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슬기가 제대로 반응하기도 전에, 연다인은 달려가 배정우의 품에 안기며 말했다.“정우야, 어떡해? 슬기 미쳤나 봐.”마치 자신이 피해자인 듯한것처럼 불쌍하면서도 여린 목소리였다.임슬기는 두 사람을 지켜보다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배정우, 애정 행각은 나가서 해. 역겨우니까.”임슬기의 말에 배정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연다인을 밀어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넌 여기 왜 온 거야?”연다인은 잠시 멈칫하다가 급히 그의 팔을 붙잡고 애교를 부렸다.“뉴스에서 임슬기가 잡혔다길래 서둘러 온 거야. 도울 일이 있을지도 모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데, 진승윤이 다가와 임슬기를 끌어안으며 고개를 숙여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슬기 씨, 흥분하면 안 돼요. 집에 가서 푹 쉬세요.”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달한 지 오래였다. 배정우는 눈에 살기를 띠며 소리쳤다.“진승윤! 그 손 놔!”“배정우, 네가 만약 진심으로 슬기 씨를 생각한다면, 지금 슬기 씨는 휴식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야 할 거 아니야. 퇴원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임신까지 한 몸이야. 종일 고문 당하듯 이렇게 끌려다니면 버틸 수 있을 거 같아?”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슬기의 몸이 휘청거
“대표님, 혹시 누군가 대표님 명령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오후, 임슬기가 체포된 뒤 배정우는 즉시 모든 언론사에 보도를 금지한 뒤 사전에 내보낸 기사도 철회하도록 분부했다.만약 누군가 목숨을 걸고 보도를 내보낸 게 아니라면, 연다인이 이 일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걸 설명했다.창밖을 응시하는 배정우의 검은 눈동자에는 잠깐 살기가 스쳐 지났다.만약, 정말로 연다인이 관련되었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었다.한창 생각에 빠져 있는데 연다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하지만 배정우는 미동도 없이 버티고 있다가
임슬기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다음 날 점심이었다. 머리를 문지르며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자,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보지 않아도 김현정이 국을 끓이고 있을 거란 걸 알 수 있었다.임슬기는 세면대로 걸어가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거울 속 창백한 자신을 바라보며 잠시 멈칫하다,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죽음의 문턱까지 와서도 복수는커녕 살인 누명까지 쓰게 생겼으니, 삶이 너무나도 허무하고 공허하게 느껴졌다.세수를 마치고 나오자, 마침 주방에서 나오던 김현정이 그녀를 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언니, 얼굴이 너
임슬기는 연다인의 차 뒤를 따라 점점 시내를 벗어나 산으로 향했다.연다인이 또 무슨 꿍꿍이를 꾸밀까 두려웠던 임슬기는 옷 안에 숨겨둔 카메라를 켰다. 이번에는 자신이 다친다고 해도 모두에게 연다인의 진짜 얼굴을 보여주리라 결심했다.30분을 더 운전한 후, 연다인의 차가 급커브를 돌며 멈췄다. 주변을 둘러보던 임슬기는 음침하고 으스스한 환경에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졌다.‘사람도 살지 않을 것 같은 곳이네.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곳까지 온 거지? 설마 날 죽일 생각인가?’여기까지 생각한 임슬기는 주머니에 작은 칼을 숨겨두었다.차에
연다인은 임슬기의 머리카락을 또 한 번 세게 잡아당기며 그녀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그 후 임씨 가문이 망하자, 오정태는 증거를 들고 너를 찾아왔다가 나를 만난 거야. 그대 오정태의 눈빛이 어땠는지 알아?”연다인은 임슬기의 턱을 움켜쥐고 사나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그 늙은이가 나를 범인 보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더라. 사실 처음엔 그를 죽일 생각도 없었거든. 그런데 제 분수를 모르고 자꾸 네 걱정을 하더라고. 죽기 직전까지도 널 걱정하더라? 역겹게!”갑자기 연다인은 임슬기를 바닥에서 끌어 올려 소각
진승윤과 김현정이 도착했을 때, 임슬기는 깜깜한 화장터에서 다리를 절며 겨우 걸어 나오고 있었다.“슬기 언니!”김현정은 차에서 뛰어내린 뒤 달려가 임슬기를 부여안았다. 머리는 흐트러지고 입가엔 핏자국이 선명했다.“언니, 이게 무슨 일이에요? 연다인 그 나쁜 년이 한 짓이죠?”김현정의 품에 안겨서야 임슬기는 공허하던 눈빛이 흔들리더니 얼굴을 파묻으며 울음을 터뜨렸다.“현정아, 집사님이 재가 되고 말았어. 나는 왜 이렇게 무능한 걸까...”임슬기의 말에 김현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한 채 그녀의 등을 토닥이다 한참 뒤에 입을
금액 아파트로 돌아간 뒤 임슬기는 카메라 메모리 카드를 꺼내 태블릿에 넣은 뒤 영상을 편집해 진승윤에게 보내고 문자를 남겼다.[추적할 수 없는 계정을 만들어서 영상을 올려줘요. 연다인에게 실시간 검색어 1위가 어떤 것인지 알게 해줘야죠.]얼마 지나지 않아 진승윤한테서 회답이 왔다.[알겠어요. 슬기 씨가 이렇게 반격하니까 저도 기쁘네요.]잠깐이지만 임슬기는 가슴이 살짝 떨려왔다. 진승윤은 그녀를 너무 잘 대해주었다.모든 부탁을 거절 한번 없이 응해주는 진승윤한테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이러는 거 그 사람을 이용하는 게
