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안 마실 건가요?”“마셔, 마셔, 목말라 죽겠어.”그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밥은 없어?”김승엽이 물었다.데일은 냉소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의 입에 물을 부었다.김승엽은 목이 마른 나머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하지만 물이 입에 들어가자 맛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금물이었다. 심지어 매우 짠, 농도가 높은 소금물이었다. 너무 짜서 나중엔 쓴맛이 날 지경이었다.그는 마시지 않고 고개를 돌려 피하려고 했지만, 데일은 그의 턱을 꽉 잡고 억지로 짠 소금물을 입에 들이부었다.“콜록... 콜록콜록...”김승엽은 사레에 들려 기침을 연발했다. 너무 쓴 나머지 속이 울렁거려 토하고 싶었지만,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여서 되려 조금전에 마셨던 소금물을 전부 토해냈다.“너희들… 어쩜 이렇게 독해?”김승엽은 연신 기침을 하며 말했다.“이정도면 아가씨는 착하신 편이에요.”데일은 그들을 힐끗 쳐다보며 냉소적으로 말했다.만약 데일이었으면 그는 그들을 단칼에 해치웠을 텐데 말이다. 감히 제멋대로 우해영에게 손을 대다니… 지금 우해영이 고생하는 것에 비하면 이런 고통쯤이야 아무 것도 아닐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말을 마치고, 그는 밖으로 유유히 나갔다.원래 목이 말랐는데, 짠 소금물을 벌컥벌컥 들이킨 탓에 목구멍에서 연기가 나고 목이 타는 것 같았다. “해민아, 그 물에 문제가 있는 줄 이미 알았어?”김승엽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난 그저 언니가 우리에게 물을 줄 만큼 착하지 않단 것만 알아.”우해민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왜…”그는 우해민에게 왜 진작 알려주지 않았는지 따지려다가 꿀꺽 말을 삼켰다. 두 사람은 각자 걱정거리가 있었다. 김승엽은 어떻게 하면 탈출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다.원래 본가에서 제명되어 갈 곳이 없는 것만도 이미 충분히 비참할 줄 알았는데, 생사의 고비에 놓이다니… 생사 앞에서 그는 존엄이든 어떤 영욕이든 상관관이 없었다. 그저 살아있
“당신은 지금 내 말을 얼버무리고 있어.”김승엽의 마음이 지금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걸 느낀 우해민은 실망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그럴 리가! 지금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잖아. 우리 둘 다 죽게 생겼어! 죽는 게 뭔지 알기나 해? 죽으면 모든 게 다 없어진단 말이야! 네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노력했는데, 인제 와서 순순히 죽어준다고? 우리 둘 다 죽으면 안 돼!” 김승엽은 짜증 섞인 말투로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죽는 게 그렇게 두려워?” 우해민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그러자 김승엽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두렵지! 당연한 거 아니야? 난 죽고 싶지 않다고. 난 살고 싶어, 아직 이 세상을 다 누려보지 못했단 말이야! 잘살고 있었는데 내가 왜 죽어야 해?” 그의 말에 우해민은 평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그녀의 말투가 조금 이상했지만, 김승엽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그는 배가 너무 고파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몸도 피곤했고 물을 마시지 못해 목도 아파졌다.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눈을 꼭 감으며 체력을 조금이나마 아끼려 했다. 괴로움 속에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다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에 들었다.———— 오전 10시, 한소은은 약속대로 제시간에 우씨 가문의 집 앞에 도착했다. 김서진은 그녀를 혼자 보내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아 결국 따라나섰다. 다만, 차를 대문 밖에 세워두고 따라 들어가지 않았다. 김서진은 한소은의 귀에 미니 이어폰을 끼워 주며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신호를 보내면 당신이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올 거고, 무슨 일이 있어도 무리하지 않고 절대로 그 여자와 정면충돌하지 않으며 결정짓지 못할 일이라면 돌아가서 상의해 보고 결정한다고 말해야 하는 거 잘 기억했어요!” 김서진은 어제부터 이 말들을 계속 반복했다. 하도 여러 번 말했기 때문에 한소은이 다 외울 지경이였다. 그녀의 말에 김서진은 말문이 막힌
