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윤선아는 전송진에서 천사국으로 넘어오던 중 마침 지나가던 마차 한 대에 떨어졌다.순식간에 수십 명의 무리가 그녀를 에워쌌다. 물론 그녀의 실력이라면 두세 번의 공격으로 처리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문제는 그녀를 뒤따라온 소유정, 한소희 그리고 지성윤이었다. 이 셋 중에서 실력이 그나마 강한 지성윤은 몇 명 정도 해치울 수 있었다.그러나 소유정과 한소희는 무공을 수련한지 얼마 안 되어 마룡 천왕의 호위무사를 상대할 능력이 되지 않았다.그렇기에 세 여자는 곧 제압당했고 이를 빌미로 윤선아더러 항복하라고 협박했다.만약 이 세 여자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윤선아는 협박을 신경 쓰지 않겠지만, 이 셋은 이도현과 엮인 여자들이었다.그중 둘은 이도현의 여자친구라고 인정하기도 했다. 설사 거짓말이라 윤선아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두 사람이 후배의 여자친구든 아니든 간에 윤선아는 그녀들이 위험에 빠진 것을 손 놓고 지켜볼 수 없었다. 그녀는 이도현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체포되었고 마룡 천왕의 부하에게 무공을 봉인 당했으며 강제로 마룡 천왕의 신부로 차려 입혀졌다. 이는 그녀의 인생에서 제일 큰 치욕이었다.“선배, 다친 데 없죠?”이도현이 재빨리 달려 나와 둘째 선배의 상태를 체크했다. 그녀는 무공만 봉인 당했을 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이도현은 자신이 제일 걱정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확인한 후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그는 윤선아의 체내로 내력을 주입하여 봉인을 풀어준 후 나머지 세 여자의 상태를 체크하러 갔다.“도현 오빠, 고마워요. 저희가 또 폐를 끼쳤네요. 죄송해요.”소유정이 송구스럽게 말했다.“도현 오빠, 미안해요.”한소희도 고개를 떨구며 사과했다.“이도현 씨가 또 한 번 저를 살렸네요. 이 은혜 평생 잊지 않을게요.”지성윤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이도현을 바라보며 말했다.“다들 별일 없어서 다행이에요.”이도현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그는 차마 속마음을 입 밖으로
이도현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순순히 선배의 말을 따랐다. 조금 전까지 사람의 팔을 잘라내고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사람의 목숨을 끊어놓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마룡 천왕의 성채에 있던 사람들은 이도현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으며 속으로 욕설을 퍼붓기까지 했다. 그들은 조금 전의 사납던 맹수가 순식간에 젠틀하고 온순한 강아지로 변했다는 것이 전혀 믿겨 지지 않았다.역시 이 세상에 아무리 횡포한 남자라도 여자의 말을 들어야 했다. 아무리 사나운 사람이라도 자기 여자 앞에서는 온순하고 말 잘 듣는 강아지가 되는 법이었다.이도현도 방금의 사나운 맹수에서 온순한 강아지로 변한 것이다.그러나 사람들은 이도현의 태도가 180도 변한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이도현이 또 사람을 죽이거나 괴롭히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물론 운 좋게 살아남은 마룡 천왕 역시 이도현이 가자고 말하는 것을 듣고 안도하며 숨을 토했다.긴장이 확 풀리자 마룡 천왕은 다리에 힘이 풀려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오늘은 봐주마. 앞으로 제대로 처신하는 게 좋을 거야. 천왕이라고 해서 함부로 굴지 말고 두 번 다시 날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흥...”이도현이 이렇게 으름장을 놓자 마룡 천왕은 겁을 잔뜩 먹었다.“명심하겠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마룡 천왕은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였고 급히 대답했다. 그는 이도현과 네 명의 여자를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이도현을 쳐다보다가 홧김에 죽임을 당할까 봐 겁났고 윤선아같이 예쁜 여자를 한 번 더 쳐다봤다가 여색에 눈이 멀어 이성을 잃을까 봐 두려웠다.“흥. 나쁜 놈...”마룡 천왕의 곁을 지날 때 한소희가 이를 악물며 마룡 천왕의 다리를 세게 걷어차 자신만의 복수를 이뤘다.염국에서 천금으로 살아온 그녀는 집안 어른들의 공로 덕분에 일반인 중에서도 관가 아가씨의 존재였기에 한 번도 이런 수모를 겪은 적이 없었다.
