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의 그림자가 시선 속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임유민이 고개를 돌려 임구택에게 물었다.“둘째 삼촌, 방금 소희 쌤이었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이곳은 수풀이 우거져 아무리 시력이 좋은 임유민이라고 해도 소희를 알아보지 못했는데.임구택이 듣더니 미간을 올리며 대답했다.“마음이 통해서?”“쳇!”소희 그들은 마치 유원지를 돌아다니는 여행객마냥 여유만만하게 레드 팀의 보루를 향해 직진하고 있었지만 반대로 레드 팀은 점점 초조해지고 있었다. 그들 레드 팀의 팀원들이 하나둘씩 아웃되고 있는 와중에 그들은 블루 팀 팀원들의 그림자조차도 보지 못했으니까.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그들이 분명 길을 막으며 블루 팀의 보루를 향해 직진했는데도 블루 팀이 깃발을 떼어 갔다는 것이다.처음까지만 해도 상대를 경시했던 프로 선수들은 그제야 전부 고도로 정신을 차렸다.적들은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했으니까.그렇게 레드 팀의 팀원들은 그들의 깃발을 수호하러 신속히 보루로 철수하며 또 블루 팀의 팀원들을 열심히 찾았다.임구택과 임유민이 한창 레드 팀의 보루로 향하고 있는데 갑자기 먼 곳의 수풀 쪽에서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저 여인을 잡아!”덩달아 여인의 비명소리가 들렸다.임구택과 임유민이 듣더니 순간 눈길을 마주쳤다.“소희 쌤일가요?”임구택은 소희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레드 팀의 모든 팀원이 힘을 합친다고 해도 절대 소희의 적수는 아니다. 그러니 그들을 유인하기 위해 레드 팀이 짠 연기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불안감이 들었다. 설령 10의 1의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그는 소희가 다른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었다.“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한 번 가볼게. 곧 돌아올 테니까 잘 숨어있고.”임구택이 한마디 당부하고는 임유민의 시선 속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임유민은 제자리에서 경계하며 사방을 주시했다.그러던 중 수풀 쪽에서 다시 인기척이 들렸고, 임유민이 즉시 나무 뒤로
이때 갑자기 깃발을 지키고 있던 네 명 중의 한 사람이 헤드셋에 대고 입을 열었다.“아니, 깃발은 우리가 잘 지키고 있어.”“진짜?”“잘됐네!”소희가 한참 듣더니 눈썹을 올렸다. 비록 상대방이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임구택과 임유민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걸로 봐서는 레드 팀에게 잡힌 게 분명했다. 그래서 소희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총을 들어 보루에 있는 사람을 향해 조준했다.그리고 ‘뻥! 뻥!’ 두 번의 총소리와 함께 금방 통화를 끝낸 사람과 그 옆에 있던 동료가 순간 아웃되었다.두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두 눈을 크게 뜬 채 상대방의 몸에서 반짝이고 있는 빨간불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땅에 주저앉았다.그 모습에 나머지 두 동료도 곧바로 달려와 소희가 있는 방향을 향해 총을 쐈다.이에 소희가 날렵하게 모든 탄알을 피하면서 나무줄기를 밟고 공중으로 훌쩍 날아올라 보루에 숨어 있는 사람을 향해 총을 쐈다.뻥-뻥-또 두 번의 총소리와 함께 레드 팀은 순간 전멸되었고, 팀원들은 낙담한 표정을 지으며 총을 내려놓고 숲에서 걸어 나오는 소녀를 쳐다보았다.표정 한 번 변한적 없는 소희는 레드 팀의 팀원들을 덤덤하게 힐끗 쳐다보고는 보루의 벽을 짚고 가볍게 훌쩍 뛰어올라 레드 팀의 깃발을 떼어냈다.그런데 이때, 방금 헤드셋으로 대화를 주고받던 팀원의 헤드셋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에 소희가 바로 그 팀원의 헤드셋을 떼어내 귓가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헤드셋 맞은편에서 누군가의 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블루 팀의 그 여인이 보루에 접근하기만 하면 단풍나무 숲으로 유인해! 우리 지금 블루 팀의 꼬맹이를 잡았으니까, 나중에 다 같이 죽여버리자고!]장명의 목소리였다.소희가 순간 눈빛이 차가워져서는 대답했다.“알았어, 금방 갈게.”그러고는 상대방이 소리를 내기도 전에 헤드셋을 던지고 레드 팀의 깃발을 말아 잘 챙긴 후 단풍나무 숲으로 향했다.같은 시각, 소리 따라 쫓아온 임구택은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위에서 또 4~5명이 몰려왔고, 임구택과 소희는 거의 동시에 몸을 돌려 서로 등을 기대었다. 그러고는 달려드는 적을 향해 총을 쏘았다.순간 상대방 팀에 네 사람이 쓰러지고 한 사람이 도망쳤다.손영 등은 확실히 뛰어난 사격 선수이다. 