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원한다고요?”“네!”한소은 그녀는 이 아이를 지키기로 결정하였다. 아이를 가지게 된 운명을 받아들인 것이다.단지 아이를 좋아하고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모든 불필요한 것들을 물리치기엔 충분했던 것이다.“저는 확실히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좋은 엄마가 되는 책임이 막중할까봐 조금 두렵지만, 저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 노력할거예요. 이 아이가 저희에게 온 것은 하늘의 뜻일 거예요. 제 이기적인 이유로 이 작은 생명을 빼앗고 싶지 않아요.”그녀의 말은 김서진을 매우 감동시켰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를 덥석 안았다. “당신은 충분히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아니, 당신은 이미 정말 좋은 엄마가 되었어요!”——정하진은 뷔페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보통 이런 뷔페식당에서는 커플이나 가족들이 다 함께 밥을 먹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 넓은 식당에 혼자 와서 와인을 곁들어 밥을 먹는 사람은 정하진 밖에 없었다.투명한 창가에 앉아 도시의 경치를 내려다보며 즐기는 그의 모습이 오히려 놀랍기까지 했다.그러나 그 여유로움은 여기까지였다. 하이힐 구두 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고, 이어서 한 청순한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정하진은 고개를 들기도 귀찮은 듯,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젓가락으로 쟁반 위의 불고기를 뒤척거렸다.그의 푸대접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뻔뻔하게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사람도 없어 보이는데, 앞에 앉아도 되죠?”“아니, 꺼져.”사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치근덕거리는 여자는 수도없이 만났다. 이러한 일은 그에게 있어서 이미 일상적인 일이었으며, 이렇게 거절하는 것은 이미 습관이 되었다.그는 앞에 앉은 여자를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해서 밥을 먹었다.“하진 씨, 사람한테 이런 식으로 대하면, 옆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될 거예요.” 윤설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웃으면서 말했다.“뭐라고?” 하진은 마침내 앞에 앉은 여자를 쳐다보았다.정말인지 이 여자는 낯짝 한번 두껍다. 일반적
“친구는 적이 아니잖아요.” 윤설아는 조용히 정하진을 바라보았다.정하진은 비웃으며 말했다. “내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이미 차고 넘쳐. 너 같은 게 내가 원하는 자격을 맞출 수나 있을까?”“내 자격이 충분한지 아닌지는 당신이 판단하면 되죠.” 윤설아는 휴대폰을 집어들고선 손가락으로 가볍게 몇 번 터치하였다. 이어 정하진이 책상 위에 놓은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하였다.정하진은 조금 당황한 듯 울리는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그녀를 한 번 보고, 다시 한 번 자신의 핸드폰을 보았다. “이 자료는 바로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앞으로 저와 친구가 되면, 더 큰 선물도 드리죠.” 윤설아가 말했다.윤설아가 보낸 파일 안에는 한소은에 관한 상세한 자료가 들어있었다. “겨우 이걸로 나랑 친구를 하겠다는 건가?” 정하진은 여전히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런 자료는 나도 쉽게 구할 수 있어.”“맞아요. 하진 씨도 이런 정보는 충분히 쉽게 구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적인 일들까지 알아낼 수는 없을 거예요.” 윤설아는 담담하게 말했다. “왜냐하면 이 자료는 모두 한소은과 가까웠던 사람이 구해준 자료이기 때문이죠.”“제가 듣기로는 한소은을 조사하기 위해서 해성 시에 왔다고 들었어요. 더욱 적은 노력으로 이런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남는 장사 아닌가요?”정하진은 파일 속 정보들을 대충 훑어보았다. 사실 그는 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자신이 알아내지 못하였던 사적인 정보들까지 모두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이 자료, 도대체 어디서 얻은 거지?”“어디서 얻은 건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제가 한 말들은 모두 거짓이 아니라는 게 증명되었다는 거죠. 이미 저는 하진 씨에게 좋은 선물을 주었다고 생각이 드는데, 저희가 친구가 될 지는 하진 씨에게 달려있겠네요.” 윤설아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당신 이름이 뭐지?” 마침내 정하진이 질문을 던졌다.“윤…윤설아예요.”“윤설아?” 정하진은 곰곰히 생각하였다.
