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얼굴을 붉혔지만 또 안색이 창백해졌다.태경은 항상 그녀를 쉬운 여자로 취급했다. 아마도 사랑의 역할은 그의 욕망을 해소하는 것밖에 없는 것 같았다.술자국에 얼룩진 사랑의 손가락을 보며, 태경은 그녀의 손을 잡더니 고개를 숙여 진지하게 손수건으로 사랑의 손을 닦아줬다.사랑은 갑자기 부드러움을 베푸는 태경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항상 태경의 마음에서 새어 나오는 그 사소한 사랑을 갈망했다.‘많이 안 줘도 돼, 조금이면 충분해.’사랑은 저도 모르게 어느 해 여름방학 전의 마지막 체육수업을 떠올렸다. 그녀는 교실 창밖을 지나고 있었고, 바람은 강의동 밖의 꽃나무를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이때, 찬란한 햇빛은 마침 태경의 옆모습을 비추고 있었다.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소년은, 장난스럽고 유치하게 자신의 손목과 세영의 손목을 리본으로 묶었다. 세영은 책상에 엎드려 깊이 잠들어 있었다.태경은 머리를 받치고,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예쁜 눈에 환한 미소를 드러내고 있었고, 그렇게 애정이 넘치는 눈빛으로 자고 있는 소녀를 지켜보았다.교실이 시끄러워지자, 그는 다른 사람에게 조용하라는 손짓을 했다. 세영을 방해하면 안 되니까.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니, 사랑은 마음이 쓰라리면서 씁쓸했다. 태경은 남을 사랑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뿐이었다.‘그치만 분명히 내가 먼저 태경과 만났는데. 이 남자도 날 직접 찾아와서 보답하겠다고 약속했는데... 나중에 전부 잊어버렸다니... 아니야... 단지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을 뿐이야.’사랑은 정신을 차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자선 연회가 끝났을 때, 사랑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고, 배고파서 무척 괴로웠다.‘뱃속의 아이는 입맛이 아주 좋은 것 같아.’지금 사랑은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냉장고에 케이크가 있었기에, 그걸로 배를 채울 수 있었다.차에 타자, 사랑은 태경에게서 나는 술기운을 맡았다. 그리 짙은 냄새는 아니었다.태경은 술을 마셔도 항상 자제했다. 그는 접대할 필요가 없었고,
사랑이 자신을 세 번이나 거절했기 때문일까, 흥이 깨진 태경은 기사에게 그녀를 별장으로 데려다 주라고 지시한 후 아무렇지 않은 듯 떠나버렸다.샤워를 마친 사랑은 거실에 앉아 케이크를 한 입 먹어 보았다. 달콤해야 할 케이크였지만, 그 맛은 지금의 사랑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그 순간, 눈물이 한 방울씩 손등 위로 떨어졌다. 임신 탓인지 사랑은 요즘 감정이 쉽게 요동쳤다. 울고 싶지 않았지만, 눈물은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내렸다.사랑은 눈물을 훔치고 한동안 거실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음이 차츰 가라앉자 그녀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눈은 자꾸 감겨왔지만, 잠은 그저 멀기만 했다.결국 사랑은 옆에 놓여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고, 카톡을 열었다.[태경 씨, 나 임신했어요.]삭제하고 다시 편집했지만, 그녀는 전송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됐어. 말하면 뭐가 달라진다고.’사랑은 주말에 병원에 가서 아이를 지우기로 결심했다. 눈을 꼭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꿈속에서 사랑은 소년 시절의 태경을 보았다. 그의 손과 발은 날카로운 철사에 묶여 있었고, 눈은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의 호흡은 너무나 미약해, 마치 이미 숨이 멎은 것처럼 보였다.어린 사랑은 밧줄을 풀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힘이 부족했다. 결국 손가락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뒤에야 철사를 풀 수 있었다.그러던 찰나, 둘을 납치했던 남자가 다시 돌아왔다. 남자는 사랑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고, 그녀의 귓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가득했다.그때의 태경은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경찰들이 그 남자를 끊임없이 추적하고 있었기에, 그는 화풀이로 태경을 무참히 때렸다.사랑은 태경이 죽을까 봐 두려워 매일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마침내 동화까지 들려주며 그의 곁을 지켰다.“꼭 살아야 해.”이것은 사랑이 태경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이었다.잠에서 깨어날 때, 마침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사랑은 오랜만에 납치 사건과 관련된 꿈을 꿨지만, 어린 시절의 상처는 여전
