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녀는 어쨌든 좋은 집안에서 자란 아가씨라 멘탈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강했다.식사 시간 내내 그녀는 애써 분노를 억누르면서 계속해서 웃음을 머금고 강해숙과 이야기를 나누었다.식사가 끝난 후, 강해숙은 다실에서 차를 끓였다.온다연은 차향을 맡으니 속이 좀 편해져서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나은별은 오늘 말이 특별히 많았고, 고상하고 우아한 화제만 골라 가며 강해숙의 비위를 맞추었다.강해숙도 예의상 얘기를 이어갔지만 사실 이미 싫증이 난 것 같았다.그동안 강해숙과 지낸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강해숙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며 나은별을 친절하게 대하는 것도 십중팔구는 아들의 체면을 봐서일 것이다.온다연은 강해숙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는 나은별의 모습이 좀 우습게 느껴졌다.잠시 후, 장화연이 들어와서 강해숙의 귀에 대고 뭐라고 말하자 그녀는 잠깐 실례한다고 말하고 일어나서 나갔다.강해숙이 나가자 나은별은 즉시 표정이 바뀌더니 일어나서 온다연 쪽으로 걸어왔다.온다연도 이 순간을 기다리다가 인내심을 거의 잃을 뻔했다.그녀는 조용히 나은별을 바라보며 그녀가 다가오기 전에 입을 열었다.“강 대표님은 은별 씨를 전혀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 눈치채지 못했어요?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너무 웃겼어요.”나은별은 온다연 앞에 다가와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경멸하는 말투로 말했다.“그게 뭐 어때서요? 적어도 제가 왔다고 신경 쓰셨잖아요? 왜냐하면 저는 나씨 가문의 아가씨니까. 하지만 다연 씨는 아무것도 없는 고아예요. 강 대표님의 눈에는 지금 안고 있는 고양이보다도 못한 존재죠.”온다연은 품속의 구월이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코웃음을 쳤다.“그래요? 하지만 아쉽게도 저는 강 대표님의 인정이 필요하지 않거든요. 유강후만 저를 인정하면 되니까요.”그녀는 나은별을 힐끗 쳐다보았다.“은별 씨, 저를 상대할 힘이 있으면 어떻게 유강후한테서 더 많은 실익을 챙길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 게 나을 거예요. 어쨌든 유강후는 당신에게 미안한 마음을
장화연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무슨 일인데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 온다연 씨가 여기서 쉬고 있는데 그렇게 떠들면 지장이 되잖아. 규칙을 하나도 몰라!”하인은 그제야 온다연이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유강후는 임신한 온다연이 잠이 많아 하인들에게 특별히 하인들에게 조용한 환경을 만들어주라고 분부했다.그래서 하인들은 평소에 일할 때 온다연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했다.그녀는 이렇게 큰 소리로 말했으니 확실히 잘못했다고 느끼고 급히 사과했다.“죄송해요. 잠시 깜박했어요.”장화연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야단법석을 떨어?”하인이 급히 말했다.“왠지 모르지만, 오늘 문 앞에 길고양이들이 가득 몰려오더니 나은별 씨에게 미친 듯이 달려들어 옷을 찢고 얼굴에도 생채기를 냈어요.”“그 고양이들은 우리가 쫓아도 가지 않고, 정말 이상해요. 장 집사님, 빨리 가보세요. 나은별 씨는 어쨌든 손님이잖아요.”“알았어. 네가 나가서 도와줘.”장화연이 말을 자르자, 하인은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갔다.장화연이 가려 할 때, 온다연이 구월이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저도 가볼래요.”장화연은 두꺼운 패딩을 꺼내 그녀에게 걸쳐주고 흰색 스노우 부츠를 갈아 신게 했다.“바깥이 추우니 구경을 해도 따뜻하게 입어야 해요.”온다연이 입을 오므리고 웃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장 집사님, 캣민트를 얼마나 넣은 거예요? 조금만 넣어서 이 세 마리 고양이에게 시달림을 좀 받게 하면 된다고 했더니 이 근처의 길고양이를 모두 끌어오면 어떡해요?”장화연이 정색하며 말했다.“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그 여자가 고양이를 끄는 체질이라서 그런 거죠.”이때 밖에서 여인의 비명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딱 들어도 나은별의 목소리였다.“나가봐요.”출입문을 나서자, 나은별이 길고양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보였다. 몇 마리는 그녀의 몸에 달라붙어 하인들이 아무리 잡아당겨도 떨어지지 않았다.게다가 맞은편 골목에서 계속 길고양이들이 달려오
