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슬기는 배정우를 밀면서 말했다.“정우, 그만 좀 해. 나 너랑 같이 갈게.”배정우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닥쳐. 집에 돌아가서 다시 보자.”“정우...”송재현이 다가와 손을 뻗어 임슬기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배정우 씨, 슬기는 당신과 함께 가고 싶어 하지 않아요. 슬기의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 돼요.”배정우는 송재현을 밀어내며 차가운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당신이 뭐길래 내가 내 아내와 어떻게 지내는지에 간섭하는 거죠?”“배정우 씨, 슬기를 아내로 여기신 적 있나요? 이런 행동은
가는 내내 배정우의 얼굴은 어둡게 가라앉았고 주위엔 살을 에는 듯한 냉기가 감돌았다. 그 기세에 눌린 임슬기는 조수석에 웅크린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한참을 달리던 차 안, 침묵을 깨고 배정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설명 안 할 거야?”임슬기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속눈썹 끝에는 눈물이 아슬하게 맺혀 있었다.“내가 해명하면... 들어줄 거야?”“말해 봐.”화가 난 배정우는 짧게 한 마디 내뱉었다. 하지만 그 말 한마디에 분명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마치 그녀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는 듯한 목소리였다.“나랑 송
“뭐? 안 지울 거야! 이거 놔!”임슬기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하지만 배정우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닫자 그대로 그의 손목을 꽉 깨물었다.배정우는 갑작스러운 통증에 결국 그녀의 손을 놓쳤고 그 기회에 임슬기는 곧장 밖으로 뛰어갔다.‘아이를 지켜야 해!’임슬기가 배 속의 아이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함께 버텨왔는데 살아 있는 한 절대 스스로 이 생명을 포기할 수 없었다.하지만 배정우는 순식간에 그녀를 따라잡아 단숨에 품 안에 가뒀다.“어디로 도망치려고?”임슬기는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며 소리쳤다.“살려
“임슬기...”배정우는 갑자기 손을 뻗어 연다인의 손을 움켜쥐더니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아 긴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러나 배정우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자 연다인의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우야, 깼어?”눈을 뜬 배정우는 연다인의 얼굴을 확인하곤 약간 실망한 기색을 보이며 그녀의 손을 놓았다.“네가 왜 여기 있어?”“너 다섯 시간이나 기절해 있었어. 나 정말 너무 놀랐어. 어때, 좀 괜찮아?”하지만 배정우는 그녀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머리를 감싸 쥐며 소리쳤다.“권
배정우는 여자가 우는 걸 싫어했다. 특히 연다인이 매번 우는 것을 볼 때면 더욱 짜증이 났다.하지만 임슬기는 달랐다. 배정우는 그녀가 울면 이상하게도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고 그녀에게 수없이 속아 넘어가면서도 결국엔 마음이 약해졌다.연다인은 배정우가 점점 짜증을 내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더 이상 매달리지 않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았어. 그럼 난 집에서 기다릴게.”“그래.”문을 나서는 순간 연다인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빌어먹을 임슬기. 죽을 날이 코앞인데도 정우의 마음을 붙잡고 있다니, 진짜 끈질기네!’원래
버스에서 내리자 싸늘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고 임슬기는 몸을 웅크리며 옷깃을 여몄다. 비에 젖은 옷이 축축하게 달라붙어 바람이 스칠 때마다 몸이 떨렸다.이곳은 오정태의 고향이었다. 임슬기는 이곳에 한 번 와본 적이 있었지만 밤이 되니 길이 낯설었다.홀로 빗속을 헤매던 끝에 겨우 오정태의 집을 찾아냈다.창문 너머로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걸 본 임슬기는 한참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그 순간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구세요?”“아주머니, 저 슬기예요.”잠시 정적이 흐르고 십여 초가 지
임슬기는 순간 얼어붙었다.“집사님이 뭔가 남기셨다고요? 아주머니, 그거 혹시 아빠가 남긴 거예요?”“그래. 가시기 전에 불안하다고 일부러 따로 보관해 두셨어.”주인화는 한숨을 내쉬었다.“슬기야, 넌 자책할 필요 없어. 그이가 떠나기 전에 직접 점을 쳐 봤는데 이번에 가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더니, 결국 그대로 됐잖아.”“집사님... 집사님은 살해당했어요. 저를 찾으러 명인시에 오지만 않았어도...”“이건 다 운명이야. 연다인 같은 배은망덕한 애는 반드시 천벌을 받을 거야. 그이도 예전에 그 애는 믿을 게 못 된다
가장 먼저 임슬기를 발견한 사람은 연다인이었다. 그녀는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배정우의 팔을 잡아당기며 그의 품에 고개를 기대고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정우야, 사람들이 다 오기 전에 우리 정원에서 잠깐 산책할래? 같이 별 보고 싶어.”어젯밤 크게 다툰 탓인지 배정우는 마뜩잖은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임슬기는 문 앞에 서서 두 사람이 정원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슴 한쪽이 저릿했지만 이내 감정을 다잡고 송재현 쪽으로 향했다.“재현아.”송재현은 그녀를 본 순간 귀신이라도 본 듯 뒷
