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만약 다시 붙잡힌다면 아이는커녕 제 목숨도 지켜낼 수 없을 거예요!”택시 기사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얇은 옷차림이었던지라 확실히 어딘가 불쌍하게 보여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이 차는 이미 들켰어요. 지금 우리 기사들만 있는 단톡방에서도 모든 게이트가 막혔다고 문자가 올라오고 있어요. 이 차 색깔만 골라 전부 검사한다고 하더군요. 어휴, 한번 마음 쓴 김에 끝까지 써보죠. 내가 다른 차를 불러줄게요.”말을 마친 그는 누군가에게 연락했다.5분 정도 지났을까, 자가용 한 대가 그들이 탄 차 옆에 멈춰 섰다.기사가 말했다.“얼른 타요. 저걸 타면 안전할 거예요.”온다연은 머뭇거리다가 택시 기사에게 감사 인사를 하곤 승용차로 올라탔다.안전하든 아니든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계속 이곳에만 있다가 유강후에게 붙잡혀 돌아가는 것보단 나았다.가는 길은 아주 순조로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원으로 돌아왔다.차에서 내리자마자 검은색 승합차가 그녀를 향해 빵빵 소리를 냈다.그녀는 빠르게 승합차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그 안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임정아가 앉아 있었다.임정아의 어깨는 훤히 드러나 있었고 목에는 비싼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녀는 눈썹을 꿈틀거렸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병원에 같이 가 달라니요. 전 연예인이에요. 그런데 저한테 그런 부탁을 하시면 어떻게 해요?”온다연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뒤 생수를 꺼내 마셨다.“이렇게 하면 돼요. 일단 옷부터 갈아입고 모자를 눌러 써요. 그러면 아무도 정아 씨인 걸 모를 거예요.”임정아는 말문이 막혔다.“만약 파파라치한테 사진이라도 찍혀 내일 아침 대문짝만한 기사라도 나면 저더러 어떻게 하라고요!”온다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이따가 신분증도 빌려줘요.”임정아가 말했다.“안 돼요!”온다연은 멈칫했다.“그럼 정아 씨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없을 거예요.”임정아는 혀를 하며 눈을 가늘게 접었다.“전에는 연약하고 만만한 상대인 줄 알았
온다연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지고 눈앞에 있는 차를 노려보았다.자세히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안도할 수 있었다.하지만 임정아의 안색이 변했다.그녀는 그 차를 빤히 보다가 기사한테 말했다.“그냥 들이박아요!”기사는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럴 수 없습니다. 저 차는 송 시장님 차에요. 전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아요.”임정아의 표정은 한껏 일그러졌다.“그냥 박으라면 박아요. 대체 뭘 두려워하는 거죠?”기사는 여전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임정아는 차에서 내린 뒤 기사를 운전석에서 끌어냈다.“정말 쓸모없네요. 꺼져요!”그러고 난 후 시동을 걸었다.두 사람이 탄 차는 그대로 앞차로 달리고 있었다.앞에 있던 차는 승합차가 정면으로 달려오자 바로 핸들을 꺾어 피해버렸다.임정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속도를 끝까지 올리며 빠르게 병원으로 달렸다.온다연은 뒤를 보다가 작게 말했다.“따라오고 있어요.”임정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다연은 송지원을 만난 적 있었다. 경원에서 아주 젊은 나이로 부시장 자리에 오른 사람이었고 집안 배경도 빵빵했다.게다가 송지원은 유강후와도 깊은 사이였다. 온다연은 유강후가 마련한 식사 자리에 여러 번이나 송지원을 봤었다.만약 송지원이 임정아의 차에 자신이 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모든 것이 들통나게 될 것이다.그렇게 생각한 온다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송지원 씨는 아저씨 친구에요. 만약 제가 여기에 있다는 걸 들키기라도 하면 끝장날 거예요.”임정아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그럼 이따가 연기 좀 해줘요. 제 매니저인 척하면 못 알아볼 거예요.”온다연이 또 물었다.“송지원 씨랑은 무슨 사이에요? 왜 따라오는 거죠?”임정아는 입꼬리를 픽 올리며 말했다.“전 약혼자예요. 그리고 지금은 원수지간이죠. 딱히 무슨 사이라고 할 건 없죠.”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빠르게 병원에 도착했다.내리기 전 온다연은 마스크를 착용한 뒤 모자를 푹 눌러
