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는 머뭇거리며 말했다.“하지만 남자 친구가 좋아하지 않아요. 피임약은 부작용도 있고.”소희는 임구택이 자신에게 준 약을 떠올리며 말했다.“내가 먹는 약이 있긴 한데 부작용도 없다니까 한번 먹어볼래요?”“정말요? 어디 브랜드인데요?”미나는 감격스럽다는 듯 물었다.“나도 잘 몰라요. 집에 가서 사진 찍어서 보내 줄게요.”“좋아요.”미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부작용이 없다니, 너무 좋은데요?”스태프들이 몰려오자 일을 하기 시작했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소희는 임구택이 준 약통을 찾아 사진을 찍어 미나에게 보냈다. [어 저 이거 본 적 있어요! 고마워요, 소희 씨!][괜찮아요.]소희는 한 가지 일이 마음에 걸렸다. 저녁에 임구택과 밥을 먹을 때도 얘기하지 않았다. 이틀이 지나고 소희가 일하고 있는 도중에 미나가 달려오더니 막대사탕 하나를 소희에게 건넸다.소희는 막대사탕을 받으며 물었다.“왜 이렇게 좋아해요?”탁자 위에 엎드려 방긋 웃으며 말하는 미나였다.“생리가 왔어요.”“어머, 잘 됐네!”미나는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이렇게 임신하는 거 두려워할 바엔 평소에 피임 잘해요.”“꼭 할게요.”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금세 어두워졌다.“사실 임신이 두려운 건 제가 아니라 남자친구예요. 그래서 계속 저한테 압력을 넣는데 그러고 보니 절 그다지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왜 그렇게 생각해요?”“만약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임신하는 걸 두려워해야 할 게 아니라 임신하기를 바라고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미나는 삐진 어투로 말을 하자 소희가 달랬다.“아마 결혼하지 않아서 그런가 보죠.”“아무 상관없어요. 사귄 지 2년이 지났고 임신하고 결혼하기 딱 좋잖아요.”미나는 속상해하며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그 사람은 절 사랑하지 않거나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사랑하지 않겠죠.”막대사탕이 입에서 사르르 녹자 새콤달콤한 맛이 입안을 맴돌았다.“참 소희 씨가 추천해 준 약 있잖아요. 제가 여러 약국 다녀보며 물었는데 없더라
책상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울렸다. 하영임을 알자 소희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하영 씨.”“아직도 현장인가요?”“네.”“당신같이 글로벌한 유명 디자이너가 그런 곳에 있는 거, 재능 낭비 아닌가요? 진석에게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봐야겠네요.”“여기 끝나면 작업실로 돌아갈게요. 그리고 전 어디에 있든지 하영 씨한테 디자인 설계도 늦게 주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말고요.”“제가 왜 소희 씨한테 전화했는지 눈치챘나 봐요.”“이번 가을 디자인 다 나왔으니까 이메일로 보내드릴게요.”“좋아요! 아 참, 강솔씨 돌아왔죠?” “네, 근데 잠깐은 작업실로 돌아가지 않겠다 하더라고요. 예능 프로그램의 예술 감독으로 발탁돼서 한동안 바쁠 겁니다.”“알겠어요. 강솔씨 돌아오면 한 번 모이시죠.”“그래요!”소희는 통화를 끝낸 후 자신이 GK에 보낼 가을 패션 디자인 설계도를 하영에게 보냈다. 오후에는 임구택이 마중을 나왔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소희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어디로 가는 거야?”“너 좋아하는 거 먹으러 가.”붉은 노을이 그의 얼굴을 비추자 눈동자는 더욱 빛이 났다. 소희는 익숙한 거리를 보이자 웃음이 절로 났고 임구택은 방고거리의 길가에 차를 멈추더니 소희를 데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에 도착했을 때, 날이 막 어두워졌고 안에는 여전히 강성대학을 다니는 대학생으로 가득 찼다. 두 사람은 빈자리를 찾아 앉았고 사장님의 눈에 처음으로 띈 사람은 임구택이었고 반가워하며 그들에게 다가왔다.“또 왔어?”그녀는 말을 마치고서야 그녀를 등지고 있는 소희를 보았고, 더욱 놀라워했다.“둘이 함께 오니 보기 좋네.”소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임구택도 웃으며 입을 열었다.“먹던 대로 주세요.”“오케이!”사장님은 친절하게 대답하고 주방으로 갔다. 가게의 등불이 켜지자 알록달록한 장식용 등의 그림자가 소희의 얼굴에 비쳤다. 소희는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국수 안 좋아하지 않나?”“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뭐야, 내가 늙었다는 거야?”“아마도?”임구택이 진지하게 묻는 모습에 소희가 웃음을 꾹 참으며 대답했다.