사랑은 태연하게 돈을 받은 다음, 주방에 가서 저녁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담담한 척하며 태경에게 문자를 보냈다.[저녁에 돌아와서 식사할 거예요?]결혼한 후에도 사랑은 태경과 동거를 하며 대부분 시간을 보냈다.솥 안의 국은 이미 끓기 시작했다.오랜 기다림 끝에, 사랑은 냉담한 답장을 받았다.[아마도.]사랑은 식탁에 앉아 한 상 가득 차린 음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임산부는 감정이 예민해서, 이미 사랑받지 못하는 것에 익숙해졌지만, 오늘 밤 여전히 외로움을 느꼈다.그녀는 시계를 바라보았는데, 이미 밤이 되었다. 식탁 위의 음식도 식기 직전이었다.사랑은 다시 음식을 데웠고, 또 30분이 지났지만 시종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신중하게 문자를 여러 번 편집했다.[저녁을 준비했는데, 언제 돌아올 거예요?]사랑은 눈을 드리우며 자신이 보낸 문자를 쳐다보더니 또 무뚝뚝하게 삭제했다.집안의 가정부도 곧 퇴근할 시간이 되었다.사랑이 그녀에게 말했다.“이모님, 이 음식들 다 버려요.”윤미숙은 이 여주인을 무척 동정했다. 집안의 가정부도 태경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네, 아가씨.”가정부의 월급도 태경이 책임졌다. 처음에 그들은 사랑을 사모님이라고 불렀는데, 한 번은 태경이 이를 들었고, 불쾌해하지 않았지만 그저 앞으로 그녀를 아가씨라 부르라고 했다.깍듯한 호칭인 동시에 거리감이 있었다....밤 10시가 되자, 사랑은 소파에 앉아 멍하니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화면 속에는 그녀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게스트가 나오고 있었다.얼마 전, 이 여자 연예인과 태경이 함께 찍힌 사진이 기사로 떴다. 텔레비전 속에서 시크한 여신 같았던 그녀는 태경 앞에서는 활짝 웃으며 그의 팔을 다정하게 끼고, 한밤중에 호텔을 드나들었다.사랑은 태경을 좋아하는 여자들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여자들은 모두 태경에게 마음을 고백할 용기가 있었지만, 정작 사랑만은 그러
사랑은 간신히 계약을 체결했지만, 유정일은 이미 인사불성이 되도록 취했고, 그녀의 곁으로 걸어갔다.“강 비서, 난 네가 정말 마음에 드니까, 앞으로 이런 일 있으면 다 너에게 맡길 수 있는데.”유정일은 비틀거리며 등불 아래의 미인을 바라보았고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는 참지 못하고 사랑을 껴안으며 키스하려 했다.“강 비서 정말 너무 예쁘네.”술 냄새에 담배 냄새가 섞이자, 사랑은 속이 울렁거려서 토하고 싶었고, 그를 힘껏 밀쳤다.그러나 유정일은 사랑이 밀당하는 줄 알고, 음탕하게 웃으며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놓으려 하지 않았다.“강 비서, 혼자 C시에서 일하는 건 쉽지 않은데, 내가 많이 도와줄게.”말을 마치자, 그는 또 사랑의 얼굴에 뽀뽀를 하려 했다.사랑은 차갑게 얼굴을 돌리더니 유정일의 발을 세게 밟았다. 그는 아파서 이를 악물었고, 버럭 화를 냈다.“감히 날 밟아!”사랑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유 사장님, 지금 바로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남자는 술냄새로 가득한 입을 열더니, 조금도 개의치 않은 모양이었다.“내가 무서워할 줄 알아?”유정일은 또 달려들더니 강제로 사랑을 안으려 했다.복도에서 벌어진 두 사람의 다툼은 많은 눈길을 끌었다. 술에 취한 남자는 힘이 셌고 또 무척 무거웠고, 사랑은 그의 발을 또 한 번 세게 밟았다. 이때 총총히 달려온 직원이 남자를 떼어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사과했다.“유 사장님, 정말 죄송합니다.”사랑은 옆에 서서 옷을 정리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익숙한 사람과 시선을 마주쳤다.태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복도 끝에 서 있었다. 양복 차림에 안색은 냉담했고, 입가에 은근히 미소가 어려 있었지만 마치 그녀를 비웃는 것 같았다.사랑은 태경의 눈빛에 가슴이 찔렸다.‘어떻게 여기에 나타난 거지?’그녀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탁 하는 소리와 함께, 태경은 담배에 불을 붙였고, 담배 연기가 흩날리기 시작했다.“이리 와.”사랑은 천천히 그를 향해 걸어갔다.태경은 고개를 숙이고