임정아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나은별 그 여자는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니에요. 저도 상대하기 버거운 사람이라고요. 교활하고도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긴 하지만 남자들은 대부분 나은별 같은 타입이 취향이죠.”온다연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말을 하려던 순간 고개를 드니 차 앞에 누군가 서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그 사람은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고 아주 점잖아 보였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임정아에게 고정되었다.송지원이다.온다연은 황급히 마스크를 착용하며 작게 말했다.“앞에 사람 있어요.”임정아도 고개를 들어 보았다. 안색이 바로 굳어지며 빈정댔다.“언제부터 송지원 씨에게 사람을 미행하는 취미가 생긴 거죠? 전 아주 대단하신 송지원 씨가 절대 이런 볼썽사나운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송지원의 시선이 온다연이 들고 있던 진단서로 옮겨졌다.그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매니저랑 이 밤에 병원에 왜 온 거지?”온다연은 안도했다.송지원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임정아의 비서로 오해하고 있었다.임정아는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송지원 씨랑 무슨 상관이죠?”송지원은 그녀를 빤히 보았다.“아픈 거야? 어디가 아픈 건데?”임정아는 그를 무시하며 온다연에게 말했다.“타요.”이때 송지원이 갑자기 다가오며 온다연 손에 들고 있던 진단서를 확 빼앗아 갔다.훑어보던 그는 안색이 변했다.“임수아, 임신했어?”임정아의 본명은 임수아였다. 임정아는 예명일 뿐이다. 방금 온다연은 그녀의 신분증으로 검사를 받았다.임정아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그래요, 뭐가 문제 있어요?”송지원은 진단서를 꽉 잡았다. 온다연은 송지원 손등으로 튀어나온 퍼런 핏줄을 보았다.갑자기 고개를 들던 그는 임정아를 무섭게 보았다.“누구 애야.”임정아는 픽 웃었다.“어차피 송지원 씨 아이 아니에요. 그리고 우리 결혼은 이미 없던 일이 되었잖아요. 제가 누구 아이를 배든 무슨 상관인데요. 계속 이러시면 저한테 마음이 있는 거로 간주할 거예요.
누군지 떠올리기도 전에 송지원의 운전기사가 차에서 내려 달려왔다.그는 힘겹게 송지원을 임정아에게서 떼어냈다.그리곤 힘을 써 빨개진 얼굴로 임정아를 향해 소리 질렀다.“얼른 가요. 멍하니 서 있지 말고 가세요!”임정아는 기침을 했다. 손발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그녀는 송지원이 정말로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것을 순간 느꼈다.‘정말 미쳤어!'그녀는 기침해대며 말했다.“타요, 얼른!”차는 빠르게 주차장을 벗어났다. 운전기사는 여전히 이성을 잃은 남자를 붙잡고 있었다.온다연은 조수석에 앉아 임정아를 힐끗 보았다.임정아의 목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고 여전히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온다연이 작게 말했다.“조금 쉬다가 다시 운전할래요? 지금쯤이면 아마 못 쫓아 올 거예요.”임정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길가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웠다.차에서 내린 그녀는 담배를 꺼내 피우다가 전화를 받았다.한참 지나서야 다시 차로 돌아왔다.임정아는 진정을 되찾은 듯 담담하게 말했다.“유강후 씨가 지금 다연 씨를 못 찾아서 이성을 잃은 상태라고 하네요. 영원 전체를 지금 다 막아버렸다고 해요. 당시 다연 씨를 태워줬던 택시 기사님도 찾았대요. 대체 무슨 수단을 쓴 건지 모르겠지만 기사님은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유강후 그 미친놈과 지금 경원으로 오는 중이라고 해요.”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녀는 유강후가 자신을 빨리 찾을 줄은 예상하였지만 운전기사까지 난처하게 할 줄은 몰랐다.핸드폰을 꺼낸 뒤 미리 빼버린 유심 카드를 다시 넣었다.그리고 전화를 걸었다.몇 번의 신호음 끝에 유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디야.”온다연은 핸드폰을 꽉 잡았다.“기사님을 어떻게 하신 거예요?”그는 한참 침묵하다가 말했다.“말해, 어디야.”온다연은 감정을 조절하기 어려웠다.“얼른 기사님 풀어줘요!”유강후의 목소리는 아주 싸늘했다.“온다연, 내가 지난번에도 말했지? 또다시 말도 없이 사라지면 그땐 벌을 내려줄 거라고!”온다연은 갑자기 소리를 질렀
그는 단지 말을 잘 듣지 않는 애완동물이 도망갔는데, 아직 데리고 놀기 좋아서 찾으러 나왔을 뿐이다.“저도 송지원 씨가 정아 씨한테 마음 쓰는 것을 보면 장난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해요.”온다연의 말에 임정아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그런 징그러운 얘기는 하지 말아 줄래요?”“정아 씨가 먼저 했어요.”이 말에 임정아는 혀를 내둘렀다.“그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쉴 곳을 찾아줄까요?”온다연은 창밖을 내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아니에요. 그 사람이 제 휴대폰 번호를 통해 위치를 추적할 수 있어요. 아까 휴대폰을 켰을 때 이미 제가 어디 있는지 알아냈을 거예요.”