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슬기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미행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송재현과 거리를 두었다.“뭐 먹고 싶어?”“아무거나.”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배정우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나타나 자신을 하찮은 여자라고 욕할까 봐 두려운 마음에 그녀는 두 손을 꽉 쥐고 창밖을 바라보며 긴장된 표정으로 대충 대답했다. 송재현은 그런 임슬기를 흘깃 쳐다보더니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슬기, 나랑 있을 때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 지난번엔 내 잘못이었어. 그래도 우리는 함께 자란 사이인데 내가 널 외면할 수 있겠어
임슬기는 배정우를 밀면서 말했다.“정우, 그만 좀 해. 나 너랑 같이 갈게.”배정우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닥쳐. 집에 돌아가서 다시 보자.”“정우...”송재현이 다가와 손을 뻗어 임슬기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배정우 씨, 슬기는 당신과 함께 가고 싶어 하지 않아요. 슬기의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 돼요.”배정우는 송재현을 밀어내며 차가운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당신이 뭐길래 내가 내 아내와 어떻게 지내는지에 간섭하는 거죠?”“배정우 씨, 슬기를 아내로 여기신 적 있나요? 이런 행동은
가는 내내 배정우의 얼굴은 어둡게 가라앉았고 주위엔 살을 에는 듯한 냉기가 감돌았다. 그 기세에 눌린 임슬기는 조수석에 웅크린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한참을 달리던 차 안, 침묵을 깨고 배정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설명 안 할 거야?”임슬기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속눈썹 끝에는 눈물이 아슬하게 맺혀 있었다.“내가 해명하면... 들어줄 거야?”“말해 봐.”화가 난 배정우는 짧게 한 마디 내뱉었다. 하지만 그 말 한마디에 분명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마치 그녀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는 듯한 목소리였다.“나랑 송
“뭐? 안 지울 거야! 이거 놔!”임슬기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하지만 배정우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닫자 그대로 그의 손목을 꽉 깨물었다.배정우는 갑작스러운 통증에 결국 그녀의 손을 놓쳤고 그 기회에 임슬기는 곧장 밖으로 뛰어갔다.‘아이를 지켜야 해!’임슬기가 배 속의 아이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함께 버텨왔는데 살아 있는 한 절대 스스로 이 생명을 포기할 수 없었다.하지만 배정우는 순식간에 그녀를 따라잡아 단숨에 품 안에 가뒀다.“어디로 도망치려고?”임슬기는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며 소리쳤다.“살려
“임슬기...”배정우는 갑자기 손을 뻗어 연다인의 손을 움켜쥐더니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아 긴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러나 배정우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자 연다인의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우야, 깼어?”눈을 뜬 배정우는 연다인의 얼굴을 확인하곤 약간 실망한 기색을 보이며 그녀의 손을 놓았다.“네가 왜 여기 있어?”“너 다섯 시간이나 기절해 있었어. 나 정말 너무 놀랐어. 어때, 좀 괜찮아?”하지만 배정우는 그녀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머리를 감싸 쥐며 소리쳤다.“권
배정우는 여자가 우는 걸 싫어했다. 특히 연다인이 매번 우는 것을 볼 때면 더욱 짜증이 났다.하지만 임슬기는 달랐다. 배정우는 그녀가 울면 이상하게도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고 그녀에게 수없이 속아 넘어가면서도 결국엔 마음이 약해졌다.연다인은 배정우가 점점 짜증을 내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더 이상 매달리지 않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았어. 그럼 난 집에서 기다릴게.”“그래.”문을 나서는 순간 연다인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빌어먹을 임슬기. 죽을 날이 코앞인데도 정우의 마음을 붙잡고 있다니, 진짜 끈질기네!’원래
버스에서 내리자 싸늘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고 임슬기는 몸을 웅크리며 옷깃을 여몄다. 비에 젖은 옷이 축축하게 달라붙어 바람이 스칠 때마다 몸이 떨렸다.이곳은 오정태의 고향이었다. 임슬기는 이곳에 한 번 와본 적이 있었지만 밤이 되니 길이 낯설었다.홀로 빗속을 헤매던 끝에 겨우 오정태의 집을 찾아냈다.창문 너머로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걸 본 임슬기는 한참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그 순간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구세요?”“아주머니, 저 슬기예요.”잠시 정적이 흐르고 십여 초가 지
임슬기는 순간 얼어붙었다.“집사님이 뭔가 남기셨다고요? 아주머니, 그거 혹시 아빠가 남긴 거예요?”“그래. 가시기 전에 불안하다고 일부러 따로 보관해 두셨어.”주인화는 한숨을 내쉬었다.“슬기야, 넌 자책할 필요 없어. 그이가 떠나기 전에 직접 점을 쳐 봤는데 이번에 가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더니, 결국 그대로 됐잖아.”“집사님... 집사님은 살해당했어요. 저를 찾으러 명인시에 오지만 않았어도...”“이건 다 운명이야. 연다인 같은 배은망덕한 애는 반드시 천벌을 받을 거야. 그이도 예전에 그 애는 믿을 게 못 된다
