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는 온다연을 발견하자마자 황급히 몸을 피했다.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기도 했다.테라스의 조명은 어두운 편이었다. 그런데도 상대의 얼굴은 잘 보였다.상대는 20대 여자였다. 한겨울에 원피스 한 장만 입은 그녀는 꽤 추워 보였다. 밀폐식 테라스는 창문을 열어놓았다. 여자는 얼마 가지 못하고 창문에 닿아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온다연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그녀의 얼굴은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핏자국이 있었다.시선을 아래로 떨구자 손목과 발목에서도 피가 흐르는 것이 보였다. 온다연은 무언가 눈치챈 듯 장화연과 눈을 마주쳤다.여자는 몸을 흠칫 떨더니 무릎을 꿇었다.“부탁해요. 저를 여기서 데리고 나가주세요. 안 그러면 저 오늘 죽을지도 몰라요. 살려주세요.”온다연은 장화연이 들고 있던 외투를 받아서 여자에게 걸쳐줬다.“여기서 말하지 말고 휴게실에 가요.”그녀는 여자를 데리고 가장 가까운 휴게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잠그며 여자에게 물었다.“당신은 누구예요?”환한 방 안에서 여자의 예쁜 얼굴이 더 잘 드러났다. 감탄이 나올 정도의 미모였다.그러나 예쁘고 정교한 얼굴에는 공포만 서려 있었다. 여자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저는 이 집 도우미예요. 근데 오해를 받아서 며칠이나 가둬져 있었어요. 오늘은 저를 감시하는 사람이 술 마시러 나가서 몰래 줄을 끊고 도망 나온 거예요.”그녀는 울면서 말을 이었다.“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안 그러면 저 이대로 맞아 죽을 거예요. 저는 억울해요. 저는 도둑질을 하지도 않았고, 도련님한테 다른 마음을 품지도 않았어요! 한 번만 도와주세요. 저 진짜 죽기 싫어요.”여자의 몸은 아주 얇았다. 몸에 핏자국까지 있어서 아주 안쓰러워 보였다.그녀에게서 온다연은 과거의 자신을 보았다.“집사님, 차에서 옷 한 벌 가져다줄 수 있어요? 아저씨한테 말하지는 말고요.”장화연은 말없이 몸을 돌려서 나갔다.온다연은 여자를 부축해서
손님와 봉씨 집안의 도우미는 전부 로비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소리 소문 없이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장화연은 온다연의 말대로 운전해서 별장과 거리를 벌렸다. 여자가 차에서 내리기 전 온다연은 현금을 건네주면서 말했다.“그쪽이 보통 도우미가 아닌 건 알겠어요. 봉씨 가문 도련님이랑 보통 사이가 아니죠? 그쪽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걸 봐서 도련님은 믿을 만한 사람이 안 돼요. 그다지 마음도 없어 보니까 빨리 떠나요. 다시는 붙잡히지 않게 경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요.”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고마워요. 아가씨 말씀이 맞아요. 저는 도련님과 만난 적이 있어요. 하지만 이제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도련님도 결혼하실 텐데, 저는 떠날 때가 된 것 같아요. 다시 한번 고마워요. 기회가 된다면 꼭 보답할게요. 아가씨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이름 물어볼 필요 없어요. 저는 저 자신을 도와줬을 뿐이니까요. 얼른 떠나요.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요.”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머리핀까지 빼서 전해줬다.“이거면 돈 좀 더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어요.”말을 마친 온다연은 미련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그녀는 백미러를 통해 앞으로 달려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그녀는 어쩐지 부러운 기분이 들었다. 적어도 여자는 지금 당장 자유를 찾아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운 좋게 도와줄 수 있는 사람도 만났다.온다연은 넋이 나간 얼굴로 말했다.“집사님, 만약 제가 떠나려고 한다면 도와주실 거예요?”장화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아니요.”“...아니에요. 집사님은 도와주실 거예요. 착한 분이시니까요.”“...”장화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운전을 계속했다.연회장에 도착했을 때 유강후는 차가운 얼굴로 온다연의 손목을 잡았다.“어디 갔었어?”장화연이 따라서 들어오는 걸 보고 나서야 그의 눈빛은 약간 부드러워졌다.“가만히 앉아 있어. 자꾸 돌아다니지 말고.”온다연은 아까 앉아 있던 자리에 가서 임혜린에게 메시지를 보냈
