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소희를 담담하게 쳐다보며 웃는 듯 마는 듯 했다."그래요?"노부인은 성가네 아가씨의 사진을 구택에게 보여주었다."나는 이 사람이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경성대에서 졸업했는데 최근에 강성으로 돌아왔다. 소희 선생님도 이 아가씨가 예쁘다고 했어. 네가 직접 봐봐!"구택은 사진을 받고 한 번 보더니 고개를 들어 소희에게 물었다."소희 선생님은 이 여자가 나와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나요?"소희는 속으로 무청 긴장했지만 그저 태연하게 노부인의 말에 동의하며 말했다."아주 예쁘다고 생각하는걸요!"구택은 눈동자가 밤처럼 어두웠다. 그는 다른 의미를 띤 눈빛으로 소희를 쳐다보며 거볍게 웃었다."방금 대학을 졸업했으니 나보다 5~6살 정도 어릴 텐데요. 내가 나이 많다고 싫어하진 않을까요?"소희는 구택의 물음에 당황하며 억지로 차분하게 대답했다."마음만 맞으면 나이는 문제가 아니죠."구택은 계속 물었다."어떤 게 마음이 맞는 거죠?"옆에 있던 유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콧방귀를 뀌었다."둘째 삼촌, 할머니가 와이프 선택해 준 것에 대해 불만 있으면 그냥 솔직히 말해요. 왜 소희한테 화풀이를 하는 거예요?"소희는 감격에 겨운 눈빛으로 유림을 바라보았다.구택은 소희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며 담담하게 웃었다."소희 선생님이 좋다고 하시니 나도 당연히 좋다는 이유를 물어봐야 하지 않겠어? 게다가 소희 선생님도 성금희 씨와 나이가 비슷하니까 그녀의 의견을 물어봐야 성금희 씨와 어떻게 지내는지 알 거 아니야."노부인은 기뻐했다. "그럼 동의하는 거야?"구택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내가 동의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 사람이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요?""둘째 삼촌, 언제 이렇게 겸손해졌어요?"유림이 말했다.구택은 담담하게 웃었다."금방 배웠는데!"노부인은 웃으며 말했다."그럼 내가 성 씨네 집안 한 번 물어볼게. 그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너희들 한 번 만나게 해줄까?"구택이 말했다."내가 시간이 나면요. 요즘 회사에 일이
하인은 이미 밥을 차려놓았고 소희는 부득불 남아서 밥을 먹어야 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화제를 돌리는 틈을 타서 급히 화장실에 들어가서 숨을 길게 내쉬었다.따지고 보면 그녀는 구택의 법적인 아내였다. 그러니 임가네 식구들한테 들켜도 별일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노부인이 뭐라도 발견할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하필 구택은 계속 그녀를 암시하고 있었고 마치 다른 사람한테 들키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수도꼭지를 틀고 얼굴을 씻은 소희는 고개를 숙일 때 뒤쪽에서 문 소리가 나는 것을 들고 얼굴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고 거울 속의 사람을 보며 갑자기 멍해졌다.남자는 나른하게 나무 문에 기대어 그윽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소희는 인차 몸을 돌려 눈을 크게 뜨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는 겁이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이곳은 1층의 화장실이었고 노부인과 유림은 모두 밖에 있었다.구택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키가 훤칠한 그는 소희와 거의 몸이 닿았고 그녀가 할 수 없이 뒤로 물러나자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방금 그 물음에 소희 선생님은 아직 대답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어떻게 해야 마음이 맞는 거죠?"소희는 고개를 살짝 들고 얼굴에는 물방울이 가득 맺혔다. 마치 아침의 꽃잎이 이슬을 머금은 것처럼 맑고 투명했다.물로 씻은 듯한 눈동자는 맑고 깨끗했으며 또 약간의 긴장함과 분노를 띠고 있었다."응?" 남자는 몸을 굽혀 팔로 세면대를 받치고 그녀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사람을 압박하는 기세는 화장실 전체의 공기를 응고시켰다. 소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러지 마요. 유림은 내가 화장실에 온 거 알고 있어서 너무 오래 있을 수 없어요!"구택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촉촉한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내 질문에 대답하면 놓아줄게요!"소희의 새하얀 얼굴에 물방울이 굴러떨어지며 그녀의 가녀린 목덜미를 따라 내려갔다. 남자는 눈을 드리우며 눈빛에 갑자기 욕망이 스쳤다."임구택 씨……" 소희는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밥을 먹을 때 노부인은 가끔 소희에게 학교 수업에 관해서 물었고 소희는 내색하지 않고 화제를 유림한테로 돌리며 그녀더러 노부인과 얘기를 많이 나누게 했다.