑해 줄 뿐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거지요.”탕양이 계속 권했다. 두 주인이 사이가 틀어져서는 곤란하지. 초왕부가 겨우 요 며칠 평안하게 지내지 않았는가 말이다.우문호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아, 탕양이 말한 대로 생각해 보고, “네 말도 맞네. 왕비도 내가 신경 쓰이니까 이렇게 하는 게 틀림없어. 만약 왕비가 듣고 아무 반응이 없으면 내가 오히려 걱정했겠지.”“바로 그렇다니까요?” 탕양이 권하며, “왕야 어서 봉의각에 가셔서 달래 주세요, 여자는 좀 맞춰주면 좋아집니다.”우문호가 일어나, “넌 여기 남아, 나 혼자 가면 되니까.” 탕양에게 자신이 여자에게 고개를 숙이는 꼴을 보여줄 순 없다. 이건 체면 문제다.탕양이 미소를 지으며: “예, 소인이 사람을 시켜 탕을 올리라 하지요, 왕비마마와 왕야 두 분이 같이 마시세요.”우문호가 성큼성큼 나가는 것을 보고 탕양은 복도에 서서 웃음을 띤 채,
기왕비의 병하지만 문제가 바로 우문호가 앞으로 원경릉에게만 전심을 다 할 수 있느냐 여부다. 우문호는 그 일에 대해 한마디로 말했다. 황자는 전부 이래.이 시대에 지위가 좀 있다고 하는 남자는 전부 처첩을 몇 씩이나 두고 있다. 우문호도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원경릉에 대한 감정도 사랑인지 확실하지 않고, 사랑이라 해도 감정은 지나가는 거라 일평생 첫 마음을 유지할 수 없다.현대의 이혼율이 높아지면 높아졌지 떨어지지 않는 걸 보면 알 수 있다.하지만 현대는 적어도 이혼이라도 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남편이 변심해서 첩을 들여도 정실 부인은 묵묵히 참아내야 한다. 심지어 현모양처가 되려면 남편을 위해 첩도 들여줘야 한다. 이 생은 특히나 비굴하고 억울하게 보내야 할 것 같다.“왕비마마, 주무셔야 할 시간입니다.” 희상궁이 왔다.원경릉이 앉아서 상궁을 불러, “상궁, 뭐 좀 물어볼 게. 북당 황실 친척 중에 첩을 들이지 않으신 분이 계셔?”“그건…… 지금 첩을 들이진 않으셨지만 앞으론 첩을 들이셔야 해서. 자손을 번창하게 하셔야 하니. 왕비마마 이 일은 괘념치 마세요.”“손왕도 첩을 들이지 않았어.” 원경릉은 둘째 아주버님이 생각났다.“손왕 전하도 첩을 들이셔야 합니다. 손왕비께서 이미 손왕 전하께 첩을 천거하셨어요.” 희상궁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원경릉이 탄식하며, “일생을 한 여자에게 수절한 사람은 없어?”“있죠, 첩을 들일 돈이 없는 평민들이요.” 희상궁이 웃으며, “하지만, 누가 가난한 사람과 결혼하고 싶겠어요? 평범한 여자라도 조금이라도 더 나은 처지가 돼서 일평생 먹고 사는 근심 없기를 바라지요.”그렇지, 의식주가 제일 중요하지, 그거에 비하면 남편이 첩을 들이는 것쯤 용인할 수 있다.“부군이 첩을 들이지 못하게 한 여자도 있어?”희상궁이: “있지요, 하지만 투기하는 여자라고 해서 아무도 그녀와 왕래하지 않고 명예가 땅에 떨어질 겁니다.”그렇다. 투기하는 여자라고 낙인 찍히고 아무도 그녀와 상대하지 않는다. 먹과 가까
페병에 걸린 기왕비와 기왕의 야심기왕비는 진짜 결핵에 걸렸다.어의가 확진을 내리자 기왕은 상당한 돈을 쥐어 주고 어의의 입을 막았다.하지만 전에 의원이 맥을 짚은 적이 있는지라 소문을 아주 막을 수는 없었다.기왕비가 회왕부에서 원경릉에게 속마음이 까발려진 다음 날 결핵이 시작되었다.그저 감기인줄 알고 의원을 불러 약을 짓게 했는데 약을 먹을수록 기침이 심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결핵은 갑자기 발작해서 증세가 심각하다.발병한지 다섯째 날에는 고열이 시작되고 기침이 멈추지 않아 오밤중에 어의를 청했다.결핵에 걸렸다는 건 머리에 죽음이란 두 글자를 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하지만 기왕비가 절망하지 않은 것은 원경릉이 회왕을 낫게 할 수 있다면 의원도 자신을 반드시 낫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결코 원경릉의 의술이 천하제일이라고 인정할 수 없었다.기왕비가 몰랐던 건 원경릉의 의술이 좋아서가 아니라 원경릉은 단지 치료할 약을 가지고 있을 뿐이란 사실이지만. 몇 년간 오래 끄는 결핵도 있지만 급하게 발병할 경우 결핵은 굉장히 급속도록 악화된다.기왕비는 급속도로 악화되는 부류였다.어의가 처방한 약은 일시적으로 억제해도 낫게 할 수는 없다.기왕은 왕비의 병으로 고민했지만 마음은 그런대로 괜찮았다.오늘은 이미 여섯째 날이다.사건을 해결하는 기한까지 이틀 남았다.기왕비가 병으로 앓아 누워있으나 어진 왕비의 진면목을 발휘하고 있으니 기왕에게는 좋은 기회다.홍수(紅袖)가 기왕비를 부축해서 일어나는데 기왕이 다가와 기왕비의 손을 잡으며, “그냥 누워있으시게.”“괜찮습니다!” 눈두덩이가 푹 꺼진 기왕비는 시녀를 시켜 두꺼운 면으로 만든 마스크를 얼굴에 하고 있어서 기왕은 할 필요가 없었다.좌우의 사람들을 물리고, 기왕비는 기왕에게: “사건이 마지막 기한에 이르러 초왕이 문책을 당해 직위에서 해제되면 왕야께서 자진해서 나서세요. 삼일내에 이 사건을 해결시면 아바마마께서 왕야를 높이 평가하실 게 틀림 없습니다. 살인청부업자 쪽에는 가족과 처첩을 거느