그러나 삼림 대전에서는 사격술만 뛰어났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이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외에 동작이 민첩해야 하고, 환경에 대한 감지력이 뛰어나야 하는 동시에 경각성도 높아야 한다.그리고 그것들이 바로 소희와 임구택을 오늘날까지 살아오게 했던 실력이다.그런데 장명 그들이 평소에 일탈할 겸 총 게임을 몇 번 놀았다고 소희와 임구택의 생존 본능에 도전하려 했으니 실패하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아무런 소통도 필요 없이 호흡이 척척 잘 맞았던 소희와 임구택은 불과 몇 초만에 또 상태팀의 세 사람을 아웃시켰다.그러다 나머지 팀원들은 무슨 명을 받았는지 갑자기 신속히 후퇴하면서 숲의 중심위치로 돌진했고, 소희와 임구택이 뒤따라 도착했을 땐 장명의 총이 임유민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손영 등 나머지 7~8명은 일렬로 늘어서서 소희와 임구택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고.심지어 레드 팀 이미 아웃된 팀원들도 그곳에 모였다. 다만 그들은 더 이상 대결에 참여할 수 없어 보루 위에 앉아 두 팀 간의 대결을 구경하고 있었다.그중 제일 중간 자리에 앉은 손영의 여자친구가 차가우면서도 약간의 두려움이 묻어있는 눈빛으로 소희를 주시하며 손영을 향해 소리쳤다.“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말고 바로 죽여! 특히 저 여인!”이때 손영이 궁금해하며 물었다.“당신들 대체 뭘 하는 사람이지?”두 사람은 동작이 민첩할 뿐만 아니라 사격술도 국가선수급은 되는 것 같아 보이는 게, 게임은 물론이고 진짜 정글전에도 충분히 참가할 자격이 있었다.‘설마 코치가 게임의 난이도를 높여 더 많은 고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제대한 특전사를 초대한 건가?’‘이번 실전이 평소보다 더 짜릿하긴 했지.’“일반인.”소희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게임은 그렇게 끝났고, 블루 팀은 아무런 사상자가 나타나지 않은 상황하에서 양 팀의 깃발까지 전부 떼어냈다.반대로 레드 팀은 깃발을 잃은 것도 모자라 발버둥 칠 여지조차 없이 전멸되었다.“세 분 설마 이 게임 속의 NPC인 건가?”손영은 비록 게임에서 진 것 때문에 체면이 많이 구겨졌지만 그래도 소희와 임구택의 실력에 탄복되어 두 사람을 향해 웃으며 물었다.이에 임구택이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 그냥 놀러 온 게이머야.”그러자 옆에 있던 장명도 다가와서는 칭찬을 아까지 않으며 열정적으로 두 사람을 초대했다.“그런 거 치고는 너무 대단한 거 아니야? 정식 경기에 참가해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임구택이 소희를 한 번 쳐다보고는 웃으며 거절했다."우리는 딱히 그런 경기에 참가할 생각이 없어서.”하지만 숭배의 마음에 더욱 흥분해진 장명은 두 사람을 이대로 놓치고 싶지 않아 다시 입을 열었다.“앞으로 자주 같이 팀을 짜서 놀자! 두 사람만 있으면 우리 무조건 백전백승할 거야.”다른 사람들도 우르르 몰려와 소희와 임구택을 설득했다.이에 제일 밖에 밀려나 있던 임유민이 인파를 비집고 들어와서는 냉소했다.“왜 나를 초대하지 않는 건데? 내 실력이 그렇게 형편없었어?”“나를 몇 초만에 제압했는데 실력이 형편없을 리가 있나!”장명이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그리고 내내 얼어붙어있던 분위기는 그제야 화기애애해졌다.이때 CCTV를 한 번 훑어보고 온 코치가 두 팀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정말 대단하네요.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진정한 정글전을 본 느낌이 들 정도로 저마저도 짜릿했어요.”소희가 듣더니 미소를 지었다.‘진정한 정글전이라?’‘이들이 진정한 정글전을 겪어봤다면 절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정글전 세 글자를 입밖에 내지 않았겠지?’그렇게 날은 어느새 어두워져 다들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러던 중 내내 소희를 물고 놓지 않았던 소녀가 갑자기 다가와서는 어색하게 소희를 불렀다.“그… 이, 이
월요일이른 아침, 청아는 시간에 맞춰 장씨 그룹 건물 앞에 도착했다.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뚝 솟은 건물을 쳐다보노라니 청아는 순간 감개무량했다.분명 2년 전에도 근무했었던 곳이지만, 심경은 그때와 너무나도 달랐다.‘괜찮아! 할 수 있어!’청아는 숨을 몇 번 깊게 들이마시고 안으로 들어갔다.그리고 그녀의 이력서를 한 번 훑어본 프런트 직원이 다정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대표님께서 이미 분부하셨습니다. 바로 인사팀으로 올라가 입사 절차를 밟으시면 됩니다.”청아가 듣더니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했다. 그러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25층 인사팀으로 올라갔다.