유강후는 이를 바득 갈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론 문 앞에 너무 많은 고양이를 불러들이지 마. 길고양이들은 야생성이 강해서 혹시라도 다치면 어떡하려고?”온다연은 모르는 척하며 천진난만한 얼굴로 말했다. “고양이들을 많이 부르다니, 내가 무슨 신선이라도 돼서 고양이를 불러들이겠어요? 은별 씨따라 온 거예요.”유강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장화연에게 말했다. “은별이한테 갈아입을 옷 좀 가져다주세요. 분명 옷에 뭔가 묻어서 이렇게 많은 고양이들이 따라온 걸 거예요. 그리고 사람들을 불러서 고양이를 쫓아내세요.”장화연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도련님.”이때, 나은별의 울부짖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강후 씨!”“나 고양이가 너무 무서워. 나 좀 도와줘!”“강후 씨, 나한테 이러면 안 돼!”“재민아, 한재민, 나 너무 무서워, 나 좀 구해줘!”...유강후는 몸이 굳어진 채 발걸음을 멈췄다.온다연은 유강후의 옷을 꼭 붙잡고 놓지 않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은별 씨부터 구해줘요. 아저씨가 필요한 것 같은데.”유강후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집 안으로 들어와서도 온다연은 그의 몸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의 목을 감싼 채 머리를 목덜미에 파묻으며 작게 말했다. “저 배고파요. 아저씨가 만들어준 떡국 먹고 싶어요.”유강후는 소파로 가서 그녀를 내려놓으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온다연, 다음부턴 이러지 마.”그는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나갔다.온다연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문 채 그를 따라 현관까지 갔다.다만 그녀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문 앞에 서서 조용히 엿들었다.밖에는 고양이가 몇 마리 더 왔는지 사람들이 쫓아내고 있었다. 고양이 울음소리는 조금 처참했다.그리고 나은별의 울부짖는 소리도 똑같이 처참했다.잠시 후, 소란이 멈추고 온다연도 그만 꽃방으로 돌아갔다.꽃방은 꽤 넓었다. 강해숙도 이곳을 좋아하는
온다연은 순간 움찔했다. 드디어 얘기하려는 건가?유강후가 먼저 이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그녀는 왠지 모르게 미묘한 긴장감이 돌았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하고 싶으면 말해도 돼요.”유강후는 옅은 한숨을 내쉬더니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맞댔다.곧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재민은 한이준의 형이야. 어릴 때부터 나랑 같이 자랐고 모든 친구들 사이에서도 우리 둘이 제일 친했어.”“재민은 엄청 유능한 친구였어. 내가 봐도 내 능력에 전혀 뒤지지 않는 사람이었지. 재민이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한씨 가문의 사업은 진수의 손에서 빠른 속도로 성장했어.”그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지고 점점 깊어지더니 어느새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어느 해였나? 나, 한재민, 한이준, 송지원, 봉현수, 그리고 함께 자란 여자애들 몇 명이랑 같이 요트를 타고 바다로 나갔어. 그런데 중간에 사고가 났고 난 바다에 빠졌어.”그는 극심한 고통에 빠진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온다연의 허리를 더 세게 감싸안았다.온다연은 그를 안아주며 천천히 등을 두드려 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그만 해도 돼요.”유강후는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나 스스로 헤엄쳐 올라갈 수 있었어. 그런데 그날은 유난히 날씨가 나빴고 주위에서 상어 떼가 발견됐지. 재민은 우리 중에서 수영을 가장 잘했어. 혹시라도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재민이 먼저 구명보트를 타고 내려왔어.”“참 신기한 게, 평소엔 그 지역의 상어 떼들이 절대 요트를 공격하지 않는데, 그날은 미친 듯이 우리를 쫓아오더니 찢어버리려 했어. 결국 난 구출됐지만 재민은 그대로 사라졌어. 우린 며칠 동안 재민을 찾아다녔지만 흔적조차 찾지 못했어.”온다연은 그의 몸이 점점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그의 손도 떨리는 듯하더니 목소리마저 고통스러워졌다.온다연은 그의 손을 꼭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나은별이 조금 철이 없을 수 있지만 지나치게 잘못한 건 없어. 날 봐서라도 은별이랑 다투지 않을 수 있어?”온다연은 가슴 속에서 실망이 솟구치며 공허함과 아픔을 느꼈다.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 나은별을 믿어요? 나은별이 나쁜 짓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유강후의 목소리는 가라앉은 채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들렸다. “너무 지나치지 않는다면...”“아저씨!” 온다연은 그의 말을 가로챘다.