임정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정말 개자식이네요. 그들 무리는 유강후부터 한이준, 송지원, 그리고 봉현수까지 좋은 놈이 하나도 없어요.”온다연은 침묵을 지켰다.임정아의 말이 맞다. 이 네 사람은 집안 형편이 비슷하고 젊은 세대에서 출중한 인물들이라 이들이 손잡으면 경원시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지니게 된다.빨리 발을 빼지 않으면, 앞으로 유강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더 어려워질 것이다.“정아 씨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지만, 제 조건도 만만치 않습니다.”온다연의 말에 임정아가 눈썹을 치켜올렸다.“무슨 조건인데요?”온다연의 눈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유하령이 지위도 명예도 다 잃고 평생 감옥에서 썩게 해주세요.”임정아가 눈살을 찌푸렸다.“그건 너무 어려워요. 유씨 가문은 고씨 가문이나 이씨 가문과 차원이 달라요.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유재성과 유자성의 말 한마디면 아무도 유하령을 건드리지 못해요.”“사실 그동안 유씨 가문의 두 골칫덩어리 유민준과 유하령이 황당한 일을 많이 저질렀는데 증거가 하나도 없어요. 지난번 이효진의 일도 봐요. 이씨 가문이 망했는데, 유민준은 언론에 한 번도 오르내린 적이 없잖아요. 왜 그런지 알아요?”“유씨 가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거의 입도 뻥끗하지 않았어요. 아무도 감히 폭로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유씨 가문은 다연 씨가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멀리서부터 가까이 다가왔다.온다연은 몸을 돌리고 눈을 감았다.곧 침실 문이 열리고, 찬바람과 함께 시원한 우디향이 몰려와 그녀를 감쌌다.뒤이어 건조하고 따뜻한 손이 그녀의 이마에 얹어졌다.열이 나지 않는 것을 확인한 남자는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다.“다연아!”온다연은 잠든 듯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손은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있었다.그녀는 유강후가 지난번처럼 억지로 한다면 물어 죽이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열린 침실 문으로 불빛이 새어 들어와 유강후의 몸을 비추면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그녀의 몸을 완전히 덮었다.완전히 그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처럼 탈출할 가망이 전혀 없어 보였다.온다연은 점점 숨이 막히면서 호흡 곤란까지 왔다.유강후는 가볍게 떨리는 그녀의 속눈썹을 들여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기분이 안 좋으면 화를 낼 수 있다고 말했지, 제멋대로 도망가도 된다고 말하지는 않았어.”“다연아, 너를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면 가둬야 하니?”온다연은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강후는 야들야들한 그녀의 볼을 만지며 숨 막히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너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데, 무슨 벌을 주면 좋을까?”약간 투박한 그의 손가락이 얼굴에서 이리저리 움직임에 따라 온다연은 찌릿찌릿 전율을 느꼈다.그가 벌을 내린다고 하면 그거 하는 것밖에 없지 않은가? 하루에 몇 번을 반복해서 그녀가 기진맥진해지고 걷지 못할 때까지.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의사가 3개월간 잠자리를 하면 안 된다고 했다.그녀는 갑자기 눈을 뜨고 유강후를 빤히 쳐다보았다.희미한 불빛 아래서 그의 잘생긴 얼굴이 더욱 빛나고 훈훈했다.이전에는 이 얼굴을 조금은 좋아했지만 지금은 그저 두려울 뿐이다.그가 아이를 해치고 자신을 깊은 수렁에 빠뜨릴 것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두려웠다.하지만 그녀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두려워해서는 안 되고 두려워할 수도 없다.그가 뭘 하려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다. 그 전에 화나게 하는 것이 가
