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대인배였던 남하윤은 곧바로 미소를 되찾고 대답했다.“대표님의 충고, 감사히 받아들일게요. 저도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이윽고 그녀는 유강후의 곁에 있는 온다연에게 시선을 옮기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이분이 바로 다연 씨죠? 저희 만난 적 있잖아요.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웬만한 연예인보다 더 예쁘신 것 같은데요.”온다연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감사합니다, 하윤 씨.”온다연은 무의식적으로 주희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주희의 눈빛에는 분노와 증오만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온다연은 그 눈빛에 미세하게 표정을 찡그리며 유강후의 손을 살며시 잡고는 낮게 말했다.“아저씨, 우리 그냥 돌아갈까요? 저 조금 피곤해요.”하지만 유강후는 덤덤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차가운 음성으로 대답했다.“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보고 가자. 결혼식에 쓸 피아노 연주곡이 있다고 하던데, 들어보고 괜찮으면 우리 결혼식에 쓰지, 뭐.”그 말에 주희가 고개를 들어 날카로운 눈빛으로 온다연을 바라보았다.그 시선에 온다연의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급히 유강후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낮게 속삭였다.“이런 얘기는 밖에서 하지 말라고요, 제발.”남하윤은 유강후의 말을 듣고는 잠시 멍하니 있더니 이내 깊은 눈빛으로 온다연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다연 씨, 유 대표님이랑 결혼하시는군요. 정말 축하드려요. 제가 선물 엄청난 거 준비해드릴게요.”하지만 유강후는 계속해서 주희를 바라보았다.온다연이 주혜성과 아는 사이인지 아닌지 유강후는 몰랐다. 하지만 주혜성의 반응으로 미루어보면 그는 확실히 온다연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니 유강후는 자연스레 자신의 앞에 있는 이 주혜성을 온다연의 과거 동창으로, 온다연을 탐냈던 그 남자로 여겼다.잠시 후, 시선을 돌린 유강후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땐 네 남자 친구도 같이 데리고 와.”온다연을 이끌고 자리에 앉은 그는 더 이상 남하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남
싸늘한 시선으로 무대 위에서 공연 중인 주희를 한 번 쏘아본 유강후는 몸을 일으켜 온다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그 순간, 무대 위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는 더욱 애절해졌다. 그 음악은 마치 저주라도 된 듯 온다연을 감싸며 그녀의 마음을 서서히 터뜨릴 듯 조여왔다.온다연은 유강후의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파묻으며 말했다.“아저씨, 저 너무 피곤해서 그래요. 우리 이만 돌아가면 안 될까요.”유강후는 온다연을 더 꼭 끌어안으며 대답했다.“그래.”그는 온다연을 데리고 빠르게 공연장을 빠져나갔다.밖에서는 언제부터인지 눈이 소복소복 내리고 있었다. 공연장을 빠져나오자마자 몰아치는 차가운 공기에 온다연은 유강후의 옷을 더욱 꽉 움켜잡고 말했다.“저 좀 추워요.”유강후는 온다연을 자신의 코트 안으로 감싸 안으며 낮게 물었다.“이래도 추워?”온다연은 여전히 유강후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마음속이 너무 추워요.”그 말에 가슴이 아려오기 시작한 유강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온다연이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이제 유강후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얼마 전, 그는 예전에 유씨 가문에서 해고된 하인들과 집사들을 모두 찾아내 숨겨진 진실을 파헤쳤다.처음 괴롭힘을 당하기 시작했던 때, 온다연은 반항도 해보고 경찰에 신고까지 해봤지만 그 뒤에 따르는 것은 더욱 심한 모욕과 보복이었다.해고된 하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온다연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끼니를 거르는 것 정도는 자연스럽고도 가벼운 일상이었다고 한다.겨울에는 온다연의 침대에 얼음을 쏟았고, 여름에는 그녀의 방에만 난방기를 틀어놓았다. 밥에는 작은 압정들을 뿌렸고, 죽은 쥐, 고양이나 강아지의 사체가 그녀의 침대 위에 놓여 있곤 했다.온다연이 전에 갇혔던 그 물탑 옆 방은 온다연이 한여름에 몇 번이고 갇혔다가 탈수 상태로 나왔던 방이었다. 심미진은 그런 온다연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 아무도 온다연이 이런 것들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감히 상상도 못 했다.그 후부터 온다연이
