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구택이 자리에서 일어난 후 다시 성연희를 바라보았다.“연희 씨, 화를 가라앉히고 소희와 이야기를 나눴으면 해요, 소희에겐 아무런 잘못도 없으니까. 나와 소희가 다시 합치게 되는 건 단지 시간 문제였어요. 난 한 번도 소희를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없었거든요, 포기하지도 않을 거고요.”말을 마친 후 임구택은 바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그리고 소희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성연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화내고 싶으면 나한테 화풀이를 해. 네 말이 맞아, 내가 마음이 약해졌어.”“너희 두 사람이 한마음 한 뜻이고, 내가 오히려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사람인 거잖아, 안 그래?”“연희야!”“잠깐!”성연희가 문득 무엇이 생각났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물었다.“임구택이 방금 옆집에 있을 거라고 했던 게 무슨 뜻이야?”“구택 씨가 내 옆집을 샀어, 지금 내 이웃인 거고. 참, 이 집도 구택 씨가 샀어.”소희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덤덤하게 대답했다.그러자 성연희가 미간을 찌푸리고 냉소를 드러냈다.“허! 그래서, 그것 때문에 감동했어?”소희가 성연희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그러고는 맑고 평온한 눈빛으로 성연희를 바라보며 말했다.“연희야, 너도 사랑을 누구보다 더 중히 여기는 사람이잖아. 너 전에 명성 씨와 헤어지게 되면 평생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했던 거, 기억나? 나도 그래.”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던 성연희는 소희의 말에 순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그러다 한참 후 숨을 깊게 한번 들이마시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하지만 난 네가 이렇게 쉽게 임구택과 화해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네가 너무 불쌍하다고!”“구택 씨가 나의 옆집으로 이사 왔다는 일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사실 구택 씨가 나를 위해 많은 일을 했어. 처음엔 나도 이미 헤어진 판에 다시는 돌아가지 말자고 다짐했어. 하지만 연희야, 난 나 자신을 속일 수가 없어. 구택 싸와 함께 있을 때마다 난 너무 행복해.”소희의 맑은 눈동자를 보며 성
“알았어, 그럼 다른 말은 더 이상 하지 않을 게. 다만 그 자식이 또 너에게 상처를 준다면 난 목숨 걸고 그 자식한테 복수할 거야.”성연희가 여전히 화난 말투로 말했다.그런데 이때, 소희의 휴대폰이 울렸다.임구택의 메시지였다.[내가 가서 연희 씨와 잘 얘기해 볼까?]“그 자식이야? 뭐라는데?”성연희가 소희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묻자 소희가 임구택이 보내온 메시지를 성연희에게도 보여 주었다.그리고 성연희가 보더니 바로 휴대폰을 앗아가 임구택에게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소희는 그쪽 말보다 내 말을 더 잘 들어요. 그쪽을 버리겠다는데요?”소희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연희야! 그런 장난을 치면 어떡해?”“왜, 내가 널 그 자식한테 줬는데, 장난도 못 쳐?”그런데 이때, 성연희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현관 문이 열렸고, 임구택이 성큼성큼 들어와서는 긴장한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았다.이에 소희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지었다.“연희가 농담한 거야.”임구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소희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그윽한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며 고개 숙여 키스했다.“엄마야!”임구택의 뜬금없는 동작에 성연희가 놀라서 바로 소파에서 일어섰다.“임구택 씨, 지금 일부러 나한테 시위를 하는 겁니까?”임구택이 다시 한번 소희의 입술에 소리를 내며 뽀뽀하고는 천천히 고개 돌려 성연희를 쳐다보았다.“소희에 대한 나의 결심을 봤죠? 나한테 불만이 있으면 화가 풀릴 때까지 실컷 욕하면서 화풀이를 해요, 소희를 가지고 나한테 장난치지 말고.”심한 집착이 섞여 있는 임구택의 눈빛에 성연희는 순간 할 말을 잃게 되었다. 그러다 한참 후에야 다시 임구택을 향해 입을 열었다.“그래요, 한 번만 더 믿고 소희를 그쪽한테 맡길 게요. 다만 또 소희를 괴롭히거나 소희한테 상처를 줬다간…….”말하고 있던 성연희는 갑자기 목이 메이더니 눈시울마저 붉어졌다.“난 절대 그쪽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걱정 마요, 난 연희 씨보다 더 소희가 상처