“만약 나은별이 날 다치게 했다면?”유강후는 몸이 뻣뻣해지더니 자세를 바로잡고 온다연을 바라보았다. “나은별이 너한테 무슨 짓 했어?”온다연은 잔뜩 긴장한 유강후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그래, 믿지 않겠지.’그는 나은별과 함께 자란 어린 시절의 친구로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지독히도 얽혀있을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구해준 은혜도 있었다.나은별을 믿지 않고 그녀를 믿을 리 없었다.마치 그녀가 주한만 믿는 것처럼.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손을 내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손가락, 나은별이 밟아서 부러졌어요.”그녀는 반쯤 감긴 눈으로 무심하게 말했다. 보기엔 거짓말하는 듯한 기색이 없었다.하지만 유강후는 되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새끼손가락에 가볍게 입을 맞추더니 말했다. “내가 그런 거잖아. 다연아, 귀여운 농담하지 마.”온다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유강후를 조용히 바라보았다.그는 천천히 길게 내려온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꽤나 진지하게 말했다. “앞으로 나은별이 네 앞에 나타나지 않도록 할게, 그럼 되겠어?”온다연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그녀의 눈에서 차오르는 실망감에 유강후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온다연의 손을 꼭 잡은 채 말했다. “지난번에 나은별이 호텔에서 구월이를 다치게 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오늘 너도 복수했잖아. 은별이도 얼굴이 긁혔으니 이
강해숙은 밖을 바라보며 안색이 변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후야, 나랑 나가자꾸나.”두 사람이 나가자 제네시스 차 문이 열리더니 훤칠한 기럭지에 위엄 있는 남자가 내렸다.유재성이었다.비록 그는 이미 예순쯤 되었지만 겉모습은 마치 쉰을 갓 넘긴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생활한복을 입고 위엄 있어 보였다.유재성은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꽃방 쪽으로 쳐다보았다.온다연은 이내 옆으로 물러나며 시선을 피했다.유재성은 그녀에게 비교적 예의 있게 대해주었고 한 번도 그녀를 질책한 적이 없었다. 다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너무 압도적인 데다 유씨 가문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온다연은 별로 마음이 가지 않았다.유재성은 곧 홀로 향했다.집에 들어서자마자 복도 끝에 서 있는 강해숙이 보였다.강해숙은 은은한 기품을 풍기며 새하얀 한복을 입고 있었다.그녀는 비록 나이가 오십을 넘었지만 관리를 잘한 덕분에 마치 사십 대 초반처럼 보였다.하지만 그 우아한 얼굴은 어딘가 약간 초췌해 보였다.유재성은 그녀를 보자마자 격양된 채 말했다. “해숙아...”강해숙은 서늘한 표정으로 서재를 향했다. “유재성,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30분 줄게. 다 말했으면 당장 나가.”유재성은 유강후를 한 번 흘겨보더니 말했다. “너도 들어와.”서재 안, 유재성은 강해숙에게 온갖 아양을 떨었지만 강해숙은 여전했다.유재성은 지쳤는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해숙아, 어떻게 해야 나를 용서하겠어?”강해숙은 담담하게 말했다. “연서가 세상을 떠난 그날 밤부터 우리는 이미 끝났어. 유재성,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니?”남 보기에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사업가로 보이는 이 남자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쉬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연서도 내 딸이야. 나도 너무 힘들었어. 근데 왜 날 이렇게 미워하는 거야...”강해숙은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아니, 연서는 네 딸이 아니야. 연서가 네 딸이었다면 그날 밤 넌 네 어머니가 유일한 약을
그녀는 갑자기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너, 집사가 나한테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 모든 사람이 유민준을 돌보고 있었어. 근데 우리 연서 곁엔 아무도 없었어. 집사가 몰래 연서에게 물을 가져다주었을 땐 이미 의식이 거의 없는 상태였어. 계속 엄마 아빠가 자기를 버렸냐고 중얼거리고 있었대...”그녀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얼굴을 감싸 쥐며 눈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유재성 역시 눈시울이 붉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방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한참 지나서야 강해숙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네가 연서를 한 번이라도 보러 갔더라면 연서는 죽지 않았을 거야. 