그때의 사건과 사람들을 다시 조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이 생각이 들자 유강후의 마음속에서는 불길한 예감이 피어올랐다.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온다연을 품에 안고 차에 탔다.한밤중이 되자 온다연은 다시 열이 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의식 역시 온전치 못했다. 그런 온다연의 모습을 보던 유강후의 눈에는 깊은 어둠이 깃들었다.그는 밤새 한숨도 못 자고 온다연의 곁을 지키며 그녀를 간호했다.동이 틀 무렵, 장화연이 안으로 들어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직도 안 돌아갔습니다.”유강후는 아직 잠들어 있는 온다연을 한 번 쳐다보며 그녀의 이마를 어루만졌다.다행히 열은 내렸다.어젯밤, 온다연은 밤새 뒤척이며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고, 계속 땀을 흘린 탓에 옷도 몇 번이나 갈아입어야 했다.밤새 무슨 꿈을 꾸었던 것인지 자는 내내 고양이의 이름을 부르며 잠꼬대를 했다.고양이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유강후는 질투마저 느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온다연의 이불을 덮어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직접 만나러 가야겠어.”그 말을 남긴 유강후는 겉옷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밖에서는 거센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밤새 눈이 내린 탓에 병원 밖 거리에는 두터운 눈이 쌓여 있었다.온다연의 병실을 마주 보고 있는 오래된 거리에는 검은색 슈퍼카가 서 있었다.아마 밤새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모양이다. 나무에 가려지긴 했지만 그래도 차 지붕에는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하지만 차 주위에는 눈 대신 담배꽁초만 수북이 쌓여 있었다.차 문 옆에는 창백하고도 단정한 모습의 청년이 서 있었다.밤새 잠을 못 잤거나,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운 듯 청년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눈에는 실핏줄이 서 있었다.어둡고도 집착 어린 눈빛은 평소 TV에서 보던 밝고 청량한 모습과 정반대였다.유강후가 다가오자 청년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버리고 두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은 채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둘 다 검은 외투
유강후의 눈에서는 살기가 서서히 번져 나왔다. 그의 눈 안에 숨겨진 차가운 살의는 전혀 숨겨지지 않았다.그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주혜성, 당신이 예전에 온다연을 도와줬다는 걸 감안해서 이렇게 최대한 공손하게 얘기해주는 거야. 아무리 남씨 가문이 당신을 보호해준다고 해도, 내가 당신 하나 처리 못 할 것 같아? 내가 정말 당신 하나 처리하려고 나선다면, 남씨 가문에서 당신 하나 지키려고 감히 나랑 맞서려고 할까? 가 지금 인내심이 남아 있을 때 원하는 만큼 부르는 게 좋을 거야. 그럼 넌 더 이상 무대 위에서 굳이 춤추고 노래하지 않아도 돼. 그 돈 들고 경원을 떠나.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그 말에 주희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리더니 눈가에 미묘한 빛을 띠었다.“대표님은 제가 이런 것까지 신경 쓸 거라고 생각하시나요?”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한층 더 냉랭해진 목소리로 말했다.“그렇다면 당신 연예계 생활은 여기서 끝이야.”주희가 경멸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그딴 걸 신경 쓸 거라고 생각하세요? 대표님, 아무리 대표님 권력이 막강하다고 해도 온다연에게는 대표님이 절대 다가갈 수 없는 과거가 있어요. 그 과거를 만들어준 장본인들도 다름 아닌 유씨 가문이라는 건 아세요? 어제 보니까 온다연 참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물론 그렇게 예쁜 여자를 안 좋아하는 게 더 이상하겠지만 안타깝게도…”혀를 끌끌 차던 주희가 도발적인 말투로 말했다.“온다연은 절대 대표님을 좋아할 수 없을 거예요! 대표님이 유씨 성을 가지고 있는 한, 유씨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한, 온다연은 절대 대표님을 좋아하는 일이 없을 거예요!”그 말에 유강후의 심장이 심연 속으로 깊숙이 가라앉더니 이마에는 핏줄까지 불거졌다.그 순간, 유강후는 당장이라도 주혜성을 죽여버리고 싶었다.하지만 그는 곧바로 다시 차분하고도 권위적인 모습을 되찾더니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상관없어, 온다연이 날 좋아하지 않아도 우린 결국 결혼할 사이니까. 여기 밤새 서 있어봤자 온다연은