온다연은 유강후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었다. 큰 눈은 약간 찌푸린 채 로비를 바라보고 있었다.로비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수군대고 했었다. 특히 고씨 집안사람은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몰랐던 것이다.그들은 분명히 고유정과 봉현수의 약혼식에 참석했다. 그런데 이찬영이 누구란 말인가?설명을 듣고자 로비를 한참 돌아다녔지만 봉씨 집안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저택 도우미만 있었다.이때 사회자가 또다시 말했다.“다음으로 고유정 씨와 이찬영 씨의 행복한 순간을 함께 감상하시겠습니다.”로비의 스크린에는 고유정과 낯선 남자의 사진이 떴다. 남자는 키가 크지 않았다. 얼굴도 못생겨서 차마 봐줄 수 없을 정도였다.의논 소리는 더욱 커졌다. 고승철은 안색이 확 변하면서 대뜸 사회자의 멱살을 잡았다.“봉씨 집안사람 어디 있어? 왜 한 명도 안 보이는 건데? 봉현수는 또 어디 있어? 오늘은 현수랑 내 딸의 약혼식이야. 이제 와서 다른 남자로 바꾸는 건 무슨 뜻인데? 무슨 뜻이냐고?!”이때 장하그룹의 회장 봉태식이 위층에서 내려왔다.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승철을 바라봤다.“저희는 한 번도 고유정 양을 며느리로 들인다고 한 적 없어요. 댁의 귀한 따님은 알아서 챙기세요.”고승철은 불끈 화를 내며 손가락질했다.“뭐요? 사람을 이런 식으로 갖고 노는 게 어디 있어요? 제 딸이 뭐 어때서요? 집안 좋지, 학벌 좋지, 가정 교육도 잘 받았지, 어디가 모자라요?”“가정 교육을 잘 받아요? 그럼 보여드려야겠네요. 그 잘난 따님이 어떤 일을 했는지.”그는 손뼉을 쳤다. 그러자 스크린에는 두 사람이 엉켜 있는 영상이 재생되었다. 남자는 끊임없이 움직였고, 여자는 교태로운 소리를 냈다.“빨리! 더 빨리! 아아, 찬영 씨!”현장은 갑자기 술렁거렸다. 어떤 사람은 핸드폰을 들어 올려 촬영하기 시작했다.봉태식은 차가운 표정으로 고승철을 바라보며 말했다.“이게 댁 따님의 실체예요. 지금도 저택 3층에서 이찬영이라는 남자랑 같이 있죠.
“독한 녀석들!”봉현수는 계단 손잡이를 잡고 피식 웃었다.“그러게 왜 밖에서 서자를 키우셨어요. 따님을 아주 잘 키운 덕도 있겠죠. 건드려서 안 되는 사람을 건드리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그는 또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아, 그리고 잃으신 건 무한테크의 지분뿐이 아니에요. 부동산도 동산도, 아무것도 없어요. 물론 빚은 많겠네요. 오늘의 식사가 최후의 만찬이 될 것 같은데 배불리 먹어 두세요. 내일부터는 빚에 시달리게 될 거예요. 그리고 이찬영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요? 마약에 미친 사람이에요. 더러운 병도 있어서 따님을 병원에 데려가는 게 좋을걸요.”봉현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께는 진심 어린 사과를 드립니다. 사과의 뜻으로 떠나실 때 선물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봐주시면 좋겠어요.”사람들은 이제야 고유정의 더러운 사생활 때문에 오늘의 파국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이때 고유정이 휘청거리며 3층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봉현수를 보자마자 눈물을 터뜨리기 시작했다.“현수 씨, 내 얘기 들어줘요. 누가 나한테 약을 먹였어요. 제가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요. 누가 나한테 악감정을 품은 게 분명해요. 나는 주스 한 모금에 정신 잃고 끌려갔었어요.”봉현수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도우미에게 말했다.“그 방은 적어도 10번은 반복 소독하세요. 이 여자가 지나갔던 곳은 전부 소독해줘요. 그리고 고씨 집안사람은 이만 내보내 줘요. 귀한 손님들 기분을 망치면 안 되니까요.”고씨 집안사람들은 걸인처럼 밖으로 내던져졌다. 로비는 시끄러웠던 것도 잠시 금세 다시 원래의 분위기로 돌아갔다.경원에는 이런 변화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한 시간 전만 해도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던 사람이 바닥에 처박혔다고 해도 놀란 건 없다. 고씨 가문의 결말 역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봉현수는 밖으로 밀려 나가는 고씨 집안사람을 바라보고 있다가 위층에 올라가려고 했다. 이때 집사가 후다닥 달려와서 말했다.“도련님
장화연은 여자를 힐끗 보기만 했다. 그리고 한결같이 담담한 표정으로 온다연에게 말했다.“도련님이 싫어하시는 분입니다. 같이 있던 걸 들키면 또 벌을 받으시게 될 겁니다.”“알아요. 저는 모르는 사람인데 무슨 사관이에요. 아저씨가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으니까 기다리는 것뿐이에요. 말 한마디 안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요. 저 진짜 추워서 그래요.”장화연은 이제야 밖으로 나갔다.여자는 소파에 털썩 앉아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단속이 심하네요. 다연 씨를 많이 좋아하나 봐요. 이런 인생 놔두고 왜 힘든 길을 가려고 해요? 유씨 집안이랑 대체 얼마나 척을 졌길래.”온다연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물건은 이미 전해줬어요. 근데 왜 온 거예요? 아저씨가 의심할 수도 있어요.”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정아 씨는 너무 눈에 띄어요. 