누군가 물 한 모금만 줬더라도 버틸 수 있었어. 근데 넌? 넌 일해야 했고 많은 사람을 재난에서 구제하려 했지만 정작 네 딸은 모른 체 했잖아!”“집사 말로는 네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와 약이 한 알밖에 남지 않아서 유민준한테만 줄 수 있다고 했다며. 근데 넌 회의에 들어가야 한다면서 전화를 급히 끊었지. 유재성, 네 어머니가 늘 남아선호 사상인 걸 알았으면서도, 연서가 많이 아프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넌 그냥 방관했어.”“네가 연서를 포기하는 순간 나도 포기한 거야. 우리 사이는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그녀는 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나가. 다시는 찾아오지 마. 여긴 연서가 살던 곳이야. 더 이상 우리 연서를 역겹게 만들지 마!”유재성은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소파에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유강후는 부드럽게 강해숙의 등을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이제 그만해요.”강해숙은 고통에 휩싸인 채 낮게 말했다. “강후야, 왜 그때 너희를 데리고 가지 않았을까. 왜 너만 데리고 갔을까. 그때 연서도 데리고 갔더라면 우리 연서는 지금도 내 곁에 있었을 텐데.”유강후는 마음속의 고통을 애써 억누르며 어머니를 위로했다. “그때 누나는 안정을 취해야 하는 상황이었잖아요. 우리도 원래 3일만 떠나기로 했었고, 그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어
다락방은 항상 잠겨 있었다.이 집에서 꽤 오래 살았지만 온다연은 처음으로 다락방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처음 이 집에 왔을 때 유강후는 잠겨있는 곳 빼고는 어디든 갈 수 있다고 했다.아마도 이 다락방이 유강후가 말했던 갈 수 없는 곳인 듯 했다.반쯤 열린 문 사이로 온다연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방은 별로 크지 않았지만 엄청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바닥과 가구에는 먼지 한 점 없었다.누군가 자주 청소하는 게 확실했다.다만 이 방에 있는 모든 물건은 다소 오래되어 보였다. 왠지 어린 소녀가 좋아할 만한 것들이었다.혹시 유연서가 남긴 물건일까?온다연은 다락방 중앙에 서서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에 등골이 서늘해졌다.그녀는 하얀 천으로 덮여있는 이젤 앞으로 다가갔다.천천히 천을 벗기자 안에는 채 완성되지 않은 유화였다.끝없는 해바라기 꽃밭에 두 명의 소년 소녀가 앉아 있었다.그 소년은 유강후와 많이 닮았고 소녀는 그날 사진 속 인물과 닮아 있었다.두 사람은 손을 잡고 매우 다정한 모습이었다.온다연은 손을 뻗더니 한쪽 모서리를 만졌다.거기에는 강후와 연서는 영원히 함께라고 쓰여 있었다.지금의 필체처럼 강렬하진 않지만 나름 풍모가 엿보였다.아마도 유강후가 어렸을 때 쓴 것 같았다.그녀는 글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천을 다시 덮고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책상 위에는 오래되어 보이는 사진첩 몇 개가 놓여 있었다.온다연은 가장 위쪽의 사진첩을 펼쳤다.잘 보관된 사진들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변함없었다.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는 작은 소년의 등에 업힌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사진을 찍을 때 바람이 불었는지 두 사람의 옷자락은 바람에 휘날리며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을 자아냈다.온다연은 멍하니 그 사진을 바라봤다.어쩌면 이게 바로 그들의 정일까.사진을 펼쳐보며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아파졌다.오른쪽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유일한 사랑 연서라고 적혀 있었다.유일한 사랑 연서.유일하게 사랑하는 연서.유강후 같은 사람이 이런
