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일이 생겨서...”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배건후가 그녀의 턱을 확 잡아당겼다.그는 음침한 눈길로 도아린을 째려봤다.“무슨 일? 도성에 남자 만나러 오는 일? 넌 대체 왜 그렇게 욕구불만이야? 무대에서 꼭 그렇게 끼 부려야겠어? 아예 옷을 다 벗어버리지 왜?”배건후의 비꼬는 말투에 그녀는 너무 굴욕스러워서 안색이 다 창백해졌다. 오해를 당한 서러움과 분노가 여린 마음을 단숨에 짓눌러버렸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배건후에게 쏘아붙였다.“3년이나 굶었는데 당연히 허기지죠. 이제라도 남자를 찾아야지, 안 그러면 무슨 느낌인지조차 까먹게 생겼다고요.”“...”배건후가 손에 힘을 꽉 주었다.“그때 그 느낌으론 만족이 안 돼? 평생 못 잊을 텐데?”“그땐 건후 씨도 약 먹고 나도 술 마셨잖아요. 사실이 증명해주다시피 결혼 뒤엔 단 한 가지도 빠져선 안 돼요.”배건후가 턱을 너무 세게 짓누르다 보니 그녀의 이빨이 살에 긁혀 입안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평생 못 잊죠. 좋았던 추억이 아니라 끔찍했던 기억으로 남을 거예요!”그녀의 도발에 배건후는 분노 게이지가 한 레벨 더 올라갔다.남자는 이마에 실핏줄이 튀어 오르고 이를 꽉 악문 채 그녀에게 쏘아붙였다.“그럼 그 선배한테 도움 청하기 전에 미리 술 좀 마셔야겠네?”배건후는 그녀를 뿌리치고 와인 캐비닛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위기감을 느낀 도아린이 재빨리 일어나 문 앞으로 달려갔지만 문손잡이에 손도 닿기 전에 배건후에게 뒷덜미가 덥석 잡혔다.그는 도아린을 확 잡아당겨서 품에 짓누르고 술잔을 입가에 갖다 댔다.“건후 씨... 켁켁...”배건후는 그녀의 거부를 아예 무시한 채 독한 보드카 한 잔을 억지로 들이부었다. 도아린은 사레에 걸려서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됐고 이 모습을 본 배건후는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도아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다 젖은 티셔츠를 움켜쥐고 기침을 해댔다.한편 배건후는 거만한 자세로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넥타이를 풀어서 소파에 내던지고는 옷 단추를 풀고 완벽한 식스
물론 그 당시 도아린은 더 이상 갈 곳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모든 희망을 배건후에게 거는 건 아니었다. 오늘날의 초라한 몰골에 이르기까지 전부 그녀가 잘난 척하며 자초한 일이다.이 남자에게 잘해주면 서서히 그의 마음을 녹여 내릴 줄 알았는데 모든 게 오산이었다.배건후의 숨결이 더 거칠어졌고 한없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쳐다봤다.촤라락.너덜너덜해진 티셔츠가 휴지통에 버려졌다. 곧이어 배건후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세면대에 앉혔다.도아린은 비틀거리다가 그의 품에 기댔고 배건후의 손은 그녀의 쇄골을 타고 서서히 아래로 흘러내렸다. 이에 그녀는 저도 몰래 몸을 움찔거렸다.“3년 동안 순하고 다정하게 내 의식주를 잘만 책임져주더니,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다고 맹세하더니... 불만 한 마디 없던 애가 육민재가 돌아왔다고 이젠 저 자신이 바보 같아 보이는 거야?”도아린은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현혹돼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은밀한 부위가 터치 당하고 나서야 불현듯 두 눈을 부릅떴다.그랬다. 이건 환각이 아니었고 눈앞의 남자는 바로 배건후였다.그녀는 남자의 손목을 확 잡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다.“배건후, 나 건드리지 마!”배건후는 들끓어 오르는 분노를 줄곧 참다가 그녀의 거절에 끝내 폭발하고 말았다. 그는 도아린의 목을 꽉 잡고 이마를 맞댔다.“그럼 누가 건드리길 바라는데? 육민재? 박규형? 그것도 아니면 너한테 꽃 선물하던 그 선배?!”도아린은 문득 뭔가 생각난 듯 한심하다는 눈길로 배건후를 째려봤다.“건후 씨가 선배 손가락 부러뜨렸어요? 대체 왜?”배건후는 한 손으로 벨트를 풀었다.“네 그 선배 진작 결혼했어. 박규형도 아들이 곧 초등학교 들어가. 넌 내연녀가 그렇게 싫다면서 정작 본인이 그 짓거리를 하고 있네? 참 포부가 큰 여자야, 그치?”도아린은 그를 밀치고 비틀거리며 밖으로 달려나가다가 발이 미끄러져 바닥에 넘어졌다.무릎에서 전해지는 통증에 그녀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잔뜩 꼬인 혀로 뭐라고 얼버무렸다.배건후
