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구택은 고개도 들지 않고 손에든 서류를 보고 있었다.임유림은 고개를 돌려 웃으며 물었다. “소희야, 과외하러 온 거야?”그녀는 소희의 집안 형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곳이 부자동네여서 당연히 과외 하려 온 줄 알았다.소희는 웃어 보였다. “널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그녀는 임유림이 임구택 형의 딸, 즉 그의 조카라는 걸 어떻게 잊었단 말인가?거의 3년 동안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최근에만 일주일에 3번을 만났다. 그들을 주선해 준 중매쟁이가 드디어 깨어난 건가요?임유림은 돌아보며 소희에게 소개해 주었다. “이분은 내 둘째 삼촌이야!”소희는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임구택은 목소리가 익숙한 것 같아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가 또 있어 눈을 가늘게 떴다.소희는 손에 들고 있는 우산 손잡이를 꽉 쥔 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임유림은 열정적으로 소희와 대화를 나눴다. “주경이가 고석 좋아하는 거 아니야?”소희는 어제의 일을 떠올리며 답하였다. “그런 것 같아!”소희는 무의식적으로 임구택을 바라보며 미소를 띠며 답했다. “나와 고석은 그냥 친구야, 그가 누구와 함께 있는 나랑 상관없어.임유림이 계속해서 그녀에게 눈치를 보내니 소희의 마음속이 불안해졌다. 그녀가 결혼을 합의 때문에 하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 그녀는 결혼한 신분이다.시내로 들어서자 앞쪽에 사고가 나 차가 막혔다. 임유림은 고픈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 “길 언제 뚫리지, 배고픈데 먼저 밥 먹으러 갈까?”소희는 답혔다. “나 여기서 내릴게 나 학교 가야 해.”“학교는 무슨, 점심인데 같이 밥 먹으러 가자.” 임유림은 이미 스스로 결정을 내린 듯했다.아무 말도 하지 않던 임구택은 시계를 보고 명우에게 차를 세우라고 지시했다.세 사람은 프렌치 레스토랑에 들어가 앉았다. 임유림은 소희가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 와본 적이 없을까 봐 소희에게 물어본 뒤 대신 주문해 주었다.임유림이 음식을 주문하고 화장실에 가자 자리에는 임구택과 소희 둘만 남았다.소
임구택은 의아한 듯 그녀를 한 번 더 보았다.때마침 임유림이 돌아오자 그녀는 소희 옆에 앉아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고등학교 동창 만나서 잠시 얘기하다 왔어.”웨이터가 음식을 가져오고 나서 세 사람은 밥을 먹기 시작했다. 임유림은 소희와 함께 학교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었다.식사를 마치고 세 사람이 출발할 때 성연희 일행을 만났다. 성연희도 손님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나오다가 문 앞에서 마주쳤지만 두 사람은 모르는 척하며 스쳐 지나갔다.두 명의 사장님은 임구택을 알아보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였다.밖은 이미 비가 그치고 길도 뚫린 상태였다. 명우가 차를 몰고 세 사람을 태웠다.“소희야, 어디로 가?” 조수석에 앉아 있던 임유림이 물었다.“가는 길이면 강성대 앞에 세워주면 돼.”“가는 길이라 문제없을 거예요.” “우리 삼촌은 말도 참 예쁘게 하네.” 임유림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소희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전에 했던 독설을 듣지 않았다면 아마 단순하게 믿었을 것이다.학교에서 잠시 떨어진 곳에서 임유림과 소희는 잡담을 나누고 임구택은 옆에 앉아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다.오늘 두 명의 부부는 같은 차에 동승했고 소희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차는 학교 입구 앞에서 멈추었고 소희는 차에서 내리기 전에 유림에게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 유림아.”“뭘, 다음에 밀크티 한잔 사줘.” 임유림은 눈매가 날렵하면서 귀여웠다.소희는 웃으며 동의했고 자신의 우산과 가방을 들고 내렸다. “감사합니다, 임 선생님.”임구택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네.”소희는 차에서 내려 손을 흔들며 임유림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소희는 버스정류장으로 가 버스를 기다렸다.차에서 유림은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돌아서며 임구택에게 말했다. “삼촌, 저 소희에게 유민이의 가정교사를 맡기고 싶어요.”그녀의 부모님은 자주 집을 비우셨다. 며칠 전에는 런던 경제 세미나에 참석하러 갔고, 이번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모시고 가셨다. 유민이의 가정교사는 핑계를 대고