쉬운 여자란 말에 사랑은 얼굴이 창백해졌고, 머리까지 어지러웠다. 그녀는 손톱으로 힘껏 손바닥을 꼬집으며 통증으로 정신을 차리려 했다.‘아마 태경에게 있어, 난 돈만 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여자로 보이겠지.’사랑은 깊이 숨을 들이쉬면서 결코 변명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최근에 좀 한가해서 마침 디자인 주문을 받았을 뿐이에요.”사랑은 태경과 어색한 관계로 되고 싶지 않아 먼저 한 걸음 물러섰다.태경은 그녀가 이런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유정일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봤어?”사랑은 침묵했다.태경은 그녀의 턱을 치켜들며 매서운 기세로 차갑게 입을 열었다. “알아본 적 없구나.”사랑은 너무 지쳤다. 지금 아무리 설명해도 태경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도 이해가 안 갔다.‘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건지 모르겠네.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다니, 정말 심태경 답지가 않아.’그래서 그녀는 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남자의 타고난 소유욕 때문인가? 자신의 아내가 밖에서 얼굴을 내밀고, 다른 남자와 밥 먹고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사랑은 얼굴을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부드러운 불빛이 여자의 지나치게 아름다운 얼굴을 비추자, 촉촉한 입술은 마치 빨간 사과처럼 탐스러웠고, 달콤한 향기를 풍겼다. 태경은 저도 모르게 키스를 하고 싶었다.태경은 앞으로 다가가서 사랑의 얼굴을 들어올렸다.“그 사람 오늘 밤 어딜 건드렸지?”사랑은 이 질문에 좀 난처했다. 그녀는 얼굴을 돌려 말을 하지 않았다.태경의 안색은 여전히 담담했고, 목소리도 매우 평온했다. 마치 대수롭지 않은 일을 물어보고 있는 것 같았다.“말해.”사랑은 입술을 깨물며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하얗고 가는 엄지손가락으로 장난치듯 사랑의 입술을 어루만졌다.태경의 목소리는 약간 잠겼다.“여기 만졌어?”사랑은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저었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었는지, 남자의 엄숙한 안색이 조금 누그러졌다.태경은 길
태경은 사랑의 말을 무시하고, 집사에게 차 대시시키라고 했다.사랑은 그의 소매를 움켜쥐며 억지로 정신을 차렸다.“정말 병원에 갈 필요가 없어요. 그냥 생리 온 것 같아요.”태경은 한참 생각에 잠겼다.“요 며칠이 아닌 것 같은데.”계약 결혼이었지만, 두 사람은 부부로서 해야 할 일을 빼먹지 않았다.태경은 정상적인 남자였기에, 생리적 욕구가 있었다. 그를 만족하기엔 쉽지 않았는데, 어떨 때는 몇 번이나 사랑의 생리기간과 충돌되었다.사랑은 태경의 기억력이 이렇게 좋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는 얼굴을 살짝 돌리며 감히 태경의 눈을 보고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요즘 날짜가 그리 정확하지 않거든요.”태경은 사랑의 이마를 만졌는데 체온은 정상이었다.사랑은 그에게 안긴 채로 침실에 들어갔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고, 배의 통증이 점차 사라지자, 사랑도 많이 편안해졌다.태경은 약 상자에서 진통제를 꺼내 건넸다.“약 먹고 자.”사랑은 멍하니 진통제를 받았는데, 알약을 바라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사실 지금의 태경은 확실히 친절하고 다정했다. 평소의 그는 냉정하고, 자제하고 또 까칠했으니까.잠시 후, 남자는 다시 사랑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사랑은 물컵을 받으며 나지막이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함부로 약을 먹지 못했다.‘아이를 가졌으니 조심해야 되는데...’태경은 셔츠의 단추를 풀며 물었다.“왜 안 먹어?”사랑은 아무 핑계를 댔다.“이제 좀 나아졌어요. 의사가 진통제를 먹지 않는 게 좋다고 했거든요. 시간이 지나면 약에 의존성이 생기니까요.”태경은 더 이상 자세히 묻지 않고 욕실에 가서 샤워를 했다. 그는 핸드폰을 침대 위에 던졌다.사랑은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손바닥으로 배를 어루만졌다.‘아직 두 달도 채 안 되어서,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모르겠네.’사랑은 주말에 예약한 수술을 생각하니, 가슴이 벌벌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아이를 지우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
