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후의 눈동자는 차갑고도 어두웠다. 막강한 매력을 가진 눈동자였다. 그의 눈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끝없는 심연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그렇게 그림을 그리고 있던 찰나, 빙하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나를 그린 거야?”온다연은 화들짝 놀라며 종이를 구겨서 뒤로 숨겼다. 그리고 곧 뒤에 서 있던 사람이 유강후라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푹 숙였다. 마치 잘못을 저지른 초등학생처럼 말이다.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당황한 듯 말했다.“왜 출근 안 했어요...?”유강후는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힐끗 쳐다봤다. 그리고 바닥에서 뭉개진 종이를 주워 펼쳐 보았다. 눈빛이 서서히 부드러워졌다.“잘 그렸네. 나보다 더 잘생겼어.”온다연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그를 바라보지 못했다. 그래도 두 달간 유강후가 직접 돌봐 준 덕분에 전처럼 무서워하지는 않았다.잠시 침묵에 잠겼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삼촌이 더 잘생겼어요.”이건 진심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유강후의 외모가 뛰어난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그는 수많은 사람을 홀릴 수 있는 매력의 소유자였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까이하고 싶어지는 그런 잘생김이었다.반대로 유강후는 외모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그래도 온다연의 말을 들으니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그녀를 품에 안더니,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천천히 쓰다듬었다.“오늘 점심 많이 안 먹었다며? 생선죽이 별로였어?”온다연의 식습관은 두 달 동안 점차 드러났다. 그녀는 가리는 음식이 꽤 많은 편이었다.예를 들어, 줄기보다는 잎이 많은 채소를 좋아하고, 표면이 거친 과일보다는 매끄럽고 예쁜 과일을 더 좋아했다. 고기는 잘 먹지 않았고, 특히 붉은 고기는 더더욱 먹지 않았다. 고기의 색깔이 진하면 아예 손도 대지 않았다.그녀의 식성은 음식의 모양에 따라 결정되었다. 하지만 크게 앓고 나면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야 하는 법이다. 고기를 먹지 않으면 회
거의 두 달 동안 정성껏 돌본 결과 온다연의 상태는 드디어 호전되었다. 홀쭉했던 얼굴에도 살이 붙었고, 입술 색은 예전처럼 돌아가서 부드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 모습이 유강후에게 얼마나 유혹적이었는지 모른다.온다연은 그의 손길에 부쩍 익숙해졌다.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차라리 따르기로 한 모양이다. 그녀는 부드럽고 하얀 손을 한데 모으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저 이제 먹고 싶은 거 막 먹어도 돼요?”유강후는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한참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의 상태에 만족한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가끔은 먹어도 돼. 근데 기본적으로는 영양사의 식단을 따라.”“네...”온다연은 약간 실망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습관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반짝이는 입술은 약간의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유강후는 그녀의 입술에 시선을 멈췄다. 그리고 점점 어두워지는 눈빛으로 그녀를 안아 들고 방 안에 들어갔다.침대에 닿기도 전에 그는 고개를 숙여 온다연의 입술을 물고 반복적으로 문질렀다. 곧 그의 손이 옷속으로 들어갔고, 온다연은 반사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그녀는 도망치거나 강하게 반항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자발적으로 맞춰주는 것도 불가능했다. 유강후의 기세는 무서울 정도로 강압적이었다. 온다연은 그를 따르는 것 외의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의 손은 부드러운 피부를 타고 천천히 올라갔다.흉터가 남은 부위를 지나면서 그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는 흉터의 윤곽을 천천히 매만졌다. 온다연은 몸을 굳히며 그의 손을 잡았다.“그만해요. 보기 흉하잖아요.”유강후는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흉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전혀 흉하지 않아. 나중에 하나도 안 보이게 지워줄게.”말을 마친 그는 다시 입술을 맞췄다. 온다연은 머리를 젖힌 채 그저 견뎌내야 했다. 그의 손은 점점 더 위로 올라가더니 그녀의 가슴을 감싸려고 했다
