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슬기의 휴대폰이 울리자마자 차량 내부의 기묘한 정적이 깨졌다.“슬기 언니, 지금 어디예요?”김현정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임슬기는 정신을 차렸다.“왜, 무슨 일이야?”“오늘 밤 그냥 호텔에서 묵어요. 집에 가지 마요. 지금 아파트 아래에 기자들이 잔뜩 몰려 있어요.”‘기자들이 몰려있다고?’임슬기는 순간 멍해졌다.“현정아, 정확히 무슨 일인지 말해봐.”김현정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언니가 자수하는 영상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어요. 지금 인터넷에서 언니가 불륜을 저지르고 집사까지 죽였다고 난리
계단을 오르기도 전에 경찰이 그들을 막아섰다.“임슬기 씨, 경찰서로 동행해 주시죠.”이 모든 건 예상했던 일이었다. 연다인이 영상을 공개하고 기자들까지 불러 모았는데, 경찰을 빼놓을 리가 없었다.연다인은 단순히 망신만 주려는 게 아니었다. 임슬기가 살인 혐의로 수갑을 차고 체포되는 모습을 세상에 똑똑히 보여주려는 것이었다.“내려줘.”그 말을 듣고도 배정우는 쉽게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지만 결국 그녀를 바닥에 내려줬다.임슬기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차분하게 수갑을 찼다. 그 모습을 보면서 배정우는 알 수 없는 짜증이 밀려왔다.
임슬기가 제대로 반응하기도 전에, 연다인은 달려가 배정우의 품에 안기며 말했다.“정우야, 어떡해? 슬기 미쳤나 봐.”마치 자신이 피해자인 듯한것처럼 불쌍하면서도 여린 목소리였다.임슬기는 두 사람을 지켜보다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배정우, 애정 행각은 나가서 해. 역겨우니까.”임슬기의 말에 배정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연다인을 밀어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넌 여기 왜 온 거야?”연다인은 잠시 멈칫하다가 급히 그의 팔을 붙잡고 애교를 부렸다.“뉴스에서 임슬기가 잡혔다길래 서둘러 온 거야. 도울 일이 있을지도 모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데, 진승윤이 다가와 임슬기를 끌어안으며 고개를 숙여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슬기 씨, 흥분하면 안 돼요. 집에 가서 푹 쉬세요.”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달한 지 오래였다. 배정우는 눈에 살기를 띠며 소리쳤다.“진승윤! 그 손 놔!”“배정우, 네가 만약 진심으로 슬기 씨를 생각한다면, 지금 슬기 씨는 휴식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야 할 거 아니야. 퇴원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임신까지 한 몸이야. 종일 고문 당하듯 이렇게 끌려다니면 버틸 수 있을 거 같아?”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슬기의 몸이 휘청거
“대표님, 혹시 누군가 대표님 명령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오후, 임슬기가 체포된 뒤 배정우는 즉시 모든 언론사에 보도를 금지한 뒤 사전에 내보낸 기사도 철회하도록 분부했다.만약 누군가 목숨을 걸고 보도를 내보낸 게 아니라면, 연다인이 이 일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걸 설명했다.창밖을 응시하는 배정우의 검은 눈동자에는 잠깐 살기가 스쳐 지났다.만약, 정말로 연다인이 관련되었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었다.한창 생각에 빠져 있는데 연다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하지만 배정우는 미동도 없이 버티고 있다가
임슬기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다음 날 점심이었다. 머리를 문지르며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자,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보지 않아도 김현정이 국을 끓이고 있을 거란 걸 알 수 있었다.임슬기는 세면대로 걸어가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거울 속 창백한 자신을 바라보며 잠시 멈칫하다,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죽음의 문턱까지 와서도 복수는커녕 살인 누명까지 쓰게 생겼으니, 삶이 너무나도 허무하고 공허하게 느껴졌다.세수를 마치고 나오자, 마침 주방에서 나오던 김현정이 그녀를 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언니, 얼굴이 너
임슬기는 연다인의 차 뒤를 따라 점점 시내를 벗어나 산으로 향했다.연다인이 또 무슨 꿍꿍이를 꾸밀까 두려웠던 임슬기는 옷 안에 숨겨둔 카메라를 켰다. 이번에는 자신이 다친다고 해도 모두에게 연다인의 진짜 얼굴을 보여주리라 결심했다.30분을 더 운전한 후, 연다인의 차가 급커브를 돌며 멈췄다. 주변을 둘러보던 임슬기는 음침하고 으스스한 환경에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졌다.‘사람도 살지 않을 것 같은 곳이네.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곳까지 온 거지? 설마 날 죽일 생각인가?’여기까지 생각한 임슬기는 주머니에 작은 칼을 숨겨두었다.차에
연다인은 임슬기의 머리카락을 또 한 번 세게 잡아당기며 그녀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그 후 임씨 가문이 망하자, 오정태는 증거를 들고 너를 찾아왔다가 나를 만난 거야. 그대 오정태의 눈빛이 어땠는지 알아?”연다인은 임슬기의 턱을 움켜쥐고 사나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그 늙은이가 나를 범인 보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더라. 사실 처음엔 그를 죽일 생각도 없었거든. 그런데 제 분수를 모르고 자꾸 네 걱정을 하더라고. 죽기 직전까지도 널 걱정하더라? 역겹게!”갑자기 연다인은 임슬기를 바닥에서 끌어 올려 소각
“내가 뭐 도와줄 일 있어?”임슬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미 충분히 도와줬어. 너까지 휘말리면 내가 더 걱정돼.”문득 진성한 쪽 일을 떠올린 임슬기는 고개를 들어 걱정 어린 눈빛으로 진승윤을 바라보았다.“근데 너야말로 괜찮아? 혹시 김씨 가문 쪽에서...”그 순간 그의 얼굴에 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너 얼굴 왜 이래?”불현듯 배정우가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고 임슬기는 날카롭게 물었다.“배정우가 그랬지?”진승윤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아냐, 그냥 부딪힌 거야.”“거짓말하지 마.”임슬기는 그의 얼굴을 억