태경은 베란다로 나가 전화를 걸었다.사랑은 키가 크고 훤칠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이 생각보다 훨씬 냉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태경이 전화 너머의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전화할 때 그의 표정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차가웠던 미간이 점차 풀리면서 입가에는 담담한 미소가 떠오르고, 모처럼 부드러운 기색이 비쳤다.말없이 시선을 돌린 사랑은 침대 시트를 힘껏 쥐었다. 심장은 마치 갈기갈기 찢어진 것만 같았다.몇 분 후, 태경이 전화를 끊고 돌아왔다. 사랑은 자신이 참을성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오늘 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그녀는 작은 얼굴을 들어 태경을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강세영 씨 귀국했어요?”사랑은 이미 남에게서 세영이 귀국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영은 어릴 때부터 사람들에게 떠받드는 공주로 살았는데,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세영이 공항에 도착하자, 동창들은 이미 SNS에 사진을 올리며 그녀를 환영했다.태경은 가슴을 드러내는 짙은 색의 가운을 입고 있었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랑의 눈빛에 은근히 숨이 막혔다.“응.”사랑은 침묵했다.‘나도 묻지 말았어야 했는데.’태경은 화가 났든 안 났든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영원히 냉담한 표정을 지은 채, 그의 마음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방의 불을 끄고 침대 머리맡의 작은 등을 남겨두었다.사랑은 자신을 이불 속으로 숨기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코를 훌쩍거리며 눈물을 삼키려 애썼다.침대에 누운 태경은 사랑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뜨겁고 단단한 그의 몸이 그녀를 품에 가두었다. 둘의 몸은 서로 닿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친밀했다.남자는 코끝으로 사랑의 어깨를 가볍게 문질렀고,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 태경의 손은 그녀의 배를 어루만졌고, 그 뜨거운 온도는 끊임없이 전해져 왔다.그는 낮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좀 괜찮아졌어?”사랑은 태경이 자신을 부드럽게
사랑은 조용히 자신에게 말했다. ‘커피 한 잔 타는 것뿐이니, 아무 일도 없을 거야.’사랑은 아메리카노 두 잔을 준비해 대표님 사무실로 가져갔다.태경은 냉정하게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셔츠의 소매는 위로 말아 올려져 있었고, 드러난 하얀 손목조차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심심한 듯 손가락으로 펜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사랑의 시선은 소파에 앉아 있는 세영으로 향했다. 세영은 오늘도 눈에 띄는 빨간 벨벳 탱크톱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곱슬머리 덕분에 매력이 한층 더 강조된 모습이었다.세영의 미모는 화려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녀의 이목구비는 정교했고, 눈매에는 요염한 빛이 서려 있었다.지금 세영은 나른하게 태경의 사무실 소파에 엎드려 있었고, 다리를 꼬고 앉아 그의 책과 서류들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심심했던 것인지, 힐끗 한 번 쳐다보곤 바로 옆으로 던져버렸다.“태경아, 네 사무실은 왜 이렇게 검은색 아니면 하얀색뿐인 거야? 너무 밋밋하지 않아?” 사랑은 세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세영이 당당하게 태경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으며, 사랑은 뜻밖에도 조금 부러움을 느꼈다.태경은 결벽증과 강박증이 있는 사람이었다. 사무실 안의 서류는 덕훈조차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지만, 세영은 오히려 마음대로 던져버릴 수 있었다.마치 누군가의 시선을 알아차린 듯, 세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사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썹을 들어올리며 붉은 입술을 의미심장하게 구부리며 미소를 지었다.사랑을 훑어보는 세영의 눈빛은 무척 차가웠다. 그녀는 자신의 불만을 감추며 일부러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태경에게 물었다.“이 사람이 네 비서야?”대답을 듣기도 전에, 세영은 천천히 일어서서 머리를 뒤로 넘기더니 태경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왜 이렇게 예쁜 비서를 쓰는 건데?”세영의 비아냥에 익숙해진 태경은 사랑을 보더니 먼저 나가라고 했다.태경은 자신의 사생활이 들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설령 그 사람