유강후는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아니다. 우리 셋이 모이면 현수 씨랑 지원이가 서운하다고 난리 치겠네. 차라리 내가 미리 연락할게. 시간 괜찮다고 하면 이쪽으로 오라고 할게.”한재민이 답했다.“그래. 하루 정도는 여유 있으니까 나중에 시간 정하면 알려줘.”유강후가 다시 물었다.“이번에 형수님이랑 조카도 함께 온 거야? 같이 왔으면 데리고 오지. 아직 형수님을 만나 뵌 적이 없네?”아내와 아이를 언급하자 한재민의 표정은 한층 부드러워졌다.“같이 왔어. 은하 이번에 둘째를 임신했어. 혼자 두고 나올 수는 없어서 그냥 집에 있으라고 했어. 나도 그게 마음이 편하고.”유강후의 눈빛에는 부러움이 스쳤다.“우리 중에서 제일 먼저 아이를 낳을 줄은 몰랐네. 그것도 둘씩이나. 솔직히 제일 많이 놀았던 사람이잖아.”두 사람은 같은 생각이 스친 듯 갑자기 말이 없었다.“화장실 다녀올게요.”이를 알아챈 온다연은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 모두 오랜만에 만났으니 당연히 옛 추억에 대해 언급하고 싶을 것이고 그중에 여자 얘기가 빠질 수는 없다. 아니나 다를까 온다연이 떠나자 한재민은 곧바로 물었다.“어릴 때 사람들이 우리 둘 다 나은별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잖아. 사실 나는 네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눈치챘어. 그런데 너무 깊이 숨겨서 아직도 그 여자가 누군지 모르겠다니까?”유강후는 눈빛이 부드러워졌다.“내 지금 아내야.”한재민은 온다연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러니까 그때 좋아하던 사람이 저분이라고?”“나이 차이가 꽤 있네?”“어쩐지 그렇게 숨기더라. 사람들이 수군거릴까 봐 얘기 못 했던 거지?”유강후가 답했다.“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건 대수롭지 않았는데 그때 다연이가 많이 어렸거든. 나도 일 때문에 집 비우는 일이 잦아서 옆에 있을 수가 없었어.”유강후는 그동안 온다연이 겪었던 일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다.“많이 후회해. 그런데 후회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한재민은 말문이 막혔
온다연은 눈살을 찌푸렸다.“누가 보면 우리가 살 능력이 없는 줄 알겠네.”“서혜윤?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네요. 한국인이면서 한국을 모욕하는 게 사람이 할 짓인가요? 대중의 사랑을 먹고 사는 직업이면 감지덕지할 줄 알아야지 어떻게 이용하고 무시할 생각을 하는 거죠? 이런 사람이 배우를 한다면 아이들이 뭘 보고 자라겠어요.”“출연금지 시키는 게 현명한 선택이네요. 오늘 찍힌 영상도 인터넷에 유포하는 게 좋겠어요. 사람들도 자기가 좋아하던 배우의 본모습은 알아야죠.”“삼촌인 저분도 같이 처리하는 게 좋겠어요. 피를 섞은 가족인데 어떤 사람인지는 안 봐도 뻔해요. 아무튼 앞으로 연예계에서 서혜윤은 보고 싶지 않네요.”유강후는 흐뭇하게 웃었다.“알겠어요. 유나 씨가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요.”“또 뭐 사고 싶은 건 없어요? 쇼핑하러 나왔는데 괜히 저 사람들 때문에 기분 망치면 안 되잖아요. 들어가서 쇼핑할까요?”유강후는 온다연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뒤따라간 임혜린은 대뜸 온다연에게 말했다.“나는 급한 일이 있어서 같이 못 갈 것 같아. 먼저 가볼게.”그렇게 말하고는 온다연의 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부랴부랴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러다가 입구에서 어떤 잘생긴 남자와 부딪히고 말았다.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임혜린은 표정이 확 돌변했다.“한, 한이준...”남자는 미간을 찌푸렸다.“내 동생을 알아요?”임혜린은 그제야 이 남자가 한이준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라는 걸 알아챘다. 디테일하게 말하자면 한이준보다 훨씬 성숙했다.깜짝 놀란 임혜린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한재민?”‘죽은 사람이잖아... 왜 살아있는 거지? 요즘은 죽다 살아나는 게 유행인가?’남자가 물었다.“저를 아세요?”임혜린은 멍하니 끄덕이다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 모릅니다.”어렸을 때 멀리서 몇 번 본 게 전부라 아는 사이라고 말하기에는 애매하다.한씨 가문과 그 어떤 일로도 엮이고 싶지 않았던 임혜린은 재빨리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이때 그녀의
서혜윤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 채 당당하게 말했다.“맞아요. 대작 영화죠. 아참, 방금 지나가신 분이 나 대표님인 것 같아요.”서혜윤은 입구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나은별은 보이지 않았다.“나 대표님과 아는 사이인가요?”유강후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곧장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그리고 그는 스피커폰으로 돌렸고 곧이어 한이준의 나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강후야, 회사 도착했는데 너 지금 어디야?”다른 사람은 괜찮았는데 임혜린은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한이준 이 나쁜 X. 설마 유강후한테 끌려온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서혜윤을 쳐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북아메리카에 왔다고?”“응. 왜 계속 헛소리만 해.”안색이 어두워진 임혜린은 당장이라도 유강후의 살점을 찢을 듯 사나운 눈빛으로 노려봤다.‘딱 봐도 정보 유출했네. 