보통 이런 명문가의 자제들은 단정하고 조용한 스타일이거나, 교만하고 제멋대로 하는 것이 정상적인 일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 앞에 있는 이 여자는 표정은 순진하지만, 하는 말은 꽤나 대담한 것이 아닌가.정하진은 그런 윤설아를 보며 웃기 시작하였다. 사실 자신에게 들이대는 여자들은 수도없이 봐왔지만, 지금껏 이런 타입의 여자는 보지 못하였다.“내 기억상에는 당신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것 같은데, 우리 초면이지? 그런데 초면부터 날 원한다라…너가 원하는 건 내 지위인가? 아니면 내 재산?”“당신이요. 제가 원하는 건 정하진, 당신이예요.”“당신 참 재미있는 사람이네. 근데, 그렇다고 이런 자료로 날 가지려는 건 너무 큰 욕심 아닌가?”“당연히 이 자료로 당신을 가지기엔 부족하겠죠. 이건 저희의 좋은 시작에 불과해요. 저와 친구를 맺게 된다면, 절대 손해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 윈윈하는 관계가 될 거라는 소리예요.” 그녀의 표정을 보아하니, 결코 농담 같지 않았다. “윈윈?”“정 씨 가문은 확실히 전국에서 매우 유명하죠. 그러나 저희 윤 씨 가문도 결코 뒤쳐지는 가문은 아니예요. 저희 가문은 하진 씨가 하고 싶은 일을 충분히 후원해주고 지지해줄 수 있어요. 저희 집안은 당신의 든든한 후원자가 될 거예요.” 윤설아가 말했다.이런 그녀의 제안에 정하진은 그저 웃기만 하였다. “또, 어떤 좋은 점이 있지?”“정 씨 가문은 정치를 하고, 저희 가문은 사업을 하죠. 이것 자체가 서로 윈윈이 되는 관계 아닌가요?” 사실 윤설아가 한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저는 사실 빙빙돌려 얘기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요. 저는 당신의 외모, 학력, 집안을 모두 마음에 들어요. 솔직히 저 정도 되는 여자면, 결코 손해보는 장사는 아닐텐데…한번 고민이라도 해보시죠?”그녀의 직접적인 유혹은 정하진을 생각에 잠기게 만들었다.사실 그녀가 말한 것도 맞다. 자신의 가문은 정치를 하는 가문이고, 저 여자의 가문은 대대적으로 사업을 하는 집안이니, 가문 대 가문으로 봤을
아이를 낳기로 한 이상 초기 검진은 필수였다. 이참에 화학약품을 접촉하고 환경이 안 좋은 실험실에 장시간 머물렀는데 아이에게 안 좋은 영향은 없을지 검사해봐야 했다.병원에 방문하여 초음파, 소변검사를 마치고 나니 오히려 복잡했던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며칠 전까지 불안했었는데 그가 밖에서 기다린다는 사실만으로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를 낳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벌써 엄마가 된다는 생각에 들뜨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했다.“한소은 씨?”의사가 검사결과를 들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임신이 아닙니다.”아이를 가지려면 뭘 조심해야 하는지 아직 묻지도 못했는데 한소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방금 뭐라고 하셨어요?”“초음파 결과가 나왔어요. 임신 아닙니다.”말을 마친 의사가 검사 결과지를 그녀에게 건넸다.멍한 표정으로 검사지를 받아 살펴보았지만 뭐라고 썼는지 알아볼 수 없었다. 어쨌든 최종 진단에 임신이 아니라는 글자만 똑똑히 보였다.“임신이… 아니라고요?”옆에 있던 김서진은 그녀에 비해 침착한 편이었다.“그런데 집에서 테스트기로 테스트했을 때는 두 줄이었어요.”“테스트기가 다 정확한 건 아니에요. 그리고 이 건 두 줄이 그렇게 선명하지도 않고 좀 흐릿하네요. 내분비 실조나 호르몬 변화 때문에 이렇게 나올 수도 있어요. 초음파가 가장 정확하죠. 임신은 아니고 생리가 늦어지는 건 아마 스트레스가 많거나 최근에 몸 상태가 안 좋아져서 그럴 거예요.”한소은은 그 말을 들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김서진이 의사와 몇 마디 나누었지만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마치 농락당한 기분이었다.며칠이나 고민하고 결정했는데 임신이 아니라니. 헛웃음이 나왔다.차에 오른 뒤에도 한소은은 멍한 표정으로 배를 붙잡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많이 혼란스러워 보였다.“차라리 잘 됐어요.”김서진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물론 그도 실망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기쁜 마음으로 아이를 맞을 준비까지 했는데 헛수고였다고 생각하니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이로써 그는 아이를