배정우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떠나려는 찰나 김서우는 뒤에서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배정우 씨, 지금 연다인한테 가는 거예요?”“손 놓으시죠?”배정우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김서우는 손을 놓지 않고 계속 뒤따라가더니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다인이는 배정우 씨한테 진심이었어요. 이렇게 냉정하게 대하면 안 되죠.”배정우는 어두운 표정으로 김서우의 손을 뿌리치고는 살기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신경 쓰지 마시죠.”말을 마친 배정우는 두 걸음 앞으로 걸어가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배정우 씨.”갑자기 김서우가 배정우에게 다가와 임슬기의 말을 가로막았다.“정말 다인이를 버리는 거예요? 만나러 갔었는데 애가 완전히 야위어 있었다고요.”배정우는 김서우를 무시한 채 차가운 목소리로 임슬기를 추궁했다.“뭐가 없다고?”김서우의 등장에 정신이 번쩍 든 임슬기는 배정우의 질문과 이 모든 상황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방금 임슬기는 배정우에게 자신도 신장 하나가 없으며, 그것도 연다인과 같은 위치라는 사실을 말하려 했었다. 하지만 폐암도 믿지 않는 그가 이를 믿을 리 없었다.임슬기는 입술을 깨물며 비웃었다.“뇌
‘은혜를 갚는다고?’비록 임슬기는 한 번도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김현정이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헌신적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마침, 김현정과 눈이 마주친 임슬기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애써 감추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진승윤, 그래서 보내야만 하는 거야. 내 옆에 있으면 너무 위험해.”명인 시에 머무르면 배정우든, 연다인이든, 김씨 가문이든 김현정을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지 않았다.김현정은 임슬기의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앞장서는 사람이었고 그러다 결국 임슬기 대신 위험해질까 봐 두려웠다.만약
“배정우 씨, 여기 있었네요. 그럼, 아내를 좀 잘 다스려요. 2년 전 같은 스캔들이 다시 일어난다면 체면이 말이 아닐 텐데.”물론 차희라도 배정우가 두렵기는 했지만, 딸을 위해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그러세요? 2년 전 제 아내가 누명을 썼던 건 모르셨나 보네요?”배정우는 차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게다가 승윤이는 내 친구인데, 제 아내를 배려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배정우의 말에 임슬기는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말이 단순히 체면을 위한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자신을 믿는 건지 의아해졌다.순간 임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깔끔한 검은 정장을 차려입고 곧은 자세로 서서, 차갑고도 거리감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임슬기는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오정태의 장례식이니만큼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배정우는 손에 든 꽃을 묘비 앞에 놓고는 그녀를 힐끔 돌아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끝나면 얘기 좀 해.”그의 말에 임슬기의 마음은 이유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설마 연다인을 변호하러 온 건가?’“시간 없어.”거절당한 배정우는 마치 무심코 던진 말인 양 아무런 대꾸도 없이 발걸음을 돌
몇 번째로 오는지도 모를 익숙한 그곳에 발을 들이자, 임슬기는 가슴이 미묘하게 떨려왔다. 하지만 이번엔 가해자 처지가 아닌 자유로운 몸으로 찾아온 것이라 마음이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철문 앞에 서자, 단 하루 만에 연다인은 초췌한 몰골로 앉아 있었다.비싼 옷은 어제와 같았지만, 머리는 흐트러지고 화장은 번져 경찰의 추궁에 시달린 흔적이 역력했다.‘연다인, 겨우 이거로 부족하지. 엄마의 죽음, 집사님이 받은 고통 그리고 동생의 인생까지. 지금 네가 받는 이 고통은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여기까지 생각한 임슬기는 이를 악
임슬기가 말을 마치자, 수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진승윤의 침묵에 불안해진 임슬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진승윤 씨, 지난번 병원에서 우리가 생사를 함께한 동지라고 했잖아요.”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나에게 친구는 무엇보다 소중해요. 승윤 씨가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차라리 복수 같은 건 포기할 거예요. 알겠어요?”연다인을 상대할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임슬기 자신이었다. 만약 목숨을 담보로 삼아야 한다면, 그건 진승윤이 아닌 자신의 생명이어야 했다.지금껏 곁을 지켜준 건 진승윤과 김현정뿐이었으니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임슬기는 배정우가 다시 돌아온 줄 알고 소리쳤다.“꼴도 보기 싫으니까 꺼져!”“슬기 언니, 저 김현정이에요.”임슬기는 멈칫하더니 눈물을 닦고 감정을 억누른 채 문을 열었다.하지만 문을 열고 김현정을 보자, 참지 못하고 그녀를 붙잡은 채 실성한 듯 울음을 터뜨렸다.임슬기는 무력한 자신이 싫었고 원망스러웠지만,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얼마나 울었을까, 울다가 지친 그녀는 김현정을 놓아주더니 말없이 욕실로 들어갔다.샤워하고 약을 먹은 뒤 옷을 갈아입고 나서야 욕실에서 나온 임슬기는 걱정스
“뭐예요? 저한테 손대지 마세요! 전 사람을 죽인 적이 없다고요!”연다인은 황급히 배정우의 등 뒤로 숨으며 소리쳤다.“정우야, 어서 막아줘! 난 억울해!”“연다인 씨, 조사에 협조해 주시죠.”“못해요!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러는 거예요? 증거 있어요? 전 억울해요!”연다인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배정우의 옷소매를 움켜쥐었다.경찰은 난처한 표정으로 배정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배정우 씨, 서로 곤란한 일은 만들지 마시죠.”얼굴빛이 무섭게 바뀌던 배정우는 이내 등 뒤에 있던 연다인을 잡아 경찰들 앞에 세우며 말했다.“다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