유강후는 그녀를 목 졸라 죽이고 싶었다. 감히 그에게 싫다는 말을 한 것은 그녀가 처음이다. 하지만 그녀는 목이 너무 가늘어서 조르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그는 눈을 감고 몇 번 심호흡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화가 많이 가라앉았다.“내가 요리를 자주 하지 않지만 솜씨가 그리 나쁘지는 않아. 장 집사가 오지 않았으니 아쉬운 대로 먹어.”나지막이 이 말을 내뱉은 후, 그는 재빨리 주방으로 갔다.이 셋집은 하도 작아 주방이 1평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오래된 집이라 구조도 좋지 않았다. 키가 큰 유강후는 좁은 주방에서 마음대로 움직이기도 힘들었다.다행히 며칠 전에 사람을 불러서 주방을 리모델링했기에 주방 기구들은 그런대로 쓰기 편했고, 냉장고에도 식자재가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다.잠시 후, 간단한 떡국과 만두가 완성됐다. 하지만 온다연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유강후는 그녀를 침대에서 안아 일으킨 후 식탁 의자에 앉혔다.“먹어봐.”온다연은 정말 배가 고팠고 유강후가 만든 음식이 꽤 맛있어 보여 참지 못하고 조금 먹었다.음식이 들어가니 몸이 따뜻해지기 시작하면서 위도 따뜻해져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절반쯤 먹었을 때, 온다연은 갑자기 고개를 들고 유강후를 쳐다보았다.“아저씨, 저를 좋아해요?”묻고 나서 그녀 자신도 깜짝 놀랐다.유강후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이내 스스로 부정했다.유강후 같은 사람은 감정이 없다. 있다고 해도 별로 요긴하지 않은 장난감에게 나눠주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아저씨, 아이를 갖고 싶으세요?”유강후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오늘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장화연한테서 그녀가 오늘 구월이를 찾으러 내려갔을 뿐,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난 적은 없다고 들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그녀가 또 유하령을 만난 줄 알 뻔했다.하지만 이러는 것을 보면 또 무슨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듣고 심리적 부담이 커진 게 분명하다.그는 꼼짝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다연아
하지만 저녁에 돌아오니 그녀는 완전히 딴사람으로 바뀌었고, 공격적인 길고양이가 되어버렸다.그뿐이 아니라 그녀는 말로 그를 자극하기도 했다. 정말 간이 배 밖에 나왔다.온다연은 그의 표정이 점점 차가워지는 것을 보면서 머리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입구 방향을 보면서 도망치려고 했다.하지만 그녀가 겨우 두 걸음 옮겼을 때 유강후가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은 후,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고정해 자기를 똑바로 쳐다보게 했다.이를 악문 그의 표정은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온다연, 너는 내 곁에서 도망치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 생각해?”그는 원래도 힘이 센데 지금 거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상태라, 온다연의 허리와 턱이 곧 부러질 것 같았다.그녀는 눈물이 저절로 흘러나올 정도로 아팠지만 입술만 달싹일 뿐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유강후는 이 어린 계집애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말랑말랑한 입술을 깨물었다.깜짝 놀란 온다연은 악을 쓰며 그를 물었다.유강후는 아파서 움찔하더니 그녀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평소에는 이러면 온다연이 보통 말을 들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그를 물었고 심지어 그를 발로 걷어찼다.그녀는 거의 혼신의 힘을 다해 그를 물었고, 걷어차는 힘도 매우 셌다.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그녀를 안고 침실로 갔다.온다연은 급해서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이었다.“또 나한테 그 짓을 하려고요?”“유강후, 또 그러면 당신을 죽여 버릴 거예요.”그녀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세게 유강후의 어깨를 물었다.유강후도 잔뜩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그는 머릿속에 말을 듣지 않는 이 계집애를 반드시 길들여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안고 성큼성큼 침실로 들어갔다.온다연은 곧바로 침대에 내던져졌고, 그의 우람한 몸뚱이가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그녀
장화연은 표진아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마 그냥 지나가는 말일 겁니다. 적어도 사모님 뒷말은 하지 마세요.”“잠시 후에 한 대표님과 봉 대표님이 오셔서 결혼식 장소에 대해 논의할 거예요. 차와 간식을 준비하세요. 한 대표님의 새로운 파트너분은 커피와 서양 과자를 좋아한다고 하니 그것도 준비하시고 나머지는 평소대로 하시면 됩니다.”“네, 장 집사님.”하인이 돌아서려는 순간, 장화연이 다시 말했다.“준비해 두세요. 결혼식이 끝난 뒤, 당신은 영운산 별장으로 가서 일하게 될 겁니다. 모든 일에 좀 더 신경 쓰세요. 셋째 도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별장으로 가는 사람은 대우가 더 나아질 거라고 하셨습니다.”