구택은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두 사람이 무심코 눈을 마주쳤을 때 그는 티 나지 않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소희는 눈빛을 홱 돌리며 표정은 침착했지만 속으로 무척 긴장했다.다행히 구택은 그녀를 난처하게 하지 않고 조용하게 식사만 했다. 하인이 디저트를 올리자 그는 자연스럽게 손으로 받으며 내색하지 않고 소희와 가장 가까운 곳에 두었다.식사가 거의 끝날 때, 구택은 비로소 입을 열고 담담하게 물었다."소희 선생님 이따 어디로 가시는 거죠? 나도 마침 나가야 하니 가는 길에 데려다 줄게요."소희는 고개를 들어 사양했다."아니에요, 나 혼자 택시 타고 돌아가면 돼요!"유림이 말했다."여기는 택시가 잘 안 잡히니까 우리 둘째 삼촌 보고 데려다 달라고 해. 어차피 그도 나가는 길이니까."구택은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어머니도 방금 소희 선생님을 잘 챙겨주라고 하셨으니, 사양하지 마세요!"소희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래요, 그럼 부탁할게요."밥을 먹고 소희는 노부인과 유림에 작별 인사를 했다. 노부인은 자상하게 웃으며 소희에게 말했다."시간 있으면 또 놀러 오고.""네, 할머님, 잘 먹고 가요!" 소희는 다시 한번 감사를 드렸다.구택은 문어귀에 서서 소희를 기다리다가 그녀가 할머님이라 부르는 것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속으로 무척 불쾌했다.두 사람이 차를 타고 임가네를 떠나자 구택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앞으로 우리 어머니 부를 때, 할머님이라고 부르지 말아 줄래요?"원래 그는 자신이 그녀보다 7살 많다는 것에 대해 이미 세대 차이를 느꼈는데 그녀가 그의 어머니를 할머님이라 부르니 그는 자신과 그녀의 나이차이가 점점 커지는 것만 같았다.소희는 웃음을 참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부르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할머님이 이렇게 부르라고 하셨어요!"
부두의 화물 하역은 모두 기계화되었지만 부근에는 여전히 일부 운반 회사가 화물 주인을 도와 귀중품을 운반하거나 화물을 지키는 것을 돕고 있었다.송진일이 고용한 사람이 바로 하역회사의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일 년 내내 부두에서 빈둥거리며 대부분 본업에 종사하지 않는 깡패들이었고 돈을 주면 무엇이든 했다.부두에 들어가기도 전에 멀리서 두 무리의 사람들이 대치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맞은편 사람들은 아마도 운반회사의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들은 웃통을 벗어 문신을 드러내고 손에 막대기를 들고 있었고 망명자의 흉악함과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는 기질을 드러냈다.이쪽의 사람들은 구택의 사람들인데 저마다 몸짓이 날렵하고 기질이 싸늘하고 포악했다.바닥에 서너 명이 누워 있는데 모두 운반회사의 사람들로 보였다.차가 멈추자 구택은 소희더러 차에서 기다리게 하고는 스스로 차에서 내렸다.명우와 명빈 두 사람은 구택을 보고 즉시 앞으로 다가가 일제히 입을 열었다."대표님!"구택이 앞으로 나아가자 잘생긴 얼굴은 그렇게 싸늘하진 못했지만 순간 대치하는 장면을 차갑고 긴장한 분위기로 만들었다. 그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누가 서인이지?"맞은편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앞으로 걸어왔다. 몸집이 크고 옷차림에 그렇게 신경 쓰지 않은 남자는 보기엔 호방하지만 눈빛은 날카로웠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납니다!"구택은 침착하게 그를 바라보았다."당신의 회사가 사라지게 하고 싶지 않으면 함부로 나서지 마!"서인은 청색 수염에 눈꼬리에는 흉터가 하나 있어 사람이 독하고 포악해 보였다."임 씨 그룹 대표님, 임구택, 얘기 많이 들었어요! 나는 당신의 강성에서의 능력과 지위를 잘 알고 있어요. 나도 그저 한 무리의 형제들을 데리고 밥 좀 얻어먹고 싶었을 뿐 당신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나 전에 송진일 그 사람이 나를 도와준 적이 있어서 나도 그 은혜를 갚아야 하거든요. 의리가 가장 중요하죠!"그는 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들을 힐끗 쳐다보았다."내가 먼저 임
서인은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고 눈빛도 무척 싸늘했다. 그는 잠시 소희를 쳐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임 대표, 오늘의 일은 정말 미안하네요, 양해 구할게요!"그리고 그는 자신의 사람들한테 말했다."이문 그들을 데리고 떠나!"옆에 있던 사람을 멈칫하더니 믿기지 않은 표정으로 서인에게 물었다."형님, 그게 무슨 말이에요?""돌아가라고, 14호 부두에 있는 사람들도 철수하라고 해!"서인은 이 한마디만 하고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소희를 차갑게 보더니 고개를 돌려 떠났다.다른 사람들은 영문을 몰랐다. 어떻게 바로 철수하란 말인가?그러나 그들은 서인의 말을 감히 거역하지 못했기에 얼른 바닥에 누운 다친 몇 사람을 들어 올려 서인을 따라갔다.