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하려는 거야.”프레드를 바라본 여왕의 시선이 서류에 닿았다. 그건 유언장이었다. 유언장에는 여왕 본인의 몸 상태가 악화하여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정신이 맑을 때 왕위를 세 번째 왕손한테 넘겨주고 이사의 권력을 모두 프레드한테 넘긴다고 쓰여 있었다.이건 유언장이 아니라 신체 포기각서 같은 느낌이었다.“반역이 아니라고 했잖아!”서류를 들고 있는 여왕은 눈으로 분노를 토해냈다.“세 번째 왕손은 이제 4살이야. 그 애가 뭘 알겠어! 게다가 왕자들한테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바로 왕손에게 자리를 물려주다니.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눈을 감아도 알 수 있어!”프레드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아니요, 세 번째 왕손은 어려서부터 총명한 것이 앞으로 좋은 왕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그저 옆에서 도움만 줄 뿐, 결국 모든 권력은 왕손의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왕 폐하도 왕자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않습니까. 왕자 중에서는 적합한 사람이 없습니다.”프레드는 막힘없이 술술 얘기했다. 여왕은 겨우 몸을 일으켜 얘기했다.“프레드, 왜 전에는 네가 이렇게 야심이 가득하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 걸까?”“아니요, 여왕 폐하. 여왕 폐하의 눈은 속일 수가 없죠. 폐하는 제 야심을 알아보고 저를 도와주고 이끌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죠. 그런 점에서 정말 폐하께 감사드립니다.”멈칫한 프레드가 이어서 얘기했다.“그래서 이 실험을 위해 제가 아주 많은 신경을 쓰고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실험이 성공하길 바랍니다. 최선을 다해서 이 실험이 성공하게 할 겁니다.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폐하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청춘을 되찾을 수 있죠. 심지어 몇십 년을 더 살고,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프레드는 전에도 여왕에게 이런 말을 여러 번 했다. 처음 들을 때는 의아해했지만 들으면서 점점 마음이 동했다.영원히 청춘을 즐길 수 있고 불로장생할 수 있다는데, 누
“여왕 폐하,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일은 서로 윈윈하는 것입니다. 여왕 폐하는 청춘과 불로장생을 손에 넣고, 저는 막강한 권력을 손에 넣는 것. 좋지 않습니까?”프레드는 얼굴을 매만지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다. 마치 이렇게 하면 짓밟힌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는 것만 같았다.“흥.”여왕은 프레드와 말도 섞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하지만 프레드에게 있어서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모든 것은 프레드의 손안에 있다. 곧 프레드의 계획이 성공할 것이다.누구도 프레드를 막을 수 없다. 누구도 말이다!이때 밖에서 누군가의 소리가 들려왔다.“공작님!”프레드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여왕을 쳐다보다가 손을 닦고 걸어 나갔다. 그리고 허리를 굽신대는 사람 앞으로 가서 물었다.“무슨 일이지?”프레드는 약간 불쾌했다. 중요한 일이 아니면 방해하지 말라고 미리 일러두었음에도 찾아오다니. 프레드는 이 사람들을 일 하나 제대로 처리 못하는 사람들로 간주했다.전의 장애인보다도 못하다. 장애인은 몸에 장애가 있어도 머리가 좋아 프레드를 잘 도와주었다. 다만...프레드가 깊이 생각할 사이도 없이, 부하가 작은 병을 하나 꺼내 들었다. 외부에서 파는 향수 같기도 했지만 완벽하게 똑같은 것도 아니었다. 작은 병 안의 액체는 어딘가 괴이해 보였다.“이게 뭐지?”프레드가 미간을 찌푸리고 손을 뻗어 병을 건네받았다.비슷한 전적도 있고, 프레드는 이쪽 방면의 것들은 연구하다 보니 경계심이 높아서 출처가 불분명한 물건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한 여자가 가져온 겁니다. 그리고 이것도요.”이윽고 그 남자는 동그란 모양의 카드를 꺼냈다.그 물건을 본 프레드는 약간 흠칫하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그 여자는 지금 어디 있어.”“아직 밖에 있습니다. 신분이 불확실한 자이니 들여보내지 않았습니다. 계속 중요한 물건이 있다고, 꼭 공작님한테 드려야 한다고 하지 않았으면 진작 돌려보냈을 겁니다.”이건 사실이었다. 이곳은 외부인이 쉽게 들락날락할 수 있는 곳이