거리 곳곳에 그들의 광고판이 붙었다.전광판 뿐이 아니라 TV와 SNS에 “빅토리”라는 향수가 도배되었다. 신제품은 아직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많은 관심을 끓었다.대윤 그룹 공식 홈페이지에 안내된 구매예약 링크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매진될 정도였다.엄청난 실적에 윤소겸은 물론이고 윤중성까지 입이 귀에 걸렸다. 실적 보고서를 확인한 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아버지, 보셨죠? 겨우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많이 팔렸어요.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니까요!”윤중성의 맞은편에 다리를 꼬고 앉은 윤소겸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제가 무조건 성공할 거라고 했잖아요!”“그래! 잘했어!”한바탕 칭찬이 끝난 뒤, 윤중성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공장 쪽은 물량 충분하지?”“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이미 다 준비했죠. 노동자들은 3조 교대로 근무형태를 바꾸었어요. 돈을 준다는데 누가 안 하겠어요?”윤소겸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참, 아버지. 공장 쪽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노형원 그 자식은 도대체 뭐하는 놈이에요? 공장 측에서는 거의 출근을 안 했다고 하는데…. 왜 그런 게을러빠진 놈을 데리고 있어요? 저 혼자 그 많은 일 처리를 하느라 바빠죽겠다고요!”“그래?”윤중성이 미간을 찌푸렸다.“정 안되면 꺼지라고 해! 모레 임원 회의 열 거야. 그때 너도 참석해서 프로젝트 진행상황을 임원들에게 보고해. 네 입지를 다지는데 도움이 될 거야. 회사 사람들한테 네 실력을 증명할 좋은 기회이기도 하니까 꼭 참석하도록.”임원회의에 참석하라는 말에 윤소겸은 신바람이 났다. 회사에 입사한지도 한참 되었지만 공식적인 회의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무리 윤중성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자격미달이라고 윤중성이 반대했기 때문이었다.게다가 그는 결국 사생아였다.“이틀 사이에 철저히 준비해. 내일 정식 출시니까 긴장 늦추지 말고. 중요한 시기니까 어떤 사고도 없어야 해.”자리에서 일어선 윤중성은 손으로 아들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이렇게
한편, 윤설아는 쇼핑백을 가득 들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마침 외출하고 돌아오는 요영과 마주쳤다. 요영은 무슨 일인지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또 땄나 보네?”윤설아가 생긋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요영이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조금? 요즘 운이 좀 좋아. 이대로 가다가는 그 여편네들이 나랑 게임 안 한다고 하겠어. 오늘도 내가 따니까 다들 똥 씹은 표정을 하더라고.”“예전에는 그 사람들도 많이 땄잖아. 설마 그러겠어?”윤설아는 미소를 지으며 쇼핑백을 내려놓고 신상백 하나를 요영에게 건넸다.“이번에 새로 나온 신상인데 엄마랑 어울릴 것 같아서 하나 샀어.”“내가 외출할 일이 뭐가 있다고. 됐어.”말은 그렇게 해도 어느새 눈은 가방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들고 나갈 일이 없으면 진열장에 넣어둬. 보기만 해도 기분 좋잖아.”가방을 내려놓은 윤설아는 뒤돌아서 작은 유리병 하나를 건넸다.“그리고 이거.”“향수네?”향수를 건네 받은 요영은 뚜껑을 열고 향을 맡더니 말했다.“괜찮네! 조금 진하기는 해도 무난한 것 같아.”윤설아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엄마, 이 향수가 뭔지 알아?”“뭔데?”“이게 빅토리야!”“촌스러운 이름이네. 전혀 고급스럽지 않아.”요영은 이름이 촌스럽다고 비웃으며 다시 손목을 코에 대고 향을 맡았다.“향이 조금 이상하네. 그런데 어디가 이상한지는 잘 모르겠어.”말을 마친 그녀는 티슈를 꺼내 손목을 닦았다. 윤설아는 향수를 탁자에 내려놓고 의미심장한 얼굴로 엄마를 바라보았다.요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이 향수가 뭐가 특별해?”“엄마, 이 향수 어디 제품인지 궁금하지 않아?”요영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설마 한소은이 새 제품을 내놓았어?”“아니야!”윤설아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이거 우리 대윤 그룹 신제품이야.”요영이 멈칫하며 다시 물었다.“그러니까 그 자식이 만든 향수라고?”“회사에서 최근 진행하는 새 프로젝트 있잖아. 정식 출시를 앞두고 있어. 나도 응원하는 셈치