임구택은 그녀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희고 부드러우며, 붉은빛이 돌았다. 마치 구름이 노을빛을 머금은 것 같았고 붉은빛은 그녀를 더욱 앳되게 보이게 해 대학생이 아니라 고등학생처럼 보였다.그는 데이비드를 물러나게 한 후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 떨어져도 좋아요.”소희는 일단 한 번 돌아보고 나서야 그에게서 떨어졌고 바로 남자 뒤에 숨어서 강아지에 눈을 떼지 못했다.남자는 가볍게 웃은 뒤 데이비드에게 걸어갔다.그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남자의 몸에서 은은한 향기가 나는 게 마치 봄에 내리는 가랑비의 냄새 같았다.남자는 데이비드에게 다가가 목을 쓰다듬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데이비드는 보통 사람을 공격하지 않습니다.”소희는 남자의 말에 속뜻을 헤아렸다. 무슨 뜻이야? 내가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그녀는 그 개를 보고나니 그제야 셰퍼드라는 것을 깨달았다. 보통 셰퍼드보다 더 커서 사람을 놀래키기엔 충분해 보였다.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그의 담담한 태도를 흉내 내며 말했다. “익숙한 말이네요, 애꿎은 행인이 개한테 물렸다는 소식은 뉴스에서 많이 접했어요.”임구택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나이가 어릴 땐 이가 아주 날카롭죠!”소희가 막 말을 하려고 할 때 임유림이 웃음을 띠며 내려왔다. “소희야 너 왔구나!”그녀는 연한 화장을 한 채 내려와 소희에게 인사를 건넸다. “부모님은 안 계시고 평소엔 집에 거의 사람이 없어. 여긴 우리 삼촌 어제 봤지?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소희는 임구택을 바라보며 파리를 먹은 듯한 표정으로 입을 오므렸다.임구택은 아까의 일을 복수하듯 담담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어른을 만났는데 인사도 안하나요? 인사예의도 모르면서 가정교사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군요.”임유림은 임구택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른 채 임구택에게 눈치를 줬고 임구택은 못 본 척했다.소희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이빨 사이로 두 글자를 짜내는 듯했다. “삼...촌!”임구택은 폼을 잡으며 데이비드를 데리고 소파에 앉았
소희는 손을 뒤로 숨기고 싶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그러지 못했다.게임에서는 그녀가 유민을 쏴 죽이고 그녀도 다른 사람 총에 맞아 죽었다.소희를 발로 차고 싶은 충동을 참은 유민은 그녀를 옹호하였다. “둘째 삼촌, 숙제 다 했어요!”임구택은 의외라는 듯 소희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보자.”유민은 숙제를 꺼내서 임구택에게 보여주었다. 과연 다했을 뿐만 아니라 채점도 다하고 틀린 문제도 고쳤다. 심지어 어떤 문제는 오답노트까지 써놓았다.임구택은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려 소희를 바라보았다.소희는 태연하게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 “유민이가 숙제 다 하면 게임 같이 해주겠다고 약속했어요.”임구택은 입가에 웃음을 띤 채 숙제를 내려놓고 유민에게 말했다. “숙제 잘했네, 계속 게임해!”임구택은 말을 마친 뒤 걸음을 옮겨 방을 나갔다.소희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고 유민과 눈을 마주쳤다.유민이 비웃었다. “삼촌이 그렇게 무서워?”소희는 입을 열었다. “설마 넌 안 무서워?”유민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삼촌이 화나면 날 때릴 때도 있지만 그래도 너는 때리지도 못할텐데 넌 뭐가 무서워?”소희는 목이 메었다. “누... 누가 무섭대?”유민은 야유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소희는 짜증이 나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삼촌 얘기하지 말고 게임이나 하자.”유림은 다시 태블릿을 집어 들고 위협했다. “또 나 쏘면 내가 너 먼저 죽인다!”소희는 미소를 지었다. “안 그럴게!”......소희가 집에 갈 땐 임구택을 마주치지 않았고 별장을 떠난 후 그제야 그녀는 마음이 탁 트였다.어떤 사람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게 한다.임구택은 오전 내내 외출하지 않았고, 점심에는 유민과 단둘이 10개의 반찬과 국을 곁들여 밥을 먹었다.임구택은 먼저 국물을 몇 모금 마시고는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새로운 선생님 어때?”“좋아요!”유민은 고개를 끄덕였다.임구택은 가볍게 비꼬았다. “너랑 게임 같이 해줘서?”유민은 대수