하인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알겠습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저녁 식사 전, 한이준과 봉현수가 정말로 도착했다.다만 한이준 옆에 선 사람은 낯선 얼굴이었다.봉현수 옆에는 여전히 지예솔이 함께였다.온다연의 시선이 한이준의 파트너에게 스치듯 지나갔다.단정하고 청순한 외모로 임혜린과 몇 분 닮은 느낌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무표정하게 시선을 돌렸다.그런데도 그 여자는 무척 친근한 척하며 달콤한 미소로 말했다.“유 대표님, 저 기억하시나요? 저는 이진이의 어릴 적 친구 곽혜영이에요. 예전에 모임에서 뵌 적 있는데.”유강후는 별다른 표정 없이 예의상 고개를 끄덕였다.곽혜영은 전혀 어색해하지 않고 여전히 밝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감 있게 행동했다.저녁 식사가 무척 풍성하게 준비되었지만 어떤 사람들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곽혜영은 식사 중 활발하게 대화를 이끌며 마치 유씨 가문과 봉씨 가문에 아주 익숙한 사람처럼 굴었다.그러나 두 남자는 마치 포커페이스를 하듯 냉담한 표정을 유지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곽혜영은 전혀 개의치 않고 국제 정세와 금융 이야기를 꺼내며 온다연과 지예솔을 가끔씩 흘끔거렸다.그 눈빛 속에는 미묘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곽혜영은 사전에 조사를 했었다.온다연과 지예솔은 얼굴로 자리를 차지한
말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감탄했다.보기에는 여리여리하지만 옷감 아래 숨겨진 몸매는 정말 볼륨감이 있었다. 허리는 너무나 가늘어 아찔할 정도였고 가슴은 부드럽고 풍만해 전혀 작지 않았다.외부 사람이 있는 것을 본 온다연은 유강후의 팔에서 벗어나려 했다.눈가에는 아직도 약간의 붉은 기운이 남아 있는 채로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난 고르고 싶지 않아요. 아저씨가 결정한 일이니까 아저씨가 직접 골라요.”말을 마치자마자 돌아서 나가려 했다.하지만 유강후는 그녀를 다시 끌어안으며 성급함을 억누르고 달래듯 말했다.“결혼식이 이제 보름 남았어. 고르지 않으면 그날 입을 게 없잖아.”온다연은 피곤한 듯한 표정으로 유강후의 품에 갇혀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빠져나갈 수 없었다. 결국 아무 말 없이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표진아의 조수가 몇 벌의 웨딩드레스를 가져왔다. 모두 엄선된 고급 맞춤 드레스였는데 화려하면서도 신선하고 우아한 매력을 잃지 않은 디자인이었다.하지만 20벌이 넘는 드레스를 계속 보여줬음에도 온다연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너무 피곤한 듯 보였다.지쳐 보이는 온다연의 모습에 유강후는 안쓰러워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많이 힘들지? 내일 다시 골라볼까?”그러나 온다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드레스들 위에 머물러 있었지만 눈빛에는 생기가 없었다.며칠 동안 그녀는 계속 이런 상태였다.깨어 있는 시간보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아이를 잃었다는 소식은 그녀의 마음을 철저히 무너뜨렸다.오늘도 유강후가 계속 달래고 유도하며 울고 말하게 하지 않았다면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녀의 기운 없는 모습을 보자 유강후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곧 허리를 숙여 그녀를 안아 들고 나가려는 찰나, 표진아가 급히 말했다.“사모님께서 만족하지 못하신다면 제가 다른 시리즈를 준비해왔습니다. 트렌디한 전통 스타일인데 사모님의 기품에 딱 맞을 겁니다. 애프터 드레스로도 사용할 수 있어요.”이런 큰 거래를
표진아가 뚫어져라 온다연을 쳐다보자 옆에 있던 집사가 입을 열었다.“저희 사모님입니다.”표진아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나이가 어려 보이는데 설마 미성년자를 만나는 건가?’부유한 집안의 아가씨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유강후라는 온실속에서 곱게 자란 화초처럼 보였다.‘이런 외모를 가졌으면 유 대표님 같은 분을 만나는 게 맞지. 안 그러면 이상한 사람이 얼마나 꼬이겠어.’표진아는 궁금함을 참지 못했다.“사모님이 생각보다 어리시네요. 미성년자는 아니겠죠?”집사는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눈살을 찌푸렸다.“진아 씨, 도련님이 화낼지도 모르니 안에 들어가서는 절대 이런 얘기를 꺼내시면 안 됩니다. 사모님은 혼인신고까지 마친 성인이에요.”“그리고 사모님이 요즘 도련님과 갈등이 생겨 기분이 안 좋으시니 언행을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표진아가 막 답하려던 찰나 커다란 문이 열리며 제네시스 한 대가 안으로 들어왔다.집사는 그녀의 옆에서 급히 속삭였다.“도련님이 오셨네요. 진아 씨는 저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시죠.”표진아는 집사의 뒤를 따르며 걸음을 옮겼다.