유강후는 하던 일을 모두 멈춘 채 거의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온다연의 곁을 지켰다.그는 어젯밤의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주혜성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온다연을 바라보며 유강후는 비서에게 창가에 의자를 갖다두게 했다. 그러고는 그녀를 끌어안아 창가에 갖다 놓은 의자 위에 앉혔다.온다연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유강후가 이끄는 대로 자신의 몸을 맡겼다.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고 그저 침묵을 지키며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둘 사이의 분위기는 마치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연인처럼 부드럽고도 애틋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다음 날 아침까지 쭉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잠에서 깬 온다연은 유강후에게 낮은 소리로 말하는 장화연의 목소리를 들었다.“모든 연락을 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다연 씨가 보기 전에 핫이슈들 새로 뜬 거 다 지워야죠.”유강후의 지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장 집사가 권이랑 같이 확실하게 처리해.”그 말에 온다연은 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뉴스를 찾아보았다. 어플 추천화면에는 벌써 수십 개의 뉴스가 떠 있었다.“라이징 스타 주혜성, 어젯밤 클럽에서 만취한 채…”“주혜성 음주운전, 교통사고”“톱스타 주혜성, 고속도로에서 추락, 생사는 불분명…”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멍해진 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트렸다.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분노가 그녀를 순식간에 집어삼켜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온다연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유강후에게 다가갔다.“아저씨가 한 짓이죠?”그 말을 내뱉은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표정에는 분노와 놀라움이 섞여 있었다.유강후의 시선은 아무것도 신지 않은 그녀의 발로 옮겨지더니 무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왜 신발 안 신었어?”온다연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유강후를 노려보며 주먹을 꽉 쥔 채 언성을 높였다.“지금 묻잖아요, 아저씨가 한 짓이냐고요!”갑자기 커지는 목
깜짝 놀란 유강후는 몸을 일으켜 온다연을 부축하기 위해 다가갔다.“다연아!”온다연은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할 고통에 휩싸이면서도 유강후를 한 손으로 밀어내며 말했다.“가까이 오지 마요, 지금 아저씨가 끔찍이도 싫으니까!”극심한 고통을 느끼는 온다연을 보며 가슴 한쪽이 서늘해진 유강후는 다급하게 그녀를 안고 응급실로 달려갔다.당직의도 잔뜩 흥분한 듯한 온다연의 모습에 깜짝 놀라 다급하게 그녀에게 강제로 진정제를 투여했다.온다연은 빠르게 잠이 들었다.빠른 속도로 정밀검사를 마친 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다행히 태아에게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냥 순간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경련이 온 것 같아요.”의사가 유강후를 바라보며 말했다.“대표님, 이번엔 다행히 태아에게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산모가 몸이 너무 약하기도 하고 태아의 상태도 불안정합니다. 다른 산모들에 비해 태아의 발육 상태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고요. 이 이상의 자극은 최대한 피하셔야 할 겁니다.”더 말을 이으려던 의사는 유강후의 쓸쓸한 눈빛과 무거운 표정을 본 순간, 마음이 약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유강후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며 그는 소문으로만 듣던 피도 눈물도 없는 재벌 후계자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되었다.유강후는 전혀 차가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온다연이라는 여자를 극진히 아끼고 사랑하는 한 남자에 불과했다.게다가 간호사들은 종종 온다연이 잠든 틈을 타 그녀의 얼굴에 입 맞추는 유강후의 모습을 본 적도 있다며 수군댔다. 온다연의 모습을 보는 유강후의 눈빛에는 항상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또 어떤 날에는 온다연을 꼭 안고 다니며 땅에 발을 붙이지도 못하게 했었다. 그런 날에는 아예 온다연을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혀 밥까지 직접 떠먹여 주곤 했다.다만 유강후의 집착스럽고 강압적인 태도와 방식은 온다연의 숨통을 조여왔다.그리고 온다연을 대하는 그의 표정은 항상 차갑고도 단호했다. 주변 사람들도 온다연이 유강후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할 수 있었