온다연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몸을 일으킨 유강후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조금 전의 기세는 사라졌고 평소의 차가운 눈빛이 다시 돌아왔다.“서쪽 교외에 온천 호텔이 생겼대. 이따가 출발해서 갈 거야.”침대에 엎드린 자세로 있던 온다연은 그를 쳐다보지 못했다. 그녀의 시야에는 그저 그의 정장 바지만 보였다. 한 번 스쳐본 것만으로도 조금 전의 열기가 떠올라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유강후는 그녀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귀 끝이 붉어진 것을 보고는 부드러운 표정이 잠시 스쳤다.“지금 갈까?”온다연의 몸은 약간 뜨거워졌다.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부끄러운 생각을 들킬까 봐서 말이다.그녀는 그의 셔츠를 꼭 잡고 차까지 안겨 갔다. 두 대의 벤틀리가 앞뒤로 천천히 병원을 빠져나와 차로 가득한 도로에 합류해서 평온하게 달렸다.온다연은 창밖의 번화한 도시를 묵묵히 바라봤다. 너무 오랜만에 나와서 그런지 빌딩만 봐도 새롭게 느껴졌다.가장 번화한 거리에 들어섰을 때, 앞자리에 있던 이권이 말했다.“앞에 있는 건물이 바로 미래 그룹 본사예요. 대단하죠?”창문을 통해 온다연은 커다란 빌딩들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적어도 20개 이상의 건물이 있었고, 가장 앞에 있는 건물이 제일 웅장했다. 그 건물의 위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미래 그룹’ 네 글자가 반짝이고 있었다.미래 그룹의 건물은 파란색을 기본으로 사용했다. 원래는 무겁고 답답한 느낌을 주는 색깔이 대규모로 연결된 모습은 너무나도 웅장해서 존경심이 생겨날 정도였다.온다연은 한동안 넋을 잃었다. 왠지 모르게 이 건물들이 유강후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을 쉴 수 없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었다.이때 이권이 약간 자랑스러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엄청 크죠? 미래 그룹은 대륙 최고 수준의 대기업이에요. 하지만 도련님에게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에요. 여러 나라에 대기업을 소유하고 있으니까요.”이권 말이 많다고 생각한 듯, 유강후는 미간
유강후는 이를 악문 채 그 네 글자를 묵묵히 바라봤다. 예리한 눈빛은 당장이라도 공기를 얼릴 것 같았다.온다연의 공포를 느낀 듯 그는 힘껏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약간 아플 정도였지만 그는 신경 쓸 겨를 없이 말했다.“가까이 와서 앉아.”온다연은 머리를 숙였다. 목소리는 겁에 질린 듯 덜덜 떨렸다.“더 빨리 가면 안 돼요? 저 약간 힘들어요.”이권이 엑셀을 밟고 무한테크의 건물은 금방 뒤로 사라졌다. 짧은 몇십 초 사이에 온다연의 손은 식은땀으로 흥건해졌다.유강후는 그녀를 끌어당겨 자기 몸에 기대도록 했다. 시원한 나무향이 안겨 오자 그녀는 진정이 되는 듯 눈을 감았다.잠시 후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유강후가 입을 열었다.“며칠만 참아. 내가 다 해결해 줄게.”목소리는 한결같이 차가웠다. 그의 말뜻도 온다연이 알기에는 어려웠다.하지만 이권은 알았다. 최근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을 떠올리며 그는 묵묵히 감탄했다.차는 금방 온천 호텔 앞에 멈춰 섰다. 커다란 호텔은 고풍스러운 스타일로 인테리어 했다. 주변에는 자그마한 대나무숲과 호수도 있었는데, 고즈넉하니 힐링 하기 딱 좋아 보였다.차가 멈춰 서기 바쁘게 호텔 직원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오셨습니까, 도련님. 룸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사용하시기 편하게 따듯한 온천과 간식 세트도 준비해 놓았습니다. 따로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유강후가 대답하기도 전에 직원이 또 말을 이었다.“이 마당은 도련님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다른 사람은 사용한 적 없으니 편하게 지내세요. 그리고 주방에 셰프도 대기하고 있어서 만족스럽지 않은 점이 있으면 저한테 말씀하시면 됩니다.”유강후는 머리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말했다.“수고했어요.”“아닙니다! 도련님이 와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말을 마친 직원은 그들의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유강후는 주변을 잠깐 둘러보다가 온다연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거실의 TV는 켜져 있었다. 화면에는 오늘의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무한테크가 사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전 대문 앞에서 마중해 줬던 직원이 직접 음식을 가져왔다. 그의 뒤에는 겁먹은 표정의 셰프가 있었다.