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용수의 표정을 쳐다보고 강서연은 대충 짐작이 갔다. 황실 종친들 사이에서 송지아가 오늘 이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는 건 분명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 왕위 계승자로 떠오르고 있는 화제의 인물이다. 강서연은 워낙 복잡한 배경이 있는 사람과 사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친왕의 초대에 가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저씨, 스타일리스트 좀 불러주세요.”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분부했다. 황실의 사람을 만나러 가는 자리이기 때문에 옷차림에 신경 써야 했다.윤씨 가문에도 부르면 바로 오는 스타일리스트가 있었다. 잠시 후, 스타일리스트는 강서연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가져왔고 그녀에게 블라우스와 스커트로 갈아입게 하였다. 오후 티타임 시간에 맞춰 강서연은 황실 정원에 나타났다.황궁은 으리으리하고 위엄이 있었고 바닥 타일에도 금이 잘게 박혀 있어 곳곳에서 황실의 기품을 드러내고 있었다. 럭셔리하지만 강서연은 들어오면서 답답함을 느꼈다. 경호원의 인솔하에 그녀는 황궁 남쪽의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송지아는 이미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이번에 강서연은 절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인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황실의 규칙에 따라 행동했다. 송지아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살갑게 말했다.“예의를 차릴 필요 없어요. 얼른 이리와 앉아요.” 강서연은 그녀의 옆에 있는 소파 빈자리로 눈길을 돌렸다. 이렇게 큰 정원에는 소파가 하나뿐이었고 그 소파의 질감과 무늬를 보니 송지아만 앉을 수 있는 것이 분명했다. 경호원과 하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강서연은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되었다.실수라도 하면 황궁에는 보는 눈이 많아서 틀림없이 이야기가 부풀려 소문이 돌릴 것이다. 그건 윤씨 가문의 명성에 누를 끼치는 일이었다. 강서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예의 바르게 두 걸음 물러서 등나무 의자에 앉았다.눈빛을 반짝거리던 송지아는 저도 모르게 강서연을 몇 번 더 쳐다보았다. “강서연 씨, 편하게
이 주얼리 세트는 정교하게 다듬어졌고 럭셔리하기 그지없었으며 사소한 부분까지 모두 훌륭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특히 그 사파이어 반지는 크기가 크고 완벽한 품질로 희귀한 보물이었다. 만약 경매장에 내놓으면 아마 최고가에 팔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옛말에 남의 신세를 지고 있으면 심한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던가?이렇게 귀중한 선물을 받는다면 앞으로 송지아의 통제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전하, 그런 말씀 마세요.”강서연은 웃으면서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저와 친구가 되어 주신 것만으로 영광입니다. 제가 어찌 이런 선물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우리는 이미 친구 사이인데 이런 선물 좀 주면 뭐 어때서요?”송지아는 그녀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어차피 비싸지도 않으니까 그냥 받아요.”“전하께서는 좋은 것을 자주 보셨으니 당연히 귀하게 여기지 않으시겠죠. 그러나 저희 같은 서민들의 눈에는 정말 값진 보물이에요.”송지아의 입가에 뜬 미소가 점차 굳어져 버렸다. 그녀는 강서연이 거절하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거절하는 말조차 이리 예쁘게 하다니. 역시 윤정재 그 늙은 여우의 딸이군.’그녀는 계속해서 강서연을 떠보았다. “서연 씨, 우리는 친구잖아요.”강서연은 계속 웃으며 거절했다.“친구니까 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겁니다. 공로가 없으면 봉록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 않나요? 이 선물은 너무 귀해서 받을 수 없습니다.”“공로가 없다고 누가 그랬나요?”송지아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서연 씨는 곧 공을 세울 기회가 있을 거예요.”그녀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강서연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인은 리치의 껍질을 까서 금 그릇에 넣어두었고 송지아는 천천히 한 알 한 알 먹기 시작했다.한편, 강서연은 그 옆에 앉아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해가 천천히 지면서 마지막 노을빛을 대지에 뿌렸다. 기온이 분명 내려갔을 텐데 강서연은 더 덥고 숨이 턱턱 막혔다. 송지아는 마지막 리치를 먹고 난 다음 그녀를 쳐다보았다.
