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마주 섰지만, 한동안 말이 없었고 분위기는 조금 이상했다.“너…….”한소은은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오이연에게 물었다.“뭐 하는 거야?”“…….”“날 미행했어?”“…….”오이연은 여전히 답변이 없었다.고개를 숙이고 정신이 어딘가에 팔린 듯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한소은은 한숨을 푹 쉬고 다시 물었다.“서한 씨 때문에?”그제야 오이연은 고개를 들어 한소은을 바라보며 말했다.“그게, 김서진 씨가 돌아오셨잖아?”한소은은 오이연이 이런 걸 왜 묻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 서한 씨에 대해 묻지 않고 김서진에 관해 묻자, 한소은은 입술을 살짝 오므리고 얼굴을 찌푸리더니 말했다.“응. 왜?”“내가 만나볼 수 있을까?”오이연은 계속해서 물었다.“안 돼!”이번에 한소은은 단호하게 거절했다.다른 이유는 아니었지만, 현재 김서진의 몸 상태로 봐서는 가능한 한 아무도 만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김서진의 할머니에게도 이 사실을 숨겼다.괜히 그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하러 올까 봐서 걱정이었다. 나이도 많으신 분이 혹시라도 바이러스의 감염이라도 된다면 큰일이다.전염성이 있는 병이기 때문에 당연히 조심해야 한다.“왜 안 돼? 그냥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오이연은 의외로 고집을 부렸다.“대답만 듣고 금방 갈게.”“지금 그이 몸 상태로는 네 물음에 대답할 수 없을 거야.” 한소은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오이연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어쨌든 서한 씨에 관한 소식이 있으면 바로 연락할게!”한소은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녀가 여전히 서한이 걱정되어 김서진을 만나고 싶어 하는 거라고 짐작했다.한소은이 손을 들어 오이연의 어깨를 두드리려 했지만, 그녀는 피했다.오이연은 옆으로 몸을 살짝 돌리며 말했다.“필요 없어.”그녀의 대답에 한소은은 어리둥절했다.“그게 무슨 말이야?”“아무것도 아니야. 내게 말하고 싶지 않으면 얘기하지 않아도 돼. 그렇게 숨길 필요 없어.”오이
“꼭 선택해야 한다면?!”오이연은 항상 상냥하기도 모든 일에 담담하게 대하는 성격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는 난데없이 고집을 부렸다.“만약 나와 김서진 씨가 서로 맞은편에 서서 서로의 적이 된다면…….”오이연은 말하면 할수록 불안해하고 화가 났다.“그럴 리가 없잖아!”한소은은 그녀를 가로막으며 말했다.“너희 두 사람이 적이 되게 두지 않을 거야!”“너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잖아. 서진 씨는 더욱 그런 사람이 아니야. 만약 두 사람이 무슨 모순이 생겼다면 분명 무슨 오해가 있는 것일 거야.”“난 두 사람의 오해를 풀려고 노력할 거고! 두 사람 모두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야. 그런데 어떻게 두 사람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는 거야?”한소은은 한숨을 푹 쉬고 말을 이어갔다.“이연아, 요즘 서한 씨 때문에 마음이 심란한 거 잘 알아. 하지만 날 믿어줘. 내가 꼭 도와줄 거니까!”그러나 오이연은 과거처럼 한소은의 말에 진정되지 않고 오히려 두 걸음 뒤로 물러나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 언니는 그러지 않을 거야. 예전에는 감정이 모든 걸 다 초월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이제 알겠더라. 생사의 갈림길에 선 사람은 다 이기적인 거야. 미안해, 소은 언니. 나도 이기적인 사람이야. 어떤 일에 대해서는 난 나부터 생각할 수밖에 없어. 미안해!”오이연은 이렇게 말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떨어졌다.한소은 할 말을 잃었다.그녀가 말을 알아듣기도 전에 오이연은 갑자기 돌아서서 다시 차에 올라타더니 시동을 걸고 떠났다.차가 떠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소은은 혼란스러워했다.‘그래서 이 말을 하려고 날 미행하면서까지 여기서 기다렸다고?’‘아, 아니지. 서진 씨를 만나고 싶다고 했었지. 하지만 내가 거절했고. 그런데 이연이의 상태가 너무 이상해. 마치 서진 씨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거 같았어.’그녀를 쫓아가 다시 물어보고 싶었지만, 시간은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았다.한소은은 서둘러 짐을 챙기고 다시 병원에 갔다가