사랑은 순간 멍해졌다. 웃을 수도, 그렇다고 웃지 않을 수도 없었다. 주변이 고요해지고, 어쩐지 분위기가 묘하게 아슬아슬해졌다. 다행히 간호사가 와서 그녀의 링거를 빼주어 그 어색함이 조금이나마 덜어졌다. 태경은 차를 몰고 나와 그녀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감싸며 걸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냉랭한 기운과 은은한 압박감에 사랑은 걸음걸이가 조금씩 느려졌다. 태경은 품 안의 그녀가 며칠 새에 더 야위어 버린 것을 증명하는 가느다란 허리를 느끼며,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인상을 찌푸렸다.이러니 이렇게 자주 아프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며, 말없이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외투를 걸쳐주고 옷자락을 정성스럽게 감싸 주었다. 그는 사랑의 차가운 손을 잡았는데, 누가 봐도 연인 같은 모습이었다. 태경의 손은 따뜻했고, 사랑의 차가운 엄지손가락은 그의 온기 덕분에 조금씩 녹아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남자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차갑기만 하던 그의 표정에 어딘가 부드러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태경은 그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문득 입을 열었다. “요즘 밥 잘 안 먹었어?” 사랑은 그의 질문에 잠시 당황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에요, 먹었어요.” 그녀는 지난 며칠 동안 일정이 불규칙했기에 가끔 식사를 거르기도 했다. “살 빠졌어.” “정말요?” 사랑은 거울을 볼 때마다 비슷한 얼굴이어서 전혀 느끼지 못했다. 태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좀 더 먹고 면역력을 길러. 자꾸 아프지 않게.” 사랑은 입을 열어 자신이 자주 아픈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말하려다 멈췄다. “네.”결국 그저 짧게 답했지만, 그녀의 속으로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태경 씨가 지금 나를 걱정하는 건가?’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태경의 표정을 슬쩍 살펴보다가 말했다. “앞으로는 더 조심할게요.” 사랑도 자신이 병에 걸려 태경에게 번거로움을 주고 싶지 않았다. 사실 아픈 상태에서 누군가가 곁에 있어
사랑은 집에서 고열로 정신이 혼미해져 땀을 흘렸지만,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다. 몸이 너무 뜨거워서 침대에서 간신히 일어나 욕실로 가서 샤워를 한 후, 잠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불을 푹 덮고 있으면 좀 나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힘이 없어서 병원에 갈 여력도 없었다. 잠에서 깨어나서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으면, 그때 119에 연락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언제나 이렇게 혼자서 버텨왔다. 아프면 참고, 또 참고, 정말 못 참을 때만 도움을 요청했다. 병에 걸리는 건 물론 괴롭지만, 사랑에게는 이미 익숙한 감각이었다. 과거, 학비를 벌기 위해 고열에도 불구하고 아르바이트를 나갔던 시절이 있었다. 깊은 밤, 편의점에서 잠깐 엎드려 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N시는 C시처럼 큰 눈이 자주 내리지 않아서, 겨울에는 늘 음습하고 차가운 비가 내렸다. 차가운 공기는 사랑의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후반부에 잠에서 깬 사랑은 기침을 하며 의식이 혼미한 상태로 119를 눌러 구급차를 불렀다. 구급차는 빠르게 도착했고, 사랑은 혼자 병원으로 가서 응급실에서 진료를 받으며 링거를 맞았다. ...태경은 가능한 가장 빠른 비행기를 타고 출발했다. 급히 나서느라 짐도 챙기지 않았다. 두 시간 후, 그는 N시의 공항에 도착했다. 비서는 이미 사람을 보내 준비해 두었다. “대표님, 오늘 밤 호텔에서 머무르실 건가요, 아니면 저택으로 가실 건가요?” 태경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차 키를 줘.” 비서는 질문을 더 하지 않고 키를 건넸다. 태경은 사랑이 살고 있는 작은 집의 주소를 기억하고 있었다. 차를 몰고 가는 동안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사랑이 일부러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병원에서 링거를 맞으며 잠시 잠들었고, 핸드폰은 무음으로 되어 있어 벨소리를 듣지 못했다. 태경은 차를 골목 입구에 세우고 기억을 더듬으며 그녀의 집으로 걸어갔다.
