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지호는 몸이 굳어졌지만 이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그래, 돌아가서 잘 가르칠게. 정말 미안해.”그러고 나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눈짓했다.“더 망신당하기 전에 빨리 치워.”그들 일행은 물건을 챙긴 후 서둘러 걸어 나갔다.이때 모든 사람의 시선이 온다연에게 집중됐는데, 오직 심미진만 넋 놓고 예물을 지켜보다가 염씨 집안 사람들이 멀리 사라져서야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유강후를 힐끗 쳐다보더니 그가 자기를 보지 않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다연아, 너 언제부터 염지훈과 그런 사이가 됐어? 염지훈이 하령의 남자친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왜 그랬어?”이 말을 들은 온다연은 화가 나다 못해 웃음이 나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심미진, 누구나 당신처럼 부자만 보면 달려드는 줄 알아? 그리고 내가 누구랑 어떻게 지내든지 당신이 무슨 상관인데? 지금 무슨 신분으로 나를 가르쳐?”심미진은 아직도 그 거액의 예물을 생각하고 있었다.도시 중심의 아파트 20여 채와 상가 10여 개면 적어도 수백억의 가치가 있을 텐데. 이 좋은 일이 원래는 그녀의 것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온다연과 사이가 멀어졌다.‘안 그랬으면, 오늘 그 예물들이 내 앞에 오는 건데.’그녀는 대단한 자존심을 가진 유씨 가문이 절대 염씨 집안과 혼인을 맺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그러면 온다연이 염씨 집안에 시집갈 가능성이 크다.그녀는 온다연의 이모이고 유일한 가족이므로 그 예물들은 당연히 그녀의 것이다.며칠 전에 인연을 끊었지만 어릴 때부터 쭉 봐온 아이다.온다연은 성격이 온화하고 다루기 쉬우며 혈육 간의 정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심미진은 온다연을 다시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다고 100% 확신했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녀는 부드러운 말투로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얘가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는 너의 이모이고 유일한 가족이야. 당연히 이모의 신분으로 너를 가르치는 거지.”온다연이 말하기 전에 유강후가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왔다.“당신은 그
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빙 둘러보더니 마지막에 유자성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또박또박 말했다.“내가 바로 형이 말한 그 애비 없는 자식의 아빠야.”마른하늘에 천둥이 치는 것 같은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현장은 자신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조용했다.몇 분이 지나서야 최금영이 몸을 부르르 떨며 입을 열었다.“강후야, 그 말은...”유강후는 표정이 극히 담담했다.“네, 제 아이입니다. 날씨가 좀 따뜻해지면 온다연과 결혼식을 올릴 생각입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최금영이 버럭 화를 냈다.“안 돼.”유강후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동의하지 않아도 소용없어요. 할머니 의견을 묻는 것이 아니라 통보하는 거예요.”최금영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그녀는 원래 온다연 그년을 혼내서 유하령 대신 분풀이하려고 찾아온 것이었다.그런데 유강후가 제 입으로 온다연이 임신했고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말할 줄이야.이 소식은 외계인이 지구에 침입했다는 것보다 더 이해할 수 없었다.유씨 가문의 자랑인 유강후는 지혜와 재주가 뛰어나고 장래가 한없이 밝다. 그런 그가 어찌 아무것도 없는 고아와 이런 관계를 맺을 수 있단 말인가?틀림없이 저년이 유강후를 유혹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유강후의 신분으로 어찌 저런 천한 년을 마음에 둘 수 있겠는가?그녀는 온다연 앞에 막아선 경호원들에게 손짓했다.“너희들 비켜. 저 천한 년이 또 무슨 여우 같은 재주를 배워 강후를 유혹했는지 봐야겠어.”경호원들은 유강후의 명령만 따르기에 최금영의 명령을 아예 무시했다.경호원들이 자신을 상대하지 않자, 최금영은 더욱 화가 나서 소리 질렀다.“비켜. 너희들은 귀가 없어?”이때 온다연이 입을 열었다.“아저씨, 경호원들을 한쪽으로 비키게 해주세요. 할 말이 있어요.”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경호원들이 한쪽으로 비켜섰다.모든 유씨 집안 사람의 시선이 그녀의 배에 집중됐다. 온다연은 그런 시선