요영이 딸의 손을 잡으며 뭐라고 말하려는데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네 아빠 오셨나 보다.”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윤중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쇼핑백 하나가 들려있었다. 거실에 나와 있는 요영 모녀를 보자 그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었다.“설아도 집에 있었구나.”거실에 들어선 그가 소파로 다가가며 말했다.“마침 잘됐다. 네 엄마랑 하나씩 나눠서 가져.”“이게 뭐야?”윤설아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에서 쇼핑백을 건네 받았다.“어? 향수네?”반가워하는 딸의 얼굴을 바라보던 윤중성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대윤그룹의 첫 향수야. 벌써 초기 물량이 매진됐다고 하더구나! 공장에서 특별히 가져온 거야. 가족부터 챙겨야지.”요영은 남편의 의기양양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속이 울렁거렸다. 대윤 그룹이 첫 향수를 출시해서 기쁜 게 아니라 밖에서 낳아온 사생아 자식이 프로젝트를 성공시켰다는 사실에 더 들뜬 것 같았다.기분이 언짢으니 표정이 곱게 지어질 리 없었다. 그녀는 시종일관 무표정한 표정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아빠가 우리 거 챙겨올 줄 알았으면 돈 주고 사지 않는 건데.”윤설아는 아깝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놀란 윤중성이 물었다.“뭐? 너도 샀어?”“당연하지! 우리 대윤 그룹 첫 향수잖아. 게다가 소겸이가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진행한 프로젝트라서 더 특별한 의미가 있지! 소장용으로 하나 샀어!”말을 마친 윤설아는 탁자에 놓인 향수를 가리켰다.“엄마도 써보고 좋다고 했어. 안 그래, 엄마?”요영도 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윤중성은 곁눈질로 아내의 표정을 살폈다. 사실 그녀가 기분이 언짢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두 여자 사이에 끼어서 몇 년을 살다 보니 이럴 때는 자신이 한발 물러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본처와 애인이 화목하게 지내는 게 그의 바람이었다.본처인 요영이 가만히 있어 준다면 밖에서 기자들이 뭐라고 떠들든 상관이 없었다.“어쩐지 우리 마님한테서 좋은 향기
서재에 도착한 윤중성은 포트에 전원을 연결하고 티백을 꺼냈다.“설아야, 요즘 회사에서 얼굴 보기 좀 힘들다?”윤중성은 무심한 듯, 찻잔에 티백을 담으며 물었다.윤설아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아빠,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전에도 회사에서 나랑 얼굴 마주치는 일이 드물었잖아. 난 사무실에 있었어. 그런데 왜?”정작 말을 꺼내려니 조금 어색했던 윤중성은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요즘 회사 일이 좀 바빠서 못 마주쳤나 보네. 참, 네 동생이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너는 어떻게 생각해?”윤중성이 티백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난 당연히 응원하지! 행동으로 보여줬잖아? 일부러 그 향수 사려고 백화점까지 갔으니까.”윤설아는 최대한 진심인 것처럼 보이도록 환한 미소를 지었다.윤중성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그런 얘기가 아니야. 이 프로젝트 자체가 어떠냐고 물어본 거야.”“좋지! 난 좋다고 생각해! 소겸이한테 조언도 좀 해주려고 했는데 걔가 혼자 할 수 있다잖아. 우리 의견은 유행에 뒤처진다고 그랬어. 노 차장한테 들었는데 노 차장이 조향사를 소개해 준다는 것을 소겸이가 거절했대. 그러고는 혼자 국제 일류 조향사를 찾아서 진행했잖아. 처음에는 조금 걱정했는데 지금 결과로 보면 소겸이는 역시 사업 쪽으로 재능이 있어. 결과가 좋잖아.”윤설아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윤소겸을 칭찬했다.하지만 윤중성이 듣기에 조금 불안했다.“정말 그렇게 생각해?”물이 다 끓자 윤설아는 다가가서 포트를 들어 찻잔에 물을 부었다.뜨거운 물로 찻잔을 한번 데운 뒤, 다시 티백을 넣고 차를 우렸다. 윤설아는 다 우린 찻잔을 윤중성의 앞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아빠, 혹시 내가 소겸이를 안 좋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래?”윤중성이 찻잔을 지그시 바라보며 되물었다.“내가 오해한 거니?”“처음에 소겸이 집에 데려온다고 했을 때 기분이 안 좋았던 건 인정해. 하지만 걔가 우리 집에 들어오고 회사도 같이 다니면서 계속 누나라고 불러주니까 미워할 수가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