구택의 사람들도 서로 쳐다보며 영문을 몰랐다. 방금까지만 해도 상대방은 목숨을 걸고 그들과 싸우려는 기세였는데, 어떻게 바로 떠나는 것일까?명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된 일이지?"명빈은 코웃음 쳤다. "허세를 부릴 뿐이야!"구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마디만 분부했다."다친 사람들 병원으로 보내. 부두에는 사람들 붙여서 지키게 하고. 송진일의 화물은 절대 뭍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해.""네!" 명빈은 즉시 대답했다.구택은 소희의 손을 잡았다."가요!"소희는 넋을 잃고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구택은 그녀의 손을 잡고 약간 힘을 주었다."왜 이렇게 차가워요?"소희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얼른 가요!"두 사람이 차에 타자 구택은 소희에게 안전벨트를 매주며 몸을 숙여 그녀의 얼굴을 만졌다."놀랐어요?"소희는 안전벨트를 꽉 잡고 입술을 오므리며 웃었다."아니에요, 가요!"구택은 말투가 다소 무거워졌다."앞으로 다시 이런 상황에 부딪히면 소희 씨 내 말 꼭 들어야 해요. 제멋대로 하면 안 돼요!"이번에 소희는 무척 얌전했다."넵!"차는 도심을 향해 달려가며 어정에 도착하자 구택은 소희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 소희는 몸을 돌려 그에게 말했다.
허름한 사무실 안에는 이리저리 누워서 한담을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안으로 더 가면 낡은 책상이 하나 있었는데 책상 뒤의 소파에는 한 남자가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소희를 보자 몇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방금 구택 곁에 있던 여자라는 것을 알아보고 그들은 냉소하며 입을 열었다."예쁜 아가씨가 여긴 어쩐 일이래?"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놀리기 시작했다."우리 형님이 마음에 들어서 몰래 따라온 거 아니야!""내가 보기엔 아마도 임구택이 우리 형님한테 사죄를 하려고 주동적으로 여자를 보낸 거 같아!""하하하하하!"소희는 차가운 얼굴로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한쪽 팔에 검은색 피안화를 문신한 남자가 갑자기 손을 뻗어 소희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꽤 예쁘게 생긴 아가씨군, 나랑 좀 놀아볼까?"소희는 인차 남자의 손목을 잡았다.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손은 바로 부러지며 이상한 각도로 늘어졌다."아!"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손목을 안고 뒤로 물러났다.다른 사람들은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전에 농담하던 태도를 접고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싸늘해지며 날카롭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며 그녀를 향해 에워쌌다."펑!"서인은 술병을 책상에 내리치며 차가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모두 꺼져!"모두들 멍해지더니 분노해하며 서인을 바라보았다."형님! 이 여자는 우리 형제를 다치게 했습니다!""가서 상처 치료해 주고, 다른 사람들도 꺼져!"서인은 어두운 얼굴로 소리쳤다.한 무리의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영문을 몰랐지만 더 이상 물어보지 못하고 줄지어 밖으로 나갔고 마지막으로 나간 사람은 문까지 닫아줬다.서인은 매서운 눈으로 소희를 쳐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여긴 어쩐 일이야?"소희가 물었다. "지금 이런 나날을 보내고 있는 거야?"서인은 코웃음치며 담배 한 대에 불을 붙였고 눈빛은 싸늘하고 차가웠다."당신과 무슨 상관이지? 당신이 뭔데? 당신이 무
한참이 지나서야 소희는 일어섰다. 그녀는 안색이 창백했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마치 생기발랄한 한여름에서 갑자기 황폐한 겨울로 접어든 것 같았다.서인은 의자에 앉아 바닥에 떨어진 담배를 주워 힘껏 한 모금 빨았다."가, 오늘 나랑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내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거나! 넌 임구택의 여자가 되었으니 부귀영화를 잘 즐겨. 오늘 너도 여기에 오지 말았어야 했어. 얼른 가!"소희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임구택 씨와 맞서지 말고 위험한 일도 하지 마. 살아있는 이상 인생을 잘 살라고!"서인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보며 코웃음쳤다."내가 임구택을 귀찮게 할까 봐? 너 그 사람 좋아하는 거야? 너도 신경 쓰는 사람이 있구나! 결국 우리는 네가 신경 쓸 만한 가치가 없는 거야!"소희는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정적으로 일 처리하지 마!""안심해!" 