연쇄 살인 사건 해결되나경조부의 사건 담당 조직은 원래 한 세트로 난관에 빠졌을 땐 돌파할 방법이 다같이 없다.그러나 지금은 실마리가 있어 모든 게 잘 되고 있다. 그래도 물론 기한 내에 사건을 해결하는 데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왜냐하면 의심이 가는 용의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입증에 시일이 걸리고, 입증 후 용의자의 소재를 파악해 체포해야 사건이 일단락되기 때문이다.바꿔 말해 보름 이상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으면 범인을 잡기란 거의 불가능하단 얘기다.하지만 우문호와 경조사 사람들이 모두 안도하는 건 현재 범인은 대략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용의자는 바로 합령도(合嶺道)에 사는 산화랑(散花郎) 주지(周知)다. 알다시피 강호에 산화랑이란 별칭은 암기, 독침에 능해서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사람이란 뜻이다.범인을 확정하기만 하면 기한 내에 범인을 잡아들이지 못해도 황제 폐하와 주재상도 별 말이 없을 것이다.그런데 하늘이 우문호를 돕는지도 모르겠다.그날 주지가 밤 해시에 근교 낡은 절에 나타날 것이라는 익명의 신고가 들어왔다.우문호는 진위여부를 따지지 않고 사람을 데리고 잠복했는데 정말 주지를 그 자리에서 체포했다.관아로 돌아와 심문하니 주지가 자백하는데 세부 내용이 전부 들어맞았다.경조사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기뻐했으나 우문호는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지의 행적을 신고한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주지가 의외로 잡아떼지 않고 전부 술술 불었다는 점으로, 왜 어린 아기에게는 손을 쓰지 않았느냐는 말에 상당히 설득력 있게 범인도 쌍둥이 자식이 있어서 차마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이다. 우문호는 곧바로 합령도에 사람을 보냈으나 주지의 가족은 이미 떠나고 없었으며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고 들었다.합령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주지는 분명 쌍둥이 아들딸이 있었고 이제 막 돌이 되었다고 했다.모든 게 단 하나 허점없이 딱 들어맞고, 주지는 살인 경위도 설명할 수 있었으며 흉기인 식칼까지 내놓았는데 검시관이 조사해보
기왕과 기왕비의 흑심우문호는 사건의 경위를 순서대로 설명했으나 원경릉이 시체를 검시한 것과 어떤 사람이 익명으로 주지의 소재를 알려 주었다는 사실은 감췄다.원경릉의 공을 박탈 하고자가 아니라 하필 기왕이 여기 있어 기왕에게 원경릉이 이 사건에 발을 담근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익명으로 제보가 들어온 것은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잠시 황제 폐하께 알릴 수 없었다.기왕은 범인의 이름이 주지라는 말을 듣고 벌써 안색이 굳어졌다.명원제가 우문호를 크게 칭찬하니 기왕의 마음에 미움이 차 올랐지만 얼굴은 오히려 잘되었다며 흐뭇한 기색이어야 했다.명원제의 서예 연습을 지켜볼 때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다가, 씩씩거리며 궁을 나와 기왕비의 방으로 직행했다.기왕비는 막 약을 먹고 침대에 누웠다가 기왕이 씩씩거리며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왕야 무슨 일이십니까?”기왕이 노려보며, “넌 알고 있었지, 우문호가 사건을 해결해서 주지가 걸려들었다는 거?”기왕비는 깜짝 놀라, 얼른 몸을 일으키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럴 리가!”“나도 원래 그럴 리 없다고 생각 했어.” 기왕이 천천히 다가가며 냉정한 눈빛으로, “하지만 사건의 경위를 들어보니 초왕이 근교의 낡은 절에서 주지를 체포했고, 주지도 살인사실을 남김없이 자백했다더군.”기왕비는 기왕의 얼굴이 흉악해 지는 것을 보고, “왕야께서는 왜 그런 눈으로 신첩을 보십니까?”기왕이 차가운 목소리로: “왕비, 주지가 왜 교외의 낡은 절에 가야 했을까?”기왕비가 당황해서, “신첩도 모릅니다, 아픈지 며칠이 되어 그쪽 얘기를 전혀 전달받지 못했습니다.”기왕비의 얼굴도 점점 냉정해 지며 거의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말투로: “신첩 이제야 알겠습니다. 왕야께서 신첩을 의심하시는 군요. 신첩이 왕야를 위해 일을 계획했으나 결국 이 공을 우문호에게 주었다는 말씀이지요?”기왕은 한동안 그녀를 노려보다가 겨우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왕비가 당연히 그럴 리 없겠지.”기왕비는 텅 빈 눈동자로, “부부는
