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연은 그나마 두꺼운 옷으로 골랐다. 하지만 옷을 입어도 여전히 추웠기에 이따가 호텔을 나서면 천우진이랑 같이 가서 두꺼운 옷을 사야겠다고 다짐했다.그녀는 호텔 방문을 열고 나가 막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정말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이 사실인가!어떻게 어딜 가던 루카스를 만날 수가 있지?루카스도 그녀를 보곤 얼굴이 어두워져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타이밍 한 번 끝내주네.”소이연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이렇게 교양 없는 남자랑은 한 마디도 섞고 싶지 않았다.엘리베이터가 내려가고, 중간에 잠시 멈췄는데,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탔다.아마 아줌마 단체 여행객인 것 같았다.소이연은 조금 밀려났다.한 아줌마가 실수로 소이연을 밀쳤다.소이연은 그대로 뒤로 밀려나 루카스의 몸에 기댔다.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루카스는 분명 알 수 없다는 듯, 한 마디 할 것이다.그녀는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루카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루카스에게 떨어지려고 안간힘을 썼다.설마, 사람들 앞에서 루카스도 체면을 챙기는 건가?!그녀는 이 남자가 다른 사람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생각 없이 사는 줄 알았다.엘리베이터 안.아줌마들이 너무 많아서 아주 시끄러워졌다.소이연은 몇 번이고 밀쳐났다.그녀는 이미 최대한으로 루카스와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앞에 있는 아줌마가 계속 밀치는 바람에 무게를 견딜 수가 없었다.그녀가 뭐라 한 마디 하려던 그 순간, 머리 위에서 아주 불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어머니, 매너 좀 챙겨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계속 시끄럽게 하시고 이게 뭡니까? 뒤로 밀지 말아 주시죠? 뒤에 있는 사람도 생각하셔야죠!”목소리는 아주 컸고, 예의도 없었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끄럽던 엘리베이터는 순간 고요해졌다.루카스에게 한 마디 들은 아줌마는 고개를 돌려 루카스를 보았다. 확실히 표정이 좋지 않았다.“요즘 젊은이들은 진짜 예의가 하나도 없어. 어른들 존중할 줄도
“요즘 젊은이들은 예의가 없어, 예의가!” 아줌마는 화가 안 풀렸는지 계속 욕을 퍼부었다.“늙어서 나빠진 게 아니라, 나쁜 사람이 늙는 거구나.” 루카스도 지지 않고 반박했다.소이연은 그 아줌마가 화병으로 죽을 것 같은 모습을 보았는데, 속으로는 뭔가 통쾌한 기분을 느꼈다.평소에 이런 아줌마들은 자기 나이를 들이밀며 노인도 존중하지 않는다.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그 아줌마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욕을 하며 사라졌다.소이연이 몸을 조금 움직이자, 루카스는 급히 그녀를 놓아주었다.그 모습이 마치 더러운 물건이라도 만진 것 같아 보였다.독한 말도 잊지 않았다. “오해하지 마, 너 때문에 아줌마랑 싸운 거 아니니까.아줌마가 널 밀면, 네가 날 미니까, 난 누가 내 몸에 닿는 게 싫거든.”“오해 안 해.” 소이연은 성큼성큼 걸어나갔다.원래 그래도 “고맙다”라는 말 한마디는 하려고 했는데, 역시 그에게는 필요 없었다.소이연은 그대로 호텔 입구로 걸어갔다.호텔 문이 열리자, 찬 바람이 들어왔고, 소이연은 참지 못하고 몸서리를 쳤다.그녀는 너무 추워 몸을 부르르 떨었다.밖에서 들어오던 두 여자 중 한 명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와, 이렇게 추운 날 저거 밖에 안 입다니! 그래도 몸매는 예쁘네, 분위기도 있고.”“이게 바로 분위기는 챙기고 따뜻함을 버리는 건가? 나는 이렇게 추우면 차라리 곰처럼 꽁꽁 싸맬래.” 또 다른 여자가 말했다.“나도, 나도. 난 이렇게 추운 날 도대체 왜 저렇게 입는지 이해가 안 돼.”이때 소이연은 이미 호텔 문을 나서고 있었다.천우진이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그녀가 확실히 얇게 입은 것을 보더니 손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아 조수석에 태웠다.“왜 때문이겠어?” 그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저런 롤스로이스를 끌고 데리러 온다면 난 아무것도 안 걸쳐도 돼.”“슬프네.” 두 여자는 깔깔대며 웃었고, 루카스는 그들 옆으로 지나쳐갔다.당연히 소이연이 한 남자의 고급 차에 타는 것도 보았다.그의 입꼬리에는