쓸쓸히 내리는 눈과 바람이 도시 전체를 덮고 있었다. 가로등이 하얗게 쌓인 눈 위를 밝히며, 바깥세상이 조금은 덜 허전해 보이게 했다. 태경은 얇은 캐시미어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허리는 잘록하고 어깨는 넓으며 다리도 길어, 빛 아래 서 있는 태경의 모습은 특히나 더 돋보였다. 핸드폰 벨소리가 몇 번 울리더니 마지막 몇 초가 지나 통화가 연결되었다. 사랑은 소파에서 거의 잠이 들 뻔했는데, 벨소리를 듣고는 정신없이 베개 밑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누구의 전화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코맹맹이 소리로 답했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그녀의 목소리는 나른하고 부드러웠다. 태경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속 짜증이 점차 사라졌다. 그는 입을 열었다. “나야.” 사랑은 그제야 화면 속 이름을 확인했다. 태경은 다시 말했다. “아까 나한테 전화한 이유가 뭐야?” 사랑은 태경이가 왜 갑자기 전화를 걸어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보통 그가 먼저 자신에게 연락을 할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TV에서는 여전히 새해 특집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랑은 하품을 하며, 대충 핑계를 지어 말했다. [대표님께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요.] 그녀는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사실 태경이가 사랑의 전화를 끊기 전, 그녀가 원한 것은 그저 그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었으니 말이다.지금의 사랑은 가벼운 잠을 한 번 자고 나니, 조금은 덜 외로웠다. 태경은 핸드폰을 꽉 쥐었다. 그의 손목에 선명하게 드러난 혈관이 더욱 돋보일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가슴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럼 며칠에 돌아올 생각이야?” 사랑은 아직 항공권을 예매하지 않았다. N시에 며칠 더 머물고 싶었고, 태경의 차갑고 쓸쓸한 별장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곳에 있고 싶었다. [잘 모르겠어요.] “3일에 돌아와.” 태경이 그녀 대신 결정을
태경의 아버지 심지환은 평소 바쁜 사람으로, 높은 직책과 권한을 가지고 있어 쉽게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 설날이 되어서야 겨우 저녁 8시쯤 집에 돌아왔다. 심씨 가문은 설날이 되면 가족들이 모여 늘 북적였다. 어린 자녀들도 장로들의 뜻을 거스를 수 없으니, 반드시 집으로 와 명절을 보냈다. 집 안은 새로 장식한 창문지와 함께, 아이들이 저녁을 먹고 후원에서 불꽃놀이를 즐기는 소리로 가득했다. 오랜만에 아들을 본 심지환은 저녁 식사 후 태경을 서재로 불렀다. “네 작은아버지가 그러더군. 요즘 네가 일 처리를 너무 가혹하게 한다고.” “작은아버지가 또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가 일을 할 때 어느 정도 여지를 남기라고 하더군.” 태경은 집안 어른들이 늘 이런 방식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일에 한 치의 여지를 남기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뽑지 않는 이상 다시 자라날 풀이라면, 태경은 철저히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가혹하고 단호한 것이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태경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걱정 마십시오, 아버지께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심지환은 아들이 자신에게 폐를 끼칠까 걱정하지 않았다.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심지환도 쉽게 무너질 리 없었다. 다만 심지환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좋은 인연을 쌓고 싶어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자기 아들은 그런 충고를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아들 태경은 성격이 고집스럽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일에 간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환 보기엔, 태경의 결혼 또한 그랬다. 회사 일도 그렇듯이, 결혼마저도 자신의 방식대로 처리했다. 심지환은 며느리에 대해 별다른 인상이 없었다. 자주 만나지도 못했기에 그저 조용한 아가씨라는 것 정도만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며느리는 가정 형편은 다소 아쉽지만, 다른 면에서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올해는 왜 새아가가 안 보이는 거지?” “N시로 내려갔습니다.” “둘이