육문주가 아직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응급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다가왔다.“다행히 제때 도착해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다만 심각한 출혈이 있어 당분간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임슬기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하게 물었다.“선생님, 현정이 몸에 난 상처들은요?”비록 다리 한쪽밖에 보지 못했지만 온몸이 피투성이였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의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조금 전 이미 전신에 약은 다 발라두었습니다. 다만 계속해서 치료가 필요합니다.”임슬기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임슬기는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점점 초조해졌다.급히 거실로 달려가 서랍과 상자를 뒤져 욕실 열쇠를 꺼냈지만, 마음이 급할수록 손이 떨려 열쇠를 제대로 꽂을 수조차 없었다.“현정아, 현정아, 제발 버티고 있어. 안 돼... 제발...”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고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결국 임슬기는 어깨로 문을 들이받기 시작했다. 두세 번 들이받자 문이 휘청이며 열렸다.문틈 사이로 보인 광경에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김현정은 욕조 안에 쓰러져 있었고 팔에는 붉은 상처가 길게 나 있었으며 욕조 안
미디어의 자극적인 보도 탓에 상황은 점점 더 왜곡되었고 김현정은 마치 스스로 몸가짐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사람, 방탕하게 구는 사람으로 몰려버렸다.임슬기는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분노에 휩싸였고 당장이라도 연다인을 찾아가 멱살을 잡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곧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으며 정신을 다잡았다.이 일은 김현정에게 있어 너무나도 큰 상처다. 절대 감정적으로 행동해선 안 된다.반드시 가장 합리적이고 피해가 적은 방법을 택해야 했다. 무엇보다 김현정이 이런 기사나 사진을 보는 건 막아야 했다. 절대로 보면 안 된다.그 순간 그
주방에서 임슬기는 면을 삶고 있었지만 마음은 온통 딴 데로 가 있었다.한편으로는 김현정의 상태가 걱정됐고 또 한편으로는 연다인이 다음에 무슨 짓을 벌일지 불안했다.생각이 많아지는 그때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임슬기는 불을 약하게 줄이고 도어스코프로 밖을 확인한 후 문을 열었다.“문주 씨, 도대체 어디 갔었어요? 아침에 전화했는데 왜 계속 안 받았어요?”육문주는 아직도 어제 입었던 정장을 그대로 입고 있었고 안색은 좋지 않았으며 목소리도 쉬어 있었다.“어젯밤에 좀 일이 있었어요. 현정 씨는 안에 있어요?”“있어요.”육문주가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말해 봐, 연다인!”“난 말이지 네가 무너지는 꼴을 보는 게 제일 즐거워. 임슬기, 네가 미쳐버릴 정도로 무너지고 나면 정우도 너랑 이혼하겠지. 그때쯤이면 나도 자연스럽게 정우의 아내가 되겠네?”임슬기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연다인, 너 죽고 싶어 환장했어? 경고하는데, 더는 함부로 굴지 마!”하지만 연다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도 참 한심해, 임슬기. 그렇게 소리만 질러대고 그 외엔 뭘 할 수 있는데?”“이 비겁한 년!”임슬기가 더 말하려는 찰나 갑자기 욕실 안에서
임슬기는 순간 멈춰 섰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김현정을 바라보며 물었다.“현정아, 무슨 일이야?”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몇 걸음 더 다가갔다.“슬기 언니... 제발 오지 마요!”김현정은 몸을 더 안으로 움츠리며 눈물범벅인 얼굴로 간절히 애원했다.“부탁이에요, 오지 마요... 제발...”김현정의 반응이 너무 격해지자 임슬기는 더 다가가지 못하고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알겠어. 안 갈게. 여기 이렇게 있을게. 괜찮지?”김현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임슬기는 김현정이 우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
‘허, 승윤아? 참 다정하게도 부르네.’임슬기는 취기에 휘청이며 배정우의 품속으로 파고들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중얼거렸다.“너랑 있으면 마음이 좀 놓여. 고마워, 승윤아.”배정우는 그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상대는 술에 잔뜩 취한 상태라 불러도 소용없고 화를 낸다고 바뀔 것도 없었다.결국 그는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주 제대로 한 대 갈겨. 힘 좀 써서.”...다음 날.임슬기는 흐릿한 정신으로 깨어났다. 입안이 텁텁하고 목이 바짝 말랐다.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중얼거렸다.
그 말을 입에 올리자마자 진승윤은 바로 후회했다.너무 충동적이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 있었을까.만약...“좋아.”진승윤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임슬기가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좋아요. 진 변호사님께서 내가 몸 약한 것만 안 싫어한다면 말이죠.”진승윤은 어리둥절한 채 말을 잇지 못했고 임슬기는 그의 얼굴 앞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지금 혹시 후회하는 거 아냐?”“아, 아니...”“나도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몰라. 근데 내가 죽고 나면 내 동생이 정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