“모른다니 됐어요. 그냥 물어본 것이니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 시간이 늦었으니 아기도 이젠 엄마가 보고 싶을 것 같네요.”이내 송지아는 옆에 있는 경호원을 향해 입을 열었다.“강서연 씨, 바래다줘.”두 명의 경호원은 공손하게 인사를 올린 뒤 강서연의 양쪽에 섰다. 한편, 강서연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안해졌다. 방금, 송지아의 의미심장한 웃음과 지금 자신의 옆에 있는 두 사람의 기세를 보면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한테 해코지라도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강서연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서 의심이 많은 자신을 비웃었다. 그녀는 송지아에게 인사를 한 뒤 정원을 떠났다.송지아는 방금 그녀가 앉아있던 자리를 쳐다보았고 그 주얼리 세트가 테이블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녀는 차갑게 웃으며 사파이어 반지를 꺼내어 자신의 손에 끼우고는 뚫어지게 쳐다보며 침착한 목소리로 수행원에게 입을 열었다. “그 두 사람에게 강서연 씨 잘 데려다주라고 하세요. 아시겠어요?”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 두 명의 경호원은 강서연을 데리고 다시 돌아왔다. 송지아의 얼굴에 약간의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들 뒤에 송혁준이 나타났다.“어떻게 같이...”“누나를 만나러 오던 참에 강서연 씨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어.”강서연은 송혁준을 힐끔 쳐다보았다. 윤씨 가문의 응접실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지만 그 당시 그녀는 이 사람에 대해 그다지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그저 겉으로는 유순해 보이지만 속은 검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리 가까이 있으니 강서연은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음산한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송혁준은 수려한 이목구비와 하얀 피부, 늘씬한 키에 깡마른 몸매를 가지고 있었고 귀티가 나는 전형적인 미남이었다. 그는 강서연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미소를 지었다. 그의 웃음은 맑고 깨끗해 보였다. 그의 눈을 보고 있으면 하느님이 모든 아름다움을 그의 눈에 넣어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돌
손님이 찾아왔으니 밖으로 내쫓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강서연은 최연준의 팔짱을 끼고 송혁준의 뒤를 따라갔다.윤씨 가문의 별장은 황실 귀족들을 자주 접대했었지만 이 시간에 손님이 방문하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다행히 서글서글한 송혁준이었기 때문에 집사 한 명만 남겨놓았고 그렇게 큰 격식을 차리지 않았다. 집사가 다과를 올린 후, 최연준은 집사한테 나가라고 했고 이내 거실에는 그들 세 사람만 남게 되었다. 강서연은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최연준의 얼굴을 보고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녀는 조용히 남편의 손을 잡고 그에게 단호한 눈빛을 보냈다. 그녀의 눈빛을 마주한 최연준은 이내 안색이 변하였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옆에 사람이 있다는 것조차 잊은 채 서로를 쳐다보았다.“콜록콜록.”송혁준의 가벼운 기침 소리가 두 사람을 현실로 끌어당겼다. 강서연은 서둘러 손을 놓으려 했으나 최연준은 그녀의 손을 더 꼭 잡았다. 그녀가 손을 떼려는 순간 그는 그녀의 작은 손을 자신의 손바닥 안으로 감쌌다. “윤 회장님과 사모님의 금실이 그렇게 좋다고 하던데 내가 보기에 최연준 씨와 강서연 씨의 사이도 참 부러울 정도로 다정해 보이네요.”얼굴이 살짝 붉어진 그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한편, 최연준은 주인의 태도로 송혁준에게 차를 권했다.“이 차는 오성에서 가져온 겁니다. 전하의 입맛에 맞는다면 앞으로 매년 전하께 보내드리지요.”송혁준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한 입 맛보았다. ㅊ차 맛이 가슴에 스며들고 농도가 적당한 것이 정말 보기 드문 좋은 물건이었다.“오성 4대 가문 중 최고의 가문인 최씨 가문의 취향이 남다르다는 건 이 차 한 가지만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네요.”“이 차는 녹차의 일종입니다.”최연준은 차가운 얼굴로 옅은 미소를 띠며 말을 이어갔다.“사실 차를 마시는 건 여자들이 액세서리를 착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자신에게 어울리는 차를 마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참신한 관점이네요. 어