직원은 음식을 하나하나 식탁에 배치했다. 그리고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도련님, 이건 주방에서 직접 한 음식입니다. 입에 맞는지 확인해 보세요. 만족스럽지 못한 곳이 있으면 셰프한테 말하면 됩니다.”말을 마친 그는 뒤로 물러나서 셰프의 귀에 대고 무언가 전달했다.식탁 위의 음식은 아주 평범한 가정식이었다. 놀랍게도 유강후가 지내던 곳에서 먹은 것과 똑같았다. 유일한 다른 점이라고는 보기만 해도 화려한 생선찜이었다.다른 음식도 정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음식을 담은 흰색 도자기 그릇은 옆에 조각 장식도 되어 있었다.닭고기와 감자는 집사가 요리한 것보다 더 부드럽게 조리되었다. 맛은 약간 싱거웠지만 오랜 시간 죽만 먹었던 온다연에게는 천상의 맛이었다.급하게 먹은 온다연의 이마에는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유강후는 그녀가 감자만 먹는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감자를 옆으로 밀어내고 가시를 바른 생선찜을 그릇에 담아주며 말했다.“이걸 먹어.”온다연은 눈썹을 찌푸리더니 앞쪽 바 테이블에 놓인 음료를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음료는 마셔도 돼요?”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온다연이 눈을 반짝였다.“그럼 시원한 오렌지 주스 마실래요.”“안 돼! 너 아직 차가운 거 금지야.”유강후가 단호하게 말했다.온다연의 눈빛이 금세 어두워졌다. 그녀는 더 이상 말없이 앞에 있는 팥죽이나 홀짝거렸다. 곧 미지근한 오렌지 주스가 나왔지만, 그녀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손도 대지 않았다.유강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한 남자가 웃으며 다가왔다.“도련님.”그 남자는 잘생긴 얼굴에 수트를 입고 금테 안경을 썼다. 굉장히 점잖고 신사적인 모습이었다.그는 자연스럽게 온다연의 맞은편에 앉았다.“여기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돌아온 지 꽤 되었다고 들었는데 왜 연락 한 통 없었
온다연은 그것을 힐끗 보기만 했는데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안 그래도 좁은 공간에 유강후와 함께 있는 것이 떨렸는데, 온천의 열기 때문에 더욱 화끈거렸다.그녀는 몰래 유강후를 바라봤다. 유강후는 커튼을 단단히 쳐놓고 환풍기를 켰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는 한 발짝 한 발짝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유강후가 한 발짝 옮길 때마다 그녀는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두 손은 등 뒤로 돌려서 긴장되는 듯 꼼지락댔다.온천 안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녀도 당연히 알았다. 하지만 경험이 없었던 그녀는 옷을 벗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기절할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금방 그녀의 앞에 도착했다. 시선은 그녀의 발그레한 얼굴, 촉촉한 눈동자, 그리고 탐스러운 입술에 스쳤다. 유난히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린 그는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더워?”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내리깐 채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기만 했다.유강후는 손에 힘을 주면서 그녀가 억지로 입을 벌리게 했다. 입속의 핑크색이 시선에 들어오자 목소리는 더욱 잠겼다.“다연아, 너 나랑 키스하고 싶어?”깜짝 놀란 온다연은 황급히 머리를 흔들었다. 유강후는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그러면 자꾸 입술 깨물지 마. 유혹하는 것처럼 보이니까.”이 말에 화들짝 놀란 온다연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피가 떨어질 것처럼 빨갰다. 그녀는 말을 얼버무리며 겨우 소리를 냈다.“아, 아니에요...”유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계속 다그쳐 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았던 것이다.“단추 풀어줘.”거역할 수 없는 명령의 어조였다. 두 개월 전에 했던 말이 다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온다연은 또다시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어설프게 반항하지 않았다. 반항을 해봤자 소용없기 때문이다.그녀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셔츠 단추를 풀어 내렸다. 다행히 지난번보다는 훨씬 능숙하게 단추를 풀 수 있었다.하나... 둘... 셋...온다연의 얼굴은 단추를 풀
