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연은 아무 말이 없었다.한없이 가녀린 엄마의 어깨였지만 기대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마음이 안정되었다. 엄마의 냄새가 그녀의 긴장했던 신경을 풀어주면서 진정하게 했다.“서연아.”윤문희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사실 우리 두 모녀는 운이 아주 좋아. 난 네 아빠를 만났고 넌 최 서방을 만났잖아.”강서연의 입꼬리가 살짝 실룩거렸다.‘그래. 두 사람 모두 엄마와 나에게 진심으로 잘해주고 있어.’“그런 사람 앞에서 왜 열등감이 들어?”윤문희는 강서연의 두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널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너의 그런 작은 흠 때문에 널 미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걱정하고 아껴줘.”“하지만...”강서연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게시글을 봤는데 아이를 낳은 후에 튼살이 많이 생기니까 남편들이 예전보다 무관심해지고 쳐다도 안 본대요. 어떤 남편은 저녁에 집에 들어오지도 않는대요. 엄마, 살면서 이런 자질구레한 것들 때문에 사랑이 식나 봐요.”윤문희는 어이없으면서도 웃음이 터져 나와 강서연의 이마를 툭 쳤다.“대체 어디 가서 그런 쓸데없는 글을 본 거야? 그런 남자도 있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엄마가 장담하는데 최 서방은 절대 그런 남자 아니야. 서연아, 사랑은 식는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더 견고해지는 거야. 너의 다이아몬드 반지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건이 영원히 반짝이고 빛나잖아.”“엄마...”“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널 숨길 필요 없어.”윤문희가 강서연의 머리를 어루만졌다.“너답게 살면서 두 사람의 새로운 생명을 맞이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는 걸 잊지 마.”...윤문희가 맨체스터에 온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윤정재의 전화는 끊이질 않았다. 그 바람에 강서연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아빠, 엄마는 절 챙겨주러 오셨다고요. 누가 납치해 갈까 봐 겁이 나서 그래요?”“딸, 네 엄마는 누구에게 쉽게 납치당하고 그럴 사람이 아니야.”윤정재가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경기는 자선 친선경기야.”최연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설명했다.“지고 이기는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이 경기의 모든 수입을 자선 단체에 기부한다는 거야.”“네...”강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축구 스타들도 많이 와요?”“응. 게다가 다 유명한 축구 스타들이야.”강서연이 활짝 웃었다. 최연준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팀 선수들이 입장하면서 장내는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아니나 다를까 TV에서만 보던 얼굴이 많이 보였다. 강서연은 평소 축구에 관심이 별로 없었고 최연준이 경기를 볼 때만 가끔 들여다보았기에 축구에 관해 잘 알지 못했다.다른 대부분의 여성 팬처럼 선수의 공을 다루는 기술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얼굴만 기억했다.“아, 저 사람은...”강서연은 놀라면서도 기뻐했다.“저 사람도 왔어요?”최연준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강서연이 어찌나 뚫어지게 쳐다보는지 두 눈이 다 튀어나올 지경이었다.하긴, 이렇게나 많은 축구 스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긴 했다.최연준이 입을 삐죽거렸다.이번 친선경기는 김중 그룹에서 주최하였기에 일반 축구 스타만 몇 명 정도 초대하면 된다고 했었다.‘누가 잘생긴 선수를 초대하라고 했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자들에게 엄벌을 내려야겠어!’최연준은 긴 팔을 뻗어 강서연을 품에 안으려 했지만 강서연은 옆에 있는 여자 팬들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치며 응원했다.강서연도 나름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어 옆에 있는 팬들과 바로 친해졌다.“어느 선수를 좋아해요?”“전 10번요.”“10번 선수 너무 잘생겼어요.”“공을 다루는 모습이 너무 남자다워요.”왁자지껄 수다를 떠는 여자들을 보며 최연준은 들고 있던 확성기를 부러뜨릴 정도로 꽉 쥐었다.강서연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녀들의 대화에 끼지는 않았지만 현장에서 축구를 관람하는 기분이 꽤 좋았다.“여보, 선수들만 보지 마.”최연준은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사실... 나도 공 잘 차.”“네?”강
