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얼굴이 피투성이였지만 유독 별처럼 맑은 소희의 한 쌍의 눈은 장막을 밝혀주고 있었다.......전망대에서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더는 기다리기 귀찮아 고개를 돌려 Maduro에게 말했다."사람 보내 처리해.""아무렴요."Maduro가 불빛 아래에서 더 조각져 보이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담담하게 웃었다."절대 불필요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겁니다. 먼저 돌아가셔도 되고요.”그의 말에 임구택은 몸을 돌려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그런데 이때, 갑자기 귓가에 굉음이 들려왔다. 임구택은 멍하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열 대 가까이 되는 헬리콥터가 하늘을 가르며 천천히 날아오고 있었다. 그 헬리콥터들은 마치 먹구름처럼 밀려 와 마지막 한 가닥의 황혼을 가렸고, 하늘은 찰나에 어두워졌다.헬리콥터는 산기슭으로 날아가 살육 현장의 상공에서 빙빙 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굉음은 천지마저 뒤흔들었다.임구택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Maduro를 바라보았다."누구야?"Maduro의 안색도 순간 변하더니 바로 대답했다."불곰 쪽의 사람은 아닐 겁니다."마침 임구택의 핸드폰이 울렸고, 임구택이 바로 받았다."무슨 상황이야?"고무원을 관리하던 명경이 급급히 대답했다."임 대표님, 진언이 왔습니다!"임구택이 듣더니 순간 멍해졌다.그러더니 바로 고개를 돌려 어두운 얼굴색으로 Maduro에게 물었다."포위 공격을 당하고 있는 자들이 대체 누구지?"Maduro가 듣더니 눈알을 굴리며 대답했다."저 여인이 진언이 가장 좋아하는 이를 죽였거든요. 그러니 진언이 직접 저 여인을 잡으러 온 걸 겁니다."임구택의 눈빛이 점점 무거워났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 아래로 내려가며 명경에게 말했다."진언 쪽 사람과 통화해. 나 진언을 만나야겠어."명경이 바로 대답했다. "네!"*헬리콥터 프로펠러의 거대한 소리는 산맥 전체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그러다 줄 사다리가 헬리콥테에서 밖으로 던져졌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줄 사다리를 타고 신속히 내려왔다.
시언이 소희를 안고 헬리콥터로 향했다. 그리고 부하더러 상처투성이인 심명도 헬리콥터로 옮기라고 했다.심명은 경악한 표정으로 눈앞의 사람들을 보고 또 소희를 보았다. 눈에는 복잡함과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오빠!"소희가 갑자기 시언의 팔을 잡고 장명원 쪽을 바라보았다."저 사람도."시언은 차가운 눈빛으로 장명원을 한번 보고는 다시 소희를 보며 말했다."걱정마, 네 사람은 한 명도 버리지 않을 거야."소희는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그러자 순간 심한 통증이 온몸을 감쌌다.시언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한 사람이 달려와 큰 소리로 말했다."진언, 임구택이 한번 뵙고 싶답니다!"시언이 순간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차가운 눈동자에는 매서운 빛이 드러났다."그가 나를 매우 실망시켰으니, 앞으로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전해."말을 마친 후 시언은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헬리콥터에 오르자마자 같이 따라 온 의사가 바로 소희와 심명의 상처를 처리했다. 소희는 상체에 속옷 한 벌만 걸치고 있었다. 허리에 묶인 티셔츠는 이미 피로 물들었고, 선혈은 그녀의 하얀 피부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어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의사가 티셔츠를 풀자 밖으로 뒤집힌 상처가 흉악하고 무섭게 사람들의 눈앞에 드러났다. 의사는 신속하게 의용솜으로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 상처를 막았다.심명은 한쪽에 앉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소희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 나오고 있는 피를 보더니 안색이 순간 참백해졌다.