소희가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그랬으면 좋겠다.”“임구택과 다시 만나기로 결정한이상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마. 인생은 짧으니까 즐길 수 있을 때 즐겨. 즐거운 게 제일 중요한 거야.”성연희가 말하고는 고개를 들어 남은 술을 원샷 해버렸다. 그러고는 또 자신과 소희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즐길 수 있을 때 즐기자!’가 성연희의 인생 신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소희는 웃으며 술잔을 들어 성연희와 건배를 했다.반짝이는 불빛아래 이목구비가 더욱 뚜렷해진 성연희는 유난히 매혹적이었다.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잔잔한 음악에 따라 가볍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신과 소희의 술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그렇게 한 잔에 한 잔을 이어 마시다 보니 성연희의 손 옆에는 어느새 빈 술병 두 병이 놓여 있었고, 그제야 성연희의 정서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챈 소희는 급히 계속 술을 따르고 있는 성연희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눈썹을 올리고 물었다.“명성 씨와 무슨 일이 있었어?”이미 반쯤 취한 성연희가 듣더니 애교와 투정이 묻은 어투로 대답했다.“우리 오랜만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데, 그 사람 이야기는 하지 말자.”이에 소희가 성연희의 술잔을 빼앗아내고 정색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대체 무슨 일인데?”성연희는 등을 가죽 소파 등받이에 기대고 소희의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소희야, 명성 씨가 결혼에 대해 더는 언급하지 않아. 혹시 마음이 변한 거 아닐까?”소희가 순간 멍해졌다. 전에도 성연희는 노명성과 감정상의 문제가 생겼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소희는 여민과 함께 술자리에 참석한 노명성을 만났었고, 심지어 그때 노명성을 쫓아가느라 큰 오해도 생겼었다.‘그 후 이현이 은퇴하면서 여민도 연예계를 탈퇴했고, 연희가 노명성과 함께 프란스로 간다고 해서 두 사람 간의 사이가 많이 좋아진 줄 알았는데.’“명성 씨가 언급하지 않으면 네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 봐, 어떤 태도인지.”소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하지만 성연희
[어디야?]휴대폰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임구택의 물음에 소희가 술집 이름을 말해주었다.[당신과 연희 씨 둘 다 술 마셨어?]“난 괜찮은데, 연희가 많이 마셨어.”소희가 대답하면서 고개를 돌려 성연희 쪽을 한 번 쳐다보았다. 성연희와 김영이 오랜만에 만난 친형제 마냥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내가 지금 데리러 갈 테니까,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어. 남들이 와서 말을 걸어도 대꾸하지 말고.]‘하지만 연희가 곧 김영 씨와 의형제를 맺을 것 같은데?’임구택의 당부에 소희가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그렇게 전화를 끊은 후, 소희는 웨이터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부탁하고는 몸을 돌려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이때, 소희는 마침 멀지 않은 곳에서 소파 등받이에 엎드려 몰래 성연희와 김영을 찍고 있는 수상한 남자를 발견하게 되었다.반쯤 취한 성연희는 자신과 김영 사이의 거리가 애매할 정도로 가깝다는 걸 눈치채지도 못한 채 웃으며 김영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순간 얼굴색이 어두워진 소희는 바로 손에 든 물컵을 사진 찍고 있는 남자에게 던졌다.그러자 ‘퍽’하는 소리와 함께 물컵은 남자의 팔을 명중했고,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로 젖히는 바람에 손에 든 휴대폰도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하지만 남자는 팔의 통증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바로 일어나 바닥에 있는 휴대폰을 잡으려 했다.그런데 이때 소희가 신속히 몸을 움직여 남자 먼저 휴대폰을 주웠고, 바로 발을 들어 빼앗으려고 달려드는 남자를 세게 걷어찼다.뻥-묵직한 소리와 함께 소파에 부딪힌 남자는 아파서 일어서지도 못했다.그리고 그 소리에 술을 마시고 있던 손님들이 분분히 시선을 소희 쪽으로 돌렸다.소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휴대폰 앨범을 찾아냈다.앨범 속에는 성연희를 몰래 찍은 사진이 십여 장 넘게 있었다. 심지어 일부러 각도를 잡고 찍은 게 분명했다. 사진으로 봐서는 성연희와 김영이 서로 애매하게 기대어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소희가 듣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주위의 사람들을 한번 훑었다.“피해자가 비난을 받는 건 또 처음 겪어보네요. 오늘 내가 이 사람의 범행을 제때에 발견했으니 망정이지, 만약 발견하지 못했더라면요? 이 사람이 몰래 찍은 내 친구의 사진을 가지고 무엇을 할지 누가 알아요? 