온다연은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그녀는 긴장한 듯 길고 촘촘한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금방 잠에서 깬 그녀의 볼에는 잔머리가 붙어있었다. 그리고 유강후는 그것을 정리해주기 위해 온다연을 향해 손을 뻗었다.하지만 온다연은 유강후가 정말로 자신에게 손찌검하려는 줄로 오해하고 본능적으로 얼굴을 감싸며 몸을 뒤로 물렀다.“잠깐만요!”유강후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그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온다연을 바라보며 물었다.“다연아, 내가 정말 널 때릴 거라고 생각해?”온다연이 작게 대답했다.“저번에, 저 때렸잖아요.”온다연이 임혜린의 일로 유강후에게 대들었던 그 날, 유강후는 온다연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엉덩이를 때렸다.지금 그 일을 떠올려보면 온다연은 여전히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크고 무거운 유강후의 손이 온다연의 엉덩이 위로 떨어질 때마다 그녀는 찌릿한 고통을 맛봐야 했다.유강후도 온다연의 말에 그녀의 새끼손가락이 부러졌던 그 날 일을 떠올렸다.그는 온다연의 손을 들어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이번에 마지막이야. 다음에 또 그러면, 정말 혼날 줄 알아.”말을 마친 유강후는 온다연을 안아 식탁으로 데려갔다.식사하던 도중, 손님이 병실로 찾아왔다.임혜린이 커다란 해바라기 꽃다발을 품에 안고 병실로 찾아왔다. 크고 아름다운 꽃다발은 그녀의 작은 얼굴을 더욱 환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함께 온 한이준은 무슨 일인지 안경을 끼고 있었다.맞춤형 고급 정장에 안경을 매치한 그는 마치 패션 화보 속의 모델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지적인 안경은 한이준의 평소 방탕하던 이미지와 분위기를 눌러주는 대신 차분하고도 절제적인 분위기를 더해주었다.하지만 온다연은 그의 눈 아래에 들어있는 멍을 발견했다. 안경 때문에 눈에 잘 띄지는 않았지만 자세히 보면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그녀는 무심코 두 번씩이나 시선을 돌려 한이준을 바라보았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유강후는 기분이 상했는지
임혜린은 말을 멈추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넌 이런 내가 창피하지 않아?”온다연은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리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임혜린은 온다연의 유일한 친구였다. 두 사람은 거의 모든 이야기를 공유하는 사이였지만 서로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묻지 않기로 암묵적인 약속을 했다.그 때문에 임혜린의 과거 이야기는 온다연도 처음 듣게 되었다.온다연은 한때 임다연을 부러워했다. 그녀를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외동딸로 여기고 부유하진 않더라도 먹고 살 걱정 없이 사랑받으며 살아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녀의 현실은 온다연의 생각과는 완전히 달랐다.온다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임혜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돈 버는 게 뭐가 창피해?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그녀는 고개를 돌려 온다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사실 난 말이야, 유 대표님께서 널 괴롭힌다고 생각하진 않아. 이준 씨한테서 들었는데 대표님이 예전에 너 괴롭히던 사람들 하나하나 다 찾아내서 감옥으로 보냈대. 그중 몇 명은 정체 모를 죽임을 당했다고도 하고.”온다연이 임혜린의 말을 끊었다.“설마 너도 날 설득하려는 거야? 만약 내가 너한테, 나도 너 같은 대타에 불과하다고 얘기하면, 그래도 넌 날 설득할 수 있어?”임혜린의 눈빛이 쓸쓸해지더니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한참이나 침묵을 유지하던 그녀가 겨우 입을 열었다.“아직도 주희 못 잊은 거야?”온다연은 생각에 잠긴 듯 멍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임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그럴 만도 해. 목숨 걸고 널 지켜준 사람인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그녀는 잠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이 얘긴 이제 그만하자. 은행루 예약해뒀으니까 점심은 거기 가서 먹자. 네가 좋아하는 요리들로만 부탁해놨어. 얼른 가자. 예전에 우리 학교 다닐 때, 매일 은행루 앞을 지나가면서 외제 차들 줄지어 있는 거 보고 세상에서 제일 비싼 레스토랑인 줄 알았잖아. 그때 우리 돈 많이 벌면 꼭 한번 가보자고 했었던 거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결혼식까지 남은 날이 3,4일밖에 되지 않았다.영운산에 있는 집은 완벽하게 공사가 마무리되었고 가구도 모두 배치되었다. 요 며칠 동안은 생활용품들을 하나씩 채우는 중이었다.