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연은 아무 말이 없었다.한없이 가녀린 엄마의 어깨였지만 기대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마음이 안정되었다. 엄마의 냄새가 그녀의 긴장했던 신경을 풀어주면서 진정하게 했다.“서연아.”윤문희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사실 우리 두 모녀는 운이 아주 좋아. 난 네 아빠를 만났고 넌 최 서방을 만났잖아.”강서연의 입꼬리가 살짝 실룩거렸다.‘그래. 두 사람 모두 엄마와 나에게 진심으로 잘해주고 있어.’“그런 사람 앞에서 왜 열등감이 들어?”윤문희는 강서연의 두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널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너의 그런 작은 흠 때문에 널 미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걱정하고 아껴줘.”“하지만...”강서연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게시글을 봤는데 아이를 낳은 후에 튼살이 많이 생기니까 남편들이 예전보다 무관심해지고 쳐다도 안 본대요. 어떤 남편은 저녁에 집에 들어오지도 않는대요. 엄마, 살면서 이런 자질구레한 것들 때문에 사랑이 식나 봐요.”윤문희는 어이없으면서도 웃음이 터져 나와 강서연의 이마를 툭 쳤다.“대체 어디 가서 그런 쓸데없는 글을 본 거야? 그런 남자도 있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엄마가 장담하는데 최 서방은 절대 그런 남자 아니야. 서연아, 사랑은 식는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더 견고해지는 거야. 너의 다이아몬드 반지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건이 영원히 반짝이고 빛나잖아.”“엄마...”“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널 숨길 필요 없어.”윤문희가 강서연의 머리를 어루만졌다.“너답게 살면서 두 사람의 새로운 생명을 맞이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는 걸 잊지 마.”...윤문희가 맨체스터에 온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윤정재의 전화는 끊이질 않았다. 그 바람에 강서연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아빠, 엄마는 절 챙겨주러 오셨다고요. 누가 납치해 갈까 봐 겁이 나서 그래요?”“딸, 네 엄마는 누구에게 쉽게 납치당하고 그럴 사람이 아니야.”윤정재가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경기는 자선 친선경기야.”최연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설명했다.“지고 이기는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이 경기의 모든 수입을 자선 단체에 기부한다는 거야.”“네...”강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축구 스타들도 많이 와요?”“응. 게다가 다 유명한 축구 스타들이야.”강서연이 활짝 웃었다. 최연준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팀 선수들이 입장하면서 장내는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아니나 다를까 TV에서만 보던 얼굴이 많이 보였다. 강서연은 평소 축구에 관심이 별로 없었고 최연준이 경기를 볼 때만 가끔 들여다보았기에 축구에 관해 잘 알지 못했다.다른 대부분의 여성 팬처럼 선수의 공을 다루는 기술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얼굴만 기억했다.“아, 저 사람은...”강서연은 놀라면서도 기뻐했다.“저 사람도 왔어요?”최연준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강서연이 어찌나 뚫어지게 쳐다보는지 두 눈이 다 튀어나올 지경이었다.하긴, 이렇게나 많은 축구 스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긴 했다.최연준이 입을 삐죽거렸다.이번 친선경기는 김중 그룹에서 주최하였기에 일반 축구 스타만 몇 명 정도 초대하면 된다고 했었다.‘누가 잘생긴 선수를 초대하라고 했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자들에게 엄벌을 내려야겠어!’최연준은 긴 팔을 뻗어 강서연을 품에 안으려 했지만 강서연은 옆에 있는 여자 팬들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치며 응원했다.강서연도 나름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어 옆에 있는 팬들과 바로 친해졌다.“어느 선수를 좋아해요?”“전 10번요.”“10번 선수 너무 잘생겼어요.”“공을 다루는 모습이 너무 남자다워요.”왁자지껄 수다를 떠는 여자들을 보며 최연준은 들고 있던 확성기를 부러뜨릴 정도로 꽉 쥐었다.강서연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녀들의 대화에 끼지는 않았지만 현장에서 축구를 관람하는 기분이 꽤 좋았다.“여보, 선수들만 보지 마.”최연준은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사실... 나도 공 잘 차.”“네?”강