여기 들어왔던 것도 분명히 들킬 거예요.”임정아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면서 미소를 지었다.“무서워요? 저는 그냥 뭐 좀 주러 왔어요. 정아 씨 아저씨한테는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거라 발견하지 못할 거예요.”온다연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안 했다.“고유정 씨 영상은 어떻게 퍼뜨릴까요?”“그럴 필요 없어졌어요. 어차피 고씨 가문은 재기하지 못해요. 제가 가만히 있어도 욕은 충분히 먹을 거예요. 이효진 씨 일만 계속 퍼뜨려주면 돼요.”임정아는 피식 웃으며 온다연을 훑어봤다. 그러고는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정말 연예인 할 생각 없어요? 이 정도 조건이면 무조건 잘 될 텐데.”온다연이 대답하지 않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근데 이런 얼굴로 그런 일을 저지를 줄은 몰랐네요. 이효진 씨 자살 기도를 몇 번이나 했는지 알아요? 이런 모습 유강후 씨한테 들켜도 괜찮겠어요?”그녀의 말은 가시처럼 온다연의 심장에 박혀서 통증을 유발했다. 온다연은 시선을 떨어뜨리며 대답했다.“정아 씨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에요. 아저씨가 곧 돌아올 테니
온다연은 몸을 뒤로 빼서 임정아의 손길을 피했다.“빨리 가요. 저한테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을 테니까요.”임정아는 작게 한숨을 쉬며 온다연의 손에 소형 카메라를 쥐여줬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툭툭 치면서 물었다.“주희랑은 어떤 사이에요?”온다연은 고개를 홱 들었다.“네? 주희요?”임정아는 그녀의 반응이 마음에 드는 듯 미소를 지었다.“아는 사이 아니에요?”온다연은 다소 경직된 말투로 대답했다.“알고 싶은 게 뭐예요?”“연예인 되겠다고 우리 회사에 들어온 신인데, 생긴 건 나름 괜찮았어요. 욕심이 많고 마음이 급한 게 문제지만요. 요즘 또 사고를 쳐서 다연 씨가 아는 사람이면 도와주려고 했어요.”그녀는 온다연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모르는 사람이면 말고요.”온다연은 주먹을 꽉 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대답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임정아는 눈썹을 튕기더니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지금은 일단 원래 계획만 실행하죠. 서류들만 찍어주는 걸로. 다른 생각이 있으면 또 연락해요.”그녀는 문을 힐끗 보면서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이젠 진짜 가야겠어요. 유강후 씨가 돌아오네요. 참... 그리고 경고하는데 나은별 씨 조심해요. 다연 씨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저도 전혀 못 당하겠더라고요. 유강후 씨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목숨이 걸린 문제니까 조심해요.”말을 마친 그녀는 향수 냄새를 휘날리며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고 나가면서는 유강후와 딱 마주쳤다.그녀는 놀란 척 눈을 크게 뜨며 그의 팔을 잡으며 교태를 부렸다.“대표님, 이런 데서 다 만나네요. 저 오늘 행운의 날인가 봐요.”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피하며 미간을 찌푸렸다.“비켜요.”악의와 혐오가 담겨 있는 말이었다.임정아는 잠깐 멈칫했다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온다연을 힐끗 바라봤다.“새사람 생겼다고 옛사람 잊은 거예요. 매정해라.”유강후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온다연을 향해 걸어갔다. 온다연은 먼저 쪼르르 거리를 좁혀서 그의
온다연은 고개를 들며 부족하지만 받아주려고 했다.이런 일에서 그녀는 별로 적극적이지 않다. 특히 밖에서 받아준 적은 더욱 없었다. 유강후는 가슴속에서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그는 그녀의 허리를 잡고 벽에 밀어붙이더니 더 깊게 탐하기 시작했다. 늘 그랬듯 절대적이고 강압적으로 말이다.온다연은 금방 호흡이 딸려서 낑낑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강후의 호흡은 점점 더 거칠어졌다. 그녀는 견디다 못해 손을 뻗어서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아, 안 돼요... 사람 있어요...”유강후는 그녀의 뒤통수를 잡고 물러나지 못하게 했다.“누가 감히 우리를 본다고 그래?”그의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온다연은 조금 전과 같은 상황에 놓일까 봐 있는 힘껏 그를 밀어냈다. 그러나 손이 붙잡히면서 그마저도 못 하게 되었다.뜨겁게 입을 맞추던 두 사람은 문밖에 사람이 있는 것도 몰랐다. 암울한 눈빛은 안경 뒤에서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장화연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 다음에야 상대는 몸을 돌려서 떠났다.장화연이 들어왔을 때 두 사람은 이미 떨어져 있었다. 