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다른 방법이 없다네. 나는 이번 일을 통해 황제의 포석이 근시안적이라는 걸 알았네. 집안과 나라도 구분을 못하고 말이야.” 태상황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 나갔다. “앞으로 정치를 펼치면서도 황제와 태자의 다툼은 계속 될 거야. 모순은 일정한 수준까지 쌓여만 갈 거고 상대적으로 황제의 십황자에 대한 편애는 갈수록 심해지겠지. 5년, 10년, 심지어 20년 뒤에는 태자를 폐하고 십황자를 세우려는 마음이 황제에게 일 것이고 그때 과인은 막을 수도 없어. 그저 속수무책으로 황제 손에 북당이 심연으로 빠져드는 걸 지켜보는 수밖에. 이점을 걱정하지 않았으면 이번에 황제에게 이렇게 심각하게 훈계할 필요는 없다.”안풍친왕이 위로하며 말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네 말년이나 잘 지낼 생각을 해. 나랑 네 형수가 상의했는데 십년간 여기 북당에 머물러 있을 수 있으니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돌아와 태자가 보위에 오르는 걸 돕도록 하지. 너는 말이야, 이미 물러났으니 소일거리를 좀 찾아. 맨날 세 늙은이끼리 어울리지 말고, 같이 어울려 봤자 살날이 적다는 생각밖에 더해?”태상황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쟤들이랑 같이 안 어울리면 난 대체 누구랑 어울려 놀라는 것인가?”“좀 의미 있는 일을 하라고, 젊을 때 해본 적 별로 없는.”하지만 태상황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않다. “과인이 젊을 때 안 해본 일이 어디 있어? 알면서 그래.”안풍친왕이 미소를 지으며 태상황에게 다시 물었다. “여자는 좋아해 봤어?”“왜 안 좋아해? 남자라면 다 좋아하지.”“네가 말하는 그런 가볍게 좋아하는 거 말고. 희상궁이랑 주재상 같이, 나랑 네 형수랑 같이 그런 사랑하는 감정 말이야.”태상황이 더욱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뭐가 달라?”“그녀와 얘기하는 게 너무 좋고, 아무 말 없이 그냥 같이 앉아 있기만 해도 아주 편안하게 느껴지는 게 다르지.”태상황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한 사람이 있긴 해.”“누구?”“대흥궁에서 온
한편, 명원제는 사람을 시켜 안풍친왕의 움직임을 계속 감시했다. 그리고 안풍친왕비가 장문전으로 갔다는 말에 명원제는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그제서야 황귀비의 아버지가 나장군으로 과거 안풍친왕비의 부하였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군인사이에 상호를 감싸 주는 것은 상당히 끈끈했다. 특히 안풍친왕비의 성격은 거칠어서 만약 이번에 황귀비가 안풍친왕비 면전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날엔 안풍친왕비가 어서방으로 들이닥칠 것이 분명했다. 명원제는 좌불안석으로 침전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거의 해시(밤 9시~11시)까지 어서방에서 기다렸는데, 안풍친왕비가 건곤전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말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명원제는 다음날 아침 일찍 어서방에서 회의를 한 뒤 거의 점심때가 되어 관리들은 돌려 보내고, 호비 궁으로 발길을 옮겼다.그런데 채명전에 도착하기 전에 채명전 사람이 와 보고하기를 십황자가 상처도 아직 다 낫지 않은 채로 건곤전으로 달려갔다는 것이다. 태상황 폐하께 옳고 그름을 가려 황제 폐하를 벌해 달라고 고자질을 하러 간 것이었다.명원제는 이 말을 듣고 머리가 띵하고 울리며 십황자에 대한 분노가 치밀기 시작했다. ‘곤장 3대는 너무 가벼운 벌이었군, 목여태감이 제대로 힘 주어 때리지 않고 척만 했어.’하지만 목여태감도 십황자가 아직 이틀도 안돼서 또 문제를 일으킬 줄은 생각도 못했다.명원제가 건곤전으로 얼른 갈 수 밖에 없었다. 태상황이 화가 나서 심장발작을 또 일으킬까 걱정됐기 때문이었다.하지만 막 건곤전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마당에서 울음소리와 황태손 만두의 상당히 엄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울긴 왜 웁니까? 억울한 게 뭐가 있어요?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는 게 당연하죠.맞기 싫으면 말을 잘 들으시면 되죠. 아들 된 자가 부모님 말을 안 듣고서 고자질할 낯짝이 있어요? 사내 대장부가 잘못을 했으면서 반성할 줄은 모르고, 울고 고자질이나 하지를 않나. 이거 해줘라 저거 해 줘라 창피하지도 않아요? 작은 아버지는 황조부의 아들이에요. 황조부