밤 10시가 넘은 시각 임유림은 그제야 집에 돌아왔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임구택을 힐끗 보고 무슨 말을 하려는 하인에게 눈치를 준 뒤 살금살금 위층으로 살금살금 올라가려 하였다.“이리 와!” 남자는 소파에 기대어 책을 손에 든 채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임유림은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아예 태연한 척 그에게 갔다. “삼촌, 아직 안 주무셨어요?”임구택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가정교사를 급하게 찾더라니 데이트하려고 그런 거였구나, 남자친구 있니?”“없어요!” 임유림은 고개를 즉각 고개를 저었다. “그냥 학교 친구랑 쇼핑하다 온 거예요!”“남자친구야 아니면 친구야?” 임구택은 취조하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임유림은 삼촌이 여우라는 것을 깨닫고 맞은편에 앉아 솔직하게 말했다. “저 남자친구 생겼어요. 우리 집이 특별한 집안이라고 해도 전 그냥 평범한 연애가 하고 싶어요. 그의 뒷조사와 우릴 감시하지 않았으면 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는 아주 좋은 사람이고 저도 저희 집안 얘기를 한 적 없어요.”임구택은 책을 내려놓고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림아, 연애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야, 뒷조사 안 할 테니까 네가 좀 더 조심했으면 좋겠어. 부모님이 집에 없을 땐 내가 널 책임져야 해.”임유림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삼촌, 둘째 삼촌이 최고예요!”“애교 부리지 말고 올라가 자.”임구택은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 “참, 유민이가 네 친구 괜찮다고 했으니까 다음 주부터 계속 나오라 그래.”정말요.” 유림이의 미소가 더 환해졌다. 유림은 휴대폰을 꺼내며 위로 올라갔다. “지금 말해줘야겠다!”임구택은 유림이 계단에 있는 것을 보고 한마디 외쳤다. “소희야, 자니?”전화 너머로 상대방이 말하는 소리가 들리자 유림은 웃으며 답했다. “우리 삼촌이 너 잘 가르친다고 하시더라. 네가 유민이 가정교사하는 걸로 하기로 했어.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오전에 수업하는 거 어때?”그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
외국어 선생님은 영국 분이시다, 용모가 점잖게 잘생겨 소정이가 외국어 선생님이 자신에게는 가장 완벽한 이상형이라고 노래를 불러댄다.두 사람은 교실로 들어가 수업을 들으러왔다, 적지 않은 이들이 소희에게 시선을 보내왔다, 아마도 방금 전에 밖에서의 일을 보았거나 들었거나 한 모양이다, 소희를 바라보는 시선중에 좋게 보는 시선도 있고 그녀가 고상한 척 주제를 모른다고 경멸하는 시선도 있다.소희는 태연하게 소정이와 자리를 찾아 펜과 노트북을 꺼내 수업 들을 준비를 했다.......수업이 끝나고, 소정이가 문제 묻는다는 핑계로 그녀의 “이상형”에게 찾아갔고 소희는 자리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10분이 지나도 소정이가 그만 물을 낌새를 보이지 않자 소희가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주경이 서늘하게 소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그녀가 가까이 오자 길을 막고 명령하는 식의 어조로, “앞으로 고석이한테서 멀리 떨어지세요!”라고 했다.소희가 덤덤하게, “고석한테 가서 말해,”라고 했다.주경의 안색이 순간 바뀌면서, “뻔뻔한 거 봐?”라고 했다.그녀는 방자하게 구는 게 익숙한 사람이기도 하고 며칠 전의 한도 풀 겸 손을 들고 소희의 얼굴을 향했다, 일부러 사람들의 앞에서 소희에게 응징을 주어 고석의 체면을 세워주기라도 하듯이 말이다.소희는 그녀의 손이 자신에게 닿기 전에 주경의 왼쪽 다리를 찼다.주경의 다리가 그 자리에서 골절되었다!소희의 청순하고 정교한 이목구비가 사람들의 눈에는 만만해 보이고 착해 보이지만 그녀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도 많은 말이 필요없이 깔끔하고 부드럽게 흘러간다........한 시간 후, 소희가 학교 교장 선생님의 사무실 앞에 왔다, 주경은 이미 병원으로 실려가고 지금 교장과 소리를 지르고 있는 사람은 주경의 아버지인 주철근이다.과 선생님이 소희를 감싸며 주철근과 의논했다, 분명 주경이 먼저 손을 들었으니 소희는 정당방위다.주철근은 화가 나서 과 선생님을 가리키며, “왜 이렇게 비천한 것을 감싸고도는 건가요? 이 애가 주경이의
소정이는 아래에서 계속 소희를 기다리고 있다 바로 달려와서 물었다. “어떻게 됐어? 조교쌤이 어떤 처벌을 내린다고 말했어?”소희는 백팩을 메고 두 손은 가방끈을 잡고 태연하게 말했다.“무슨 근거로 날 벌주냐, 나는 정당방위인데!”소정이가 믿기지 않는 얼굴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주경이의 다리가 골절돼서 걔네 아빠가 화를 잔뜩 품고 왔는데 널 가만히 뒀어?”소희는 웃으며 말했다.“어쨌든 이미 해결됐어!”소정이는 비록 의문이 들었지만 안도의 한숨을 쉬며 소희와 함께 학교를 나서며 중얼거렸다. “다 나 때문이야. 내가 이상형한테 치근덕 거리지 않고 일찍 나갔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소희가 개의치 않는 어조로 말했다.“주경이는 목적을 가지고 왔기에 어쩌면 그곳에서 나를 기다렸을지도 몰라. 