고풍스러운 분위기의 다실에는 넓은 유리창이 설치되어 있었고 창문을 열면 바깥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표진아는 천하의 미래 그룹 대표가 차에서 커다란 상자 몇 개를 옮기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그런 다음 부하들을 시켜 상자에 들어있는 물건을 꺼내 조립했고 순식간에 2,3m 높이에 달하는 고양이 집이 완성되었다.표진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유 대표님이 이런 일도 직접 한다고?’곧이어 목격한 장면에 그녀는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평소 위엄있고 카리스마 넘치는 유강후가 허리를 숙여 조심스럽게 온다연을 달래주고 있었다.그러나 온다연은 가볍게 무시한 채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유강후가 옆에서 한참을 달래도 입조차 벙끗하지 않았다.곧이어 유강후는 비서에게 뭔가를 지시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우미가 고양이 한 마리를 안고 나왔다.고양이를 보고서야 온다연의 얼굴에는 미세한 표정 변화가 일어났다.그러나
“하는 짓을 봐서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게 뻔합니다.”유강후는 섬뜩한 눈빛으로 사진을 바라봤다.“로운 불러와.”곧이어 로운이 들어왔다.유강후는 단호하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부터 본격적으로 공격해. 경원으로 들어온 암살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죽여버려.”“시간은 딱 한 달이야. 난 한 달 안에 김씨 가문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으면 좋겠어.”로운은 눈살을 찌푸렸다.“대표님, 열흘 정도만 더 기다리면 분명히 성공할 거라 확신합니다만 지금 바로 공격하기에는 미흡한 부분이 있습니다.”“로운.”유강후는 단호하게 그의 말을 잘랐다.“이미 내가 참을 수 있는 최대 인내심에 도달했어. 한 달 후에 임무를 완수한다면 돈, 사람, 물건 네가 원하는 건 전부 다 줄 수 있으니까 넌 여기에만 집중해.”“계정에 나온 모든 암살자를 너한테 맡길 거야. 난 대답만 원하니까 넌 반드시 성공해.”로운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맡겨주신 일은 반드시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로운이 나가자 이권이 입을 열었다.“도련님, 열흘이면 되는데 조금만 더 기다리는 건...”“안돼.”유강후의 표정은 한없이 어두웠다.“화창한 봄날에 꽃 피는 언덕에서 가장 로맨틱한 결혼식을 올려주겠다고 다연이랑 약속했어.”“안 그래도 빚진 게 많은데 이런 약속조차 지키지 못하면 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이권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벙끗했으나 끝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유강후는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 굉장히 침착하고 이성적인 성향이기에 지금처럼 큰 위험을 감수할 때가 많지 않다. 남자로서 유강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이건 리스크가 너무 큰 모험이다.온다연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미래 그룹의 앞날을 걸고 있는 격이다.유강후는 정말 뼛속까지 온다연을 사랑하고 있었다.봄은 갈수록 날이 길어졌고 햇볕은 점점 더 따뜻해졌다.그러나 생기가 넘쳐야 할 봄날과 달리 한옥은 조용하기 그지없다.듣기로 여주인은 정원 중앙의 나무 밑에 의자를 두어 그
온다연이 너무 안쓰러워 덩달아 괴로움이 밀려온 유강후는 끊임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아니야. 다연이는 최고의 엄마야.”“우리 아이는 다연이를 엄청 좋아해. 그러니까 계속 꿈에 나타나잖아.”“울고 싶으면 울어. 참지 않아도 돼.”온다연은 울먹였다.“꼭 돌아오겠죠? 강후 씨, 아이는 다시 절 찾아올 거예요. 맞죠?”“그런데 꿈속에는 신발 한 켤레도 없이 맨발이었어요. 너무 불쌍해요.”꿈속의 장면이 떠오른 온다연은 가슴이 터질 듯 울부짖었다.“그곳이 너무 춥대요. 왜 데리러 안 오냐고 원망하는데...”“강후 씨, 아이가 추워하나 봐요.”“나 너무 힘들어요.”“괴로워요.”...극심한 괴로움과 고통은 몸의 경련을 일으켰다.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했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은 어느새 유강후의 옷자락을 적셨다.그는 온다연의 피와 살에 녹아들듯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돌아올 거야. 무조건 돌아오니까 걱정하지 마. 다연아, 이제 그만 아파해.”...한참 동안 울다가 지쳐버린 온다연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흐느꼈다.유강후는 온다연을 안고 집으로 들어갔다.안방 문을 열려 있었는데 침대는 깨끗이 치워졌고 도우미 몇 명이 바닥에 엎드려 뭔가를 찾고 있었다.그에게 안겨있던 온다연은 발버둥 치다가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처음 팔찌가 부러진 곳에 무릎을 꿇더니 나무판자 틈을 따라 조금씩 이동하며 찾았다.온다연이 움직이는 방향 따라 눈물 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마침내 호박석은 바닥과 벽이 맞닿은 틈새에서 발견됐다.온다연은 그것을 손에 쥔 채 미친 사람처럼 울고 웃었다.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아예 몰랐던 도우미들은 고개를 들 엄두조차 나지 않아 푹 숙인 채 입을 닫았다.유강후는 그녀 앞에 무릎을 반쯤 꿇고 품에 안았다.“다연아, 이제 찾았으니까 좀 쉴래?”온다연은 호박석에 담긴 아이의 체온이라도 느끼려는듯 손에 꽉 쥔채 놓지 않았다.“강후 씨, 아이가 잠든 곳에 가고 싶어요.”온다연은 몸이 너무