진짜 왜 이러는 거지?’유강후는 여전히 태연했다.“서혜윤이라고 알아? 하나 엔터 소속인 것 같은데?”서혜윤은 자신에게 좋은 일이 생기는 줄 알고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유강후를 바라봤다.“들어본 이름이네? 왜? 마음에 들었어?”유강후는 차갑게 말했다.“한이준, 너는 함부로 놀리는 그 입이 문제야. 중요한 얘기를 해주려고 했는데 기분이 상해서 말하고 싶지 않다.”“알았어. 조심하면 되잖아. 중요한 얘기라는 게 뭐야?”유강후는 임혜린을 힐끗 쳐다보더니 그녀의 극도로 화가 난 표정을 보고선 비웃듯이 말했다.“됐어. 다음에 얘기할게. 대신 처리해 줘야 할 일이 생긴 것 같아.”“서혜윤이라는 여자 당장 끌어내려.”이 말이 나오자 모두가 놀랐지만 유독 임혜린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서혜윤은 그제야 다급해지기 시작했다.“대표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갑자기 저를 끌어내린다뇨?”유강후는 상대하기 싫은지 가볍게 무시하고선 핸드폰 너머의 한이준에게 말했다.“명심해. 어디에 출연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똑바로 처리해.”“다짜고짜 연락해서 한다는 말이 여배
서혜윤은 멍하니 얼굴을 가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서안준을 바라봤다.“삼촌, 왜 때려요?”서안준은 버럭 화를 냈다.“입 다물라고 했잖아. 이 사람이 누군지 알아?”서혜윤은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주주라면서요? 그게 뭐 대단하다고. 기껏해야 주식을 조금 더 많이 가지고 있을 뿐이잖아요. 고작 그걸로 사람을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거예요?”서안준은 바보 같은 조카 때문에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쇼핑몰 주주일 뿐만 아니라 미래 그룹의 대표야. 강씨 가문의 후계자라고. 이제 알겠어? 무식하면 입 다물고 있어야지. 너 때문에 괜히 나까지 밉보였잖아.”서혜윤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이분이 미래그룹 대표라고요?”마침 서혜윤은 이번에 미래 그룹이 투자한 영화에 참여하게 되었다.소문에 의하면 미래 그룹의 고위 임원이 자신의 아내를 위해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영화는 그렇다치고 가장 중요한 건 이 영화의 여주인공이 차기 미래 그룹의 쥬얼리 모델과 많은 고급 화장품 브랜드의 모델로 채택되어 무한한 혜택을 얻을 수 있다.서혜윤은 청순하고 섬세하게 생긴 외모 덕분에 캐스팅 때 어떠한 스폰서의 비서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분은 서혜윤이 실제 영화의 여주를 닮은 데다가 연기력도 나름 괜찮아서 후보에 올렸다고 한다.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서 미래 그룹의 회장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게다가 영화 속 여주인공의 실물도 보게 되었다.‘젠장. 망했네.’서혜윤은 곧바로 다른 대책을 생각했다.실제 여주인공을 닮았다는 건 눈앞의 이 남자도 분명 그녀에게 어느 정도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시밎어 서혜윤은 톱 배우 라인에서도 예쁘다고 소문이 났기에 애교를 부린다면 흔들리지 않을 남자가 없다며 자신했다.이를 생각한 서혜윤은 목소리를 낮추고 눈물을 글썽이며 유강후를 바라봤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건 아니에요. 이분이 대표님의 아내라는 걸 알았다면 절대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을 거예요...”서
유강후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안색이 어두워지며 이권에게 속삭였다.“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이권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며칠 후에 있을 영화제 때문에 협찬받으러 온 게 아닐까요?”유강후는 목소리가 싸늘해졌다.“심사위원팀에 연락해서 당장 명단에서 빼버려. 절대 행사장에 들어오게 해서는 안 돼. 이름 올리는 건 더더욱 안되고. 만약 이름이 올라가면 올해는 물론 이후의 모든 협찬이 취소될 거라고 단호하게 얘기해.”말하는 사이에 나은별은 이미 안으로 들어갔다.유강후는 여전히 싸늘했다.“끌어내. 꼴도 보기 싫으니까.”이권은 재빨리 나은별을 잡았다.“대표님께서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뵙기 곤란하다고 합니다. 옆에 있는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리시죠.”나은별은 자리에 얼어붙은 채로 유강후를 바라봤다.“강후 씨, 3년 동안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어. 내가 그렇게 미워?”“내가 잘못했어. 김원도가 그렇게 미칠 줄 알았더라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다연 씨랑 바꾸는 걸 막았을 거야.”말을 하던 그녀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다연... 다연 씨...”