이 사람은 지금 내 친구의 초상권을 침해했습니다. 그리고 법적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으니 이렇게 용서를 빌고 있는 건데, 참 쉽게 여러분들의 가여워하는 대상이 되었네요?”방금 전까지만 해도 남자를 위해 불평을 토하던 몇 사람은 소희의 말에 순간 난처해져 더 이상 소리를 내지 못했다.“대체 뭘 찍었는데요? 저도 보여줘요.”이때, 옆에 있던 김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성연희의 손에서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그러고는 앨범을 뒤지기 시작하는데 무릎 꿇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일어나 김영의 손에서 휴대폰을 앗아내고는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주위의 사람들이 보더니 전부 어리둥절해졌다. 특히 방금 남자의 편을 들었던 몇 사람은 더욱 고개도 들지 못했다.그렇게 편을 들어줬는데 전혀 잘못을 뉘우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니.남자가 도망가게 가만히 지켜볼 리가 없었던 소희는 신속히 쫓아갔다.그리고 뒤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에 남자의 눈빛에 한줄기의 한기가 스치더니 바로 휴대폰을 창문밖으로 던졌다.술집은 6층에 자리 잡고 있어 휴대폰은 땅에 떨어지자마자 산산조각이 났고, 남자는 그제야 겁도 없는 웃음을 드러내며 고개를 돌렸다.“휴대폰이 망가지고 사진도 찾지 못하게 되었으니 경찰에 신고해도 소용없겠는데요?”“…….”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 소희는 바로 발을 들어 남자를 걷어찼다. 그러자 남자는 ‘퍽’하는 소리와 함께 벽에 부딪히면서 피를 토하고 말았다.순간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술집 사방에서 들려왔다.술이 반쯤 깬 성연희도 소란에 큰소리로 외치며 급히 달려왔다.“소희야!”소희는 바닥에 누워 있는 남자의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아서는 차갑게 그를 쳐다보았다.“네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러는지 이젠 중요하지
노명성은 성연희를 데리고 먼저 술집을 떠났고, 뒤따라 임구택과 함께 술집을 나가던 소희는 갑자기 무엇이 생각났는지 고개를 돌려 술집안을 둘러보았다.하지만 이상하게도 김영이 보이지 않았다.“왜 그래?”임구택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아니야, 가자,”그렇게 술집에서 나와 차에 오른 후 소희는 문득 임구택을 향해 물었다.“당신이 노명성을 불렀어?”“응. 명성 씨의 여자 친구가 술에 취했는데, 명성 씨를 부르지 않으면 누구를 불러?”농담이 섞인 어투로 대답하고 있는 임구택의 의도는 너무 뻔했다. 그러나 소희는 굳이 그걸 들춰내지 않고 걱정이 되어 다시 말을 이어갔다.“방금 그 사람 절대 술김에 충동적으로 연희를 몰래 찍은 게 아니야. 왠지 의도적인 것 같았어.”‘그의 휴대폰에는 다른 몰카 사진이 없었어. 그러니 상습범은 아니라는 거지. 설령 정말로 연희가 예뻐서 몰카한 거라고 해도 한 두 장만 찍으면 되는데, 굳이 열 몇 장이나 찍었어.’‘게다가 각도도 마침 오해할 수 있을 정도의 애매한 각도였고.’‘그러니 고의적인 게 분명해.’‘아니면 누가 시켰거나.’임구택이 듣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럼 방금 그 사람을 그렇게 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소용없을 거야. 그 사람이 휴대폰을 망가트렸잖아. 게다가 그 능청스러운 태도로 봐서는 범행을 승인하지 않을 게 분명한데, 경찰들은 더욱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거야.”“연희 씨가 그래 봬도 명성 씨의 곁을 그렇게 오랫동안 따라다녔는데, 쉽게 당할 사람은 아닐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응.”임구택의 위로에 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근심이 되는 건 여전했다.경원주택단지로 돌아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소희는 곧장 자기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임구택이 갑자기 소희의 손목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봐 봐, 누가 돌아왔는지.”임구택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맞은편 문에 붙은 스크린에서 지니가 나타났다. 그러고는 들뜬 어투로 소희에게 인사를 했다.“소희 님, 오랜만이에요!”소희가 보더니
