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소리를 들은 손영은 바로 소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지만 소녀는 이미 홀로 바닥에 누운 채 아웃되어 있었다.그리고 손영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소녀가 손영을 보자마자 그의 다리를 안고 큰소리로 통곡했다.“나 놀라 죽을 뻔했어, 자기야!”“괜찮아, 진짜 총도 아닌데 뭐가 무서워?”“아니, 아니. 방금 그 순간, 나 정말 그 여인 손에 죽는 줄 알았어!”두려움에 가득 찬 소녀는 놀란 나머지 얼굴색마저 변해있었다.그녀는 총 게임을 여러 번 해 보았지만, 죽음에 직면한 공포감이 든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아까 그 순간의 소희는 정말 마치 아수라장에서 걸어 나온 사신과 같았다.놀란 여자친구를 위로하고 있는 손영은 순간 승부욕이 활활 타올랐다. 그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격 선수로서 아마추어 몇 명을 아웃시키지 못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내 여자친구도 보호할 수 없다면, 난 남자도 아니지.’그래서 그는 손에 든 총을 꽉 잡고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가서 복수해 줄게.”장명 그들은 이미 흩어져 보이지 않았고, 손영은 바로 새로운 대오를 만들었다. 그러고는 더 이상 소희를 포위하지 않고 블루 팀의 깃발이 놓여진 보루로 향해 달려갔다.하지만 블루 팀에 도착한 후 그들의 얼굴색은 순간 변했다.보루에는 깃발이 없었다.‘어쩐지 오는 길이 순탄하더라니.’‘문제는 블루 팀의 세 사람이 어떻게 레드 팀의 포위를 피해 가면서 이렇게 빨리 깃발을 빼앗아간 거지?’‘너무 놀라워.’그러다 손영이 갑자기 무엇이 생각났는지 안색이 변해서는 소리쳤다.“블루 팀이 깃발을 가지고 있어! 어서 우리 쪽 보루로 돌아가야 해!”……같은 시각, 임유민이 파란색 깃발을 메고 임구택과 함께 느릿느릿 레드 팀의 영지로 향하고 있었다.그러다 이리저리 둘러보고는 실망하며 입을 열었다.“레드 팀에 사람이 엄청 많은 거 아니었어요? 왜 가는 길에 두 명밖에 만나지 못한 거예요?”‘게다가 아무런 전투력도 없었고.’이에 임구택이 웃으며
소희의 그림자가 시선 속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임유민이 고개를 돌려 임구택에게 물었다.“둘째 삼촌, 방금 소희 쌤이었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이곳은 수풀이 우거져 아무리 시력이 좋은 임유민이라고 해도 소희를 알아보지 못했는데.임구택이 듣더니 미간을 올리며 대답했다.“마음이 통해서?”“쳇!”소희 그들은 마치 유원지를 돌아다니는 여행객마냥 여유만만하게 레드 팀의 보루를 향해 직진하고 있었지만 반대로 레드 팀은 점점 초조해지고 있었다. 그들 레드 팀의 팀원들이 하나둘씩 아웃되고 있는 와중에 그들은 블루 팀 팀원들의 그림자조차도 보지 못했으니까.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그들이 분명 길을 막으며 블루 팀의 보루를 향해 직진했는데도 블루 팀이 깃발을 떼어 갔다는 것이다.처음까지만 해도 상대를 경시했던 프로 선수들은 그제야 전부 고도로 정신을 차렸다.적들은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했으니까.그렇게 레드 팀의 팀원들은 그들의 깃발을 수호하러 신속히 보루로 철수하며 또 블루 팀의 팀원들을 열심히 찾았다.임구택과 임유민이 한창 레드 팀의 보루로 향하고 있는데 갑자기 먼 곳의 수풀 쪽에서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저 여인을 잡아!”덩달아 여인의 비명소리가 들렸다.임구택과 임유민이 듣더니 순간 눈길을 마주쳤다.“소희 쌤일가요?”임구택은 소희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레드 팀의 모든 팀원이 힘을 합친다고 해도 절대 소희의 적수는 아니다. 그러니 그들을 유인하기 위해 레드 팀이 짠 연기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불안감이 들었다. 설령 10의 1의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그는 소희가 다른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었다.“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한 번 가볼게. 곧 돌아올 테니까 잘 숨어있고.”임구택이 한마디 당부하고는 임유민의 시선 속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임유민은 제자리에서 경계하며 사방을 주시했다.그러던 중 수풀 쪽에서 다시 인기척이 들렸고, 임유민이 즉시 나무 뒤로