이번 성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학사가 초고를 완성하자 바로 도장을 찍게 해서 그대로 태자에게 보냈다.다섯 도시로 인한 분쟁은 이렇게 파란만장했던 사건으로 일단락 지어졌다.한편 저녁이 되자, 십황자가 와서 명원제에게 잘못을 빌었다. 이번에는 상당히 성의가 느껴지는 게 조그만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닥에 꿇어앉아 잘못했다고 빌며 용서를 구했다.명원제는 곤장을 때려도 깨우쳐 주지 못한 십황자를 만두가 엄하게 꾸짖어 뉘우치게 할 줄은 몰랐다. 허탈하기도 했지만 기쁘고 안도의 마음이 들었다. 황태손이란 이름이 명불허전이었어!명원제는 목여태감을 건곤전으로 보내 태상황 앞에서 황태손을 칭찬하자, 태상황이 다 듣고 나서 목여태감에게 몇 마디로 답했다. “그의 공이 아니야!”목여태감도 숨기지 않고 돌아가서 그대로 명원제에게 보고하자 그가 한동안 멋쩍어하더니 무안한 말투로 목여태감에게 말했다. “짐은 그와 같은 황태손이 있는 게 가장 위안이 되고 기쁠 뿐이야.”명원제의 가마는 장문전으로 향했다.황귀비는 명원제를 안으로 들이게 한 뒤 기름 등에 불을 붙이고 탁자에 마주 앉았다. 황귀비의 표정은 평온했고, 아무 말이 없었다.명원제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돌아가, 여긴 당신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아.”“아니요, 좋습니다. 신첩은 평생 이곳에 있을 생각입니다!” 황귀비가 말했다.“어째서 자신을 괴롭히는 것으로 짐을 벌하려고 하느냐?” 명원제가 황귀비를 바라봤다.황귀비는 입가에 고요한 미소를 띠었다. “괴롭지 않습니다. 신첩은 정말 여기가 좋아요. 고요하고 절 옭아매는 잡다한 일이 없습니다. 매일 자유롭게 지내는 것이 지난날 수만 가지 일에 묶여 있을 때보다 지내기 좋습니다.”명원제가 뭐라고 더 말하려 하자 황귀비가 명원제를 똑바로 쳐다보며 먼저 입을 뗐다. “폐하, 더는 말씀하지 마세요. 신첩은 옮기지 않을 것으로 여기가 좋습니다. 정리를 마치고 나니 여기는 꽃이 피고 새가 우는 곳으로 바깥의 소란스럽고 어수선함보다 낫습니다. 신첩이 황귀비에 봉해지기 전에
명원제는 결국 장문전에서 나갔다. 오래되고 중후해진 정문이 닫히면 나는 끼익하는 소리가 황귀비와 매사에 서로 돕고 지내던 동병상련의 추억들을 밖으로 내모는 듯했다.명원제가 목여태감에게 말했다. “짐은 황귀비를 잃었어.” 적적한 그의 목소리는 체념으로 가득찼다.“폐하 곁에는 아직 호비 마마께서 계시고, 후궁의 많은 마마님들께서 계십니다.” 목여태감은 위로하는 척하면서 은근히 비꼬았다.“달라!” 명원제는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파쇄석이 깔린 길을 걸었다. 발걸음이 붕 뜬 게 기분이 가라앉으며 마음이 은은하게 아렸다.목여태감이 명원제의 걸음에 맞춰 밖으로 걸었다. 당연히 다르고말고. 온 후궁에서 유일하게 황귀비가 가장 이해심이 풍부한 성품으로 다른 사람을 잘 헤아려줬지만 알고보면 상당히 원칙적이었다.황귀비는 자신을 장문전 안에 가둔 채 명원제의 숙고를 다시 한번 거치게 한 뒤 후궁의 권한을 손왕의 어머니인 정비 마마에게 주고 경귀비로 책봉하도록 했다.경귀비는 궁 안에만 틀어박혀 좀처럼 밖에 나오지 않았고, 후궁 일에도 거의 참여하지 않았으니 갑자기 후궁의 권한이 자신에게 떨어져도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 경귀비 위로도 주 황후와 적귀비, 그리고 총애를 받는 호비가 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성지가 내린 이상 경귀비는 그저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장문전에 가서 황귀비에게 인수인계를 받은 경귀비는 깊은 한숨을 토하며 처량하게 말했다. “반평생, 폐하의 은총을 구한 적 없이 지냈는데 권세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질 줄 누가 알았을까. 정말 어찌할 바를 모르겠고 황공하기 그지없네요. 행여나 시비에 휘말려 두 아들에게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황귀비가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분수껏 하면 됩니다. 혹여나 문제가 있으면 절 찾아오셔도 되고 아니면 태자비를 찾아가셔도 돼요. 태자비는 후궁의 일을 간여할 수는 없지만 의견을 제시해 줄 수는 있을 겁니다.”경귀비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수 밖에요. 동생도 몸 조심해요. 그런 시끄러운 일로 몸 상하지 말고요.”“
“좋아질 수 있는 거야? 언제 좋아져? 대체 뭘 하면 돼?” 태상황이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원경릉은 솔직하게 답했다. “전부 아직 미지수예요. 재상의 머릿속에 핏덩이가 흡수될지 지켜보고 만약 흡수될 경우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흡수되지 않을 경우엔 실명 외에도 다른 후유증이 있을 수도 있어요.”“다른 방법은 없나?” 태상황의 마음이 또 한없이 작아졌다. 겨우 마음이 호방해졌는데 캄캄한 안개 속을 아직 다 헤치고 건너온 게 아닐 줄 몰랐다.“당분간은 없어요!” 원경릉이 힘없이 말하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쩌면 궁에서 나가서 좋은 환경으로 가면 마음이 편해 병세가 일정한 호전을 보이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궁 분위기는 너무 무겁고 답답했다.태상황은 일찍부터 그렇게 할 생각이라 원경릉의 건의에 사람을 불러 짐을 꾸린 뒤 황실 별장으로 보내고 날을 잡아 이사하기로 했다.태상황이 이번에 궁을 떠나는 것은 철저하게 마음 먹은 것으로, 아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명원제가 말렸지만 붙잡을 수 없어 마차로 그들을 보내드릴 수밖에 없었다. 