그러다 25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소식을 전달받은 인사팀 직원이 마중을 나왔고, 바로 청아를 인사팀 팀장의 사무실로 안내했다.인사팀 팀장이 이력서를 훑어보다가 청아의 경력사항을 확인한 순간 살짝 놀라서 물었다.“전에 이곳에서 일한 적이 있나요?”“네, 예전에 이곳에서 인턴을 한 적이 있습니다.”“장 대표님과는 아는 사이인 거고?”인사팀 팀장이 궁금해서 물었다.이에 청아가 덤덤하게 웃기만 할 뿐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아는 사이가 아니었으면 장시원이 면접도 생략하고 바로 나를 대표 비서 자리에 꽂아주지 않았겠지.’계약서 작성이 다 끝난 후 청아는 정식으로 장씨 그룹의 정규직으로 되었고, 인사팀 팀장이 청아에게 엘리베이터 카드를 건넸다.“이건 대표님 사무구역의 전용 엘리베이터 카드. 지금 바로 39층으로 올라가 최결 최 조수님을 찾으세요. 그분이 알아서 임무를 배치해 줄 겁니다.”“네, 감사합니다!”청아가 다시 감사를 표하고는 사무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끊임없이 변해가고 있는 숫자를 보며 청아는 순간 호랑이 굴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호랑이 굴에 들어선 찰나부터 그녀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땡-경미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러자 우아하고 고풍적인 느낌이 물씬한 대표 사무구역이 눈앞에 펼쳐졌
남색 정장을 차려입고 길쭉한 두 다리를 내디디며 청아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장시원은 덤덤하고 온아했던 평소와는 달리 늠름하면서도 사람에게 이유 모를 압박감을 주고 있었다.그리고 그의 뒤에는 회사 임원 몇 명이 따르고 있었고, 작은 소리로 인수 합병건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다.청아는 바로 몸을 돌려 한쪽에 서서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로 장시원을 향해 인사했다.“좋은 아침입니다, 대표님.”장시원이 청아를 한 번 훑어보고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이때 최결이 다가와 장시원을 향해 소개했다.“대표님, 이분은 새로 온 조수 우청아 씨입니다.”“알아.”장시원이 여전히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대표 사무실로 들어갔다.그리고 장시원의 태도에 최결이 눈썹을 올렸다.젊고 예쁜 아가씨가 면접도 거치고 않고 바로 39층으로 올라와 최결은 두 사람이 당연히 말 못 할 사이인 줄 알았다.하지만 방금 장시원의 미지근한 태도로 봐서는 또 그렇게 친밀한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내가 잘못짚었나? 설마 다른 사람이 대표님에게 사정을 해 청아 씨를 꽂아 넣은 거고, 그것 때문에 대표님이 언짢아하시는 건가?’그렇게 최결이 두 사람의 사이를 추측하고 있는 동안, 청아는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바로 서류 복사하러 갔다.한참 후, 최결은 오늘의 일정표를 들고 대표 사무실로 향했다. 그러다 장시원이 어제 커피를 마시면서 맛이 괜찮다고 했던 게 생각나 커피까지 한 잔 타주었다.고위층 임원들은 이미 회의실로 들어갔고, 사무실에는 장시원뿐이었다.최결이 커피를 장시원 앞에 내려놓고 오늘의 일정을 그에게 보고했다.장시원이 들으면서 처리해야 할 서류에 사인을 하고 난 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앞으로 커피나 차를 타는 잡일은 우청아 씨에게 맡기세요.”최결이 듣더니 순간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네!”“그리고 우청아 씨 오늘이 출근 첫날이라 아직 39층의 업무에 대해 익숙하지 않을 거니까, 최 조수님께서 많이
잠시 후, 청아가 최결을 따라 회의실에 들어섰고, 회의는 그제야 비로소 정식으로 시작되었다.회의에서 몇몇 고위층 임원은 열띤 토론을 통해 인수합병건의 이해득실을 분석하면서 각자의 해결방안을 제기했다.청아는 최결의 옆자리에 앉아 임원들이 제기하는 내용을 열심히 귀담아들으며 그 속에서 중점을 골라 기록했다.그리고 그러는 청아의 옆모습을 장시원은 이미 5초 넘게 쳐다보았다. 흰색 셔츠에 검은색 긴 바지 차림을 한 청아는 오늘따라 확실히 커리어 우먼 같았다. 다만 약간의 젖살이 붙어있는 하얀 얼굴은 옷차림이랑 다르게 많이 깜찍해 보였다. 특히 지금처럼 말하지도 않고 웃지도 않는 모습은 이상하게 더욱 위화감이 들었다.‘몸매는 수척한데, 하필이면 둥글고 윤택한 얼굴을 가졌으니.’“대표님, 명실 쪽에서 제시한 조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때 한 임원이 갑자기 장시원을 향해 물음을 제기했고, 그 소리에 청아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장시원을 쳐다보았다.그러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장시원이 천천히 시선을 거두어들이고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명씨 가문에 지금 분열이 나타났고, 명실이 이렇게 쉽게 우리 손에 수매되기를 원하지 않은 몇 명이 고의로 중간에서 방해하고 있습니다.”