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사람들의 무덤사람 같지 않고 지옥의 귀신 같았다.서일이 작은 목소리로, “저 사람 말이 32살이라고 합니다.”순간 정적이 감돌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직 바람만 귓가에 계속 스치며 썩은 냄새만 풍겨왔다.어느 만큼 시간이 지난 후 원경릉은 서일을 시켜 그 사람에게 전병을 더 주게 했는데 그들은 전부 마른 식량을 챙겨 산을 올라서 서일이 한 덩이를 주자 게눈 감추듯 먹어 치우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졌다.원경릉이, “천천히 드세요, 목 막혀요.”병자가 웃는데 공포스럽다, “목 막혀 죽으면 좋죠, 적어도 배는 부를 테니까.”원경릉이 우문호를 보는데 우문호의 얼굴에 한번도 없던 엄숙함과 격동이 있었다.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병자가 전병을 먹는 것을 보기만 했다.다 먹은 후에 우문호가 비로소, “이름이 뭔가? 당신들은 여기서 음식 공급이 부족한가?”병자는 손가락에 남은 찌꺼기를 빨며 다시 무감각한 얼굴로 돌아가, “전 이하(李賀)입니다. 하루에 한 끼를 먹는데 다 옥수수 개떡으로, 마른 거, 쉰 거, 쌀겨 죽을 먹을 때가 더 많고, 어제는 추석이라 밀가루 만두를 먹었는데 일년에 두 번 추석과 설날에 줍니다.”병자는 원래 영양보충이 필요한데 이렇게 개 만도 못하게 먹고 어떻게 영양이 있을 수 있을까?어쩐지 하나같이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더라.“이 안에는 몇 명이나 있나?” 우문호가 다시 물었다.이하가, “구체적으론 모르고 300명 정도겠죠. 어쨌든 요 몇년간 죽은 사람도 많고 어쩌다가 사람이 올려 보내지기도 하지만, 여기는 살아있는 사람의 무덤이니 올라오는 순간 죽는 날을 세는데, 몇 명인지 누가 신경이나 씁니까?”원경릉이, “가족들이 당신을 보러 올라오나요?”이하가 놀라며, “가족?”이하가 웃기 시작하는데 웃는 게 우는 것 같다. “올라오게 하면 안 되지요, 올라와서 뭐 하게요? 병에 감염된 후 여기 다시 보내지라고요?”만아가 듣더니 눈물을 흘리며, “가족들이 그립죠?”이하가 진정하고 무뚝뚝하게 고개를 흔들며, “안
주재상과의 대화경성으로 돌아오니 우선 사식이가 원경릉에게 보고하길 원용의가 돌아온 뒤 이사를 갔고 제왕도 순순히 이혼협의서를 써주어서 두 사람은 이혼한 셈이 되었다고 했다.제왕이 포기하다니 우문호에겐 의외였다. 일곱째가 동그란 얼굴 기지배에게 마음이 움직였다는 걸 일곱째 자신만 계속 모르는 것 같다.동그란 얼굴 기지배가 갔으니 일곱째는 분명 상처를 받고 누군가를 찾아 술 마시고 하소연할 게 뻔하다. 그리고 동생을 달래는 형의 책임을 다른데 전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우문호는 여러 번 생각해 보더니 서일에게 만약 제왕이 오면 자신이 없다고 하라고 했다. 술은 즐겁게 마셔야지 일곱째의 지겹도록 되풀이되는 얘기를 듣는 건 고문이다.하지만 이번에 어찌 된 일인지 제왕이 오지 않는데 종일 코 빼기도 뵈지 않는 것이 모기에만 물려도 하늘이 무너진다고 소란을 떠는 제왕 성격이라 우문호는 구사를 시켜 가보도록 했다.구사도 별로 가고 싶어하지 않는 게 벌써 해질 녘인데 집에 가서 새신부와 밥 먹으며 사랑을 속삭이면 좀 좋아? 아내를 잃은 데다 실연까지 한 남자를 굳이 건드려야 하느냐 말이지?그리도 그간의 정이 있어서 구사가 갔다. 하지만 제왕부 별채에 갔다가 돌아와서 우문호에게, “제왕 전하는 아직 살아 계시고, 웃으시고, 말씀도 하셔.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던데.”우문호가 믿을 수 없어, “일곱째는 동그란 얼굴 기지배한테 마음이 있었는데 어떻게 상처를 안 받을 수가 있지?”“어쨌든 아무일 없어 보였어.” 구사가 떠올리더니, “하지만 내가 갔을 때 눈을 비비고 있었던 거 같아, 울었는지는 모르겠지만.”“확실하네!” 우문호가 단정하는게 그래야 일곱째의 성격에 맞는다.두 사람은 이윽고 안심했다.문둥산의 일은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그래서 우문호는 주재상과 상의하기 위해 주재상의 집으로 갔다.재상은 듣자마자 반대하며 질책하길, “태자비 마마는 미래의 국모시고, 황태손의 생모신데 어찌 문둥산에 가시는 모험을 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우문호는 재상의
우문호의 결심우문호가 가볍게 받아 치며, “신경 안 써요!”주재상이 기가 막혀서, “신경 안 쓴다고요? 전하께서 신경 안 쓰신다는 건 황조부께서 전하를 위해 계획하신 걸 저버리는 겁니다.”우문호가 주재상을 보고 웃으며, “황조부께서 저를 위해 세우신 계획이라면 그건 북당 강산과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니 백성을 근본으로 삼으실 게 분명합니다. 제가 백성을 위해 하는 일은 황조부의 기대와 약속이나 한 듯 딱 들어맞는데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주재상이 눈을 부라리며, “갈수록 능구렁이 담 넘어 가십니다.”“어쨌든 이치는 그렇다는 것이지요, 재상이 궁리한 게 그거 아닙니까. 만약 제가 태자의 지위가 위태롭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북당의 복이 될 수 없습니다. 재상은 지난날 굉장히 박력 넘치게 일하더니 요즘 겁이 많아지신 게 늙으셨나 봅니다. 