강적과 죽음 앞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던 그는 갑자기 두려워 났다. 소희가 정말 죽을까 봐.시언은 소희를 꼭 안고 있었다. 그의 품안 소희가 아픔에 눈을 다시 떴지만 이를 꽉 깨문 채 신음 한번 내지 않았다.멍하니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심명은 갑자기 자신이 여태껏 소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오늘 그가 본 소희는 매 순간마다 그를 놀라게 했다.헬리콥터가 너무 심하게 움직였는지
너무 심하게 다쳐서.심지어 그녀에게서 살아있다는 흔적을 느낄 수가 없었다.뒤에는 차가운 살기를 품은 사람들과 일반인한테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심각한 상처들을 달고 있는 소녀는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진 의사조차 손을 떨게 만들었다.다행히 시언이 데려온 군의관이 침착하고 담담하게 말을 건넸다."걱정마세요, 서 아가씨께서는 죽지 않을 테니 긴장을 푸시고, 일반 환자를 구하는 것처럼 하면 됩니다."진 의사가 손을 들어 이마의 땀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군의관은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을 전부 밖으로 모셨다. 진 의사와 그 조수들이 다른 곳에 한눈을 팔지 않고 서희와 심명을 구조할수 있도록.그렇게 거의 하룻밤 동안 바삐 돌아치다 진 의사가 피곤하게 무균실에서 나왔을 때 날은 이미 밝았다.밖에서 줄곧 지키고 있던 시언은 의사를 보더니 대뜸 물었다."서희는 어떻게 됐습니까?"시언의 물음에 두 의사는 서로를 한 번 쳐다보았다. 군의관이 앞으로 다가가 심각한 어투로 대답했다."목숨은 간신히 건졌지만, 몸속에 주입된 페린세제는 지극히 자극적인 독이라 아가씨의 시신경에까지 자극을 주었거든요...... 아가씨께서 실명할 수도 있을 겁니다."시언이 잠시 멍해지더니 눈빛에 침통한 기색으로 가득했다."치료할 수는 있습니까?""혼합된 독약이라, 저희도 일시적으로는 해독제를 찾을 수 없습니다."군의관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시언이 듣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살았으면 됐습니다. 수고했습니다."그러고는 뒤돌아 부하에게 "진 의사를 모셔다드려"라고 분부했다.한 위장복을 입은 남자가 앞으로 다가와 진 의사를 데리고 떠났다. 그러다 장원을 나선 후 작은 휴대용 금고를 그에게 건네주며 차갑게 말했다."진 의사님, 이건 진 의사님의 보수입니다. 그리고 어젯밤에 겪으신 일에 대해서는 전부 잊어주십시오. 밖에 의사님과 조수를 데려다 줄 차가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진 의사가 금고 안의 돈을 보더니 순간 멍해졌다. 그러다 바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길을
숲속에는 한 무리의 용병들이 소희를 포위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를 인질로 소희를 위협했었다. 그러다 소희는 기습당하고 용병 한 명이 그녀에게 불명의 약물을 주입했지만, 소희는 순간 그 용병을 죽이고 나머지 용병들과 뒤엉켰다.당시 너무 놀란 나머지 그는 소희를 도우러 가려고 했지만 온몸이 나른해져 있었고, 어느 순간에 목덜미를 한 번 맞고 다시 기절해 버렸다.그러다 다시 깨어나니 이미 여기에 있었고.중간에 무슨 일이 생긴 거지?소희를 포위 공격했던 사람은 누구지?불곰인가?그럼 또 누가 그를 강성으로 데려온 거지?머리가 너무 아프고 혼란스러워 전혀 냉정하게 사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 하지만 약의 부작용으로 손발에 여전히 힘이 없었다. 다행힌 건 전처럼 전혀 걸을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다.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상 쪽으로 걸어가 생수를 집어 들고 급히 마셨다.마시자마자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그가 다가가 문을 열자 간미연이 성큼성큼 뛰어들어 그의 옷을 잡고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소희는? 소희는!"