장시원의 대답에 다들 분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그제야 문득 문제의 중심을 알게 된 듯했다.그렇게 회의는 두 시간 동안 진행되었고, 회의가 끝난 후 장시원은 또 부대표를 사무실로 불러들여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그러다 청아가 마실 차를 가지고 사무실에 들어서자 부대표가 웃으며 물었다.“신입?”청아가 듣더니 바로 공손하게 인사했다.“처음 뵙겠습니다, 배 부대표님.”아까 회의실에서 청아는 이미 장시원 주변 몇몇 고위층 임원들의 자료를 다 살펴보았다. 그중 당원이라는 임원과 지금 사무실에 앉아있는 배강 배 부대표가 바로 장시원의 아주 유능한 오른팔이다.“장 대표님의 관심을 받을 만큼 예쁘게 생기긴 했네요. 오자마자 39층에 배치된 걸 보니.”배강이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
최결은 청아에게 장시원의 업무 시간과 휴식시간이 적혀있는 리스트를 건네주었다.‘두 시간마다 대표님에게 물 한 잔 건네줄 것.’‘매일 점심 대표님에게 점심 주문 하겠냐고 문의할 것.’‘저녁 퇴근 후 술자리에 참석하게 되면 같이 동행할 것.’‘대표님 대신 오가는 모든 인정을 기억할 것.’‘대표님이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면, 대표님 대신 모든 기념일을 기억하고 여자친구분을 위해 선물을 챙겨줄 것.’……‘족히 세 페이지나 되는 내용을……’청아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회사 대표의 조수는 아무나 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되었다.‘차라리 무미건조한 디자인 원고를 만드는 게 더 낫겠네.’그러다 장시원의 여자친구를 위해 선물을 챙겨줘야 한다는 사항에 청아가 고개를 들어 최결에게 물었다.“그럼 대표님 지금은 여자친구분이 계신가요?”“아직은 없어요. 하지만 언제든지 생길 수 있으니까 많이 유의하세요.”장시원이 여자친구를 바꾸는 속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청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난 이만 밥 먹으러 갈 테니까, 청아 씨는 대표님께 점심에 따로 스케줄이 있는지 한번 여쭤봐요. 배달시킬 필요 있는지도요.”“네! 지금 바로 가서 여쭤보겠습니다.”최결의 당부에 청아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최결이 떠난 후, 청아는 바로 대표 사무실로 향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리에 돌아가 앉아 업무를 보았다. 그러다 점심시간이 훌쩍 넘었는데도 장시원이 안에서 나오지 않자 청아는 그제야 부득불 사무실로 향했다.그러고는 손을 들어 대표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고, 안에서 전해오는 장시원의 대답을 들은 청아가 숨을 깊게 한번 들이마시고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대표님, 점심밥 주문해 드릴까요?”고개를 숙인 채 공손하게 물음을 묻고 있는 청아의 모습을 장시원이 고개 들어 한번 쳐다보고는 미적지근한 말투로 대답했다.“아니, 입맛 없어.”이에 청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그러자 뒤에서 바로 남자의 소리가 들려왔다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
이날, 임유진은 티타임에 진소혜와 마주쳤다. 소혜는 입술을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팀장님, 구씨그룹의 총애를 받으니 우리 부서 실적도 쭉쭉 오르겠죠? 부서 직원들 대신 감사드려요, 팀장님.”유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나가려다, 소혜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 소혜 씨가 한 거라는 거 알아요. 이미 누가 나한테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소혜 씨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소혜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고, 고개를 돌려봤을 땐, 유진은 이미 자리를 떠나 있었다.오후 회의에서 유진은 이렇게 발표했다.“이번 평가 기간 동안 곽시양 씨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어요. 따라서 정현준 씨의 직책을 승계하여 부서 부팀장으로 승진해요.”“인사팀에서 곧 공식 공지드릴 예정이에요.”유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엔 놀라움이 번졌고, 시양 본인조차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부서 내에서도 존재감이 적었고, 입사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나 실적 모두 소혜에 비해 부족했기에, 시양이 발탁된 건 모두에게 의외였다.소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팀장님, 부팀장 선발 기준이 뭔가요? 