패기가 떨어졌다 싶으면 희상궁을 자주 찾아가서 얘기를 좀 나누세요, 자극이 돼서 어쩌면 젊었을 때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우문호가 말을 마치고 웃으며 작별을 고했다.주재상이 유유자적 하게 떠나가는 걸음을 보고 비록 문둥산에 가는 건 동의하지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우문호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말을 준비해라, 입궁할 것이야!” 주재상이 하명했다.태자가 아침 조정회의에서 이 안건을 제출할 거라고 했으니 반드시 할 게 틀림없다. 주재상은 그보다 먼저 폐하에게 넌지시 말을 던져 놔야 한다.하지만 주재상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게 황제는 동의하지 않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아니나 다를까 명원제는 주재상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화를 내더니, “간도 크구나, 감히 사사로이 문둥산을 가? 아직 덜 바쁜 모양이군, 자네가 경고하게, 이 일은 입도 뻥긋하지 말 것이며 특히 아침 조정회의에서는 일언반구도 꺼내서는 아니될 것이네.”주재상이, “폐하, 태자 전하는 말을 잘 듣는 분은 아니십니다.”이 말에 명원제는 수심에 잠겼다.그렇다, 우문호는 어릴 때부터 말 잘 듣는 아이가 아니었
문둥산 비리주재상이 출궁해 초왕부로 와서 먼저 희상궁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우문호에게 황제가 이 일에 동의하지 않는 것과 우문호에게 ‘함부로 설치지 말고, 급식을 조사해서 중간에서 떼먹은 자를 찾는 일만 하면 된다’고 전했다.우문호는 일단 급식을 개선하는 일이 급선무로 도대체 어떤 개자식이 병자의 급식비와 약값까지 떼먹었는지 알아내기로 했다.그런데 이게 웬 걸, 조사를 안 했으면 모를까, 해보니 어이없게도 문둥산 병자를 관리하는 것은 뜻밖에 우문호의 셋째 외삼촌 소답화였다.소답화는 자질이 평범한 사람으로 호부에 있을 때 원외랑(員外郎)이었는데 그나마도 겨우 청탁으로 들어온 것인데 몇 년을 일해도 일하는 수완이 늘지 않아 계급이 낮아지지는 않았지만 승진도 못했다.문둥산을 설립할 때 아무도 가서 관리하고 싶어하지 않았는데, 소답화가 자진해서 가서 일을 맡고자 하여 산 위에 집을 짓고 사람을 산꼭대기로 보내 파수하고 밥을 지었다. 매달 조정에서 보내주는 은자는 천 냥으로 급식과 산 위에서 필요한 각종 지출 용도로 별도로 약재를 사거나 하는 것에 대해서는 영수증으로 정산을 올리고 사람이 죽으면 장례비용은 인당 열 냥을 받았다.문둥산에 천여명이 있어 천냥으로 한달 비용을 충당하기 충분한 것이, 사 놓아야 하는 생활용품이 전부 전에 사 놓았기 때문에 지금 매달 나가는 천냥은 온전히 급식과 의복 비용이다.지금 남은 사람은 300명이며, 산위에서 옥수수 개떡이나 찐빵 같은 급식이 그것도 하루 한번만 주고 있는 것을 기준으로 하면 한 달에 대략 열 냥의 은자가 들며 그것도 굉장히 여유 있게 잡은 것이다.이 일은 처음부터 소답화가 관할하고 있어 전수조사도 그다지 어렵지 않아서 우문호는 사람들에게 은밀히 장부를 초왕부로 가지고 오게 해서 봤다.그날 밤, 우문호와 탕양, 서일 등은 자시(자정 12시)가 되어서야 정산을 마칠 수 있었다.정산을 마치고 우문호의 얼굴이 검어 지며 분노로 모든 장부를 바닥에 내던지며 일갈하길,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5년동안 문
비리의 핵심 인물소씨 집안에 지금 사람들에게 말발이 서는 건 그래도 소후(蘇侯) 나리다.소후는 현비의 부친으로 현 태후의 친동생이다.소후는 지금 군에 경차도위(輕車都尉)의 직임을 맡고 있으나 실제로 하는 일은 별로 없고 진정으로 조정에 공을 세운 적도 없이 지금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데 그저 그의 여동생이 현 태후이고 딸이 현비이기 때문이다.소후는 최근 2년동안 중용된 적이 없으며 이것도 현비가 상당히 조급해 하던 원인으로 우문호가 태자가 되면 소씨 집안 사람을 뽑아 올릴 심산이었다. 소씨 집안이 가족이 크고 자손이 많으니 만약 절반이 조정 관리로 임용되면 얼마나 큰 세력이겠는가?탕양이 작은 목소리로, “전하, 만약 소씨 집안을 건드리시면 현비 마마 쪽엔 송구할 뿐 아니라 태후 마마쪽에도 송구할까 두렵습니다.”우문호가 아무렇지도 않게, “미안해도 할 건 해야지. 내일 자네는 소답화를 초왕부로 불러라, 내가 먼저 사적으로 물어보고 만약 죄를 인정하면 아바마마 면전에 데려가 돈을 토해내게 하면 그만이나 만약 자백하지 않으면 이부에 연락을 취해 그를 처리하고 다시 얘기하지.”“예!” 탕양은 이 일이 사적으론 할 말이 없음을 알았다.우문호가 잠시 생각하더니 서일에게 분부하길, “소후부에 가서 소룡을 오라고 해라.”서일이 놀라며, “이렇게 늦은 시간에요?”“그래, 소룡은 야행성이라 아직 자기엔 일러.”서일은 명을 받고 바로 갔다.하지만 반 시진 후에야 소형을 데리고 왔다. 역시 사촌형은 아직 자지 않고 있었으며 산뜻하게 비단옷을 차려 입고 약간 취기가 돈 채 문을 들어서며, “중요한 일이 아니면 사촌동생이라도 사적으로 할 말 없네.”우문호도 아무 말 없이, 장부와 탕양이 총결산한 공책을 던져주고, “직접 봐, 셋째 큰아버지가 얼만 좋은 일을 했는지.”소형이 장부를 넘겨보는데 특히 숫자에 민감해서 한 눈에 열 줄에서 문제를 발견해 낼 수 있는 정도다. 장부를 다 본 뒤 탕양의 총결산을 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게 도대체 무슨 일