어제부터 지금까지 그녀가 루카스와 이렇게 우연찮게 마주친 건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이 많았다.루카스의 눈빛을 보니, 그녀는 이 사람이 고의로 자신을 따라다닌다고 생각할 듯해 보였다. 그녀는 급히 천우진을 붙잡았다.천우진은 아마 조금 놀란 것 같았다.그동안 소이연은 그에게 먼저 스킨십을 하지 않았다.그 순간 갑자기 그에게 팔짱이 끼워졌다......천우진의 말없이 웃던 얼굴에 장난기가 발동했고, 그는 루카스를 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올라간 입꼬리엔 비웃음이 담겨있었다.소이연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이 남자는 그녀에게 보인 적 없는 다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하지만 마린의 작업실에서 그를 파악했던 것이 전부였는데, 아마도 이 남자는 인상이 깊었던 것 같다.낯선 사람에게 그렇게 좋은 인상을 심어줄 필요도 없었다.그녀는 천우진의 팔짱을 끼고 루카스의 옆을 지나쳐 한쪽으로 걸었다.판매원이 나와 급히 응대했다.소이연은 어떤 옷을 살지 생각도 안 해봤고, 따뜻하기만 하면 되니 판매원에게 골라 달라고 했다.판매원은 당연히 한 벌만 고르지 않았고, 급히 디자이너의 신제품 3벌을 꺼내며 말했다.“이 3벌이 다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맞다, 이건 커플룩이에요. 남성복도 있는데 입어보시겠어요?”소이연은 흘끗 보더니 말했다. “아니요, 제 것만 포장해 주시면 돼요.”“네, 계산은 이쪽입니다.” 판매원이 공손히 말했다.“내가 갈게.” 천우진이 그대로 따라갔고, 소이연도 거절하지 않았다.어차피 천우진은 돈이 많으니까 이 정도는 문제없었다.그녀는 방금 구매한 패딩을 바로 입었다.글로벌 럭셔리 브랜드 쇼핑몰의 난로는 아주 따뜻했지만, 소이연은 여전히 추웠다.그녀는 옷을 입고 거울을 보며 천우진이 계산하는 것을 기다렸다.그 순간 탈의실에서 루카스가 나왔다.소이연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루카스가 입은 그 옷은 방금 판매원이 말한 그 커플룩의 남자 옷이었다.마침 그녀도 지금 여자 옷을 입고 있었다.루카스도 한눈에 알아보고 또 경멸하는 듯
“근데 저 사람 육현경 씨 닮았어요, 느낌도 비슷하고. 설마......”“하나도 안 닮았어요.” 소이연은 바로 그의 말을 끊었다. “얘기해 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육현경이랑 점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어요.”천우진은 담담히 웃었다.소이연이 어느 한 사람 때문에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날이 오다니 너무 놀라웠다.두 사람은 다시 차로 돌아왔고, 천우진은 그대로 천씨 가문 저택으로 향했다.소이연이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천우진이 물었다. “아직까지도 긴장돼요?”“그건 아니고.. 그냥 익숙치 않아서요.”“자주 오면 익숙해질 거예요.”“타이르지 마세요.” 소이연이 직설적으로 말했다. “저희 엄마가 그때 떠났다는 건, 여기가 좋지 않다는 거예요.”“......” 천우진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천씨 가문은 확실히 좋지 않았다.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이모, 즉 소이연의 엄마는 그의 할아버지와 관계를 끊고 집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그리고 소이연이 돌아오기로 한 것도 사실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두 사람은 같이 거실로 향했다.거실에서는 천씨 어르신과 천제진이 소파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의 옆에는 천우진의 아버지 천정류와 어머니 진양숙, 천우진의 동생 천우빈도 있었다.그 옆에는 천우진의 작은 아버지네 가족이 있었는데, 천제진의 둘째 아들 천정엽과 며느리 임단아, 손주 천재린, 그리고 손녀 천재희도 있었다.천씨 가문의 관계는 아주 복잡했다.소리 없는 전쟁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만약 육현경이 죽지 않았다면, 천우진이 바로 그를 데려와 권력을 빼앗았을 것이다.소이연이 원래 부모 밑으로 호적을 옮긴 것도 사실 최근 몇 년의 일이였고, 천제진이 직접 장안시까지 그녀를 찾아와 그녀 어머니가 어렸을 때부터 찍은 사진 여러 장과 천씨 가문 사람들의 사진을 꺼냈다.그러고는 사진을 가리키며 그녀에게 그녀의 어머니는 천제진의 딸이고, 그녀가 천제진의 손녀라고 했다.그녀는 이제서야 왜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언론에 노출시키지 않으려 했는지 깨달았