벨트 위에 있던 금속이 온다연의 피부에 닿았을 때 몸이 저도 모르게 흠칫 떨려왔다. 금속은 분명 아주 차가웠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뜨거워지며 두려움이 느껴졌다.손은 남자에게 잡혀 억지로 벨트에 가져다 댄 상태였다.달칵! 벨트가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너무도 가까이 있었던지라 온다연은 놀라게 되었고 손은 끊임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고개를 들어 애원하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전, 전 못해요...”여기서 그만하고 싶었다.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잔혹했다.“이번엔 지퍼를 내려봐.”순간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숨 쉬는 법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까만 눈동자는 점점 더 커지고 목소리마저 떨려왔다.“싫...”유강후는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쌀쌀한 목소리로 말했다.“네 남자인데 잘 모셔야하지 않겠어? 이건 네가 언젠가 해야하는 일이야. 미리 배워서 나쁠 것 없지.”온다연은 눈물이 날것 같았다.“싫, 싫어요...”유강후는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나한테 울면서 빌어도 소용없어. 절대 봐줄 생각 없으니까.”“지금, 당장 내려.”온다연은 세차게 머리를 저었다.“싫어요!”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한없이 차가워졌다.“그래, 그럼 이 과정은 뛰어넘고 더 중요한 걸 하지.”말을 마친 뒤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 당겼다.옷 안에 있던 물건은 이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고 엄청난 크기에 온다연의 안색이 창백해져 울먹거렸다.“안 돼요, 싫어요. 지퍼, 지퍼 내릴 게요...”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숨을 크게 몇번 들이쉬더니 이내 다시 평정심을 되찾았다.온다연은 하얗게 질린 채 눈을 감고 덜덜 떨려오는 손으로 지퍼를 잡았다.아주 간단한 일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지옥처럼 느껴졌다.다행히 지퍼를 내린 뒤 유강후는 더는 그녀를 힘들게 하지 않았다. 손을 들어 그녀의 뒤에 있던 침대를 가리켰다.“쇼핑백
탈의실에서 한참 우물쭈물하던 그녀는 결국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두 눈을 감고 비키니로 갈아입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으로 온천탕에 들어갈 수 없지 않은가. 비키니로 갈아입은 뒤 벗어놓은 옷을 들어 앞을 가리면서 느릿느릿 나왔다.나가자마자 유강후가 보였다. 그는 이미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다.상반신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고 튼튼하고 뚜렷한 상체 근육이 전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목부터 복부까지 근육이 선명하게 드러났고 시선을 조금만 아래로 내리면 허리춤에 걸려있는 수건 한 장이 보였다.옷을 벗은 뒤의 모습과 옷을 입은 그의 모습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옷을 입었을 때는 갸름하고 어딘가 도도하면서 지적으로 보였고 꼭 아무런 욕망도 없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옷을 벗은 뒤의 그의 모습은 완전히 정반대였다.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와 눈빛마저 차가워 꼭 살아있는 염라대왕 같았다.온다연은 그를 똑바로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옷으로 앞을 꽉 가리며 느릿느릿 온천탕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녀의 피부는 아주 하얬고 우유처럼 윤기가 돌았다.설령 옷으로 가리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가리지 못한 부분이 있었고 하얗고 가느다란 팔과 윤기 도는 그녀의 다리가 그대로 드러나 보는 사람마저 깨물고 싶다는 충동이 들게 했다.유강후의 눈빛은 점점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녀가 온천탕으로 조심스럽게 걸어와 발을 내밀어 온도를 확인하고 다시 거두어들이는 모습까지 전부 지켜보았다.그리고 이내 고개를 들어 그를 힐끗 보았다.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지 바로 두 볼이 붉어졌고 옷으로 가슴을 가린 채 우왕좌왕 움직였다.유강후가 자신을 향해 올 거로 생각하고 있을 때 그녀의 예상과 달리 그는 혼자 온천탕으로 들어갔다.그는 편한 자리를 찾아 기대어 앉은 뒤 눈을 감았다.순간 마음이 놓인 그녀는 천천히 온천탕으로 들어갔다.물은 조금 뜨거웠다. 하지만 이런 천연 온천에 들어가면 정말로 편안하고 나른했다. 공기 중에는 은은한 유황 냄새가 났다