임구택이 몸을 살짝 일으켜 세우고 소희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키스를 했다. 그러다 한참 후 잠겨 있는 목소리로 소희를 향해 말했다.“소희야, 사랑해.”소희가 듣더니 나지막한 소리로 임구택의 사랑 고백에 응했다. 부드러우면서 애교가 섞여 있는 목소리는 그야말로 매혹적이었다.이에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임구택은 물속에서 일어나 소희와 더욱 찐한 키스를 나눴다.……밤중에 임구택은 뭐가 그렇게 마음에 걸렸는지 여러 번이나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다 품속에 누워있는 소희를 보고서야 시름 놓인 사람 마냥 소희의 얼굴에 입술을 한번 맞추고는 다시 잠들었다.그런데 새벽녘이 되자 밖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유리창에 떨어지는 비소리에 깬 소희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날이 밝아지려면 아직 한참 남았으니까 좀 더 자. 내가 곁에 있잖아.”소희의 불안함을 눈치챘는지 임구택은 그녀의 미간을 어루만지며 낮은 소리로 달랬고, 그 소리에 소희는 곧 숨을 고르고 다시 깊은 잠에 들었다.하지만 그러는 소희와는 달리 임구택은 오히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바깥의 빗소리를 들으며 품에 안은 여인을 보고 있으니 임구택은 오랜만에 안정감을 느끼게 되었다.‘내일이 영원히 오지 않고, 비도 멈추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이 순간도 영원히 이대로 멈추겠는데.’그렇게 날이 거의 밝아질 무렵 피곤함에 눈조차도 뜰 수 없었던 소희는 임구택의 품에 머리를 묻힌 채 웅얼거리며 입을 열었다.“조깅하러 갈 거야?”임구택이 소희의 얼굴에 가볍게 입술을 한번 맞추고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늘은 비가 와서 못 갈 것 같아. 조금만 더 자.”소희가 듣더니 로또에 담청 된 사람 마냥 기뻐하며 다시 잠들었다.그러다 실컷 자고 깨어났을 땐 시간은 이미 8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고, 날씨가 음침한 게 집안 전체도 덩달아 침침했다.달칵-이때 마침 방문이 열리더니 임구택이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들고 들어와서는 잔을 침대 머리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몸
‘역시 기대를 품는 게 아니었어.’흰색 티셔츠에 검은색 트레이닝 팬츠 차림을 한 임구택이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착잡한 표정으로 소희를 쳐다보았다.그러자 소희가 다시 유난히 맑은 눈동자로 임구택을 바라보며 물었다.“대체 어느 거 먹을 거야? 나 전에 미나한테서 면을 맛있게 끓이는 팁을 배웠다고!”“당신이 먼저 먹고 싶은 걸 골라, 그리고 남은 걸 내가 먹을 게.”임구택은 소희를 한 번만 더 믿어 보기로 했다.이에 소희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마저 가서 일 봐. 면이 다 되면 부를 게.”“물에 데지 않도록 조심하고.”“알았어, 내가 뭐 어린애도 아니고! 어서 가서 일 봐!”소희가 자신만의 팁을 알려줄 마음이 없는 것 같아 임구택은 결국 주방을 떠났다.그러다 10분 정도 지나자 소희가 조용히 안방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임구택이 영상회의를 하고 있는지 살피는 듯했다.임구택이 보더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면이 다 됐어?”“응. 이제 먹어도 돼!”임구택이 앞으로 다가가 소희의 똥머리를 한번 누르고는 웃으며 말했다.“나의 요구는 엄청 간단해, 달걀프라이가 타지만 않으면 돼.”소희가 바로 임구택의 손을 밀어내고는 대답했다.“오늘은 수란이라 탈 리가 없거든.”임구택이 듣더니 아주 흡족한 표정을 드러냈다. 심지어 약간의 기대까지 더해져 소희의 손을 잡고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식탁 위에는 이미 면 두 그릇이 놓여 있었다.“두 가지 면을 섞어서 끓였어, 그러면 당신이 두 가지를 다 맛볼 수 있잖아.”“…….”소희의 참신한 아이디어에 임구택이 입꼬리를 올리고 제일 진심이 담겼다고 생각하는 웃음을 드러냈다.“역시 자기. 진짜 똑똑해.”“먹고나서 칭찬해.”소희가 삶은 면은 유난히 풍성했다. 계란 프라이, 햄, 야채…….보기에도 확실히 괜찮고.“내가 말했지, 연습만 충분히 하면 요리 실력이 반드시 늘 거라고?”소희가 여전히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한마디 덧붙이고는 면을 먹기 시작했다.임구택도 소희가 이번에
서인은 안토니네 가족과 이야기를 나눈 지 채 30분도 되지 않아, 밖에서 누군가가 소리치는 소리를 들었다.“윤석경 씨, 잠깐 나와 보세요! 이 사람이 당신네 집 손님 맞나요?”서인은 순간 미간을 좁히며, 무언가를 예감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밖으로 향했다. 토니의 부모도 급히 그를 따라 나갔다. 밖에는 오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단정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머리는 곱슬머리로 말려 있었다. 여자는 토니네 가족을 보자마자, 곧장 손가락으로 한쪽에 서 있는 유진을 가리켰다.“이 사람이 당신네 손님 맞아요?”유진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제발 소리치지 마세요! 제가 돈 드린다고 했잖아요!”유진은 당장이라도 땅속에 숨고 싶은 심정이었고, 서인은 다가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죠?”박민란은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이 여자랑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지만, 내 난초를 뽑아서 토끼 먹이로 줬어요! 내 난초가 얼마나 비싼 줄 알아요?”“조금만 늦었어도 다 뽑혀 나갔을 거예요!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에요? 이건 엄연한 도둑질이라고요!”