비록 목소리의 주인이 보이지 않았지만 말투만 들어도 상대하기 쉬운 인물이 아닌 게 분명했다.모두가 목소리의 주인을 찾고 있을 때 예쁜 나비 두 마리가 날아왔다. 두 마리의 붉은 나비는 불꽃을 휘감으며 마룡 천왕을 향해 날아갔다.거의 한순간 두 마리의 나비는 마룡 천왕의 곁에 도착했다.오리무중에 빠져있던 마룡 천왕이 미처 반응하지도 못했는데 그의 눈앞에서 두 줄기의 불빛이 곧바로 그의 하체를 스쳐 지나가 극심한 고통이 전해졌다.뚝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살덩이가 잘려나가 바짓가랑이에서 발목으로 떨어졌다.“아...”마룡 천왕은 비명을 지르며 피범벅이 된 아랫도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세상이 순간 암흑으로 변하는 듯했다.“아... 없어졌어... 어떻게 이럴 수가... 여봐라. 빨리 찾아...”마룡 천왕이 소리를 지르자 호위무사 한 명이 얼른 달려와서 그의 바지 속으로 손을 넣고 급하게 찾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호위무사의 손은 피범벅이 되었다. 그의 수색으로 인해 마룡 천왕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고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다.그러나 그는 이런 것들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지금 남자의 가장 중요한 것이 없어졌으니 이것보다 고통스러운 일은 없었다.‘그것을 잃은 남자는 과연 진정한 남자라고 할 수 있을까? 이제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남자가 모든 것을 얻고 권세와 재화를 얻는 것은 모두 즐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남자를 상징하는 것이 없어졌으니 앞으로 어떻게 즐기고 무엇으로 즐길지 눈앞이 캄캄했다.자고로 남자는 결국 여자를 위해서 노력한다는 말도 있었다. 그게 맞는 말인지 아닌지는 따로 논의할 일이지만 남자의 즐거움은 확실히 여자와 갈라놓을 수 없었다. 특히 권세가 높은 사람은 세상의 미인을 모두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싶어한다. 따지고 보면 그들도 결국은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였다.지금 마룡 천왕은 갑자기 들이닥친 나비에 의해 그 중요한 것을 잃고 말았다. 그럼 그의 후반생은 무엇을 즐길까?여자와 놀아날 그것이 없어졌으니 사는 게 무슨 의
여인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 세상에 발을 디딘 선녀 같았다.한 폭의 그림처럼 고운 춤사위를 선보인 그녀의 모습은 감히 정면으로 쳐다볼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현장의 모든 여인 중에서도 오직 윤선아만이 그녀와 겨룰 수 있을 정도였다.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을 보며, 조금 전 마룡 천왕의 그곳을 잘라낸 사람과 연결 지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어찌 그런 잔혹한 일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게다가 그 부위라니. 여자가 어찌 남자의 그곳을 노리며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정말... 말이 되지 않는 일이 아니겠는가?’‘이건 너무 말이 안 돼...’사람들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만, 아무도 감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괜한 말 한마디 잘못 꺼냈다가, 이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들에게도 같은 일을 저지를까 봐 겁이 났다.‘정말 죽도록 고통스러울 건데.’“일곱째야... 네가 웬일로 여기에 있어? 넌 어쩜 한결같이 막무가내야. 이 천방지축에 부끄러운 줄 모르는 계집애야. 이 선배가 좀 보게 어서 이리 와.”윤선아는 여인을 본 순간 화색이 만면해져 재빨리 달려가면서 소리쳤다.“둘째 선배... 보고 싶었어요... 흑흑...”여인은 눈시울을 붉히며 눈물을 흘리더니 그대로 윤선아의 품에 안겨 엉엉 울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됐어. 이 계집애야. 다 큰 어른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여전히 질질 짜기나 하고. 정말 다섯째와 똑 닮았어. 변한 게 하나도 없네.”윤선아는 여인의 등을 다독이면서 머리를 살살 어루만져 주었다. 말로는 엄격하게 얘기했지만 정작 윤선아의 눈가에도 눈물이 고여 반짝였다.“둘째 선배... 살이 빠지셨네요. 이게 얼마 만이에요? 제가 얼마나 선배들을 그리워했는지 아세요? 스승님께서는 무사하시죠? 대선배는요? 셋째 선배, 넷째 선배, 다섯째 선배, 여섯째 선배는요? 그리고 여덟째 후배와 아홉째 후배는 잘 지내죠? 열째는 요즘 무공 연습을 좋아하나요?”여인은 숨 돌릴 새도 없이 질문 세례를 퍼부