늦게 가나 일찍 가나 다를 거 없어!”“다리가 골절됐어도 싸!” 소정이가 분해서 씩씩거리더니 갑자기 안색이 바뀌고 두 눈을 번쩍이며 소희를 바라보았다.“소희야, 너 무술 배운 적 있어? 어떻게 주경이를 단번에 쓰러뜨린 건지 알려줘!”소희가 입술을 여미고 얼버무렸다. “아마도 내가 마침 가장 약한 곳을 차서 그런가 보지!”소정이는 눈을 희번떡 거리며 말했다.“괜히 들떴어. 난 또 네가 무슨 신비로운 무술 가문의 배경이 있는 줄 알았어!”소희가 풉 하고 웃었다.“소설 그만 봐. 뇌 발달에 해로워 질라!”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며 느긋하게 걸어갔다. 학교 대문을 나서자 소정이가 소희의 팔을 당기며 왼쪽으로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저기 봐, 소 퀸카야!”소희가 고개를 돌리고 보니 길 옆에 벤쯔 한 대가 세워져 있고 운전기사가 내려 소연이가 차에 오르게 문을 열어주고 있었다.주위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구경했다. 여학생들은 부러워하고 남자들은 연모하고, 심지어 누군가 '여신님' 하고 소리쳤다.소정이가 쉬쉬하며 말했다. “소연이는 어쩜 팔자가 이렇게 좋을까. 공부 잘해, 예쁘게 생겨, 심지어 부잣집에 태어났어. 내가 그중 하나라도
소희는 드디어 왜 임유민의 가정교사들이 사직을 한 건지 알 것 같았다, 재벌 집의 아이는 욕을 할 수도 때릴 수도 없는데다 설교를 하면 시끄럽다 하고 좋은 말로 달래주면 유치하다고 하기에 그런 무력감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동적으로 포기하게 만들었을 것이다소희가 몸을 일으키고 상 위에 다트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과녁을 한 번 겨누고 손을 들어 다트를 던지니 과녁의 한가운데 정확히 명중했다.그녀가 세 번째 다트를 던질 때 임유민이 고개를 들고 놀라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소희가 양손에 동시에 다트를 들고 보지도 않고 던졌다, 두 다트는 같은 속도로 전에 명중한 다트를 맞추고 동시에 과녁에 명중했다.임유민이 몸을 일으키고 소희의 곁으로 와서 고개를 들고 그녀를 보며, “다트 배운 적 있어요?”하고 물었다.소희가 눈썹을 치켜들고 부인하지 않았다.임유민은 흥취가 올라와, “그럼 알려주세요.”라고 했다.소희가 팔짱을 끼고 책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의 수업을 완벽하게 하면 알려줄게!”임유민이 코웃음을 치며, “다른 수법으로 바꿀 수 없어요?”하고 물었다.소희가 어깨를 들썩이며, “어쩔수 없어, 내가 널 가르치러 온 이튿날에 무능하다는 이유로 쫓겨날 수는 없잖아, 나도 체면이 있는데.”라고 했다.임유민은 거만하게, “저 둘째 삼촌한테 알려달라고 할 수도 있어요, 선생님보다 한수 위거든요!”라고 했다.“그럼 지금 너의 둘째 삼촌을 불러다 널 가르쳐 주는지 확인해 볼까?” 소희는 겁이 나지 않는다, 알려줄거였으면 진작에 알려주었겠지.임유민의 얼굴에 바로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가늠을 하듯 고개를 끄덕이고, “알겠어요, 선생님 말 들을 테니까 공부하고 나면 활 쏘는 법 가르쳐 줘야 해요, 활도 잘쏘세요?”“활?” 소희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임유민은 약간 득의한 기색을 보이며, “안 되죠? 저희 둘째 삼촌은 백발백중이거든요!”라고 했다.“누가 못한데, 먼저 공부나 하고 말해!” 소희가 책상 앞으로 갔다.“저 속이면 어떻게 해요? 다트 놀이와
셋은 대학 1학년 때부터 알던 사이였다. 그 오랜 시간, 학교에서 사회로 이어지며 지금까지도 우정을 유지해 왔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그래서 방연하는 결국 더 이상 상황이 꼬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조용히 장효성에게 신호를 보냈다. 부디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려줬으면 좋겠다고.세상에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꼭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해야 하나. 괜찮은 남자는 많지만, 7년 8년을 함께한 친구는 많지 않으니까.그러자 효성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맞아. 그럼 나도 방해 안 할게.”효성은 여진구의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연하는 술병을 들고 그녀와 가볍게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우리 회사에 새로 들어온 남자 직원 있는데, 피부도 하얗고 꽤 잘생겼어. 너 스타일이거든. 한번 소개해 줄까?”효성은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괜찮은 사람이면, 네가 먼저 노려야 되는 거 아냐?”연하는 익살스럽게 대답했다.“같은 부서라서 내가 먼저 나서기 좀 그렇지. 만약 나중에 헤어지면 계속 보기 불편하잖아.”“우리 팀장도 같은 부서끼리 연애하는 거 안 좋아해서, 너한테 넘기는 거야. 이게 바로 내 사람한테 좋은 건 안 넘긴다는 말 있잖아?”효성은 고개를 끄덕였다.“좋지. 언제 한 번 불러줘. 얼마나 잘생겼는지 한번 보자.”