유강후는 장화연에게서 외투를 받아 온다연에게 걸쳐주었다.“배고프지 않아?”온다연의 입술은 잔뜩 부어 있었다. 그녀는 유강후가 또다시 다가올까 봐 두려운 듯 슬금슬금 거리를 벌렸다.“조금요. 아저씨, 저희 외식 안 한 지 한참 됐어요. 오늘은 밖에서 먹으면 안 돼요?”유강후는 온다연을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겼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그는 훨씬 진정된 목소리로 물었다.“뭐 먹고 싶어?”“전에 살던 곳 근처에서 먹고 싶어요. 그래도 될까요?”온다연은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서 말이다.그녀는 또 금방 말을 보탰다.“안 간 지 한참 돼서 약간 그리워요. 그리고 그쪽도 나름 괜찮은 식당이...”거절당할까 봐 조심스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렸다.“내 앞에서 조심스러워할 필요 없어. 너 혼자 허락 없이 가는 거 아니면 다
온다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자가 어디까지 도망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잡혀 오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봉씨 집안사람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특히 봉현수는 구린 구석이 꽤 많아 보였다.온다연이 침묵에 잠긴 것을 보고 유강후의 말투는 더욱 차가워졌다.“넌 절대 따라 배우지 마. 만약 지난번과 같은 일이 또다시 일어난다면 쉽게 넘어가지 않을 거야.”온다연은 고개를 숙이며 아무 말도 못 했다.차량 뒷좌석에서 유강후는 두 사람 사이의 빈 공간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가까이 와서 앉아.”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유강후에게 다가갔다. 그것도 답답한 듯, 유강후는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당겼다.“내가 말했지. 문에 붙어서 앉지 말라고.”말을 마친 그는 그녀를 안아서 자기 무릎에 앉히려고 했다. 그녀는 황급히 뒤로 뺐다.“안 돼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막강한 아우라에 그녀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손가락만 꼼지락댔다.“오늘은... 키스를 너무 많이 했어요. 입술이 아프다고요...”유강후의 눈빛은 이제야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목소리는 한결같이 차가웠다.“이리 와. 내가 봐줄게.”온다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강후는 어린아이를 안듯이 가볍게 그녀를 안아 올려 무릎에 앉혔다. 그러고는 턱을 잡고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입 벌려 봐. 까졌는지 확인할게.”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거절했다.“싫어요. 또 키스하려는 거죠.”여린 목소리는 애교를 부리는 것 같기도, 반항하는 것 같기도 했다. 유강후는 깊어진 눈으로 손에 힘을 줘서 그녀의 입술을 벌렸다.입 안쪽은 약간 까져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것이 보기만 해도 아파 보였다.“더 크게 벌려 봐. 안엔 어떤지 보게. 심각하면 약 발라야 해.”여기서 말을 안 들으면 그는 힘만 더 줄 것이다. 그래서 온다연은 순순히 입을 더 벌렸다.다행히 상처가 깊은 곳까지 생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강후가 그녀의 입속을 바라보는 눈빛은 점점 깊어졌다.그는 그녀의 혀를 잠
한바탕 난리 후 의사도 진땀을 뺐다.다행히 검사 결과 큰 문제는 없었다.보름이 넘도록 쉬지 못한 데다가 온다연이 걱정되어 줄곧 긴장한 상태였으니 몸이 지쳐 쓰러진 게 틀림없다.이런 상황에서도 온다연의 곁을 지키려고 하자 의사는 안된다며 강제로 수면제 한 알을 먹였다.곧이어 이권과 장화연도 들어왔다.장화연은 초췌한 모습의 유강후를 보며 가슴이 미어졌지만 표정만은 담담했다.“오늘은 푹 쉬세요. 다연 씨의 곁은 제가 지키고 있을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유강후는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눈뜨면 바로 불러.”이권이 걱정스럽게 말했다.“도련님, 아무 생각 말고 얼른 주무세요. 이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전 어르신의 손에 죽을지도 모릅니다.”유강후는 여전히 온다연이 걱정되어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수면제를 먹은 탓에 잠이 쏟아졌다.곧이어 깊은 잠에 빠졌다.그러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약병 하나를 들고 밖으로 나가는 간호사가 시야가 들어왔다.간호사는 잠에서 깬 유강후를 보더니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방금 누가 에센스 하나를 깨뜨려서 제 몸에 향이 배었습니다.”유강후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으니까 나가봐.”그렇게 말하고 그는 일어나 침대에서 나왔다.그래도 억지로라도 깊은 잠을 자고 나니 몸이 한결 개운해졌다.유강후는 시간을 보려고 핸드폰을 확인하고서야 자신이 아홉시간 정도 잤다는 걸 알아챘다.바깥은 이미 해가 뜨고 날이 밝았다.기분이 언짢아진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이권, 들어와.”서둘러 안으로 들어온 이권은 안색이 많이 좋아진 유강후를 보며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컨디션 좋아 보이네요. 어제는 정말 표정이 않았는데...”“왜 안 깨웠어?”유강후의 말투에서는 언짢음이 담겨있었다.“깊이 자고 계시길래 일부러 안 깨웠습니다. 도련님, 거의 1년 넘게 맘 편히 잠을 못 주무셨잖아요. 다연 씨는 장 집사님이 지키고 있으니...”“이권!”유강후는 싸늘했다.“이제 제멋대로 행동하는구나? 이번 달