“그제야 저는 이 영감탱이가 욕보이려 했던 대상이 둘째 선배라는 걸 알았어요. 그러니까 더더욱 용서할 수 없었어요. 원래는 깔끔하게 죽여 버리고 싶었는데 선배가 용서하겠다고 하니, 저도 선배의 뜻을 어기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저놈을 그냥 살려두기는 싫으니까 차라리 저렇게 만들어 버렸어요. 아예 ‘근원’을 잘라버린 거죠. 헤헷...”여인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녀의 달콤한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현장에 있던 남자들은 저도 모르게 저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으며 슬쩍 다리를 모았다.‘저게 진짜 ‘그곳’을 자르겠다는 의도였다니... 너무 무서운 여자야.’그녀의 소름 돋는 말에 이도현조차 등골이 서늘해졌다.“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이 계집애야. 그런 말을 함부로 지껄이면 어떡해. 어서 막내 후배한테 인사부터 드려. 후배가 벌써 선학신침을 열 개나 정제시켰어.”윤선아가 진지하게 말했다.하지만 이도현은 어안이 벙벙했다.‘방금 그 섬뜩한 얘기랑 선학신침이랑 무슨 상관이야?’그러나 일곱째 선배는 그 말을 듣자마자 표정이 돌변했다. 방금까지의 장난기 어린 모습은 사라지고 순식간에 엄숙한 얼굴로 바뀌었다.그녀는 이도현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도현이 말릴 새도 없이 그녀는 한쪽 무릎을 꿇고 이도현에게 공손히 경례하며 인사를 올렸다.“태허산 제97대 제자 서명월이 장문께 절 올리겠습니다.”일곱째 선배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이도현은 완전히 멘탈이 나갔다. 게다가 선배가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는 것에 깜짝 놀라 심장이 벌렁거렸다."아니... 선배,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어서 일어나세요... 제발 장난치지 마세요.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이도현은 거의 놀라 까무러칠 지경이었다.‘선배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지? 왜 나한테 무릎을 꿇고 인사를 하시는 거지?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지?’이도현은 다른 선배들의 성격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성격이 독특한 선배일수록 이도현을 더욱 심하게 놀렸다. 특히 여덟 번째 선배, 열 번째 선배 그리고 여섯 번째
이도현은 정말 겁이 잔뜩 났다.두 선배가 자신에게 무릎을 꿇는 것은 조금 전 13구의 시체 대전과 맞섰을 때보다 더 무섭고 산에서 내려온 이후 겪었던 제일 무서운 일이었다.그 무서운 정도는 몇몇 선배들에게 가슴 공격을 당하는 것과 비슷했다.특히 두 선배가 매우 진지한 얼굴로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니, 이도현은 가슴이 쿵쾅거리며 몸둘바를 몰랐다.“선배... 제발 이러지 말고 우리 말로 풉시다. 얼른 일어나세요. 이러시면 제가 당황스러워요. 제발 장난이라면 그만 하세요.”이도현은 거의 무릎을 꿇을 뻔했다. 도대체 선배들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그는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도현 후배. 아마 스승님께서 얘기해 주지 않아 후배가 모르는 모양이야. 태허산의 오랜 규칙에 따르면 선학신침을 9개 이상 정제한 후계자는 정식으로 태허산의 장문이 되네. 후배가 열 번째 선학신침을 정제했을 때, 우리는 이미 감지했어. 그러니 후배가 바로 우리 태허산의 장문이고, 태허산의 제자인 우리는 장문을 뵌 후 마땅히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려야 하네.”윤선아가 말했다.“네? 선학신침을 9개 이상 정제하면 장문이 된다고요? 저는... 처음 듣는 얘기예요. 스승님은 왜 저한테 한마디도 얘기해 주지 않았나요?”어안이 벙벙한 이도현은 정말 선배의 말이 하나도 믿어지지 않았다. 태허산에 이런 규칙이 있다는 걸 그는 전혀 몰랐다. 게다가 예로부터 내려온 규칙인데 그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예로부터 내려온 규칙이라는데 태허산의 제97대 유일한 남자 제자이자 제97대 후계자인 나는 왜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이도현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늙은 영감탱이 스승은 무책임하게 이렇게 중요한 규칙을 설명해주지 않았고, 수련만 하게 할 뿐 이도현을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스승님은 강호의 규칙이나 권선징악 등 도리 같은 것을 전혀 이도현에게 얘기해 주지 않았다. 말 그대로 사람을 죽이는 방법만 가르치고 나머지 일은 조금도 가르쳐주지 않았다.“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선배. 어찌 됐든