“보장할게. 네 기대 안 저버릴걸!”두 사람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다시 편안한 분위기를 회복했다. 조금 전까지 흐르던 묘한 기류도, 웃음소리에 묻혀 사라졌다.곧 유진과 진구가 거실로 돌아왔다.“계속 마셔. 아직 술 남았지? 없으면 내가 더 가져올게!”유진이 웃으며 말했다.“이제 그만 마시자. 내일 출근도 해야 하잖아.”효성은 진구를 흘긋 보고는 곧 시선을 돌렸다.“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정리하자.”유진은 말했다.“치우지 마. 내일 청소 도우미 아주머니 오시거든.”“온 집안에 술 냄새가 진동하는데, 간단하게라도 정리하자.”진구는 술병들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말했다.“오늘 밤 창문 꼭 닫고 자.
장효성은 구은정을 처음 본 터라, 아까 거실에서 벌어진 긴장감에 어리둥절했다.그녀는 방연하에게 조용히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 그 남자 누구야?”연하는 짧게 대답했다.“유진이 삼촌이야. 친삼촌은 아니고.”“그러면 그 사람이랑 선배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효성은 더더욱 이해하지 못하자, 연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말하자면 길어.”사실 연하가 짐작한 대로라면, 상황은 더 복잡해질 수도 있었다.한편 베란다에선 유진이 인상을 찌푸린 채 여진구를 바라보고 있었다.“선배 도대체 왜 그래요? 왜 삼촌이랑 그렇게 대립하려 드는 건데? 그 사람이 선배한테 뭐라도 잘못했어요?”그러자 진구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너는 못 봤어? 그 사람이 나한테 어떤 태도였는지! 완전히 적대적이었잖아!”유진은 코웃음을 쳤다.“내가 보기엔 선배가 먼저 시비 걸었는데요?”“하!”진구는 비웃듯 숨을 내쉬고는, 등을 돌린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언제나 그래. 네가 신경 쓰고 감싸는 건 항상 그 사람이잖아.”유진은 고개를 기울이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지금 뭐라고 했어요? 좀 크게 말해 봐요.”진구는 다시 몸을 돌려 베란다 난간에 등을 기댄 채 물었다.“그럼 다시 생각해 보자. 그 사람이 네 이웃이 된 게 진짜 우연이라고 믿는 거야?”유진은 살짝 당황해하며 대답했다.“그냥 우연이죠.”“그 말을 진심으로 믿어?”진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되물었고, 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그러는 선배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데요?”진구는 답답하다는 듯 중얼거렸다.“임유진.”하지만 유진의 맑고 단단한 눈빛을 마주하자, 결국 그 뒤의 말은 꺼내지 못했다. 지금은 아직 말할 때가 아니었다.이에 유진은 눈살을 찌푸렸다.“혹시 선배가 생각하기에, 내가 갑자기 이사 나오고, 하필 그 집을 고른 게 삼촌이랑 일부러 이웃하려고 그랬다는 뜻이에요?”“선배 지금 뭘 생각하는 거예요? 그 사람은 삼촌이에요.”그 말에 진구는 되려 눈을 크게 떴다
“누가 왔어?”임유진이 빠르게 거실 쪽으로 걸어오다가, 구은정을 보고 놀란 듯 말했다.“돌아오셨어요?”여진구는 곧장 고개를 돌려 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애옹이는 은정을 향해 달려가, 반가운 듯 꼬리를 흔들며 애교를 부렸다. 은정은 허리를 살짝 숙여 애옹이를 안아 들었다. 손엔 케이크 박스를 하나 들고 있었고, 아무 말 없이 거실로 들어섰다.진구는 은정이 아무렇지 않게 유진의 집에 들어오는 모습에 충격을 받은 듯, 놀람과 분노가 뒤섞인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심지어 조금은 당황한 기색도 엿보였다.이에 유진은 바로 말했다.“은정 삼촌이 제 옆집에 살아요.”“뭐라고?”진구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거의 충격에 찬 목소리였고, 유진은 민망한 듯 웃었다.“저도 나중에야 알았어요.”그러나 진구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나중에 알았다? 그런데 벌써 이 집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사이야?”그 말에 은정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밤의 냉기를 담은 듯한 시선이 진구를 향했다.“그 말투로 유진이한테 말하는 건가?”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당신이 나한테 따질 만한 일인가요?”진구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구은정 씨, 본인은 지금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고는 있어요? 당신은 유진이의 삼촌이잖아요!”진구는 삼촌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거의 이를 악물고 말했다. 하지만 진구와 달리 은정은 차분했고, 오히려 단호했다.“삼촌이기 때문에 더 잘 챙겨주는 거죠. 그게 문제인가요?”‘문제냐고?’진구는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르고 싶을 만큼 화가 치밀었다. ‘문제고도 남았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그때 방연하와 장효성이 다가왔다.“무슨 일이야?”“분위기가 왜 그래?”은정을 본 연하는 당황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구은정 씨!”은정은 연하와 효성을 확인하곤, 굳어 있던 얼굴을 조금 누그러뜨렸다.“모임 중이셨어요?”연하는 얼른 맞장구쳤다.“네, 지난번 유진이 이사 파티할 때 효