서인은 냉소했다."나는 우리가 안다고 말하지 않고 네가 임 부인이 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너도 이제 가봐!"소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그는 더 이상 듣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몇 걸음 걷다가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너희 가족은 줄곧 네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들을 속이는 건 말이 안 되니 시간이 있으면 한 번 돌아가 봐!"서인은 말을 하지 않았고 표정은 좀 더 어두워졌다.소희가 문을 나서자 후덥지근하고 어지러운 창고 안의 십여 명의 사람들은 모두 동시에 일어나 무섭게 그녀를 쳐다보았다.소희는 평소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수많은 매서운 눈빛의 주시하에 침착하게 이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나왔다.밝은 햇살이 갑자기 떨어지자 소희는 눈앞에서 멀지 않은 번화한 항구를 바라보며 한순간에 자신이 방금 두 개의 다른 세계를 경험한 것 같다고 느꼈다.그리고 자신은 어둠 속에서 빠져나와 여전히 열심히 살고 있었다!소희가 떠난 지 얼마 안 되자 진일이 서인을 찾아왔다. 문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화가 난 채로 다짜고짜 그에
진일은 납득이 안 됐다."이 부두에서 임구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오직 서 사장뿐인데 내가 어디 가서 또 다른 사람을 찾겠나? 당신은 이 건 하지 않아도 되지만 나한테 왜 그러는지 이유만 말해 줘.""이유 없어, 그냥 하기 싫어졌어." 서인은 담배를 피우며 푸른 수염이 자란 얼굴은 무척 오만했다.진일은 자신의 말이 도무지 먹히지 않자 참지 못하고 안색이 어두워졌다."모두 서 사장이 의리를 지킨다고 하는데, 내가 봤을 땐, 한다면 한다는 말은 모두 다 개뿔이구먼!"이문은 미간을 찌푸리며 호통쳤다."뭐라고요? 다시 한번 말해봐요!""입 닥쳐!" 서인은 이문을 꾸짖은 뒤 고개를 돌려 진일에게 말했다."난 틀림없이 이 건을 하지 않을 거야. 전에 당신한테 빚진 것도 우리는 떼먹지 않을 테니까 내 손을 베거나 아님 돈을 가지고 간다거나!"진일은 싸늘하게 웃었다."그래, 당신들 참 독하군! 호랑이도 평지에서는 개들에게 물린다지만, 내가 다시 내가 재기하면 당신들 절대로 가만 안 둬!"말이 끝나자 진일은 책상 위의 돈을 몽땅 챙긴 뒤 두 사람을 힐끗 보고는 분개해하며 떠났다.진일이 떠나자 이문은 의자를 잡아당겨 서인 맞은편에 앉고는 눈살을 찌푸렸다."형님, 우리 도대체 왜 송진일의 그 건을 하지 않는 겁니까? 설마 형님 정말 임구택을 무서워하는 건 아니겠죠?"서인은 포커 몇 장을 손에 들고 담배를 물고 고개를 들었다."내가 임구택을 무서워할 것 같아?"이문은 즉시 고개를 저으며 머리를 굴렸다."설마, 방금 온 그 소녀 때문입니까?"서인은 검지와 중지로 포커 한 장을 쥐고 밖으로 던졌다. 포커는 회전하며 날아가 바로 벽면에 꽂혔다. 그는 안색이 담담한 채로 계속 두 번째 포커를 던졌다.이문은 그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자신이 알아맞혔다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 소녀는 누구입니까?"서인은 그를 힐끗 쳐다보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함부로 알아보지 마! 형제들한테 내 말을 전해, 나중에 그녀를 보면 모두 피해 다니
서인은 안토니네 가족과 이야기를 나눈 지 채 30분도 되지 않아, 밖에서 누군가가 소리치는 소리를 들었다.“윤석경 씨, 잠깐 나와 보세요! 이 사람이 당신네 집 손님 맞나요?”서인은 순간 미간을 좁히며, 무언가를 예감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밖으로 향했다. 토니의 부모도 급히 그를 따라 나갔다. 밖에는 오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단정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머리는 곱슬머리로 말려 있었다. 여자는 토니네 가족을 보자마자, 곧장 손가락으로 한쪽에 서 있는 유진을 가리켰다.“이 사람이 당신네 손님 맞아요?”유진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제발 소리치지 마세요! 제가 돈 드린다고 했잖아요!”유진은 당장이라도 땅속에 숨고 싶은 심정이었고, 서인은 다가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죠?”박민란은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이 여자랑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지만, 내 난초를 뽑아서 토끼 먹이로 줬어요! 내 난초가 얼마나 비싼 줄 알아요?”“조금만 늦었어도 다 뽑혀 나갔을 거예요!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에요? 이건 엄연한 도둑질이라고요!”유진은 머리를 싸매고 싶었고, 작은 목소리로 서인에게 변명했다.“난초인 줄 몰랐어요. 그냥 잡초인 줄 알았어요.”유진은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부모님께 혼나는 아이처럼 위축되었다. 그러나 박민란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듯 쏘아붙였다.“변명하지 마요! 어쨌든 내 난초를 뽑은 건 사실이잖아요!”그때, 윤석경이 나서서 말했다.“우리 집에도 난초가 있으니까, 그걸로 대신 보상해 줄게요. 어린애한테 그렇게 큰소리칠 필요까지야 있나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요.”하지만 박민란은 완강했다.“안 돼요! 당신네 집 난초랑 내 난초는 품종이 달라요! 그러니 난 절대 못 받아요!”윤석경도 화가 났다.“똑같은 난초잖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박민란이 계속해서 억지를 부렸다.“내 난초는 특별히 돈 들여 키운 거예요. 이미 손님이 예약한 거라고요! 근데 이제 어쩌란 말이에