“정말 뜻밖이네요. 허허허. 눈앞의 이 나쁜 녀석이 과거에 여자에게 놀아나 골수까지 잃었던 그 바보스러운 놈이라는 것이 전혀 믿기지 않아요.”서명월은 시시덕거리며 옛날 일로 이도현을 놀려댔다. 그녀의 장난에 이도현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당황한 나머지 땅굴이라도 파고 들어갈 심정이었다.서명월의 말로부터 예전에 이도현이 강설미에게 감정을 속아 간이고 쓸개며 빼서 뒷바라지하다가 결국 척추골까지 잃었던 과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서명월이 이도현의 오래전 망신거리를 들추자 그는 더욱 민망해졌다.‘그때는 너무 어린 데다가 사회에 금방 발을 들여서 모든 걸 순진하게 생각했어. 바보같이 모두가 착한 사람이라고 믿었지.’하지만 현실은 그에게 가혹한 교훈을 남겨주었다. 현실이라는 주먹에 호되게 얻어맞은 그는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예전에 이 얘기를 꺼낼 때마다 이도현은 마음속에 분노가 들끓었지만 이제는 수많은 생사를 겪으면서 인간의 본성을 꿰뚫었기에 많이 덤덤해졌다.무사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회 고인물들, 그리고 국가를 쥐락펴락하는 권력자들의 잔혹함에 비하면 강설요의 배신은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큰일을 겪고 굉장한 장면들을 보고 나니 예전에 겪었던 일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이 계집애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다 지난 일인데 왜 그 얘기를 들춰내고 그래? 꼭 후배의 아픈 상처를 헤집어야겠어? 셋째 선배가 들었으면 아마 네 입을 꿰맸을 거야.”윤선아가 웃으면서 서명월을 꾸짖었다.“헤헤. 저는 이제 셋째 선배를 무서워하지 않아요. 게다가 도현 후배가 분명히 개의치 않아 할 거라고 믿어요. 아직도 예전의 일 때문에 마음을 앓고 있었다면 지금의 이 경지까지 이르지 못했을 거예요.”“안 그래? 도현 후배. 후배가 과거의 심마를 이겨내지 못했다면 수련이 어느 정도에서 그쳤을 거야. 지금의 경지에 이르기는커녕 왕급을 넘어서 무도 경지에 이르지도 못했어.”서명월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만약 이도현이 과거의 상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
“대박... 이럴 수가... 와... 이거 실화야... 헉헉...”서명월은 놀라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옥병에 들어있는 담약 세 알을 바라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서명월이 놀라서 이상한 말을 할까 봐 윤선아는 그녀의 입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으로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입 다물어. 사람 많은 곳에서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 후배에게 민폐라도 끼치면 안 되니까 나중에 자세히 얘기하자. 어서 가자.”윤선아가 단호하게 말했다.“둘째 선배. 이게 진짜예요? 이 담약을 정말 도현 후배가 직접 정제해 냈단 말이에요? 이건... 너무 대단하네요. 세상에...”“이 선물은 고맙게 받을게. 도현 후배. 정말 고마워. 내가 되돌려줄 만한 건 없고 보답으로... 나중에 애라도 낳아 줄게.”서명월이 돌연 폭탄 발언을 했다.그녀가 감사함을 표현하는 방식은 너무 직설적이고 충격적이었다.‘고마우면 고맙다고 말하면 될 것을 왜 이야기가 그쪽으로 튄 거지? 너무 뜬금없어.’이도현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서명월의 말하는 스타일은 여덟 번째 선배보다 더 과감했고 거의 여섯 번째 선배와 맞먹는 수준이었다.“선배... 그건 너무... 과분해요...”이도현은 너무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이 계집애야. 너는 수치스러운 줄도 모르냐? 그런 말을 입에 담다니... 나이에 맞게 좀 점잖아질 수는 없어? 후배를 놀라게 하면 어떡해?”윤선아는 서명월의 말을 듣고 연신 고개를 저었다.“헤헤. 난 농담이 아니었어. 후배도 놀라지 않았지? 그치? 도현 후배?”“그만 말하고 어서 가기나 하자.”뒷이어 이도현 등 일행은 성채 안의 놀라움에 빠진 사람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마룡 천왕은 하늘을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아... 아... 아...”마룡 천왕은 마치 화가 난 맹수처럼 큰 소리를 내면서 울부짖었다. 호위무사의 손에 조금 전 불꽃에 강제로 잘라낸 살덩이가 쥐여 있는 것을 보자 마룡 천
“말은 통하지 않지만, 저랑 신기로 간단히 교감할 수는 있어요. 의식이 막 깨어난 정도라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대화만 가능해요.”이도현이 담담히 설명했다.“세상에. 이건 전설의 신물과 똑같잖아. 정말 믿기지 않아.”윤선아와 서명월이 또다시 놀라며 탄성을 자아냈다.작은 향로 하나가 단 몇 분 만에 그녀들을 수차례나 경악시켰다. 이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은 그동안의 모든 경험을 무색하게 할 만큼 경이로웠다.“내가 직접 시도해봐야겠어. 향로를 크게 만들어볼 거야.”서명월이 즉시 눈을 감고 신기를 펼쳐 향로와 교감하기 시작했다.“정말 반응하고 있어. 내 말에 응답하고 있어. 마치 나를 ‘선배’라고 부르는 것 같아. 너무 귀여워. 너무 신기해.”서명월은 향로에서 전해지는 의식의 파동을 느끼며 흥분해서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그녀는 한 번도 이런 기이한 경험을 해본 적이 없다. 지금이 상황은 그녀의 상식을 깨뜨렸고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이제 키워볼 거야.”서명월의 교감에 따라 향로 표면에 불꽃이 타오르는 것처럼 붉은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잠시 후 향로는 그녀의 손을 떠나 하늘로 날아오르더니 공중에서 서서히 커졌다.