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렸다.“네 말은 배에 탄 사람 들중에 문제가 있다는 거야?”유강후는 단 한 번도 탑승한 사람들에 대해 의심한 적이 없다.그 배는 유강후의 소유였기에 당시 초청을 받은 사람들도 그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들이었다.굳이 꼽자면 소씨 가문과 유씨 가문의 사이가 어색한 것 빼고는 거의 다 유씨 가문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집안이다.집안의 뿌리까지 서로 얽혀있는 사이랄까?아무리 소씨 가문과 관계가 어색하다고 한들 가문 후계자가 유강후의 소꿉친구이니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 비록 능력이 많이 모자랐지만 책임감이 있고 품행이 단정한 사람이니까.이권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저는 단지 수상쩍은 생각이 들 뿐입니다. 도련님이 물에 들어갔을 때 마침 상어 떼가 나타났잖아요. 배에 타고 있던 그 많은 사람들 중 한재민 씨만 도련님을 발견한 것도 뭔가 좀 걸립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계획 살인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타깃은 도련님이 아닌 한재민 씨죠...”“듣기로는 그날 한재민 씨가 나은별 씨와 엄청 크게 다퉜다고 합니다.”유강후는 눈빛이 반짝였다.“이 일이 나은별이랑 관련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야?”이권이 답했다.“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그 답을 들은 유강후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나은별이 성격이 더러운 건 사실이야. 우리 어렸을 때부터 친구인 건 알지? 내가 아는 나은별은 그런 일을 계획할 사람이 아니야. 재민이의 아이까지 임신했는데 굳이 그럴 이유가 없잖아.”그는 잠시 망설였다.“권아, 앞으로 이 일은 언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솔직히 내 친구를 의심하고 싶지 않아. 만에 하나 정말 크게 싸웠다 해도 상대를 죽일 만큼은 아닐 거야.”이권은 말문이 막혔다.바로 이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나은별이 걸어온 전화였기에 이권은 자연스레 스피커폰으로 돌렸다.통화가 연결되자 곧이어 연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후 씨, 나 보러 와줘. 응?”“어제 꿈꿨는데 계속 그 장면이 떠올라서 너무 괴로워.”“재민 씨
이권은 재빨리 입을 닫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유강후는 자고 있는 온다연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자리 좀 지켜줘. 다연이 눈뜨면 바로 연락하고.”장화연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답했다.“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지는 마세요. 다연 씨는 지금 대표님이 필요합니다.”유강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온다연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선 곧바로 병실을 나갔다.장화연은 그들을 배웅했다.그 시각 침대 위의 온다연은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피곤한 듯 다시 눈을 감았다.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권은 유강후가 나오자 재빨리 옆에서 다가갔다.“도련님, 헬기는 준비했습니다.”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통보하는 거야? 제멋대로 결정하는 거 보니까 미래 그룹의 대표를 해도 되겠어.”“그래도 도련님을 대신해 총을 막았으니 적어도 한번은 찾아가는 게 예의라고 생각합니다.”유강후는 말없이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피우지 않고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경원은 매우 컸고 반짝이는 네온 불빛과 아름다운 야경을 자랑했다.한때 유강후는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 도시마저 그의 발밑에 있다고 느꼈다.그러나 현실은 아이를 지키지 못했고 온다연의 마음을 사로잡지도 못했다.만약 지금 가진 모든 것으로 아이의 생명을 바꾸고 온다연의 마음과 환심을 얻을 수 있다면 주저 없이 내놓을 준비도 되어있다.하지만 이 세상에 만약은 없다.담배 연기가 가라앉고 불꽃이 반쯤 꺼졌을 때 유강후가 입을 열었다.“권아, 넌 와이프랑 사이가 좋아?”“성격이 예민한 것 말고는 괜찮아요.”“와이프 임신했다며? 몇 개월이야?”이권의 얼굴에는 금세 미소가 떠올랐다.“3개월이요. 임신해서 그런지 더 예민하더라고요.”유강후는 한참이 지나서야 답했다.“아이가 태어나면 큰 선물을 줄게. 권아, 나는 네가 정말 부럽다.”밝은 불빛과 달리 유강후는 오히려 밤의 어둠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울고