안토니는 이미 저들과 한 차례 몸싸움을 벌였는지, 얼굴에 상처가 있었다. 그는 부모님 앞을 가로막고 서서, 강제로 계약서에 서명시키려는 남자들과 격렬하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그때, 서인이 안으로 들어섰고,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란 눈으로 서인을 바라봤다. 서인은 그저 아무 말 없이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이윽고 한 손으로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며 차갑게 말했다.“안토니네 가족은 이사하지 않으니까, 당장 꺼져요!”그때, 상대편의 우두머리 격인 남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당신 누구야? 당신이 뭔데 결정해?”서인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지금부터 이 집안일은 내가 결정해.”임유진도 단호하게 나섰다.“당신들, 합법적인 철거 허가서라도 있어요? 없으면, 지금 이건 불법으로 민가에 침입한 거고, 타인의 재산을 침해하는 범죄예요! 신고하면 처벌받을 수 있다고요!”남자는 싸늘한 눈빛으로 유진을 노려보았다.“신고? 해보시지, 이 계집애가!”남자는 말을 끝맺지 못했는데, 서인의 차가운 눈빛이 번뜩이며 그를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했고,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이내 남자는 수치심에 휩싸여 분노를 터뜨렸고 뒤에 있던 부하에게 눈짓을 보냈다. 곧, 우락부락한 남자가 앞으로 나서더니, 주먹을 쥐고 서인을 향해 돌진했다.그러나 서인은 간단하게 공격을 막았다. 팔을 낚아채어 비틀어버린 후, 가슴팍을 발로 걷어찼다.쿵! 남자는 그대로 공중으로 튕겨 올라 바닥에 내팽개쳐졌다.“으악!”놀란 안주설과 토니네 부모님이 급히 뒤로 물러섰다. 토니는 같이 싸우려 했지만, 서인이 손을 들어 막았다.“넌 신경 쓰지 마.”서인의 태도는 한결같이 차분했지만, 움직임은 날카롭고 거칠었다. 몇 초 만에 남은 두 명까지 모두 쓰러졌다.우두머리는 바닥에 널브러진 부하들을 보며, 서인이 보통 상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대로 정면으로 붙었다가는 자기들이 더 크게 당할 것이 뻔했다.그는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다.“기
서인이 약속한 장소는 호텔 맞은편에 있는 찻집이었다. 두 사람이 몇 분을 기다리자, 상대가 도착했다.그는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였고, 짙은 남색의 운동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멀리서 서인을 발견한 남자는 곧바로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걸어오면서 팔을 벌렸고, 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이파이브를 한 뒤, 어깨를 가볍게 맞댔다가 서로를 끌어안았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 같았다.“이렇게 오래 못 봤는데, 네가 갑자기 연락할 줄이야. 아직도 믿기지 않네!”남자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그는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얼굴에는 감정이 서려 있었다.이에 서인은 담담하게 웃었다.“정말 오랜만이긴 하죠.”“예전에 너희 작전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남자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살아 있어서 다행이네.”서인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인은 남자를 데리고 자리로 돌아왔다.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남자는 놀란 듯 서인을 쳐다보았다.“여자친구야?”서인은 짧게 답했다.“아니요. 그냥 같이 온 친구예요. 임유진.”그는 이어서 남자를 소개했다.“이한우라고 해요.”유진은 그를 한 번 보더니 따라 불렀다.“한우 씨!”한우는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서인의 친구라면 나한테도 친구나 다름없죠. 편하게 있어요.”세 사람은 자리에 앉았고, 서인과 한우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유진은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다실에서 나온 말차 케이크와 재스민 차를 즐겼다.서인은 흥성에서 기반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한우는 지역에 오래 정착한 사업가로, 여러 방면에 인맥이 있었다.서인은 안토니네 가족을 돕기 위해 한우를 찾아온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한우는 별다른 고민도 없이 흔쾌히 말했다.“리조트 호텔 사장은 모르지만, 철거 보상 담당자는 잘 알지. 같이 술도 마셨던 사이라, 내