후반전 경기가 시작되었다.최연준은 경기장에 나오자마자 맹공격을 펼쳤다. 미드 라인의 패스를 받은 최연준은 상대 진영으로 돌격하더니 상대 팀의 수비수를 가볍게 제치고 한 골을 넣었다.현장이 삽시간에 들끓었고 강서연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최연준은 유니폼을 벗어 손에 들고 흔들었다. 탄탄한 상반신이 드러나면서 남자다운 매력을 한껏 뽐냈다.“와!”강서연의 옆에 있던 상류층의 여자들은 숙녀의 이미지고 뭐고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강서연이 고개를 돌려보니 여자들의 두 눈이 하나같이 반짝였다. 당장이라도 경기장으로 뛰어 들어가 최연준을 잡아먹을 기세였다.더 멀리 내다보니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 팬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섹시한 춤을 추고 있었다.“저기요.”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봤어요? 봤어요? 최연준 씨 너무 대단해요.”“그러게 말이에요. 축구 스타들도 아예 비교가 안 된다니까요.”“와! 또 상대 진영으로 쳐들어갔어요.”강서연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환호 소리를 들으며 겉으로는 애써 웃는 척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이미 질투가 폭발했다.‘이 여자들 왜 이렇게 귀찮게 굴어? 그리고 연준 씨는 축구만 잘할 것이지, 옷은 왜 벗어?’강서연은 씩씩거리며 제자리로 돌아와 최연준의 얼굴이 닳도록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경기는 아주 치열하게 진행되었고 양 팀 선수 모두 최선을 다해 뛰었다. 경기가 거의 끝날 무렵 최연준이 미드 라인을 돌파하여 먼 거리 슛을 때렸다. 골이 상대의 골문에 들어간 동시에 심판이 호루라기를 불어 경기 종료를 알렸다.커다란 경기장에 있는 수만 명의 관중들이 동시에 환호했다.강서연이 고개를 들어보니 최연준이 또 옷을 벗고 승리를 축하하고 있었다.“최연준 씨!”강서연이 한국어로 소리를 질렀다.“옷 좀 입어요!”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환호성에 파묻혀 전달될 리가 없었다.경기장에 있는 최연준은 웃옷을 훌렁 벗은 것도 모자라 두 팔까지 벌려 카메라가 마음껏 찍도록 했다.강서연이 발끈하려던 그때 경기장
“하나도 안 아팠어. 하지만...”최씨 가문이든 김씨 가문이든 가정 교육이 엄하여 문신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하지만 가슴에는 문신할 수 있어.”최연준이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가슴 이 자리는 평생 단 한 사람에게만 남길 수 있어. 그러니까 서연아... 시간이 얼마나 지나든, 무슨 일이 있든 당신의 이름은 영원히 내 가슴에 새겨져 있어. 이 자리는 영원히 당신 것이야.”최연준은 강서연의 작은 얼굴을 받쳐 들고 입술에 진한 키스를 남겼다.뒤로 불꽃이 하늘로 솟아올라 아름답게 펼쳐졌고 반짝이는 하트 모양을 이루었다.불빛이 강서연의 아름다운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녀는 두 눈을 감고 최연준과 진한 키스를 나누었다.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볼을 타고 뚝 떨어졌다....휴대 전화를 들고 있는 김유정의 두 손이 파르르 떨렸다. 친선경기 생방송을 보던 김유정은 화가 난 나머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안색도 창백해졌다. 홧김에 휴대 전화를 던지려던 그때 손미현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뭐 하는 거야? 비싼 휴대 전화가 망가지면 어쩌려고?”“엄마.”김유정이 히스테릭하게 울부짖었다.“그깟 휴대 전화 망가지면 망가졌지, 뭐가 대수라고요. 왜요? 우리 인제 휴대 전화도 못 사는 신세가 됐어요?”“이게 휴대 전화 문제야?”손미현이 의미심장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휴대 전화를 망가뜨린다고 해도 안에 있는 사람은 여전히 존재하잖아.”김유정이 하도 씩씩거린 바람에 얼굴이 다 일그러졌다.“딸.”손미현이 영상을 힐끗 보았다.“최연준 그 녀석이 남의 호의를 무시한다면 너도 죽어라 매달릴 필요 없어. 엄마가 최연준보다 만 배 더 좋은 남자를 찾아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김유정은 소파에 엎드린 채 목청이 터져라 울었다.“됐어, 그만해. 그냥 나대게 내버려둬.”손미현이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아직 조급해하지 마. 쟤네 얼마 나대지도 못해. 엄마에게 다 방법이 있어.”“또 무슨 방법이 있어요?”김유정이 높은 목소리로 떠들어댔다.“지난번