“전하,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 몇 년 동안 궁중에서 현비 마마 앞으로 된 지출이 많이 발견됐습니다. 지금 마마께 급여되는 은화로는 턱도 없는 금액의 지출입니다.” 탕양이 말했다. “본왕이 모친께 물어보니 외가에서 은화를 줬다고 하더라고.” 우문호의 말을 듣고 옆에 있던 소로(蘇老)가 입을 떼었다.“아우야, 소씨 가문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겠잖아. 가문 내에서도 은화가 부족한 상황인데 고모에게 줄 여유가 어디 있겠느냐?”“이 얘기는 내일 소답화(蘇答和)에게 물어보고 얘기하는 게 좋겠어.” 우문호는 마음이 착잡했다.“내일 일은 내일이고, 지금 대충 윤곽은 잡아놔야지 되지 않겠어? 넌 만약에 고모가 이 일에 개입된 게 확실하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뭘 어떻게 하겠어? 자신의 몫이 아닌데 횡령한 은화를 당연히 뱉어내는 것이 맞지.” 우문호는 현비 생각에 머리가 아픈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현비가 그 많은 은화를 더 써버린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됐다. 만약 이 은화 중의 20만 냥이 문둥산에 쓰였다고 해도 남은 80만 냥은 현비가 뱉어내야 했다. 그것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부황이 이 사실을 알고 현비를 용서하겠느냐는 것이다.*이튿날 우문호는 소답화를 부중으로 초청했다. 소답화는 당연히 우문호가 문둥산의 장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온 것이다. 그러나 우문호는 소답화의 얼굴에서 당황한 기색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는 외삼촌 행세를 하며 그가 현비의 뜻을 거스르고 불효를 저지른다고 꾸짖었다.우문호는 소답화의 말을 듣고 그가 현비와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문호는 소답화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에게 장부를 보여주었다.장부를 건네받은 소답화는 담담하게 우문호를 보았다.“이 장부들 중에 일부는 내가 적은 것인데 태자는 이 장부가 무슨 문제라도 있다고 생각하는가?”“문둥산에 들어간 은화는 20만 냥인데, 여기에 적힌 것 5년간의 기록은 그것보다 더
말을 마친 후 그는 우아한 표정으로 우문호를 곁눈질하더니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우문호는 그의 뻔뻔한 태도에 치가 떨리는 듯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장부를 조정에 공개하지 않아도 당신의 죄를 묻기에는 충분한 상황입니다. 도대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은화를 횡령한 겁니까? 문둥산에 사는 환자들에게 다 쉬어가는 시큼한 냄새가 나는 떡을 먹게 하다니 이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 대체 양심이 있기는 한 겁니까?”소답화는 우문호의 말을 듣고 단번에 낯빛이 바뀌었다. “다섯째, 우리는 핏줄로 이어진 관계가 아닌가? 삼촌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이러지 말게! 그리고 그 아무 쓸모 없는 병자들을 북당에서 먹여주고 입혀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지금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병자들보다 배고픔에 굶주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태자는 장차 이 나라의 황제가 될 텐데 백성들을 살펴야지 한낱 병자들에게 연민을 느껴서 되겠는가?”“당신이 중간에서 횡령한 은화가 과연 얼마나 될지 참으로 기대가 됩니다. 몇 년 동안 분수에 맞지도 않는 몇 십만 냥의 은화를 먹고 마시는데 흥청망청 쓰다니, 조정에서 문둥산관련 얘기를 꺼려 한다고요? 난 내 방식대로 이 일을 처리할 테니 알아서 하세요.”“……”’“아, 가장 좋은 방법은 당장 관아로 들어가 이 일을 자백하는 것일 겁니다.”소답화는 우문호의 말에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이내 우습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마음대로 해. 난 죽어도 절대 혼자 죽지 않을 테니까. 그 많은 은화를 설마 나 혼자 꿀꺽했을까? 내일 관아에 들어가기 전에 네 모친을 찾아가 은화의 행방을 물어보거라. 적지 않은 은화가 지금 너에게도 쓰였을 거니까 말이야!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참나 어이가 없어서는 원!”소답화는 가슴을 쳐들고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우문호를 노려보더니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우문호는 소로의 말대로 현비가 이 일에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이 초조해졌다. ‘모친, 도대체 왜 이런 일에 휘말린 겁니까……’밖에