임슬기는 강재호의 태도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동생 잘 돌보고,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요.”“고마워요, 임슬기 씨.”강재호는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원래 육문주가 두 사람을 배웅하려 했지만, 진승윤이 먼저 임슬기의 짐을 차에 실었다.“육문주, 너는 해야 할 일이나 잘해. 이런 일에 신경 쓰지 말고.”육문주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승윤 형, 내가 무슨 원수예요?”“배정우의 간첩이잖아.”“진짜 아니라고요.”육문주는 진승윤의 귀에 속삭였다.“그리고,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형
“네.”대답하고 나서야 육문주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바로 말을 바꿨다.“아니에요. 안 좋았어요.”배정우는 한참을 침묵하다 욕을 퍼부었다.“쓸모없는 새끼.”육문주는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내가 왜 쓸모없어요?”“육문주, 내 기억 상실 어떻게 치료해야 해?”“최면이요.”육문주는 배정우가 이해하지 못할까 봐 설명하려 했지만,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한참 뒤 배정우가 물었던‘기분 좋았어?’의 상대가 자신이 아닌 임슬기였음을 알아차린 육문주는 배정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해 질 녘, 김현정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육문주가 도시락을 가만히 들고 들어왔다.“슬기 씨, 여기 저녁이요.”도시락을 내려놓은 육문주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덧붙였다.“난 정말 정우 형 편이 아니에요. 그냥 의사로서 환자를 돌봐줄 뿐이라고요.”“환자? 이미 퇴원한 거 아니었어요?”육문주는 복잡한 표정으로 임슬기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슬기 씨, 사실 전에 여러 번 말하려다 계속 말 못했던 게 있어요. 정우 형이 2년 전 교통사고로 뇌진탕을 입었었는데, 그때는 한 달 정도 요양하고 다 나았지만, 최근 다시 두통이
그날 밤, 임슬기는 얕은 잠에 빠져 있었다.꿈속에 배정우가 나타났고 두 사람은 사소한 말다툼을 벌이다가, 갑자기 배정우가 임종현의 목을 움켜쥐며 그녀를 위협했다. 숨 막히는 공포가 엄습하자,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그때, 갑자기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아기? 내 아기인가?’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임슬기는 그제야 모두 꿈이었음을 알아차렸다. 아이의 울음소리도 마침 복도를 지나가는 누군가의 아이일 뿐이었다.“슬기 언니, 아침 먹어요.”임슬기는 비닐봉지를 들고 들어오는 김현정을 보며 물었다.“방금 나가서 사 온 거야
육문주는 배정우를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가 정확히 그날, 임슬기가 추락한 자리로 끌고 가 말했다.“정신이 좀 들어요?”배정우는 어두운 눈빛으로 불쾌한 듯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육문주, 죽고 싶어?”“여길 봐요.”육문주는 자신의 발 아래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정우 형, 여기가 슬기 씨가 떨어진 곳이에요. 형 손으로 직접 밀어낸 곳이라고.”“난 그런 적 없어.”“그건 형 생각이죠. 근데 슬기 씨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이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 얼마나 절망스러웠을지?”육문주의 말에 흠칫하던 배정우는 옥상 변
임슬기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배정우를 밀어내려 했지만 바위처럼 무거워 꿈쩍도 하지 않았다.“배정우, 너 취했어.”배정우는 갑자기 그녀를 껴안더니 고개를 들어 턱으로 그녀의 이마를 살며시 문질렀다.“나 안 취했어, 슬기야. 지금 정신이 아주 멀쩡해.”“멀쩡하면 지금처럼 부르진 않았겠지.”“슬기야.”배정우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그럼 널 뭐라고 불러야 해? 여보?”‘완전히 취했구나.’이 남자는 제대로 취했다. 그런데도 임슬기의 마음속 어딘가에선 묘한 기쁨이 피어올랐다. 지금 이 남
배정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병원까지 도착했다.차에서 내리기 전 임슬기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내일도 종현이 보러 데려가 줄 거야?”“상황 봐서.”‘이 말은 어쩌면 더 이상 종현이를 못 보게 할 수도 있다는 뜻인가?’그렇지만 임슬기는 그 물음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아직 내일이 오지 않았으니, 그전까지는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싶었다.“알겠어.”차에서 내린 후, 임슬기는 주머니 속 사진을 슬쩍 만져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히 배정우가 눈치채지 못했다. 만약 그가 그 사진을 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임슬기는 배정우가 혹시라도 일기장 안에서 보지 말아야 할 내용을 보게 될까 봐 두려웠다.그러나 배정우는 일기장을 몇 장 넘기다 어느 페이지에서 멈춰 섰다.잠시 후, 그는 일기장을 닫더니 바닥에 툭 내던졌다. 그의 목소리는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너 송재현이랑 잤어?”그 한마디에 임슬기는 완전히 얼이 빠졌다. 그녀의 일기장엔 대부분 십 대 시절의 감정이 담겨 있었고 거의 전부가 배정우에 관한 내용이었다. 송재현이랑 관련된 건 전혀 없었다.“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일기장에
이번 식사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식사를 마치자마자 임종현은 별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올라갔다.오늘 임종현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했던 임슬기는 그가 문을 닫는 모습을 바라보다 괜히 미간을 찌푸렸다.그때 배정우가 그녀를 힐끗 보더니 조용히 말했다.“내가 설거지할게.”임슬기는 조금 놀랐지만 굳이 말릴 생각도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2층으로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종현아, 누나가 잠깐 들어가도 될까?”“잠시만요.”몇 분 후, 임종현이 문을 열었다.“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