손미현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족히 십여 초 동안 넋을 놓았다.“사모님, 사모님? 듣고 계세요?”손미현이 심호흡을 크게 한 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주문은 내 거야. 여러 브랜드와도 이미 얘기를 마쳤고 마지막으로 계약서에 사인하는 일만 남았다고. 그런데 어떻게 최연준에게 뺏겨?”“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그게 참 이상해요.”비서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하지만 방금 전해 들은 소식에 따르면 여러 브랜드 측에서 셋째 도련님과 계약했고 또...”“또 뭐?”“주문을 누군가 셋째 도련님께 준 것 같아요.”“뭐라고?”손미현이 손을 내려놓자 휴대 전화가 바닥에 툭 떨어지면서 화면이 와장창 깨졌다.“엄마, 무슨 일이에요?”김유정의 말이 끝나자마자 김성주가 한 손에는 새장을, 다른 한 손에는 밀랍 염주를 들고 베란다에서 비틀거리며 걸어왔다.“미현 씨, 무슨 일이야?”“아빠.”김유정이 재빨리 도움을 청했다.“엄마가 준비했던 패션위크 주문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어요.”“주문?”김성주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뭔가를 떠올렸다.“아, 국제 패션위크 말하는 거야?”“네.”“하하, 그거 내가 연준이에게 넘겼어. 당신이 자료를 저기에 둔 걸 알고 연준이더러 가져가라고 했어.”김성주는 솔직하고 당당하게 말했다. 손미현은 잘못 들은 줄 알고 귀까지 의심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김성주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방금... 뭐라고 했어요?”“내가 주문을 연준이에게 넘겼다고. 왜?”김성주는 화난 얼굴로 새장을 옆에 던져놓더니 팔짱을 꼈다.“지난번 연회에서 유정이가 그런 식으로 나에게 말하고서는 지금까지도 사과하지 않았어. 그리고 당신도 요 며칠 이상해. 맨날 날 볼 때마다 얼굴을 찡그리기나 하고. 예전처럼 나에게 잘해주지도 않아. 흥, 유정이는 날 아빠 취급 안 하고 당신은 날 남편 취급 안 했잖아. 그래서 작은 복수를 한 거야. 하하, 어때?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거 알
“엄마가 꺼지라잖아요. 못 들었어요?”김유정이 두 눈을 부릅뜨고 앞으로 다가가 그를 확 밀쳤다.“바보! 멍청이! 꺼져요!”김성주는 순간 멍해졌다. 엄청난 굉음이 귓가에서 폭발하는 것 같았고 마음을 칼로 도려내듯 아팠다. 그는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알지 못했다.분명 먼저 태도가 나쁘게 달라진 건 두 사람인데 복수하면 뭐 어때?그런데 지금은... 아내가 그를 탓하고 딸도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이 집안에서 자신이 쓸데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김성주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꽉 쥔 두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그렇게 천천히 몸을 돌려 비틀거리며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엄마, 우리 인제 어떡해요?”김유정이 다급하게 묻자 손미현은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이 바닥 사람이라면 손미현이 그 프로젝트를 담당할 거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최연준에게 빼앗겼으니 어찌 얼굴을 들고 다닌단 말인가?하지만 만약 최연준과 손을 잡는다면... 그녀의 몫도 있게 된다.손미현이 눈알을 굴리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분부했다.“유정아, 얼른 가서 선물 준비해. 비싼 걸로. 우리 아무래도 내일 최연준을 또 찾아가야 할 것 같아.”...오전, 서재에 앉아 계약서를 내려다보는 최연준의 입가에 미소가 새어 나왔다.국제 패션위크의 주문을 이렇게 쉽게 손에 넣었다는 걸 누가 믿겠는가?손미현이 별의별 궁리를 다 써서 어머니에게서 빼앗은 것을 외삼촌이 다시 해결해 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게 바로 이익을 탐하여 뒤에 올 위험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건가?최연준은 씩 웃으며 계약서를 서랍에 넣었다.그때 강서연이 문을 열고 들어와 방금 내린 드립 커피를 테이블 앞에 내려놓았다. 최연준은 그녀의 작은 손을 잡고 슬쩍 잡아당겨 다리 위에 앉혔다.그러자 강서연이 그의 목을 감싸 안고 얼굴을 코에 대고 비비적거렸다.“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최연준은 계약서를 꺼내 강서연에게 보여주었다. 자초지종을 듣던 강서연은 화들짝 놀랐다가