“왔어요!”주현철이 모른다고 말하려던 순간 주효영이 밖에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이상하게도 그녀를 보자 조증에 걸린 듯했던 진정기는 갑자기 진정되었고 그의 눈에는 짜증과 불안이 사라졌다.“주효영…….”“고모부, 연구소에 대해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주효영이 이렇게 말하더니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진정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그녀를 따라갔다.주현철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다 따라가려고 했지만, 주효영이 호된 목소리로 그를 멈춰 세웠다.“기밀 사항이라 고모부에게만 말할 수 있어요!”“…….”주현철은 조금 화가 났다.‘내가 네 아비인데, 그까짓게 뭐라고 못 듣는다는 거야? 앞으로 내가 백신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될 텐데 말이야!’하지만 그는 이런 말을 마음속으로만 말했지 감히 주효영의 앞에서 말하지 못했다.그는 요즘 진정기가 주효영의 말만 듣는다는 걸 잘 알았다. 이 계집애가 그에게 어떤 마법을 부렸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유익하기만 하면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았다.그까짓 기밀 사항은 안 들어도 그만이다.하지만 진가연은 달랐다. 원래 그녀는 옆에서 천천히 밥을 먹으며 구경하고 있었다.요즘 진가연은 자기의 아버지가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뭐가 문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녀의 아버지는 예전과 똑같이 출근하고 퇴근하며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더 길어졌지만, 딸에게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더 차가워졌다.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거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앉아있었다.진가연이 괜찮냐고 물으면 항상 괜찮다고 대답했다.지금과 같은 광기다운 모습은 가끔 있었지만, 그저 아빠가 변했다고만 생각했다. 전에 한소은이 자기에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고 말했었다. 생각해 보니 자신의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냥 자기처럼 아팠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주효영이 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진가연의 아버지는 마치 눈에 빛이 들어온 것 같았고 주효영의 말에 순종했다.두 사람이 서재로
서재 문이 닫혀 있었지만, 진가연은 포기할 수 없어 빠르게 서재로 달려갔다. 그녀는 그들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 듣고 싶었다.서재 문에 다다랐을 때 안쪽에 문이 열렸다.주효영이 가슴에 팔을 감싸고 서서 진가연에게 말했다.“너, 왜 충고를 듣지 않는 거야?”그녀는 선한 미소를 지으며 진가연을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진정기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고모부,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나가!”진정기는 굳은 얼굴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진가연에게 호통을 쳤다.“아빠, 혹시 언니가 아빠를 협박하고 있는 거예요? 왜 이렇게 된 거예요? 전 가연이에요.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딸 가연이라고요!”진가연은 눈앞에 있는 아버지를 보며 주효영이 자기의 아버지를 홀린 거라고만 생각했다.‘이대로 두면 안 돼. 아빠가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만들어야 해!’주효영은 그녀에게 말을 걸지도 않고 돌아서서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어쨌든, 난 급하지 않아요!”그녀의 말에 진정기는 갑자기 감정이 격해져 앞으로 나아가 진가연의 손을 잡아당기고 돌아서서 그녀를 바깥쪽으로 힘껏 끌고 나갔다.진가연의 몸매가 뚱뚱하고 무거워 끌고 가기가 어려웠지만 진정기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강한 체격에 있는 힘껏 그녀를 서재에서 게스트실까지 끌고 가 손을 탁 놓았다. “아…….”거대하고 강한 힘에 끌려 관성에 의해 격렬하게 던져진 진가연은 걷잡을 수 없이 앞으로 돌진했고 곧바로 바닥에 쓰러졌다.“아파!”진가연은 넘어지는 곳마다 몸이 아파서 눈물이 쏟아졌다.지난번 낙상으로 인한 부상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번에 넘어지니 더욱 힘들었다.가장 중요한 것은 이번에는 진정기에게 땅에 던져져 몸이 아팠을 뿐만 아니라 마음이 더 아팠다.진가연이 바닥에서 일어서기 전에 진정기가 게스트실 문을 쾅 닫고 밖에서 자물쇠를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아빠, 아빠…….”딸이 애타게 외쳤지만, 진정기는 딸에게 관심을 조금도 주지 않고 밖에 있는 하인들에게 말했다.“내 명령 없이는 누구도 문