“다연아, 너한테는 내가 있잖아.”“아이는 다시 생길 거야. 너만 건강하다면 반드시 선물처럼 찾아올 거야.”...드디어 차가 병원에 도착했고 온다연은 급히 응급실로 옮겨졌다.검사 결과 급성 위경련으로 이미 약했던 위가 강한 자극을 받아 대량의 출혈을 일으켜 피를 토해낸 것이다.곧이어 응급 처치 및 수혈이 시작됐다.장장 두 시간 정도 지속되었다.그 후 온다연은 병실로 옮겨졌지만 밤이 될 때까지도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의사도 이런 상황이 의외인 듯 다시 한번 정밀 검사를 진행했다.진찰을 마친 의사는 진지하게 말했다.“위출혈로 찾아오는 환자는 지금도 많습니다. 다만 그 심각도에 따라서 상황이 나뉘죠. 대량의 피를 토해낸 심각한 경우라면 30분 이내에 쇼크로 사망할 수도 있습니다.”“다연 씨의 경우 이미 심한 위궤양 증세를 보이고 있으니 절대 자극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보통 출혈이 끝나고 상태가 점차 호전되면 5시간 안에 의식을 되찾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열 시간이 지나도록 눈을 감고 있네요.”“대표님, 제 생각에 다연 씨는 스스로 코마 상태에 빠진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하면 깨어나고 싶지 않은 거죠. 현실을 마주하기가 두려운 모양입니다. 시간을 좀 더 주시죠.”의사가 떠난 후 유강후는 오랫동안 온다연의 침대 앞에 앉아 있었다.그는 손으로 온다연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온다연은 학교 다닐 때보다 훨씬 말랐고 성격도 많이 변해 있었다.어쩌면 아이가 바뀐 걸 알아채고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다가 더는 견디지 못해 육체적인 고통으로 이어진 것 같다.유강후는 온다연의 손을 잡고 자신의 얼굴에 대고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너한테는 내가 있잖아.”“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도망치지 말자. 우리 함께 맞서 싸우자.”...얼마 후 장화연이 들어왔다.유강후는 외로운 조각상처럼 홀로 온다연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세 시간 전에 봤던 모습과 똑같이 자세조차 바꾸지 않은 그를 보며 장화연은 가슴이 아팠다.그녀는 앞으로 나서서 유
그 말과 함께 온다연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이렇게 빌게요. 제발 아이를 다른 사람한테 주지마요. 안 그러면 확 죽어버릴 거예요.”“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요. 제발 아이만...”유강후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애써 이성을 유지하며 온다연을 일으켰다.“다연아, 거짓말이 아니야. 저 아이는 우리 아들이 아니라니까?”온다연은 그를 바라봤다.“말했잖아요. 우림이랑 유전자 검사해 봤다고요. 혈연관계가 없다는 결과를 이미 확인했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날 속일 거예요?”하얗게 질린 얼굴에는 눈물이 가득했다.“저 아이가 내 아들이 아니라면 진짜 아들은요? 누구한테 줬어요?”유강후는 말없이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았다.그러나 온다연은 여전히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고 점점 더 과격해졌다.“말하라고요. 내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냐고요.”어느새 유강후의 눈에도 슬픔이 차올랐지만 입을 꾹 닫은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왜 대답을 못 해요? 말해줘요. 내 아이는 어디에 있는지.”“말하라고!”이때 뒤에 서 있던 이권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도련님, 이제 사실대로 말씀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큰일 날 것 같습니다.”온다연은 고개를 돌리더니 이권을 쳐다보며 물었다.“이권 씨는 알고 있죠?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줘요.”“이권, 입 닫아.”유강후가 단호하게 호통을 쳤지만 이권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다연 씨, 아이는 죽었어요.”“그 작은 아이가 5개월 동안 살아있을 리가 없잖아요.”“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련님의 손바닥 위에서 마지막 숨이 끊겼습니다.”그 말은 날벼락처럼 날아가 온다연의 가슴을 후벼 찧었다.‘죽었다고?’‘내 아들이 죽었다고?’그녀의 눈빛은 서서히 생기를 잃었고 마치 영혼 전체가 고통에 휩싸인 것처럼 공허하고 슬퍼졌다.‘아니야. 분명히 건강을 되찾고 있었어.’‘거짓말하는 게 분명해. 세상이 지금 날 속이고 있는 거야.’심장이 멎은 듯 숨이 막혀온 온다연은 몸을 떨면서 중얼