그리고 그 대답에 임구택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캠퍼스 커플들을 살펴보았다.확실히 그와 다르게 생기발랄한 모습이었다.순간, 임구택의 얼굴색은 더욱 어두워졌다.“그럼 당신도 내가 늙었다고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니겠지?”“그럴 리가. 비록 당신이 저 아이들보다는 늙었지만 멋있잖아.”웃음기가 가득 찬 소희의 눈빛에 화가 난 임구택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그윽하게 소희를 바라보며 물었다.“정말 내가 늙었다고 생각해?”“아니! 농담이야.”소희가 듣더니 바로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에 임구택이 미소를 드러내며 말했다.“아무리 농담이라고 해도 대가를 치러야 해.”“주문하신 국수 나왔습니다!”그런데 이때, 마침 주인 아주머니가 국수를 들고 와서는 웃으며 말했고, 소희가 보더니 바로 화제를 돌렸다.“일단 국수부터 먹자.”국수의 맛은 예전 그대로였다.소희는 조용히 국수를 먹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임구택을 바라보았다. 마침 임구택도 소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를 쳐다보고 있는 두 사람의 눈에는 모두 잃었던 보물을 다시 찾아낸 후의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오랜 세월이 지난 후 다시 함께 추억 속의 장소로 올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안도감.국수를 다 먹고 두 사람은 함께 시끌벅적한 방고 거리를 걸었다. 날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졌고, 방고 거리 전체가 어느새 밝고 오색찬란한 불빛에 휩싸여 있었다.임구택이 소희의 손을 잡고 붐비는 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막대사탕 하나를 꺼내 소희에게 건네주었다.“뭐야, 언제 샀어?”“당신 데리러 가는 길에.”2년 전에도 임구택은 매번 소희와 방고 거리를 올 때마다 사탕을 미리 준비해 소희에게 주곤 했었다.소희가 웃으며 사탕 종이를 까고 사탕을 입에 넣었다.그리고 그러는 소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임구택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어정으로 돌아가 볼래?”소희가 듣더니 순간 발길을 멈
성연희가 순간 동작을 멈추었다. 그러다 한참 고민하더니 결국 몸을 돌려 거실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소파에 앉아 늠름한 표정으로 임구택을 쳐다보며 물었다.“말씀해 보시죠, 어떻게 내가 없는 틈을 타서 소희를 꼬셨는지?”덩달아 맞은편 소파에 앉은 임구택이 침착하고 여유롭게 대답했다.“소희는 내 집사람입니다.”성연희가 듣더니 바로 비웃음을 터뜨렸다.“집사람? 소희와 이혼할 생각이었던 거 아니었어요? 질렸다면서요?”“그건 오해였습니다.”“아니요! 그건 오해가 아니라 그쪽이 애초부터 소희를 믿지 않았던 거죠!”“앞으로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정말이에요?”되묻고 있는 성연희의 목소리에는 한기가 섞여 있었다.“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또 장은서, 이은서가 나타나 소희가 다른 목적을 품고 그쪽한테 접근한 거라고 하면, 또 소희를 버릴 건 아니고요?”“절대 버리지 않습니다.”임구택의 눈빛은 확고했다.하지만 성연희는 오히려 화를 내며 소리쳤다.“남자들은 항상 그런 듣기 좋은 말로 여자들을 속죠. 그리고 소희만 바보같이 그쪽이 한 듣기 좋은 말에 넘어가고!”성연희가 말하다 갑자기 고개를 돌려 소희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여전히 노여움이 가득 찬 표정으로 소희를 질책했다.“너 전에 나한테 뭐라고 약속했는지 잊었어? 다시는 임구택한테 돌아가지 않을 거라며! 다시는 임구택을 사랑하지 않을 거라며! 그런데 저 자식이 듣기 좋은 말로 몇 번 달랬다고 바로 쫄래쫄래 돌아간 거야? 그런 거냐고!”옆에서 듣고 있던 임구택의 안색이 순간 가라앉았다.“연희 씨, 지난 2년 동안 연희 씨가 줄곧 소희를 챙겨줬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나한테 불만이 많은 것도 당연한 거고. 나를 욕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욕하세요, 달갑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나한테만 화를 내요, 소희한테 뭐라 하지 말고.”“허! 이제 와서 마음이 아픈 거예요? 소희가 전에 상처투성이가 되어 하마터면 죽을 뻔했을 때 그쪽은 어디에 있었죠? 소희가 눈이 멀어 앞이