유진은 머리를 싸매고 싶었고, 작은 목소리로 서인에게 변명했다.“난초인 줄 몰랐어요. 그냥 잡초인 줄 알았어요.”유진은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부모님께 혼나는 아이처럼 위축되었다. 그러나 박민란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듯 쏘아붙였다.“변명하지 마요! 어쨌든 내 난초를 뽑은 건 사실이잖아요!”그때, 윤석경이 나서서 말했다.“우리 집에도 난초가 있으니까, 그걸로 대신 보상해 줄게요. 어린애한테 그렇게 큰소리칠 필요까지야 있나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요.”하지만 박민란은 완강했다.“안 돼요! 당신네 집 난초랑 내 난초는 품종이 달라요! 그러니 난 절대 못 받아요!”윤석경도 화가 났다.“똑같은 난초잖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박민란이 계속해서 억지를 부렸다.“내 난초는 특별히 돈 들여 키운 거예요. 이미 손님이 예약한 거라고요! 근데 이제 어쩌란 말이에
안토니는 이미 저들과 한 차례 몸싸움을 벌였는지, 얼굴에 상처가 있었다. 그는 부모님 앞을 가로막고 서서, 강제로 계약서에 서명시키려는 남자들과 격렬하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그때, 서인이 안으로 들어섰고,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란 눈으로 서인을 바라봤다. 서인은 그저 아무 말 없이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이윽고 한 손으로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며 차갑게 말했다.“안토니네 가족은 이사하지 않으니까, 당장 꺼져요!”그때, 상대편의 우두머리 격인 남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당신 누구야? 당신이 뭔데 결정해?”서인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지금부터 이 집안일은 내가 결정해.”임유진도 단호하게 나섰다.“당신들, 합법적인 철거 허가서라도 있어요? 없으면, 지금 이건 불법으로 민가에 침입한 거고, 타인의 재산을 침해하는 범죄예요! 신고하면 처벌받을 수 있다고요!”남자는 싸늘한 눈빛으로 유진을 노려보았다.“신고? 해보시지, 이 계집애가!”남자는 말을 끝맺지 못했는데, 서인의 차가운 눈빛이 번뜩이며 그를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했고,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이내 남자는 수치심에 휩싸여 분노를 터뜨렸고 뒤에 있던 부하에게 눈짓을 보냈다. 곧, 우락부락한 남자가 앞으로 나서더니, 주먹을 쥐고 서인을 향해 돌진했다.그러나 서인은 간단하게 공격을 막았다. 팔을 낚아채어 비틀어버린 후, 가슴팍을 발로 걷어찼다.쿵! 남자는 그대로 공중으로 튕겨 올라 바닥에 내팽개쳐졌다.“으악!”놀란 안주설과 토니네 부모님이 급히 뒤로 물러섰다. 토니는 같이 싸우려 했지만, 서인이 손을 들어 막았다.“넌 신경 쓰지 마.”서인의 태도는 한결같이 차분했지만, 움직임은 날카롭고 거칠었다. 몇 초 만에 남은 두 명까지 모두 쓰러졌다.우두머리는 바닥에 널브러진 부하들을 보며, 서인이 보통 상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대로 정면으로 붙었다가는 자기들이 더 크게 당할 것이 뻔했다.그는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다.“기
서인이 약속한 장소는 호텔 맞은편에 있는 찻집이었다. 두 사람이 몇 분을 기다리자, 상대가 도착했다.그는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였고, 짙은 남색의 운동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멀리서 서인을 발견한 남자는 곧바로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걸어오면서 팔을 벌렸고, 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이파이브를 한 뒤, 어깨를 가볍게 맞댔다가 서로를 끌어안았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 같았다.“이렇게 오래 못 봤는데, 네가 갑자기 연락할 줄이야. 아직도 믿기지 않네!”남자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그는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얼굴에는 감정이 서려 있었다.이에 서인은 담담하게 웃었다.“정말 오랜만이긴 하죠.”“예전에 너희 작전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남자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살아 있어서 다행이네.”서인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인은 남자를 데리고 자리로 돌아왔다.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남자는 놀란 듯 서인을 쳐다보았다.“여자친구야?”서인은 짧게 답했다.“아니요. 그냥 같이 온 친구예요. 임유진.”그는 이어서 남자를 소개했다.“이한우라고 해요.”유진은 그를 한 번 보더니 따라 불렀다.“한우 씨!”한우는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서인의 친구라면 나한테도 친구나 다름없죠. 편하게 있어요.”세 사람은 자리에 앉았고, 서인과 한우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유진은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다실에서 나온 말차 케이크와 재스민 차를 즐겼다.서인은 흥성에서 기반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한우는 지역에 오래 정착한 사업가로, 여러 방면에 인맥이 있었다.서인은 안토니네 가족을 돕기 위해 한우를 찾아온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한우는 별다른 고민도 없이 흔쾌히 말했다.“리조트 호텔 사장은 모르지만, 철거 보상 담당자는 잘 알지. 같이 술도 마셨던 사이라, 내