“커졌어. 정말 커졌어. 세상에, 이건 진짜 신기한 일이야. 신물이라니까. 확실히 신기야.”서명월이 흥분에 겨워 펄쩍 뛰며 소리쳤다.“둘째 선배. 보셨어요? 제가 직접 조종했어요. 제가 향로를 키웠어요.”“봤어. 어서 잘 간직해둬. 이런 걸 드러내면 안 돼. 누군가 보기라도 하면 위험해져...”흥분하던 윤선아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면서 이런 신물이 밖으로 알려지면 천하가 피바다로 변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땐 이 신물을 빼앗으려는 자들로 인해 또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이도현이 가장 먼저 타깃이 될 것이 뻔했다.“제 능력을 보세요.”서명월이 우쭐대며 신기를 펼쳐 향로와 교감했다.그녀의 조종하에 향로는 손바닥 크기로 줄어들어 그녀의 손에 떨어졌다. 표면의 붉은 빛도 사라지면서 다시 평범한 모습으로
윤선아와 서명월은 많은 걸 겪어본 사람이라 신기한 것들을 잘 아는 편이었다.그러나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녀들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었다.크기를 자유자재로 변환하고 불꽃을 뿜어내며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붉은 향로는 전설 속의 신물과 다름없었다.신기한 병기들도 보았고 결계, 비경도 겪어봤던 그녀들은 이렇게 신기한 보물을 보기는 또 처음이었다.전설로만 듣던 신물과 다를 게 없었다. 이런 신물은 신선 빼고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후배야... 빨리 작게 해봐. 이럴 수가... 너무 신기해. 이 세상에 이런 보물이 있다니... 정말 보고도 믿기지 않아.”서명월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신대륙을 발견한 탐험가처럼 반짝였다.“신화는 진실을 가리키는 나침반이었어... 그 말이 맞았어. 신화는 허구가 아니라, 숨겨진 진리를 드러내는 열쇠일지도... 신이 실제로 존재했을지도 몰라.”윤선아가 붉은 향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그녀는 고금의 비경 속에 감춰진 고서들이 떠올랐다. 그 고서들에는 신선에 관한 기이한 기록이 담겨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마치 신화나 전설처럼 느껴지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런 고서들은 대부분 봉건 왕조 시대 황실의 금고에 간직된 것이라,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것들이었다.심지어 일부는 지금도 국가의 서고에 보관되어 있다. 만약 정말로 쓸모없는 미신이라면 백성들에게 공개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보통 사람이 미신이라 여기는 것들을 은밀히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왜냐하면, 세상 모든 것들이 겉면에 보이는 것처럼 단순한 것은 아니었다.윤선아는 고전 서적들에서 봤던 ‘신화는 진실을 가리키는 나침판’이라는 구절이 떠올랐다.지금 이 문장을 되새기니, 그 말의 무게가 확 와닿았다. 마치 말속에 엄청난 지혜와 진리가 담겨 있고 세상 사람들에게 모종의 진실을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이도현은 윤선아의 혼잣말에 정신이 확 들었다. 그는 뭔가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것 같으면서도 제대로 알아내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하하하. 장난이야.”서명월이 가볍게 웃어넘겼다.이도현은 분위기가 어색해지기 전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일곱째 선배. 저한테 방어용 보물이 한 개 더 있는데 이것도 가지고 계세요. 위급할 때 목숨을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예요.”“또 보물을 주다니... 후배한테서 이미 많은 걸 받아서 더는 부담스러워. 이건 네가 잘 간직해라.”서명월이 단칼에 거절했다.“선배. 이 보물은 지금 당장 저한테 필요 없어요. 위험한 상황이 지나면 다시 찾으러 올게요. 선배도 태허산 의술과 담약 제조에 능통하시잖아요. 그러니 이 향로는 선배께 딱 맞는 물건이에요.”이도현이 음양탑에서 붉은빛의 향로를 꺼내며 말했다.“후배... 이 조그만 물건이 바로 네가 말한 그 보물이야?”서명월은 이도현의 손바닥에 있는 자그마한 향로를 유심히 바라보면서 빙그레 웃었다.“선배, 보기엔 작아도 정말 특별한 보물이에요. 한때 제 목숨을 구해준 적도 있어요.”이도현이 향로를 어루만지면서 신기로 향로와 교감했다.‘잠시만 선배에게 빌려드리는 거야. 내가 없는 동안 위험한 일이 생기면 나 대신 선배를 잘 지켜줘.’하지만 향로는 싫다는 듯 빙글빙글 돌며 반기를 들었다. 이도현은 간절히 향로를 달래며 설득해야 했다.‘부탁이야... 내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꼭 도와줘. 선배가 위험에 처할 때만이라도... 제발.’결국 이도현의 애원에 향로가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다.“이 작은 향로가 네 목숨을 구해줬다고? 장난치는 거지?”서명월이 안 믿는다는 말투로 되물었다.서명월뿐만 아니라 윤선아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두 사람은 이도현의 손에 든 향로를 보면서 일반 향로랑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선배들. 이게 전부가 아니에요. 지금 보여드릴게요.”이도현이 원력을 주입하자 향로에서 붉은 불꽃이 치솟았다. 순식간에 향로가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책상만 한 크기로 변했다.향로는 붉은빛을 번쩍이면서 하늘로 끊임없이 불꽃을 뿜어댔고 강렬한 기운이 사방을 에워쌌