떠날 때조차 태상황은 명원제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리고 오히려 주 재상이, “소신 이제 몸이 온전치 못해서 중임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소신이 재상직에서 물러나기를 원하오니 폐하께서는 윤허하여 주십시오!”명원제는 콧등이 시큰했다. 주 재상이 재임하던 기간을 돌이켜보니 몸과 마음을 바쳐 갖은 고생을 다 했다. 얼마 전부터 반쯤 물러난 상태라고는 해도 온통 마음이 조정 일에 있어 전쟁이 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출정하기까지 했다.“재상은 몸 상태만 신경 쓰고 나랏일은 걱정할 필요 없다네!” 명원제는 목이 메었다.주 재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명원제를 보더니 살짝 한숨을 쉬었다. “폐하, 소신 한 마디만 올리겠습니다. 늙은이의 잔소리라고 괘념치 마시고 일단 들어주십시오. 북당은 발전해야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멈춰 있어서는 안 됩니다. 조정은 인재를 선발해 적폐를 처단하고 정치를 쇄신해야 합니
냉정언이 조회를 마치고 나와 어서방으로 갔는데, 명원제는 내각 학사들과 회의 중이었다.이번 왕조 최연소 재상인 냉정언은 이름을 드러나게 날린 적이 없었다. 줄곧 이전의 조용하고 내성적인 모습으로 천천히 재상의 태사의에 앉았는데 냉정언의 입술에 보일 듯 말듯한 미소가 걸렸다.햇살이 궁에서 나서는 길을 비추고 궁 양쪽 담장을 뒤덮은 무성한 나뭇잎이 냉정언의 발걸음을 따라 천천히 뒤로 멀어졌다. 출궁하는 길에 보이는 금군 시위들 무도가 순찰을 돌다가 “냉재상!”하고 냉정언에게 깍듯이 예를 취했다.냉정언은 입술을 쭉 내밀며 미소를 짓더니 더욱 천천히 걸어 나갔다.막 궁문을 나와 머뭇거리던 냉정언의 낫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빠르게 나타난 그림자는 악의가 가득해 순식간에 살기를 충천하며 흉악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턱 내!”냉정언은 손가락 끝으로 관복 가슴팍에 톡톡 두드리며 눈을 살짝 치켜떴다. 눈꼬리는 여전히 예리함이 번득였다. “현 재상에게 돈을 강탈하고자 협박하는 게 어떤 죄목에 해당하는지 알고 있겠지?”우문호는 냉정언 목을 겨누었던 손을 풀고 바로 냉정언의 어깨를 시원하게 안마하며 물었다. “아직도 태자 앞에서 재상입네 하는 것 좀 봐. 아이고, 대단하셔라. 다시 묻자, 낼 거야 안 낼 거야? 안 내면 우리 형제들이 가만있지 않을걸!”우문호가 손가락을 까딱하자, 오문(午門:궁의 정문) 쪽에서 몇 사람이 나란히 걸어오는데 제왕, 손왕, 회왕을 필두로 구사, 전진 장군, 사촌 소형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이 앞으로 성큼성큼 긴 옷자락을 휘날리며 활보하는 모습은 말할 수 없이 위풍당당하고 호탕했다.냉정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며 눈에 맑은 빛이 반짝였다. “현 태자 전하에 현 황제 폐하의 친왕 전하는 물론이고 이렇게 많은 분이 오셨는데, 목숨을 내놓으라고 협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한 턱 내지 않으면 안 되겠는데요.”우문호가 휘파람을 불며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구사에게 소리쳤다. “동서, 가서 홍엽이랑 박씨 부부 불러서 초왕부에서 모이자고
훼천이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며 날카로운 말투로 소리쳤다. “어디서 감히 고상을 떨어? 늑대골에서는 화장한 뼈 담은 항아리도 썼던 주제에.”그러자 모두가 껄껄 웃었고, 냉정언도 눈웃음을 지었다.사발이 다시 홍엽 앞에 놓이자, 이번엔 홍엽이 받을 수밖에 없어 머지않아 고개를 들고 한 잔을 다 비워냈다. 그러자 구사가 바로 또 가득 따랐다. “계속 마셔!”홍엽이 또 다 비웠는데 급하게 마셔서 그런지 계속 기침을 하는데 홍엽이 죽든 말든 구사는 또 사발에 가득 따르며 외쳤다. “마지막 한 잔!”그러자 홍엽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어질어질한 상태였지만, 손을 뻗어 사발을 잡으려는 순간 냉정언이 가로채 손을 뻗었다. “내가 대신 한 사발 하지!”“됐어!” 홍엽은 ‘고작 세 사발이 뭐 대단하다고?’ 다시 사발을 가져오려 했다.냉정언이 싸늘한 눈빛으로, “손대지 마!”냉정언은 곧바로 술잔을 들고 고개를 살짝 젖힌 뒤 술 한잔을 입으로 가져가는데 세 모금에 한 사발을 다 마셨다. 냉정언은 원래가 우아한 사람으로 사발에 술을 마셔도 군자의 품위를 잃지 않았으나 이렇게 소탈하게 마시는 모습은 처음이었다.홍엽의 눈빛은 자기도 모르게 따듯해져 있었다. ‘냉정언이 알고 보니 의리의 사나이였군.’재상이 술을 대신 마셨지만 아무도 감히 트집 잡을 생각을 못 하는데 우문호만 냉정언을 쓱 째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냉대인이 술이 고팠나 보네. 냉대인에게 건배!”사람들이 우르르 건배하러 냉정언에게 몰려가 너도나도 신임 재상에게 건배를 청했다.냉정언이 사발을 들고 일어나 우문호를 째려보고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입을 뗐다. “빌어먹을 태자야!”우문호가 아니라며 손을 내저으며 태자로서 한껏 거드름을 피워댔다. “말하는 것 좀 보게!”접객실에서는 황실의 며느리들이 모여 앉아 도란도란 얘기 중이었다.그동안 남편들이 어디 낮술 마실 짬이 있기나 했나? 낮술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일로, 그동안 뼈가 부서지도록 고생했으니 오늘은 마시고 싶은 만큼 얼마든지 마시고 즐거워서 다행