강서연이 커다란 두 눈을 굴리더니 누가 올지 단번에 알아챘다.“외숙모가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고요?”최연준이 가볍게 웃었다.“당신은 어떻게 생각해?”강서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하긴, 이혼하고 애까지 데리고 김씨 가문에 시집온 손미현이 쉽게 물러나는 사람이었더라면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겠지.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최연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웃었다.“그럼 난 좀 더 잘게요. 여기 일은 전부 슈퍼맨 최연준에게 맡기도록 하겠습니다.”“알겠습니다, 사모님.”최연준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모든 게 최연준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강서연이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초인종 소리가 울렸고 잠시 후 집사가 다가와 알렸다.“도련님, 미현 사모님과 유정 아가씨가 오셨습니다. 안으로 들일까요?”고개를 든 최연준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손미현과 김유정은 1층 거실에서 최연준을 기다렸다. 계단을 내려가던 최연준의 눈에 다급함과 초조함, 그리고 불안감이 뒤섞인 두 모녀의 표정이 보였다. 게다가 빈손으로 오지 않고 선물까지 챙겨왔는데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명품 한정판 가방이었다.김유정의 얼굴에 아까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딱 봐도 한 번도 써보지 못한 티가 팍팍 났다. 이번에 손미현이 마음먹고 돈을 꽤 쓴 모양이다.최연준은 자신만만하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표정은 냉랭했지만 갖춰야 할 예의는 갖췄다.“외숙모, 유정아.”“아이고... 연준아.”손미현이 반갑게 인사했다.“외숙모가 참 오랜만에 너희들을 보러 왔지? 아 참, 서연이는? 이번 달에 산부인과 다녀와야 하는 거 아니야? 유정이 시간 되니까 유정이와 함께 가면 되겠네.”“그럴 필요 없어요. 제가 가면 돼요.”최연준의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빛은 한없이 냉랭했다.“그나저나 두 사람은 무슨 일로 우리 집까지 찾아왔어요?”손미현은 강서연을 위해 준비한 작은 성의라면서 선물을 건넸다. 하지만 최연준은 무덤덤하게 힐끗 쳐다보기만 했다. 최연준의 싸늘한 모습에 집
“부모도 자식도 없는 게 장사 바닥이에요. 이런 상황에 지금 저와 가족 간의 정을 운운하는 건 금기를 어기는 거나 마찬가지예요.”손미현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최연준이 한참 어린 손아랫사람이긴 하지만 엄청난 카리스마에 저도 모르게 두려움이 살짝 밀려왔다.“연준아...”손미현은 감정에 호소하기 시작했다.“네 삼촌이 어떤 사람인지 너도 잘 알잖아. 그냥 애야, 애. 애가 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하겠어? 오늘 너에게 주문을 넘겨줬지만 내일 기분이 좋아져서 다시 달라고 할지도 몰라. 허, 네 삼촌이 달라는데 안 줄 수 있어? 그렇게 되면 연준이 네 체면만 깎이잖아.”“그런가요?”최연준이 웃을 듯 말 듯 했다.“외숙모는 제 체면을 생각해서 이러시는 거군요?”“그럼, 당연하지.”“우리 삼촌이 그 정도로 지능이 낮다고 생각해요?”“그건...”손미현은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그때 김성주에게 진심이라면서 죽어도 결혼하겠다고 한 건 그녀였으니 말이다.“허, 외숙모.”최연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는 싸늘하게 비웃었다.“우리 삼촌이 반응이 느리긴 하지만 바보도 아니고 이랬다저랬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에요. 외숙모 아무래도 생각을 잘못하신 거 같아요.”손미현은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그를 한참 동안 멍하니 쳐다보았다.“그러니까 넌 주문을 나에게 돌려줄 생각이 없다, 이거지?”최연준은 그녀를 차갑게 쏘아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손미현은 같이 죽자는 식으로 덤벼들었다.“경고하는데 퇴로를 남겨두는 게 좋을 거야. 날 건드렸다간...”“어쩔 건데요?”최연준의 눈빛이 날카롭기 그지없었다.“허, 유정이 백화점에서 서연이를 난처하게 할 때 퇴로를 생각해 봤어요?”“오빠, 그건 다 오해야.”김유정이 억지소리를 꾸며댔다.“내가 임신을 해본 것도 아니고 튼살이 뭔지 당연히 모르지. 난 그저 신기해서 그런 것뿐이야... 여자의 배에 그렇게 흉측한 게 생길 줄은 정말 몰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