유강후는 밀어내고 싶었지만 나은별을 중심을 잡지 못하는 듯 계속 비틀거렸다.밀어내려고 할수록 나은별은 그의 옷을 한사코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온다연의 눈에 비친 이 장면은 마치 서로에게 감정이 남아있는 연인 같았다.순간 어려서부터 각별한 사이로 자라온 소꿉친구 사이에 제3자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고 생각했다.나은별의 말대로 유강후는 어쩌면 일시적인 감정 때문에 지금처럼 행동하는 걸 수도 있다.온다연은 주먹을 불끈 쥐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내가 때렸어요. 왜요? 가슴 아파요?”그 말에 화가 난 유강후는 목소리마저 가라앉았다.“온다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온다연은 싸늘하게 웃었다.“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당사자가 제일 잘 알겠죠.”이때 반지를 수정하려고 자리를 잠깐 비운 직원이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수정된 반지와 함께 걸어왔다.“다연 씨, 요청하신 대로 수정이 완료되었습니다.”온다연은 번쩍 돌리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이제 필요 없으니까 환불해 줘요.”유강후는 화가 치밀어 몸을 떨었다.“그러기만 해봐.”온다연은 시선은 여전히 그의 팔에 기대어있는 나은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두 사람 결혼해요. 아주 천생연분이네.”그 말을 한 뒤 직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환불해 줘요. 이제 필요 없어졌거든요.”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 직원은 정석대로 안내했다.“죄송합니다. 이니셜이 새겨진 특별 제작한 반지라 환불이 불가합니다.”화를 주체할 수 없었던 온다연은 앞으로 걸어가더니 반지를 집고 땅바닥에 내던졌다.“그럼 버릴게요.”단단한 반지가 바닥에 닿자 몇 미터 높이로 튕겨 나갔다가 다시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유강후는 자신이 더없이 아끼고 사랑하는 물건이 버려지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몸을 떨었다.그는 단호하게 말했다.“온다연, 당장 주워.”온다연은 차가운 표정으로 힐끗 보고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분노로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된 유강후는 단번에 나은별을 밀어내고 앞으로 걸어갔다
온다연의 눈에 비친 살기는 두피를 저리게 했고, 손에 칼이 있었다면 주저 없이 나은별을 찔렀을 것이라고 모두가 확신했다.사람들은 온다연처럼 몸집이 작은 여자가 어디서 폭발적인 힘이 나왔는지 몰랐고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큰 악의를 품고 있는데 이해되지 않았다.조아영은 체면을 잃었다는 생각에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온다연을 때릴 기세였다.“미친X. 남의 남자 친구를 뺏은 주제에 뭐가 그렇게 당당해서 사람을 때려?”“하여튼 가정 교육을 못 받으면 이렇다니까. 세컨드인 걸 아무리 즐겨도 그렇지 어떻게 당사자 여자 친구를 떄려?”“내가 오늘 너 죽여버릴 거야.”그러나 조아영의 손이 온다연에 닿기도 전에 손목이 잡혔다.우드득하는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조아영은 반대편 벽에 내동댕이쳐졌다.불과 몇 초안에 일어난 일에 다들 눈을 의심하여 그대로 얼어붙었다.그들 사이에 무슨 갈등이 있는지 주위 사람들은 몰랐으나 눈앞의 이 훤칠한 남자가 마치 조아영을 잡아먹으려는 것처럼 살벌하다는 건 단번에 알 수 있었다.누군가 핸드폰을 꺼내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유강후는 온다연을 끌어당겨 몸 곳곳을 확인했다.다친 곳이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버럭했다.“왜 가만히 있어. 다른 사람이 때리려고 하면 소리라도 질러야지.”이때 옆에 있던 조아영이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눈 잘못됐어요? 저 여자가 은별이를 때렸다고요. 은별이가 어떻게 맞았는지 두 눈 뜨고 똑바로 봐봐요.”유강후는 그제야 바닥에 앉아 있는 나은별이 눈에 들어왔다.평소의 매력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이고 머리는 정신 나간 여자처럼 헝클어져 있었다.유강후는 온다연이 누군가를 때렸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우리 다연이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야.”이때 옆에 있던 직원이 용기 내 입을 열었다.“대표님, 저희가 봤습니다. 이 여성분이 먼저 손을 쓴 게...”“닥쳐.”유강후는 버럭 호통을 쳤다.“내가 말하라고 했어?