임슬기도 한때는 이 아이를 지울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결국 이 아이는 그녀의 아이였고 차마 포기할 수 없었다. 절망과 고통 속에서 오직 이 아이만이 그녀를 다시 살고 싶게 만들었으니까.가끔은 꿈꿨다. 아이가 태어나면 혹시 배정우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비록 그녀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더라도 마지막 순간만큼은 셋이 함께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그러나 그 아이를 죽인 건 배정우였다. 그는 스스로 그들과의 모든 인연을 끊어버렸다. 이제 더 이상 그를 사랑해야 할 이유도, 그를 용서해야 할 이유도
“언니, 제가 이야기 하나 해줄게요.”김현정은 코를 훌쩍이며 침대에 기대어 앉았고 눈물 맺힌 눈으로 창백한 얼굴의 임슬기를 바라보았다.“17년 전에 저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당했었어요. 작고 어두운 방에 갇혀 있던 그때 언니를 만났는데 그때 언니도 겨우 열 살쯤이었을 거예요. 그런데도 언니는 무서워하기는커녕 저를 보호하려고 했어요.”“기억나요? 한번은 제가 울며 소리를 질렀더니 놈들이 화를 내며 밥을 안 주겠다고 했잖아요. 그러자 언니는 놈들이 떠난 뒤 몰래 언니 빵을 반으로 갈라서 제 손에 쥐여줬어요. 또 다른 날은 그놈들이 절
상처를 다 싸맨 후 배정우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소파에 앉았고 한동안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방 안에 가득한 정적이 답답하고 숨 막힐 정도로 무거웠다.그렇게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 불도 켜지 않은 방 안에서 달빛만이 희미하게 그의 몸을 비추고 있었다. 그 모습은 한층 더 싸늘해 보였다.그러다 갑자기 배정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긴 다리를 뻗으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그런데 문 앞에서 누군가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배정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문
진승윤은 쓴웃음을 지었다.“이제 와서 그게 중요한가요?”그는 임슬기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자신이 그녀를 좋아하든 말든 아무 의미도 없다.진승윤은 그저 임슬기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그런데 김현정이 그의 앞으로 다가와 단호하게 말했다.“중요해요.”진승윤은 순간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김현정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다시 말했다.“만약 진 변호사님이 슬기 언니를 사랑한다면 적어도 배정우 그 개자식보단 나은 선택지니까요. 변호사님은 슬기 언니를 다치
“배정우, 너 진짜 비겁한 놈이야!”진승윤은 배정우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 올리더니 바로 또 주먹을 날렸다.퍽.“사랑하지 않으면 그냥 놔줘야지. 도대체 왜 한 여자를 이렇게까지 괴롭히는 거야? 만약 아직도 사랑한다면 슬기를 믿었어야지!”퍽.또다시 강렬한 주먹이 배정우의 얼굴을 강타했다.진승윤은 힘을 아끼지 않았다. 배정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부어올랐고 입가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하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그런 배정우의 무기력한 모습이 오히려 더 분노를 자극해 진승윤은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주먹을 날렸다.“거짓말만
배정우의 손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는 연다인을 밀어내고 임슬기를 구하려 했지만 연다인이 필사적으로 그를 붙잡고 늘어져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그 사이 임슬기의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자 배정우는 재빨리 연다인을 확 밀쳐내고 황급히 난간으로 달려가 손을 뻗었다.하지만 늦어버렸다. 두 사람의 손끝은 닿을 듯 스치며 멀어져 갔다. 마치 그들의 사랑이 결국 엇갈리고 만 것처럼.“슬기야!”무표정하기만 하던 배정우의 눈동자가 드디어 공포와 무력감으로 물들었다. 그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만
“그거 참 정말 난처하게 됐네.”임슬기는 옷깃을 여미며 연다인 앞으로 다가와 차갑게 웃었다.“연다인, 내가 죽어도 넌 만족하지 못할 거 같은데? 설마 내 유골까지 팔아서 명혼을 치르려는 건 아니지?”연다인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태연하게 대답했다.“그거 좋은 아이디어네. 한 번 고려해 볼게.”그 태도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임슬기는 어이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그런데 정작 우스운 사람은 자기 자신일지도 몰랐다. 임슬기는 선의를 한 번 베풀었다가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자신의 인생까지 망쳐버렸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초
다음 날 아침.진승윤이 임슬기의 병실을 찾았을 때,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부은 눈은 밤새 울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진승윤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슬기야, 무슨 일 있었어?”임슬기는 고개를 저으며 기침했다.“아무것도 아냐. 어젯밤에 추웠나 봐. 감기 기운이 좀 있어.”“주민규가 왔어. 오늘에는 일단 예비 검사를 진행할 텐데, 너 몸 괜찮아? 부담스러우면 다른 날로 미룰 수도 있어.”“괜찮아. 오늘 하자.”임슬기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네가 아니면 주 선생님 같은 분을 모실 수
임슬기는 예전엔 낮고 매력적인 배정우의 목소리를 좋아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두려움이 밀려왔다.“배정우, 뭐 하는 거야? 당장 일어나.”하지만 배정우는 일어나지 않고 그녀를 꼭 껴안았다.“임슬기, 잠깐만 이러고 있자.”갑작스러운 다정함에 불편해진 임슬기는 배정우의 몸에서 나는 희미한 술 냄새에 서둘러 그를 밀어냈다.“너 취했어?”“윽!”배정우는 가슴을 움켜쥐며 얼굴을 찡그렸다.임슬기는 배정우의 부상이 떠올라 급히 다가가 상처를 확인하려고 손을 뻗었다.“상처를 건드린 거야? 피는 안 나?”배정우는 갑자기 그녀의 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