“나는 진정기입니다.”진정기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그럼 저는 누구죠?”주효영은 자기 코를 가리키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몇 초 동안 그녀를 바라보던 진정기는 멈칫하다 대답했다.“주인님입니다.”“아니, 나를 주효영이라고 불러야 해요, 알겠죠? 내가 당신의 주인이니까 내 말을 들어야 해요. 그러니 밖에서는 날 주효영이라고 불러야 해요, 알았죠?”진정기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주효영이 강조했다.그러자 진정기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좋아!”주효영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아까 시킨 지령을 진정기 앞에서 다시 한번 반복하여 기억을 더 깊게 했다.거의 한 시간이 지나서야 두 사람은 서재에서 나갔다.주현철은 밖에서 오래 기다리다 결국 소파에 누워 잠이 들었고 코를 골고 있었다.그러다 갑자기 ‘주현철!’이라는 외침이 들렸다.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깜짝 놀란 주현철은 소파에서 뒹굴며 일어나 진정기임을 확인하고는 입가에 묻은 침을 닦으며 반사적으로 대답했다.“매형!”주현철은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프로젝트 기지로 가서 준비하라고 해. 효영이와 연구팀이 곧 입주할 거야. 프로젝트는 한시가 급해. 최대한 빨리 해야 해!”진정기는 소파에 앉아서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주현철은 멈칫하다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네, 당장 사람을 시켜서 준비할게요!”그런 다음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다.“하지만 매형, 서류 작업은…….”“서류 작업은 내가 처리할 테니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그의 말에 진정기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진정기가 이런 태도로 자신을 대하는 건 이미 주현철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네! 매형, 매형이 이렇게 말했으니, 안심되네요. 바로 가서 준비할 테니까 매형은 걱정하지 마세요. 꼭 완벽하게 준비할게요!”주현철은 기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하러 가려 했다. 주효영이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녀에게 물었다.“효영아, 나랑 같이 갈 거야?”“아니요, 아직 고모
“뭘 인정해? 언니의 사악함, 비열함, 파렴치함을 인정하라는 거야?”진가연은 주효영을 등진 채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주효영의 잘난 척하는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인정하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촌 언니가 이런 사람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진가연의 비꼬는 말과 조롱에 대해 주효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네가 뭐라고 말하든 이 세상은 언제나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르고 있어. 아직도 그걸 이해하지 못하겠어? 능력이 강할수록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고, 직접 손에 쥐고 있는 것만이 진실한 거야!”“진실? 언니가 진실을 운운할 자격이 있긴 해?”진가연은 차갑게 웃었다.그녀의 눈물은 이미 말랐고 울음도 그쳤다.“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네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야. 고모부, 가연이는 최근 한소은이라는 여자에게 속아 넘어갔어요. 아주 말을 듣지 않고 있으니 잘 가르쳐야 할 것 같아요!”주효영은 진정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순간 진가연은 등골이 오싹했다.방금 자기의 아버지가 자신을 그렇게 대했다는 것에 마음이 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버지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정말 아빠는 주효영의 말을 듣는 걸까? 주효영의 말 한두 마디 때문에 정말 날 혼내려 할까?’“어떻게 가르치면 좋을까?”진정기는 뜻밖에도 주효영에게 이렇게 물었다.“음…….”주효영은 곰곰이 생각했고, 진가연은 더는 참지 못하고 뒤돌아서서 바라보면서 아버지가 실제로 주효영에게 어떻게 순종하는지, 어떻게 자기를 가르칠 것인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슬픔과 실망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고개를 돌리는 진가연을 보며 주효영의 마음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통쾌했다.이것은 주효영이 보고 싶어 했던 것이었다. 주효영은 어렸을 때부터 진가연의 눈에서 빛이 나는 걸 보는 게 익숙했었다.처음에는 진가연은 예쁜 여자아이였다. 귀여운 외모에 예쁜 드레스를 입고 모든 사람의 눈에 작은 공주처럼 보였던 예쁜 어린 소녀였다.모두가 그녀를 사랑했고,