온다연은 망설임 없이 여자의 손목을 덥석 잡고 뒤로 힘껏 밀쳤다.힐을 신은 여자는 두어 걸음 뒷걸음질 치더니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온다연은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봤다.“누구신데 남 일에 참견하는 거죠? 경고하는데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예요. 안 그러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겁니다.”넘어질 뻔하던 일행을 나은별이 부축했다.여자는 나약해 보이는 온다연이 감히 밀쳐낼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듯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그럼에도 분을 이기지 못하고 또 달려들어 온다연을 치려고 했다.이때 나은별이 팔을 붙잡았다.“조아영, 그만해. 때릴 가치조차 없는 사람이야.”나은별은 온다연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었다.“내가 화내면서 뺨 한 대 치길 바랐던 건 아니죠? 솔직히 그 모습을 강후 씨가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잖아요. 내가 유하령처럼 멍청해 보여요?”“온다연, 내가 너처럼 천한 여자를 한두 번 본 것 같아? 매달려도 소용없으니까 포기해. 유씨 가문이랑 강씨 가문에서 두 사람의 결혼을 응원할까? 너처럼 가진 것 하나없는 인간이 무슨 자격으로 강후 씨랑 만나.”“유하령이 말해줬으니까 순진한 척 그만해. 너 복수하려고 강후 씨를 만나는 거잖아. 엄청 친한 친구가 있었다며? 널 구하려고 다른 사람 손에 죽었다던데 맞아? 죽기 전에 영상까지 찍혔다며? 아참, 유하령이 그 영상을 나한테 보내줬어.”온다연은 고개를 번쩍 들어 죽일 듯이 나은별을 노려봤다.나은별은 대수롭지 않은 듯 피식 웃고선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그 남자애가 너한테 소중한 존재라고 들었어. 죽은 사람의 마지막 체면을 지켜주고 싶으면 좋은 말로 할 때 강후 씨 곁에서 떨어져. 안 그러면 내가 그 영상 인터넷에 확 뿌려버릴 거야. 죽어서도 고통스럽게...”짝.온다연은 나은별의 따귀를 세게 한 대 갈겼다.눈빛에는 독기가 가득했고 당장이라도 죽여버릴 듯 살벌했다.“유하령이랑 똑같은 인간인 줄은 몰랐네요. 당신 같은 인간은 살 자격도 없어요.”나은별은 그대로 얼어붙었다.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나은별은 이권을 여러 번 찾아가 유강후가 왜 만나주지 않느냐고 물었다.이권도 처음에는 예의 바르게 대했지만 찾는 횟수가 많아짐에 따라 저도 모르게 피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더는 참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이실직고하게 되었고 온다연이 싫어해서 만나지 않는다고 얘기했다.그 후로는 나은별의 전화를 아예 받지 않았다.나씨 가문과 유씨 가문의 혼담이 취소된 걸 누가 소문냈는지 유강후에게 아기가 생겼고 그 상대가 나씨 가문의 아가씨가 아니라는 것까지 모든 사람이 알게 되었다.그 이후로 나은별과 나씨 가문은 경원의 가장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온갖 조롱과 유언비어가 난무했고 유강후와 결혼하는 건 나씨 가문의 일방적인 바람이었을 뿐 유강후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은별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렸다.소문이 퍼지는 가운데 나씨 가문의 투자자들은 하나둘씩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고 회사는 지금 매우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가장 역겨운 점은 예전에 빌붙으려고 양손 가득 선물 챙겨서 찾아오던 사람들이 갑자기 증발이라도 한 듯 문전성시를 이루던 나씨 가문은 하루아침에 적막해졌다.배은망덕한 사람들의 행동에 화가 치밀어 오른 나씨 가문 어르신은 명절날에도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나은별은 이런 상황이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을 알고 있다.사람들이 추측하며 수군거릴 때 아무런 대처 없이 묵인한 유강후가 그 원인의 중심이다.그동안 나씨 가문을 통해 미래 그룹에 빌붙으려던 사람들까지 발걸음을 멈췄다.나은별은 그런 사람들을 미워하는 건 아니다.이익을 추구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다. 하늘에서 땅이 아닌 지옥으로 떨어지는 케이스를 수없이 많이 봐왔기에 이런 우여곡절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이익 때문에 등을 돌린 인간이 아닌 사건의 원흉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나은별은 온다연이 유강후에게 빌붙어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초라한 자신에 비해 전보다 안색도 좋아지고 예쁜 얼굴마저 더 정교해진 온다연이 몹시 눈에 거슬렸다.게다가 입고 있는 옷의 패턴
온다연은 순순히 그의 품에 안겨 몰래 눈물을 닦았다.“보석상에서 가지러 가도 된다고 연락왔는데 아직 안 갔어요. 결혼식 며칠 전에 가려고요.”그 말을 들은 유강후는 설레는 마음에 심장이 뛰었다.“지금 가지러 가자. 어떤 건지 너무 보고 싶어.”옷 갈아입을 때 유강후는 특별히 가장 마음에 드는 슈트를 입었다.그러고는 온다연에게 넥타이를 골라달라고 부탁했다.온다연은 너무도 많은 넥타이에 흠칫하다가 다시 신중하게 골랐다.유강후는 캐비닛 앞에 서서 열심히 넥타이를 고르는 온다연이 귀여운지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온다연이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을 때 유강후는 이런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외출 준비할 때 아내인 온다연이 옷과 넥타이를 골라주며 신경 써주는 이 상황을 수년동안 기다렸다.