어젯밤 경기를 마치고 핸드폰에 접속한 후에야 그녀는 사고가 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장명원의 몸은 그녀의 힘에 따라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러다 간미연을 멍하니 바라보며 대답했다."나도 몰라. 아마, 아마......"그 많은 사람들에게 포위 공격을 당하고 있었는데, 아직 살아 있을까?간미연는 힘껏 그를 땅바닥에 내팽개치고는 이를 악물며 그를 노려보았다."이 나쁜 놈아!"장명원은 바닥에 쓰러져 멍하니 간미연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이때, 간미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내용을 확인한 간미연의 눈빛은 순간 밝아졌다. 매곡리에 마침내 소희의 위치가 나타났다.그녀는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장명원이 바로 따라와 간미연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간미연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남자를 돌아보았다."너 아직도 모르겠어? 왜 임무를 받은 건 보스인데
그는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하지만 목구멍이 메이는 것 같은 감각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한참 후 그는 차를 몰고 있는 간미연을 쳐다보았다. 두 눈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목소리는 엄청 낮았다."너, 푸른 독수리야?"앞쪽만 주시하고 있는 간미연의 얼굴색은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 장명원의 물음에 묵인했다.장명원이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왜 전에 나에게 말하지 않았어?"간미연이 듣더니 차갑게 그를 흘겨보았다."우리 셋 맹세한 적이 있어, 그 누구든 신분을 절대 폭로하지 않겠다고. 나와 보스는 서로 공개한적도 없어, 다만 서로를 묵인했을뿐.”장명원이 자조하듯 냉소했다."역시 나만 바보였어.""너 바보 맞아."간미연이 인정사정 없이 장명원을 욕했다. 그러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 주시후, 수상해."그건 장명원도 이젠 눈치챈 일이다.주시후가 불곰을 찾는다는 이유로 그를 끌어들였던 건 사실 소희를 쳐내고 싶어서였겠지.나중에 밀수에서 만난 그 사람도 주시후 쪽 사람일 것이고. 고의로 그를 기절시켜 묶어둔 후 소희를 협박하려고.그는 정말 어리석었다. 구은서를 믿었기 때문에 주시후도 아무런 의심없이 믿었는데, 주시후가 소희를 상대할 때 쓰이게 될 미끼로 되다니.간미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주시후가 수상하다는 걸 눈치챘으면, 구은서도 배후 주모자일거라는 건 생각해 본 적 있어?"장명원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졌다.구은서가 그를 주시후에게 추천했고, 주시후는 소희를 죽이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더는 구은서가 주시후의 계획을 모를 거라며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주시후와 소희 사이에는 원한이 없다. 소희와 원한이 있는 사람은 구은서다.그럼 나중에 그를 납치한 일은?구은서가 알까?만약 알고 있었다면, 그가 자칫하면 불곰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건?장명원의 마음에 순간 한기가 돌았다. 이때서야 그는 자신이 완전히 구은서에게 이용당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우연히 그의 신분을 알게 되었고, 또 주시후를 통해 소희에 관한
시언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두 사람, 매곡리 쪽 사람인가? 줄곧 소희의 위치를 추적하고 있던 것도 그쪽이고?""네. 중간에 오해가 좀 있긴 했지만, 하얀 독수리는 절대 고의로 보스를 해치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 이미 잘못을 뉘우치고 있기도 하고."간미연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장명원은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시언에게 잡혀있는 그는 전혀 반항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장명원을 풀어준 시언의 눈빛에는 차가운 빛이 번쩍였다. 그러더니 부하를 향해 말했다."서희한테 보내줘.""