“아빠가 일을 마치면 바로 널 데리러 갈 거야. 너…….”임상언은 잠시 멈칫하며 말을 이어갔다.“아빠가 옆에 없어도 홀로 잘 챙기고. 넌 다 컸어, 알았지?”“알았어요!”임상언의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아빠도 몸조심하세요!”이 말은 임상언이 눈물을 흘리게 할 뻔했다.임상언은 눈물을 겨우 참으며 마음속의 씁쓸함을 삼키고 또 삼켰다.“아들…….”그의 입에서 말이 나오기도 전에 화면이 깜빡거리더니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아들! 아들!!!”임상언은 화면을 향해 달려갔지만, 화면은 이미 꺼졌고 아들의 귀여운 얼굴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임상언, 시간 다 되었어!”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어둠 속에 있던 남자는 리모컨을 손에 쥐고 빛 아래로 걸어 나왔다.“약속한 대로 했으니, 당신도 약속을 어기지 않았으면 좋겠어!”이 말을 뒤로하고 남자는 밖으로 나섰다.임상언은 하염없이 화면을 두드렸다. 이렇게 하면 아들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렇게 하면 아들을 구할 수 있는 것처럼 하염없이 두드리기만 했다. “내 아들을 놔줘요! 그는 아직 어린아이일 뿐 아무것도 몰라요! 당신이 하라는 대로 다 할게요!”“크크크크크크…….”남자는 웃으며 소리쳤다.“날 바보로 생각하는 거야? 네 소중한 아들이 내 손에 없었다면 당신이 이렇게 순종할 수 있을까? 임상언,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어! 그런 쓸데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지 마.”“당신 아들은 내가 잘 돌보고 있어. 하지만 당신이 말을 잘 듣지 않고 쓸데없는 짓을 한다면 이 아이가 계속 이렇게 평화롭고 무사히 지낼 것이라고는 보장할 수 없지!”남자가 협박하는 말에 임상언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변했다.그는 이전에 이 조직의 수단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 남자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임상언의 검게 변한 얼굴을 본 남자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어떤 방법을 사용하든 상관없으니, 한소은을 데려와. 이 실험의 마지막
“서진 씨 좀 어때요?”의사에게도 물어봤었지만 경씨가 계속 김서진의 곁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묻는 게 가장 빨랐다.“한 번도 깨어나지 않으셨어요.”경씨의 대답은 언제나 그랬듯이 간단했다.깨어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태가 악화한 것은 아니다. 그저 깊은 잠에 빠져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는다.한소은은 한 손의 장갑을 벗고 손을 들어 김서진의 맥을 짚었다.전보다 평온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기적이 심했다. 아직도 그의 몸이 허약하고 불안정하다는 뜻이다.김서진의 몸속에 있는 바이러스도 있는 듯 없는 듯 그 자리를 계속 지켰다.이 독소는 실로 이상했다.이리저리 잘 숨는 건 물론이고 때론 맥을 짚을 때 단번에 나타나기도 한다.한소은도 처음에는 이런 상황인 것을 몰랐다.그녀는 단순히 김서진의 몸속에 독소가 다 빠져나가 맥을 짚어도 찾지 못한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김서진이 다시 발작을 일으켰을 때야 바이러스가 사라진 게 아니라 어딘가에 숨어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이 바이러스는 생명과 생각이 있는 것처럼 숨어서 면역 계통을 피하고 자신을 위장하였는데 능했다. 이렇게 사람들과 열심히 투쟁 중이다.손을 다시 거둔 한소은은 마음속에 짐작이 조금갔다. 소독약으로 손을 깨끗이 씻고 장갑을 다시 끼고서야 경씨에게 시선을 옮겼다.경씨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김서진을 지키고 있었다.“안 피곤해요? 여긴 서진 씨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으니까 가서 쉬셔도 되는데.”“괜찮아요.”경씨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래도 쉴 땐 쉬어야죠.”한소은이 그를 타이르며 말했다.“서진 씨가 깨어나지 않았는데 당신까지 쓰러질까 봐 겁나요.”“산에서 살 때 사냥을 라면 삼일동안 잠을 자지 않을 때도 있었어요.”경씨가 담담하게 말했다.“그리고 전쟁할 때도…….”말이 입까지 나오다 다시 멈추었다. 얼핏 들은 한소은은 깜짝 놀랐다.“전쟁터에 나갔었어요?”그러자 경씨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오래전 일이에요.”그가 더 이상 말하려 하지 않자, 한소은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