이때 갑자기 깃발을 지키고 있던 네 명 중의 한 사람이 헤드셋에 대고 입을 열었다.“아니, 깃발은 우리가 잘 지키고 있어.”“진짜?”“잘됐네!”소희가 한참 듣더니 눈썹을 올렸다. 비록 상대방이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임구택과 임유민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걸로 봐서는 레드 팀에게 잡힌 게 분명했다. 그래서 소희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총을 들어 보루에 있는 사람을 향해 조준했다.그리고 ‘뻥! 뻥!’ 두 번의 총소리와 함께 금방 통화를 끝낸 사람과 그 옆에 있던 동료가 순간 아웃되었다.두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두 눈을 크게 뜬 채 상대방의 몸에서 반짝이고 있는 빨간불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땅에 주저앉았다.그 모습에 나머지 두 동료도 곧바로 달려와 소희가 있는 방향을 향해 총을 쐈다.이에 소희가 날렵하게 모든 탄알을 피하면서 나무줄기를 밟고 공중으로 훌쩍 날아올라 보루에 숨어 있는 사람을 향해 총을 쐈다.뻥-뻥-또 두 번의 총소리와 함께 레드 팀은 순간 전멸되었고, 팀원들은 낙담한 표정을 지으며 총을 내려놓고 숲에서 걸어 나오는 소녀를 쳐다보았다.표정 한 번 변한적 없는 소희는 레드 팀의 팀원들을 덤덤하게 힐끗 쳐다보고는 보루의 벽을 짚고 가볍게 훌쩍 뛰어올라 레드 팀의 깃발을 떼어냈다.그런데 이때, 방금 헤드셋으로 대화를 주고받던 팀원의 헤드셋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에 소희가 바로 그 팀원의 헤드셋을 떼어내 귓가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헤드셋 맞은편에서 누군가의 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블루 팀의 그 여인이 보루에 접근하기만 하면 단풍나무 숲으로 유인해! 우리 지금 블루 팀의 꼬맹이를 잡았으니까, 나중에 다 같이 죽여버리자고!]장명의 목소리였다.소희가 순간 눈빛이 차가워져서는 대답했다.“알았어, 금방 갈게.”그러고는 상대방이 소리를 내기도 전에 헤드셋을 던지고 레드 팀의 깃발을 말아 잘 챙긴 후 단풍나무 숲으로 향했다.같은 시각, 소리 따라 쫓아온 임구택은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위에서 또 4~5명이 몰려왔고, 임구택과 소희는 거의 동시에 몸을 돌려 서로 등을 기대었다. 그러고는 달려드는 적을 향해 총을 쏘았다.순간 상대방 팀에 네 사람이 쓰러지고 한 사람이 도망쳤다.손영 등은 확실히 뛰어난 사격 선수이다. 그러나 삼림 대전에서는 사격술만 뛰어났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이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외에 동작이 민첩해야 하고, 환경에 대한 감지력이 뛰어나야 하는 동시에 경각성도 높아야 한다.그리고 그것들이 바로 소희와 임구택을 오늘날까지 살아오게 했던 실력이다.그런데 장명 그들이 평소에 일탈할 겸 총 게임을 몇 번 놀았다고 소희와 임구택의 생존 본능에 도전하려 했으니 실패하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아무런 소통도 필요 없이 호흡이 척척 잘 맞았던 소희와 임구택은 불과 몇 초만에 또 상태팀의 세 사람을 아웃시켰다.그러다 나머지 팀원들은 무슨 명을 받았는지 갑자기 신속히 후퇴하면서 숲의 중심위치로 돌진했고, 소희와 임구택이 뒤따라 도착했을 땐 장명의 총이 임유민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손영 등 나머지 7~8명은 일렬로 늘어서서 소희와 임구택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고.심지어 레드 팀 이미 아웃된 팀원들도 그곳에 모였다. 다만 그들은 더 이상 대결에 참여할 수 없어 보루 위에 앉아 두 팀 간의 대결을 구경하고 있었다.그중 제일 중간 자리에 앉은 손영의 여자친구가 차가우면서도 약간의 두려움이 묻어있는 눈빛으로 소희를 주시하며 손영을 향해 소리쳤다.“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말고 바로 죽여! 특히 저 여인!”이때 손영이 궁금해하며 물었다.“당신들 대체 뭘 하는 사람이지?”두 사람은 동작이 민첩할 뿐만 아니라 사격술도 국가선수급은 되는 것 같아 보이는 게, 게임은 물론이고 진짜 정글전에도 충분히 참가할 자격이 있었다.‘설마 코치가 게임의 난이도를 높여 더 많은 고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제대한 특전사를 초대한 건가?’‘이번 실전이 평소보다 더 짜릿하긴 했지.’“일반인.”소희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게임은 그렇게 끝났고, 블루 팀은 아무런 사상자가 나타나지 않은 상황하에서 양 팀의 깃발까지 전부 떼어냈다.반대로 레드 팀은 깃발을 잃은 것도 모자라 발버둥 칠 여지조차 없이 전멸되었다.“세 분 설마 이 게임 속의 NPC인 건가?”손영은 비록 게임에서 진 것 때문에 체면이 많이 구겨졌지만 그래도 소희와 임구택의 실력에 탄복되어 두 사람을 향해 웃으며 물었다.이에 임구택이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 그냥 놀러 온 게이머야.”그러자 옆에 있던 장명도 다가와서는 칭찬을 아까지 않으며 열정적으로 두 사람을 초대했다.“그런 거 치고는 너무 대단한 거 아니야? 정식 경기에 참가해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임구택이 소희를 한 번 쳐다보고는 웃으며 거절했다."우리는 딱히 그런 경기에 참가할 생각이 없어서.”하지만 숭배의 마음에 더욱 흥분해진 장명은 두 사람을 이대로 놓치고 싶지 않아 다시 입을 열었다.“앞으로 자주 같이 팀을 짜서 놀자! 두 사람만 있으면 우리 무조건 백전백승할 거야.”