감사합니다, 진언님!"간미연이 듣더니 바로 감사를 표했다.소희는 양지바른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상처가 전부 봉합 처리된 소희는 하얀 잠옷을 입고 조용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잠든 것처럼 보이지만 얼굴색은 무서울 정도로 창백했다.옆에는 하녀 한 명이 멍들고 부어오른 주사바늘 자국을 따뜻하게 찜질하고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 들어온 걸 보고 소리 없이 물러났다.침대에 누워있는 소희를 보면서 장명원은 후회와 자책하는 심정이 점점 용솟음쳤다. 그리고 그 심정에 손가락마저 떨렸고 콧등과 목구멍도 시큰시큰해 났다. 결국 두 무릎이 나른해지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그는 정말 세상 멍청이었다.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더라도, 무고한 소녀일 뿐인데.왜 그녀를 겨냥하고, 왜 구은서를 도와 그녀를 해치려한 거냐고!그가 그녀에게 그렇게 많은 어리석은 짓을 했는데, 그녀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를 탓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위급한 순간에도 그녀는 그를 먼저 보호했었다.그 때문에 그녀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지금 돌이켜보면, 바보같은 짓들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았다.그는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떨고 있었다. 후회되기 그지없었다.간미연은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 침대 옆으로 가서 조용히 소희를 바라보았다.그러다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돌려 장명원에게 말했다."소희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그래, 그녀는 아직 살아있어. 모든 잘못을 만회할 수 있고
구은서가 장명원에게 물 한 병을 가져다 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명원아, 뭐 오해하고 있는 거 아니야? 물 좀 마시고, 앉아서 천천히 말해 봐."장명원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구은서, 넌 줄곧 나를 이용하여 소희를 상대하고 있었어. 우리 어릴 때부터 알면서 쌓아온 의리를 이용하고 있었다고, 네가! 난 너를 친누나로 생각해서 망설임 없이 네 편에 섰어! 하지만 넌? 나의 손을 빌어 소희를 죽일 생각만 하고 있었어! 임구택 때문에 소희를 죽이려 한 것도 모자라 심지어 나까지 죽이려 했다고, 너! 구은서, 너 어떻게 이렇게 끔찍할 수가 있어?"한 사람과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더라도 그 사람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은 게 정상이었던 것이다.적어도 이 일이 있기 전에는 그는 구은서가 이렇게 위선적이고 독한 여자라는 걸 절대 믿지 않았다.구은서의 얼굴색이 많이 덤덤해졌다. 그러고는 여전히 무고한 눈빛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명원아, 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소희가 어떻게 됐다는 거야? 넌 뭘 또 내가 너를 죽인다고 그러는 거야, 무섭게."장명원의 빨갛게 달아오른 눈에는 실망과 침통함으로 가득했다. 그는 구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아직도 모르는 척할 거야? 좋아, 모르는 척해도 되고, 모든 것을 네 사촌 오빠 주시후에게 떠넘겨도 돼. 주시후는 이미 밤새 외국으로 도망쳤고, 아무도 너와 대치할 수 없을 거니까, 계속 그렇게 모른 척하고 있으라고!"임구택마저도 단서라고는 Maduro밖에 없었고, 아무것도 물어내지 못했다.Maduro도 중간에서 커미션만 받고 일을 처리했을 뿐, 구체적인 상황은 너무 상세하게 알고 있는 건 아니라서.지금은 불곰이 죽고 주시후도 온데간데없이 달아났으니, 아무도 더 이상 진상을 알지 못할 것이다.구은서는 냉담하게 장명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무슨 말을 하든, 난 아무것도 몰라.""승인 안 해도 돼. 너 내가 너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잖아."