가족들은 화기애애하게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밥을 먹었다.소이연은 두껍게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추웠다. 정신도 맑지 않아서 계속 하품만 나왔다.그러자 천제진이 관심을 가지며 물었다. “어제 잘 못 잤니? 호텔에서 자면 안 좋다고 집에 와서 자라니까.”“어젯밤에 일 때문에 바빠서, 잠을 조금밖에 못 잤어요.” 소이연은 거짓말로 둘러댔다.“일은 항상 끝이 없단다. 그래도 건강은 챙겨야지.” 천제진이 말했다.“네, 조심할게요.”“이제 올라가서 좀 잘래? 사람 시켜서 방 준비해뒀어. 앞으로 서울 오면 집에 와서 자.”“괜찮아요 할아버지. 조금 있다가 또 마린이랑 일정 논의해 봐야 해서 곧 가야 해요.” 소이연은 대답을 피했다.비록 사람들은 아주 우호적이였지만 그녀는 이 집이 싫었다.당연히 겉으로만이겠지만, 그녀는 이익적으로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잘해주어도 좋을 것이 없었다.하지만 천씨 가문에서 소리 없는 전쟁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만약 천제진이 아직 살아서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았더라면, 두 아들은 진작에 다른 태도로 임했을 것이다.“이렇게나 일찍 가려고?” 천제진은 눈에 띄게 아쉬워했다.“이번에 온 것도 전시회 참여하는 김에 온 거고, 아직 장안시에 남은 일이 많아요. 다음에는 휴가 내고 올게요. 그럼 이렇게까지 안 바쁠 거예요.”“다음이 언젠데?” 천제진이 물었다.그는 소이연이 거짓말을 할까 봐 두려웠다. 그러자 소이연이 웃으며 말했다. “다음 달이요. 다음 달에는 꼭 제가 연차 낼게요.”“분명 다음 달이라고 말했다? 그때는 집에 와서 자. 호텔 가지 말고.”“......아, 네.” 소이연은 억지로 대답했다.천제진을 여러 번 거절했기 때문에 그녀도 조금은 죄책감이 들었다.오후 2시 반.소이연은 마린의 전화를 받고 집을 나설 준비를 했다.천제진은 직접 그녀를 차까지 데려다주었고, 역시 천우진이 그녀를 데려다주기로 했다.천제진이 그녀를 배웅했기 때문에, 천씨 가문 모든 사람들이 나와 그녀를 배웅했다.
차가 플래티넘 라운지에 도착했고, 천우진은 소이연이 내릴 때 말했다. “필요하면 연락해요. 서울에 있으니까, 저 24시간 대기하고 있을게요.”“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세요?” 소이연은 참지 못하고 말했다.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고, 솔직히 별로 신경 쓰지 않아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천우진이 그녀에게 잘해주든 말든, 그녀는 상관이 없었다.하지만 갑자기 조금은 그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천우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가볍게 말했다. “첫 느낌이 좋았어요. 처음 봤을 때부터 친근하게 느껴졌거든요.”“......” 이 대답은 대답하지 않은 것과 같았다. 만점이다.역시 천씨 가문 사람들은 다들 교활하다.“조심히 가세요.” 소이연은 예의를 갖추며 인사를 건넸다. 천우진은 살짝 웃었다.그는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다. 근데 아마 소이연은 안 믿는 것 같았다.그는 차를 돌려 나갔다.아마 그중에는 고모의 원인도 있을 것이다.그가 어렸을 때, 그의 고모는 그녀에게 아주 잘 해주었다.아쉽게도...... 이제 만날 수 없다.소이연도 지체 없이 플래티넘 라운지로 향했다.마린은 내일 귀국인데, 어제 밥도 제대로 못 먹은 것 같아 오늘 오후에 시간을 내서 차를 마시기로 했다.소이연은 최고급 VIP 룸으로 들어갔다.들어간 그 순간, 잠시 멈칫했다.루카스를 보니 그녀는 정말 뒤돌아 나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그녀는 마린이 두 사람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면, 최소한 두 사람이 마주치는 일은 피할 줄 알았다.“lovely.” 마린은 그녀를 보고 친근하게 불렀다. “어제는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다 오해였어. 그래서 오늘 루카스도 불렀어. 오해 풀려고.”소이연은 루카스를 보았다.그는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그녀는 신경도 안 쓰는 모습이었다.“오해는 무슨.” 소이연도 어제처럼 뒤돌아 나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역시 예의는 없었다.마린이 서울에 오는 일은 흔치 않으니, 잘 접대하는 게 옳다.당연히 저런 품위 없는 남자 때문에
소이연은 갑자기 조금 화가 났다.루카스를 마주하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자신의 심술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어떻게 이걸 살 수가 있어?” 그녀가 물었다.루카스는 차갑게 웃으며 소이연을 보고 말했다. “너 진짜 웃긴다. 내가 사고 싶은 옷을 사는 건 내 자유야. 내가 허락도 맡아야 해?”“너 내가 똑같은 옷 산 거 알고 있었잖아!”“그건 네 일이고,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좋아서 샀다는데, 네 생각은 미안하지만, 이연 씨 우리 안 친해.그리고 당신은 내가 원하는 사람 범주에도 없고.” 루카스는 말에 약간의 조롱을 담고 있었다.소이연은 입술을 깨물었다.속으로 천 불이 났다.루카스의 말에 말문이 그대로 막혀버렸다.이 사람 외국에서 자랐다면서, 말은 또 왜 이렇게 잘 해?“이건 너희들 취향이 같다고 할 수밖에 없다.” 마린은 급히 수습했다.“역시 다들 패션 선두주자라서 그런가? 나도 디자인이 예쁜 것 같다고 방금 루카스한테 얘기했어.”소이연은 입술을 만지며 침착하려 커피를 홀짝홀짝 마셨다.그리고 계속 이 사람 때문에 몸이 안 좋아지면 안 된다고 되뇌었다.“아, 말 나온 김에 하반기에 해외 전시가 있는데 전 세계 유명 디자이너들이 다 참여할 정도로 커.