다른 사람들도 우르르 몰려와 소희와 임구택을 설득했다.이에 제일 밖에 밀려나 있던 임유민이 인파를 비집고 들어와서는 냉소했다.“왜 나를 초대하지 않는 건데? 내 실력이 그렇게 형편없었어?”“나를 몇 초만에 제압했는데 실력이 형편없을 리가 있나!”장명이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그리고 내내 얼어붙어있던 분위기는 그제야 화기애애해졌다.이때 CCTV를 한 번 훑어보고 온 코치가 두 팀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정말 대단하네요.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진정한 정글전을 본 느낌이 들 정도로 저마저도 짜릿했어요.”소희가 듣더니 미소를 지었다.‘진정한 정글전이라?’‘이들이 진정한 정글전을 겪어봤다면 절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정글전 세 글자를 입밖에 내지 않았겠지?’그렇게 날은 어느새 어두워져 다들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러던 중 내내 소희를 물고 놓지 않았던 소녀가 갑자기 다가와서는 어색하게 소희를 불렀다.“그… 이, 이
월요일이른 아침, 청아는 시간에 맞춰 장씨 그룹 건물 앞에 도착했다.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뚝 솟은 건물을 쳐다보노라니 청아는 순간 감개무량했다.분명 2년 전에도 근무했었던 곳이지만, 심경은 그때와 너무나도 달랐다.‘괜찮아! 할 수 있어!’청아는 숨을 몇 번 깊게 들이마시고 안으로 들어갔다.그리고 그녀의 이력서를 한 번 훑어본 프런트 직원이 다정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대표님께서 이미 분부하셨습니다. 바로 인사팀으로 올라가 입사 절차를 밟으시면 됩니다.”청아가 듣더니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했다. 그러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25층 인사팀으로 올라갔다.그러다 25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소식을 전달받은 인사팀 직원이 마중을 나왔고, 바로 청아를 인사팀 팀장의 사무실로 안내했다.인사팀 팀장이 이력서를 훑어보다가 청아의 경력사항을 확인한 순간 살짝 놀라서 물었다.“전에 이곳에서 일한 적이 있나요?”“네, 예전에 이곳에서 인턴을 한 적이 있습니다.”“장 대표님과는 아는 사이인 거고?”인사팀 팀장이 궁금해서 물었다.이에 청아가 덤덤하게 웃기만 할 뿐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아는 사이가 아니었으면 장시원이 면접도 생략하고 바로 나를 대표 비서 자리에 꽂아주지 않았겠지.’계약서 작성이 다 끝난 후 청아는 정식으로 장씨 그룹의 정규직으로 되었고, 인사팀 팀장이 청아에게 엘리베이터 카드를 건넸다.“이건 대표님 사무구역의 전용 엘리베이터 카드. 지금 바로 39층으로 올라가 최결 최 조수님을 찾으세요. 그분이 알아서 임무를 배치해 줄 겁니다.”“네, 감사합니다!”청아가 다시 감사를 표하고는 사무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끊임없이 변해가고 있는 숫자를 보며 청아는 순간 호랑이 굴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호랑이 굴에 들어선 찰나부터 그녀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땡-경미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러자 우아하고 고풍적인 느낌이 물씬한 대표 사무구역이 눈앞에 펼쳐졌
남색 정장을 차려입고 길쭉한 두 다리를 내디디며 청아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장시원은 덤덤하고 온아했던 평소와는 달리 늠름하면서도 사람에게 이유 모를 압박감을 주고 있었다.그리고 그의 뒤에는 회사 임원 몇 명이 따르고 있었고, 작은 소리로 인수 합병건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다.청아는 바로 몸을 돌려 한쪽에 서서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로 장시원을 향해 인사했다.“좋은 아침입니다, 대표님.”장시원이 청아를 한 번 훑어보고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이때 최결이 다가와 장시원을 향해 소개했다.“대표님, 이분은 새로 온 조수 우청아 씨입니다.”“알아.”장시원이 여전히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대표 사무실로 들어갔다.그리고 장시원의 태도에 최결이 눈썹을 올렸다.젊고 예쁜 아가씨가 면접도 거치고 않고 바로 39층으로 올라와 최결은 두 사람이 당연히 말 못 할 사이인 줄 알았다.하지만 방금 장시원의 미지근한 태도로 봐서는 또 그렇게 친밀한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내가 잘못짚었나? 설마 다른 사람이 대표님에게 사정을 해 청아 씨를 꽂아 넣은 거고, 그것 때문에 대표님이 언짢아하시는 건가?’그렇게 최결이 두 사람의 사이를 추측하고 있는 동안, 청아는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바로 서류 복사하러 갔다.한참 후, 최결은 오늘의 일정표를 들고 대표 사무실로 향했다. 그러다 장시원이 어제 커피를 마시면서 맛이 괜찮다고 했던 게 생각나 커피까지 한 잔 타주었다.고위층 임원들은 이미 회의실로 들어갔고, 사무실에는 장시원뿐이었다.최결이 커피를 장시원 앞에 내려놓고 오늘의 일정을 그에게 보고했다.장시원이 들으면서 처리해야 할 서류에 사인을 하고 난 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앞으로 커피나 차를 타는 잡일은 우청아 씨에게 맡기세요.”최결이 듣더니 순간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네!”“그리고 우청아 씨 오늘이 출근 첫날이라 아직 39층의 업무에 대해 익숙하지 않을 거니까, 최 조수님께서 많이