기준을 명확히 해주시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혜를 응시하며 말했다.“기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기준이라면 기준이겠죠”소혜는 눈을 크게 떴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시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시양 씨, 제 사무실로 잠깐 와요.”“네?”시양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유진을 따라갔다.유진이 회의실을 나서자, 안에서는 수군거림이 폭발했다. 최근 있었던 일로 인해 유진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었고, 그런 유진이 능력도 부족한 신입을 뛰어넘어 부팀장으로 발탁했다는 점에서 불만과 의문은 더 커졌다.현준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인사 결정은 사전 상의 없이 유진이 발표한 것이었고, 그 역시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소혜는 맞은편에 앉은 베
유진은 구은정의 표정을 보고,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는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고, 유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어제 술 마셨다던데, 괜찮아요?”은정은 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술은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유진이 조용히 은정에게 당부했다.“응.”그 말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됐어요. 나 출근해야 해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그렇게 둘은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조금 전 은정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급히 뛰쳐나왔다.그러나 복도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 지금은 내 문제부터 정리해야 해. 괜히 그 사람한테 짐이 되어선 안 돼.’그날 오후, 은정은 늦게서야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법무팀에 최이석 관련 고소를 철회하라고 지시했다.마심호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 사람 같은 놈은 봐줄 이유가 없죠. 이번 기회에 서성 라인 애들도 좀 눌러놓는 게 나아요.”그러나 은정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그날 저녁, 은정은 늘 그랬듯 이경 아파트로 돌아왔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곧장 유진의 집 앞으로 갔다.문 비밀번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은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예전 그대로였고, 유진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았다.그런데도 방 안은 왠지 썰렁했는데,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은정은 그녀가 드라마를 자주 보던 소파에 앉았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정은 책상 위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녹음 안 했어요.”서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은정아, 이 일은 내가 밖에 알리지 않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최이석 일, 바로 고소 취하하고 다시는 들추지 마.”“그리고 스스로 구씨그룹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회사도, 강성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네 아버지에겐 그냥 말하면 돼. 죄책감 때문에 이 집에 더는 못 있겠다고. 이번엔 분명히 놔줄 거야.”“네가 떠날 땐,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돈도 챙겨줄게. 아버지한텐 그걸로도 충분히 체면 세워준 셈이 될 거야.”은정은 서선영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당신 딸을 희생해서까지 날 함정에 빠뜨린 이유가 최이석 때문이었네요.”서선영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곧바로 해명했다.“그 사람은 내 동생 밑에서 오래 일했어. 난 내 동생을 위해서 한 거야. 은정아, 지금 네가 분위기 바꿔서 빠져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내가 당신 말대로 안 하면요?”