혹시 관심 있어? 너 작품 안 낸 지도 오래됐잖아. 사람들이 다 네 디자인 기대하고 있는데, 미리 준비하는 건 어때?”“언제쯤인데?”“6, 7월쯤?”“알겠어, 시간 나면 준비해 볼게.”“그럼 하는 걸로 알고 있을게?”“응.”“그럼 그때 내가 데리러 갈게, 너 직접 올 거지?”“만약 다른 일 없으면 내가 직접 갈게.”“넌 진작에 세상에 나왔어야 했어. 그동안 너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상태가 안 좋아 보였어. 디자인 실력을 말하는 게 아니라, 네 건강이… 뭐랄까? 기운이 없어졌다고 해야 하나?”“응.” 소이연은 그저 담담히 대답하고, 더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았다.그에게 그녀와 육현경의 일에 대해서 얘기한 적도 없었다.더 이상 마음 아픈 얘기를 계속
호텔 직원이 감기약을 가져왔다. “이연 씨, 만약 약 드시고도 안 나아지면, 전화 주세요. 차 불러서 병원에 데려다 드릴게요.”“네, 감사합니다.”“아닙니다.”소이연은 방문을 잠갔다.그녀는 병원에 잘 가지 않아서, 일반적인 감기는 보통 약만 먹어도 나았다.그녀는 물을 끓이고 약을 먹은 뒤 다시 침대에 누워 이불 속에 파묻혀서 덜덜 떨었다.난방을 더 올렸다. 타 버릴 수도 있을 정도로 말이다.이불도 한 겹 더 덮었는데, 무거워서 숨이 잘 안 쉬어질 정도였다.소이연은 자신의 이마를 만져보았다.도대체 몇 도까지 올라간 거지?이번엔 왜 이렇게 힘이 든 걸까.약을 먹고 2시간 뒤, 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고, 체온도 그대로였다.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았기에 소이연은 결국 버티지 못했다.처음으로 감기 때문에 스스로 병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전화기를 들었다. “저 좀 병원에 데려다주세요… 열이 계속 나요.”“네 알겠습니다. 10분 뒤에 내려오시면 차 불러드릴게요.”“감사합니다.”소이연은 전화를 끊고 흐느적거리며 옷을 갈아입었다.새로 산 패딩을 두르고 문을 나섰다.눈앞이 핑 돌더니 갑자기 조금씩 어두워졌다.그녀는 급히 벽에 기대 컨디션이 나아지도록 노력하고 있었다.깊게 숨을 들이켜고 다시 복도를 걸어갔다.앞에 뭔가 익숙한 사람이 보이는 것 같았다.그 사람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소이연은 있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루카스 앞에서 절대로 이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되뇌었다.그에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소이연 씨.”소이연이 겨우 루카스를 지나치던 그 순간, 루카스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소이연은 대답하지 않고 여전히 입술을 깨문 채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저기!”루카스는 그녀가 대답이 없어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소이연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지자 루카스는 미간을 찌푸렸다.이 여자 귀신 들린 건 아니겠지?!얼굴도 원숭이 엉덩이처럼 빨개졌고, 걸음도 S자가 됐네?!취했나?!취했는데 밖
백일잔치가 시작되기 전 예수진은 소이연과 친구들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급히 다가왔다.“왜 혼자와?”“그럼 누구랑 와?”“우리 조카는?”“아, 엄마한테 맡겨놨어. 먹고 싸는 것밖에 할 줄 몰라서 재미없어.”“...”“그러는 너는 좀 어때?”“뭐가 어떠냐고?”“네 애 말이야.”예수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의 찻잔이 쨍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아직 파티가 시작되기 전이라 차만 마시고 있던 남자들이었는데 송문수의 손에 들려있던 찻잔이 미끄러지면서 안에 있던 차가 흘러나온 것이다.송문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찻잔을 집어 들더니 휴지로 물기를 닦아내기 시작했다.그 얼굴에서 당황스러움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찻잔을 떨군 건 그저 우연이라는 듯 하도경, 육현경과도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그를 보며 하지수도 입을 열었다.“잘 있지. 전에는 좀 힘들었는데 이젠 잘 먹고 잘 자.”“너 살 좀 찐 것 같아.”“응, 2킬로 넘게 쪘어.”“그럼 됐어.”하지수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던 예수진은 파티가 곧 시작한다는 말에 계지원과 함께 자리를 떴고 그녀가 떠나가 테이블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아마도 얘기를 다 나눈 남자들 때문인 것 같았다.가만히 있기도 뻘쭘했던 하지수가 주전자를 들려 하자 송문수가 빠르게 그녀에게 차를 따라주었다.“고마워.”