임구택이 자리에서 일어난 후 다시 성연희를 바라보았다.“연희 씨, 화를 가라앉히고 소희와 이야기를 나눴으면 해요, 소희에겐 아무런 잘못도 없으니까. 나와 소희가 다시 합치게 되는 건 단지 시간 문제였어요. 난 한 번도 소희를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없었거든요, 포기하지도 않을 거고요.”말을 마친 후 임구택은 바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그리고 소희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성연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화내고 싶으면 나한테 화풀이를 해. 네 말이 맞아, 내가 마음이 약해졌어.”“너희 두 사람이 한마음 한 뜻이고, 내가 오히려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사람인 거잖아, 안 그래?”“연희야!”“잠깐!”성연희가 문득 무엇이 생각났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물었다.“임구택이 방금 옆집에 있을 거라고 했던 게 무슨 뜻이야?”“구택 씨가 내 옆집을 샀어, 지금 내 이웃인 거고. 참, 이 집도 구택 씨가 샀어.”소희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덤덤하게 대답했다.그러자 성연희가 미간을 찌푸리고 냉소를 드러냈다.“허! 그래서, 그것 때문에 감동했어?”소희가 성연희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그러고는 맑고 평온한 눈빛으로 성연희를 바라보며 말했다.“연희야, 너도 사랑을 누구보다 더 중히 여기는 사람이잖아. 너 전에 명성 씨와 헤어지게 되면 평생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했던 거, 기억나? 나도 그래.”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던 성연희는 소희의 말에 순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그러다 한참 후 숨을 깊게 한번 들이마시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하지만 난 네가 이렇게 쉽게 임구택과 화해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네가 너무 불쌍하다고!”“구택 씨가 나의 옆집으로 이사 왔다는 일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사실 구택 씨가 나를 위해 많은 일을 했어. 처음엔 나도 이미 헤어진 판에 다시는 돌아가지 말자고 다짐했어. 하지만 연희야, 난 나 자신을 속일 수가 없어. 구택 싸와 함께 있을 때마다 난 너무 행복해.”소희의 맑은 눈동자를 보며 성
“알았어, 그럼 다른 말은 더 이상 하지 않을 게. 다만 그 자식이 또 너에게 상처를 준다면 난 목숨 걸고 그 자식한테 복수할 거야.”성연희가 여전히 화난 말투로 말했다.그런데 이때, 소희의 휴대폰이 울렸다.임구택의 메시지였다.[내가 가서 연희 씨와 잘 얘기해 볼까?]“그 자식이야? 뭐라는데?”성연희가 소희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묻자 소희가 임구택이 보내온 메시지를 성연희에게도 보여 주었다.그리고 성연희가 보더니 바로 휴대폰을 앗아가 임구택에게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소희는 그쪽 말보다 내 말을 더 잘 들어요. 그쪽을 버리겠다는데요?”소희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연희야! 그런 장난을 치면 어떡해?”“왜, 내가 널 그 자식한테 줬는데, 장난도 못 쳐?”그런데 이때, 성연희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현관 문이 열렸고, 임구택이 성큼성큼 들어와서는 긴장한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았다.이에 소희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지었다.“연희가 농담한 거야.”임구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소희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그윽한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며 고개 숙여 키스했다.“엄마야!”임구택의 뜬금없는 동작에 성연희가 놀라서 바로 소파에서 일어섰다.“임구택 씨, 지금 일부러 나한테 시위를 하는 겁니까?”임구택이 다시 한번 소희의 입술에 소리를 내며 뽀뽀하고는 천천히 고개 돌려 성연희를 쳐다보았다.“소희에 대한 나의 결심을 봤죠? 나한테 불만이 있으면 화가 풀릴 때까지 실컷 욕하면서 화풀이를 해요, 소희를 가지고 나한테 장난치지 말고.”심한 집착이 섞여 있는 임구택의 눈빛에 성연희는 순간 할 말을 잃게 되었다. 그러다 한참 후에야 다시 임구택을 향해 입을 열었다.“그래요, 한 번만 더 믿고 소희를 그쪽한테 맡길 게요. 다만 또 소희를 괴롭히거나 소희한테 상처를 줬다간…….”말하고 있던 성연희는 갑자기 목이 메이더니 눈시울마저 붉어졌다.“난 절대 그쪽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걱정 마요, 난 연희 씨보다 더 소희가 상처