미색이 턱을 괴며 물었다. “둘째 형님, 남의 인륜지대사에 뭘 그렇게 신경 쓰시나요?”그러자 손 왕비가 정색하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어쨌든 냉 대인이 지금 재상인데 혼사는 물론이고 일상생활의 작은 일도 신경 써야 할 건 신경 써야 하는 것이야.”요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둘째한테 신경 꺼. 한가해서 그러는 거니까.”손 왕비가 한가한 게 당연한 거 아냐? 지금 희동이도 커서 곁에 붙어있으려 하지 않고 집안일은 별것 없는 데다 싸울 첩도 없다. 손왕은 또 출장을 가서 나름 일을 잘하고 있다니 손 왕비가 매일 고민하는 게 고작 오늘 하루를 또 뭐하면서 보내나였다.손 왕비가 개탄하며, “심심해도 너무 심심해. 뭐라도 할 일이 좀 있나 찾고 있다니까.”“정말 그렇게 심심하면 정화를 좀 도와줘. 거긴 하루하루가 전쟁이던데.” 요 부인이 말했다. 요 부인은 요즘 내내 거기서 돕고 있는데 오늘은 정말 너무 피곤해서 쉬고 싶었지만, 모두와 만나고는 싶지만 애들을 내려놓지 못해 안 오려는 정화를 억지로 끌고 와야만 했다.“그래, 둘째 형님. 할 일 없으면 와서 우리 애들이나 좀 데리고 있어.” 정화가 웃으며 말하는데 아이들이 생긴 뒤로 의지할 곳이 있자 사람이 아주 생기로 충만했다. 안색은 아직 좀 안 좋은 게 잠이 많이 부족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갓난아이 엄마가 세상에서 잠이 제일 부족하기 마련이다.손 왕비가 말했다. “그래, 내일 갈게.”그러나 그렇게 다정하게 굴지 않는 것은 손 왕비가 아이를 싫어해서가 아닌, 정화의 아이이기에한참을 아이들에게 정을 붙였는데 자기 아이가 아닌 걸 알면 정을 떼기가 더 힘들기 때문이었다.손 왕비가 안 왕비에게 물었다. “언제 강북부로 돌아갈 생각이야?”안 왕비가 입을 열었다. “며칠 있다가요. 왕야의 상처가 거의 나아서 오늘 제가 온 것도 겸사겸사 여러분께 작별 인사도 드리고요!”손 왕비가 어머 하고 놀라했다. “이렇게나 빨리 간다고? 좀 더 있지? 지금 넷째가 다쳐서 아바마마께서도 쫓아내실 리가
우문호는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이 확 어두워지며 깜짝 놀랐다.“청혼? 누가 청혼을 한 것이오? 미친 것이오? 겨우 여덟 살인데!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이런 짓을……”그는 너무 충격을 받아 분노가 치밀었다. 겨우 여덟 살인 딸을 누군가 눈독을 들이고, 심지어 청혼까지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는 그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반드시 혼쭐을 내겠다고 마음먹었다.원경릉이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이미 택란의 비밀을 다 털어놨으니, 이제 더 이상 나한테 화내면 안 되오.”“말하시오. 용서할 테니 더 말하시오!”우문호는 더 이상 원경릉에게 화를 낼 힘도 없었다. 사실 처음부터 그렇게 심하게 화가 난 것도 아니었고, 복잡한 감정만이 뒤섞여 답답할 뿐이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들도 모두 사라지고, 이 터무니없는 사건이 더 중요해졌다.원경릉은 택란이 금나라에 가서 10만 냥을 얻은 전말을 설명했다. 특히 금나라의 어린 황제가 그녀에게 청혼했다는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고 전부 털어놓았다. 단 한 글자도 숨기지 않고 진실만 말했다.우문호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그건 너무 대담하잖소! 금나라에서 10만 냥을 빼앗았다니? 어찌 이야기가 이렇게 익숙한 것이오? 그래, 기화요! 어찌 스승이 이런 짓을 가르친 것이오? 그리고 그 금나라의 어린 황제는 이제 몇 살이오? 듣자 하니 겨우 열 살이라고……”“열셋이오. 금나라의 진국왕이 그의 권력을 누르려, 일부러 열 살이라고 소문낸 것이오.”우문호는 벌떡 일어나 뒷짐을 지고 방을 빙빙 돌며 어쩔줄 몰라했다. “열다섯이라도 안 되네! 금나라가 북당의 경성에서 얼마나 먼지 알고 있소? 아이가 그곳에 시집가면 1년에 한 번도 못 돌아올 것이네. 북당의 진국 공주를 부인으로 삼겠다니? 허망 된 꿈이요! 꿈!”“아이들의 농일 뿐이요.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안 되네.”원경릉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농담이라도 안 되네. 황위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우리 귀한 딸을 부인으로 삼겠다니? 이런 녀석은 앞