‘호박석에 들어있는 게 정말 아이의 머리카락이라고?’온다연이 차고 있던 팔찌는 엊그제 영문도 모른 채 끊어졌고 그때 호박석을 잃어버렸다.그걸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온다연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아이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유일한 증거를 잃어버렸으니 죄책감이 밀려왔고 반드시 다시 찾으리라 다짐했다.‘찾아야 돼. 아직 그 방에 있을 거야.’온다연은 허둥지둥 침대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밖으로 뛰어갔다.이를 본 장화연도 얼른 뒤따라가며 그녀를 말렸다.“다연 씨, 건강이 회복되면 언제든지 아이를 만날 수 있어요. 지금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있잖아요. 이대로 나가면 다칠 겁니다.”온다연은 주저 없이 장화연을 밀어냈다.“비켜요. 장 집사님이 참견할 일이 아니잖아요.”장화연은 경호원에게 눈치를 주고선 여전히 온다연을 부축했다.“그럼 뭐라도 좀 먹고 가세요. 엄마가 힘없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아이도 속상해할 겁니다.”그 말을 듣고 멈칫한 온다연은 곧바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내가 초라한 모습을 보이면 아이도 싫어하겠지?’‘하긴 이런 엄마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온다연은 다급하게 몸을 돌렸다.“죽 먹을게요. 줘요.”장화연은 그녀를 작은 식탁으로 부축해 갔다.“아직 뜨거우니까 천천히 드세요.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온다연은 죽을 필사적으로 입에 밀어 넣었다.너무 급하게 먹은 탓에 속이 안 좋은지 곧바로 심한 기침을 이어갔다.장화연을 다급하게 죽그릇을 옆으로 치웠다.“이렇게 드시면 안 됩니다.”때마침 병실로 돌아온 유강후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기침하고 있는 온다연을 발견했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는 다급하게 달려오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유강후는 병실에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고는 단호하게 호통쳤다.“사람이 몇인데 이런 일도 똑바로 못하면 어쩌자는 거야. 한 명을 케어하는 게 어려워?”병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입을 꾹 다문 채 감히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이때 온다연이 유강후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그러고선 팔찌를 뚫어져라 쳐
장화연은 한숨을 내쉬며 진지하게 답했다.“다연 씨는 가족이 없잖아요. 아이가 유일한 희망인데 지금은...”“앞으로 무슨 일이 생겨도 도련님은 무조건 다연 씨의 편을 들어야 합니다. 망설임 없는 확고한 모습을 보여줘야 다연 씨는 안정감을 느낄 겁니다.”“잠드신 것 같은데 침대로 옮기시죠.”유강후는 신생아를 안은 듯 조심스럽게 온다연을 침대로 옮겼다.온다연의 연약함은 깃털과도 같아서 그가 조금만 힘을 줘도 금방 찢어질 게 틀림없다.하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소리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유강후는 침대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마치 이렇게 하면 온다연이 그에게 잡혀 영원히 도망칠 수 없을 것처럼 말이다.어느새 유강후도 잠이 들었다.꿈속에는 그는 온다연과 두 아이를 낳았다.아들은 유강후를 닮고 딸은 온다연을 닮았는데 두 아이가 유강후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안아달라고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그들은 평범한 부부처럼 밤에는 격렬한 사랑을 나누고 아침에는 달콤한 입맞춤으로 하루를 시작했다.유강후는 매일 그녀에게 해바라기 한 송이를 선물했고, 온다연은 늘 밝은 미소와 부드러운 포옹으로 그에게 보답했다.그러던 어느 날 온다연이 선물이라며 그림을 주었다. 그림에는 해바라기로 가득한 꽃밭에서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걷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담겨있었다.온다연은 이 그림의 이름은 ‘영원한 사랑’이라고 얘기했다.심장이 터질듯한 행복감이 밀려온 유강후는 이대로 떠나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다.자존심만 세우던 그는 비로소 자신의 고귀함을 벗어던지고 사랑하는 여자에게 남은 여생을 함께 해달라고 부탁할 용기가 생겼다.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듯이 가질 수 없는 게 제일 비참하다.그 시각 온다연도 꿈을 꾸고 있었다.꿈속의 온다연은 어두운 방에 갇혀 있었고 누군가에게 손을 밟혔다.유강후는 싸늘하게 말했다.“그러게 내 말을 들었어야지. 이건 벌이야.”나은별은 그의 곁에 기대어 애교를 부리며 웃었다.“강후 씨, 벌이 너무 가벼운데? 말 잘