유강후는 단호하게 말했다.“얼른 막아.”그러자 경호원들이 앞으로 나서며 온다연을 가로막았다.“사모님, 밖에 비가 옵니다. 여기 있는 게 좋을 거예요.”온다연이 계속 피하려고 하자 몇몇 경호원은 아예 문을 막아버렸다.다급함과 초조함이 밀려온 그녀는 또다시 경호원의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다행히 이를 알아챈 경호원은 재빨리 옆으로 몸을 피했다.“사모님, 또 총을 쓰시려고요?”온다연은 자신의 의도가 간파되자 뒤로 돌아서더니 주저 없이 창문으로 달려갔다.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녀가 창가에 다가가기도 전에 이미 창밖에는 건장한 경호원이 자리 지키고 있었다.절망은 밀물처럼 온다연을 덮쳤다.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그녀는 슬픔에 잠식할 듯한 눈빛으로 뚫어져라 유강후를 째려봤다.유강후도 이제는 그녀의 마음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그는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끝내 벽 모퉁이에 다다르고서야 온다연은 품에 있는 아이를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강후 씨, 이건 내 아이예요.”유강후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그 고통을 애써 참으며 온다연에게 손을 내밀었다.“다연아, 우리의 아이는 우림이야. 그러니까 이리 줘.”“싫어요.”온다연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너무 긴장하고 불안한 탓인지 그녀의 옷은 어느새 식은땀으로 젖어있었고 이마와 손바닥도 땀투성이였다.한편으로는 유강후가 아이를 빼앗아 그녀의 곁에서 떼어 놓을까 봐 극도로 두려워했다.온다연은 삶의 이유를 찾지 못했다.그녀는 품에 있는 아이를 꼭 껴안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가 내 아들이잖아요.”온다연은 고개를 들어 유강후를 바라봤다.“내 아이 맞잖아요! 강후 씨, 제발 부탁인데 빼앗지 마요. 사실 이미 알고 있어요. 우림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는걸.”유강후는 그대로 얼어붙었고 심장이 터질 듯 아팠다.“이 아이는 재혁이의 아들이야. 경호원 이재혁 알지? 우리의 아이는 우림이가 맞아.”그 말
온다연은 말없이 진시현의 품에 있는 포동포동한 아이를 바라봤다.유강후가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넋이 나갔다.그녀의 영혼은 아이에게 빨려 들어갔고 아이의 모든 움직임에 매료되었다.유강후는 혼이 나간 듯 얼굴마저 창백해진 온다연의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열은 없었다.그는 온다연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이 사람이 진시현이야. 로운의 부하이자 네가 말한 그 여자... ”온다연의 눈에는 아이밖에 없었기에 유강후의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녀는 유강후의 손을 뿌리치고 한 걸음 한 걸음 진시현 앞으로 걸어갔다.진시현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사모님, 안녕하세요. 진시현이라고 합니다. 저랑 대표님의 관계를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온다연은 정신이 멍해져서 진시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다만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가 있었다.‘네 아이잖아. 이건 네 아들이라고.’온다연은 가까이 다가가 아이의 생김새를 관찰했다.하얗고 토실토실한 아이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맑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봤다.순간 아이의 얼굴에서 유강후의 모습이 언뜻 스쳐 갔다.호흡마저 가빠진 온다연은 재빨리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안아봐도 될까요?”얼굴은 식겁할 정도로 창백했지만 온다연의 아름다운 미모에는 전혀 영향이 없었다.진시현은 지금껏 멀리서만 온다연을 봤었다. 물론 그때도 청순하고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처럼 가까이에서 보니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온다연의 피부는 매우 하얗고, 뚜렷한 이목구비는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여주인공이라 해도 무방했다.한편으로는 유강후가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가 납득되었다.다만 아이를 바라보는 온다연의 눈빛은 평소와 매우 달랐는데 마치 당장이라도 아이를 빼앗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게다가 아이를 안아보고 싶다고 하니 진시현은 무의식적으로 유강후의 눈치를 살폈다.유강후도 온다연의 이상함을 눈치챘다.“다연아, 아이가 보고 싶어서 그래? 장 집사한테 얘기해서 우림이 데려올게.