서인이 자신을 바라보자, 임유진은 재빨리 침대 옆 협탁에서 안대를 꺼내 들었다. 자신이 눈을 가릴 거라는 뜻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이미 씻었어.”서인은 무심하게 말한 뒤, 고개를 돌려 물었다.“불 꺼도 돼?”방 안에는 서인의 쪽에만 벽 등이 켜져 있었다. 이에 반쯤 몸을 돌린 채 유진을 바라자, 유진도 마찬가지로 그를 바라봤다. 둘의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 공간이 멈춘 듯한 정적이 흘렀다.그저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고작 오초였지만, 묘하게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유진의 눈빛은 마치 깊고 맑은 호수 같았다. 그 안에 잔잔한 물결이 퍼지는 듯했다.어둠 속에서도 유진의 눈빛이 한층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헐렁한 티셔츠의 목 부분이 흘러내려, 가느다란 어깨가 반쯤 드러났다. 유진의 피부는 눈이 부시게 하얗고 매끄러웠다. 마치 만지기라도 하면 부서질 듯한 촉감이 느껴질 것 같았다. 그러나 곧, 방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그 짧은 순간에 묘한 분위기도 함께 사라졌다. 유진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유진은 서인의 침대 너머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야외 수영장의 물이 조명이 반사되어 은은하게 출렁이고 있었다. 마치 유진의 들뜬 마음처럼, 물결이 잔잔하게 일렁였다. 그러나 곧, 자동으로 커튼이 내려졌다.그 작은 물결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서인이 일부러 그런 것임을 알고, 유진은 살짝 토라진 얼굴로 침대에 누웠다. 이윽고 이불을 단정하게 덮고 눈을 감았다.서인도 조용히 눈을 감았으나 방 안에는 은은한 향이 맴돌고 있었다. 샤워를 마친 유진의 상쾌한 바디워시 향이 공기 속에 가볍게 떠돌았다. 희미하지만, 너무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치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가슴 깊이 스며드는 듯했다.다음 날 아침, 서인은 눈을 뜨자마자 머리가 멍해졌다. 그러나 곧 모든 감각이 선명해지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이게 뭐지?’유진은 원래 잘 때 얌전한 모습이었으나 자고 나면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녀의 이불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침대 위에
유진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방으로 돌아가 휴대폰을 챙겼다. 왜냐하면 유진이 가져온 것은 오직 휴대전화뿐이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계단을 내려갔다. 어둑한 복도에서, 유진은 무의식적으로 서인의 손을 잡았다.그리고 이번에는 서인이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유진은 조금씩 용기를 내어 손가락을 더 깊이 엮었고, 결국 그의 손 전체를 단단히 쥐었다.서인의 손은 크고 뼈마디가 굵었으며, 손바닥에는 거칠지만 단단한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그러나 유진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촉감이 이상하게도 더 마음에 들었다.깊은 밤, 조용한 복도에서, 유진은 자기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쿵, 쿵. 긴장과 부끄러움, 그리고 묘한 설렘이 섞여 있었다.민박집을 떠난 뒤, 서인은 차를 몰아 유진과 함께 산을 내려가 도시로 향했다. 그는 자기 외투를 벗어 유진의 어깨 위에 걸쳤다. 어둠 속에서 서인의 날렵한 얼굴선이 더욱 차갑고 도도해 보였다.“잠깐 눈 붙여. 도착하면 깨울게.”하지만 깊은 밤 도로를 달리는 이 순간이, 유진에게는 너무나도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그리고 유진은 전혀 졸리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반짝이며 전방을 바라보며 서인과 대화를 나눴다.“그 쥐덫, 아무 소용도 없을 거예요. 쥐는 계속 나올 거라고요.”그곳의 쥐들은 너무 대담했다. 사람을 무서워하기는커녕, 창가에 올라와 그녀와 눈을 마주치기까지 했다.서인은 물었다.“그러면 왜 날 안 불렀어?”유진은 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입을 막고 있었거든요!”유진은 서인이 피곤할까 봐 일부러 참고 있었다. 하루 종일 운전했으니, 이미 녹초가 됐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침대 속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그냥 밤새도록 그렇게 버틸 생각이었다가 그 소리를 들었다. 바로 맞은편 방에서 들려오는 민망한 소리.그 순간, 유진은 차라리 쥐랑 함께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 그때, 서인이 문을 두드렸다. 그 순간이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유진은 본능적