하지만 이제 온다연에게 아이는 없다.아니, 어쩌면 오래전부터 이미 없었을 수도 있다.온다연은 더 이상 유강후가 본인을 속이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았고 그와 따지려는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이미 모든 것에 실망했으니 다시 누군가는 사랑할 능력과 용기조차 없었다.따스한 햇볕과 달리 그녀의 마음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이 세상은 온다연에게 너무 각박했고 살고픈 희망을 가질때 쯤 잔인하게 짓밟아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다.유강후는 차가운 온다연의 손을 어루만지더니 담요를 가져다 덮어주며 말했다.“아침 바람은 쌀쌀하니까 여기에 앉아 있지 마.”그가 움직일 때마다 은은한 향기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온다연은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나은별을 만나고 왔겠지?’‘이 향기는... 나은별에게서 나는 건가?’‘역시나 나보다는 나은별이 더 중요하구나. 전화 한 통에 밤새도록 자리를 비운 걸 보면...’‘됐다. 누굴 좋아하든 마음대로 해.’온다연은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이때 장화연이 죽과 함께 아침밥을 챙겨왔다.“도련님, 이쪽에서 드세요. 제가 다연 씨를 돌볼게요.”“내가 할게. 죽 이리 줘.”유강후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올려 소파 등받이에 기대게 한 후 푹신한 쿠션을 그녀의 허리 뒤에 놓아 최대한 편안한 자세를 만들어줬다.그럼에도 온다연은 힘이 없는 듯 똑바로 앉아 있지 못했다.그러자 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쿠션 두 개를 더 가져와 그녀를 지탱했고 모든 걸 마친 후 그는 죽을 가지러 걸음을 옮겼다.마침 장화연은 죽을 그릇에 옮겨 닮고 있었다.유강후는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위가 안 좋으니까 앞으로 이것보다 좀 더 부드럽게 만들어줘.”“알겠습니다. 이것도 2시간이나 고아서 만든 죽입니다.”“다연이 언제 깨어났어?”장화연은 온다연을 힐끗 쳐다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깨어난 지 여섯시간쯤 되었습니다. 눈을 뜨고도 지금껏 계속 말이 없었고 아침부터 저쪽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합니다.”그녀는
한바탕 난리 후 의사도 진땀을 뺐다.다행히 검사 결과 큰 문제는 없었다.보름이 넘도록 쉬지 못한 데다가 온다연이 걱정되어 줄곧 긴장한 상태였으니 몸이 지쳐 쓰러진 게 틀림없다.이런 상황에서도 온다연의 곁을 지키려고 하자 의사는 안된다며 강제로 수면제 한 알을 먹였다.곧이어 이권과 장화연도 들어왔다.장화연은 초췌한 모습의 유강후를 보며 가슴이 미어졌지만 표정만은 담담했다.“오늘은 푹 쉬세요. 다연 씨의 곁은 제가 지키고 있을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유강후는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눈뜨면 바로 불러.”이권이 걱정스럽게 말했다.“도련님, 아무 생각 말고 얼른 주무세요. 이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전 어르신의 손에 죽을지도 모릅니다.”유강후는 여전히 온다연이 걱정되어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수면제를 먹은 탓에 잠이 쏟아졌다.곧이어 깊은 잠에 빠졌다.그러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약병 하나를 들고 밖으로 나가는 간호사가 시야가 들어왔다.간호사는 잠에서 깬 유강후를 보더니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방금 누가 에센스 하나를 깨뜨려서 제 몸에 향이 배었습니다.”유강후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으니까 나가봐.”그렇게 말하고 그는 일어나 침대에서 나왔다.그래도 억지로라도 깊은 잠을 자고 나니 몸이 한결 개운해졌다.유강후는 시간을 보려고 핸드폰을 확인하고서야 자신이 아홉시간 정도 잤다는 걸 알아챘다.바깥은 이미 해가 뜨고 날이 밝았다.기분이 언짢아진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이권, 들어와.”서둘러 안으로 들어온 이권은 안색이 많이 좋아진 유강후를 보며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컨디션 좋아 보이네요. 어제는 정말 표정이 않았는데...”“왜 안 깨웠어?”유강후의 말투에서는 언짢음이 담겨있었다.“깊이 자고 계시길래 일부러 안 깨웠습니다. 도련님, 거의 1년 넘게 맘 편히 잠을 못 주무셨잖아요. 다연 씨는 장 집사님이 지키고 있으니...”“이권!”유강후는 싸늘했다.“이제 제멋대로 행동하는구나? 이번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