목여 태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문호에게 말했다.“폐하, 공주를 너무 꾸짖지 마십시오. 공주께서는 단지 세상을 경험하고 싶어 한 것 뿐입니다. 큰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안왕과 위왕도 그곳에 있었고,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았잖습니까?”우문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택란이 자네에게는 과자 한 조각을 주었지만, 나한테는 안 주더군.”택란은 그 말을 듣고 재빨리 과자 한 조각을 가져와 아버지의 입가에 가져다 대며 환심을 사려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 드셔 보세요. 이건 그렇게 달지 않은 생강 과자인데, 정말 맛있습니다!”생강 과자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딸의 귀엽고 앙증맞은 얼굴을 보니 어떻게 밀쳐낼 수 있겠는가? 화가 난 상태였지만 결국 한입 물었고 생강과 설탕의 맛이 입안에 퍼졌고, 딸의 사랑스러운 미소를 보니 얼굴에 굳었던 표정이 풀어졌다.“나도 먹고 싶은데.”원경릉이 가볍게 웃으며 그의 옆에 앉아 턱을 괴고 물었다.“다섯째야, 맛있느냐?”우문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무시했다. 그녀가 스스로 만든 규정을 어겼으니, 좋은 표정을 지을 마음이 없었다.원경릉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택란아, 나한테도 한 조각 줘 보거라!”택란은 다시 과자 한 조각을 가져와 엄마의 입가에 가져다주며 더 큰 죄책감을 느꼈다. 이번엔 자신의 엄마까지 곤란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원경릉은 과자를 먹고 나서 웃으며 말했다.“정말 맛있구나. 다 먹었으니 나가서 좀 자거라. 돌아오는 길에 제대로 못 잤으니.”“예!”택란은 얌전히 대답하고 나머지 과자를 빨리 먹어 치운 뒤 아버지에게 다가가 그를 한 번 안아주었다.“아바마마, 저 먼저 자러 가겠습니다. 깨고 나면 다리 주물러 드릴게요!”우문호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그래, 어서 가거라.”택란은 목여 태감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엄마를 한 번 돌아보며 아버지가 너무 오래 화를 내지 않기를 바랐다.원경릉은 문을 닫고 탁자 옆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택란이 드디어 경성으로 돌아왔다. 우문호는 소월궁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옆에서 목여 태감이 계속해서 설득했다. 그는 공주가 아직 어리니, 노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며, 그저 택란이 다른 어린아이들이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을 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목여 태감은 혹시라도 황제가 공주를 꾸짖을까 봐 걱정되어 공주를 감쌌다. 그의 약한 마음은 그런 걸 감당하지 못했다.마침내 택란과 원경릉이 도착했다.우문호는 작은딸이 원경릉의 뒤에 숨어 겁먹은 얼굴로 머리를 살짝 내밀고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았다.원경릉이 딸의 손을 꽉 잡고 말했다.“가봐라, 아버지께서 기다리신다.”택란은 고개를 숙이고 아버지 앞으로 다가갔다. 우문호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자기 손을 그의 손 위에 올려놓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바마마, 저 돌아왔습니다.”그러자 우문호는 딸의 손을 잡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뿌리치지도 않았다.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는 눈빛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약도성에 얼마나 있었느냐?”택란은 거짓말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솔직히 대답했다.“지난번 여름방학 때 집에 돌아온 후 바로 약도성으로 갔어요.”우문호는 큰 충격을 받았다.“모두가 알고 있었으면서, 나만 속였단 말이냐?”택란은 미안한 마음에 아버지를 껴안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안 그러겠습니다!”우문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원경릉이 다가가 말했다.“아이가 자네 선물을 많이 샀소. 한번 보시게.”“필요 없소!”우문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딸을 뿌리칠 마음은 없지만, 그는 여전히 속았다는 사실에 너무 힘들었다.원경릉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텐데,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다. 서로 비밀이 없기로 약속했건만, 그 약속이 깨진 것 같아 화가 났다.원경릉은 그의 표정을 보고 더 걱정해야 할 사람이 자기라는 것을 깨달았다.오는 길 내내 택란만 걱정하며 우문호에게 딸을 변호해 주려 했지만, 정작 자신이 그를 속인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이 한 일을 이야기하며 원경릉을 기쁘게 했다.