배건후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 도아린이 글쎄 바닥에 대자로 뻗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호텔 싫어. 호텔은 싫다고...”“침대 올라가 얼른.”배건후는 거만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이때 도아린이 침대를 짚으며 겨우 일어나더니 그의 바지를 잡아당겼다.“그쪽은 유정이가 보낸 서프라이즈 선물이에요?”서프라이즈?소유정은 그녀에게 술을 사줄 뿐만 아니라 서프라이즈까지 준비해줬다고?!배건후는 기가 차서 말문이 턱 막혔다.“...”그는 도아린의 손등을 탁 내리쳤다.“역시 유정이밖에 없다니까. 내가 키 크고 잘생긴 남자 좋아하는 거 완전 잘 알아. 근데 그쪽은 얼마예요? 너무 비싸면 나 감당 못 하는데?”“...”배건후의 눈 밑에 서늘한 한기가 스쳤다.몇 분 전까지만 해도 열녀 납셨더니 이젠 또 이토록 음탕하게 변해버린다고?“얼마 줄 수 있는데?”배건후의 음침한 목소리에 아찔함이 섞여 있었지만 도아린은 머리가 워낙 어지럽다 보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그녀는 배건후를 붙잡고 겨우 일어서서 발꿈치를 들더니 잘생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생긴 건... 나름... 나름 내 스타일이고, 돈도 좀 있어 보이네.”배건후는 비틀거리는 그녀의 몸을 확 잡고 눈을 가늘게 뜨면서 지그시 바라봤다.한편 도아린은 눈앞의 이 남자가 마치 요술이라도 부리듯 얼굴이 길쭉해졌다가 또 넓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머리를 휘젓다가 손을 번쩍 내밀었다.“40만 원 줄 테니 우리 한 번 해요!”배건후는 입꼬리를 씩 올리고 섬뜩한 눈빛으로 되물었다.“확실하지?”“키 커서 20만 원, 근데 또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그쪽은 40만 원 할게요...”도아린은 그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엉덩이도 탱탱하네. 20만 원 추가! 더는 안 돼요.”배건후는 마음 같아선 그녀를 욕조의 찬물에 확 담가버리고 싶었다. 정신을 차리고도 계속 이렇게 음탕하게 나올 수 있을지 지켜보고 싶었으니까.도아린은 그의 손에서 휴대폰을 꺼내 힘겹게 화면을 터치했다.“카... 카카오페이로 줄게요. 근데.
“건후 씨가 왜 여기 있어요?”그녀의 물음에 배건후가 피식 웃었다.“누가 60만 원 준다면서 나보고 한 번 하자던데?”“...”도아린은 일부러 못 알아들은 척 돌아누우며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냉큼 짓눌러버렸다.“어젠 울면서 잘못을 인정하더니 잠 깨자마자 모른 척 시치미 떼려고?”“무슨 잘못을 인정해요? 내가 뭘 잘못했는데!!”배건후가 목소리를 내리깔았다.“유부녀가 낯선 남자랑 침대에서 뒹구는 게 잘못 아니야?”“단순히 뒹굴었을 뿐 건후 씨 나한테 뭐 한 것도 없잖아요.”도아린은 언짢은 듯 그의 손을 뿌리쳤다.“건후 씨도 유부남이면서 밖에서 실컷 즐기고 다녔잖아요! 왜 이렇게 내로남불이야 진짜.”“너 지금 대체 뭐라는 거야?”배건후는 잔뜩 화나서 미간을 찌푸렸다.도아린도 뒤질세라 그에게 삿대질했다.“나쁜 짓 했으면 했지 뭘 또 발뺌이에요? 건후 씨는 나한테 이런 말 할 자격 없어요!”배건후가 손보미의 신비주의 남친이란 걸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그가 대체 무슨 체면으로 도아린을 질책하는 걸까?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왔는데 시퍼렇게 멍든 무릎 때문에 선뜻 일어서지 못하고 또다시 배건후에게 허리를 휘감겨버렸다.배건후는 이번에 아예 그녀를 몸 아래에 깔아 눕혔다.“건후 씨 계속 발뺌할 거면 나 갈래요!”“으읍!”이때 배건후가 갑자기 그녀의 입술을 꼭 깨물었다.쓰라린 고통에 그녀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그의 등을 두드릴수록 더 세게 깨물더니 끝내 입술을 벌리게 했다.도아린은 거부하지 못한 채 이 남자의 거침없는 키스에 온몸이 나른해졌다.배건후는 그녀의 입술을 탐하다가 귓불로 넘어가더니 나중에는 목을 타고 내려왔다. 그는 마치 드라큘라처럼 그녀의 피를 빨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다.도아린은 끝내 몸부림을 포기했다.“건후 씨 지금 내 말에 정곡을 찔려서 이렇게 화내는 거죠?”순간 배건후가 동작을 멈추고 고개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이때 도아린이 머리를 들며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사모님!”박규형은 덩치 큰 체구로 차 문을 가로막으며 도아린을 간절히 쳐다봤다.“어제는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사모님께 그런 실례를 범하다니. 