다음 날 아침.우문호는 입궁해 현비가 있는 경여궁으로 갔다.현비는 이전에 한바탕 자살 소동을 일으켰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고, 심지어 명원제마저 거들떠보지 않았다. 화가 치밀던 차에 우문호가 찾아와 문둥산 횡령에 대해 물으니 그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 사실을 시인하였다.“그래, 내가 네 셋째 삼촌하고 그랬다 왜? 설마…… 너 모비를 단죄하려는 것이냐? 좋아, 이렇게 된 거 네 맘대로 하거라! 어디 한번 네 손으로 모친을 죽여보거라!”우문호는 악을 쓰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실망한 듯 침통해했다. “모비, 도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왜냐고?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모두 널 위해서 그런 것이야! 네가 2년 전에 싼 똥을 치우느라 네 어미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느냐?”현비의 말을 듣고 우문호는 주먹을 쥐며 분노했다.“제가 언제 모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습니까? 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다고요! 모비가 굳이 외삼촌과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제 살길 찾았을 겁니다! 모비는 외삼촌이 문둥병 환자들에게 하루에 한 끼만 줬다는 거 알고 있었습니까? 그것도 개떡을요?”“아, 그 옥수수 개떡? 병자들에게 그것도 감지덕지지 어디서 반찬투정이야? 문둥병이면 곧 죽을 판인데 그들이 억울할게 뭐 있어? 그리고 너희 외할아버지와 네 삼촌이 아니었다면 병자들은 이미 다 불에 타 죽었을 것이야!”“그게 무슨 말입니까?”“그때 누군가 문둥병의 싹을 없애버려야 한다며 병자들을 한데 모아 태워버리자고 했는데, 너희 외할아버지가 부황께 문둥산을 운영하자고 설득해서 병자들이 지금까지 살아있는 거야! 오히려 그들을 우리 가문에게 고마워해야 해.”현비의 말을 들은 우문호는 깜짝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몰랐던 사실에 놀랐느냐? 그러니까 내가 중간에서 좀 떼어 먹어도 그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거야. 난 지금까지 내 부친이 그들의 목숨을 구해준 값을 받는 거라고 생각해. 그들도 이에 대해 불만 없을걸?”우문호는 현비의 차가운 얼굴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
혼담을 꺼낸 당일에 모든 일을 결정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하지만 원가는 세속적인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혼수도 원하는 대로 준비하게 했고, 잔칫상만 제대로 차리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잔칫상은 일곱째 아가씨가 결코 시집을 못 가는 것이 아니라고 세상에 알리는 용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혼인 상대가 황제가 가장 신임받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자리였다.따라서 잔칫상만큼은 빠질 수 없었다.이 부분은 탕양도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나름 저축해둔 돈이 있었기 때문에, 잔칫상을 준비하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하객 문제에 대해서도, 탕양은 아는 사람이 정말 많았기에 문제없었다. 다른 곳은 말할 것도 없고, 경성에만 백 상 이상은 문제없이 마련할 수 있었다.황제를 곁에서 모시는 자로서, 조정의 문무백관 중 그와 친분이 없는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되겠는가?이 모든 것을 논의한 후, 탕양은 마침내 의문을 물어볼 수 있었다.“노태군, 만약 일곱째 아가씨께서 동의하지 않으면 어찌해야 합니까?”“동의할 것이다. 원가는 혼사를 치르거나 상을 치르거나 내릴 결정을 둘 뿐이니, 그렇게 알고 있거라. 다른 선택은 없다.”노태군이 단호하게 말했다.“그건...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탕양이 초조해하며 말했다. 왠지 일곱째 아가씨를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혼사는 본디 두 사람이 마음이 맞아야 하는 것 아닌가.돌아가는 길에 탕양이 여전히 불안했해 하자, 원경릉이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너무 많은 생각은 하지 말고, 그저 신랑이 될 마음의 준비만 해두시게. 일곱째 아가씨는 원가 식구들이 설득할 것이오.”“그녀가 원하지 않으면 어찌합니까? 곤란하게 하거나, 억지로 결혼하게 해서 그녀가 상처받는 건 싫습니다.”“아가씨도 동의할 것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약도성에서 자네를 뿌리치고 떠났을 것이네. 하지만 곁에 남아 자네를 보살폈잖나? 그것만 봐도 자네에 대한 마음이 있는 것이오.”“정말입니까?”탕양이 놀랐는데, 얼굴에 은은하게 빛이 맴돌았