다섯째는 이전에 다섯 개의 성을 위해 적어도 30년이나 50년의 계획이 필요하다고 했었는데, 지금 상황을 보니, 20년이 채 되지 않아 조정에 대한 충성심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나아가 국경 방어뿐만 아니라 조정에 세금을 납부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보였다. 아이들이 현대의 경험을 참고하며 지내는 것이 다섯째의 큰 걱정을 해결해 준 것이었다. 약도성은 이번 지진으로 국고의 돈과 주변 주현의 자원을 사용했다. 북당과 약도성의 백성들의 마음이 끈끈히 묶여 있어 불행 중 다행이었다.중증 환자들이 회복된 후, 원경릉은 택란과 함께 경성으로 돌아갔다.출발하기 전에 비둘기를 통해 다섯째에게 소식을 전하며 심리적 준비를 하도록 시간을 주었다. 이렇게 하면 다섯째가 택란을 보았을 때 마음을 가라앉혀 덜 화를 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택란은 아버지가 화를 내거나 슬퍼할까 봐 사실 마음속으로 몹시 두려웠다.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그녀또한 잘 알고 있었다.돌아가던 중 택란은 아버지에게 줄 선물을 사자고 제안했다. 원경릉은 딸의 강한 생존 본능에 웃음을 터뜨렸다. 딸이 아버지를 소중히 여기고 있었으니, 다섯째가 딸을 그렇게 아끼는 것이 헛된 일이 아님을 느꼈다.“너희 아버지께서는 특별한 취미가 없으시고, 그저 술 한잔하는 걸 좋아하시니까 좋은 술 몇 병 사 가는건 어떠냐?”그러자 원경릉이 먼저 제안했다.“좋습니다! 사요! 많이 사서 마차에 싣고 가겠습니다!”택란이 급히 대답하자 원경릉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다섯째가 아이들에게 그렇게 자상한데도 아이들이 그를 무서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물론 이는 두려움이 아니라 존경이고 사랑이지만 말이다.경성에서 우문호는 원경릉의 서신을 받자마자 열어보았다. 편지를 읽는 순간 그는 멍해졌다.“계란이가 약도성에 갔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것이냐? 그렇게 얌전하던 딸아이가 몰래 약도성에 갔을 리가 없어.”더구나, 셋째와 넷째는
약도성의 건물 대부분이 무너져 백성들은 임시로 지은 오두막과 초가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폐허로 변한 도성은 눈에 보이는 곳마다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원경릉은 마음속 깊이 안타까움을 느꼈다.택란의 뜻으로 중증 환자들은 모두 저택으로 옮겨졌다. 원경릉은 계란이의 결정이 매우 옳다고 생각했다. 중증 환자들은 그녀와 몇몇 의원이 책임지고 돌보았고, 나머지 의원은 경증 치료를 맡았다.택란은 엄마 곁에 머물며 환자를 돌보는 것을 도왔는데, 기본적인 의술을 알고 있어서 소독과 붕대 감는 일을 도왔다. 부상자들은 대부분 통증이 심해 참기 어려웠고, 진통제를 먹이거나 진통 주사를 놓았다. 택란도 주사를 놓을 수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쉬지 않고 바쁜 모습을 보였다. 그런 그녀를 본 환자들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그들은 궁에서 자신들의 생사를 진정으로 걱정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황후마저 직접 왔으니, 예전의 대립과 적대감은 유치한 웃음거리로 느껴졌다.저녁 무렵, 아이들이 엄마를 찾아왔지만, 이야기를 나눌 여유도 없이 서로 포옹한 뒤 다시 각자 사람들을 구하러 나섰다.백성 중 자발적으로 음식을 만들고 약을 끓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저택 내 물자는 부족했으나 주변의 도움이 끊이질 않았다. 호명은 사람들을 조직해 식량과 의복을 나누어 주었다. 지금의 약도성엔 인간의 이기심이 한순간에 사라진 듯했다.황후가 직접 약도성에 온 덕분에 서북 지역의 신하들도 직접 의원과 물자를 이끌고 약도성에 와서 돕기 시작했다.약도성은 전례 없는 관심을 받았고, 이는 약도성 백성들이 다섯 도시 중 가장 빠르게 조정을 인정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사람들을 구하고 재난 이전의 상태로 빠르게 회복하는 데만 집중했다.재난이 발생한 지 반달이 지나면서 발견된 것은 모두 희생자뿐이었다. 인원을 파악한 후 한곳에 모아 장례를 치렀다.이번 지진으로 약도성은 5만여 명의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 이 숫자는 매우 끔찍했지만, 택란의 사전
북당의 황후가 의원을 이끌고 직접 약도성으로 향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이들이 믿지 않았다. 약도성의 백성들조차 믿을 수 없었고, 감히 믿을 엄두도 없었다.우문택란이 이미 약도성에 왔지만, 고작 여덟 살짜리 아이에 불과했다. 다들 그저 그녀가 약도성에 놀러 왔고 수천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왔다고 생각했다. 이후 어린아이답지 않은 그녀의 비범한 능력이 증명되었다. 그녀는 약도성의 성주로서 약도성에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러나 이번 지진으로 약도성은 초토화되었고, 재건하려면 조정이 막대한 인력과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북당의 조정이 약도성을 방치하고 자연적으로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어도 어쩔 수 없었다. 