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은 얼굴이 사색이 된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효연 씨, 허풍 좀 그만 떨어요. 내가 우리 새언니에게 무슨 짓을 했다고 그래요? 좋은 마음으로 언니와 함께 옷을 사러 왔는데 내가 왜 당신에게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하죠?”“좋은 마음이라고요?”이효연이 성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김유정 씨, 계속 그렇게 뻔뻔스럽게 굴었다간 확 다 까발리는 수가 있어요?”“당신...”“당장 이 여자를 끌어내요.”이효연이 유창한 영어로 몇몇 경호원들에게 말했다.경호원은 전부 흑인이었는데 체구가 아주 건장했다. 눈알의 흰자위가 특히 커 보인 탓에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최연준의 부하들이 백화점의 문을 닫았고 속옷 가게의 호스트들은 벽에 딱 붙어선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흑인 경호원들이 김유정을 잡으려던 그때 강서연이 옷을 갈아입고 탈의실에서 걸어 나왔다.“사모님!”이효연이 재빨리 다가가 강서연을 부축했다.강서연의 두 손이 얼음장같이 차가웠고 코끝에 작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두 다리는 천근같이 무거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아주 힘겨워 보였다.“사모님, 괜찮으세요?”이효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제가 모셔다드릴게요.”“혼자 갈게요. 아무도 따라오지 말아요.”강서연이 기운 없이 말했다. 마치 무언가가 그녀의 기운을 전부 빼앗은 듯 축 처진 모습이었다. 그녀는 배를 부여잡고 힘겹게 발걸음을 내디디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김유정의 곁을 스쳐 지나갈 때 강서연은 김유정을 째려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김유정은 그녀의 약점을 진작 알고 있었고 그녀의 자존심을 어떻게 완벽하게 짓밟을 수 있는지조차 알고 있었다.강서연은 가끔 완벽주의자이다. 처음 임신한 거라 불편한 점이 많았지만 다 참아왔고 마음의 변화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그뿐만 아니라 살이 찌고 얼굴에 기미가 생기며 행동이 불편한 점도 적응하려 노력했고 아이를 낳은 후에는 다 좋아질 거라고 자신을 위로했다.하지만 볼록한 배 위의
최연준은 웃으며 그녀의 배를 다정하게 어루만졌다.“아들, 아빠 좀 도와줄래?”아이가 또 한 번 움직였다.“엄마에게 전해줘.”최연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아빠 마음속에서는 영원히 제일 예쁘고 영원히 사랑한다고.”그때 강서연이 몸을 뒤척이자 최연준은 그대로 얼어붙어 숨조차 쉬지 못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이불을 덮어준 후 다시 옆에 누웠다.이튿날 최연준은 장모님에게 전화하여 도움을 청했다.“장모님, 서연이 요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요.”윤문희는 듣자마자 여자의 임신 반응이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요 며칠 절 가까이 가게도 못 하고 옷을 갈아입을 때도 등을 돌려요.”최연준이 낮은 목소리로 하소연했다.“게다가 씻겨주지도 못하게 해요. 장모님이 좀 오셔서 서연이 옆에 있어 주시면 안 돼요?”윤문희는 두말없이 바로 그날의 영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낮잠에서 깬 강서연이 아직 비몽사몽이던 그때 익숙한 카렌둘라 향이 코끝을 스쳤다.“엄마?”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강서연은 윤문희가 정말로 눈앞에 있는 걸 보고는 기쁨의 소리를 질렀다.“엄마, 여긴 어떻게 왔어요?”“바보야, 당연히 널 보러 왔지.”윤문희는 그녀를 안고 등을 토닥였다. 딸의 배가 더 불러온 걸 보자 예전에 자신이 임신했던 때가 떠오르면서 만감이 교차했고 눈시울도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엄마...”윤문희의 눈가가 촉촉해진 걸 본 강서연은 마음이 움찔했다.“엄마, 왜 울어요?”“갑자기 가슴이 울컥해서 주체가 안 됐어.”윤문희는 웃으며 딸을 빤히 쳐다보았다.“너도 예전에는 엄마 배 속에 있던 아가였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네가 엄마가 됐네.”강서연이 가볍게 웃었다. 생명이 한세대 한세대 이어지는 게 참으로 신기했다.두 모녀가 단둘이 얘기할 자리를 마련해주려고 눈치 빠른 집사와 도우미들은 알아서 물러갔다.윤문희는 강서연을 보더니 천천히 자신의 옷을 들어 올렸다.“엄마?”그런 그녀의 모습에 강서연은 화들짝 놀랐다가 엄마의 배에 생긴 튼살을
강서연은 아무 말이 없었다.한없이 가녀린 엄마의 어깨였지만 기대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마음이 안정되었다. 엄마의 냄새가 그녀의 긴장했던 신경을 풀어주면서 진정하게 했다.“서연아.”윤문희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사실 우리 두 모녀는 운이 아주 좋아. 난 네 아빠를 만났고 넌 최 서방을 만났잖아.”강서연의 입꼬리가 살짝 실룩거렸다.‘그래. 두 사람 모두 엄마와 나에게 진심으로 잘해주고 있어.’“그런 사람 앞에서 왜 열등감이 들어?”윤문희는 강서연의 두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널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너의 그런 작은 흠 때문에 널 미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걱정하고 아껴줘.”“하지만...”강서연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게시글을 봤는데 아이를 낳은 후에 튼살이 많이 생기니까 남편들이 예전보다 무관심해지고 쳐다도 안 본대요. 어떤 남편은 저녁에 집에 들어오지도 않는대요. 엄마, 살면서 이런 자질구레한 것들 때문에 사랑이 식나 봐요.”윤문희는 어이없으면서도 웃음이 터져 나와 강서연의 이마를 툭 쳤다.“대체 어디 가서 그런 쓸데없는 글을 본 거야? 그런 남자도 있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엄마가 장담하는데 최 서방은 절대 그런 남자 아니야. 