원경릉은 원가에서 이 혼사를 분명히 찬성할 것이라 생각했다. 노태군이 일곱째 아가씨를 시집보내고 싶어 안달이 난 상황에서 혼담을 꺼내는 것은 단지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원가의 유일한 문제는 일곱째 아가씨 본인이었는데, 그녀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일은 십중팔구 성공할 것이다.역시나, 다음 날 탕양과 함께 원가로 향한 원경릉은 원가에서 심지어 점쟁이까지 청해 두 사람의 사주를 확인하겠다고 하는 것을 보았다.두 사람의 사주를 본 점쟁이는 한참 확인하더니,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두 사람의 사주가 다소 상충합니다.”원 노태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어디가 상충하는가?”“한 사람은 닭띠, 한 사람은 개띠입니다. 이는 닭과 개가 편치 않은 사주라, 혼사를 치른 후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노태군은 탁자를 쾅 치며 말했다.“그럼 바꾸면 되지! 이제 보니 우리 딸은 말띠다. 방금 헷갈렸었다.”“말띠요? 말띠라면 괜찮습니다. 말띠는 올해 연분이 따르는 해 입니...”노태군은 점쟁이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괜찮다니 됐다. 이제 길일을 골라주게.”그러자 점쟁이는 다시 손을 펴고 계산하더니 말했다.“올해 좋은 날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무리 빨라도 연말쯤이어야...”“좋다. 이번 달 15일로 하지. 보름달이 뜨는 날, 사람도 오붓이 모이는 날이니, 좋지 않겠나?”점쟁이가 책자를 닫고,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예.”혼사는 원가에서 준비하니, 제시간에만 준비 된다면 안 될 것도 없었다.15일까지 남은 시간은 단 5일, 원가에서 딸을 시집보내는 일을5일 안에 끝낼 수 있을까 걱정 되었다. 준비할 시간도 아직 부족했는데, 혼례복을 만드는 일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하지만 원가는 이미 일곱째 아가씨를 위해 혼례복을 준비해 두었다. 3년마다 한 번씩 새로 만들었기에, 지금껏 서랍 속에 쌓여 있는 혼례복만 해도 7~8벌이나 되었다.혼수도 일찌감치 마련해 두고, 혼담을 꺼낼 자가 나타나기만 기다리
사식이는 다들 일곱째 고모의 안부를 걱정하지 않는 것이 이상해 의아해하며 물었다.“일곱째 고모께서 편지를 보내신 겁니까?”그러자 셋째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그래. 편지가 왔단다. 며칠 놀다가 곧 경성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구나.”사식이는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일곱째 고모께서 돌아오고 나서 혼담을 꺼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일곱째 고모가 동의하지 않으면 일이 난감해질 텐데요.”노태군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이미 모든 일을 저질렀느넫 이제 와서 동의하지 않는다니? 감히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냥 목을 매겠다!”노태군은 일곱째 고모가 열여덟 살이 되던 때부터 그녀의 혼사를 기다려 왔다. 계속 기다리다가 이미 머리카락이 다 하얘져 버렸지만, 그녀는 아직 혼인 기약조차 없었다. 이번에도 혼사를 정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는게 더 나았다.그녀 뿐만 아니라 모두가 일곱째 아가씨가 빨리 시집가기를 바라고 이씩 때문에, 이 일은 서둘러 진행하기로 했다.“사식아, 네 고모에게 편지를 보내, 내가 갑작스레 병에 걸려 거의 죽게 생겼다고 전해라!”노태군이 단호히 명령했다.딸을 집으로 불러들이기 위해서 스스로 저주까지 불사하는 그녀는 정말 독한 늙은이었다.서일은 탕양을 데리고 서둘러 궁으로 향했다. 중매인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기에, 바로 황후를 찾아가야 했다.소월궁에서 우문호 부부는 탕양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우문호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짐이 보기엔, 일찍 일곱째 아가씨에게 네 마음을 고백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이리 일을 저지를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탕양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고,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갔다. 하루라도 빨리 그녀를 만나지 못한다면 불안에 휩싸여 버릴 것 같았다. 그는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폐하,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하실 때가 아닙니다… 제발 사람을 보내 그녀가 어디 있는지