사랑은 태경이가 더는 답장을 보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침대에서 일어나, 잠이 오지 않자 베란다로 나가 바람을 쐬었다. 맞은편 이웃집은 이미 새로운 ‘입춘첩’을 붙여두었고, 문 앞에는 새로 장만한 복조리가 걸려 있었다. 사랑은 내일 자신도 명절을 맞아 필요한 물건들을 좀 사러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창문 장식 스티커와 입춘첩 같은 것들 말이다. 그녀는 날이 밝아올 무렵에야 겨우 잠들었고, 늦게 잠든 데 비해 일찍 눈이 떠졌다. 오랜만의 한가로운 시간에 사랑은 근처 시장에 가서 여러 가지 창문 장식과 입춘첩을 사 왔다. 찹쌀풀을 만들어 대문과 창문에 하나하나 붙여 두었다. 붉은 색으로 분위기가 한층 밝아지면서 조금은 명절다운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바로 섣달이었다. 사랑은 또 슈퍼마켓에 가서 식재료와 자신이 좋아하는 달콤한 꿀떡을 사 왔다. 비록 혼자 맞는 명절이지만, 최소한 스스로 초라해 보이지는 않게 하고 싶었다. 슈퍼마켓에서 돌아온 사랑은 택시를 타고 묘지로 향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묘지는 교외의 한적한 곳에 있었다. 사랑은 매년 찾지 못했다. 학창 시절에는 겨우 방학 때만 와서 성묘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생전에 좋아하셨던 음식 몇 가지를 준비해 묘비 앞에 올려두었다. 두 노인의 흑백 사진을 바라보며, 사랑은 손을 들어 그 사진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어머니를 제외하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사랑을 가장 아끼고 사랑해 주었던 분들이었다. 사랑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만약 우리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아직 살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만약 강남복이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내가 없었으면,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나를 아껴주었던 가족이 큰 고통을 겪게 되는 일이 없었을 텐데...’ 성묘를 마친 사랑은 눈이
송년회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사는 긴 연휴에 들어갔다. 법정 휴가보다 3일을 더 쉬게 되어, 10일까지 출근할 필요가 없었다. 사랑은 간단히 짐을 꾸리고 N시로 돌아갈 비행기 표를 미리 예매해 두었다. 설 연휴라 비행기 표가 평소보다 구하기 어려웠고, 가격도 성수기 요금 수준으로 올라갔다. 출발 날짜가 임박해지자 사랑은 병원에 들렀다. 매주 주말이면 병실에 들러 여전히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비록 어머니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사랑은 가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말없는 위로를 전했다. 사랑은 호흡기에 의지해 생명을 이어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이렇게 강제로 어머니의 생명을 붙들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생각하곤 했다. 그녀는 어머니가 언젠가 깨어날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르지만, 자신은 기다릴 수 있었다. 설령 의사선생님은 포기하라고 해도 사랑도 그럴 수 없었다. 설령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그녀는 놓지 않고 싶었다. 오늘 사랑도 어머니의 담당 의사를 만났다. 의사는 조심스레 말했다. “희망이 전혀 없진 않지만, 그렇다고 크지도 않습니다.” 환자가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나는 것은 하늘의 뜻에 달려 있었다. 환자의 생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에 따라 깨어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랑의 어머니 남청연은 한때 발코니에서 뛰어내리기로 결심한 사람이라 이미 생의 의지를 버렸을지도 몰랐다. 사랑은 이러한 마음의 고통을 견뎌내며 약간 창백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깨어나실 거라고 믿어요.” ‘엄마는 절대 나를 두고 떠나지 않을 거야!’ ‘아직 아버지의 죗값을 지켜보지 못하니까.’ ‘엄마가 이렇게 잠든 채로 나를 놓고 떠날 리 없을 거야!’ 사랑은 항상 상상했다. 어머니가 깨어나고, 모든 일이 끝나면 어머니를 모시고 N시의 마을로 가서 조용히 살아가는 모습을. 의사는
사랑은 아주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더 강하게 말하면 태경의 인내심을 자극하게 될까 염려되었다. 태경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어.”사랑은 실망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평온함을 유지했다.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체면을 지켰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혼이 나간 듯이 있다가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이 ‘특별한 서프라이즈’는 어디까지나 회사 여직원들의 투표로 정해진 것이었다. 태경이 거절해도 아무도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그는 회사의 절대적 권한을 쥔 사람이니까. 사랑은 당첨된 쪽지를 손에 쥐고서 유럽 여행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삶은 엉망이었고, 이국적인 풍경을 감상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녀는 태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표님, 이걸 현금으로 바꿀 수 있나요?” 사랑은 얼마의 금액이 될 수 있는지 더 관심이 갔다. 태경은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실망인 듯 아닌 듯, 이런 식으로 돈을 좋아하는 여자는 처음이라는 눈빛이었다. “업무일에 인사팀에 가서 문의해봐.” 그는 오늘 사랑의 옷차림을 한 번 더 살펴보며 눈빛을 잠시 멈추고 말했다. “꽤 쏠쏠한 금액일 거야. 강 비서는 운이 좋네.” 사랑은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방금 태경의 거절로 인해 느꼈던 실망이 금세 사라졌다. “오늘 밤 운이 좋은 것 같네요.” 사실 그녀는 태경과 한 곡 추고 싶었다. 오늘이 지나면 앞으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비록 사랑은 춤을 잘 추지도 못했지만, 예전에 몰래 배운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파티에서 태경이 세영의 허리를 감싸 안고 춤을 추던 그날 밤, 둘은 세상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연인처럼 보였다. 태경은 차갑고, 세영은 따뜻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완하며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사랑은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두 사람의 춤을 흉내 내며 서투르게 따라 해보았다. 그러나 그 춤은