약도성 백성들은 줄곧 조정을 적대시하였기 때문에, 조정이 이들을 구할 이유가 없었다.그런데 황후가 직접 약도성으로 향한다는 것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약도성은 조정이 이렇게까지 신경 쓸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지 않았다.지진 발생 열흘째 되던 날, 원경릉 황후가 이끄는 의원들이 약도성에 도착했다. 그들은 밤낮없이 말을 갈아타며 전력으로 달려왔다. 약도성의 백성들은 이 소식을 듣고 흥분하며 황후께서 약도성에 오신다고 얘기를 전했다.사람들의 생각은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지진 이전까지만 해도 조정을 적대시하고 북당을 적국으로 여겼던 약도성 백성들이, 이제는 원경릉을 환영하며 열광적으로 맞이했다. 이는 택란이 지진을 미리 알아차린 것과 구조 활동 덕분이었다.원경릉은 백성들의 뜨거운 환영을 예상하지 못했다. 말을 타고 앞을 바라보니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고 있었고, 그녀의 눈시울이 촉촉해졌다.“어머니!”군중 속에서 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경릉은 단번에 딸을 찾아내고 말에서 내려 달려갔다. 택란은 엄마 품에 안기자마자 눈물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어머니,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너무 많아요!"택란이 흐느끼며 말했다.원경릉은 딸이 이렇게 슬프게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원경릉은 딸을 품에 꼭 안
택란은 어릴 적부터 화염을 다루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감정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 겉으로는 담담해 보였지만, 그녀는 내면의 감정을 철저히 억눌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화염을 제어하지 못할 위험이 있었다. 스승님을 따른 후, 스승이 계속해서 그녀에게 약점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감정의 틈새가 생기면 많은 것을 통제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녀는 항상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며, 모든 일을 담담히 대하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진심 어린 감정을 흔들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그녀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꼬마 봉황이 날개를 펼쳐 그녀를 품에 안고 위로해 주었다.그들은 수년간 서로를 지지하며 함께 성장해 왔고, 서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잠시 후, 택란은 다시 구조 현장으로 나갔고, 여전히 평온하고 흔들림 없는 얼굴로 사람들 앞에 섰다.위왕과 안왕은 어린 조카의 침착함에 깜짝 놀랐다. 겨우 여덟 살짜리 아이가 어떻게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아이의 천성은 어디로 간 것인가?그들은 택란이 애초에 아이로서의 천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태어난 후, 조금이라도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녀는 빠르게 세상을 이해하며, 지혜롭고 노련한 어른처럼 모든 것을 맞서야 했다.사실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그녀를 한두 살짜리 어린아이처럼 사랑하고 아껴주었다. 그에게는 아무런 기대나 요구가 없었으며, 능력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어머니처럼 그녀의 모든 행동을 걱정하고 감시하지 않았다.아버지 앞에서 그녀는 가면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약도성의 일이 안정된 후, 그녀는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돌아갈 계획이었다. 이번 약도성 방문은 그녀에게 있어 단순한 놀이가 아닌 실습이었다. 이곳은 그녀의 의지와 감정을 단련할 수 있는 장소였고, 실제로 그녀는 이곳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했다.구조 작업은 계속되었고, 지진이 발