은정은 담배를 내뿜으며 한껏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어차피 난 이미 악명 높은 놈이 됐어. 하나쯤 더 얹혀도 그만이죠. 오히려 구은서는 이제 절대 부잣집 자제와의 결혼은 꿈도 못 꾸겠죠.”서선영의 얼굴은 날카롭고 차가웠다.“끝장을 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은서는 동정받는 쪽이 될 거야.”서선영은 은정을 똑바로 노려봤다.“임유진하고 너, 꽤 가까운 사이잖아. 그 애는 나랑 너 때문에 몇 번이나 맞붙었지. 근데 만약 그 애가 네가 술에 취해 여동생을 건드린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그 아이 눈엔 네가 어떻게 보일까? 널 어떻게 생각할까? 넌 그걸 감당할 수 있어?”그 말에 은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선영은 그 반응에 확신을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대로 해. 열흘 안에 강성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안 그러면 임유진이든, 임씨 집안이든, 강성 전체가 너란 인간이 얼마나 추잡한 놈인지 알게 될 거야.”“널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거고, 임유진도 널 경멸하
은정은 격노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선영 저 사람이 꾸민 함정이에요.”서선영은 엉엉 울면서 외쳤다.“내가 내 딸을 희생시켜서 너한테 함정을 판다고? 구은정,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알아.”“예전부터 나한테 편견이 있었지. 그래, 미우면 나한테 손찌검을 해. 왜 애먼 은서를 괴롭혀?!”“은서는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해? 이 소문이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끝장이야!”은정은 오직 구은태만 바라보며 물었다.“저를 믿으세요?”구은태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갑자기 은서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듯 달려갔다. 죽을 각오로 내달리는 눈빛이었다.“은서야! 안 돼, 은서야!”서선영이 급히 은서를 껴안고 붙잡았고, 울음이 멎지 않았다.“은서야,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거기 누구 없어요! 얘 좀 붙잡아줘요!”서선영은 울먹이며 도우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은서를 붙들고 감싸 안았다.그중 평소 은서를 따르던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구은태 앞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회장님, 사실은 전에도 도련님께서 밤에 아가씨 방문을 두드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하지만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서, 보복당할까 봐 말씀 못 드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 도우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은정은 도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애옹이가 은서에게 보내졌던 그날 밤, 은정은 술에 취해 돌아와 애옹이가 사라진 걸 알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때 이 도우미가 어두운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은태는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죽을힘을 다해 몸을 던지려던 은서, 그리고 도우미의 일방적인 증언이 더해지자, 구은태는 은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다시 근처에 있던 물
[말 좀 해봐요.][삼촌?]서선영이 천천히 2층에서 걸어 내려오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장말숙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눈짓을 보냈다. 이에 장말숙 아주머니는 눈치를 채고 전화를 받아 들고 말했다.“유진 씨죠? 저희 도련님이 술에 취하셨어요.”유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네, 신세 좀 질게요. 잘 부탁드려요.]“네!”장말숙 아주머니는 괜히 말을 더했다가 실수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은정의 까만 눈동자가 서선영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이미 흐릿했다.서선영은 은정을 부축하듯 손을 내밀며,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은정아, 술 너무 많이 마셨잖아. 방으로 데려다줄게.”“으악!”