유씨 집안 사람들이 깜짝 놀라 허둥지둥하는 가운데 심미진이 급히 다가가 최금영을 부축했다.최금영은 숨을 헐떡이며 유강후와 온다연에게 손가락질했고, 부들부들 떨면서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마치 유강후와 온다연이 무슨 큰 죄를 지은 것처럼.심미진이 급히 그녀의 등을 두드려 진정시켰다.몇 분 후에야 최금영은 숨을 가다듬고 온다연을 가리키며 말했다.“너를 절대 유씨 집안에 들이지 않을 거니까 포기해.”온다연은 무슨 우스운 말을 들은 것처럼 피식 웃었다.“내 아이는 유씨 성을 가지지 않을 거예요. 더러워서 싫어요.”“너!”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최금영은 잠시 더 험한 말로 온다연을 욕하지 못해 얼굴이 시뻘게졌다.온다연이 또 무슨 말을 하려 하자, 심미진이 그녀를 말렸다.“다연아, 할머님을 여기서 죽일 작정이야?”“할머님에게 사과해, 어서.”온다연은 그녀를 상대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유강후에게 말했다.“아저씨, 저는 피곤해서 이 사람들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요. 가라고 하세요. 앞으로도 이 사람들을 보고 싶지 않아요.”유강후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알았어.”그는 돌아서서 유자성을 바라보았다.“형, 이만 가세요. 안 가면 경호원을 불러 끌어낼 거예요.”유자성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애써 화를 참으며 말했다.“강후야, 일이 이 지경이 됐으니 어떻게 할 건지 상의해야 하지 않겠니? 온다연은 어쨌든 네 형수 조카딸이야. 너희 둘이 결혼하면 우리 유씨 가문이 웃음거리가 돼...”“그건 형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에요.”유강후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말을 잘랐다.“온다연은 가족이 없고 누구의 조카딸도 아니에요. 다연이 누구랑 결혼하든 유씨 집안에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어요.”그의 말투는 극히 차가웠다.“남의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있으면 형의 아들과 딸이나 잘 간수하세요. 이 상태로는 민준에게 유씨 가문의 회사를 넘겨줄 수 없어요. 민준이 정말 경영의 길로 갈 수 없다면, 새로운 길을 찾아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유하령이 최근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유강후는 M국에 있었던 몇 년 동안 많은 산업에 투자했으며 그 규모가 이미 미래그룹과 비슷하다고 한다.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유강후가 강씨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라는 것이다.그리고 강씨 가문은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유명한 재벌 중 하나이며, 일국 경제를 조종할 수 있을 만큼 규모가 크다.그러니 후계자인 유강후의 몸값은 가늠할 수 없다.유씨 가문도 회사를 더러 가지고 있지만, 유강후가 가지고 있는 것과 비교나 되는가?그녀는 원래 유강후에게 기대서 평생 호의호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온다연 때문에 유강후는 이제 더 이상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카드까지 정지시켰다.그녀가 지난달 눈독 들였던 한정판 가방과 차도 아직 사지 못했다.‘이는 모두 온다연 그 천한 년의 잘못이다.’이제 온다연은 염지훈을 가로챘을 뿐만 아니라 유강후의 아이까지 가졌으니 앞으로 유하령의 처지는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다.유하령의 시선은 독사처럼 온다연의 얼굴에 닿았다가 다시 담요를 덮은 그녀의 배로 내려갔다. 대담하고 악독한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불끈 쥔 채 나지막이 말했다.“작은 아빠,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하지만 저를 버리지는 마세요. 제가 고칠게요...”그녀를 상대할 마음이 없는 유강후는 직접 유자성에게 말했다.“당장 나가세요. 안 그러면 경호원을 불러 쫓아낼 거예요.”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유자성도 기진맥진했다. 그는 온다연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모든 것은 아버지가 돌아오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 강후야, 너무 극단적으로 행동하지 마.”말을 마친 그는 화가 나서 기절할 뻔했던 최금영을 부축해 밖으로 나갔다.떠나기 전에 심미진은 달갑지 않은 듯 온다연을 쳐다보며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유강후의 매서운 눈빛에 놀라서 그만뒀다.유씨 집안 사람들이 떠나자 병실은 즉시 조용해졌다.유강후는 온다연의 귀밑머리를