만취한 우문호기왕비가 폐병으로 죽어도 아무도 그녀의 사인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고 부모와 형제는 계속 기왕을 지지할 것이다. 혹시라도 기왕이 다시 한 번 상심할까 황제는 기왕을 더 측은하게 여겨 결국 기왕비는 회왕을 돌보다가 안타깝게 병을 얻은 것으로 될 것이다. 멀쩡하게 살인사건의 공로를 우문호에게 넘겨준 건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만약 이런 식으로 기왕을 압박하지 않으면 기왕비는 철저하게 이용 가치를 잃게 된다.기왕비를 잃으면 백배는 고통을 겪을 것이란 걸 끊임없이 상기시켜 줘야 기왕을 장악할 수 있다.경조부는 오늘밤 공로를 치하하는 분위기다.우문호는 술을 잔뜩 마셨는데 오늘 밤은 허물없이 경조부 관원들이 권하는 축하주를 마셔서 정신을 차리고 보면 과음상태로 과음도 이만저만 많이 마신 게 아니다.서일이 우문호를 초왕부 입구까지 데려다 주니 우문호는 마차를 내리자마자 문간에 있는 늙은 회화나무에 한바탕 토했다. 완전 인간 분수로 서일이 보고는 덜덜 떨린 정도로 사람이 토하다 죽을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우문호가 다 토하더니 술이 좀 깨서 서일을 가리키며 호통을 치는데, “너……운전 그 따위로 할 거야?”서일이 우문호를 부축하며, “예, 예,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소월각으로 돌아가십시다.”우문호는 서일의 손을 뿌리치며, 노기 충천해서: “부축할 필요 없다. 난 봉의각으로 갈 거야.”“예, 알겠습니다. 왕비마마께 가십시다.” 서일이 따라가면서 보니 우문호가 갈지자로 허위허위 걷는데 넘어질까 걱정이다.“가서 죄를 물을 것이다!” 우문호가 청천벽력같이 외쳤다. “지가 뭔 데? 날 그렇게 대할 수가 있어?”“왕야, 목소리 좀 줄이세요!” 서일이 차마 입을 틀어막지는 못하고 말했다.이 말을 왕비께서 들으시면 또 화를 내시겠네.우문호는 비틀비틀 소리를 지르며 봉의각 입구에 도착했다.문 앞의 나무를 붙들고 다시 한번 거하게 토하는데 다바오조차 슬금슬금 피해서 저 멀리 도망갔다.우문호는 다 토하고나서 계속 쩌렁쩌렁 소리를 치며, “
우문호는 머리를 움켜쥔 채 집중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관계없는 이들은 다 나가거라!”그가 손을 휘저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말을 듣고 기상궁과 기라가 황급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우문호는 격동된 표정으로 원경릉을 바라보며 “너…… 화내지 마.”라고 말했다.“나 화 안 났어.” 원경릉이 답했다.“거짓말!”우문호는 그저께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원경릉이 화를 내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너 취했구나!”원경릉이 말했다.그는 탁자를 내리치더니 “본왕은 취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원경릉은 그의 부어오른 손바닥을 보며 “됐어. 나 화 안 났어.”라고 말했다.“난 네 말을 믿지 않아, 너는 분명히 화났다! 네가 물어보는 것에 대해 본왕이 말했지 않았느냐, 근데 넌 계속해서 또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술기운 탓인지 그가 주절주절 계속 말을 했다.“그래, 내가 잘 못 했어. 내가 괜한 걸 물어봤네.”원경릉은 이틀 내내 괴로웠기에 지금, 이 순간 그와 입씨름하기 싫었다. “물어봐도 돼, 근데 지겹게 계속 묻지는 마. 본왕이 말했잖아 아니라고, 근데 넌 안 믿고, 또 물어보고.”우문호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러자 듣고 있던 그녀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나 계속 안 물어봤어, 너도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잖아.” “본왕이 말했잖아 아니라고!”그의 눈에는 원망스러움이 담겨있었다.아, 가소롭다. “솔직히 말해봐 맞잖아!”우문호는 노발대발하며“아니라고, 네가 나를 우습게 생각하니까 본왕이 그랬을 거라고 하는 거지.”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원경릉은 어리둥절했다.“무슨 뜻이야? 내가 너를 우습게 생각한다고?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한다는 건대?”“아!니!라!고!” 우문호는 한 글자 한 글자 원망의 눈빛을 담아 원경릉에게 내질렀다.“자세히 설명해봐!”원경릉이 그의 눈을 쳐다보자 우문호는 순간 흠칫하며 뒷걸음질을 칠 뻔했다. 술기운 때문인지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아무튼 아니야…….”원경릉은 손사래를 치며 “그래, 아니라고