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상상이 현실로 되었고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온다연은 매우 열심히 넥타이를 골라주고 있다.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당장이라도 침대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어젯밤 너무 무리한 탓에 차마 그러지 못했다.유강후는 뒤에서 온다연을 끌어안고선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골랐어?”온다연은 회색 넥타이를 꺼냈다.“오늘 입은 옷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예뻐요.”유강후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예쁜 건 딱히 중요하지 않아. 다연이가 좋아하면 그게 뭐든 나도 좋아.”온다연은 얼굴이 발그레해졌다.“아저씨, 그만해요.”빨갛게 달아오른 온다연의 귀를 본 유강후는 더 이상 참지 못했고 그녀의 머리를 잡고선 한참이나 키스를 한 후에야 놓아주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보석상에 도착했다.임정아는 안목이 좋을 뿐만 아니라 여러 주얼리 브랜드의 모델이기도 하다. 온다연은 가성비가 좋고 흔치 않은 남성용 반지를 골랐다.온다연이 집 사려고 모아둔 금액이었으니 싼값은 아니었다.하지만 유강후가 마음에 안 들어 할 수 도 있으니 긴장된 마음을 늦추지 못했다. 어쨌든 지금 입고 있는 옷과 시계에 비하면 훨씬 싼 값이니까.그런데 의외로 유강후는 매우 좋
온다연의 기분을 단번에 알아차린 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상자 중 하나를 가져와 안에 들어있는 반지를 꺼냈다.“다른 건 싫으면 안 가져도 돼. 그래도 이건 껴야지.”유강후의 손에 있는 것과 비슷해 보이는 아주 평범한 은반지였다.온다연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거두었다.“지금은 끼고 싶지 않아요.”거부하는 그녀의 모습에 유강후는 불안함이 밀려왔다.“왜? 나랑 결혼하는 게 싫어?”온다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비싼 물건이에요. 난 제대로 된 반지 하나도 살 수 없는데... 아저씨한테 너무 불공평하잖아요.”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강후는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선 진지하게 말했다.“다연이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이렇게 준비할 수밖에 없었어. 많이 부족한데 이해해 줄 거지?”온다연이 답했다.“저도 반지를 준비했는데... 아저씨가 준비한 거에 비하면 너무 초라해요.”유강후의 눈빛이 반짝였다.“날 위해서 반지를 준비했다고?”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에 주문했어요. 하지만 엄청 싼 거여서...”보름전, 온다연은 임정아에게 부탁해 남자 반지를 하나 주문했다.온다연이 감당할 수 있는 가격 중에서 가장 비쌌지만 유강후가 오늘 준비한 보석들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질 금액이었다.결혼하게 되면 이런 선물이 오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유강후가 이렇게 많이 준비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한 세트당 수십억에 버금갔으니 그저 막막했다.막말로 온다연이 집 한 채를 팔아도 보석 한 세트조차 살 수 없었으니 얼마나 비참한 현실인가.유강후는 온다연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이건 예물이 아니라 다연이의 재산이야.”“결혼식 날 다연이는 영운산의 별장에서 출발할 거야. 그때 이 혼수들을 들고 나한테 시집오는 거지.”“영운산에 있는 별장이랑 경원에 있는 모든 부동산, 그리고 우리가 예전에 묵었던 온천 호텔까지 전
유강후는 돌아보며 사랑스럽게 온다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내가 한가한 줄 알아? 설마 내가 만든 음식을 아무나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오늘 아침과 점심만 해도 중요한 미팅이 여러 개 있는데 온다연을 위해 전부 저녁으로 미뤘다.미래 그룹도 규모가 크지만 수중에는 다른 투자 건들도 많았기에 하루 스케줄이 꽉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최근 들어 온다연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거의 모든 미팅을 저녁으로 옮기기 일쑤였다. 사실 온다연에게 고기를 먹이려고 준비한 시간에 미팅했다면 적어도 두 개는 끝냈을 것이다. 이렇게 바쁜 유강후가 다른 사람에게 요리를 해줄 만큼 에너지와 시간이 있을까?온다연은 이런 줄도 모르고 그저 조그마한 얼굴을 그의 품에 파묻으며 말했다.“아무튼 다른 사람한테 해주면 화낼 거예요. 그것도 엄청. 절대 안 풀릴걸요?”유강후는 일부러 놀렸다.“다연이가 화낼 때는 어떤 표정인지 궁금하네? 음... 아니면 다른 사람한테 한번 요리해 줘 볼까?”온다연은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고선 몸을 휙 돌리고 떠났다.“어디가? 남은 고기 먹고 가야지.”화가 난 온다연은 씩씩거리며 말했다.“안 먹어요. 다른 사람 줘요.”유강후는 그 모습마저 귀여운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심술쟁이네. 