소희가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그랬으면 좋겠다.”“임구택과 다시 만나기로 결정한이상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마. 인생은 짧으니까 즐길 수 있을 때 즐겨. 즐거운 게 제일 중요한 거야.”성연희가 말하고는 고개를 들어 남은 술을 원샷 해버렸다. 그러고는 또 자신과 소희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즐길 수 있을 때 즐기자!’가 성연희의 인생 신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소희는 웃으며 술잔을 들어 성연희와 건배를 했다.반짝이는 불빛아래 이목구비가 더욱 뚜렷해진 성연희는 유난히 매혹적이었다.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잔잔한 음악에 따라 가볍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신과 소희의 술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그렇게 한 잔에 한 잔을 이어 마시다 보니 성연희의 손 옆에는 어느새 빈 술병 두 병이 놓여 있었고, 그제야 성연희의 정서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챈 소희는 급히 계속 술을 따르고 있는 성연희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눈썹을 올리고 물었다.“명성 씨와 무슨 일이 있었어?”이미 반쯤 취한 성연희가 듣더니 애교와 투정이 묻은 어투로 대답했다.“우리 오랜만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데, 그 사람 이야기는 하지 말자.”이에 소희가 성연희의 술잔을 빼앗아내고 정색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대체 무슨 일인데?”성연희는 등을 가죽 소파 등받이에 기대고 소희의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소희야, 명성 씨가 결혼에 대해 더는 언급하지 않아. 혹시 마음이 변한 거 아닐까?”소희가 순간 멍해졌다. 전에도 성연희는 노명성과 감정상의 문제가 생겼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소희는 여민과 함께 술자리에 참석한 노명성을 만났었고, 심지어 그때 노명성을 쫓아가느라 큰 오해도 생겼었다.‘그 후 이현이 은퇴하면서 여민도 연예계를 탈퇴했고, 연희가 노명성과 함께 프란스로 간다고 해서 두 사람 간의 사이가 많이 좋아진 줄 알았는데.’“명성 씨가 언급하지 않으면 네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 봐, 어떤 태도인지.”소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하지만 성연희
[어디야?]휴대폰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임구택의 물음에 소희가 술집 이름을 말해주었다.[당신과 연희 씨 둘 다 술 마셨어?]“난 괜찮은데, 연희가 많이 마셨어.”소희가 대답하면서 고개를 돌려 성연희 쪽을 한 번 쳐다보았다. 성연희와 김영이 오랜만에 만난 친형제 마냥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내가 지금 데리러 갈 테니까,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어. 남들이 와서 말을 걸어도 대꾸하지 말고.]‘하지만 연희가 곧 김영 씨와 의형제를 맺을 것 같은데?’임구택의 당부에 소희가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그렇게 전화를 끊은 후, 소희는 웨이터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부탁하고는 몸을 돌려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이때, 소희는 마침 멀지 않은 곳에서 소파 등받이에 엎드려 몰래 성연희와 김영을 찍고 있는 수상한 남자를 발견하게 되었다.반쯤 취한 성연희는 자신과 김영 사이의 거리가 애매할 정도로 가깝다는 걸 눈치채지도 못한 채 웃으며 김영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순간 얼굴색이 어두워진 소희는 바로 손에 든 물컵을 사진 찍고 있는 남자에게 던졌다.그러자 ‘퍽’하는 소리와 함께 물컵은 남자의 팔을 명중했고,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로 젖히는 바람에 손에 든 휴대폰도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하지만 남자는 팔의 통증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바로 일어나 바닥에 있는 휴대폰을 잡으려 했다.그런데 이때 소희가 신속히 몸을 움직여 남자 먼저 휴대폰을 주웠고, 바로 발을 들어 빼앗으려고 달려드는 남자를 세게 걷어찼다.뻥-묵직한 소리와 함께 소파에 부딪힌 남자는 아파서 일어서지도 못했다.그리고 그 소리에 술을 마시고 있던 손님들이 분분히 시선을 소희 쪽으로 돌렸다.소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휴대폰 앨범을 찾아냈다.앨범 속에는 성연희를 몰래 찍은 사진이 십여 장 넘게 있었다. 심지어 일부러 각도를 잡고 찍은 게 분명했다. 