우문호는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이 확 어두워지며 깜짝 놀랐다.“청혼? 누가 청혼을 한 것이오? 미친 것이오? 겨우 여덟 살인데!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이런 짓을……”그는 너무 충격을 받아 분노가 치밀었다. 겨우 여덟 살인 딸을 누군가 눈독을 들이고, 심지어 청혼까지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는 그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반드시 혼쭐을 내겠다고 마음먹었다.원경릉이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이미 택란의 비밀을 다 털어놨으니, 이제 더 이상 나한테 화내면 안 되오.”“말하시오. 용서할 테니 더 말하시오!”우문호는 더 이상 원경릉에게 화를 낼 힘도 없었다. 사실 처음부터 그렇게 심하게 화가 난 것도 아니었고, 복잡한 감정만이 뒤섞여 답답할 뿐이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들도 모두 사라지고, 이 터무니없는 사건이 더 중요해졌다.원경릉은 택란이 금나라에 가서 10만 냥을 얻은 전말을 설명했다. 특히 금나라의 어린 황제가 그녀에게 청혼했다는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고 전부 털어놓았다. 단 한 글자도 숨기지 않고 진실만 말했다.우문호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그건 너무 대담하잖소! 금나라에서 10만 냥을 빼앗았다니? 어찌 이야기가 이렇게 익숙한 것이오? 그래, 기화요! 어찌 스승이 이런 짓을 가르친 것이오? 그리고 그 금나라의 어린 황제는 이제 몇 살이오? 듣자 하니 겨우 열 살이라고……”“열셋이오. 금나라의 진국왕이 그의 권력을 누르려, 일부러 열 살이라고 소문낸 것이오.”우문호는 벌떡 일어나 뒷짐을 지고 방을 빙빙 돌며 어쩔줄 몰라했다. “열다섯이라도 안 되네! 금나라가 북당의 경성에서 얼마나 먼지 알고 있소? 아이가 그곳에 시집가면 1년에 한 번도 못 돌아올 것이네. 북당의 진국 공주를 부인으로 삼겠다니? 허망 된 꿈이요! 꿈!”“아이들의 농일 뿐이요.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안 되네.”원경릉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농담이라도 안 되네. 황위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우리 귀한 딸을 부인으로 삼겠다니? 이런 녀석은 앞
목여 태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문호에게 말했다.“폐하, 공주를 너무 꾸짖지 마십시오. 공주께서는 단지 세상을 경험하고 싶어 한 것 뿐입니다. 큰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안왕과 위왕도 그곳에 있었고,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았잖습니까?”우문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택란이 자네에게는 과자 한 조각을 주었지만, 나한테는 안 주더군.”택란은 그 말을 듣고 재빨리 과자 한 조각을 가져와 아버지의 입가에 가져다 대며 환심을 사려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 드셔 보세요. 이건 그렇게 달지 않은 생강 과자인데, 정말 맛있습니다!”생강 과자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딸의 귀엽고 앙증맞은 얼굴을 보니 어떻게 밀쳐낼 수 있겠는가? 화가 난 상태였지만 결국 한입 물었고 생강과 설탕의 맛이 입안에 퍼졌고, 딸의 사랑스러운 미소를 보니 얼굴에 굳었던 표정이 풀어졌다.“나도 먹고 싶은데.”원경릉이 가볍게 웃으며 그의 옆에 앉아 턱을 괴고 물었다.“다섯째야, 맛있느냐?”우문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무시했다. 그녀가 스스로 만든 규정을 어겼으니, 좋은 표정을 지을 마음이 없었다.원경릉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택란아, 나한테도 한 조각 줘 보거라!”택란은 다시 과자 한 조각을 가져와 엄마의 입가에 가져다주며 더 큰 죄책감을 느꼈다. 이번엔 자신의 엄마까지 곤란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원경릉은 과자를 먹고 나서 웃으며 말했다.“정말 맛있구나. 다 먹었으니 나가서 좀 자거라. 돌아오는 길에 제대로 못 잤으니.”“예!”택란은 얌전히 대답하고 나머지 과자를 빨리 먹어 치운 뒤 아버지에게 다가가 그를 한 번 안아주었다.“아바마마, 저 먼저 자러 가겠습니다. 깨고 나면 다리 주물러 드릴게요!”