“일곱째 선배. 곧 떠나야 하는데 이렇게 가면 둘째 선배와 제가 너무 불안할 것 같아요. 제가 없는 사이에 적들이 찾아와 선배한테 시비를 걸 수 있어요. 이걸로 몸을 보호하는데 보탬이 되세요.”이도현이 진지하게 말하며 품에서 담약들을 꺼냈다.“이 바보 같은 녀석아.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준 공간 반지와 담약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데 이렇게 귀한 걸 또 어떻게 받아.”서명월이 토라진 척했지만, 속은 뭉클했다. 두 번 만난 후배가 자신을 이토록 챙기니 마음이 따뜻했다.‘좋은 물건이 생기면 내 몫도 챙겨주고 위험한 길 떠나기 전에는 목숨을 지킬 물건까지 주다니.’“선배. 저를 남으로 생각하면 섭섭해요. 선배는 저에게 친누나처럼 소중한 분이에요.”이도현은 음양탑에서 구현단과 영모단 열 알씩을 꺼내 일곱째 선배에게 건넸다.“선배, 이건 구현단과 영모단이에요. 충성스러운 고수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면 복용 후 수행 경지가 한 단계 도약할 거예요.”이도현이 또 다른 병을 꺼내며 말을 덧붙였다.“이 담약들은 제가 직접 제련한 거예요. 구현단보다는 약하지만, 경지 돌파에 충분히 도움이 될 거예요. 재능 있는 이들은 한 경지쯤은 거뜬히 뛰어넘을 테니, 백 알을 전부 드릴게요.”이 담약들은 이도현이 직접 제련해낸 거라 얼마든지 더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있는 만큼 먼저 일곱째 선배에게 모두 드렸다.“아니... 후배야... 이렇게 과분한 선물을... 마음은 고맙지만 받기도 거절하기도 어렵구나.”서명월이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쯧쯧, 이 녀석아. 이렇게까지 할 거면 내가 네 아이를 낳아야 마음이 편해지겠는데? 그래. 담약은 받겠다. 하지만... 너무 많이는 바라지 마. 많아봤자 아이 둘만 낳아줄 거야.”선배의 돌직구에 이도현은 얼굴이 단박에 붉어졌다.“일곱... 일곱째 선배. 그건 좀... 그게...”“호호호. 얼굴이 빨개졌네. 왜? 설마 내가 너한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야?”서명월이 장난치자, 이도현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아니
“그래. 모두 네 뜻대로 하자.”윤선아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장 돌아간다고? 안 돼. 둘째 선배와 도현 후배가 이렇게 먼 길을 왔는데 며칠 더 놀다 가야지. 벌써 가지 마.”서명월이 아쉬움을 드러내며 손사래를 쳤다.“명월 후배. 우리가 천사국에서 이토록 난동을 부렸는데 더 이상 이곳에서 지내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겠어? 차라리 우리와 함께 동방으로 돌아가는 게 어때? 네가 혼자 이 먼 곳에 있는 게 항상 마음에 걸렸어. 우리랑 같이 돌아가자. 그래야 우리도 마음이 놓여.”윤선아가 설득에 나섰다.“맞아요, 일곱째 선배. 이런 외딴곳에 계실 게 뭐가 있어요? 같이 돌아가요.”이도현도 거들었다.“안 돼.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태허산을 위한 거점을 세우기 위해서야. 이제 막 기반을 닦았는데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어.”서명월이 단호하게 말했다.“둘째 선배도 알잖아요. 동방과 서방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에요. 그저 천하의 한구석일 뿐이죠. 도현 후배가 강해질수록 우리는 더 넓은 세상을 마주하게 될 거고... 이곳에 거점을 두는 것은 앞으로 우리 태허산에 이득이 될 거예요.”서명월의 눈빛이 갑자기 깊어졌다.“일곱째 선배...”이도현이 더 말하려 하자 서명월이 단호히 그의 말을 막았다.“됐어, 이놈아. 너는 네 길을 가고, 나는 내 사명을 지킬 거야. 사명을 다하면 나도 자연스럽게 떠날 거야. 둘째 선배랑 돌아가야 한다면 조금 있다가 가.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나도 이곳에서 지낸 세월이 있으니 내 앞가림은 할 수 있어.”서명월이 평소답지 않게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네...”이도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이도현은 선배가 얘기한 사명이 뭔지는 모르지만 평소 장난기 가득한 일곱째 선배의 얼굴에서 진지하고 확고한 다짐을 보았다.“됐어, 도현 후배. 더 이상 명월 후배를 난감하게 하지 마.”윤선아가 갑자기 말머리를 돌렸다.‘사명'이라는 말에 그녀의 눈동자에 잠깐의 그림자가 스치더니 더는 서명월을 설득하지 않았다.그녀는 이도현