사진으로 봐서는 성연희와 김영이 서로 애매하게 기대어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강시언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최근에 내가 너의 양부모와 관련된 단서를 따라갔고, 너를 납치했던 사람을 찾아냈어.”“대략 1년 전에 체포되어 지금 감옥에 있어. 내가 사람을 보내 잘 돌봐주게 했지.”아심은 눈빛이 살짝 차가워지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시언은 말을 이었다.“그리고 널 샀던 양부모도 지금 형편이 좋지 않아. 아들은 방탕한 삶을 살고, 일을 하지도 않으면서 여자 친구랑 함께 부모를 착취하고 있지.”“돈을 요구하며 부모를 때리고 욕하는 게 다반사야. 그래서 그런 상황이라면 내가 따로 손을 쓸 필요도 없었어.”아심은 담담히 말했다.“나는 그들에게 이미 마음을 비웠어요. 어차피 친부모도 아니었으니까요. 나를 사들였다가 다시 팔아버릴 수도 있는 사람들이죠.”“감정도 없으니 당연히 원망도 없어요.”“원망은 내가 해!”시언의 목소리는 차갑고 무거웠다.“그 사람들이 너를 때리고 욕했던 걸 떠올리면, 지금 받는 벌이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껴져.”아심의 마음은 순간 간질거렸다. 마치 개미가 기어오르는 듯한, 따뜻하면서도 저릿한 감각이 가슴 끝까지 퍼졌다. 그녀는 눈가가 살짝 물들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 사람들이 나를 팔았기에 내가 당신을 만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정말로 그들을 원망하지 않아요.”시언은 팔을 들어 아심의 어깨를 감싸며 눈을 마주쳤다. 시언의 깊고 투명한 눈동자는 점점 더 차갑고도 또렷해졌다.“그날 도경수 할아버지가 네 몸에 있는 태어나는 반점을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을 때, 내가 대답하지 않았잖아. 네 생각엔 뭐라고 답해야 할까?”시언은 끝음을 살짝 끌며, 자기 목소리에 특유의 저음과 자극적인 울림을 더했다. 빗소리에 묻힌 그의 말은 그녀의 마음을 강렬히 두드렸다.이에 아심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있는 그대로 대답하세요. 근데, 그럴 용기 있어요?”“내가 무서워서 못 한다고 생각해?”시언은 낮고 짧게 대꾸했다. 그는 긴 손가락으로 아심의 정교한 턱을 잡아들며,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오븐 속 닭 날개는 이미 다 구워졌고, 끓던 국도 식어버렸다. 밖에서는 다시 비가 내리는지, 부슬부슬한 빗소리가 고요한 분위기를 더욱 차분하게 만들고 있었다.강시언은 몸을 약간 일으켜 그녀의 옷을 입혀주며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뒷정리할 테니, 너는 가서 샤워해. 씻고 나오면 바로 식사할 수 있을 거야.”강아심은 나른하게 눈을 가늘게 뜨며 움직이지 않고 대꾸했다.“내가 샤워 끝낼 때쯤 당신이 음식을 다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해요?”“딱 두 가지 요리랑 국 하나야. 충분하겠어?”시언이 묻자, 아심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점심에 외할아버지가 보내주신 음식이 많이 남아서, 그거 데워서 먹으면 돼요. 음식은 낭비하면 안 되니까.”“그래.”시언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아심을 조리대에서 내려주었지만, 아심은 그의 단단한 허리를 감싸 안고 움직이지 않았다.붉게 물든 눈가로,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 못 걸을 것 같아요.”이에 시언은 낮게 웃으며 아심을 다시 들어 올려 주방에서 주방의 욕실로 데려갔다....두 사람이 저녁 식사를 마쳤을 때는 이미 밤 10시가 되었다. 시언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아심은 발코니에 앉아 있었다.얇은 잠옷 차림의 그녀는 헝클어진 긴 머리를 어깨에 흘러내린 채 앉아 있었다. 밖에서 스며드는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아심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흩날렸고, 하얗고 가녀린 어깨가 머리카락 사이로 드문드문 드러났다.아심은 비를 바라보며 무언가 깊이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어두운 조명이 그녀의 부드럽고 가냘픈 라인을 더 강조했고, 그녀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쓸쓸하고 고독한 느낌을 주었다.시언은 그녀에게 다가가 같은 자세로 바닥에 앉았다.“야근은 좋은 핑계겠지만, 도도희 아주머니랑 도경수 할아버지가 모를 리 없지. 너, 집에 가기 싫은 거잖아.”아심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시언의 깊고 투명한 눈빛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이에 아심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그 말이 맞아요.