다음 순간, 그는 송혁준의 온화한 눈빛을 마주하게 되었다. “최연준 씨, 이렇게 오래 얘기했는데도 날 알아보지 못하는 겁니까?”“뭐라고요?”최연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송혁준은 웃음을 지으며 뒤돌아서서 거실을 나갔다. 그의 마음속에는 의심으로 가득 찼다. 기억을 이리저리 되짚어봤지만 이 사람에 관한 그 어떠한 정보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일부러 속임수를 쓴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정말 강서연에게 반했다면 분명 최연준을 교란하고 기회를 노릴 것이니까. 최연준은 정신을 가다듬고 직접 그를 문 앞까지 배웅했다. 다시 거실로 돌아오니 강서연은 이미 아래층에 내려와 있었다. “군형이는 어때?”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방금 젖 먹였더니 잠들었어요.”“응.”그는 담담히 대답하고 빠른 걸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갔다.강서연은 그의 뒤를 바짝 따라왔고 그는 아기의 방문 앞에 멈추어 섰다가 두 사람의 침실 문 앞에 멈추어 섰다.그녀가 고개를 들자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너... 군형이를 우리 침대에 눕힌 거야?”“쉿, 목소리 낮춰요.”강서연은 이내 그를 게스트룸으로 밀어 넣었다.“애 깨우지 말고.”최연준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이 꼬맹이한테 침대를 양보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집에서 말도 못 하는 거야?’입을 삐죽거리던 그의 얼굴에 또 먹구름이 몰려왔다. 강서연은 피식 웃더니 그의 팔짱을 끼고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그녀는 오늘 밤 그가 매우 불쾌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남자가 자신을 집 앞까지 바래다준 것도 모자라 거리낌 없이 집으로 들어와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으니까. 보통 남자라도 마음이 불편했을 건데 하물며 이 질투쟁이는... 게다가 아들은 자기 침대에서 자지 않고 떡하니 그의 큰 침대를 차지하고 있다. 곧 그의 질투심이 폭발할 것 같다. “연준 씨, 화났어요?”강서연은 달콤하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깊은숨을 들이마
그녀는 이번에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여보.” 그는 그녀의 목 사이에 얼굴을 묻고 숨을 크게 들이쉬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밤은 여기서 자...”“하지만 군형이가 침실에 혼자 있어요.”“그게 뭐 어때서? 남자아이는 어릴 때부터 독립하는 법을 배워야 해.”“잠에서 깨면 무서워할 거예요.”“그러니까 오늘도 군형이랑 자겠다는 거야?”최연준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들이 태어난 지 한 달이 될 때, 최연준은 손수 아기방을 꾸미고 남자아이는 일찍 독립해야 한다며 신이 나서 아들을 자기 방으로 들여보냈다. 그러나 강서연은 자꾸만 아들을 두 사람의 침실로 데려왔다. 밤에 젖을 먹이는 것이 편하다고 하면서 아들을 자신의 옆에서 재웠다. 처음에 침대에는 최연준의 자리가 있었다. 하지만 강서연이 무슨 뉴스를 보고 이러는 건지 최연준이 잘 때 뒤척이다가 아들을 다치게 할 것 같다고 하면서 결국은 침대에서 쫓겨나게 되었다.하여 그 후부터 아들이 안방에서 자면 남편인 그는 어쩔 수 없이 게스트룸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최연준의 모든 불쾌감은 오늘 밤 송혁준에 의해 자극받은 후 집중적으로 폭발하게 되었다. “연준 씨, 밤에 군형이한테 젖 먹여야 해요.”강서연은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편, 최연준은 막무가내로 떼를 썼다.“나도 먹을 거야.”“연준 씨...”그의 말에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다음 순간, 최연준 바로 벨을 누르고 가정부와 산후 도우미한테 오늘 밤은 모두 안방으로 가서 도련님을 돌보라고 명했다. 최군형은 잠을 잘 자는 편이었다. 한밤중에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냉동실에 미리 보관해 둔 모유가 있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잠시 후, 그는 품에 안긴 여자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그녀를 끌어안고 횡포를 부리기 시작했다.“내 침대에 올라왔으면서 내려갈 생각을 해?”“연준 씨!”“군형이가 전생에는 내 연적인 것 같아. 여보... 아니면 전생의 애인을