그런 생각을 하며 유강후는 인내심 있게 말했다.“가구는 고르기 싫으면 그만둬. 커튼과 침구는 밝은색으로 하는 게 어때?”온다연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더욱 눈빛이 어두워진 유강후는 거의 빌붙는 말투로 말했다.“그럼, 아기방은 어떤 색으로 페인팅하고 싶어? 노란색으로 할까?”온다연이 마침내 손을 움직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마세요. 아기를 아저씨에게 맡기지 않을 거예요.”유강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한 것으로 볼 때, 애써 참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그는 온다연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말을 이어갔다.“정원에 화단을 설계하고 있는데, 이곳에 어울리는 해바라기 모종을 보내오라고 했어. 잘 관리하면 겨울에도 꽃이 필 거야.”온다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지막이 말했다.“해바라기를 낭비하지 마세요, 아저씨.”말하고 나서 그녀는 눈을 감고 유강후의 어떤 말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유강후는 모노드라마 주인공처럼 계속 말했지만 끝까지 대답을 듣지 못했다.온다연이 계속 그를 무시할 줄 알았는데, 이튿날 그에게 컴퓨터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요즘 그녀는 휴대폰을 쓰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항상 플랫폼에서 스타들의 콘서트를 관람했다.특히 주혜성이라는 신인 톱스타에게 푹 빠진 것 같다.그녀는 하루 중 태반을 그 스타의 동영상을 보는 데 썼다.그의 콘서트는 물론 최근에 찍은 드라마, 예능, 심지어 광고까지 몇 번씩 반복해서 봤다. 보면서 가끔 웃기도 했다.유강후는 지금까지 그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다. 진짜 큰일 났다.그는 겉으로는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처럼 평온하고 차분해 보였다. 심지어 그녀가 콘서트를 볼 때 옆에서 노래를 잘 부른다고 칭찬하기도 했다.하지만 뒤에서는 질투심이 폭발해 주혜성의 배경을 낱낱이 캤다.알고 보니, 그는 남씨 가문 아가씨 남하윤의 남자친구였다.나이가 18-19세에 불과하지만 범접할 수 없는 고결한 분위기와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여린 느낌이 있어 처
이번에 입원한 후, 유강후는 그녀를 유난히 감시했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불안한 듯 대부분 자기가 직접 지켰다.그래서 온다연은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간만에 기회를 얻은 그녀는 자신의 메일 계정에 로그인했다.요 며칠 전화를 할 수 없는 까닭에 그녀는 임정아와 메일로 연락했다.임정아가 보낸 메일이 몇 통 있었다. 별일은 없고, 그냥 그녀를 도와 매입한 주식과 펀드가 꽤 수익을 냈다는 것과 유하령이 최근 악평이 자자하다는 소식이었다.온다연은 간단히 몇 마디 답장한 후 로그아웃하려다가 이전에 사용한 적이 있는 계정을 발견했다.그녀가 이전에 주한과 연락할 때 사용했던 계정인데, 주한이 죽은 후 그 계정을 한 번도 열지 않았다.잠시 넋 놓고 있던 그녀는 5년 만에 처음 그 메일에 로그인했다.메일함을 열자마자 600-700통의 읽지 않은 메일이 떴다. 광고 메일을 제외한 나머지는 놀랍게도 모두 주희가 보낸 것이었고, 가장 최근에 보낸 건 오늘 아침이었다.클릭해서 열어보니 전부 ‘왜 연락이 없냐’, ‘나를 잊은 것이 아니냐’, ‘주한을 잊은 것이 아니냐’, ‘유강후를 멀리하라’라는 내용이었다.온다연은 몇 통만 보고 메일을 닫은 후 답장을 보냈다.[나는 잘 지내고 있어. 걱정하지 마.]그녀는 ‘자신을 잘 돌보라’고 쓰려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주희는 지금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다. 남하윤이라는 아가씨가 주희를 무척 좋아하는 듯하다.남하윤이 챙겨주고 있으니 그는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 있을 것이다.그의 병도 당연히 최선의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주희는 더 이상 그녀의 보살핌이 필요하지 않을 듯하다.그녀는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주희가 다 커서 기뻤고,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 같아 슬펐다.잠깐 망설이다가 온다연은 잠겨 있는 폴더를 열었다.그 안에는 그녀와 주한이 주고받은 1,000여 통의 메일과 1,000여 장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이는 그 시절의 사소한 일상에 관한 기록이다.이전에 여러 번 봤던 그