영상 속의 셰프는 유창하게 자국어를 구사하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신은 미스터 강의 여자 친구인가요? 참고로 지금 종료해도 보수는 환불되지 않아요.]아심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알고 있어요.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좋아요. 그러면 이만!]셰프의 말을 끝으로 아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영상을 종료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강시언에게 물었다.“닭 날개를 굽고 싶으신 거예요?”“너 할 줄 알아?”“이미 양념까지 다 해두셨으니, 오븐에 넣고 온도와 시간을 맞추면 끝이예요.”시언은 접시에 담아둔 닭 날개를 그녀에게 건네자, 아심은 돌아서서 접시를 오븐에 넣으며 물었다.“어떻게 갑자기 요리를 배우고 싶으셨던 거예요?”시언은 다른 재료를 고르며 무심하게 대답했다.“별거 아니야. 네가 집에 돌아왔을 때 따뜻한 밥상을 느껴보라고.”그 말에 아심은 순간 멈칫하며 오븐을 멍하니 바라봤다. 몇 초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타이머를 설정했다. 아심은 돌아서며 미소를 지었다.“제가 뭐 도와줄까요?”시언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네가 내가 부른 셰프를 쫓아냈잖아. 네가 안 도우면 생닭을 먹겠다는 뜻인가?”아심은 고개를 숙이며 작게 웃었다. 그녀는 소매를 걷으며 도마 위에 놓인 토마토를 보며 물었다.“이건 뭐 만들려고요?”“약간의 토마토를 곁들인 소고기볶음.”아심은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아직 걷는 법도 배우지 않았는데 벌써 달리려는 거예요?”시언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지?”아심은 대답 대신 말했다.“그 요리는 오래 걸려요. 배가 고프니까 그냥 토마토는 생으로 먹어요.”시언은 물었다.“생으로? 그냥 먹으라고?”“상쾌하고 맛있어요.”아심은 토마토를 반으로 자른 뒤 한 조각을 손으로 집어 시언의 입가에 내밀며 말했다.“한번 먹어보고 생토마토 맛이 어떤지 확인해 보세요.”아심은 고개를 살짝 치켜들며, 눈가가 붉어진 채 가늘게 올라간 눈꼬리와 흐르는 듯한 시선으로 무의식적인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겼다.시언은
아심은 연희가 쏟아내는 말들을 들으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기절하지 마, 그러다 네 남편이 걱정하실라.”[아심아, 내가 도경수 할아버지를 몇 년 동안 알아 왔는지 너 알아?]연희는 감탄하며 말했다.[우리가 친구였는데, 이제 넌 도경수 할아버지의 친손녀가 됐잖아!]아심은 연희의 목소리에서 그녀의 놀라움을 느낄 수 있었다.“사실 나도 정말 많이 놀랐어.”[그렇지만 정말 축하할 일이야!]연희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이건 정말 깜짝 놀랄 만 하면서도 기쁜 소식이야!]연희는 평소 양재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재아가 도경수의 손녀가 아니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기뻤다. 그런데, 아심이 도경수의 손녀라는 사실을 들었을 땐 말 그대로 두 배의 기쁨이었다.어젯밤, 연희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노명성을 끌어안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바람에 명성은 그녀가 임신이라도 한 줄 알고 당황했던 적도 있었다.“고마워.”아심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연희야, 나도 네가 내 친구라는 게 너무 행복해.”[이제는 친구뿐만 아니라 가족이기도 하잖아!]연희는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이번 주말에 도경수 할아버지를 찾아뵈러 갈게. 축하도 드릴 겸.]“언제든지 환영해.”두 사람은 한참 더 이야기를 나눈 뒤에야 전화를 끊었다....오후에 정아현이 다시 업무 보고를 하러 왔을 때는 이전과 달리 눈에 띄게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녀는 내내 긴장된 표정을 지으며 결국 입을 열었다.“사장님, 정말 죄송해요. 저, 나쁜 의도는 없었어요. 그저 사장님이 걱정돼서 그랬던 건데, 앞으로는 다시는 미스터 강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을게요!”아심은 담담히 말했다.“그래요. 오늘은 일찍 퇴근해요. 남자 친구 생겼다면서요? 데이트하러 가요.”이에 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감사드려요, 사장님. 다시는 실수하지 않을게요!”...아심이 퇴근할 때쯤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회사를 나설 땐 직원들마저 모두 퇴근해 그녀 혼자 남아 있었다.점심으로 받은 음
식사 중에 강시언이 물었다.“저녁에 또 약속 있어?”아심은 반쯤 내려간 눈길로 잠시 깜빡이며, 약간 죄책감을 느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요즘 정말 바빠요.”“응.” 시언은 짧게 대답한 뒤 더는 묻지 않았다.식사가 끝나고 두 사람은 함께 집을 나섰지만 각자 차를 타고 반대 방향으로 떠났다. 아심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고, 그녀는 정말 바빴다.정아현이 업무 보고를 하러 들어왔을 때, 아현은 무심코 아심에게 말했다.“내일 토요일인데, 권수영 여사님께서 댁에서 생일 파티를 연대요. 성대한 파티를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꽤 많은 사람을 초대한 것 같아요.”“지승현 사장님도 아마 어머니 생일을 위해 집에 남아 있을 거고요. 어쩌면 권 여사님께서 그 자리에서 며느리를 정하려고 할지도 몰라요.”