잠시 후, 청아가 최결을 따라 회의실에 들어섰고, 회의는 그제야 비로소 정식으로 시작되었다.회의에서 몇몇 고위층 임원은 열띤 토론을 통해 인수합병건의 이해득실을 분석하면서 각자의 해결방안을 제기했다.청아는 최결의 옆자리에 앉아 임원들이 제기하는 내용을 열심히 귀담아들으며 그 속에서 중점을 골라 기록했다.그리고 그러는 청아의 옆모습을 장시원은 이미 5초 넘게 쳐다보았다. 흰색 셔츠에 검은색 긴 바지 차림을 한 청아는 오늘따라 확실히 커리어 우먼 같았다. 다만 약간의 젖살이 붙어있는 하얀 얼굴은 옷차림이랑 다르게 많이 깜찍해 보였다. 특히 지금처럼 말하지도 않고 웃지도 않는 모습은 이상하게 더욱 위화감이 들었다.‘몸매는 수척한데, 하필이면 둥글고 윤택한 얼굴을 가졌으니.’“대표님, 명실 쪽에서 제시한 조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때 한 임원이 갑자기 장시원을 향해 물음을 제기했고, 그 소리에 청아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장시원을 쳐다보았다.그러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장시원이 천천히 시선을 거두어들이고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명씨 가문에 지금 분열이 나타났고, 명실이 이렇게 쉽게 우리 손에 수매되기를 원하지 않은 몇 명이 고의로 중간에서 방해하고 있습니다.”장시원의 대답에 다들 분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그제야 문득 문제의 중심을 알게 된 듯했다.그렇게 회의는 두 시간 동안 진행되었고, 회의가 끝난 후 장시원은 또 부대표를 사무실로 불러들여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그러다 청아가 마실 차를 가지고 사무실에 들어서자 부대표가 웃으며 물었다.“신입?”청아가 듣더니 바로 공손하게 인사했다.“처음 뵙겠습니다, 배 부대표님.”아까 회의실에서 청아는 이미 장시원 주변 몇몇 고위층 임원들의 자료를 다 살펴보았다. 그중 당원이라는 임원과 지금 사무실에 앉아있는 배강 배 부대표가 바로 장시원의 아주 유능한 오른팔이다.“장 대표님의 관심을 받을 만큼 예쁘게 생기긴 했네요. 오자마자 39층에 배치된 걸 보니.”배강이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
차에 올라탄 지아윤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큰어머니, 이제야 제가 한 말 믿으시겠죠?”권수영은 약간 흥분한 표정으로, 눈빛이 반짝였다.“저 아가씨, 혹시 남자친구 없나?”“물론 없죠!”“그럼 기다릴 필요 없겠네. 빨리 승현이와 만나게 해야겠어.” 권수영은 이미 마음이 급해져 있었다.“제가 재아에게 말만 하면 분명히 승낙할 거예요.” 아윤은 눈을 굴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할머니의 혼수품도 되찾고, 오빠에게 좋은 여자친구까지 소개해 드렸으니, 큰어머니께서 저를 어떻게 보상해 주실 건가요?”권수영은 속으로 이익을 따져 보며 생각했다. 만약 도씨 집안과 결혼까지 성사된다면, 그야말로 돈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이득이었다.“네가 승현이와 저 아가씨를 이어준다면, 내가 할머니의 혼수품을 되찾아도 그중 절반은 네 몫으로 줄게.”“정말 약속하신 거죠?” 아윤의 눈이 반짝였다.“그럼, 내가 직접 약속했는데 속이겠니?”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반드시 최선을 다할게요!”...집에 돌아온 아윤은 바로 재아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권수영과의 만남 이유를 은근히 흘리며 설명했다. 그리고는 지승현을 칭찬하며 그와 한번 만나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재아는 그제야 모든 상황을 깨달았다. 속으로 기분이 상했다. 첫째는 자신이 누군가의 결혼 상대자로 몰래 계획된 것 같아서였고, 둘째는 현재 중간급인 지씨 집안과 연결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래서 재아는 시큰둥한 태도로 말했다.“야, 그런 얘기를 진작해주지 그랬어? 미안하지만 난 지금 연애할 생각 없어. 아마 큰어머니께서 실망하실 거야.”아윤은 재아의 기분이 상한 것을 눈치채고 급히 사과했다.[미안해, 재아야. 정말로 큰어머니께서 그냥 너를 보고 싶어 하셔서 그런 거야. 괜한 부담은 갖지 마.]아윤이 이렇게 간곡히 사과하자, 재아는 약간 기분이 풀리며 말했다.“괜찮아. 나 화난 건 아니야. 그냥 난 당분간 일에 집중하고 싶어. 외할아버지도 내가 빨리 결혼하길 원치 않으셔.”아윤은 다시