연하의 얼굴에 아쉬움이 비쳤다.“거절당했지 뭐. 자기는 날 안 좋아한대. 앞으로 다시는 연락하지 말래. 내가 왜냐고 물었더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고.”임유진은 애옹이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구은정이 말했던 자신을 짝사랑하다 떠난 여자 이야기가 떠올랐다.이에 연하는 피식 웃었다.“나는 그 말 다 핑계 같아. 그냥 나한테 마음 없어서 거절하려고 만든 말이겠지.”유진이 물었다.“그래서 너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포기해야지. 더 엉겨 붙으면 보기 안 좋잖아. 어쨌든 너희 삼촌인데, 나도 자존심은 있어야지.”연하는 털털하게 웃었다.“세상에 나무가 얼마나 많은데, 굳이 한 그루에 목 매달 필요는 없잖아!”유진은 연하의 시원시원한 태도가 부러웠다.“그렇게 생각해서 다행이네.”유지은 은정이 바로 옆집에 산다는 걸 말할까 잠시 고민했다지만 연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작게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유진아, 너 혹시 눈치챘어? 효성이 진구 선배 좋아하는 것 같아.”유진은 놀란 나머지 본능적으로 소리쳤다.“진짜?”“거 봐, 너 전혀 몰랐지!”연하는 눈길을 식탁 쪽으로 돌려, 진구와 이야기 나누는 효성을 바라보았다.“근데 나는 선배가 효성이를 좋아할 것 같진 않더라고. 내가 효성이한테 말해볼까?”유진은 웃으며 말했다.“감정이라는 게 말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잖아. 두 사람 얘기가 잘 통하면 또 모르는 거고.”연하는 복잡한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 진구가 아직 고백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섣불리 말할 수 없었다.하지만 효성은 이미 진구가 유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에 연하는 생각에 잠겼다.‘이번 일 잘못하면 꼬일 수도 있겠다.’그 사이 진구와 효성은 가볍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진구의 휴대폰에 낯선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여진구 사장님, 알려드릴 게 있어요. 진소혜 씨가 뒤에서 자주 임유진 씨 험담을 해요.][지난번 유진 씨랑 집 보러 갔을 때도 일부러 다른 사람들 꼬드겨 따라간 거예요. 유진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장효성이 출장 갔다가 돌아왔거든요. 오늘 우리 집에 들른다고 했어요.”여진구는 오늘 일정을 확인하더니 웃으며 말했다.“그럼 나도 저녁에 갈게. 술이랑 음료, 저녁까지 내가 다 챙길게!”유진은 웃으며 말했다.“좋아요! 그럼 연하랑 효성한테 단톡방에서 말할게요.”진구는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그런데 요즘 그 이웃, 또 널 귀찮게 하진 않았어? 남자야, 여자야? 얼굴은 봤어?”“그 사람은...”유진이 막 대답하려던 찰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온 사람은 기획팀 부장이었고, 업무 보고를 하러 온 참이었다.유진은 잡담을 멈추고, 진구에게 먼저 일 보라고 한 뒤, 자리를 나섰다. 사장실에서 나와 걸으면서 유진은 속으로 생각했다.‘이웃이 구은정 삼촌이라는 걸 선배가 알면 어떤 반응일까?’오후.은정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저녁 약속이 생겨서 좀 늦게 들어간다며, 애옹이를 잘 부탁한다고 했다.은정은 예전부터 애옹이를 돌보던 도우미 아주머니를 그만두게 했고, 그 뒤로는 그가 자리를 비우면 애옹이를 돌보는 일은 자연스럽게 유진의 몫이 되었다.마침 오늘은 집에 친구들이 오기로 되어 있어 은정에게 수업할 시간도 없었는데, 잘 됐다 싶었다.유진은 메시지를 보냈다.[퇴근하고 애옹이 우리 집으로 데려갈게요. 집에 올 때 데리러 오세요.]은정이 보냈다.[응. 저녁은 밖에서 먹을 테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어.]유진은 은정이 보낸 메시지를 보며, 다시 묘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곧 누가 다가와 업무 얘기를 꺼냈고, 그녀는 휴대폰을 내려놓은 채 은정에게 답장하는 것도 잊어버렸다.퇴근 후, 진구를 포함한 몇 명이 유진의 집에서 모였다. 해외에서 돌아온 효성이 모두에게 선물을 준비해 왔고, 진구까지 빠짐없이 챙겼다.유진은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앉아 있으라 하고, 옆집에서 애옹이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먼저 간식을 먹이며 애옹이를 달랬다.“고양이 너무 귀여워! 어디서 데려온 거야?”고양이를 좋아하는 연하가 애옹이