이도현은 선배들을 제외하면 두려움을 모르는 자였다.그러니 마룡 천왕이나 광명왕 같은 자들이 무슨 수작을 부리든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천사국 땅에서 그들이 감히 덤빈다면 그는 단칼에 죽여버리면 그만이었다.싸움을 건다면 맞서 싸우면 그만이지, 두려울 게 하나도 없었다.이도현이 자신의 물건을 되찾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고 누구에게도 미안할 필요가 없었다.상대를 죽이는 것은 그들이 제 발로 죽음을 자초했기 때문이다.이도현은 이런 일들을 전혀 마음에 담지 않았다.게다가 그는 서양인들이 득실대는 이 땅에 더 머무를 마음이 없었기에 이미 돌아갈 채비를 마친 상태였다.이도현은 광명왕의 성을 나와 황량하게 펼쳐진 산과 들판에 이르자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더니 텅 빈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둘째 선배, 일곱째 선배. 인제 그만 나타나시죠. 제가 성안으로 들어갈 때부터 두 분이 뒤따라오셨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더 숨을 필요가 있나요?”사실 광명왕의 성채 안으로 들어갈 때부터 이도현은 이미 두 선배가 자신의 뒤를 따랐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선배의 체면을 생각해 모르는 척 연기했던 것이었다.이도현이 광명왕의 성채에서 행동을 자제한 것도 선배들 때문이었다. 일을 크게 만들었다가 선배들까지 나서면 그녀들이 위험에 빠질까 봐 걱정되었다.그래서 광명왕의 성채에 있을 때, 이도현은 마구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 참았다.그렇지 않고 그의 성격대로 했으면 광명왕은 아마 이렇게 가벼운 상처만 입는 것이 아니라 마룡 천왕보다 더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을 것이다.“히히히... 결국 네놈한테 들통났구나. 이 못된 놈아, 조금만 더 모르는 척해주지. 굳이 나와 선배를 드러내 체면을 구겨야만 했어?”서명월과 윤선아가 먼 산봉우리에서 모습을 드러내면서 날아내려 왔다. 서명월이 이도현을 바라보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선배들도 참. 제가 따라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다행히 위험한 상황은 없었지만...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제가 선배들을 위험에 빠뜨린 셈이 되잖
“안 됩니다... 천왕 전하,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제발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사람들은 순식간에 경악하며 소리쳤다.광명왕의 한 마디에 그들은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들은 오늘의 지위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광명왕의 단 한마디로 무너져 버렸으니, 누구도 이 결과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왜냐고? 그런 질문을 할 면목이 아직도 남아 있더냐? 무슨 이유인지 너희가 더 잘 알 텐데.”광명왕은 비꼬듯이 말했다.“존귀하신 천왕 전하, 설령 우리에게 잘못이 있다 해도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 너무 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는 지금껏 천왕 전하의 곁을 묵묵히 지켜왔습니다.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이렇게 매정하게 나오시면 안 됩니다...”한 마법사가 분노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그들은 위험한 상황에서 자신의 목숨부터 챙기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죽을 거 뻔히 알면서 무턱대고 달려드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의 정? 하하하. 너희들이 날 위해서 뭘 그렇게 많이 했는데? 내가 매정해? 내가 왜 너희들을 여태까지 곁에 끼고 살았는데? 강적이 나타났을 때 누군가가 나를 위해 앞장서서 방패가 되어주길 바라기 때문이지. 그런데 너희들이 방금 무엇을 했더냐? 뒤로 물러선 것도 모자라 내가 자존심을 내려놓고 적을 돌려보내니까 그제야 나서서 염치없는 빈말이나 하지 않았더냐? 정말 역겨워서 못 들어주겠더라.”“본 왕은 조금 전의 명령을 거두어들일 생각이 없으니까 남고 싶은 사람은 남고 떠나고 싶은 사람은 떠나도 좋다. 나는 더 이상 쓸모없는 자들을 먹여 살릴 생각이 없으니까 떠나고 싶은 사람은 지금 당장 떠나라.”광명왕은 말을 마치고 더 이상 그들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오늘 광명왕은 체면을 완전히 잃었다. 하지만 그는 이 굴욕을 그냥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이도현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 반드시.’그는 다른 천왕들과 손을 잡고 이도현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는 이