하지수의 인사에 송문수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한참 동안 둘 사이에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그러다가 결국 송문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너 임신했어?”“응.”“빠르네.”송문수는 의미 없는 웃음으로 자신의 착잡한 마음을 감추려 했다.적어도 결혼한 다음에야 임신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송승우의 아이를 가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인신고만 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송문수는 자신의 생각이 점점 커지는 게 싫어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너 혼자 온 거야? 송승우는?”“서울 갔어.”“몸은 괜찮아졌어?”“응, 의족 해서 이젠 잘 다녀.”오랫동안
예수진은 빠르게 소이연에게 문자를 보냈다.[이연 언니, 송문수 왔어요. 진짜 올 줄은 몰랐는데 방금 안으로 들어갔어요!][내가 진짜 올 거라고 했잖아요.][내 매력이 그 정도일 줄 몰랐죠.]역시나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예수진에 어이없다는 이모티콘을 보내고 난 소이연은 송문수의 인영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하도 큰 키 덕분에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도 우뚝 솟아있는 송문수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문수야.”마찬가지로 그를 알아본 육현경이 인사를 건네자 송문수는 빠르게 그들에게로 다가갔다.“언제 왔어?”“어제 오후에.”“왔는데 왜 말도 안 해? 사업 잘된다고 이젠 우리도 모른 척하는 거야?”“아무리 잘 되봤자 내가 현경이만큼 돈이 많진 않아.”볼멘소리를 하는 하도경에 맞는 말로 반박하자 하도경도 딱히 할 말이 없는지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언제 가?”“모레 비행기야, 내일 집 가서 부모님만 뵙고 가려고.”“그래서 우리 만날 시간은 없다 이거지?”“이번엔 시간이 좀 빠듯해, 거기 일도 많고. 오늘 보지 뭐, 술 제대로 마시자 한번.”“너 진짜 많이 변했어 송문수, 이렇게 진지하진 말아 줄래?”적응되지 않는 송문수의 말투에 하도경이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그럼 어쩌라고.”“나는...”판을 깔아주니 말하기 어려웠는지 하도경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술 마셔 그냥.”“그래.”또 무슨 바람이 분 건지 둘은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파티의 주인공이 자리하기도 전에 술부터 마시기 시작했다.육현경이 그런 그들을 말리려 할 때 송문수의 옆에 문득 한 여자가 앉았다.그에 술잔을 들고 있던 송문수도 잠시 멈칫했다.굳이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아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을 주며 술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송문수를 한번 보던 소이연은 하지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지수 씨, 왔어요?”“네.”“혼자예요?”“네.”혼자라는 말에 송문수의 손은 아까보다 더 하얗게 질려버렸다.“혼자니까 더 조심해요 다닐 때.”“그
그로부터 반년이 지나서야 송문수는 마침내 국내로 돌아올 수 있었다.캐나다에 있는 회사도 이제 정상적으로 흘러가자 귀국한 거였지만 그도 그냥 예수진 아들의 백일을 축하하러 온 것뿐이었다.시간이 어찌나 빠른지 송문수가 나갈 때까지만 해도 배가 부른 채로 있던 예수진이 벌써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백일까지 맞이하게 된 것이다.오랜만에 온 장안시였지만 송문수는 자신의 귀국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저 본인의 집으로 향했다.오랫동안 비워둔 집이라 그런지 온통 먼지투성이여서 일단 도우미부터 부른 송문수는 아주머니가 정리를 마친 다음에야 침대에 몸을 뉘일 수 있었다.떠나기 전만 해도 이곳에서 사랑하던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는데.이제는 그 모든 게 다시는 들춰선 안 될 과거가 돼버린 것 같았다.해외에 있던 시간 동안 송문수는 부단히 하지수를 잊으려 애쓰고 있었다.물론 정말 잊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하지만 하지수와 송문수가 반년 동안 연락을 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었다.부모님과 영상통화를 할 때도 같은 집에 살던 하지수는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그저 우연히 한 번, 그녀의 뒷모습이 화면에 스친 게 전부였다.몸을 뒤척이던 송문수는 내일의 백일잔치에 대해 생각했다.내일 가면 친구들이 무조건 술을 권할 텐데, 오랫동안 술을 마시지 않은 탓에 송문수는 지금 자신의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그래도 푹 쉬면 조금은 낫겠지 싶어 그대로 잠을 청한 송문수는 이튿날 아침이 돼서야 눈을 떴다.언제부턴지 부모님처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배어버린 탓에 송문수는 이젠 밤을 새우는 게 오히려 힘겨웠다.그렇게 여유롭게 준비를 마친 그는 한 번 더 깔끔하게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선물을 한 아름 안고 집을 나섰다.너무 이르지도 않고 너무 늦지도 않은 딱 적당한 시각에 집을 나선 그는 문득 옛날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을 지었다.예전에는 어쩜 그리 특이하게 살아왔는지, 참으로 유치했던 것 같다.해외에서 반년 동안 혼자 살아서