서인이 자신을 바라보자, 임유진은 재빨리 침대 옆 협탁에서 안대를 꺼내 들었다. 자신이 눈을 가릴 거라는 뜻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이미 씻었어.”서인은 무심하게 말한 뒤, 고개를 돌려 물었다.“불 꺼도 돼?”방 안에는 서인의 쪽에만 벽 등이 켜져 있었다. 이에 반쯤 몸을 돌린 채 유진을 바라자, 유진도 마찬가지로 그를 바라봤다. 둘의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 공간이 멈춘 듯한 정적이 흘렀다.그저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고작 오초였지만, 묘하게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유진의 눈빛은 마치 깊고 맑은 호수 같았다. 그 안에 잔잔한 물결이 퍼지는 듯했다.어둠 속에서도 유진의 눈빛이 한층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헐렁한 티셔츠의 목 부분이 흘러내려, 가느다란 어깨가 반쯤 드러났다. 유진의 피부는 눈이 부시게 하얗고 매끄러웠다. 마치 만지기라도 하면 부서질 듯한 촉감이 느껴질 것 같았다. 그러나 곧, 방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그 짧은 순간에 묘한 분위기도 함께 사라졌다. 유진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유진은 서인의 침대 너머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야외 수영장의 물이 조명이 반사되어 은은하게 출렁이고 있었다. 마치 유진의 들뜬 마음처럼, 물결이 잔잔하게 일렁였다. 그러나 곧, 자동으로 커튼이 내려졌다.그 작은 물결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서인이 일부러 그런 것임을 알고, 유진은 살짝 토라진 얼굴로 침대에 누웠다. 이윽고 이불을 단정하게 덮고 눈을 감았다.서인도 조용히 눈을 감았으나 방 안에는 은은한 향이 맴돌고 있었다. 샤워를 마친 유진의 상쾌한 바디워시 향이 공기 속에 가볍게 떠돌았다. 희미하지만, 너무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치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가슴 깊이 스며드는 듯했다.다음 날 아침, 서인은 눈을 뜨자마자 머리가 멍해졌다. 그러나 곧 모든 감각이 선명해지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이게 뭐지?’유진은 원래 잘 때 얌전한 모습이었으나 자고 나면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녀의 이불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침대 위에
유진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방으로 돌아가 휴대폰을 챙겼다. 왜냐하면 유진이 가져온 것은 오직 휴대전화뿐이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계단을 내려갔다. 어둑한 복도에서, 유진은 무의식적으로 서인의 손을 잡았다.그리고 이번에는 서인이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유진은 조금씩 용기를 내어 손가락을 더 깊이 엮었고, 결국 그의 손 전체를 단단히 쥐었다.서인의 손은 크고 뼈마디가 굵었으며, 손바닥에는 거칠지만 단단한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그러나 유진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촉감이 이상하게도 더 마음에 들었다.깊은 밤, 조용한 복도에서, 유진은 자기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쿵, 쿵. 긴장과 부끄러움, 그리고 묘한 설렘이 섞여 있었다.민박집을 떠난 뒤, 서인은 차를 몰아 유진과 함께 산을 내려가 도시로 향했다. 그는 자기 외투를 벗어 유진의 어깨 위에 걸쳤다. 어둠 속에서 서인의 날렵한 얼굴선이 더욱 차갑고 도도해 보였다.“잠깐 눈 붙여. 도착하면 깨울게.”하지만 깊은 밤 도로를 달리는 이 순간이, 유진에게는 너무나도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그리고 유진은 전혀 졸리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반짝이며 전방을 바라보며 서인과 대화를 나눴다.“그 쥐덫, 아무 소용도 없을 거예요. 쥐는 계속 나올 거라고요.”그곳의 쥐들은 너무 대담했다. 사람을 무서워하기는커녕, 창가에 올라와 그녀와 눈을 마주치기까지 했다.서인은 물었다.“그러면 왜 날 안 불렀어?”유진은 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입을 막고 있었거든요!”유진은 서인이 피곤할까 봐 일부러 참고 있었다. 하루 종일 운전했으니, 이미 녹초가 됐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침대 속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그냥 밤새도록 그렇게 버틸 생각이었다가 그 소리를 들었다. 바로 맞은편 방에서 들려오는 민망한 소리.그 순간, 유진은 차라리 쥐랑 함께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 그때, 서인이 문을 두드렸다. 그 순간이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유진은 본능적