“아... 천왕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천사는 충격에 빠진 얼굴로 광명왕을 바라보며 혹시나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었다.‘광명왕이 나를 죽이려 한다니, 그것도 참살하겠다니... 믿을 수가 없어.’천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못 들었나? 다시 한번 말해줄까? 네놈을 참살하겠다고 했다.”광명왕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아… 천왕님…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존귀하신 천왕 전하,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저를 죽이려 하시는 겁니까… 제발…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천사는 그제야 비로소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오늘의 행동이 지나쳤음을 알아차렸다.“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른다고? 네 놈이 본 왕을 얼마나 오랫동안 속이고 기만했는데 어떻게 모른다는 말이 나와? 내가 정말 바보로 보이냐? 너희들이 평소에 나를 속이던 것은 한 눈감아줄 수 있어. 그런데 강적이 나타났는데도 어떻게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아? 그저 자기에게 피해가 갈까 봐 하나같이 머리를 숙이고 나를 앞세우고는 뒤에서 조용히 숨어 있었지.”“본 왕이 자존심을 버리고 이도현을 돌려보내니까 그제야 나서서 너희들이 얼마나 잘났고 용감한지 보여주겠다고? 조금 전에는 왜 나서지 않았어? 이도현이 있을 때는 왜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고 겁에 질려 벌벌 떨기만 했는데, 이제 와서 공을 세운 것처럼 굴고 있느냐?”“끌어내서 참살해라.”광명왕은 격앙된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명령했다.그러자 병사 몇 명이 쏜살같이 달려들어 그 천사의 팔다리를 끌고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천왕님… 존귀하신 천왕 전하, 제발 살려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을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천왕 전하께 충심을 다하겠습니다. 위대하신 전하… 제발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천사는 발버둥 치며 애걸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처참한 비명이 들려왔다. 참살당한 것이 분명했다.
과거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광명왕은 늘 싸우려는 자들을 말리면서 진정시키곤 했다.그래서 사람들은 겉으로만 분노를 표현하며 형식적으로 열의를 보이다가, 광명왕이 달래주면 마지못해 물러나는 척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의 용기와 충성을 동시에 과시할 수 있었고, 광명왕 역시 그들의 충성심과 용기를 칭찬하며 인정해 주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싸우지도 않고 광명왕에게 잘 보이는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이번에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흘러갈 줄 알고 다른 사람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가장 먼저 나서서 전쟁을 청한 것이었다. 또한, 첫 번째로 나서서 눈도장도 찍으려 했다.하지만 그는 광명왕의 태도가 바뀔 줄을 꿈에도 몰랐다. 광명왕이 평소대로 움직이지 않고 뜻밖에도 승낙해버린 것이다.그는 갑작스러운 응답에 당황한 나머지 이미 준비했던 말을 결국 꺼내지 못했다.솔직히 말해서 그는 광명왕이 자신을 말릴 때 어떤 감정으로 어떻게 대답할지까지 다 예상해 놓았다.하지만 광명왕이 갑작스럽게 승낙하자 그는 준비했던 말을 모두 할 수 없게 되었다.한순간 그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저 멍한 얼굴로 광명왕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쩍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광명왕은 그런 부하의 모습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머릿속에 과거의 같은 장면들이 떠올라 기분이 매우 언짢았다.그는 예전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부하들에게 바보처럼 속여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뿐더러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으니 말이다.만약 이번에 이도현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는 계속해서 저들에게 속이며 어리석게 살아갔을 것이다.이전에 충성심과 용기가 있다고 여긴 자들을 지금 다시 보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역겹기 그지없었다.“가라고 했다. 왜 아직도 거기 서 있는 거냐? 본 왕이 허락했으니까 당장 가서 이도현의 머리를 베어라. 어서...”광명왕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존경하는 광명왕 전하. 저는... 저는...”그 천사는 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