“보름 넘게 준비한 건데 서두르는 건 아니지.”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고향을 떠나는 일인데도 송문수는 참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갔다가 언제 와?”“그건 몰라. 상황 봐서 잘 되면 빨리 오는 거고 잘 안되면 못 오는 거지.”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송문수에 그의 결심이 바뀔 리 없다는 걸 알아챈 송승우는 그만 입을 다물고 하지수의 손을 맞잡았다.무의식중에 눈물을 흘리던 하지수는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빠르게 표정을 감췄다.“가자.”그리고는 송승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그녀는 송문수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마지막 작별인사도 전하지 않은 채 그렇게 헤어졌다.하지수의 몸에 감히 시선을 두지 못하던 송문수도 그녀가 송승우와 함께 차에 타서야 차창 너머로 비치는 그 뒷모습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그는 한참 동안 자신에게서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사실 캐나다도 송문수가 직접 갈 필요는 없었다.회사에 유능한 사람은 널리고 널렸으니 아무에게나 CEO라는 직급을 쥐어 보내면 될 일이었지만 송문수는 본인이 가겠다고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여기서 다정하게 지내는 둘을 보고 있는 게 더 가슴 아플 것 같아서, 눈에 보이지 않으면 조금은 낫지 않을까 싶어서.손 하나 잡았다고 이렇게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은데 이런 모습을 계속 보는 건 정말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는 이곳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송문수는 캐나다에 도착해서야 육현경과 소이연을 비롯한 친구들에게 자신의 출국 소식을 알렸다.그리고 언제 돌아갈지는 모른다는 말까지 남기자 다들 깜짝 놀랐지만 별말은 하지 않고 몸 잘 챙기라는 소리들뿐이었다.그리고 시간 되면 놀러 오라는 얘기들로 대화가 마무리되었는데 역시나 예수진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그녀는 굳이 송문수에게 따로 문자까지 보내며 물었다.[너 진짜 어쩌려고 그래? 이렇게 가겠다고? 다 버리고? 송문수, 너 언제부터 이렇게 나약해졌니? 내가 너였으면 당장이라도 송승우랑 싸웠어!][어차피 못 이
둘의 이혼은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고 두 사람은 각각 손에 이혼 증명서를 들고 법원에서 나왔다.“이제 끝난 거지?”“네.”하지수에게 건네받은 이혼 증명서를 들춰보던 송승우는 안에 적힌 내용을 다 확인한 후에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혹시라도 돌발상황이 생길까 봐 따라온 건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두 사람의 이혼은 순조롭게 진행됐다.송문수는 하지수를 보고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절차대로 서류만 제출했다.아무 감정도 없는 것 같은 두 사람의 모습에 송승우는 감정이란 게 저렇게 쉽게 사라질 수도 있나 싶었다.둘 사이에 다른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이혼만 하면 그만이었기에 송승우는 다른 건 묻지 않았다.이제 두 사람이 이혼했으니 송승우는 저와 하지수도 떳떳해진 것 같았다.그리고 그는 송문수만 연락을 끊는다면 하지수를 다시 자기 여자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그래서 법원에서 나오자마자 송승우가 먼저 송문수를 불러세웠다.“시간 되면 집에 와서 밥이라도 먹어. 엄마 아빠가 전화해도 안 오던데, 많이 바쁜 거야?”“응.”“바쁘다고 가족들도 다 내팽개치는 건 아니지. 워라벨도 신경 써야지.”어른스러운 말투로 나무라듯 말하는 송승우를 송문수는 쳐다보지도 않았다.서울에서 일할 때 1년이 넘도록 안 오던 게 누군데.부모님이 굳이 송승우를 부르지 않은 건 그의 일에 방해가 될까 봐서였다.무튼 송승우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이 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고 다른 사람들의 일은 언제든지 시간을 뺄 수 있는 여유 적적한 일이라 여기는 사람.“언제 시간 되는지 알려주면 도우미들 시켜서 너 좋아하는 거...”“나 해외에 잠깐 나가봐야 해.”“뭐라고?”송문수가 송승우의 지루한 말을 끊으며 대답하자 송승우는 당황하며 물었다.“엄마 아빠가 말 안 했어?”“무슨 말이야 그게?”금시초문이었던 송승우는 하지수를 쳐다보았지만 그녀의 반응을 보니 그녀 역시 처음 듣는 말인 것 같았다.“우리 회사 전기차 해외 매출이 자꾸 오르니까 전