우문호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그래, 어서 가거라.”택란은 목여 태감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엄마를 한 번 돌아보며 아버지가 너무 오래 화를 내지 않기를 바랐다.원경릉은 문을 닫고 탁자 옆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택란이 드디어 경성으로 돌아왔다. 우문호는 소월궁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옆에서 목여 태감이 계속해서 설득했다. 그는 공주가 아직 어리니, 노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며, 그저 택란이 다른 어린아이들이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을 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목여 태감은 혹시라도 황제가 공주를 꾸짖을까 봐 걱정되어 공주를 감쌌다. 그의 약한 마음은 그런 걸 감당하지 못했다.마침내 택란과 원경릉이 도착했다.우문호는 작은딸이 원경릉의 뒤에 숨어 겁먹은 얼굴로 머리를 살짝 내밀고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았다.원경릉이 딸의 손을 꽉 잡고 말했다.“가봐라, 아버지께서 기다리신다.”택란은 고개를 숙이고 아버지 앞으로 다가갔다. 우문호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자기 손을 그의 손 위에 올려놓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바마마, 저 돌아왔습니다.”그러자 우문호는 딸의 손을 잡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뿌리치지도 않았다.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는 눈빛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약도성에 얼마나 있었느냐?”택란은 거짓말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솔직히 대답했다.“지난번 여름방학 때 집에 돌아온 후 바로 약도성으로 갔어요.”우문호는 큰 충격을 받았다.“모두가 알고 있었으면서, 나만 속였단 말이냐?”택란은 미안한 마음에 아버지를 껴안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안 그러겠습니다!”우문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원경릉이 다가가 말했다.“아이가 자네 선물을 많이 샀소. 한번 보시게.”“필요 없소!”우문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딸을 뿌리칠 마음은 없지만, 그는 여전히 속았다는 사실에 너무 힘들었다.원경릉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텐데,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다. 서로 비밀이 없기로 약속했건만, 그 약속이 깨진 것 같아 화가 났다.원경릉은 그의 표정을 보고 더 걱정해야 할 사람이 자기라는 것을 깨달았다.오는 길 내내 택란만 걱정하며 우문호에게 딸을 변호해 주려 했지만, 정작 자신이 그를 속인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이 한 일을 이야기하며 원경릉을 기쁘게 했다.다섯째는 이전에 다섯 개의 성을 위해 적어도 30년이나 50년의 계획이 필요하다고 했었는데, 지금 상황을 보니, 20년이 채 되지 않아 조정에 대한 충성심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나아가 국경 방어뿐만 아니라 조정에 세금을 납부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보였다. 아이들이 현대의 경험을 참고하며 지내는 것이 다섯째의 큰 걱정을 해결해 준 것이었다. 약도성은 이번 지진으로 국고의 돈과 주변 주현의 자원을 사용했다. 북당과 약도성의 백성들의 마음이 끈끈히 묶여 있어 불행 중 다행이었다.중증 환자들이 회복된 후, 원경릉은 택란과 함께 경성으로 돌아갔다.출발하기 전에 비둘기를 통해 다섯째에게 소식을 전하며 심리적 준비를 하도록 시간을 주었다. 이렇게 하면 다섯째가 택란을 보았을 때 마음을 가라앉혀 덜 화를 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택란은 아버지가 화를 내거나 슬퍼할까 봐 사실 마음속으로 몹시 두려웠다.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그녀또한 잘 알고 있었다.돌아가던 중 택란은 아버지에게 줄 선물을 사자고 제안했다. 원경릉은 딸의 강한 생존 본능에 웃음을 터뜨렸다. 딸이 아버지를 소중히 여기고 있었으니, 다섯째가 딸을 그렇게 아끼는 것이 헛된 일이 아님을 느꼈다.“너희 아버지께서는 특별한 취미가 없으시고, 그저 술 한잔하는 걸 좋아하시니까 좋은 술 몇 병 사 가는건 어떠냐?”