날카로운 비명에 은정은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을 떴고, 날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옆에서는 구은서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옷가지로 몸을 허둥지둥 가리고 있었고, 얼굴은 절망감에 젖은 눈물로 가득했다. 그녀는 분노로 떨리는 눈으로 은정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서의 비명은 곧 서선영과 집 안 도우미들을 방으로 불러 모았다. 문이 열리고 방 안 풍경을 본 순간, 모두가 굳어버렸다.은정은 조금씩 의식을 되찾았고, 은서를 훑어보며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이불을 들추고 자신을 확인해 보니,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었지만 상의는 전혀 없었다.은정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이마를 짚으며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머리가 묵직하게 지끈거렸다.“엄마!”은서는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 울부짖었다.“은서야!”서선영이 달려와 은서를 안고, 옷을 덮어주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몰라요!”구은서는 서선영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했다.“밤에 오빠가 갑자기 방에 들어왔어요. 술에 취해서 저를 한 대 치더니 그다음은...”은서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드러난 어깨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짐승 같은 놈!”서선영은 벼락을 맞은 듯 충격에 빠져 온몸을 떨며 은정을 향해 소리
우정숙은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에 은정은 분명히 임유진은 내 스타일 아니라며 선을 그은 적이 있는데, 왜 지금 와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쫓고 있는 걸까?“넌 어떻게 생각해?”우정숙이 묻자,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돌아왔어요.”그 말투가 생각보다 무거워, 우정숙은 분위기를 일부러 누그러뜨리며 웃었다.“이미 거절했는데도 냉정해져야 해?”유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어쨌든, 엄마는 이 일.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말아줘요. 그리고 삼촌한테도 되도록 비밀로 해주세요.”그 말에 우정숙은 딸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갑자기 이렇게 서둘러 집에 돌아온 이유 혹시 일이 더 커질까 봐? 너희 할아버지가 구은정한테 가서 따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야?”유진은 재빨리 대답했다.“누가 그 사람 걱정했대요? 밖에서 사는 게 질려서 온 거지, 그 사람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하지만 우정숙의 따뜻하고 조용한 눈빛은 유진의 진심을 꿰뚫고 있었다. 우정숙은 다만 조용히 숨을 내쉬며, 더는 묻지 않았다.그날 밤, 구은정은 외부 일정으로 접대를 나갔고,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좀 늦을 것 같아. 집에 들어가면 애옹이 좀 봐줘.]유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저도 집에 왔어요. 아주머님께 부탁하세요.]은정은 유진이 하루 정도 집에서 자려는 줄로만 알고, 별 의심 없이 답했다.[알겠어.]밤 10시.은정은 아직 접대 자리에서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 구은태가 보낸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은정아, 나 몸이 좀 안 좋다. 한번 집에 들러줄래?]은정은 미간을 찌푸렸다.[몸 안 좋으면 병원 가시죠.]그렇게 답장을 보냈지만, 더 이상의 응답은 없었다.술자리가 끝나고 나니 이미 자정 무렵이었다. 은정은 그래도 아버지를 확인하고자 구씨 저택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애옹이를 돌봐주던 장말숙 아주머니가 거실에서 그