제발 저 한 번만 용서하시고 대표님께 잘 얘기해주실 수 있나요? 앞으로 더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이때 맞은편에서 또 한 명이 불현듯 나타나더니 박규형과 나란히 서서 그녀를 가로막았다.“저희 아트 캠퍼니에 와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사모님 같은 분을 초대 가수로 모시다니, 제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요! 이런 분을 몰라뵙고 어제는 너무 어리석게 실례를 범했어요. 제가 세상 물정 모르고 너무 설쳐댔습니다. 사모님의 은혜는 평생 간직하고 어제 일도 평생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연예 기획사 매니저도 처참한 몰골로 말을 내뱉으며 스스로 뺨을 내리쳤다.옆에 있던 두 명의 벨보이는 멍하니 넋을 놓았고 그중 한 명이 재빨리 눈치채더니 들어가서 지배인께 알렸다.“건후 씨가 두 사람한테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과받을 마음 전혀 없습니다. 어제 일은 반드시 끝까지 추궁할 거예요.”도아린이 왼쪽으로 걸어가자 두 사람도 곧바로 따라오며 어떻게든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건후 씨 금방 나올 텐데 계속 내 앞길 막으면 뒷감당할 수 있겠어요?”두 사람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그녀는 재빨리 차에 올라탔다.“기사님, 얼른 출발해요!”차가 떠나간 후에야 둘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미친 듯이 쫓아갔다.“사모님, 천사 같은 마음으로 부디 한 번만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제발 우릴 살려달라고요!”“제발요. 사모님 말 한마디면 저희도 금방 풀려날 거예요! 한 번만 도와주세요, 네?”이때 교차로에 갑자기 차 한 대가 뛰쳐나와 두 사람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연예 기획사 매니저는 숨을 헐떡이며 박규형에게 말했다.“대표님, 저년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네요. 이참에 우리 그냥 배 대표님 찾아갈까요?”“멍청한 놈!”박규형은 커다란 나무에 기댄 채 씩씩거리며 대답했다.“배건후가 우릴 만나줬다면 굳이 쟤한테
“네 남동생 죽었어?”“아직, 하지만 별반 차이 없어.”도유준은 종업원을 불러 식당에서 제일 비싼 요리를 주문하고 술도 한 병 더 시켰다.“다들 마음껏 마셔! 이따가 가게에 내려가서 먹고 싶은 디저트 있으면 편하게 가져가고.”“도울 디저트 도련님께서 이미 허락하셨으니 사양하지 않을게.”곧이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녀석들과 등을 대고 앉은 소유정이 몸을 숙이며 말했다.“건방진 자식 같으니라고, 양아들 주제에 가산을 물려받을 생각 하다니?”도아린이 콧방귀를 뀌었다.“저놈이 왜 도 씨인지 알아?”양아들인지 아닌지는 도정국 본인이 제일 잘 알 것이다.식사를 마칠 때쯤 도아린은 주현정의 연락을 받고 먼저 가봐야 한다고 일어났고, 소유정도 입을 닦고는 가려고 했다.도아린은 입만 벙긋거리며 계산하러 간다고 말하고는 테이블 위에 놓인 볼캡을 가리켰다.비록 유명한 편은 아니지만 소유정은 나름 얼굴이 알려진 가수였다. 게다가 아침에 병원에서 나와 안색도 창백하고, 화장도 안 했는지라 조금이라도 가리는 게 나았다.두 여자가 떠난 뒤 도유준과 친구들은 흥이 나서 술을 더 시켰고,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술판을 벌였다.도유준은 잘난 척하려고 일부러 종업원을 불러서 계산했다.종업원이 계산서와 카드 단말기를 건네주자 그는 비밀번호를 눌렀고, 이내 잔액 부족이 떴다.나머지 세 친구는 가정 형편이 썩 좋은 편은 아니라서 매달 생활비가 고작 40만 원에 불과했다. 한 끼 식사에 족히 60만 원이 나왔으니 더치페이하기 싫어서 갖은 핑계를 대고 빠져나갔다.“카드 단말기가 문제 있는 거 아니에요? 아까 신발 샀을 때만 하더라도 잔액이 200만 원 넘었는데?”종업원은 그가 산 신발 따위 관심이 없었고, 다른 카드 단말기로 결제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계단 입구에 숨어서 기웃거리는 친구들을 보자 도유준은 점점 짜증이 났다.어렸을 적부터 출신 때문에 예민하고 의심이 많아진지라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거리기만 하면 마치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놀리는 듯한 환청이