3일이 지나서야 소식을 전해 들은 성연희와 서인은 곧장 차를 몰고 교외의 장원으로 갔다.차에서 내린 성연희는 두 다리가 나른해져 하마터면 땅에 주저앉을 뻔했다. 그러는 그녀를 서인이 신속히 부축했다.성연희는 얼굴색이 창백해진 채 천천히 몸을 곧게 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나 괜찮아."하인이 두 사람을 방으로 안내했고, 방에 들어서 침대에 누워 있는 소희를 보자마자 성연희는 울음을 터뜨렸다.계속 걱정하고 있던 서인이 그녀의 갑작스러운 울음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녀의 울음소리에서 그녀가 진짜 무서워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소희는 어젯밤에 이미 깨어났다. 다만 움직이지도 못하고 혼미하게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러다 성연희의 울음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그녀는 눈을 뜨고 입구 쪽을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나 죽지도 않았는데, 왜 울어?"목소리가 쉬어 있었다.소녀의 초점을 잃은 두 눈을 보며 성연희는 마음이 아파 아무 말도 못하고 오로지 울기만 했다. 마치 어린애 같았다."서인아, 너도 거기 있어? 네가 좀 말려줘."소희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얘 울음소리에 머리가 아파."적의 손에서도 살아 남은 소희는 성연희의 울음소리에 목숨을 잃을 것 같았다.성연희가 듣더니 애써 슬픔을 숨기고 침대 옆으로 다가가 소희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흐느끼며 말했다."서인한테 부탁해도 소용없어. 서인은 오는 길 내내 얼굴색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고. 서인을 어떻게 위로할지나 생각해 봐."소희는 서인이 어디에 있는지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눈을 드리우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서인아, 앞으로 우리 모두 발 뻗고 살 수 있을 거야."서인은 갑자기 눈이 뻑뻑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바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입술을 굳게 오므린 채 말을 하지 않았다."너희 둘이 이야기해, 나 나가 있을게."남자는 한마디만 하고 돌아섰다.성연희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일부러 콧방귀를 뀌었다."봐, 내가 서인이 무조건 화를 낼 거라고 말했잖아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
이날, 임유진은 티타임에 진소혜와 마주쳤다. 소혜는 입술을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팀장님, 구씨그룹의 총애를 받으니 우리 부서 실적도 쭉쭉 오르겠죠? 부서 직원들 대신 감사드려요, 팀장님.”유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나가려다, 소혜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 소혜 씨가 한 거라는 거 알아요. 이미 누가 나한테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소혜 씨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소혜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고, 고개를 돌려봤을 땐, 유진은 이미 자리를 떠나 있었다.오후 회의에서 유진은 이렇게 발표했다.“이번 평가 기간 동안 곽시양 씨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어요. 따라서 정현준 씨의 직책을 승계하여 부서 부팀장으로 승진해요.”“인사팀에서 곧 공식 공지드릴 예정이에요.”유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엔 놀라움이 번졌고, 시양 본인조차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부서 내에서도 존재감이 적었고, 입사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나 실적 모두 소혜에 비해 부족했기에, 시양이 발탁된 건 모두에게 의외였다.소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팀장님, 부팀장 선발 기준이 뭔가요? 기준을 명확히 해주시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혜를 응시하며 말했다.“기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기준이라면 기준이겠죠”소혜는 눈을 크게 떴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시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시양 씨, 제 사무실로 잠깐 와요.”“네?”시양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유진을 따라갔다.유진이 회의실을 나서자, 안에서는 수군거림이 폭발했다. 최근 있었던 일로 인해 유진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었고, 그런 유진이 능력도 부족한 신입을 뛰어넘어 부팀장으로 발탁했다는 점에서 불만과 의문은 더 커졌다.현준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인사 결정은 사전 상의 없이 유진이 발표한 것이었고, 그 역시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소혜는 맞은편에 앉은 베