참 다루기 힘든 성격이야.”“장난이니까 얼른 와서 먹어. 난 이따가 다른 일정 때문에 나가봐야 돼.”점심 식사 후, 사람들이 우르르 찾아왔는데 저마다 아름답게 포장된 선물 상자를 들고 왔고 그 바람에 서재는 선물들로 꽉 찼다.장화연도 다락방에서 유난히 화려해 보이는 상자들을 꺼내왔다.거의 대부분이 보석인데 그것도 최상급이라 큼직한 서재는 순식간에 보석 전시장이 되었다.유강후는 사람을 시켜 방금 배달된 선물 상자들을 모두 열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엄마가 다연이 주려고 준비한 선물인데 마음에 들어?”온다연은 보석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우아한 컬러와 디자인만 봐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시중에서
온다연이 어떤 삶을 보냈는지 알게 된 유강후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착잡한 기분이 들었고 마음이 쓰라렸다.하여 아예 그릴을 사게 되었고 직접 가장 신선한 소고기를 골라 양념에 재워놓았다.깻잎마저도 유강후가 세심하게 고른 후 한 장 한 장 정성스레 씻었다.이제 막 굽기 시작했는데 온다연이 그 향기를 맡고 내려온 것이다.고기를 바라보는 온다연의 눈빛을 보면서 유강후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신했다.유강후는 온다연의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 주며 말했다.“난 다연이가 뭘 좋아하는지 다 알고 있어.”고소한 향기는 점점 더 짙어졌고 먹고 싶어서 안달 난 온다연은 옆에서 끊임없이 유강후를 재촉했다.“아저씨, 이제 됐어요. 고기 익었다고요.”그 말을 끝으로 온다연은 재빨리 손을 뻗었다.그런데 이때 유강후가 그녀의 손에서 젓가락을 빼앗아 갔다.“내가 할 테니까 넌 저기 앉아서 기다려.”유강후는 잘 구운 소고기를 깻잎에 싸서 비법 소스를 살짝 묻힌 뒤 온다연에게 먹어주었다.“먹어봐.”온다연은 재빨리 입을 벌렸고 어찌나 흥분했는지 하마터면 혀를 씹을뻔했다.유강후가 직접 고른 국내산 소고기는 비계와 살코기가 적당하게 섞인 최상급인 만큼 일반 소고기에 비해 차원이 달랐다.게다가 장인에게 직접 받아온 듯한 비법 소스를 찍으니 맛이 단연 일품이다.온다연은 한입 먹고선 곧바로 쌈을 싸 유강후에게 건넸다.“아저씨, 얼른 먹어요. 엄청 맛있어요.”쌈을 받아서 먹은 유강후는 온다연이 왜 이렇게 고기를 좋아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유강후가 굽는 족족 온다연은 전부 먹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고기 한 접시를 클리어했다.온다연은 더 먹고 싶은 듯 다른 접시를 애타게 바라봤지만 유강후는 허락하지 않았다.맛있는 음식 앞에서 자제력을 잃는 게 일상이었기에 위가 아플까 봐 걱정되어 원하는 대로 먹게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하지만 애처롭게 바라보는 온다연의 눈빛을 감당하지 못했다.결국 고기 세 점을 집어 그릴에 올려놓았다.“마지막이야. 더 이상 먹으면 안
유강후는 언짢아하며 눈살을 찌푸렸다.“온다연, 집에서 슬리퍼 신어야 한다고 내가 여러 번 말했지?”온다연은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가장 좋아하는 소고기와 깻잎이 눈앞에 있는데 슬리퍼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그녀는 덜 익은 소고기를 보며 군침을 삼켰다.“엄청 맛있을 것 같아요.”말하면서 저도 모르게 고기 한 점을 집어 들었다.이때 유강후가 그녀를 번쩍 안으며 테이블에 앉히더니 도우미로부터 슬리퍼를 받아와 온다연에게 신겨주었다.“온다연, 앞으로 맨발로 돌아다니면 혼날 줄 알아.”온다연은 고기에 정신이 팔린 지 오래였다. 그녀는 공기 중에 가득 찬 음식 향기를 들이마시며 침을 삼켰다.“아저씨, 왜 갑자기 집에서 고기를 구울 생각을 했어요?”유강후의 결벽증은 온다연도 알고 있다.예전에 본가에 있을 때, 집사 외에는 아무도 그의 방에 들어갈 수 없었고 음식을 반입하는 건 더욱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지금 이 한옥에서도 늘 음식 냄새에 집안에 배는 걸 싫어하던 사람이다.그런 사람이 그릴을 사서 고기를 굽고 있으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유강후는 먹고 싶어 안달 난 온다연의 모습이 귀여운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선 그녀의 두 볼을 꼬집었다.“어떤 아기고양이가 고기 먹는 걸 좋아해서 그릴 하나 샀어.”“밖은 아직 추우니까 오늘은 일단 여기서 먹자. 나중에 날이 따뜻해지면 마당에서 구워 먹어도 되고.”온다연은 시선을 거두고 조심스럽게 유강후를 바라봤다.“아저씨, 집에 음식 냄새 배는 걸 싫어하잖아요? 그리고 제가 이거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유강후는 아침 일찍 메일에 로그인하여 온다연과 주한이 주고받은 과거의 이메일을 전부 읽었다.보면 볼수록 질투도 나고 착잡한 심정이지만 그럼에도 온다연의 취향을 알 수 있는 건 전부 꼼꼼히 메모해 두었다.온다연은 요리에 재능이 없어 지난 수년 동안 주한이 그녀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해주었다.그들이 주고받은 메일을 보면 주한은 요리 솜씨가 좋아서 아주 평범한 재료들로 맛있는 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