오래전의 악몽이 마음속에서 되살아나, 탕양은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녀가 혹시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스스로 뺨을 몇 대 때리고는 다시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아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으면 죽어도 죄를 씻을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를 따라잡으려 죽자고 달려도, 끝내 그녀를 볼 수 없었다.그렇게나 빨리 도망간 건가?그렇게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쉬지도 않고 곧장 원가로 달려갔다.마침 서일과 사식이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와 있던 참이었는데, 대문 앞에 도착하니, 탕 대인이 거지처럼 문지기 앞에 쓰러지다시피 주저앉아 먼지투성이의 얼굴에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문지기의 옷깃을 움켜쥔 채 다급히 묻고 있었다. “일곱째 아가씨는? 너희 일곱째 아가씨는 대체… 어디 있느냐?”그러자 문지기는 놀라 얼어붙고 말았다. 그는 이렇게나 사나운 탕 대인을 본 적이 없어 더듬거리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일곱... 일곱째 아가씨께서... 탕 대인과 함께 약도성에 가신 거 아니셨습니까…?”“그럼 아직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탕양이 소리쳤다.“아직... 아직 못 뵈었습니다…!”바로 그때, 서일이 다가와 문지기한테서 탕 대인을 떼어놓으며 말했다.“무슨 일이십니까?! 우선 손부터 놓으십시오. 옷이 다 찢어지겠습니다.”탕 대인은 그만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며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큰일이야… 내가 그녀를 망쳐 버렸네! 죽어도 이 죄를 씻을 수 없을 것이네…!”“무슨 일입니까? 저희 고모께서 지금 어디 계십니까?”사식이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탕 대인은 비참한 표정을 지으며, 눈물 투성이가 된 얼굴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모르네… 나는 돌아온 줄 알고 있었네...”바로 그때, 무거운 발소리와 함께 지팡이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원가의 노태군이 부축을 받으며 다가오는 것이었다! 탕양이 고개를 들자, 노태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탕
냉정언은 자기도 모르게 죄책잠이 들어 미간을 찌푸렸다.‘이번에 정말 큰일을 저지른 것인가?’그는 그저 탕양에게 술을 먹여 일곱째 아가씨에게 진심 어린 말을 꺼낼 용기를 주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동안 탕양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황제뿐만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었고, 다들 그를 안타까워했었다.탕양은 다섯째가 초왕이었을 때부터 초왕부와 다섯째, 그리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많은 일을 해왔다. 그렇게 반평생을 북당을 위해 헌신했으나, 그를 진정으로 주목한 이는 많지 않았다. 특히 과거에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탓에 평생을 스스로도 용서하지 못한채, 조정을 위해 뛰어난 공을 세우고도 관직이나 봉록을 거절하며 죄를 속죄하듯 살았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누구나 실수를 범할 수 있는 법이니까. 탕양은 이미 그 누구보다 훌륭히 잘해왔고, 게다가 정과 의리에 발목 잡힌 것은 많은 영웅이 저지르는 흔한 실수였다. 고금의 역사를 통틀어, 결코 그 혼자만이 저지른 행동이 아니었다.탕양은 일곱째 아가씨와 벗이라는 관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늘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술에 취하지 않은 이상, 맑은 정신으로는 절대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을 것이기에, 술에 취하게 하면, 경성이 아닌 변방의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몇 마디 속마음 정도는 털어놓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하지만 예상외로, 탕 대인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쌓였던 건지... 만취 상태에서 무슨 일을 저지른 것 같았다. 대체 이 마음을 얼마나 오랫동안 품었던 것일까?상황이 아주 복잡해졌다.‘탕 대인 아주 못 쓰겠구먼! 이를 어찌 마무리 짓는단 말이냐…?!’원가의 상대하기 쉽지 않은 여장군들을 떠올리니, 냉정언은 순간 뒷골이 땡겨 머리를 쥐어뜯었다.그러고 나서 고개를 돌리니, 냉명여가 눈 앞에 서 있었다. 냉명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버지, 탕 대인은 어찌 일곱째 아가씨와 그런 일을 벌인