유진은 구은정의 표정을 보고,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는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고, 유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어제 술 마셨다던데, 괜찮아요?”은정은 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술은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유진이 조용히 은정에게 당부했다.“응.”그 말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됐어요. 나 출근해야 해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그렇게 둘은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조금 전 은정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급히 뛰쳐나왔다.그러나 복도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 지금은 내 문제부터 정리해야 해. 괜히 그 사람한테 짐이 되어선 안 돼.’그날 오후, 은정은 늦게서야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법무팀에 최이석 관련 고소를 철회하라고 지시했다.마심호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 사람 같은 놈은 봐줄 이유가 없죠. 이번 기회에 서성 라인 애들도 좀 눌러놓는 게 나아요.”그러나 은정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그날 저녁, 은정은 늘 그랬듯 이경 아파트로 돌아왔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곧장 유진의 집 앞으로 갔다.문 비밀번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은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예전 그대로였고, 유진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았다.그런데도 방 안은 왠지 썰렁했는데,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은정은 그녀가 드라마를 자주 보던 소파에 앉았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정은 책상 위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녹음 안 했어요.”서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은정아, 이 일은 내가 밖에 알리지 않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최이석 일, 바로 고소 취하하고 다시는 들추지 마.”“그리고 스스로 구씨그룹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회사도, 강성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네 아버지에겐 그냥 말하면 돼. 죄책감 때문에 이 집에 더는 못 있겠다고. 이번엔 분명히 놔줄 거야.”“네가 떠날 땐,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돈도 챙겨줄게. 아버지한텐 그걸로도 충분히 체면 세워준 셈이 될 거야.”은정은 서선영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당신 딸을 희생해서까지 날 함정에 빠뜨린 이유가 최이석 때문이었네요.”서선영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곧바로 해명했다.“그 사람은 내 동생 밑에서 오래 일했어. 난 내 동생을 위해서 한 거야. 은정아, 지금 네가 분위기 바꿔서 빠져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내가 당신 말대로 안 하면요?”은정은 담배를 내뿜으며 한껏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어차피 난 이미 악명 높은 놈이 됐어. 하나쯤 더 얹혀도 그만이죠. 오히려 구은서는 이제 절대 부잣집 자제와의 결혼은 꿈도 못 꾸겠죠.”서선영의 얼굴은 날카롭고 차가웠다.“끝장을 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은서는 동정받는 쪽이 될 거야.”서선영은 은정을 똑바로 노려봤다.“임유진하고 너, 꽤 가까운 사이잖아. 그 애는 나랑 너 때문에 몇 번이나 맞붙었지. 근데 만약 그 애가 네가 술에 취해 여동생을 건드린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그 아이 눈엔 네가 어떻게 보일까? 널 어떻게 생각할까? 넌 그걸 감당할 수 있어?”그 말에 은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선영은 그 반응에 확신을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대로 해. 열흘 안에 강성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안 그러면 임유진이든, 임씨 집안이든, 강성 전체가 너란 인간이 얼마나 추잡한 놈인지 알게 될 거야.”“널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거고, 임유진도 널 경멸하
은정은 격노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선영 저 사람이 꾸민 함정이에요.”서선영은 엉엉 울면서 외쳤다.“내가 내 딸을 희생시켜서 너한테 함정을 판다고? 구은정,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알아.”“예전부터 나한테 편견이 있었지. 그래, 미우면 나한테 손찌검을 해. 왜 애먼 은서를 괴롭혀?!”“은서는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해? 이 소문이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끝장이야!”은정은 오직 구은태만 바라보며 물었다.“저를 믿으세요?”구은태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갑자기 은서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듯 달려갔다. 죽을 각오로 내달리는 눈빛이었다.“은서야! 안 돼, 은서야!”서선영이 급히 은서를 껴안고 붙잡았고, 울음이 멎지 않았다.“은서야,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거기 누구 없어요! 얘 좀 붙잡아줘요!”서선영은 울먹이며 도우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은서를 붙들고 감싸 안았다.