그러자 원경릉이 먼저 제안했다.“좋습니다! 사요! 많이 사서 마차에 싣고 가겠습니다!”택란이 급히 대답하자 원경릉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다섯째가 아이들에게 그렇게 자상한데도 아이들이 그를 무서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물론 이는 두려움이 아니라 존경이고 사랑이지만 말이다.경성에서 우문호는 원경릉의 서신을 받자마자 열어보았다. 편지를 읽는 순간 그는 멍해졌다.“계란이가 약도성에 갔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것이냐? 그렇게 얌전하던 딸아이가 몰래 약도성에 갔을 리가 없어.”더구나, 셋째와 넷째는
약도성의 건물 대부분이 무너져 백성들은 임시로 지은 오두막과 초가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폐허로 변한 도성은 눈에 보이는 곳마다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원경릉은 마음속 깊이 안타까움을 느꼈다.택란의 뜻으로 중증 환자들은 모두 저택으로 옮겨졌다. 원경릉은 계란이의 결정이 매우 옳다고 생각했다. 중증 환자들은 그녀와 몇몇 의원이 책임지고 돌보았고, 나머지 의원은 경증 치료를 맡았다.택란은 엄마 곁에 머물며 환자를 돌보는 것을 도왔는데, 기본적인 의술을 알고 있어서 소독과 붕대 감는 일을 도왔다. 부상자들은 대부분 통증이 심해 참기 어려웠고, 진통제를 먹이거나 진통 주사를 놓았다. 택란도 주사를 놓을 수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쉬지 않고 바쁜 모습을 보였다. 그런 그녀를 본 환자들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그들은 궁에서 자신들의 생사를 진정으로 걱정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황후마저 직접 왔으니, 예전의 대립과 적대감은 유치한 웃음거리로 느껴졌다.저녁 무렵, 아이들이 엄마를 찾아왔지만, 이야기를 나눌 여유도 없이 서로 포옹한 뒤 다시 각자 사람들을 구하러 나섰다.백성 중 자발적으로 음식을 만들고 약을 끓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저택 내 물자는 부족했으나 주변의 도움이 끊이질 않았다. 호명은 사람들을 조직해 식량과 의복을 나누어 주었다. 지금의 약도성엔 인간의 이기심이 한순간에 사라진 듯했다.황후가 직접 약도성에 온 덕분에 서북 지역의 신하들도 직접 의원과 물자를 이끌고 약도성에 와서 돕기 시작했다.약도성은 전례 없는 관심을 받았고, 이는 약도성 백성들이 다섯 도시 중 가장 빠르게 조정을 인정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사람들을 구하고 재난 이전의 상태로 빠르게 회복하는 데만 집중했다.재난이 발생한 지 반달이 지나면서 발견된 것은 모두 희생자뿐이었다. 인원을 파악한 후 한곳에 모아 장례를 치렀다.이번 지진으로 약도성은 5만여 명의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 이 숫자는 매우 끔찍했지만, 택란의 사전
북당의 황후가 의원을 이끌고 직접 약도성으로 향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이들이 믿지 않았다. 약도성의 백성들조차 믿을 수 없었고, 감히 믿을 엄두도 없었다.우문택란이 이미 약도성에 왔지만, 고작 여덟 살짜리 아이에 불과했다. 다들 그저 그녀가 약도성에 놀러 왔고 수천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왔다고 생각했다. 이후 어린아이답지 않은 그녀의 비범한 능력이 증명되었다. 그녀는 약도성의 성주로서 약도성에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러나 이번 지진으로 약도성은 초토화되었고, 재건하려면 조정이 막대한 인력과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북당의 조정이 약도성을 방치하고 자연적으로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어도 어쩔 수 없었다. 약도성 백성들은 줄곧 조정을 적대시하였기 때문에, 조정이 이들을 구할 이유가 없었다.그런데 황후가 직접 약도성으로 향한다는 것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약도성은 조정이 이렇게까지 신경 쓸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지 않았다.지진 발생 열흘째 되던 날, 원경릉 황후가 이끄는 의원들이 약도성에 도착했다. 그들은 밤낮없이 말을 갈아타며 전력으로 달려왔다. 약도성의 백성들은 이 소식을 듣고 흥분하며 황후께서 약도성에 오신다고 얘기를 전했다.사람들의 생각은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지진 이전까지만 해도 조정을 적대시하고 북당을 적국으로 여겼던 약도성 백성들이, 이제는 원경릉을 환영하며 열광적으로 맞이했다. 