탕양은 지금까지 살면서 술에 취해 저지른 잘못이 단 하나뿐이었다. 비록 그 일도 나중에 사실이 아니었음이 밝혀졌지만, 그 일로 그는 술에 취하면 정말로 이성과 기억을 잃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렇기에 그 후로 술을 마시더라도 되도록이면 취하지 않게 애썼다. 하지만 어젯밤은 예외였다. 그는 이곳 사람 모두를 믿고 있었기에 경계를 풀었던 것이다.남녀 간의 일도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가 되어서 어젯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의부님! 의부님!"바로 그때, 문밖에서 호명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탕양은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호통쳤다."일단 들어오지 말거라!"그는 급히 이불을 걷어내고, 바닥에서 옷을 찾아 황급히 입은 후, 이마를 문지르며 정신을 가다듬은 뒤에야 문을 열어 주었다.문밖에서 호명이 물었다."이제 막 일어나신 겁니까? 아직도 취기로 힘드십니까?"탕양은 머릿속이 어지럽고 복잡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다."괜찮다. 무슨 일이더냐?""식사하시라고 부르러 왔습니다. 아! 일곱째 아가씨께서 경성으로 돌아간 것을 알고 계십니까? 같이 가실 줄 알았는데 먼저 떠나셨더군요.""… 돌아갔다고?!"탕양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예!"호명이 그의 얼굴을 보다가 잠시 멈칫하며 말했다."의부님… 혹시 어젯밤 누구에게 맞으셨습니까?"탕양은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만져 보았는데, 그제야 얼굴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황급히 동경을 찾아 얼굴을 비춰보았는데, 왼쪽 뺨에 여러 개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누군가에게 뺨을 맞은 것 같았다.그러자 어렴풋이 한 여인이 세게 뺨을 때리며 욕설을 퍼붓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떠올랐다.하지만 여전히 머릿속이 텅 비어 있어 창백해진 안색으로 생각에 잠겼다.‘설마 내가 취기를 빌어... 그래서 떠난 것이었구나...’이번 사건은 목숨을 내놓고 속죄해도 부족할 정도였다."말을 준비하거라! 어서!"탕양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소리
연회는 계속 진행되었고, 냉정언은 술잔을 들고 계속 탕양에게 술을 권했다. 잔을 몇 번이나 주고 받자, 탕양은 머리가 머리가 어지러워져 말조차 똑바로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연회가 끝난 후, 냉정언이 일곱째 아가씨에게 말했다."술을 꽤 마셨다 보니, 탕양이 좀 취한 것 같네. 정원에 나가 산책을 조금 하면서 술기운을 가시는 것이 어떻소?"일곱째 아가씨도 약간 취한 상태였기에, 바람을 쐬며 땀을 내면 술이 깰 것 같다며 동의했다."예. 그럼 다들 돌아가서 쉬시지요. 제가 호명과 함께 탕 대인을 돌보겠습니다.""좋소. 수고하시게나!"냉정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자, 어서 돌아가시게!"그렇게 사람들은 모두 새가 흩어지는 것 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일곱째 아가씨는 호명과도 함께 산책할 생각이었는데, 빠르게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이 어이가 없는듯 웃음을 터뜨렸다.그러고는 탕양의 붉게 상기된 얼굴을 보고 물었다."괜찮습니까? 걸을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탕양이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났는데, 술에 많이 취한듯 몸을 심하게 휘청거렸다."어찌 못 걷겠습니까? 취하지 않았습니다!""예. 그럼, 몇 걸음 더 걸어보시지요. 정말 못 걸으시겠으면 방으로 돌아가 쉬시고요. 취기를 덜어줄 탕을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그러자 탕양은 허리에 손을 얹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나갔다. 곧게 뻗은 직선을 그리며 터벅터벅 걷고는 뒤돌아 일곱째 아가씨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보시지요. 얼마나 똑바로 걷는지! 안 취했습니다. 이제 믿을 수 있습니까?"일곱째 아가씨는 그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하하하. 예, 안 취하셨네요. 그럼 이만 나가서 함께 산책하시지요."그녀는 그가 오래 걷지 못할거라고 생각해, 방으로 데려가 쉬게 하기로 했다.역시나 문을 나서자마자 탕양은 난간을 붙잡고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하도 휘청거리는 탓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기에, 일곱째 아가씨는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를 부축했다.그러자