이 별장은 영운산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으며 대지 면적이 1천 평이 넘고 경운시의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었다.하지만 이 집의 가장 큰 장점은 천연 온천이었다.탁월한 약효를 자랑하는 이 온천은 오랜 기간 몸을 조리해야 하는 온다연에게 그야말로 최적이었다.이곳은 결혼 후 유강후와 함께 머물 신혼집으로, 그는 집을 꾸미는 데 엄청난 정성을 들였다.전체적으로 전통 스타일로 꾸며졌지만 거실 천장은 최상의 채광 효과를 위해 설계되었다.하여 날씨가 좋은 밤이면 소파에 누워 별을 감상할 수도 있었다.마당에는 해바라기와 붉은 장미가 가득 심어져 있었다.장미는 이미 몇 송이가 만개해 있었고 은은한 향기가 온 정원을 가득 메우며 특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그러나 온다연은 여전히 기운이 없어 보였다.유강후가 고양이 구월이의 집을 배치하고 있을 때, 온다연은 그 모습을 가만히 그네에 앉아 지켜보았다.그런데 구월이의 집이 다 완성되기도 전에 그녀는 그만 잠들어 버렸다.유강후는 온다연이 한쪽으로 기울어 깊이 잠든 모습을 보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나무 아래에 있는 긴 의자에 눕혔다.그는 요즘 들어 그녀의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전보다 훨씬 자주 잠에 빠졌고 무언가를 생각하다 멍해지는 일이 늘었다.온다연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그녀는 말을 아꼈고 가끔씩 겨우 한두 마디를 내뱉었지만 그 내용조차 마음을 긁는 말들뿐이었다.그녀가 가장 많이 말을 했던 날은 지예솔이 찾아왔던 그날이었다는 게 새삼 떠올랐다.유강후는 잠들어 있는 온다연의 옆모습을 보며 어딘가 모르게 그녀를 놓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꼈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했다.“다연아, 또 날 떠날 생각 하는 거야? 절대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온다연은 깊이 잠들어
온다연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천천히 말했다.“그중에서도 내가 보기엔 가장 약점이 될 수 있는 건 바로 거래 전문가예요.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죠?”지예솔은 대답하지 않고 고양이 모양 쿠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잠시 후, 하인이 문을 두드렸다.“사모님, 다이닝룸에 사모님이 좋아하시는 우유 커스터드가 준비되었습니다. 대표님께서 사모님을 밖으로 모시고 오라고 하셨어요.”지예솔은 그제야 시선을 거두며 낮게 말했다.“보아하니 강후 씨는 정말 다연 씨를 철저히 통제하나 봐요. 잠깐 떨어졌는데도 불안해하다니... 혹시 내가 다연 씨를 데려갈까 봐 걱정이라도 하는 걸까요?”온다연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고양이 모양 쿠션을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잘 보관해요. 이 안에 들어 있는 카메라는 구하기 힘든 거예요.”이렇게 말한 뒤, 두 사람은 함께 서재를 나섰다.다이닝룸에 다다르기도 전에 봉현수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다연 씨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예요? 벌써 30분이나 지났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그렇게 끝도 없이 하는 거죠? 혹시 우리 집 예솔이를 어딘가로 데려가려는 거 아니예요?”유강후의 반응도 냉랭했다.“우리 다연이가 예솔 씨를 데려간다니요? 예솔 씨야말로 진짜 문제 아니예요? 우리 다연이가 예솔 씨 때문에 나쁜 영향을 받았다고요! 아직 현수 씨한테 따질 말도 많아요, 근데 왜 현수 씨가 먼저 큰소리쳐요?”“현수 씨, 선 넘지 마요!”온다연과 지예솔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서로의 눈에서 당혹스러움을 읽을 수 있었다.식탁으로 돌아왔을 때, 유강후는 눈에 띄게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막 입을 열려는 순간, 지예솔이 손에 든 고양이 모양 쿠션을 보며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쿠션을 좋아하신다면 여러 개 선물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안 됩니다.”그 쿠션은 온다연과 유강후가 처음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을 때, 온다연이 인터넷으로 주문해 그의 책상 의자에 놓은 것이었다.그녀는 그것을 ‘등받이로