그중 평소 은서를 따르던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구은태 앞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회장님, 사실은 전에도 도련님께서 밤에 아가씨 방문을 두드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하지만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서, 보복당할까 봐 말씀 못 드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 도우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은정은 도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애옹이가 은서에게 보내졌던 그날 밤, 은정은 술에 취해 돌아와 애옹이가 사라진 걸 알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때 이 도우미가 어두운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은태는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죽을힘을 다해 몸을 던지려던 은서, 그리고 도우미의 일방적인 증언이 더해지자, 구은태는 은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다시 근처에 있던 물
[말 좀 해봐요.][삼촌?]서선영이 천천히 2층에서 걸어 내려오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장말숙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눈짓을 보냈다. 이에 장말숙 아주머니는 눈치를 채고 전화를 받아 들고 말했다.“유진 씨죠? 저희 도련님이 술에 취하셨어요.”유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네, 신세 좀 질게요. 잘 부탁드려요.]“네!”장말숙 아주머니는 괜히 말을 더했다가 실수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은정의 까만 눈동자가 서선영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이미 흐릿했다.서선영은 은정을 부축하듯 손을 내밀며,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은정아, 술 너무 많이 마셨잖아. 방으로 데려다줄게.”“으악!”날카로운 비명에 은정은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을 떴고, 날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옆에서는 구은서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옷가지로 몸을 허둥지둥 가리고 있었고, 얼굴은 절망감에 젖은 눈물로 가득했다. 그녀는 분노로 떨리는 눈으로 은정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서의 비명은 곧 서선영과 집 안 도우미들을 방으로 불러 모았다. 문이 열리고 방 안 풍경을 본 순간, 모두가 굳어버렸다.은정은 조금씩 의식을 되찾았고, 은서를 훑어보며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이불을 들추고 자신을 확인해 보니,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었지만 상의는 전혀 없었다.은정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이마를 짚으며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머리가 묵직하게 지끈거렸다.“엄마!”은서는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 울부짖었다.“은서야!”서선영이 달려와 은서를 안고, 옷을 덮어주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몰라요!”구은서는 서선영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했다.“밤에 오빠가 갑자기 방에 들어왔어요. 술에 취해서 저를 한 대 치더니 그다음은...”은서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드러난 어깨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짐승 같은 놈!”서선영은 벼락을 맞은 듯 충격에 빠져 온몸을 떨며 은정을 향해 소리
우정숙은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에 은정은 분명히 임유진은 내 스타일 아니라며 선을 그은 적이 있는데, 왜 지금 와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쫓고 있는 걸까?“넌 어떻게 생각해?”우정숙이 묻자,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돌아왔어요.”그 말투가 생각보다 무거워, 우정숙은 분위기를 일부러 누그러뜨리며 웃었다.“이미 거절했는데도 냉정해져야 해?”유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어쨌든, 엄마는 이 일.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말아줘요. 그리고 삼촌한테도 되도록 비밀로 해주세요.”그 말에 우정숙은 딸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갑자기 이렇게 서둘러 집에 돌아온 이유 혹시 일이 더 커질까 봐? 너희 할아버지가 구은정한테 가서 따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야?”유진은 재빨리 대답했다.“누가 그 사람 걱정했대요? 밖에서 사는 게 질려서 온 거지, 그 사람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하지만 우정숙의 따뜻하고 조용한 눈빛은 유진의 진심을 꿰뚫고 있었다. 우정숙은 다만 조용히 숨을 내쉬며, 더는 묻지 않았다.그날 밤, 구은정은 외부 일정으로 접대를 나갔고,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좀 늦을 것 같아. 집에 들어가면 애옹이 좀 봐줘.]유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저도 집에 왔어요. 아주머님께 부탁하세요.]은정은 유진이 하루 정도 집에서 자려는 줄로만 알고, 별 의심 없이 답했다.[알겠어.]밤 10시.은정은 아직 접대 자리에서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 구은태가 보낸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은정아, 나 몸이 좀 안 좋다. 한번 집에 들러줄래?]은정은 미간을 찌푸렸다.[몸 안 좋으면 병원 가시죠.]그렇게 답장을 보냈지만, 더 이상의 응답은 없었다.술자리가 끝나고 나니 이미 자정 무렵이었다. 은정은 그래도 아버지를 확인하고자 구씨 저택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애옹이를 돌봐주던 장말숙 아주머니가 거실에서 그