사랑은 캐시미어 숄로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노출된 피부를 잘 가렸기에 주변에서 그녀가 누구인지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호텔의 긴 복도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밖에는 여전히 많은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대기 중이었다. 조금이라도 독점 기사를 얻어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ZP그룹의 대표 심태경은 연예계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인기는 웬만한 연예인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네티즌들은 태경의 연애 문제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사랑은 복도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기자들의 카메라를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그들이 모여 있는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차를 불렀지만, 주말 저녁의 도심은 언제나처럼 교통 체증으로 꽉 막혀 있었다. 사랑은 호텔 로비에서 차를 기다리며 조용히 인내심을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녀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과 마주치고 말았다. 성지호는 사랑에게 있어 마치 곤란하고 위험한 독사와 같았다. 지호의 날카로운 존재감은 그 순간 사랑의 혈관을 찢어버릴 듯 강렬하게 다가왔다. 지호는 검은 정장에 긴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감춰진 날카로움이 여전히 사람을 압도했고, 그 곁에는 위압감 넘치는 보디가드들이 항상 지호를 둘러싸고 있었다. 지호가 풍기는 극도의 위압감은 누구도 지호에게 쉽게 다가설 수 없게 만들었다. 사랑은 지호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두 사람이 원래부터 엮일 필요가 없는 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성지호도 나를 몹시 싫어했고, 나도 굳이 성지호에게 다가가서 불쾌함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 하지만 지호는 사랑을 괴롭히는 것을 즐겼다. 설령 본인이 싫어하면서도 사랑에게 다가와 느긋하게 담배를 꺼내 물고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태도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마치 쓰레기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사랑은 종종 궁금해졌다. ‘성지호에게 정말 감정이라는 것이 있을까?’‘이 미친놈은 언제나 이런 감정 없는 냉담한 모습을 하고 있어.’ “강사랑, 여기서 뭐하고 있어?”
강세영은 자신이 꼭 참석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태경도 그녀를 막을 생각이 없었다. 태경은 세영의 성격을 잘 알았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개의치 않는 편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스러움을 발산하는 여자였다. 오늘 세영은 평소보다 더 아름답게 꾸미고 나타났다. 섬세하게 화장을 하고, 순수해 보이는 이목구비 덕에 미소를 지으면 해사하고 무해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눈에 띄는 빨간색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태경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자연스럽게 태경에게 질문했다.“오늘 밤 나랑 회사 여자 연예인들 중 누가 더 예쁜 것 같아?” 태경은 그녀를 슬쩍 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은 부드러웠고, 그 미소에서는 진심과 농담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듣고 싶은 대답을 원해, 아니면 진짜 의견을 묻는 거야?” 세영은 그와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당연히 네 의견이지.” 태경은 혀를 차며 웃었다. “네가 기분 나쁠까 봐.” 세영은 태경 앞에서 투정을 부리는 데 익숙해져서 적당한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그 말은 내가 걔들보다 예쁘지 않다는 거야?” 태경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건 네 입으로 한 말이잖아.” 세영은 태경과 친밀함을 유지하기 위해 늘 약간 비음과 혀짧은 발음을 섞어서 말했다. 그녀는 태경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빛에는 순수함과 진지함이 가득했다. “심 대표님, 오늘 밤 나는 당신의 파트너야. 내가 예쁘지 않으면 당신 체면이 떨어질 거라고.” 태경은 담담하게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럼 네가 여기 있는 여자 연예인들보다 예쁜 걸로 하면 돼?” “심태경, 정말 성의 없어.” “네가 오고 싶다고 했잖아.” “그렇긴 하지. 세상을 좀 더 보고 싶기도 했고.” 세영은 태경의 옆에 서 있을 때마다 여러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에 익숙했다. 그녀는 당당하게 태경의 팔짱을 끼고 있었고, 일말의 긴장감도 없이 태연하게 물었다. “내가 오늘 안 왔으면, 누가 네 파트너로 왔을까?” 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