온다연은 창밖을 바라보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나 같은 사람에게 사랑은 필수가 아니에요. 감정도 중요하지 않고요. 강후 씨와 나는 애초에 같은 부류가 아니에요. 우리 사이에는 너무 많은 장벽이 있습니다.”“전 유씨 가문 사람들이 과거에 저에게 했던 짓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어요. 그들이 죽었다고 해도 내 마음의 한은 풀리지 않아요.”“하지만 강후 씨에게 유씨 가문은 가족이잖아요. 그 사람이 그들을 진정으로 끝장낼 리가 없어요.”“봐봐요, 유하령이 그렇게 많은 악행을 저질렀는데도 지금은 겨우 다리 하나 잃은 정도잖아. 유씨 가문 사람들이 여전히 유하령의 재활을 돕고 있고 아마 1,2년 안에 다시 정상적으로 걸을 수도 있을 거예요.”“게다가 내 동생의 죽음, 그리고 나와 나은별 같은 사람들의 얽힌 관계들까지...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 알려줬어요. 나는 결국 희생될 수 있는 사람이란 걸.”“강후 씨는 한편으론 날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그 사람들이 날 무자비하게 해치도록 방치했어요. 이런 사랑은 나로선 감당할 수 없어요.”눈빛에 어두운 기색이 스치며 온다연이 말을 이었다.“한때는 아이만 있으면 모든 걸 내려놓고 그 사람과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건 내가 순진했던 거예요. 아이가 있어도 그 모든 문제들은 사라지지 않았을 거고 다만 조금 늦게 터질 뿐이었겠죠.”“유강후라는 사람은 겉으론 깊은 정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정해요. 그 사람은 항상 자신의 사고방식으로만 사람들을 판단해요. 얻지 못하면 가두거나 파괴해버리고 자기 뜻에 따르지 않으면 온갖 방식으로 벌을 주죠.”“완벽한 사업가이자 타고난 리더지만 좋은 연인은 아니에요. 게다가 나 같은 사람은 사랑 같은 건 필요 없어요. 나에겐 사랑보다 배를 채우는 게 더 중요하니까.”그녀의 말이 끝난 후, 서재에는 긴 침묵이 흘렀다.잠시 후, 온다연은 책상 의자에 놓인 고양이 모양 쿠션을 정리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쿠션의 고
온다연은 말을 마치고 곧바로 곽혜영을 무시한 채 한이준을 향해 말했다.“한 대표님, 안목이 갈수록 떨어지시네요. 눈이 좀 안 좋으신가 봐요. 강후 씨가 갓 사 온 영양제가 있는데 돌아가실 때 몇 개 가져가세요. 눈은 깨끗해야 좋으니까요.”한이준의 얼굴이 즉각 굳어졌고 곽혜영의 표정은 더 심각했다.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그녀는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 말했다.“유 대표님, 제가 다연 씨의 기분을 상하게 했나요? 화나신 것 같아요. 다 제 잘못이에요.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유강후는 냉담하게 말했다.“다연이 기분을 상하게 한 걸 알면서도 물어요? 그렇게 생각했으면 저기 문 있잖아요. 나가세요. 배웅은 안 할 테니.”이 말이 끝나자마자 봉현수가 웃음을 터뜨렸다.“강후 씨, 그래도 상대는 여자잖아요. 게다가 은별 씨 사촌인데 손님으로 온 사람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에요?”한이준의 얼굴이 극도로 어두워지며 분노했다.“두 사람 다 그만해요! 혜영이는 제 파트너입니다. 적당히 좀 해요!”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어쩐지 익숙하다 했더니. 친척이셨구나.”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곁에 있던 지예솔의 팔을 잡아당겼다.“예솔 씨, 제가 주얼리 관련해서 여쭐 게 있어요. 서재로 가서 얘기해요.”그렇게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남은 곽혜영은 얼굴이 어두워진 채 침묵을 유지했다.한이준은 눈물이 곧 흘러내릴 듯한 곽혜영의 모습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이끌고 나갔다.봉현수가 한이준이 정말 화가 난 듯해 따라나서려 했지만 유강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수 씨, 앉아요.”“신경 쓰지 마요! 이준이는 갈수록 판단력이 흐려지고 있어요. 우리 다연이조차 저 혜영 씨한테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걸 아는데 여전히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잖아요. 혜린 씨랑 헤어지고 나서는 정말 허기가 졌나 봐요. 아무거나 다 먹을 정도로.”“그냥 스스로 정신 차릴 때까지 둬요.”서재 안에서, 온다연은 앰버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예솔 씨, 부탁 하나 드리고
장화연은 표진아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마 그냥 지나가는 말일 겁니다. 적어도 사모님 뒷말은 하지 마세요.”“잠시 후에 한 대표님과 봉 대표님이 오셔서 결혼식 장소에 대해 논의할 거예요. 차와 간식을 준비하세요. 한 대표님의 새로운 파트너분은 커피와 서양 과자를 좋아한다고 하니 그것도 준비하시고 나머지는 평소대로 하시면 됩니다.”“네, 장 집사님.”하인이 돌아서려는 순간, 장화연이 다시 말했다.“준비해 두세요. 결혼식이 끝난 뒤, 당신은 영운산 별장으로 가서 일하게 될 겁니다. 모든 일에 좀 더 신경 쓰세요. 셋째 도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별장으로 가는 사람은 대우가 더 나아질 거라고 하셨습니다.”하인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알겠습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저녁 식사 전, 한이준과 봉현수가 정말로 도착했다.다만 한이준 옆에 선 사람은 낯선 얼굴이었다.봉현수 옆에는 여전히 지예솔이 함께였다.온다연의 시선이 한이준의 파트너에게 스치듯 지나갔다.단정하고 청순한 외모로 임혜린과 몇 분 닮은 느낌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무표정하게 시선을 돌렸다.그런데도 그 여자는 무척 친근한 척하며 달콤한 미소로 말했다.