이권은 안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아 재빨리 나은별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저랑 같이 나가시죠.”너무 놀라 혼이 나갔던 나은별은 순순히 이권의 손에 끌려갔고 중요한 일을 잊은듯했다.나은별을 보자마자 온다연은 극심한 두통이 밀려왔다. 유강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녀를 본 순간 이를 알아채고 재빨리 다가갔다.“머리가 아파요?”온다연은 나은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저 사람 누구예요?”유강후는 차분하게 말했다.“중요하지 않은 사람이에요. 예전에 유나 씨랑 갈등이 있던 사이라서 아마 머리가 아플 거예요.”옆에서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임혜린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저 쓰레기 같은 X.”유강후는 경고하는 듯 고개를 돌리더니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이때 서안준이 애써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강 대
하지만 온다연은 서혜윤에게 꺼지라고 했다. 설마 블랙 카드 사용자일까?그 생각은 잠깐 스쳤지만 곧 부정되었다.불가능했다.블랙카드는 세 명의 대주주만 가진 것이다. 이들은 평소 바빠서 자주 오지 않으며, 설령 오더라도 상위에서 미리 통보하여 매장을 비우게 했고 절대로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지 않았다.그러니 이 여자는 블랙카드가 아닌 골드 카드 사용자일 것이고 여기서 허세를 부리고 있다고 매니저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온다연을 직접적으로 폭로할 수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말했다. “고객님, 어서 나가주세요. 이미 내부 가격을 드렸으니 다른 곳에서도 충분히 쇼핑할 수 있어요. 꼭 여기서 살 필요는 없잖아요!”그 순간, 그는 말을 멈췄다.온다연이 손에 검은 카드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쇼핑몰의 블랙 카드였다.그는 눈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이건...”“블랙 카드예요.” 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제 이 사람들을 쫓아낼 수 있나요?”매니저는 깜짝 놀라며 다시 한 번 온다연을 살폈으나 그녀의 옷차림에는 명품이라 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그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그 카드, 진짜예요?”“당연히 가짜죠!” 서혜윤은 바닥에서 일어나며 온다연을 가리켰다. “저 사람들이 블랙카드를 가질 리가 없어요!”“경찰 불러요! 가짜 카드로 사기 치다니, 어서 신고해요!”매니저는 블랙카드를 유심히 살펴본 뒤, 잠시 망설이며 말했다. “하지만 이 카드, 가짜 같지는 않아요. 제가 진짜를 두 번 본 적이 있는데 이 카드와 똑같아요. 여기 저희 쇼핑몰의 보안 마크도 있어요.”그때 몇 명이 매장으로 들어왔고 서혜윤은 그들을 보자마자 다가가며 말했다. “삼촌! 여기에 계셨네요! 여기에 블랙 카드를 들고 사기 치는 사람이 있어요. 빨리 경찰을 불러서 잡아가게 해요!”그 사람은 쇼핑센터의 주주 중 한 명인 서안준이었다.서안준은 크게 화를 말했다. “북아메리카 최고급 쇼핑몰에서 소란을 피우다니! 어서, 저
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 말해보세요.”그때 서혜윤의 옆 사람이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만해, 저 여자, 너 찍고 있는 거 같아.”서혜윤은 손을 휘휘 휘둘렀다. “뭐가 두려워? 여긴 외국이야.”온다연은 손뼉을 한 번 치며 말했다. “서혜윤 씨, 참 거만하시네요. 제가 이 영상 인터넷에 올려서 당신을 완전히 망가뜨릴 수도 있어요.”서혜윤은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 “뭐라고요?”온다연은 서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못 할 것 같아요? 당신은 국내에서 벌어놓은 돈으로 국내 제품을 무시하고 소비자들까지 경멸하며 ‘촌놈’ 이라고 말했죠. 외국 제품을 좋아하는 건 자유지만 자기 나라 사람을 이렇게 대놓고 무시하는 건 스타 자격이 없다고 보는데요!”“예진 씨, 영상 올리고 핫서치도 하나 사요.”권예진은 이미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바로 대답했다. “알겠어요, 바로 올릴게요!”서혜윤은 크게 화를 내며 권예진의 핸드폰을 잡으려고 달려들었지만 권예진은 그녀를 밀쳐 바닥에 넘어뜨렸다.서혜윤은 분에 못 이겨 소리쳤다. “보디가드, 보디가드 어디 있어? 당장 불러서 이 년들 손목을 부러뜨려!”직원은 급히 온다연 일행에게 눈짓을 하며 말했다. “빨리 나가세요, 서혜윤 씨 삼촌이 여긴 주주예요. 정말로 싸움이 나면 여러분만 불리해질 거예요!”온다연은 코웃음을 치며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이권 씨, 이권 씨 사람들 어디 있어요? 바로 CC 매장으로 와주세요, 누가 저한테 손대려고 해요!”전화를 끊은 후, 서혜윤의 보디가드들이 이미 매장으로 돌진해 들어왔고 서혜윤은 온다연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때려. 특히 저 여자 얼굴을 망가뜨려!”그 얼굴이 너무 눈에 거슬렸고 볼 때마다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임혜린은 온다연 앞에 서서 막았다. “얘가 누구인 줄 알기나 해요? 손 대기만 해봐요. 당신 같은 작은 스타는 물론이고 그쪽 삼촌까지 와도 싹싹 빌 수밖에 없을 거예요!”그녀는 날카롭게 말하며 강한 존재감을