"탕 대인이 저를 예쁘다고 말해 주셔서 정말 기쁩니다. 그러니 일곱째 아가씨께도 예쁘다고 말해 보십시오. 분명히 기뻐하실 것입니다!"하지만 탕 대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다를 겁니다. 일곱째 아가씨는 이제 그런거에 좋아할 나이를 지났습니다. 지금 그녀에게 예쁘다고 말하면, 그저 무미건조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어찌 그럴 리 있습니까? 누구나 칭찬받는 것을 좋아하는 법입니다. 탕 대인, 대인께서 정말 재능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십니까?"탕 대인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예? 하하하. 그렇습니까?""예! 모두가 그렇게 말했습니다!"탕 대인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미소를 지었다."과찬입니다.""기분 좋으십니까?"택란이 묻자 탕 대인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뜻을 알아차리고 멈칫하며 말했다."이 녀석!"택란은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탕 아저씨도 누군가에게 꼭 사랑받으시길 바랍니다."탕 대인은 이 말에 크게 감동해서 택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예. 고맙습니다."저녁엔 계약이 성공한 기념으로 연회가 열렸다.소박한 술자리긴 했지만, 커다란 술통들이 준비되어 있어 모두 마음껏 마시며 즐길수 있었다.택란은 술을 마시지 않기에, 주 아가씨가 매실청을 대신 준비해 주었다. 새콤달콤한 맛이 택란의 마음에 쏙 들었다.술잔을 주고받으며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모두 패기 있게 약도성을 북당에서 제일가는 도성으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다.일곱째 아가씨는 벌써 독산을 어떻게 개발할지부터 고민하고 있었는데, 독산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막막했기에 사람들에게 의견을 구하기 시작했다.각자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지만 대부분이 경치를 개발하자는 내용이었다.반면, 택란은 새로운 생각을 제안했다. 독산에 온천이 있으니 오두막을 지어 온천을 끌어들여 돈을 받고 여러 개의 탕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냐며, 온천수가 몸에 좋다는 점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자고 제의하였다.택란의 생각은 이 시절
탕양은 자신이 여자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자부했었다. 특히 일곱째 아가씨처럼 강인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을 더 선호하기에 굳이 자신과 인연을 맺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는 그의 큰 착각이었다.여인의 마음은 늘 갈대처럼 변덕스럽고, 아무리 강인한 사람이라도 다정함이 필요한 순간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일곱째 아가씨는 오랫동안 혼자 외롭게 지내왔는데, 중년에 접어들며 그 외로움이 더욱 깊어진 것이다.누군가 곁에 있다면, 삶의 방식도 달라질 수 있지만, 물론 잘못된 연으로 나빠질 가능성도 있었다.원가의 가훈은 항상 군주에게 충실하며, 엄청난 용기도 있었다. 심지어는 원가에서 키운 닭조차 남의 집의 닭보다 더욱 용감할 정도였다.하지만 한 번의 좌절로 인해 사랑을 믿지 않겠다는 것이 과연 용기있는 행동 일까?물론 그녀가 반드시 탕양을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 다시 한번 용기를 내볼 수도 있었다.하지만 탕양이 먼저 용기를 내어 말한다면, 그녀 역시 그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여태껏 그녀의 마음에 들어온 사람은 오직 탕양뿐이었다.그리고 어쩌면 시도해 봐야만 서로 맞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탕양과 잘 맞는다고 느끼는 건 그녀가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아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착각일지도 모르니 말이다.경성으로 돌아간 후에도 탕양이 말을 꺼내지 않는다면, 그녀는 공개적으로 구혼에 나설 생각이었다. 한편, 택란이 주 아가씨와 함께 밖으로 나가며 물었다."탕 대인이 왜 나쁜 사람인 것이오?""여인을 훔쳐봤습니다.""탕 대인이 아가씨를 좋아하지 않소? 어찌 못 보는 것이오?"주 아가씨는 택란이 이런 부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공주에게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사내가 여인을 사모하면 상대의 시선을 바라보지, 다른 곳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러니 탕 대인은 일곱째 아가씨를 사모하는 것이 아닙니다.""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