“열나는 거 아니야?”구은정이 손을 들어 임유진의 이마에 닿으려 했다. 유진은 고개를 저으려다, 따뜻한 손바닥이 이마에 닿는 순간 겁이 나서 몸을 멈췄다.“괜찮아. 열은 없네.”은정은 손을 거두며, 자연스럽게 덧붙였다.“내일이나 모레 비 온대. 날도 추워질 테니까 출근할 땐 따뜻하게 입고.”“네.”유진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들어가.”은정은 유진의 얼굴빛이 아직도 어두워 보이자,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재채기라는 건 누군가에게 마음이 생기는 것처럼 제어할 수 없는 거니까, 굳이 미안해할 필요 없어.”그는 자기 책을 정리하면서 툭 던지듯 물었다.“내일 아침엔 뭐 먹고 싶어?”은정의 담담한 태도 덕분에 유진도 점차 긴장이 풀렸다. 조금 전의 상황도 잊은 듯 웃으며 말했다.“건너편 가게의 호떡이랑, 만두요! 치즈 들어간 거로!”은정은 잔잔하게 웃었다.“알겠어. 일찍 자. 내일 아침에 내가 사다 줄게.”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 삼촌도 일찍 쉬세요!”애옹이는 눈을 반쯤 뜬 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가 나가는 걸 보고 아쉬운 듯 두어 번 울었다.“착하지, 얼른 자. 내일 보자!”유진은 애옹이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유진의 표정은 생기 있었고, 목소리는 맑고 귀에 감겼다.애옹이를 달랜 후, 유진은 은정에게 미소로 작별 인사를 건넨 뒤 집으로 돌아갔다.이번엔 은정이 현관까지 배웅하지 않았다. 앉아 있을 때야 그나마 괜찮지만, 함께 일어나면 서로 민망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괜히 유진이 다음에 또 오기 꺼려질 수도 있었으니까.문이 닫히고 나서야, 은정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옆에 있던 얼음물 병을 들어 반쯤 단숨에 들이켜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조금 전 유진이 당황하던 모습이 자꾸 떠올라 웃음이 났다. 애옹이가 그의 무릎 위로 올라와 하품하며 몸을 늘어뜨렸다. 그는 애옹이의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유진의 생각뿐이었다.조금 전 그녀가 나갔을 뿐인데
저녁 식사를 할 때까지도 유진의 귀 끝은 여전히 붉었다.마침 은정이 자연산 농어를 쪄서 내왔는데, 아까 유진에게 다가왔던 것도 이걸 간장조림으로 할지, 찜으로 할지 물어보려던 참이었다.유진은 찜으로 조리된 생선을 한 입 먹어보았다. 살점이 부드럽고 신선해서 비린내 하나 없이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그녀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생선 냄새 너무 좋아요!”은정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애옹이 간식보다 더 맛있어?”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볼이 부풀 정도로 화가 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애옹이 간식이 더 맛있거든요!”은정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다음엔 애옹이 간식 살 때, 두 봉지 사야겠네.”얼굴에 철판 깐 지 오래라고 생각한 유진도 결국 푸하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고개를 든 은정은, 조금 전까지 웃음이 어린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진의 반짝이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며,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식사가 끝나고 나자, 은정이 식탁을 치우고, 유진도 자청해서 거들었다. 남은 재료들을 냉장고에 정리한 뒤, 유진은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오는 주방 쪽으로 돌아섰다.유진은 등을 조리대에 기대고 애옹이를 품에 안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자, 은정이 소매를 걷은 채 설거지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은은한 회색 셔츠의 소매가 팔꿈치까지 올라가 있었고, 전완근이 드러났다. 그의 동작은 느긋하면서도 단정했고, 어딘가 나른한 멋이 묻어났다.맞춤형 정장 바지까지 갖춰 입은 모습은 단정하면서도 날렵했다. 은정의 길고 탄탄한 다리와 넓은 어깨, 단단한 상체가 균형을 이룬 체형이 눈에 띄었다.예전에 유진은 방연하에게 왜 그렇게 구은정을 좋아하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방연하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거칠고 야성미가 넘치면서도 퇴폐적인 페로몬이 있다며 능글맞게 웃었다.유진은 그 말을 듣고 비웃었었다. 페로몬은 무슨, 그냥 몸이 좋은 거라고 하자 연하는 유진이 잘 몰라서 그렇다며 웃