유강후는 잠시 생각했다.“같이 데려와. 다치지 않게 옆에서 잘 경호해.”그의 눈에는 착잡함이 스쳐 지나갔다.“자식은 부모의 보물이나 다름없어. 재혁이가 날 돕기 위해 기꺼이 아들을 보내줬는데 절대 다치게 해서는 안되지.”이권이 답했다.“그건 당연히 제가 할 일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재혁 씨의 아들도 하얗고 토실토실해서 엄청 예쁘더라고요. 심지어 전체적인 분위기는 대표님과 많이 비슷해요. 닮은 거로만 봤을 땐 우림 도련님보다 훨씬 더 대표님과 다연 씨를 닮았어요.”유강후는 기분이 언짢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그게 무슨 소리야? 재혁이는 우리 엄마 먼 친척의 아들이야. 친척끼리 당연히 닮은 구석이 있겠지.”“권아, 왜 이렇게 뭉그적거리지? 빨리 안 가고 뭐 해.”“지금 바로 가겠습니다.”두 곳은 서로 가까워 얼마 지나지 않아 진시현이 아이를 데리고 함께 찾아왔다.오늘 진시현은 가면 대신 가벼운 메이크업을 했다.최근 온다연을 따라 해서 그런지 눈매와 행동까지 점점 온다연과 매우 흡사해졌다.캐주얼한 운동복을 입은 그녀는 아이를 소파에 눕히고 자연스럽게 놀아줬는데 그 모습은 유난히 온화해 보였고 로운조차도 힐끔힐끔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얼마 후 유강후가 다가와 그녀에게 몇 마디 설명했다.그러고선 자연스레 시선이 아이에게 향했다.보면 볼수록 이재혁의 아들은 강씨 가문과 많이 닮았고 그제야 이권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문득 세상을 떠난 아이가 생각난 유강후는 가슴이 미어졌다.‘우리 아이가 살아있었다면 이만하겠지?’온다연과 유강후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으니 어쩌면 훨씬 더 예쁠지도 모른다.이때 아이가 갑자기 손을 뻗어 유강후의 옷깃을 잡더니 옹알이했다.흠칫한 유강후는 홀린 듯이 조심스럽게 아이를 안았다.어찌나 작고 가벼운지 깃털처럼 느껴졌고 말랑한 몸은 마치 작은 고양이를 안은 것처럼 부드러웠다.유강후는 씁쓸한 미소를 드러내며 나지막하게 물었다.“이름은 뭐야?”진시현이 웃으며 답했다.“진하림이요.”“재혁이의 아들인데 성
자연스레 유강후도 주성원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곧바로 흰머리 한두 가닥을 보게 되었다.그는 겁에 질린 채로 재빨리 다가가 온다연의 손목을 잡고 흔들었다.“다연아.”그러나 온다연은 여전히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유강후는 그녀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아직 뜨거웠다.가슴을 쥐어뜯듯 고통이 밀려왔다.유강후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모든 상황을 설명해 줬고 심지어 아이까지 보여줬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지를 몰랐다.이때 주성원이 입을 열었다.“다연 씨의 현재 상태는 매우 심각합니다.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수준으로 돌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네요.”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사실대로 말했다.“대표님, 병원에 데려가 정밀검사를 받는 게 어떠신지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위에 문제가 있는 것 같네요. 자칫하다가 암으로 발전될 수도 있으니 검사를...”유강후는 고개를 휙 돌렸다.“뭐라고요?”주성원은 말을 이었다.“장난으로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 일만 30, 40년 해왔는데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다연 씨는 위에 문제가 생긴 게 확실합니다.”“왜 이렇게 짧은 시간에 상태가 악화된 거죠? 불과 한두 달밖에...”순간 유강후의 머릿속에는 막연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어쩌면 온다연이 아이가 없어진 걸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그저 이런 추측이 스쳐 지나갔을 뿐, 곧바로 그에게 부정을 당했다.유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다연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아시잖아요. 굉장히 내성적이고 뭐든 속에 담아두는 성향이에요. 제가 아무리 옆에서 달래도 절대 입을 열지 않거든요. 아마 최근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이렇게 된 것 같네요.”“혹시 다연이의 입을 열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주성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이건 대표님이 공들여 유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연 씨는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 어쩌면 마음의 병을 앓고 있을 수도 있겠네요. 대화를 최대한 많이 하는 게 좋습니다. 속에 담아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