“유 대표님, 저 기억하시나요? 저는 이진이의 어릴 적 친구 곽혜영이에요. 예전에 모임에서 뵌 적 있는데.”유강후는 별다른 표정 없이 예의상 고개를 끄덕였다.곽혜영은 전혀 어색해하지 않고 여전히 밝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감 있게 행동했다.저녁 식사가 무척 풍성하게 준비되었지만 어떤 사람들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곽혜영은 식사 중 활발하게 대화를 이끌며 마치 유씨 가문과 봉씨 가문에 아주 익숙한 사람처럼 굴었다.그러나 두 남자는 마치 포커페이스를 하듯 냉담한 표정을 유지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곽혜영은 전혀 개의치 않고 국제 정세와 금융 이야기를 꺼내며 온다연과 지예솔을 가끔씩 흘끔거렸다.그 눈빛 속에는 미묘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곽혜영은 사전에 조사를 했었다.온다연과 지예솔은 얼굴로 자리를 차지한
말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감탄했다.보기에는 여리여리하지만 옷감 아래 숨겨진 몸매는 정말 볼륨감이 있었다. 허리는 너무나 가늘어 아찔할 정도였고 가슴은 부드럽고 풍만해 전혀 작지 않았다.외부 사람이 있는 것을 본 온다연은 유강후의 팔에서 벗어나려 했다.눈가에는 아직도 약간의 붉은 기운이 남아 있는 채로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난 고르고 싶지 않아요. 아저씨가 결정한 일이니까 아저씨가 직접 골라요.”말을 마치자마자 돌아서 나가려 했다.하지만 유강후는 그녀를 다시 끌어안으며 성급함을 억누르고 달래듯 말했다.“결혼식이 이제 보름 남았어. 고르지 않으면 그날 입을 게 없잖아.”온다연은 피곤한 듯한 표정으로 유강후의 품에 갇혀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빠져나갈 수 없었다. 결국 아무 말 없이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표진아의 조수가 몇 벌의 웨딩드레스를 가져왔다. 모두 엄선된 고급 맞춤 드레스였는데 화려하면서도 신선하고 우아한 매력을 잃지 않은 디자인이었다.하지만 20벌이 넘는 드레스를 계속 보여줬음에도 온다연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너무 피곤한 듯 보였다.지쳐 보이는 온다연의 모습에 유강후는 안쓰러워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많이 힘들지? 내일 다시 골라볼까?”그러나 온다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드레스들 위에 머물러 있었지만 눈빛에는 생기가 없었다.며칠 동안 그녀는 계속 이런 상태였다.깨어 있는 시간보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아이를 잃었다는 소식은 그녀의 마음을 철저히 무너뜨렸다.오늘도 유강후가 계속 달래고 유도하며 울고 말하게 하지 않았다면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녀의 기운 없는 모습을 보자 유강후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곧 허리를 숙여 그녀를 안아 들고 나가려는 찰나, 표진아가 급히 말했다.“사모님께서 만족하지 못하신다면 제가 다른 시리즈를 준비해왔습니다. 트렌디한 전통 스타일인데 사모님의 기품에 딱 맞을 겁니다. 애프터 드레스로도 사용할 수 있어요.”이런 큰 거래를
표진아가 뚫어져라 온다연을 쳐다보자 옆에 있던 집사가 입을 열었다.“저희 사모님입니다.”표진아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나이가 어려 보이는데 설마 미성년자를 만나는 건가?’부유한 집안의 아가씨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유강후라는 온실속에서 곱게 자란 화초처럼 보였다.‘이런 외모를 가졌으면 유 대표님 같은 분을 만나는 게 맞지. 안 그러면 이상한 사람이 얼마나 꼬이겠어.’표진아는 궁금함을 참지 못했다.“사모님이 생각보다 어리시네요. 미성년자는 아니겠죠?”집사는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눈살을 찌푸렸다.“진아 씨, 도련님이 화낼지도 모르니 안에 들어가서는 절대 이런 얘기를 꺼내시면 안 됩니다. 사모님은 혼인신고까지 마친 성인이에요.”“그리고 사모님이 요즘 도련님과 갈등이 생겨 기분이 안 좋으시니 언행을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표진아가 막 답하려던 찰나 커다란 문이 열리며 제네시스 한 대가 안으로 들어왔다.집사는 그녀의 옆에서 급히 속삭였다.“도련님이 오셨네요. 진아 씨는 저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시죠.”표진아는 집사의 뒤를 따르며 걸음을 옮겼다.고풍스러운 분위기의 다실에는 넓은 유리창이 설치되어 있었고 창문을 열면 바깥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표진아는 천하의 미래 그룹 대표가 차에서 커다란 상자 몇 개를 옮기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그런 다음 부하들을 시켜 상자에 들어있는 물건을 꺼내 조립했고 순식간에 2,3m 높이에 달하는 고양이 집이 완성되었다.표진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유 대표님이 이런 일도 직접 한다고?’곧이어 목격한 장면에 그녀는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평소 위엄있고 카리스마 넘치는 유강후가 허리를 숙여 조심스럽게 온다연을 달래주고 있었다.그러나 온다연은 가볍게 무시한 채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유강후가 옆에서 한참을 달래도 입조차 벙끗하지 않았다.곧이어 유강후는 비서에게 뭔가를 지시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우미가 고양이 한 마리를 안고 나왔다.고양이를 보고서야 온다연의 얼굴에는 미세한 표정 변화가 일어났다.그러나