아현은 슬쩍 아심의 반응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내일 생일 파티에 누가 참석하는지 제가 알아볼까요?”아심은 손에 들고 있던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약간 피곤한 듯 말했다.“아현 씨,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와 지승현은 이미 끝났어요. 앞으로도 절대 다시 이어질 일은 없으니까, 지씨 집안 일은 신경 쓰지 마요.”“그리고 지승현 앞에서 내 얘기를 일부러 꺼내지도 마세요.”아현은 눈을 굴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사장님, 그런데 미스터 강이 돌아와서 사장님을 찾으신 건 맞죠?”아심은 고개를 들며 물었다.“그걸 어떻게 알아요?”아현은 머쓱해하며 대답했다.“그날 저녁, 그분이 회사로 오시는 걸 봤거든요.”아심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사장님, 그분과 다시 만나신 건가요?”아현의 질문에 아심은 고개를 숙이고 다시 보고서를 읽으며 담담히 말했다.“아니야.”이에 아현은 가볍게 코웃음 치며 말했다.“안 만나는 게 맞아요. 사장님, 절대 마음 약해지지 마세요. 그 사람이 갑자기 돌아와선 찾아오고, 또 떠나서는 연락도 없는 게 말이 돼요?”“사장님을 뭐로 보고 그러는 건지, 정말 어이가 없네요.”아심의 얼굴은 갑자기
“잠이 안 온다면, 다른 걸 해도 괜찮아.”강시언이 말하자, 강아심은 잠시 침묵하더니 아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왜 여기 남아 있는 거예요? 대단한 진언님께서 굳이 소파에서 자는 걸 선택하시다니, 대체 왜요?”시언은 차가운 눈을 반쯤 내리며 담담히 대답했다.“비가 와서 못 가.”아심은 문득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아 그래서 그런 거구나.”시언은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넌 뭐라고 생각했는데?”“저는...”아심은 손을 들어 시언의 셔츠 앞자락을 잡으며, 긴 속눈썹을 떨었다. 그의 어깨를 스치며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남으신 이유가, 내일 아침 제가 만든 샌드위치를 드시고 싶어서인 줄 알았어요.”“그 샌드위치, 꽤 맛있더라고.”“그러면 내일도 만들어 드릴게요.”“좋아.”아심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저 이제 피곤해요. 잘게요. 방해하지 마세요.”“자.”시언은 아심을 품 안으로 더 끌어당겼다.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퍼붓고 있었다. 마치 은하수가 쏟아지는 듯했고, 천둥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방 안에서는 두 사람이 꼭 껴안고 평온한 잠에 들었다.아심은 곧 잠들었지만, 시언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원래 잠들기 전부터 그녀에게 자극받은 상태였고, 지금 아심의 부드럽고 따뜻한 몸이 품 안에 있으니 더더욱 잠이 오지 않았다.얇은 실크 슬립 드레스 하나만 입은 아심은 곡선이 우아하고 매혹적이며, 피부는 부드럽고 은은한 향기가 퍼졌다.그랬기에 시언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제야 약간의 졸음이 밀려왔다. 그러나 막 잠들려는 순간, 아심이 시언의 품 안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그리고 아심의 손이 시언의 풀어진 셔츠 단추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시언은 즉시 정신이 번쩍 들며 낮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강아심!”하지만 아심은 깊이 잠든 상태라 대답이 없었다.시언은 깊은숨을 내쉬며 아심의 손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아심은 무의식적으로 몸부
몇 번째인지 모를 천둥소리가 울리고 난 후, 아심은 시언의 어깨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몸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시언의 눈동자는 어둠보다 더 깊고 짙어졌다. 그는 고개를 숙여 아심의 옆얼굴에 뜨거운 입맞춤을 남겼다.아심은 허리띠를 푸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의 눈이 한 번 깜빡였고, 그러더니 시언의 품에서 일어나 뒤돌아보며 나른하고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심은 천천히 자신의 방으로 걸어가며 문을 닫고 잠갔다.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린 후, 아심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는 문에 기대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웃은 뒤에야 셔츠를 정리하며 욕실로 향했다.거실.시언은 굳게 닫힌 방의 문을 바라보았다. 항상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그의 얼굴에 희미한 냉소와 무력감이 떠올랐다.시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가 손을 씻었다. 그가 다시 거실로 돌아오자, 그의 휴대전화가 진동하며 메시지가 도착했다.시언은 화면을 확인한 뒤, 희미한 조명 속에서 그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아심이 또다시 시언에게 계좌이체를 한 것이었다.그러자 시언은 화가 나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메시지를 보내며 물었다.[그게 그렇게 만족스러웠어?]잠시 후, 아심이 답장을 보냈다.[부디 돈을 받아줘요. 거래가 끝났으니, 다음번에도 잘 협력할 수 있겠죠?]아심은 막 샤워를 끝내고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밖에서는 빗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가를 살짝 올렸다. 그러나 시언은 더 이상 답장을 보내오지 않았다.아심은 그가 화가 난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문을 열고 직접 확인할 용기는 없었다.비가 점점 더 거세졌다. 아심은 침대 머리맡에 앉아 한동안 기획서를 읽고, 도도희와 통화를 한 뒤, 피곤함에 이끌려 잠이 들었다.천둥소리는 계속 이어졌지만, 아심은 매우 깊이 잠들었다.한밤중.어느덧 새벽 두 시가 되었다.천둥소리에 잠이 깬 아심은 시간을 확인한 뒤 잠시 고민하다가, 이불을 챙겨 침대에서 내