정현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죠? 임유진 건드리지 말랬잖아요. 왜 말을 안 들어요?”진소혜는 웃었다.“들었어요. 적이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없애버리라는 그 말, 정말 감명 깊었거든요. 곧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쫓겨날 거예요.”현준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임유진은 쫓겨나지 않아요. 사장님이 반드시 지킬 거니까요.”현준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덧붙였다.“유진 씨, 그 정체가 간단하지 않아요. 사장님이 곤란한 일에 휘말릴 때마다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 애였다고요.”“이렇게 성급하게 나가면 결국 당하는 건 소헤 씨라고요.”소혜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것도 그 얼굴 덕 아니었을까요? 임유진이 무슨 대단한 집안 출신이라도 돼요?”현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 애, 성이 임이야.”소혜는 비웃었다.“강성에 임 씨 많은데요? 임씨라고 다 임씨 집안이예요?”“임유진이 정말 그 임씨 집안 사람이었으면, 이런 작은 곳에서 평사원으로 일할 일이 없죠.”강성에서도 가장 윗자리에 있는 집안, 그 임씨 집안 사람이라면 당연히 격이 달랐을 것이다.현준은 소혜를 바라보며, 무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소혜 씨, 소혜 씨는 너무 자만해요. 이제 막 졸업한 사람이잖아요. 세상이 어떤지 아직 몰라요.”“내가 경력은 부족하지만, 머리는 좋아요.”소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어요.”현준은 더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고, 소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 달 말이면,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질 거예요.”이메일은 해외 IP에서 발송된 것으로 확인되어, 추적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루머는 벌써 영업팀까지 퍼진 상황이었다.한때 유진이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걸 보고 감탄했던 동료들조차, 그녀가 정말 실력만으로 이룬 건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너무 젊은 나이에, 임씨 그룹 같은 대형 고객을 설득하고, 이미 다른 부서에서 거의 성
서선영은 유혹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거절하려는 듯하면서도 몸은 피하지 않았다.“안 돼. 나, 한 시간밖에 못 나와 있어.”“당신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최이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선영의 치마 지퍼를 내렸다.“밖에 사람 세워놨어. 아무도 안 들어와.”...오전, 임유진은 구씨그룹과의 계약을 마무리했다. 오후에는 회사 고위층 회의에 참석했고, 회의가 끝나고 마케팅부로 돌아왔을 때쯤, 팀 동료들의 시선이 평소와 달랐다.유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모두는 급히 예의를 갖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진은 손에 든 자료를 들고 여진구를 찾아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진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유진이 들어오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무슨 일 있었어요?”유진이 맑은 목소리로 묻자, 진구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아니야. 너 손에 든 거, 청원안 자료야? 나 좀 볼게.”하지만 유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휴대폰, 보여줘요.”진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방금 보고 있던 건, 유진과 은정이 함께 있는 사진들이었다.둘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둘이 함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장면. 얼마 전 중식당에서 있었던 그날이었다.진구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누군가 이 사진들을 너희 팀 메일에 전체 전송했어. 내용은, 네가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게 구은정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어서라고.”유진은 이미 그 메일을 확인했었다. 메일에는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구씨 그룹 사장을 유혹했다는 식의 악의적이고 천박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업계 풍기를 망친다는 말까지, 표현이 거칠고 추했다. 유진은 이를 꽉 물었지만, 곧 침착하게 물었다.“발신 IP 추적할 수 있어요?”진구가 답했다.“지금 IT팀에서 추적 중이야. 내부 직원일 수도 있고, 유지그룹 쪽의 보복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반드시 밝혀낼 거야.”“일단 외부로 확산은 안 됐고, 회사 내부 루머 수준이야. 이미 전체 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