“하는 짓을 봐서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게 뻔합니다.”유강후는 섬뜩한 눈빛으로 사진을 바라봤다.“로운 불러와.”곧이어 로운이 들어왔다.유강후는 단호하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부터 본격적으로 공격해. 경원으로 들어온 암살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죽여버려.”“시간은 딱 한 달이야. 난 한 달 안에 김씨 가문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으면 좋겠어.”로운은 눈살을 찌푸렸다.“대표님, 열흘 정도만 더 기다리면 분명히 성공할 거라 확신합니다만 지금 바로 공격하기에는 미흡한 부분이 있습니다.”“로운.”유강후는 단호하게 그의 말을 잘랐다.“이미 내가 참을 수 있는 최대 인내심에 도달했어. 한 달 후에 임무를 완수한다면 돈, 사람, 물건 네가 원하는 건 전부 다 줄 수 있으니까 넌 여기에만 집중해.”“계정에 나온 모든 암살자를 너한테 맡길 거야. 난 대답만 원하니까 넌 반드시 성공해.”로운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맡겨주신 일은 반드시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로운이 나가자 이권이 입을 열었다.“도련님, 열흘이면 되는데 조금만 더 기다리는 건...”“안돼.”유강후의 표정은 한없이 어두웠다.“화창한 봄날에 꽃 피는 언덕에서 가장 로맨틱한 결혼식을 올려주겠다고 다연이랑 약속했어.”“안 그래도 빚진 게 많은데 이런 약속조차 지키지 못하면 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이권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벙끗했으나 끝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유강후는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 굉장히 침착하고 이성적인 성향이기에 지금처럼 큰 위험을 감수할 때가 많지 않다. 남자로서 유강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이건 리스크가 너무 큰 모험이다.온다연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미래 그룹의 앞날을 걸고 있는 격이다.유강후는 정말 뼛속까지 온다연을 사랑하고 있었다.봄은 갈수록 날이 길어졌고 햇볕은 점점 더 따뜻해졌다.그러나 생기가 넘쳐야 할 봄날과 달리 한옥은 조용하기 그지없다.듣기로 여주인은 정원 중앙의 나무 밑에 의자를 두어 그
온다연이 너무 안쓰러워 덩달아 괴로움이 밀려온 유강후는 끊임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아니야. 다연이는 최고의 엄마야.”“우리 아이는 다연이를 엄청 좋아해. 그러니까 계속 꿈에 나타나잖아.”“울고 싶으면 울어. 참지 않아도 돼.”온다연은 울먹였다.“꼭 돌아오겠죠? 강후 씨, 아이는 다시 절 찾아올 거예요. 맞죠?”“그런데 꿈속에는 신발 한 켤레도 없이 맨발이었어요. 너무 불쌍해요.”꿈속의 장면이 떠오른 온다연은 가슴이 터질 듯 울부짖었다.“그곳이 너무 춥대요. 왜 데리러 안 오냐고 원망하는데...”“강후 씨, 아이가 추워하나 봐요.”“나 너무 힘들어요.”“괴로워요.”...극심한 괴로움과 고통은 몸의 경련을 일으켰다.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했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은 어느새 유강후의 옷자락을 적셨다.그는 온다연의 피와 살에 녹아들듯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돌아올 거야. 무조건 돌아오니까 걱정하지 마. 다연아, 이제 그만 아파해.”...한참 동안 울다가 지쳐버린 온다연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흐느꼈다.유강후는 온다연을 안고 집으로 들어갔다.안방 문을 열려 있었는데 침대는 깨끗이 치워졌고 도우미 몇 명이 바닥에 엎드려 뭔가를 찾고 있었다.그에게 안겨있던 온다연은 발버둥 치다가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처음 팔찌가 부러진 곳에 무릎을 꿇더니 나무판자 틈을 따라 조금씩 이동하며 찾았다.온다연이 움직이는 방향 따라 눈물 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마침내 호박석은 바닥과 벽이 맞닿은 틈새에서 발견됐다.온다연은 그것을 손에 쥔 채 미친 사람처럼 울고 웃었다.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아예 몰랐던 도우미들은 고개를 들 엄두조차 나지 않아 푹 숙인 채 입을 닫았다.유강후는 그녀 앞에 무릎을 반쯤 꿇고 품에 안았다.“다연아, 이제 찾았으니까 좀 쉴래?”온다연은 호박석에 담긴 아이의 체온이라도 느끼려는듯 손에 꽉 쥔채 놓지 않았다.“강후 씨, 아이가 잠든 곳에 가고 싶어요.”온다연은 몸이 너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