방에는 프레드와 여자만이 남았다.프레즈는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여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여자는 조용하고 우아 해보였지만 입은 옷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했고 옷차림은 비루했다.“당신은...”프레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프레드가 질문하자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나는 주효영이에요. ‘사장님’의 부하죠. 나는 사장님의 가장 쓸모 있는 조수예요. 난 조직에서...”주효영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프레드가 손을 저어 주효영의 말을 잘랐다.“난 네가 누구인지 관심 없어. 날 찾아와서 뭘 하려고 한 거야. 혹은 왜 날 찾아온 거야.”“이거요.”주효영은 입술을 말고 웃더니 여유롭게 얘기했다.“처음에는 조직의 책임자가 누구인지 몰랐어요. 그래서 누구를 찾아야 할지도 몰랐죠. 그러다가 사장님의 몸에서 저 연락 카드를 발견했어요.”“연락 카드라니? 그 원형 철 덩어리를 말하는 거야? 그건 그냥 게임카드 같은 거겠지.”프레드는 바로 인정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면서 주효영을 떠보았다.주효영은 프레드가 바로 자기를 믿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래서 놀라지 않고 웃으면서 열심히 설명했다.“그건 일반 게임 카드가 아니에요. 사장님과 당신이 연락하는 암호죠. 솔직히 얘기하면 저도 처음에는 그냥 위의 무늬가 익숙하다고만 생각했지 특별한 걸 발견하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떠올려보니까 그 무늬는 Y 국에 있을 때 왕실 명패에서 봤던 거였어요. 그냥 국제적인 모임이었으니 주의 깊게 보지 않아 기억이 크게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 사실을 떠올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하지만 공작님은 아시잖아요. 아니에요?”주효영은 마치 도박에서 이긴 것처럼 웃으면서 얘기했다.하지만 프레드는 여전히 모르는 척했다. 그 철제 카드를 꺼낸 프레드가 말했다.“이걸 말하는 거야? 그래, 이 무늬는 확실히 왕실의 무늬와 비슷하긴 하지. 하지만 이게 위조품인지 진품인지 누가 알아? 게다가 진짜라고 해도 누가 잃어버린 걸 네가 찾은 것일지도 모르지. 넌 여기까지 와서 이걸 들고 쓸데
프레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효영의 말에 프레드의 마음이 동했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잠깐의 침묵 후, 프레드는 가볍게 기침하더니 입을 열었다.“이름이...”“주효영이요.”주효영은 허리를 곧게 펴고 자랑스러운 듯 얘기했다.“그 사람은 이미 죽은 지 오래되었어. 네가 이걸 받은 지도 오래되었을 거야. 그런데 왜 이제야 나를 찾아온 거야?”프레드는 주효영을 약간 의심했다.주효영은 그런 프레드의 뜻을 알아차리고 바로 해명했다.“처음에는 제가 뜻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열심히 조직의 사람을 찾으려고 했지만 그것도 실패했고요. 그러다가 김서진네 무리한테 잡혀서 갇혔어요.”“김서진?”프레드는 벌떡 일어나서 주효영을 보면서 물었다.“다시 얘기해 봐. 김서진네 무리라고?”“네. 겨우 거기에서 도망쳐서 공작님을 찾으러 왔습니다. 공작님만이 제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고 또한 저만이 공작님을 도울 수 있으니까요!”주효영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얘기했다.하지만 프레드의 중점은 달랐다.“어떻게 도망친 거야.”프레드는 김서진의 능력을 알았다. 그런 김서진한테 잡혀서 도망까지 쳤다고?”“전... 제가 수작을 좀 부렸습니다.”주효영이 고개를 숙이고 의미심장하게 얘기했다.“이건 더 이상 묻지 마세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그들의 스파이는 아니니까요. 그들이 보낸 사람도 아니에요. 못 믿으시겠으면 가서 확인해 보세요. 제 부모님도 다 잡혀갔어요. 전 이제 가족이 없어요. 그 사람들은 제 원수입니다. 죽여도 시원치 않은데 왜 그 사람들을 도와주겠어요.”프레드는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볼 테니까.”“그러면 저를 거둬주는 것인가요?”주효영이 기뻐하면서 얘기했다.프레드가 이렇게 얘기했으니 주효영을 부하로 삼겠다는 뜻이 아닌가.“너무 기뻐하지는 마.”프레드가 얘기했다.“일단은 거둬줄 수도 있지. 그리고 널 보호해 줄 장소도 마련해주마. 하지만 네 능력을 보여줘야 해. 입으로만 하는 건 누구나 다 할 수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주효영은 조직과 연락해서 조직의 보호를 받을 수도 없었다. 주효영은 정말 돌아갈 곳이 없었다.“솔직히 얘기하면 저는 계속 사람의 생각을 조종하는 연구를 해왔어요.”고민하던 주효영이 높은 소리로 대답했다.한 손으로 턱을 괴고 검지로 콧날을 매만지던 프레드는 미간을 찌푸리고 주효영의 말을 곱씹었다.“생각?”