정현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죠? 임유진 건드리지 말랬잖아요. 왜 말을 안 들어요?”진소혜는 웃었다.“들었어요. 적이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없애버리라는 그 말, 정말 감명 깊었거든요. 곧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쫓겨날 거예요.”현준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임유진은 쫓겨나지 않아요. 사장님이 반드시 지킬 거니까요.”현준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덧붙였다.“유진 씨, 그 정체가 간단하지 않아요. 사장님이 곤란한 일에 휘말릴 때마다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 애였다고요.”“이렇게 성급하게 나가면 결국 당하는 건 소헤 씨라고요.”소혜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것도 그 얼굴 덕 아니었을까요? 임유진이 무슨 대단한 집안 출신이라도 돼요?”현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 애, 성이 임이야.”소혜는 비웃었다.“강성에 임 씨 많은데요? 임씨라고 다 임씨 집안이예요?”“임유진이 정말 그 임씨 집안 사람이었으면, 이런 작은 곳에서 평사원으로 일할 일이 없죠.”강성에서도 가장 윗자리에 있는 집안, 그 임씨 집안 사람이라면 당연히 격이 달랐을 것이다.현준은 소혜를 바라보며, 무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소혜 씨, 소혜 씨는 너무 자만해요. 이제 막 졸업한 사람이잖아요. 세상이 어떤지 아직 몰라요.”“내가 경력은 부족하지만, 머리는 좋아요.”소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어요.”현준은 더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고, 소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 달 말이면,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질 거예요.”이메일은 해외 IP에서 발송된 것으로 확인되어, 추적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루머는 벌써 영업팀까지 퍼진 상황이었다.한때 유진이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걸 보고 감탄했던 동료들조차, 그녀가 정말 실력만으로 이룬 건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너무 젊은 나이에, 임씨 그룹 같은 대형 고객을 설득하고, 이미 다른 부서에서 거의 성
서선영은 유혹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거절하려는 듯하면서도 몸은 피하지 않았다.“안 돼. 나, 한 시간밖에 못 나와 있어.”“당신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최이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선영의 치마 지퍼를 내렸다.“밖에 사람 세워놨어. 아무도 안 들어와.”...오전, 임유진은 구씨그룹과의 계약을 마무리했다. 오후에는 회사 고위층 회의에 참석했고, 회의가 끝나고 마케팅부로 돌아왔을 때쯤, 팀 동료들의 시선이 평소와 달랐다.유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모두는 급히 예의를 갖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진은 손에 든 자료를 들고 여진구를 찾아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진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유진이 들어오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무슨 일 있었어요?”유진이 맑은 목소리로 묻자, 진구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아니야. 너 손에 든 거, 청원안 자료야? 나 좀 볼게.”하지만 유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휴대폰, 보여줘요.”진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방금 보고 있던 건, 유진과 은정이 함께 있는 사진들이었다.둘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둘이 함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장면. 얼마 전 중식당에서 있었던 그날이었다.진구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누군가 이 사진들을 너희 팀 메일에 전체 전송했어. 내용은, 네가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게 구은정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어서라고.”유진은 이미 그 메일을 확인했었다. 메일에는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구씨 그룹 사장을 유혹했다는 식의 악의적이고 천박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업계 풍기를 망친다는 말까지, 표현이 거칠고 추했다. 유진은 이를 꽉 물었지만, 곧 침착하게 물었다.“발신 IP 추적할 수 있어요?”진구가 답했다.“지금 IT팀에서 추적 중이야. 내부 직원일 수도 있고, 유지그룹 쪽의 보복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반드시 밝혀낼 거야.”“일단 외부로 확산은 안 됐고, 회사 내부 루머 수준이야. 이미 전체 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