한 마을 주민이 눈물을 닦으며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지원 같은 건 절대 없을 것이오. 조정은 우리를 모조리 죽이길 바라오. 우리가 죽어야 조정은, 이 약도성을 완전히 삼킬 수 있소. 아무도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소.”택란은 화가 나서 말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인가? 내가 여기에 왔잖냐! 빨리 계속 파시게!”주민이 그녀를 힐끔 보며 물었다.“웬 꼬마가, 넌 누구냐?”택란을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어둠 속이라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린아이가 여기 있는 걸 보고 다들 의아해했다.“약도성의 성주, 우문택란이다!”그녀는 단호하게 말한 뒤, 산사태가 난 지역을 향해 다시 걸어갔다. 작은 몸집이 시선에서 멀어질수록 더욱 작아 보였다.황실의 공주라는 말에 사람들은 모두 놀라 얼어붙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공주가 이런 곳에 직접 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공주는 저택 안에서 잘 보호받고 있어야 할 존재다.그녀는 알 수 없는 힘을 사용해 접근한 곳의 흙을 한 겹씩 옮겨내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울부짖는 소리와 구조 요청이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녀를 따라가 급히 구조 작업에 참여했다.약도성의 지진은 강북부에서도 뚜렷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낡은 집도 무너졌지만, 심각한 피해는 없었다. 약도성에 지진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위왕과 안왕은 신속히 구조 병사를 파견했다. 그들은 택란이 약도성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들 여태껏 택란이 스승과 함께 떠났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의 네 오빠들은 바로 병사를 데리고 약도성으로 향했다. 지진 발생 12 시진 후 약도성에는 8천 명 이상의 병사가 합류했다.약도성의 백성은 조정이 지원군을 보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조정이 약도성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든 관심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과거에도 가뭄, 메뚜기 떼, 산사태 등의 재난이 일어났지만, 북막조정은 몇 포대의 쌀만 보내며 형식적인 구조를 했을 뿐이다.약도성
지진이 발생하기 전, 호명과 주 아가씨는 약도성 중심부에서 백성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새벽녘은 사람들이 가장 피곤할 시간이다. 억지로 잠에서 깨어난 백성들은 분노했다. 그중 한 집안은 도축업을 하는 홀아비가 어린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새벽 무렵에야 돼지를 잡고 고기를 나눠주고 돌아와 잠자리에 든 참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잠에서 깨어난 데다 아이까지 깨우니,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옆집 사람은 칼을 들고 나가 저들을 쫓아내면 다시 잘 수 있다고 부추겼다. 남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던 상황이라 아들을 방으로 데려다 놓고, 즉시 칼을 들고 나가 주 아가씨와 맞섰다.그가 칼을 휘두르며 집안 식구들과 함께 밖으로 나온 그 순간, 지진이 발생했다. 그들은 자기 집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먼지가 자욱했고, 곁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옆집 역시 무너졌고,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이 집 처마 아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깔려 있었다.“아들! 아들아!”홀아비는 그제야 안으로 데려다 놓았던 아들을 떠올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집은 이미 완전히 무너졌다. 겨우 세 살밖에 안 되는 아들은, 살아있을 가능성이 희박했다.그는 미친 듯이 벽돌과 흙더미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주 아가씨와 호명도 서둘러 도왔다.지진은 단 몇 초 만에 일어났다. 이미 수많은 사람이 집으로 돌아갔고, 그 결과 무너진 집에 깔린 백성들이 매우 많았다. 약도성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사방에서 울부짖음과 비명이 들려왔다. 평소 조정과 맞서던 이들은 너무나 나약하고 무력해 보였다. 그들의 처절한 울음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찢어지게 했다.홀아비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다들 함께 벽돌을 치우고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도구가 없어서 맨손으로 작업해야 했다. 주 아가씨의 손은 금세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흙벽을 밀어내고 벽돌을 옮겼다.반 시진 후, 주 아가씨가 마침내 아이를 안고 왔다. 아이는 다리를 크게 다쳐 엉엉 울고 있었다. 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