이는 택란이 지진을 미리 알아차린 것과 구조 활동 덕분이었다.원경릉은 백성들의 뜨거운 환영을 예상하지 못했다. 말을 타고 앞을 바라보니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고 있었고, 그녀의 눈시울이 촉촉해졌다.“어머니!”군중 속에서 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경릉은 단번에 딸을 찾아내고 말에서 내려 달려갔다. 택란은 엄마 품에 안기자마자 눈물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어머니,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너무 많아요!"택란이 흐느끼며 말했다.원경릉은 딸이 이렇게 슬프게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원경릉은 딸을 품에 꼭 안
택란은 어릴 적부터 화염을 다루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감정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 겉으로는 담담해 보였지만, 그녀는 내면의 감정을 철저히 억눌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화염을 제어하지 못할 위험이 있었다. 스승님을 따른 후, 스승이 계속해서 그녀에게 약점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감정의 틈새가 생기면 많은 것을 통제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녀는 항상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며, 모든 일을 담담히 대하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진심 어린 감정을 흔들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그녀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꼬마 봉황이 날개를 펼쳐 그녀를 품에 안고 위로해 주었다.그들은 수년간 서로를 지지하며 함께 성장해 왔고, 서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잠시 후, 택란은 다시 구조 현장으로 나갔고, 여전히 평온하고 흔들림 없는 얼굴로 사람들 앞에 섰다.위왕과 안왕은 어린 조카의 침착함에 깜짝 놀랐다. 겨우 여덟 살짜리 아이가 어떻게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아이의 천성은 어디로 간 것인가?그들은 택란이 애초에 아이로서의 천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태어난 후, 조금이라도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녀는 빠르게 세상을 이해하며, 지혜롭고 노련한 어른처럼 모든 것을 맞서야 했다.사실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그녀를 한두 살짜리 어린아이처럼 사랑하고 아껴주었다. 그에게는 아무런 기대나 요구가 없었으며, 능력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어머니처럼 그녀의 모든 행동을 걱정하고 감시하지 않았다.아버지 앞에서 그녀는 가면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약도성의 일이 안정된 후, 그녀는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돌아갈 계획이었다. 이번 약도성 방문은 그녀에게 있어 단순한 놀이가 아닌 실습이었다. 이곳은 그녀의 의지와 감정을 단련할 수 있는 장소였고, 실제로 그녀는 이곳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했다.구조 작업은 계속되었고, 지진이 발
한 마을 주민이 눈물을 닦으며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지원 같은 건 절대 없을 것이오. 조정은 우리를 모조리 죽이길 바라오. 우리가 죽어야 조정은, 이 약도성을 완전히 삼킬 수 있소. 아무도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소.”택란은 화가 나서 말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인가? 내가 여기에 왔잖냐! 빨리 계속 파시게!”주민이 그녀를 힐끔 보며 물었다.“웬 꼬마가, 넌 누구냐?”택란을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어둠 속이라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린아이가 여기 있는 걸 보고 다들 의아해했다.“약도성의 성주, 우문택란이다!”그녀는 단호하게 말한 뒤, 산사태가 난 지역을 향해 다시 걸어갔다. 작은 몸집이 시선에서 멀어질수록 더욱 작아 보였다.