후반전 경기가 시작되었다.최연준은 경기장에 나오자마자 맹공격을 펼쳤다. 미드 라인의 패스를 받은 최연준은 상대 진영으로 돌격하더니 상대 팀의 수비수를 가볍게 제치고 한 골을 넣었다.현장이 삽시간에 들끓었고 강서연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최연준은 유니폼을 벗어 손에 들고 흔들었다. 탄탄한 상반신이 드러나면서 남자다운 매력을 한껏 뽐냈다.“와!”강서연의 옆에 있던 상류층의 여자들은 숙녀의 이미지고 뭐고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강서연이 고개를 돌려보니 여자들의 두 눈이 하나같이 반짝였다. 당장이라도 경기장으로 뛰어 들어가 최연준을 잡아먹을 기세였다.더 멀리 내다보니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 팬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섹시한 춤을 추고 있었다.“저기요.”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봤어요? 봤어요? 최연준 씨 너무 대단해요.”“그러게 말이에요. 축구 스타들도 아예 비교가 안 된다니까요.”“와! 또 상대 진영으로 쳐들어갔어요.”강서연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환호 소리를 들으며 겉으로는 애써 웃는 척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이미 질투가 폭발했다.‘이 여자들 왜 이렇게 귀찮게 굴어? 그리고 연준 씨는 축구만 잘할 것이지, 옷은 왜 벗어?’강서연은 씩씩거리며 제자리로 돌아와 최연준의 얼굴이 닳도록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경기는 아주 치열하게 진행되었고 양 팀 선수 모두 최선을 다해 뛰었다. 경기가 거의 끝날 무렵 최연준이 미드 라인을 돌파하여 먼 거리 슛을 때렸다. 골이 상대의 골문에 들어간 동시에 심판이 호루라기를 불어 경기 종료를 알렸다.커다란 경기장에 있는 수만 명의 관중들이 동시에 환호했다.강서연이 고개를 들어보니 최연준이 또 옷을 벗고 승리를 축하하고 있었다.“최연준 씨!”강서연이 한국어로 소리를 질렀다.“옷 좀 입어요!”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환호성에 파묻혀 전달될 리가 없었다.경기장에 있는 최연준은 웃옷을 훌렁 벗은 것도 모자라 두 팔까지 벌려 카메라가 마음껏 찍도록 했다.강서연이 발끈하려던 그때 경기장
“하나도 안 아팠어. 하지만...”최씨 가문이든 김씨 가문이든 가정 교육이 엄하여 문신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하지만 가슴에는 문신할 수 있어.”최연준이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가슴 이 자리는 평생 단 한 사람에게만 남길 수 있어. 그러니까 서연아... 시간이 얼마나 지나든, 무슨 일이 있든 당신의 이름은 영원히 내 가슴에 새겨져 있어. 이 자리는 영원히 당신 것이야.”최연준은 강서연의 작은 얼굴을 받쳐 들고 입술에 진한 키스를 남겼다.뒤로 불꽃이 하늘로 솟아올라 아름답게 펼쳐졌고 반짝이는 하트 모양을 이루었다.불빛이 강서연의 아름다운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녀는 두 눈을 감고 최연준과 진한 키스를 나누었다.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볼을 타고 뚝 떨어졌다....휴대 전화를 들고 있는 김유정의 두 손이 파르르 떨렸다. 친선경기 생방송을 보던 김유정은 화가 난 나머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안색도 창백해졌다. 홧김에 휴대 전화를 던지려던 그때 손미현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뭐 하는 거야? 비싼 휴대 전화가 망가지면 어쩌려고?”“엄마.”김유정이 히스테릭하게 울부짖었다.“그깟 휴대 전화 망가지면 망가졌지, 뭐가 대수라고요. 왜요? 우리 인제 휴대 전화도 못 사는 신세가 됐어요?”“이게 휴대 전화 문제야?”손미현이 의미심장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휴대 전화를 망가뜨린다고 해도 안에 있는 사람은 여전히 존재하잖아.”김유정이 하도 씩씩거린 바람에 얼굴이 다 일그러졌다.“딸.”손미현이 영상을 힐끗 보았다.“최연준 그 녀석이 남의 호의를 무시한다면 너도 죽어라 매달릴 필요 없어. 엄마가 최연준보다 만 배 더 좋은 남자를 찾아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김유정은 소파에 엎드린 채 목청이 터져라 울었다.“됐어, 그만해. 그냥 나대게 내버려둬.”손미현이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아직 조급해하지 마. 쟤네 얼마 나대지도 못해. 엄마에게 다 방법이 있어.”“또 무슨 방법이 있어요?”김유정이 높은 목소리로 떠들어댔다.“지난번