식은땀이 이내 캐미솔과 이마를 적셨고 복부에서 간헐적으로 경련이 일었다.마치 뭔가를 알려주려는 듯 며칠 동안 없었던 태동이 갑자기 나타났다.배 속의 태아가 초조한 듯 심하게 움직였다.통증은 온다연을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끌어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아랫배를 누른 채 한 손으로 메일과 컴퓨터를 닫았다.허둥지둥하다 컴퓨터가 바닥에 떨어지며 밖에 있던 사람의 주의를 끌었다.문 앞에서 지키고 있던 간호사가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온다연이 흥건히 식은땀을 흘린 것을 보고 즉시 이상함을 감지했다.“온다연 씨, 어디 불편하세요?”온다연은 아픔을 가까스로 참으며 나지막이 말했다.“배가 너무 아파요. 빨리 의사를 불러주세요.”말하는 사이에 그녀는 끈적끈적한 것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간호사는 깜짝 놀라 황급히 뛰쳐나갔고, 잠시 후 온다연은 응급실로 옮겨졌다.유강후는 응급실 문이 닫힌 후에야 도착했다.그는 안에서 나오는 간호사를 붙잡고 화를 냈다.“어떻게 된 거예요?”그는 겨우 30분 정도 자리를 비웠을 뿐이고 온다연도 계속 침대에 가만히 있었는데 왜 갑자기 유산한다는 거지?그 간호사는 마침 온다연을 지키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유강후가 화를 내자, 해고되는 줄 알고 놀라서 벌벌 떨며 말했다.“저, 저도 몰라요. 제가 문 앞에서 지키고 있을 때, 온다연 씨는 줄곧 안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컴퓨터가 바닥에 떨어져서 제가 들어가니 배가 아프다고 했어요...”이때 또 다른 의사 두 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황급히 걸어 들어갔다.이 광경을 지켜보던 유강후는 갑자기 숨이 잘 안 쉬어지고 머릿속이 하얘졌다.몸도 조금씩 차가워지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천천히 확산해 하나하나의 뼈마디 사이로 파고들었다.그는 전에 없던 무력감을 느꼈다.그는 태산이 눈앞에서 무너져도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을 만큼 천성적으로 침착한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연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병실 문밖에 서 있었다. 그는 마치 조각상처럼 응급실 문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고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권은 그의 옆에서 계속 지켜보았지만 감히 위로의 말을 건넬 용기가 없었다. 이때 유강후의 비서가 다가와서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유 대표님이 사인해야 할 아주 중요한 서류가 있습니다!” 이권은 고개를 저으며 막아섰다. “지금은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잠시 기다려야 해요!” 이권은 유강후의 신임을 받는 측근이었기에 그의 말은 상당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비록 그 서류가 매우 중요한 것이었고 상대방이 계속 재촉했지만 비서는 이권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비서는 평소에 당당한 모습으로 회사에서 모두의 존경을 받던 유강후가 지금은 응급실 문 앞에 서서 쓸쓸하고 외로워 보이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그는 유강후의 표정을 보지는 못했지만 평소 모든 이들이 의지하던 그가 지금은 심한 고통에 빠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아파하고 있었고 가슴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를 도와줄 수 없었다. 비서는 잠시 지켜보다가 마음이 무거워져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럼 대표님을 계속 지켜봐 주세요. 저는 다시 회의로 돌아가겠습니다. 나중에 유대표 님께 급히 서명이 필요한 중요한 서류가 있다고 알려 주세요.” 시간이 일분일초 지나갈수록 마치 시간이 끝없이 길게 늘어나는 듯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때, 마침내 응급실의 문이 열렸다. 온다연이 침대에 실려 나왔다. 유강후의 마음이 순식간에 위로 치솟았다. 그는 말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의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태아는 일단 무사해요. 잘 돌보셔야 해요. 더 이상 자극을 받으면 안 됩니다. 온 아가씨가 너무 큰 감정적 충격을 받아 갑작스러운 심장 리듬 이상이 생겨 태아에게 영향을 미친 겁니다...” 유강후의 마음은 다시 제자리로 내려왔다. 마치 물 밖으로 튕겨 나갔던 물고기가 다시 물속으로 돌아온 듯 그는 정상적으로 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