그때, 그 세 사람도 온다연과 그 일행을 보았다.세 사람 중, 맨 앞에 있던 이는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온다연의 얼굴을 두 초간 바라본 뒤, 질투심이 치밀어 올랐다.그때 매장 직원이 그들을 알아보고 웃으며 다가갔다.“혜윤 씨, 오셨네요. 새로운 스타일이 많이 입고됐는데 오늘 한번 보실래요?”서혜윤은 눈꺼풀을 살짝 올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게 비워. 이런 촌놈들과 함께 쇼핑하기 싫어.”직원은 잠시 놀라며 임혜린이 옷을 고르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혜윤 씨, 그분들도 저희 고객님이세요. 이렇게 하는 건 조금 곤란할 것 같은데요.”그때 옆에 있던 다른 여자가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우리 혜윤이는 대스타야. 최근엔 거액의 투자가 들어간 영화 에서 여주인공을 맡았어. 보안이 철저해야 하는데 누가 여기서 뻔뻔하게 몰래 촬영하고 있을지 모르잖아? 며칠 전에도 여배우가 옷 갈아입는 모습이 찍혔다는 뉴스까지 나왔고. 어떻게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옷을 갈아입어.”직원은 서둘러 말했다. “혜윤 씨, 정말 축하드려요. 그런데 저희 매장에는 여러 개의 탈의실이 있고 모두 매일 점검하고 있어서 그런 염려는 전혀 없어요.”서혜윤은 턱을 살짝 올리며 온다연을 가리키고 말했다. “저 여자들, 나가게 해.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옷을 갈아입을 수는 없어.”직원은 난감해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분들은 이미 옷을 고르셨고 여기 오시는 고객님들 대부분은 배경이 있는 분들이라 쉽게 무시할 수 없어요.”서혜윤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 삼촌이 이곳의 주주야. 잊었어? 이곳은 우리 집 매장이나 마찬가지야. 만약 내 심기를 건드리면 여기서 가게 못 차릴 줄 알아.”직원은 어쩔 수 없이 임혜린에게 다가가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방금 중요한 고객님이 오셨는데 그분께서 매장을 비우라고 하셨어요. 뜻을 거스를 수 없는 분이니 고객님께선 다른 시간에 다시 오셔야 할 것 같아요.”임혜린은
“잠깐 쉬자, 나 좀 피곤해.”“나도 피곤해, 앞에 VIP 라운지가 있는데 거기 가자. 무료 음료수랑 다과가 있어.”권예진은 듣자마자 눈이 반짝였다. “다과가 무료라고요? 나 배고팠는데 잘됐네요!”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많이 소비했는데, 다과 하나 먹는다고 뭐라고 하겠어요. 얼른 가요.”VIP실은 꽤 넓었고 안에는 몇 명이 흩어져 앉아 있었다.온다연 일행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멀리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여기가 뭐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인 줄 아나?”“조용히 해, 들었으면 어쩌려고!”“뭐가 무서워? 저 사람들 옷차림 좀 봐, 뭐 같아?”“아마 싸구려 브랜드겠지. 명품도 입지 못하는 처지에 여기에 와서 쇼핑한다니, 창피한 줄도 모르나 봐.”“아까 그 여자랑 같은 매장에 있었는데, 이것저것 예쁘다고 난리를 치더라고. 촌뜨기 티 나는 저런 사람들이 뭐가 무서워.”임혜린은 미간을 찡그리며 다가가려고 했지만 온다연이 그녀를 잡았다. “됐어, 그런 사람들하고 싸울 필요 없어. 그냥 못 들은 척하고 넘어가자.”임혜린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이 옷이 뭐 어때서? 국제적인 디자이너 브랜드에서 한정판으로 나온 거야. 전 세계에서 50벌밖에 안 나오는 거라 저 인간들은 주문하고 싶어도 못 한다고!”온다연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됐어, 그냥 내버려둬. 우리 지금 충분히 피곤하잖아. 여기서 또 싸우면 아마 더 이상 쇼핑 못 할 걸.”권예진도 덧붙였다. “맞아요, 신경 쓸 필요 없어요. 품위도 없고 남들을 배려할 줄도 모르는 걸 보니 좋은 사람들이 아닐 거예요.”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세 사람을 슬쩍 훑어봤다.그들은 유창한 한국어를 했고 그중 한 명은 낯이 익었다. 아마도 유명한 여배우였던 것 같은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세 사람은 그들이 자기를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챈 듯, 비꼬는 말 몇 마디를 주고받은 후 자리를 떠났다.그들이 떠나고 나서 온다연 일행은 한동안 편안하게 쉬면서 음료도 마시고 다과도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