황실의 공주라는 말에 사람들은 모두 놀라 얼어붙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공주가 이런 곳에 직접 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공주는 저택 안에서 잘 보호받고 있어야 할 존재다.그녀는 알 수 없는 힘을 사용해 접근한 곳의 흙을 한 겹씩 옮겨내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울부짖는 소리와 구조 요청이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녀를 따라가 급히 구조 작업에 참여했다.약도성의 지진은 강북부에서도 뚜렷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낡은 집도 무너졌지만, 심각한 피해는 없었다. 약도성에 지진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위왕과 안왕은 신속히 구조 병사를 파견했다. 그들은 택란이 약도성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들 여태껏 택란이 스승과 함께 떠났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의 네 오빠들은 바로 병사를 데리고 약도성으로 향했다. 지진 발생 12 시진 후 약도성에는 8천 명 이상의 병사가 합류했다.약도성의 백성은 조정이 지원군을 보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조정이 약도성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든 관심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과거에도 가뭄, 메뚜기 떼, 산사태 등의 재난이 일어났지만, 북막조정은 몇 포대의 쌀만 보내며 형식적인 구조를 했을 뿐이다.약도성
지진이 발생하기 전, 호명과 주 아가씨는 약도성 중심부에서 백성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새벽녘은 사람들이 가장 피곤할 시간이다. 억지로 잠에서 깨어난 백성들은 분노했다. 그중 한 집안은 도축업을 하는 홀아비가 어린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새벽 무렵에야 돼지를 잡고 고기를 나눠주고 돌아와 잠자리에 든 참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잠에서 깨어난 데다 아이까지 깨우니,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옆집 사람은 칼을 들고 나가 저들을 쫓아내면 다시 잘 수 있다고 부추겼다. 남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던 상황이라 아들을 방으로 데려다 놓고, 즉시 칼을 들고 나가 주 아가씨와 맞섰다.그가 칼을 휘두르며 집안 식구들과 함께 밖으로 나온 그 순간, 지진이 발생했다. 그들은 자기 집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먼지가 자욱했고, 곁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옆집 역시 무너졌고,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이 집 처마 아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깔려 있었다.“아들! 아들아!”홀아비는 그제야 안으로 데려다 놓았던 아들을 떠올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집은 이미 완전히 무너졌다. 겨우 세 살밖에 안 되는 아들은, 살아있을 가능성이 희박했다.그는 미친 듯이 벽돌과 흙더미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주 아가씨와 호명도 서둘러 도왔다.지진은 단 몇 초 만에 일어났다. 이미 수많은 사람이 집으로 돌아갔고, 그 결과 무너진 집에 깔린 백성들이 매우 많았다. 약도성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사방에서 울부짖음과 비명이 들려왔다. 평소 조정과 맞서던 이들은 너무나 나약하고 무력해 보였다. 그들의 처절한 울음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찢어지게 했다.홀아비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다들 함께 벽돌을 치우고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도구가 없어서 맨손으로 작업해야 했다. 주 아가씨의 손은 금세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흙벽을 밀어내고 벽돌을 옮겼다.반 시진 후, 주 아가씨가 마침내 아이를 안고 왔다. 아이는 다리를 크게 다쳐 엉엉 울고 있었다. 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