그런데 그때, 협탁에 놓인 물과 알약 한 알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그 옆에 나란히 놓여있는 쪽지에는 “단기 피임약”이라는 말도 적혀있었다.그 약과 물을 번갈아 보던 하지수는 피가 차게 식는다는 게 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너무나도 명확한 송문수의 의사에 하지수는 가슴이 아려왔다.성인 남녀 둘이 충동적으로 서로를 원해서 가졌던 하룻밤이니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을 것이고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걸 이렇게 약으로 알려주다니.알약을 집어 든 하지수는 참으로 처량하게 웃어 보였다....그렇게 점심이 다돼서야 하지수는 별장으로 돌아갔다.핸드폰 배터리가 다 된 탓에 그녀는 송승우가 몇 통의 전화를 했는지도 모른 채 별장 안으로 들어섰는데 송승우는 아니나 다를까 어두운 얼굴로 이제야 들어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와 달리 허영지와 송기명은 살갑게 하지수를 걱정해주었다.“지수야, 어제 어디 갔었어? 전화는 왜 꺼놓고. 수진이한테 전화했는데 네가 문수랑 같이 갔다고 해서 문수한테 연락해보니까 문수는 또 너랑 같이 있는 거 아니라고 그러던데.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어디 다친 데는 없지?”“없어요. 어제 술을 좀 많이 마셔서 문수 씨 집에서 잔 것뿐이에요.”송문수 집에서 잤다는 하지수의 말에 송승우는 더는 못 참겠는지 언성을 높였다.“하지수, 너 나랑 한 약속 잊었어? 네가 어떻게 거기서 잠을 자!”“내가 무슨 약속을 했는데요?”송승우는 아무리 화가 났어도 저 질문에만큼은 답을 할 수 없었다.가스라이팅으로 어렵게 얻어낸 기회라는 걸 다른 사람한테는 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나 문수 씨랑 아직 이혼 안 했어요. 그러니까 아직은 뭘 하든 합법적이란 소리죠.”“하지만...”“이혼하고 나서 얘기해요. 나 피곤해서 먼저 올라 가볼 게요.”몸도 마음도 다 힘들었던 하지수는 송승우를 화를 살필 겨를이 없었기에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그렇게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으니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몸을 뒤척이며 이불을 목 끝까지 끌
“너 내일 후회할 거야.”이런 하지수를 앞에 두고 참는 건 송문수에게도 곤욕이었다.온몸이 떨릴 정도로 힘을 주고 있는 것보다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는 게 더 힘들었다.“후회 안 해.”“딱 하나 후회되는 게 있다면 내가 이 나이 먹도록 한번 밖에 못 해봤다는 거야. 그리고 그 한 번도 진짜 별로였어.”“뭐?”아까부터 한번을 강조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그 한 번도 다 너한테 맞춘 거였잖아.”고작 한 번이라니, 그럴 리가.그런데 또 곱씹어 보니 둘이 함께 잔 건 한 번뿐인 것 같긴 했다.하지만 송승우와 그렇게 오래도록 사귀면서 송승우 방까지 들락날락하던 게 하지수인데 그런 그녀의 인생에서 저와 한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이번엔 내가 움직일 거야.”하지수는 잔뜩 풀린 눈으로 당차게 말했지만 그녀의 말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나 또 밀어내면 그땐 진짜 물어버릴 거야.”말을 마친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닥에 눕힌 뒤 그 위에 올라탔다.“반항하지 마.”곧바로 하지수의 입술이 자신에게 다가왔지만 송문수는 정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이 상황에 그녀를 밀어내면 하지수가 정말 울어버릴 것만 같아서.그녀의 우는 모습을 보는 건 언제나 가슴 아픈 일이었기에 송문수는 그냥 가만히 있는 걸 택했다.그렇게 내일 그녀의 원망도 다 받아낼 심산으로 송문수는 하지수의 움직임에 몸을 맡겼다.뜨거운 하룻밤을 보낸 뒤, 아침이 밝아오자 하지수는 몸을 뒤척였다.온몸에 차에 깔리기라도 한 듯 무거웠고 발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던 그녀는 힘겹게 눈부터 떠보았다.익숙하고도 낯선 이곳은 그녀의 기억 속에 있던 송문수의 집이었다.그리고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니 어제의 기억 조각들이 하나하나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그것들이 마침내 온전한 하나가 되었을 때, 하지수는 얼굴을 붉혔다.본인도 몰랐던 자신의 대담한 모습을 그녀는 차마 깊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술이 깬 지금에 와서는 절대 못 할 일이