정문에 도착하자 데일이 벌써 한소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와 차 문을 열어 정중한 모습으로 한소은을 모셨다. “큰 아가씨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소은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제일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데일.” 한소은을 우해영이 줄곧 그를 이렇게 부르는 걸 기억했다. 그녀가 이렇게 부르자, 데일은 눈에 띄게 놀란 모습이었다. 그의 당황한 모습에 한소은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불렀다. “데일, 주인을 항상 큰 아가씨로 부른다는 건 작은 아가씨도 있다는 뜻인가?” “…….” 데인 아무런 말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에 스쳐 간 놀람은 한소은에게 모두 붙잡혔다. ‘역시, 내가 생각했던 거와 다르지 않아. 우해영은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는 거야.’ 거실에 들어섰을 때 한소은은 멈칫했다. 그녀를 우해영이 거실 소파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때, 뒤따라온 데일이 그녀에게 말했다. “김씨 사모님, 저를 따라오세요.” 한소은은 그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도착한 곳은 뜻밖에도 우해영의 침실이었다. 그녀의 침실에는 한약 냄새가 가득했다. ‘우해영이 한약을 먹고 있는 건가?’ “한소은 씨.” 우해영이 어디 있는지 발견하기도 전에 그녀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한소은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니 침실 소파에 기대며 앉아 있는 우해영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편한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완전히 한소은을 손님으로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우해영 씨.” 한소은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있는 우해영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한쪽으로 길게 늘여진 다리, 발목……. 한소은은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지, 우씨 가문의 큰 아가씨라고 불러야 하나?” 한소은은 ‘큰’이라는 글자를 일부러 힘주어 말했다. 그러자 우해영이 흠칫
“그리 오래되진 않았어요.” 한소은이 대답했다. “두 사람은 정말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똑같았거든요.”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발견한 거요?” 우해영은 궁금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자기와 우해민을 구분해 낸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한소은이 어느 부분에서 발견하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물음에 한소은은 머리를 긁적이며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음…… 사실 당신도 알다시피 무술을 배우는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거는 숨길 수 없는 거잖아요. 당신의 그 쌍둥이 동생은 무술을 할 줄 모르죠?” “맞아요.” 우해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 “내 동생은 무술을 할 줄 몰라요. 무술에 대한 재능이 조금도 없죠. 몸도 약해서 오랜 시간 동안 몸조리해서야 겨우 나와 비슷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구분하기 쉬웠어요. 다만,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죠. 당신과 당신 동생은 정말 똑같이 생겼으니까. 표정과 말투, 행동, 습관 모두 똑같았어요!” 한소은은 두 사람을 보았던 장면들을 떠올렸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누가 우해영인지, 누가를 우해민이었는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한소은과 김서진이 확신했었던 때는 바로 호텔에서 그녀를 만났던 때였다. 그녀가 김승엽과 함께 있을 때면 두 사람을 구분하기 쉬웠다. “사실, 서진 씨의 작은아버지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거죠?” 한소은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우해영이 작게 기침하며 대답했다. “감정이 조금도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에요. 그 사람은 유일하게 성공적으로 내게 접근한 남자였거든요.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남자는 그저 우리 우씨 가문의 대를 잇게 해주는 도구일 뿐, 그 이상의 쓸모가 없어요. 내가 무술을 연구하는 데에 걸림돌만 될 뿐이죠.” 우해영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눈을 가늘게 뜨고 한소은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궁금했어요. 당신 같은 사람이 왜 김서진의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지. 만약 당신이 임신하지 않았더라면 분명 무