“몇 년 전에 강성에 왔어요. 오자마자 회사를 차렸죠. 꽤 돈이 많아 보이긴 했지만, 특별한 가정 배경은 없어 보였어요.” 지아윤은 권수영에게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예쁘장한 여자아이인데, 가정 배경도 없이 돈이 많고, 다른 지역으로 와서 그런 일을 하는 회사를 차렸다라.”“대체 전에 무슨 일을 했을까요? 큰어머니처럼 세상을 많이 살아본 분이야 더 잘 아시겠죠.”권수영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정말이니?]“보세요. 얼마되지도 않아 오빠를 완전히 홀렸잖아요. 그 여자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죠. 저는 돈을 노리고 있는 것 같아 걱정돼요.” 아윤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고, 권수영은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렸다.[하지만 네 할머니가 유언장을 다 작성해 놓았잖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니?]“오빠가 강아심과 빨리 헤어지게 하면 돼요. 그들이 헤어지면 강아심은 더 이상 형님의 여자친구도, 우리 집안 사람도 아니에요.”“할머니의 혼수품을 왜 남이 가져가야 하죠?” 아윤이 단호히 말하자 권수영도 망설였다.[네가 너무 심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니? 난 네 할머니의 혼수품을 바라진 않아. 하지만 우리 집안의 재산이 외부로 나가는 건 나도 막고 싶어.][그런데 네 말이 사실이라도, 아심이 오빠랑 결혼하면 괜찮지 않을까?]“그 여자가 우리 집안에 시집오는 게 영광이겠죠. 그런데 만약 도망치기라도 하면요?” 아윤이 비웃자, 권수영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내가 뭘 어떻게 하란 말이니?]“큰어머니!” 아윤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새 여자친구를 소개해 드릴게요!”[새 여자친구?]“제 절친이에요. 누군지 맞춰보세요.” 아윤은 흥분된 표정으로 말했다.“대화가 도경수 어르신의 손녀, 도재아요. 정말 명문가의 아가씨고, 아주 예뻐요.”권수영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진짜 도경수 어르신의 손녀라고? 네가 어떻게 그런 사람을 알아?]“진짜예요! 제가 도씨 저택에도 자주 갔어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아윤은 자신만
“할머니!” 지아윤은 할머니를 한 번 부르더니 아무 반응이 없자, 노인을 옆으로 살짝 밀고 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갈색 종이봉투가 드러났다. 이에 아윤의 눈이 반짝이며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종이봉투를 꺼내 안의 서류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대충 훑어보는 사이,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고, 분노가 담긴 시선으로 침대에 누운 할머니를 노려보았다.양세민이 들어올까 봐, 아윤은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서류를 사진으로 찍었다. 찍고 나서 봉투를 원래대로 넣고 방을 빠져나왔다.차로 돌아가면서 아윤은 점점 화가 치밀었다. 원래는 부모님께 전화하려다 생각을 바꿔 큰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권수영은 마침 카드놀이를 하던 중이라, 아윤의 다급한 전화에 나와서 조금 짜증이 났다.[무슨 일이야, 그렇게 급하게?]아윤은 찍어둔 사진을 권수영에게 보여주며 물었다.“큰어머니, 혹시 강아심이라는 사람 아세요?”권수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사진을 확대해 보다가,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강아심이 누구야?]아윤이 찍은 사진은 할머니의 유언장이었다. 유언장에는 할머니가 자신의 혼수품 대부분을 아심에게 남긴다고 적혀 있었다.아윤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할머니 친정은 예전부터 배를 만드는 집안이었고, 부유한 가문이었잖아요.”“혼수품은 모두 고가의 골동품, 금은보화들인데, 그 가치는 큰어머니가 더 잘 아시겠죠!”“할머니가 그때 집을 나가시면서 혼수품을 다 가져가셨잖아요.”“큰 트럭으로 한 차나 실어 나르셨다던데, 이 집에서 몇 년을 혼자 사시면서 큰돈을 쓸 일이 없었으니 그 혼수품들은 그대로 남아 있을 거예요.”“그런데 이제 돌아가실 날이 가까워졌는데, 그 재산을 아들, 손자, 손녀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어떤 낯선 사람에게 준다니, 정말 이상하지 않나요?”권수영도 짜증이 나서 말했다.[네가 나한테 그런 얘기해 봤자야. 내가 시킨 것도 아니고, 나도 강아심이 누군지 몰라!]“큰어머니가 모르셔도 저는 알아요.” 아윤은 휴대폰을 뒤적이며 몇 장의 사진을 더 보여주었다.권