“그러니까, 넌 왜 받은 거야?”은정은 낮고 깊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한 번 받으면, 그 뜻을 인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계속 오해하게 만들겠다는 거지?”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이제 알았어요. 다음에 여진구 선배한테 확실히 말하고, 더는 안 받을게요.”은정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칼을 들어 채소를 썰기 시작했다.“그래. 그럼 이제 나가서 놀아.”유진은 주방을 나가려다가 문득 뭔가 떠오른 듯 걸음을 멈췄다.“잠깐만요, 삼촌, 그러면 삼촌은요?”은정은 손을 멈추고 천천히 유진을 돌아보았다.“뭐?”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장난스럽게 물었다.“나한테 잘해주는 이유는 뭐예요? 삼촌도 나한테 무슨 목적 있는 거 아니죠?”은정은 잠시 말이 없다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네가 나한테 수업해 주니까.”이에 유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와, 진짜 솔직하네.”은정은 단호하게 말했다.“너한테는 가식 떨 필요 없으니까.”유진은 은정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가슴이 살짝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하지만 애써 웃으며 넘겼다.‘아냐, 원래 저 사람 성격이 저런 거야.’그러고는 애옹이를 꼭 안고 거실로 돌아갔다.유진은 퇴근길에 들른 펫숍에서 애옹이의 새 옷과 장난감을 몇 개 사 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애옹이에게 한 벌씩 입혀 보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애옹이는 무척 순순히 유진에게 협조했다.마지막으로 핑크색 레이스 원피스를 입혔을 때, 은정이 부엌에서 접시를 들고 나왔다. 그는 애옹이의 차림을 보고, 한순간 멈칫했다.유진은 애옹이를 들어 올려 은정에게 보여주며 말했다.“어때요? 예쁘죠?”은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좋으면 됐어.”그러자 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이건 철저히 삼촌 같은 빠꾸 없는 상남자의 취향에 맞춘 코디예요.” 그러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빠꾸 없는 상남자 취향?”“그렇죠! 핑크색, 반짝이, 공주풍 스타일을 좋아하는 거.”유진이 장난
하루가 금세 지나갔다. 평소처럼 임진은 부서 동료들과 함께 야근했다. 유진은 자기 일을 사랑했고, 늦게까지 일하는 것에 대해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자꾸만 시간을 확인하게 되었다.창밖이 점점 어두워지는 게 유난히 지루하게 느껴졌다.‘이거 혹시 애옹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걸까?’마침내 모든 업무를 마치고 퇴근할 시간이 되자, 유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서둘러 짐을 챙겼다.그때, 여진구가 다가와 삼계탕이 담긴 보온 용기를 건넸다.“우리 엄마가 오후에 보내주신 거야. 저녁에 가서 먹어.”그러나 유진은 얼른 손을 저었다.“아니요, 선배 어머니가 주신 건데 제가 어떻게 받아요?”“뭐 이렇게 딱 잘라 거절해?”진구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농담이야. 두 개 보내주셨거든. 하나는 너 주려고 한 거야. 오후에 너무 바빠서 이제야 전해주네.”그 말에 유진은 그제야 받아들었다.“그럼, 이모께 꼭 감사하다고 전해줘요!”“무슨 새삼스럽게.”진구는 일할 때 끼는 얇은 금테 안경을 썼는데, 더 똑똑하고 멋있어 보였다.“집에 가서 따뜻하게 먹어.”“알겠어요!”유진은 손을 흔들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진구는 유진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라지는 걸 보며 가만히 미소 지었다.한편, 옆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진소혜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가방을 챙겨 다가왔다.“사장님, 오늘 차 안 가져왔어요. 혹시 태워다 주실 수 있을까요?”그러자 진구는 순간 표정이 굳었다.“회사 근처에 집 구한다고 하지 않았나요?”그 말에 소혜는 잠시 당황했지만, 빠르게 대답했다.“어머니가 오늘은 집으로 오라고 하셨어요!”진구의 태도는 이미 냉대하는 태도였다.“난 아직 볼 일이 있어서요. 오늘 택시비 회사에서 처리해 줄 테니까 그렇게 가요.”진구는 말을 끝내고 곧장 사무실로 돌아갔다.소혜는 주변을 지나가는 동료들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는 걸 보며 민망한 듯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유진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옆집 문이 열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