“임유진!”서인의 목소리는 다급하고 거칠게 떨렸다. 그는 급히 옆방 문을 두드렸고, 문이 열리는 순간, 임유진이 그대로 서인의 품에 뛰어들었다.서인은 방 안을 빠르게 둘러봤으나 별다른 이상은 없는 듯했다. 그제야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 풀어지며 조용히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유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저, 저기 쥐가 있어요!”서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반쯤 설명하고 반쯤 달래듯 말했다.“이런 곳에서는 쥐가 나오는 게 당연해. 그냥 네 방을 지나간 거야. 널 물지는 않아. 오히려 네가 더 무서울걸?”하지만 유진은 서인의 품 안에서 겁에 질린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제야 서인은 유진의 모습을 제대로 보았다.커다란 티셔츠 한 장만 걸친 채, 하얀 다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창백할 정도로 희고 매끈한 피부가 시각을 자극했다.반면, 서인은 방금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있다가 나왔기에, 바지만 입고 상의는 벗은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 서인은 목이 바짝 타는 듯했고,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얼굴이 굳어버렸다.손을 뻗어 유진을 떼어내려 했지만, 유진은 겁에 질려 서인의 허리를 더 꼭 붙잡았다. 두 사람은 문 앞에서 그렇게 서 있었다.혹시라도 누가 지나갈까 걱정된 서인은 유진을 가볍게 안아 방 안으로 들어간 뒤, 문을 닫았다. 그러나 유진의 티셔츠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기에, 그녀의 부드러운 체온이 서인의 맨가슴에 고스란히 닿았다.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느낌이 들자, 서인은 서둘러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고 이불로 감싸주었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유진은 얼굴이 불타오르듯 붉어졌다.그녀는 이불을 꼭 움켜쥔 채 눈을 피했고, 서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안토니한테 가서 쥐 잡을 도구가 있는지 물어볼게.”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이자, 서인은 곧장 방을 나섰다. 유진은 그의 넓은 어깨와 탄탄한 허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길이 미묘하게 흔들렸다가, 황급히 창밖으로 시
안토니는 서인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부모님이 여기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모든 절차는 다 정식으로 등록된 거예요. 게다가 이 땅은 호텔 부지에 포함되지도 않고요.”“그런데도 그 사람들이 철거하라고 명령할 수 있어요? 보상금도 터무니없이 적고, 우리 부모님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라는 거죠?”“하지만 호텔 뒤에는 권력과 돈이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아무도 우리 편에 서지 않아요.”임유진은 분통이 터져 소리쳤다.“이건 완전히 강도질이잖아요! 소송이라도 걸어야 하죠!”토니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소용없어요.”“사실, 보상금이 충분하다면 철거를 고려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그 옆에서 안주설이 조용히 말하자, 토니는 즉시 그녀의 말을 끊었다.“얼마를 준다 해도 안 돼. 우리 고향 집도 이미 팔아버렸어. 부모님께 남은 건 이 민박집뿐이야. 여기가 없어지면 어디로 가란 말이야?”주설은 난처한 표정으로 웃으며 변명했다.“그냥 의견을 낸 것뿐이야.”서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상황은 알겠으니까 방법을 찾아볼게.”토니는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정말 어쩔 수 없어서 서인 형한테 전화한 거예요. 형이 강성에 있는 거 알지만, 흥성 일에는 개입하기 어려울 수도 있잖아요.”토니는 분노에 휩싸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서인에게 연락을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서인은 그날 바로 달려와 주었다.서인은 단호하게 말했다.“토니 형과 나는 형제나 다름없어요. 걔의 일은 내 일이나 마찬가지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해결할 테니까요.”토니의 부모는 연신 감사를 표했다.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밤 11시가 되었다. 토니는 2층에 서인과 유진을 위한 방 두 개를 준비해 주었다. 계단을 올라가며, 유진은 서인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나 아무것도 안 가져왔어요.”서인은 고개를 돌려 토니에게 물었다.“새 세면도구 있어? 갑자기 오느라 아무것도 못 챙겼어.”“당연하죠! 다른 건 몰라도 세면도구는 넉넉