아심은 별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부러 창문 밖을 보며 시언의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별장 안으로 들어가 거실을 지나며 외투를 벗어 소파에 걸어두고, 약 상자를 들고 시언의 방으로 갔다.“들어와.” 남자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심은 문을 열고 들어갔고, 시언이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아심은 외투를 소파 등받이에 놓으며 말했다.“외투 여기 두었어요.”“응.” 시언은 고개도 들지 않고 의자에 등을 기댔고, 아심은 약 상자를 들고 다가가며 준비를 시작했다.“옷 벗어요. 약 다시 바를게요.”그제야 시언이 그녀를 힐끗 보더니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아심은 시선을 피한 채, 소매를 걷어내자 시언의 상처에 감아둔 붕대를 풀었다. 겉옷은 비에 젖었지만, 다행히 안쪽의 붕대는 겉 부분만 약간 축축했을 뿐, 상처 부위는 무사했다.시언이 앉아 있고 아심이 서 있었기에, 아심은 약간 허리를 숙여야 했다. 긴 드레스가 아래로 늘어져 아심의 어깨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아심은 능숙하게 손을 움직이며 상처를 살폈지만, 시언의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자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시언의 눈은 약간의 속쌍꺼풀이 있고, 길게 뻗은 눈매가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시언의 차가운 성격과 강한 기운이 그 눈을 더 깊고 날카롭게 만들었으며, 그가 누군가를 바라볼 때면 누구라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간신히 약을 다 바르고, 강아심은 약 상자를 정리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시언은 몸을 돌려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다시 채우기 시작했다.아심은 별다른 인사도 없이 문을 나와 문을 닫았다. 어둡고 조용한 복도에 서자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그녀는 땀이 살짝 밴 등을 느끼며 문을 돌아보았다가 천천히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강성비가 내리는 날, 지아윤은 마지못해 골목 밖에 차를 세우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당 앞에 도착하자 아윤은 문을 밀고 들어가며 외쳤다.“
도도희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럼 네가 사람을 잘못 본 거였네.”이반스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금방 알아봤어.”도도희의 눈매는 부드러워졌고, 담담히 말했다.“피곤하지? 우선 쉬어. 내가 숙소를 마련해 줄 테니까.”“같이 지낼 수 있어?” 이반스는 말을 하자마자 얼른 정정했다.“아니, 내 말은 가까운 곳에 있으면 좋겠다는 뜻이야.”도도희는 잠시 생각하다가, 결국 이반스를 자신의 별장에 머물게 하기로 했다....아심과 시언은 약을 보건실에 전달하고 돌아오는 길에 도도희를 만났다. 시언의 휴대폰이 울리자, 그는 도도희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전화를 받으며 먼저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비가 이제 그칠 것 같네. 공기도 상쾌하니, 같이 산책할까?” 도도희가 웃으며 말했다.“좋아요!” 아심은 우산을 접고 도도희와 함께 잔디밭 한가운데 돌길을 따라 걸었다.“야간 당직을 맡을 사람을 이미 정해놨어. 약도 충분하니 큰 문제는 없을 거야. 별장에 의사가 있어서 다행이야.”도도희의 말에 아심은 고개를 끄덕였다.“내일이면 아이들 열도 내릴 거예요.”도도희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관리자한테 들었어. 아이들을 위해 비타민 젤리를 많이 샀다던데, 비용은 나한테 청구해.”“괜찮아요!” 아심은 가볍게 웃었다.“비싼 것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에요. 저랑 같이 수업도 들었던 친구들이니까요.”도도희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넌 원래 쉬러 온 건데, 오히려 돈을 쓰게 했네.”“덕분에 돈으로 행복을 산 거예요. 고맙다고 해야죠.” 아심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시겠지만, 저는 돈밖에 없는 사람이잖아요!”도도희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아, 맞다.” 아심이 말했다.“허락도 안 받고 이반스를 데리고 왔는데, 혹시 불편하신 건 아니죠?”“괜찮아. 걔가 갑자기 C국에 온 건 나도 몰랐어. 다행히 너희를 만나지 않았으면, 아마 마을에서 하루 종일 헤맸을 거야.” 도도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내가 올 때