손미현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족히 십여 초 동안 넋을 놓았다.“사모님, 사모님? 듣고 계세요?”손미현이 심호흡을 크게 한 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주문은 내 거야. 여러 브랜드와도 이미 얘기를 마쳤고 마지막으로 계약서에 사인하는 일만 남았다고. 그런데 어떻게 최연준에게 뺏겨?”“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그게 참 이상해요.”비서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하지만 방금 전해 들은 소식에 따르면 여러 브랜드 측에서 셋째 도련님과 계약했고 또...”“또 뭐?”“주문을 누군가 셋째 도련님께 준 것 같아요.”“뭐라고?”손미현이 손을 내려놓자 휴대 전화가 바닥에 툭 떨어지면서 화면이 와장창 깨졌다.“엄마, 무슨 일이에요?”김유정의 말이 끝나자마자 김성주가 한 손에는 새장을, 다른 한 손에는 밀랍 염주를 들고 베란다에서 비틀거리며 걸어왔다.“미현 씨, 무슨 일이야?”“아빠.”김유정이 재빨리 도움을 청했다.“엄마가 준비했던 패션위크 주문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어요.”“주문?”김성주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뭔가를 떠올렸다.“아, 국제 패션위크 말하는 거야?”“네.”“하하, 그거 내가 연준이에게 넘겼어. 당신이 자료를 저기에 둔 걸 알고 연준이더러 가져가라고 했어.”김성주는 솔직하고 당당하게 말했다. 손미현은 잘못 들은 줄 알고 귀까지 의심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김성주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방금... 뭐라고 했어요?”“내가 주문을 연준이에게 넘겼다고. 왜?”김성주는 화난 얼굴로 새장을 옆에 던져놓더니 팔짱을 꼈다.“지난번 연회에서 유정이가 그런 식으로 나에게 말하고서는 지금까지도 사과하지 않았어. 그리고 당신도 요 며칠 이상해. 맨날 날 볼 때마다 얼굴을 찡그리기나 하고. 예전처럼 나에게 잘해주지도 않아. 흥, 유정이는 날 아빠 취급 안 하고 당신은 날 남편 취급 안 했잖아. 그래서 작은 복수를 한 거야. 하하, 어때?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거 알
“엄마가 꺼지라잖아요. 못 들었어요?”김유정이 두 눈을 부릅뜨고 앞으로 다가가 그를 확 밀쳤다.“바보! 멍청이! 꺼져요!”김성주는 순간 멍해졌다. 엄청난 굉음이 귓가에서 폭발하는 것 같았고 마음을 칼로 도려내듯 아팠다. 그는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알지 못했다.분명 먼저 태도가 나쁘게 달라진 건 두 사람인데 복수하면 뭐 어때?그런데 지금은... 아내가 그를 탓하고 딸도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이 집안에서 자신이 쓸데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김성주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꽉 쥔 두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그렇게 천천히 몸을 돌려 비틀거리며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엄마, 우리 인제 어떡해요?”김유정이 다급하게 묻자 손미현은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이 바닥 사람이라면 손미현이 그 프로젝트를 담당할 거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최연준에게 빼앗겼으니 어찌 얼굴을 들고 다닌단 말인가?하지만 만약 최연준과 손을 잡는다면... 그녀의 몫도 있게 된다.손미현이 눈알을 굴리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분부했다.“유정아, 얼른 가서 선물 준비해. 비싼 걸로. 우리 아무래도 내일 최연준을 또 찾아가야 할 것 같아.”...오전, 서재에 앉아 계약서를 내려다보는 최연준의 입가에 미소가 새어 나왔다.국제 패션위크의 주문을 이렇게 쉽게 손에 넣었다는 걸 누가 믿겠는가?손미현이 별의별 궁리를 다 써서 어머니에게서 빼앗은 것을 외삼촌이 다시 해결해 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게 바로 이익을 탐하여 뒤에 올 위험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건가?최연준은 씩 웃으며 계약서를 서랍에 넣었다.그때 강서연이 문을 열고 들어와 방금 내린 드립 커피를 테이블 앞에 내려놓았다. 최연준은 그녀의 작은 손을 잡고 슬쩍 잡아당겨 다리 위에 앉혔다.그러자 강서연이 그의 목을 감싸 안고 얼굴을 코에 대고 비비적거렸다.“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최연준은 계약서를 꺼내 강서연에게 보여주었다. 자초지종을 듣던 강서연은 화들짝 놀랐다가