“무슨 생각 하길래 그렇게 웃어요?”강서연이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우리가 아무 데도 안 가고 강주에서만 살았으면 어땠을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별로 안 좋았을 거예요.”“왜?”“알아요, 연준 씨는 강주에서의 단순한 삶을 그리워하고 있다는걸.”그녀가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게 항상 단순할 수는 없잖아요. 결국은 삶의 어려움도 겪어야 하고 사람 사이의 갈등도 겪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차피 언제 어디서든 겪어야 할 일이라면 오성이나 이곳에서 사는 게 좋죠. 적어도 이곳에서 살면 우리 뒤에는 가족들이 있으니까.”그녀가 점점 성숙해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난 예전의 단순한 날들이 좋았어. 근데 지금 이렇게 복잡한 날도 좋아. 아무튼 너와 함께하는 날이면 난 다 좋아.”강서연은 눈빛을 반짝거리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러니까 여보.”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또박또박 말했다. “앞으로 그 송혁준과는 단둘이 만나지 마!”그녀는 어쩔 수 없는 표정을 짓더니 웃으며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설마 정말 송혁준 씨가 나한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애 엄마인 내가 무슨 볼 게 있다고?”“애 엄마라고 해도 당신은 매력이 있어.”최연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녀는 그와 더 이상 논쟁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의 눈에는 그녀의 모든 것이 다 좋으니까. 이내 그녀는 방긋 웃더니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는 그의 품에 안겼다. 황실 사람인 송혁준한테 남의 아내를 강점하는 특별한 취미가 있다고는 믿지 않지만 그래도 앞으로 그 사람을 멀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 황실의 초청이 오면 최대한 거절할게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석진 오빠는 좀 안 됐어요. 송지아 씨가 당분간은 오빠를 가만둘 것 같지가 않더라고요.”최연준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그녀의 머리에 키스했다. 잠시 후, 그녀는 이내 단잠에 빠졌지만 그는 잠에 들지 못했다. 송혁준이
찔리는 것이 있던 송지아는 눈길을 돌렸다.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리고 송혁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 웃기는 일이네. 친왕인 내가 뭐가 찔리는 것이 있다고? 내가 가진 권력은 최고의 권력이야. 강서연 같은 평민을 상대하는데 뭐 잘못됐어?’송혁준은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군.’그들 남매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누나는 떠벌리는 성격이었고 동생은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하지만 매번 누나에게 일이 생길 때마다 동생도 그 일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한 가족이었고 사람들은 정말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누구인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고 그저 황실 전체에 그 죄를 뒤집어씌웠었다. “누나. 정말 맹세할 수 있어?”송혁준은 그녀를 쳐다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 그의 물음에 송지아는 화를 벌컥 냈다.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나한테 맹세하라는 거야?”“그러니까 맹세할 엄두가 안 난다는 거네?”송지아는 입술을 오므린 채 몸이 굳어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남양은 종교 국가이고 신에게 맹세하는 것은 신성하고 정중한 일이었다. 현지인들은 맹세를 어기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황실이라고 해도 이 방면에서는 함부로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송지아는 맹세하지 않았다. 송혁준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담담한 표정으로 걸어가 바닥에 있는 유리 파편을 치웠다.이게 그가 황실의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었다. 그는 하인을 부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평등하고 사랑이 넘치는 이상적인 나라를 품고 있었다. 반면, 송지아는 이에 대해 매우 경멸하였고 짜증 나는 표정을 지었다. “누나.”그는 정리를 하면서 온화한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강서연 씨한테 손을 쓰려고 한 건 잘못된 일이었어. 나석진의 근황에 대해 알리지 않는 건 그녀의 자유야. 누나한테는 간섭할 권리가 없다고.” “너...”송지아는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지금 이 순간, 그녀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