주현정의 병실에 들어선 도아린은 흠칫 놀랐다.그녀는 오늘 컨디션이 좋은 듯 침대에 누워 있지 않고 밝은 색상의 명품 스타일 투피스를 입고 거실에서 친구를 접대했다.“아린아, 이리 와. 소개해줄게.”주현정이 도아린을 향해 손을 뻗으며 미소를 지었다.“이분은 내 절친이자 최고의 여배우인 함예진이야. 여긴 내 며느리 도아린이고.”함예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도아린을 위아래로 훑었고, 의아한 기색이 역력했다.비록 생얼이지만 외모가 출중했고, 몸에 별다른 사치품을 지니지 않았으나 결코 눈길을 사로잡는 아우라를 풍겼다.이런 부류의 사람은 액세서리 따위 안중에 없거나 보석보다 더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지거나 둘 중 하나였다.“이모라고 부르면 돼.”“안녕하세요, 이모.”함예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낀 반지를 빼서 건네주었다.“급하게 오느라 선물도 준비 못 했네. 귀한 건 아니라서 편하게 하고 다녀.”귀한 게 아니라니?영화계 거물은 몇십 억이 넘는 액세서리도 우습게 보는 건가?도아린은 반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3개의 깃털이 뿔 모양을 이룬 반지는 일명 유니콘 링이라고도 불렸다. 당시 함예진이 칸 영화제 레드카펫에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핸드메이드 자수 드레스와 매치한 클래식 아이템이었다.“저한테 너무 과분한 선물이라서 받을 수가 없어요.”“줄 때 가져.”주현정이 반지를 건네받아 도아린의 손에 끼워주었다.“워낙 공사다망한 사람이라 특별 게스트로 출연해달라고 하는 작품만 아니었다면 연성에 오지도 않았을 거야.”백옥처럼 하얀 피부에 오색찬란한 반지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이모랑 같이 밥 먹으러 가자.”식사 자리에서 도아린은 함예진이 연성을 찾은 진짜 목적에 대해 전해 들었다. 바로 이번 송민혁 감독의 새 작품에서 유능한 왕후 역할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녀는 정상급에 속했지만 조연이라고 해서 출연 제의를 거절하지 않았고, 캐릭터의 매력을 우선순위로 두고 대본을 선택했다.“아린아, 가서 이모랑 내가 마실 주스
함예진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아무렇지 않게 젓가락으로 주현정의 접시에 반찬을 덜어주는 도아린을 바라보았다.“어머님, 생선 드세요. 이 부분은 가시가 없거든요. 이모도 많이 드세요.”“역시 날 챙겨주는 건 며느리뿐이네.”함예진도 웃으면서 접시를 건넸다.“고마워.”아무도 입구에 있는 손보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자 그녀는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서더니 다시 배건후의 이름을 불렀다.배건후는 무표정한 얼굴로 도아린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외식하면 가장 먼저 냅킨을 깔고 필요 없는 식기를 치워주곤 했는데 오늘은 마치 공기 취급했다.머릿속으로 어젯밤 그녀의 행세를 되뇌며 오늘 아침 결판을 내기도 전에 잽싸게 도망친 일이 떠올라 속에서 열불이 나는 것 같았다.“이리 와서 앉아.”배건후가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당기자 손보미는 활짝 웃으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안녕하세요, 어머님, 선생님. 아린 씨, 오랜만이야.”진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나긋한 말투로 인사하는 여자의 모습은 아까와 사뭇 달랐다.“방금 화장실에서 보지 않았나?”도아린은 반찬을 한 입 집어 먹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손보미의 안색이 돌변하더니 표정이 어찌나 억울한지 금세 눈물이라도 흘릴 듯싶었다.함예진은 온갖 대상을 휩쓴 배우답게 진심인지 연기인지 한눈에 간파했다.이내 배건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소개 안 해줘?”“저는 손보미라고 하고, 이번 송민혁 감독님의 새 작품에서 ‘예원’ 역을 맡았어요. 왕후 역할이 다름 아닌 함예진 선생님이라고 들었는데 이번 기회에 연기를 제대로 배우고 싶어서 건후 씨한테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죠.”손보미는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섰다.함예진은 못 들은 척 배건후만 쳐다보았다.이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손보미라고 합니다.”“아, 연예인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경미한 교통사고에도 구급차를 부르는 바람에 결국 임산부를 유산하게 한 그 무명 배우?”생글생글 웃는 얼굴과 달리 인정사정없는 말을 내뱉을 줄이야.손보미의 얼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