“인생은 한 번뿐인 여행이에요. 이전에 나도 사업에 빠져들어 모든 일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어요. 나중에 발견한 건데 인생에는 사업만큼 중요하고 심지어는 사업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많아요.” “난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리면서 주위의 풍경을 보는 걸 완전히 잊고 살았어요. 때로는 적당히 발걸음을 느리면서 인생을 느끼고 아름다운 것들을 눈에 담으면 내 사업이 한 단계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르죠.” 금방 임신했을 때,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한가해지니 자기도 모르게 초조해졌다. 배가 날이 갈수록 커지고 모든 신경이 아기에게 쏠리고 나서 그런 초조함이 점차 사라졌다. 또한 태교하기 시작한 후부터, 다른 임산부도 만나보고 예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아기 분유 냄새를 맡게 되었다. 바쁜 일상에 땀에 흠뻑 젖어 시큼한 땀 냄새를 풍기는 임산부도 있었다.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한소은은 임산부도 사용할 수 있는 향수를 만들어 내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임신하기 전에 향수를 즐겨 뿌리던 사람이 임신했다고 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게 하고 싶었다. 물론, 새로운 향수 개발은 아기를 낳고 나서 해야 하겠지만 임신 중에 느낀 모든 것은 그녀에게 끊임없는 아이디어를 가져다주었다. 우해영은 한소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소은의 행복한 웃음은 그녀로 하여금 더욱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게 했다. 그녀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보며 우해영은 자기가 이렇게 행복하게 웃어본 때가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도 않았다. 심지어 오랜 시간 동안 거울 속 자기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우해민을 마주하고 있으면서 그녀의 얼굴을 볼 때마다 자기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아 이 얼굴은 정말 지겹도록 봐왔다. 우해영은 멍하니 손을 들의 자기 얼굴을 쓰다듬어 보았다. 그러고는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우해영 씨, 오늘날 여기로 부른 건 임신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한 건 아니겠죠?” 그녀의 멍한 모습을 보며 한소은이 입을 열었다. 정신을
사실 그녀가 이 비적이 가짜라는 확신을 들게 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비적을 훔친 지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김서진이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비적을 우해영이 힘들게 훔쳐 온 비적이다. 이렇게 중요한 물건이라면 잃어버린 순간 온 세상을 뒤져서라도 찾아내야 정상이다. 김서진이 자기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만약 자기가 이렇게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렸다면 제 성을 뒤집어서라도 꼭 찾아내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비적을 훔쳐 오고부터 김서진 쪽은 조용하다 못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았다. 전에 김승엽도 김서진이 그에게 따지지 않았다고 했었다. 그렇다는 건 비적이 잃어버리건 말건 김 서지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건 무슨 뜻일까? 결론은 하나다. 바로, 이 비적은 처음부터 가짜였다는 것이다. 김서진이 김승엽에게 두 개, 세 개의 함정을 준비했다면, 분명 자기에게도 함정을 준비했을 것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면 모든 일이 다 납득이 갔다. “그렇다는 건 진짜 비적은 아직 당신들 손에 있다는 말이군요.” 우해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가다듬고 계속 물었다. 반면, 한소은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한소은의 반응은 우해영의 예상을 벗어났다. 그녀는 멈칫하더니 믿지 못한다는 듯이 따져 물었다. “당신들 손에 없다고? 이건 말도 안 돼요! 그럼, 어디에 있다는 거예요? 비적을 태워 없앴다거나 누군가 보관하도록 맡겨두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죠?” “아니요.” 한소은은 담담하게 말했다. “처음부터 비적은 존재하지 않았어요.” “그럴 리가 없어요!” 우해영의 말은 한소은의 말과 동시에 입에서 튀어 나갔다. 그녀는 조금도 한소은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거짓말을 해가면서 날 속이는 이유가 뭐예요? 오늘 난 성의를 가지고 당신과 얘기하려고 부른 거예요. 내게 쌍둥이 동생이 있다는 것도 다 밝혔는데 지금 비적을 내놓으라는 것도 아