아심은 웃음을 지으며 창문을 내리고 뒤따라온 금발 남자를 바라보았다.“차에 타세요. 도도희 이모는 마을에 안 계시고, 조금 더 가야 해요.”“고마워요!” 금발 남자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하얀 이를 드러냈다. 그는 뒷좌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시언은 핸들을 잡고 있다가, 백미러에 비친 금발 남자의 미소를 보고 짜증이 서린 표정을 지었다. 금발 남자는 차가 안정되자 아심에게 명함을 내밀며 우아하고 예의 바르게 웃었다.“안녕하세요, 제 명함입니다.”아심은 명함을 받았다. 검은 갈색 카드에 이반스라는 이름과 뒤에 길게 이어진 성씨가 적혀 있었다.명함의 왼쪽 위에는 어떤 가문의 문양 같은 룰렛 모양의 상징이 그려져 있었다. 그 외에 다른 정보는 없었다.아심은 그 룰렛 모양의 문양이 어딘가 익숙했지만, 어디서 본 것인지 기억나지 않았다.시언이 옆눈으로 그것을 한 번 보고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고, 아심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강아심이에요.”“도도희가 말하길 여기에서 제 성을 이씨고 이름을 반스라고 소개하라고 하더군요.”아심은 순간적으로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이름이 반스?”남자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네?”아심은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아니에요. 반스? 정말 독특한 이름이네요!”이반스는 자랑스럽게 말했다.“도도희가 지어준 이름이에요.”아심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반스 씨와 도도희 이모는 친구세요?”“네, 우리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죠.” 이반스는 기쁘게 말했다.“하지만 이번이 처음으로 고향에 왔거든요.”“우리나라에 오신 걸 환영해요. 여기서 좋은 시간 보내세요.” 아심은 다정하게 말했다.“고마워요!” 이반스는 점잖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행동과 말투에는 귀족 같은 품위가 배어 있었다.그 후로는 차 안에 침묵이 흘렀다. 다시 돌아갈 때, 그들은 이전에 자갈이 쌓였던 곳을 지나갔다.아심은 뒤를 돌아보며 이반스에게 말했다.“자갈이 있어서 조심하셔야 해요.”이반스는 차분하게 창밖을 내다보며
금발의 남자는 놀라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강아심은 잠시 멍하니 있었지만, 이내 강시언의 팔을 뒤집어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오해했어요. 이 외국인 분은 도도희 이모를 찾고 있어요.”그러자 시언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의아해했다.“도도희 이모를 찾는다고?”“정말로 도도희를 아세요? 혹시 만나게 해주실 수 있나요?” 금발 남자의 눈빛은 간절하고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시언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찾아서 뭐 하려는 거죠?”금발 남자는 즉시 대답했다.“제 친구이고 C국까지 특별히 찾아왔어요. 만약 아신다면, 제발 저를 데려가 주세요.”“왜 직접 전화하지 않죠?”“원래는 깜짝 놀라게 해주려 했어요. 그런데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휴대폰을 잃어버려 전화도 못 하고, 어디 있는지 정확히 몰라요.” 금발 남자는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이 마을에서 하루 종일 찾아 헤맸어요.”“이렇게 멀리 찾아올 정도로 친한 사이인데, 휴대폰을 잃어버렸다고 해도 번호를 기억 못 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나요?” 시언은 의심을 품은 듯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아심은 첫날 도도희가 전화를 받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시언을 끌어당기고, 금발 남자에게 말했다.“우리가 어디 있는지 알아요. 따라오세요.”시언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보았으나, 아심은 시언을 무시하고 금발 남자에게 말했다. “따라오세요!”“정말 고마워요!” 금발 남자는 기쁨이 가득한 눈으로 아심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아심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시언의 손목을 잡고 차로 향했다.그러나 시언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낮게 말했다.“정체도 모르는 사람을 데려가려고?”아심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장난스럽게 웃었다.“진언 님, 여긴 삼각주가 아니에요. 모든 사람을 간첩처럼 심문할 필요는 없잖아요.”아심은 도도희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며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시언은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지금 거짓말을 하