유진은 뭔가 떠오른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생각하니까 정말 비싼 건 아니네요!”서인의 품에 안겼으니, 20만원이라도 아깝지 않았다. 서인은 본래 유진을 위로하려 했는데, 그녀의 표정을 보자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순간 서인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유진은 기분이 좋아진 듯 미소를 지었다.“이미 산 거니까, 그냥 먹어요. 버리긴 아깝잖아요!”그녀는 티슈로 사과를 닦아내고 서인에게 하나 건넸지만, 서인은 거절하며 고개를 저었다.“난 안 먹어.”“그럼 저 혼자 먹을게요!”유진은 사과를 입에 가져가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사과가 신선해서 아삭하게 씹히며 입안 가득 달콤한 과즙이 퍼졌다.이윽고 차 안에 오직 사과를 씹는 소리만 울렸다. 서인은 앞을 주시하며 운전을 계속했지만, 무심결에 목젖이 한 번 움찔거렸다. 유진은 연달아 몇 입을 베어 물다가 반쯤 먹은 사과를 들고 서인을 바라봤다.“정말 안 먹어요? 진짜 맛있어요!”2만원으로 이 정도 퀄리티라면 완전 대박이었다. 그러나 서인은 도로를 응시한 채 담담하게 말했다.“보통 과수원에서는 사람들이 몰래 따 먹는 걸 방지하려고 사과에 농약을 뿌려 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에 든 사과를 바라봤다가 곧 얼굴이 새파래졌다.“왜 이제야 말하는 거예요?”서인은 태연하게 대답했다.“방금 떠올랐어.”“어떡하죠? 나 중독되는 거 아니에요?”유진은 볼을 불룩하게 부풀리며 억울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내가 만약 중독돼서 장애라도 생기거나, 바보가 되면, 사장님이 평생 책임져야 해요!”서인은 웃음을 터뜨렸다.“그게 왜 내 탓이지?”“사장님이 산 사과잖아요!”당당한 유진의 태도에 서인은 말문이 막혔다. 물론, 사과에 농약 따위는 없었다. 결국 유진은 바보가 되지도, 장애가 생기지도 않았고, 심지어 배 아픈 일조차 없었다.두 사람이 안토니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10시였다. 토니네 민박집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주변에는 몇 개의 민박집이 듬
산길 위로 가끔 여행객들의 차가 지나갔다. 멀리 보이는 민박집의 불빛이 어둠 속에서도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이게 무슨 냄새지? 사과 향 같은데?”임유진은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기쁜 표정으로 돌아보며 말했다.“저기 사과나무가 있어요!”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만 가자. 이제 출발해야 해.”“딱 하나만 따면 돼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성큼성큼 사과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무에 열린 사과를 봤다. 달빛을 받아 가장 크고 탐스러운 사과를 골라 따냈다. 그리고 서인에게 줄 사과도 하나 더 따려 했다.사과를 막 손에 쥐려던 찰나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가 내 사과를 훔쳐 가지? 거기 서요!”어둠 속에서 손전등 불빛이 깜박였고,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멀리서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유진은 얼어붙었다. 사과나무가 야생인 줄 알았는데, 주인이 있는 나무였다니!유진은 처음에는 자리에 서서 주인을 기다려 설명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의 고함과 함께 거친 숨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개 한 마리가 보였다. 커다란 개가 사나운 기세로 유진을 향해 돌진했다.유진은 등골이 오싹해지며 온몸의 털이 곤두서, 본능적으로 뒤돌아 도망쳤다.“사장님!”멍! 멍멍멍! 사람 허리까지 올 법한 덩치 큰 검은 개가 빠르게 움직였다. 유진이 달아나는 것을 보자 더욱 거칠게 그녀를 향해 뛰어들었다. 유진은 손에 사과 두 개를 꼭 쥔 채, 있는 힘껏 서인을 향해 달렸다.서인도 상황을 보고 얼굴이 굳어졌고, 유진을 향해 달려갔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자, 유진은 순식간에 뛰어올라 그의 품에 안겼다. 유진은 겁에 질린 채 서인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 순간, 개가 가까이 다가왔고, 서인은 한쪽 다리를 들어 강하게 개를 걷어찼다. 50킬로그램은 나갈 듯한 큰 개가 힘껏 날아가 땅에 쾅 하고 떨어졌다.개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몇 번 뒤틀다가 겨우 일어났지만, 아까의 사나운 기세는 사라지고 멀찍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