“임유진!”서인의 목소리는 다급하고 거칠게 떨렸다. 그는 급히 옆방 문을 두드렸고, 문이 열리는 순간, 임유진이 그대로 서인의 품에 뛰어들었다.서인은 방 안을 빠르게 둘러봤으나 별다른 이상은 없는 듯했다. 그제야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 풀어지며 조용히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유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저, 저기 쥐가 있어요!”서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반쯤 설명하고 반쯤 달래듯 말했다.“이런 곳에서는 쥐가 나오는 게 당연해. 그냥 네 방을 지나간 거야. 널 물지는 않아. 오히려 네가 더 무서울걸?”하지만 유진은 서인의 품 안에서 겁에 질린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제야 서인은 유진의 모습을 제대로 보았다.커다란 티셔츠 한 장만 걸친 채, 하얀 다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창백할 정도로 희고 매끈한 피부가 시각을 자극했다.반면, 서인은 방금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있다가 나왔기에, 바지만 입고 상의는 벗은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 서인은 목이 바짝 타는 듯했고,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얼굴이 굳어버렸다.손을 뻗어 유진을 떼어내려 했지만, 유진은 겁에 질려 서인의 허리를 더 꼭 붙잡았다. 두 사람은 문 앞에서 그렇게 서 있었다.혹시라도 누가 지나갈까 걱정된 서인은 유진을 가볍게 안아 방 안으로 들어간 뒤, 문을 닫았다. 그러나 유진의 티셔츠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기에, 그녀의 부드러운 체온이 서인의 맨가슴에 고스란히 닿았다.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느낌이 들자, 서인은 서둘러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고 이불로 감싸주었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유진은 얼굴이 불타오르듯 붉어졌다.그녀는 이불을 꼭 움켜쥔 채 눈을 피했고, 서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안토니한테 가서 쥐 잡을 도구가 있는지 물어볼게.”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이자, 서인은 곧장 방을 나섰다. 유진은 그의 넓은 어깨와 탄탄한 허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길이 미묘하게 흔들렸다가, 황급히 창밖으로 시
안토니는 서인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부모님이 여기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모든 절차는 다 정식으로 등록된 거예요. 게다가 이 땅은 호텔 부지에 포함되지도 않고요.”“그런데도 그 사람들이 철거하라고 명령할 수 있어요? 보상금도 터무니없이 적고, 우리 부모님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라는 거죠?”“하지만 호텔 뒤에는 권력과 돈이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아무도 우리 편에 서지 않아요.”임유진은 분통이 터져 소리쳤다.“이건 완전히 강도질이잖아요! 소송이라도 걸어야 하죠!”토니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소용없어요.”“사실, 보상금이 충분하다면 철거를 고려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그 옆에서 안주설이 조용히 말하자, 토니는 즉시 그녀의 말을 끊었다.“얼마를 준다 해도 안 돼. 우리 고향 집도 이미 팔아버렸어. 부모님께 남은 건 이 민박집뿐이야. 여기가 없어지면 어디로 가란 말이야?”주설은 난처한 표정으로 웃으며 변명했다.“그냥 의견을 낸 것뿐이야.”서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상황은 알겠으니까 방법을 찾아볼게.”토니는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정말 어쩔 수 없어서 서인 형한테 전화한 거예요. 형이 강성에 있는 거 알지만, 흥성 일에는 개입하기 어려울 수도 있잖아요.”토니는 분노에 휩싸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서인에게 연락을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서인은 그날 바로 달려와 주었다.서인은 단호하게 말했다.“토니 형과 나는 형제나 다름없어요. 걔의 일은 내 일이나 마찬가지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해결할 테니까요.”토니의 부모는 연신 감사를 표했다.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밤 11시가 되었다. 토니는 2층에 서인과 유진을 위한 방 두 개를 준비해 주었다. 계단을 올라가며, 유진은 서인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나 아무것도 안 가져왔어요.”서인은 고개를 돌려 토니에게 물었다.“새 세면도구 있어? 갑자기 오느라 아무것도 못 챙겼어.”“당연하죠! 다른 건 몰라도 세면도구는 넉넉