프레드는 주효영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주효영이 해명했다.“꼭두각시 알아요? 아니면 인형? 뭐 그런 거예요.”“사람을 꼭두각시로 만든다고?”대충 이해한 프레드는 고개를 저었다.“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프레드는 Y 국을 지배하려는 야심이 있었다. 나아가서 전 세계를 지배하고 싶었다. 하지만 프레드는 살아있는 사람을 조종해 자기 발밑에 두고 싶었다. 죽어버린 꼭두각시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재미있네요.”주효영이 웃으면서 얘기했다.“사람을 굴복시키고 싶어 하시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 세상에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 철옹성 같은 사람이 있잖아요. 그러나 R20은 그들의 생각을 조종할 수 있어요. 그들을 굴복시키고 당신을 위해 일하게 하고 당신이 원하는 일과 당신이 하기 껄끄러운 일을 대신해줄 수 있어요. 보기에는 평범한 사람들과 같아 보여서 그 누구도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그래도 쉽게 다른 사람의 생각을 조종해서 당신의 말을 듣게 할 수 있어요. 어때요, 이래도 재미없나요?”프레드는 이 일이 재미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효영의 말을 들으니 약간 마음이 동하고 재미있어보였다.생각해 보라.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정상인 여왕이 완벽하게 프레드의 염원을 따른다... 그렇게 되면 다른 모험을 할 필요도 없고 이렇게 고생할 필요도 없다. 자기의 야심을 이루기 더욱 쉬워진다.생각만 했을 뿐인데 너무 좋았다. 프레드는 저도 모르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하지만 이내 미소를 거두고 목을 가다듬더니 얘기했다.“좋아, 네가 말한 것들은 확실히 좋아. 하지만
“아무 사람한테 다 가능하다는 건 내 몸에 써도 된다는 거야?”푸른색 눈동자가 주효영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말투는 부드럽고 온화했지만 협박성이 가득했다.등골이 오싹해진 주효영은 바로 말실수했다는 것을 감지했다.주효영은 얼른 고개를 떨구고 허리를 숙인 채 공경한 어투로 말했다.“아니요, 그럴 리가요! 전 이미 R20을 공작님께 바쳤습니다. 이제 모든 권력은 공작님께 있습니다. 원하시는 사람을 굴복시켜 조종하세요! 제가 어떻게 감히 공작님을...”“됐어. 그냥 해본 말이야. 네가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해도 그런 실력이 있어야지.”주효영의 말을 끊은 프레드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괜찮네. 표현이 좋아. 널 써도 괜찮을 것 같아. 넌 여기서 묵어. 네 거처를 마련해줄 테니까. 하지만 네 안전을 생각해서 이곳을 제외하고 다른 곳에는 절대 가지 마. 알겠어?”주효영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앞으로 공작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앞으로 공작님의 뜻은 곧 제 뜻입니다!”프레드는 주효영의 태도에 매우 흡족해하면서 손을 저어 밖의 사람더러 주효영을 데리고 나가게 했다.주효영이 나간 후, 프레드 입가의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손수건을 꺼내자 그 안에서 작은 병이 나타났다. 프레드는 약간 호기심이 동했다. 이 작은 물건이 정말 그렇게 대단한가?...김서진 쪽. 진정기는 어느새 사람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왔다. X 부문의 고 교수와 다른 사람들, 그리고 공구까지 들고 왔다. 김서진은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모든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투명 인간이라니. 영화에서 봤고, 소설에서도 봤지만 진짜로 본 적은 한 번도 없다.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 방에서 하루 종일 돌아다녔다. 사진도 찍고 단서도 수집했다. 그리고 들고 돌아가 검사와 수치 분석을 거쳐 그런 가능성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했다.고 교수, 진정기, 그리고 원철수와 김서진, 임상언까지. 다섯 명이 한 방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난 이 방면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여러분들은요?”진정기