[그럼 내가 방해하지 않을게. 일이 끝나면 꼭 집에 오렴.]도경수가 따뜻한 목소리로 당부하자 아심은 웃으며 대답했다.“네, 알겠어요.”전화를 끊은 뒤, 아심은 도경수의 번호를 저장했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 일에 몰두했지만, 머릿속에서는 계속 도경수가 했던 한 글자가 맴돌았다.집, 아심에게도 이제 집이 생겼다.잠시 후, 도씨 집안에서 보낸 점심이 도착했다. 5단으로 된 보온 도시락에는 네 가지 반찬과 한 가지 국이 담겨 있었다.모두 어제 아심이 식사 중에 유독 많이 먹었던 요리들이었다. 도경수는 아심의 입맛을 기억한 것이다. 아심은 마음속 깊이 따뜻함이 밀려들었고, 가족이라는 존재가 점점 더 가깝게 느껴졌다.오후에는 도도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는 저녁에 비가 올 테니 우산을 준비하고, 약속이 끝나면 가능한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했다.전화를 끊고 난 뒤, 아심은 휴대전화를 쥐고 갑자기 약간의 미안함을 느꼈다....하루는 빠르게 지나갔다. 저녁 8시쯤, 아심은 자주 가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은 뒤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거실의 스탠드 조명이 켜져 있었고, 강시언이 소파에 앉아 책을 들고 느긋하게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이에 아심은 그에게 다가가 약간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남의 집에 들어오실 때는 원래 이렇게 허락도 안 구하시나요?”“남의 집?”시언이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차갑게 내리는 비가 어우러진 밤,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맑은 옥처럼 울렸다. 아심은 시언의 맞은편 테이블 위에 앉았다.따뜻한 조명 아래, 아심의 아름다운 이목구비에는 약간의 나른함과 여유가 섞여 있었다.“저는 이제 당신의 넘버 세븐이 아니예요.”시언은 손을 들어 아심의 가느다란 허리를 잡고 살짝 당기며 자기 무릎 위로 올렸다. 그러고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내 넘버 세븐이 아니더라도, 넌 내 재희야.”이에 아심은 매혹적인 눈빛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왜 재희가 당신의 것이죠?”시언은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도도희가 말했다.“집으로 가져올 짐이 있으면 내가 같이 가서 챙길게.”강심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괜찮아요. 제가 혼자 해도 돼요. 짐이 많지 않거든요.”도경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면 일이 끝나면 꼭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외할아버지가 너랑 상의할 일이 있어.”아심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그러자 양재아가 말을 받으며 웃었다.“아심이 집에 오면 내 옆방에서 지내면 어때? 우리 같이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도도희는 잔잔히 웃으며 거절했다.“괜찮아요. 내가 이미 내 옆방을 정리해 두었어요. 재희와 좀 더 가까이 있고 싶거든요.”그 말에 재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그것도 괜찮네요.”아침 식사가 끝난 뒤, 강시언은 아심을 회사까지 데려다주었고, 도경수는 끝까지 마당 문밖까지 따라 나와 배웅했다.재아는 도씨 집안의 운전사가 운전하는 차에 타고 도경수가 시언의 차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보며 차가운 기운이 들었다.‘역시 친자식은 다르구나.’ 재아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내가 몇 달 동안 도씨 집안에서 도경수를 모셨는데도, 강아심이 하루 있는 것만 못하네.’“가요, 늦겠어요.”재아는 시선을 거두며 운전사에게 말했다....시언은 앞을 응시한 채 운전하며 물었다.“저녁에 정말 약속이 있는 거야?”아심은 나른한 자세로 의자에 기대고 있었다. 부드러운 햇빛이 그녀의 옆얼굴에 떨어져 따뜻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아심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정말이예요.”그러자 시언은 그녀를 힐끔 보며 말없이 운전했고, 아심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저녁에 제가 운전해서 갈 테니 굳이 데리러 오지 않아도 돼요.”“그래.” 시언은 담담히 대답했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아심은 가벼운 질문을 하였다.“강재석 할아버지랑 언제 강성으로 돌아가세요?”시언이 물었다.“왜 그러는데?”“그냥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아심은 잠시 멈추었다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강재석 할아버지가 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