강서연이 커다란 두 눈을 굴리더니 누가 올지 단번에 알아챘다.“외숙모가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고요?”최연준이 가볍게 웃었다.“당신은 어떻게 생각해?”강서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하긴, 이혼하고 애까지 데리고 김씨 가문에 시집온 손미현이 쉽게 물러나는 사람이었더라면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겠지.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최연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웃었다.“그럼 난 좀 더 잘게요. 여기 일은 전부 슈퍼맨 최연준에게 맡기도록 하겠습니다.”“알겠습니다, 사모님.”최연준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모든 게 최연준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강서연이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초인종 소리가 울렸고 잠시 후 집사가 다가와 알렸다.“도련님, 미현 사모님과 유정 아가씨가 오셨습니다. 안으로 들일까요?”고개를 든 최연준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손미현과 김유정은 1층 거실에서 최연준을 기다렸다. 계단을 내려가던 최연준의 눈에 다급함과 초조함, 그리고 불안감이 뒤섞인 두 모녀의 표정이 보였다. 게다가 빈손으로 오지 않고 선물까지 챙겨왔는데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명품 한정판 가방이었다.김유정의 얼굴에 아까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딱 봐도 한 번도 써보지 못한 티가 팍팍 났다. 이번에 손미현이 마음먹고 돈을 꽤 쓴 모양이다.최연준은 자신만만하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표정은 냉랭했지만 갖춰야 할 예의는 갖췄다.“외숙모, 유정아.”“아이고... 연준아.”손미현이 반갑게 인사했다.“외숙모가 참 오랜만에 너희들을 보러 왔지? 아 참, 서연이는? 이번 달에 산부인과 다녀와야 하는 거 아니야? 유정이 시간 되니까 유정이와 함께 가면 되겠네.”“그럴 필요 없어요. 제가 가면 돼요.”최연준의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빛은 한없이 냉랭했다.“그나저나 두 사람은 무슨 일로 우리 집까지 찾아왔어요?”손미현은 강서연을 위해 준비한 작은 성의라면서 선물을 건넸다. 하지만 최연준은 무덤덤하게 힐끗 쳐다보기만 했다. 최연준의 싸늘한 모습에 집
“부모도 자식도 없는 게 장사 바닥이에요. 이런 상황에 지금 저와 가족 간의 정을 운운하는 건 금기를 어기는 거나 마찬가지예요.”손미현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최연준이 한참 어린 손아랫사람이긴 하지만 엄청난 카리스마에 저도 모르게 두려움이 살짝 밀려왔다.“연준아...”손미현은 감정에 호소하기 시작했다.“네 삼촌이 어떤 사람인지 너도 잘 알잖아. 그냥 애야, 애. 애가 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하겠어? 오늘 너에게 주문을 넘겨줬지만 내일 기분이 좋아져서 다시 달라고 할지도 몰라. 허, 네 삼촌이 달라는데 안 줄 수 있어? 그렇게 되면 연준이 네 체면만 깎이잖아.”“그런가요?”최연준이 웃을 듯 말 듯 했다.“외숙모는 제 체면을 생각해서 이러시는 거군요?”“그럼, 당연하지.”“우리 삼촌이 그 정도로 지능이 낮다고 생각해요?”“그건...”손미현은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그때 김성주에게 진심이라면서 죽어도 결혼하겠다고 한 건 그녀였으니 말이다.“허, 외숙모.”최연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는 싸늘하게 비웃었다.“우리 삼촌이 반응이 느리긴 하지만 바보도 아니고 이랬다저랬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에요. 외숙모 아무래도 생각을 잘못하신 거 같아요.”손미현은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그를 한참 동안 멍하니 쳐다보았다.“그러니까 넌 주문을 나에게 돌려줄 생각이 없다, 이거지?”최연준은 그녀를 차갑게 쏘아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손미현은 같이 죽자는 식으로 덤벼들었다.“경고하는데 퇴로를 남겨두는 게 좋을 거야. 날 건드렸다간...”“어쩔 건데요?”최연준의 눈빛이 날카롭기 그지없었다.“허, 유정이 백화점에서 서연이를 난처하게 할 때 퇴로를 생각해 봤어요?”“오빠, 그건 다 오해야.”김유정이 억지소리를 꾸며댔다.“내가 임신을 해본 것도 아니고 튼살이 뭔지 당연히 모르지. 난 그저 신기해서 그런 것뿐이야... 여자의 배에 그렇게 흉측한 게 생길 줄은 정말 몰랐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