즉 CCTV에도 주효영이 어떻게 떠났는지 찍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이렇게 되면 가능한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첫째는 누군가가 주효영과 편을 먹어 모든 CCTV를 완벽하게 따돌리게 도와줬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들키지 않게 해줬다는 것이다. 아니면... 주효영이 정말 투명 인간이라는 말인가?어느 쪽이든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아무도 감히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하루 종일 거기에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얘기를 나누고 헤어졌다.그러던 중 두 아이의 DNA 검사 결과가 나왔고 그 보고서를 보며 김서진은 순간 눈물이 차올랐다.김서진의 아이가 확실했다. 태어나서부터 만난 적도 없었던 두 아이가 마침내 곁으로 돌아온 것이었다.김서진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이는 돌아왔지만 아이들의 어머니는 아직 무슨 상태인지 알 수 없었다.김서진은 특별히 여러 해 동안 자신을 따랐던 늙은 하인을 불러 두 아이를 돌보도록 했다. 김서진이 매일 두 아이를 지키고 있을 수는 없는 데다가 다른 사람을 찾으려니 마음이 놓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전에 김준과 보모에게 있었던 일 때문에 밖에서 다시 데려온 사람들에게는 더욱 믿음이 가지 않았다.몇 사람이 흩어져 잠시 쉬고 있을 때 서한이 왔다.서한은 몸속의 약 효과가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는지 요즘 안색이 좋지 않았다. 한소은에게서 약을 받긴 했지만 원래는 한소은이 나온 후에 완전히 치료하려고 했으니 말이다.원철수도 서한에게 진찰을 해줬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한소은이 준 약에 따라 치료하는 것 외에는 당분간 다른 방법이 없었다.서한은 개의치 않았다. 오늘까지 살아남은 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운 좋은 사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서한은 자신의 죽음을 그렇게 무겁게 생각하지 않았다.지금 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이 많았기 때문에 서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빠른 걸음으로 들어온 서한은 굳은 표정으로 김서진 앞에 다가와서 말했다.“의사가... 일이 터졌어요.”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김서진은 서한이 누구를 가
의사가 사망한 일로 인해 그들은 자신들이 경솔하게 행동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분간은 섣불리 행동하지 않기로 했다.사실 그날 대사관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 때부터 최근에는 더 이상 섣불리 행동할 수 없다는 걸 은연중에 느꼈었다. 적어도 지난번처럼은 안 된다는 것을.김씨 가문 전체의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매우 다운되었다.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전해지는 좋은 소식은 없었고 더 이상의 진전도 없었다. 유일한 좋은 소식은 두 아이가 돌아온 것이었다.그런데 또 이렇게 갑자기 돌아온 것이 무슨 뜻인지, 행운인지 불행인지 아무도 몰랐다.김서진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아이들을 데리고 원철수에게 가서 몇 차례 검사를 더 받게 했고 아이들에게 독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그래도 쉽게 방심할 수 없었다.잃어본 적이 있어야 가졌을 때의 소중함을 더 잘 알기 때문에 김서진은 반드시 아이들을 지켜야 했다. 어쩌면 한소은이 아이들을 위해서 쟁취한 기회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임상언은 아이를 돌보는 일을 도맡아서 했다. 비록 하인이 지키고 있었지만 그는 수시로 가서 아이들을 돌봤다. 임상언의 말을 빌리자면, 임남이 곁에 없으니 그 대신 사랑을 두 아이에게 베풀어 주려는 것이었다.그리고 한편 임남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장소를 아는 것 외에는 다른 조치를 취할 방법이 없었다.임상언이 조급해했지만 김서진은 되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라고 말했다. 기회가 있을 거라고, 이미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김서진은 알 수 있었다. 임상언이 그다지 믿지 않는 눈치였다는 걸.사실 임상언은 김서진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을 뿐이었다.기나긴 기다림은 임상언을 지치게 했고 인내심이 바닥나게 했으며 점점 더 자신감을 잃게 만들었다. 희망을 품었던 때로부터 실망이 가득 차기까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절망에 이르게 했다.임상언은 지금 그런 상태였다. 비록 절망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비슷했다.단지 정신으로 버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