유진은 뭔가 떠오른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생각하니까 정말 비싼 건 아니네요!”서인의 품에 안겼으니, 20만원이라도 아깝지 않았다. 서인은 본래 유진을 위로하려 했는데, 그녀의 표정을 보자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순간 서인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유진은 기분이 좋아진 듯 미소를 지었다.“이미 산 거니까, 그냥 먹어요. 버리긴 아깝잖아요!”그녀는 티슈로 사과를 닦아내고 서인에게 하나 건넸지만, 서인은 거절하며 고개를 저었다.“난 안 먹어.”“그럼 저 혼자 먹을게요!”유진은 사과를 입에 가져가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사과가 신선해서 아삭하게 씹히며 입안 가득 달콤한 과즙이 퍼졌다.이윽고 차 안에 오직 사과를 씹는 소리만 울렸다. 서인은 앞을 주시하며 운전을 계속했지만, 무심결에 목젖이 한 번 움찔거렸다. 유진은 연달아 몇 입을 베어 물다가 반쯤 먹은 사과를 들고 서인을 바라봤다.“정말 안 먹어요? 진짜 맛있어요!”2만원으로 이 정도 퀄리티라면 완전 대박이었다. 그러나 서인은 도로를 응시한 채 담담하게 말했다.“보통 과수원에서는 사람들이 몰래 따 먹는 걸 방지하려고 사과에 농약을 뿌려 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에 든 사과를 바라봤다가 곧 얼굴이 새파래졌다.“왜 이제야 말하는 거예요?”서인은 태연하게 대답했다.“방금 떠올랐어.”“어떡하죠? 나 중독되는 거 아니에요?”유진은 볼을 불룩하게 부풀리며 억울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내가 만약 중독돼서 장애라도 생기거나, 바보가 되면, 사장님이 평생 책임져야 해요!”서인은 웃음을 터뜨렸다.“그게 왜 내 탓이지?”“사장님이 산 사과잖아요!”당당한 유진의 태도에 서인은 말문이 막혔다. 물론, 사과에 농약 따위는 없었다. 결국 유진은 바보가 되지도, 장애가 생기지도 않았고, 심지어 배 아픈 일조차 없었다.두 사람이 안토니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10시였다. 토니네 민박집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주변에는 몇 개의 민박집이 듬
산길 위로 가끔 여행객들의 차가 지나갔다. 멀리 보이는 민박집의 불빛이 어둠 속에서도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이게 무슨 냄새지? 사과 향 같은데?”임유진은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기쁜 표정으로 돌아보며 말했다.“저기 사과나무가 있어요!”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만 가자. 이제 출발해야 해.”“딱 하나만 따면 돼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성큼성큼 사과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무에 열린 사과를 봤다. 달빛을 받아 가장 크고 탐스러운 사과를 골라 따냈다. 그리고 서인에게 줄 사과도 하나 더 따려 했다.사과를 막 손에 쥐려던 찰나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가 내 사과를 훔쳐 가지? 거기 서요!”어둠 속에서 손전등 불빛이 깜박였고,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멀리서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유진은 얼어붙었다. 사과나무가 야생인 줄 알았는데, 주인이 있는 나무였다니!유진은 처음에는 자리에 서서 주인을 기다려 설명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의 고함과 함께 거친 숨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개 한 마리가 보였다. 커다란 개가 사나운 기세로 유진을 향해 돌진했다.유진은 등골이 오싹해지며 온몸의 털이 곤두서, 본능적으로 뒤돌아 도망쳤다.“사장님!”멍! 멍멍멍! 사람 허리까지 올 법한 덩치 큰 검은 개가 빠르게 움직였다. 유진이 달아나는 것을 보자 더욱 거칠게 그녀를 향해 뛰어들었다. 유진은 손에 사과 두 개를 꼭 쥔 채, 있는 힘껏 서인을 향해 달렸다.서인도 상황을 보고 얼굴이 굳어졌고, 유진을 향해 달려갔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자, 유진은 순식간에 뛰어올라 그의 품에 안겼다. 유진은 겁에 질린 채 서인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 순간, 개가 가까이 다가왔고, 서인은 한쪽 다리를 들어 강하게 개를 걷어찼다. 50킬로그램은 나갈 듯한 큰 개가 힘껏 날아가 땅에 쾅 하고 떨어졌다.개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몇 번 뒤틀다가 겨우 일어났지만, 아까의 사나운 기세는 사라지고 멀찍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