송문수는 자신마저도 취해버린 것 같았다.그래서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도 분간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입술을 뗀 하지수가 오랜만에 얌전해진 송문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자신의 키스에 몸을 맡기며 가만히 있기만 하는 그에 하지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문수 씨, 내가 하는 키스가 그렇게 별로야?”별로라니, 흥분해서 자칫하면 이성이 끊길뻔했는데.여기서 입을 열면 더 이상은 참지 못할 것 같아 송문수는 이번에도 그녀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어디가 별론지 얘기해주면 내가 고칠게, 응?”송문수는 아까부터 마른침만 삼키고 있었다.부단히도 움직이는 그의 울대가 그의 초조함을 대변하고 있었다.하지수 앞에서만큼은 속절없이 무너지는 송문수라 하지수가 한마디만 더 하면 그는 정말 무너져내릴 것만 같았다.“지수...”그래서 그만하라고 말하려 하는데 하지수가 본인의 손가락을 송문수의 입에 가져다 댔다.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진 지 아는 송문수는 지금 이마에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힘을 주며 간신히 참고 있었다.이대로 가면 정말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은데, 그걸 다 알면서도 그는 하지수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그런데 하지수는 점점 과감해지는 건지 이젠 하다 하다 손까지 집어넣어 송문수의 몸 곳곳을 어루만지고 있었다.그녀의 손길이 지나간 곳이면 그게 어디든 불에 덴 듯 뜨거워 났다.송문수 역시 술을 마신 몸이라 버티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그래서 그는 자신이 느슨해져서 이 상황을 즐기는 일이 없게 온몸에 힘을 꽉 주고 있었다.하지 마 하지수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점점 더 깊은 곳까지 손을 움직여왔다.“아!”그러다 결국 송문수에게 손이 잡혀버린 그녀는 울망울망한 눈으로 송문수를 올려다봤다.자칫하면 그곳까지 갈 수도 있었는데 뭐가 아쉬워서 저런 표정을 짓는지.송문수는 심호흡으로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그만해 하지수.”“왜?”“별장에 데려다줄게.”저 순진무구한 눈을 보고 있으면 송문수도 빨려 들어갈
술에 취한 하지수의 고집을 당해낼 수 없었던 송문수는 결국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밤늦은 시간에 별장에 들어가면 다른 가족들을 깨울 수도 있으니 집에서 잠만 재운다는 핑계를 대가며 말이다.송문수가 하지수를 침대에 눕히고 자리를 뜨려 하자 하지수가 그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가지 마.”손끝에서 느껴지는 하지수의 온기에 송문수의 심장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하지수, 잘 봐. 나 송문수야.”“알아, 네가 송문수인 거. 나 버린 무책임한 놈이잖아 너!”풀린 눈으로 저를 쳐다보며 말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술을 마신 하지수는 송문수가 감히 컨트롤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왜 날 송승우한테 넘긴 거야? 내가 물건이야? 네가 뭔데 날 송승우한테 준다 만다냐고!”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하지수는 침대에 올라 선 채 송문수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서 있지 말고 일단 앉아, 그러다가 넘어져.”“안 넘어져.”하지수는 송문수의 말을 듣지도 않고 계속 질문만 퍼부었다.“왜 날 밀어내는 건데! 내가 어디가 별로야? 몸매가 별로야 아니면 내가 못생겼어? 뭘 그렇게 일일이 다 따지고 들어? 넌 보는 눈이 그렇게 높아?”“일단 누워.”“싫어.”송문수가 그녀를 잡아주려고 손을 뻗으면 하지수는 곧장 몸을 돌려 피하곤 했다.그렇게 휘청대는 하지수를 보는 게 송문수는 조마조마하기만 했다.“내 말에 대답부터 해. 왜 날 싫어하는 거야?”“난 너 싫어한다고 안 했어.”그의 대답에 송문수를 향해 손가락질하던 하지수가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넌 그냥 내가 싫은 거잖아! 나 말고 밖에 있는 그 못된 여자들을 더 좋아하는 거잖아. 나도 그 여자들처럼 변하면 나 좋아해 줄 거야?”“그런 거 아니야.”“변명하지마! 넌 그냥 몸매 좋고 능숙한 그런 여자들만 좋아하는 거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혼자 화를 내는 하지수가 송문수는 어이없기만 했다.술을 마신 하지수는 아예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