“몇 년 동안 무술을 배우고 나서 스승님께서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고 해서 할아버지가 날 데리고 하산했어요. 절을 떠나면서 스승님께서 내게 불경을 한 박스나 전해주면서 시간 날 때 자주 보라고 당부했고요.” 이렇게 말하면서 김서진은 잠시 침묵하다 다시 이어서 말했다. “나중에 스승님이 주신 불경을 여러 번 보고 나서야 모든 무술은 다 심법을 먼저 잘 배워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심법은 모든 무술의 근본이에요. 사실 아무리 대단한 수법이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에요. 게다가 무술뿐만 아니라 사업에서 닥친 어려움도 불경에서 답을 찾을 수 있어요.” 그의 말을 듣고 한소은은 반쯤 농담으로 말했다. “그 말은 당신이 자칫하면 스님이 될 뻔했다는 얘기로 들리는데요?” 하마터면 그녀의 남편은 불자가 되어 그녀와 만나지 못할 뻔 했다. 그녀의 말에 김서진은 사뭇 진지한 말투로 대답했다. “맞아요.” 김서진의 진지한 대답에 한소은은 웃으며 그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지금 이 말들을 우해영에게 알려주자, 처음에는 흠칫 놀라더니 이윽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오랫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한소은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기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우해영에게는 큰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그녀가 항상 믿으며 쫓아왔던 것이 결국에는 거짓이었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물건이라는 사실이 믿기 힘들 수 있다. “당신이 이 말들을 믿기 힘들다는 거 알지만…….” 한소은이 잠시 멈칫하다 느릿하게 이어서 말했다. “서진 씨가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은 당신의 무술이 이미 충분히 대단하다는 거예요. 사업에서든 무술에서든 자기보다 대단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에요. 이렇게 발전한 사회에서 살면서 왜 이토록 최고의 자리를 집착하는 거죠?” “사실,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에 비해 당신은 이미 성공적인 사람이에요. 우씨 가문을 더욱 빛내어 가문의 사람들이 편하게 살면서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천하제일의 자리를 쫓는 거보다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하
“독에 중독된 거예요?” 우해영이 기침하는 모습을 보며 한껏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한소은이 물었다. 그녀의 말에 우해영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자기가 독에 중독된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사실이 소문이 나게 되면 자기에게 원수를 가진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다. 이는 그녀에게 있어서 매우 위험한 일이다. 데일은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우해영이 이 시기에 이 사실을 한소은에게 알려줄 거라는 걸 생각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놀랐다. 한소은은 잠시 머뭇거리다 앞선 모든 일들을 연결하고는 결론을 내렸다. “당신에게 독을 탄 사람은 바로 당신의 쌍둥이 동생인 거죠?” 이번을 우해영이 흠칫 놀랐다. 그녀는 고개를 획 들며 의아한 표정으로 한소은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우해민이 자기에게 독을 탄 사실은 그녀와 김승엽, 그리고 옆에 있는 데일 만 알고 있는 일이다. 데일이 한소은에게 말했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한소은은 어떻게 알았을까? 우해영의 반응에 한소은은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사실 알아내는 것도 어렵지 않아요. 당신처럼 신중한 사람에게 독을 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이렇게 쉽게 성공했고 또 당신이 눈치채지 못했다면 분명 당신이 가장 신뢰하고 쉽게 경계하지 않는 사람이 했을 거예요.” “며칠 동안 사람들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동생이었으니, 이 모든 일들을 같이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올 수밖에 없죠.” 우해영은 잠시 침묵했다. 느릿하게 한숨을 쉬더니 한소은에게 말했다. “당신은 정말 똑똑하고 눈치가 빨라요.” “너무 방심한 탓이죠? 당신처럼 예민한 사람이 쉽게 독에 중독될 리가 없는데. 다만, 당신의 쌍둥이 동생은 왜 당신에게 독을 탄 거예요? 친자매잖아요.” 한소은이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이 부분이었다. 우해영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남자 때문이에요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