아심은 잠시 멍해지며 시언의 어깨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우산을 고르려고 손을 뻗었지만, 시언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하나면 충분해!”“우산 여러 개 사면 둘 데도 없어!”그렇게 말하며 아심을 끌고 걸어갔다. 아심은 우산을 파는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듯이 뒤돌아보며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은 약국을 찾아 들어갔다. 아심은 카운터로 가서 약사에게 필요한 약을 말하려 했지만, 시언이 먼저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약사에게 내밀었다.“이대로 준비해 주세요.”아심은 그 종이를 보고 놀라며 시언을 쳐다보자. 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관리자가 준 목록이야. 도도희 이모는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어.”아심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알고 있더라도 어쩌겠는가?’약이 준비되는 동안 강아심은 약국을 돌아다니다가 진열대에 놓인 여러 가지 비타민 젤리를 보고, 작은 소리로 시언에게 물었다.“이거 효과 있어요?”시언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네가 먹으려고?”아심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학생들에게 주려고요. 작은 선물로 주면 좋을 것 같아서요.”시언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근데 왜 그렇게 작은 목소리로 말해? 무슨 숨길 병이라도 있는 줄 알았잖아.”아심은 시언을 째려보았다.“당연히 약사한테 들릴까 봐 그런 거죠.”“왜 들리면 안 되는데?” 시언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이런 건 당신도 잘 모르는구나?” 아심은 자신이 드디어 남자보다 나은 부분이 있다는 듯이 우쭐해하며 말했다.“약사가 듣기만 하면 엄청나게 홍보해 대면서 판단을 흐리게 만들 거예요.”“흥!” 시언이 코웃음을 쳤다.“네 머리가 그렇게 똑똑한데, 누가 네 판단을 흐릴 수 있겠어?”시언의 말이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아심은 무시하고 비타민 젤리의 효능을 검색했다.약사가 필요한 약들을 다 준비한 후, 아심은 비타민 젤리 과일 맛 60병도 달라고 했다. 아이들에게 사탕처럼 줄 수 있는 선물로, 그들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시언은 키가 커서 두 사람이 함께 우산을 쓰는 게 아심이 혼자 쓰는 것보다 훨씬 수월했다. 아심의 몸은 시언의 팔에 거의 닿아 있었고, 우산이 가로등 불빛을 가려 우산 아래는 더 어두워졌다. 마치 둘만의 작은 공간이 형성된 듯했다. 그 공간에는 빗방울이 우산에 떨어지는 소리와 두 사람의 얕은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바깥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기분이었다.도도희는 학생들이 머무는 별장으로 향하다가 멀리서 가로등 아래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았다.시언이 우산을 들고 있었지만, 우산이 아심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어 아심을 비에 완벽하게 가려주고 있었다. 반면 시언의 어깨는 반쯤 비에 젖어 있었다.기주현도 그 모습을 보고 얼른 말했다.“제가 가서 우산 하나 더 가져다줄게요.”“괜찮아!” 도도희는 웃으며 주현을 막았다.“우리 먼저 아픈 학생들부터 보러 가자.”비록 한쪽 어깨가 젖었어도, 그 사람은 마음속으로 기분이 좋을 것이다. ...아심은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가려 했지만, 시언이 말했다.“뒷자리에 앉아.”아심은 잠시 멈칫하다가 웃으며 말했다.“설마 그렇게 운이 나빠서 산사태를 만날 리는 없겠지?”아심은 안전벨트를 매고 자리를 잡았다. 시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를 출발시켰다.별장에서 마을까지는 차로 한 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길 대부분이 산길이었고, 이미 어두워진 데다 비까지 내려 길 위에는 차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산길 한쪽은 절벽, 반대쪽은 깎아지른 듯한 벼랑으로, 차 두 대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너비였다. 가로등도 멀찍이 하나씩 있을 뿐이었다.아심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검은 어둠 속에서 빗물이 차의 속도에 따라 빠르게 흘러갔고, 시언의 날카로운 옆모습이 창에 비쳤다.아심은 계속 창밖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 시언이 고개를 돌렸을 때, 창에 비친 아심의 눈길이 자기 눈과 마주쳤다. 이에 아심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길은 평탄하게 이어졌다. 산길을 거의 빠져나갈 즈음, 아심이 앞을 보고 급히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