서연아, 사랑은 식는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더 견고해지는 거야. 너의 다이아몬드 반지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건이 영원히 반짝이고 빛나잖아.”“엄마...”“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널 숨길 필요 없어.”윤문희가 강서연의 머리를 어루만졌다.“너답게 살면서 두 사람의 새로운 생명을 맞이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는 걸 잊지 마.”...윤문희가 맨체스터에 온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윤정재의 전화는 끊이질 않았다. 그 바람에 강서연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아빠, 엄마는 절 챙겨주러 오셨다고요. 누가 납치해 갈까 봐 겁이 나서 그래요?”“딸, 네 엄마는 누구에게 쉽게 납치당하고 그럴 사람이 아니야.”윤정재가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경기는 자선 친선경기야.”최연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설명했다.“지고 이기는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이 경기의 모든 수입을 자선 단체에 기부한다는 거야.”“네...”강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축구 스타들도 많이 와요?”“응. 게다가 다 유명한 축구 스타들이야.”강서연이 활짝 웃었다. 최연준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팀 선수들이 입장하면서 장내는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아니나 다를까 TV에서만 보던 얼굴이 많이 보였다. 강서연은 평소 축구에 관심이 별로 없었고 최연준이 경기를 볼 때만 가끔 들여다보았기에 축구에 관해 잘 알지 못했다.다른 대부분의 여성 팬처럼 선수의 공을 다루는 기술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얼굴만 기억했다.“아, 저 사람은...”강서연은 놀라면서도 기뻐했다.“저 사람도 왔어요?”최연준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강서연이 어찌나 뚫어지게 쳐다보는지 두 눈이 다 튀어나올 지경이었다.하긴, 이렇게나 많은 축구 스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긴 했다.최연준이 입을 삐죽거렸다.이번 친선경기는 김중 그룹에서 주최하였기에 일반 축구 스타만 몇 명 정도 초대하면 된다고 했었다.‘누가 잘생긴 선수를 초대하라고 했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자들에게 엄벌을 내려야겠어!’최연준은 긴 팔을 뻗어 강서연을 품에 안으려 했지만 강서연은 옆에 있는 여자 팬들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치며 응원했다.강서연도 나름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어 옆에 있는 팬들과 바로 친해졌다.“어느 선수를 좋아해요?”“전 10번요.”“10번 선수 너무 잘생겼어요.”“공을 다루는 모습이 너무 남자다워요.”왁자지껄 수다를 떠는 여자들을 보며 최연준은 들고 있던 확성기를 부러뜨릴 정도로 꽉 쥐었다.강서연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녀들의 대화에 끼지는 않았지만 현장에서 축구를 관람하는 기분이 꽤 좋았다.“여보, 선수들만 보지 마.”최연준은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사실... 나도 공 잘 차.”“네?”강
후반전 경기가 시작되었다.최연준은 경기장에 나오자마자 맹공격을 펼쳤다. 미드 라인의 패스를 받은 최연준은 상대 진영으로 돌격하더니 상대 팀의 수비수를 가볍게 제치고 한 골을 넣었다.현장이 삽시간에 들끓었고 강서연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최연준은 유니폼을 벗어 손에 들고 흔들었다. 탄탄한 상반신이 드러나면서 남자다운 매력을 한껏 뽐냈다.“와!”강서연의 옆에 있던 상류층의 여자들은 숙녀의 이미지고 뭐고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강서연이 고개를 돌려보니 여자들의 두 눈이 하나같이 반짝였다. 당장이라도 경기장으로 뛰어 들어가 최연준을 잡아먹을 기세였다.더 멀리 내다보니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 팬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섹시한 춤을 추고 있었다.“저기요.”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봤어요? 봤어요? 최연준 씨 너무 대단해요.”“그러게 말이에요. 축구 스타들도 아예 비교가 안 된다니까요.”“와! 또 상대 진영으로 쳐들어갔어요.”강서연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환호 소리를 들으며 겉으로는 애써 웃는 척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이미 질투가 폭발했다.‘이 여자들 왜 이렇게 귀찮게 굴어? 그리고 연준 씨는 축구만 잘할 것이지, 옷은 왜 벗어?’강서연은 씩씩거리며 제자리로 돌아와 최연준의 얼굴이 닳도록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경기는 아주 치열하게 진행되었고 양 팀 선수 모두 최선을 다해 뛰었다. 경기가 거의 끝날 무렵 최연준이 미드 라인을 돌파하여 먼 거리 슛을 때렸다. 골이 상대의 골문에 들어간 동시에 심판이 호루라기를 불어 경기 종료를 알렸다.커다란 경기장에 있는 수만 명의 관중들이 동시에 환호했다.강서연이 고개를 들어보니 최연준이 또 옷을 벗고 승리를 축하하고 있었다.“최연준 씨!”강서연이 한국어로 소리를 질렀다.“옷 좀 입어요!”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환호성에 파묻혀 전달될 리가 없었다.경기장에 있는 최연준은 웃옷을 훌렁 벗은 것도 모자라 두 팔까지 벌려 카메라가 마음껏 찍도록 했다.강서연이 발끈하려던 그때 경기장
“하나도 안 아팠어. 하지만...”최씨 가문이든 김씨 가문이든 가정 교육이 엄하여 문신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하지만 가슴에는 문신할 수 있어.”최연준이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가슴 이 자리는 평생 단 한 사람에게만 남길 수 있어. 그러니까 서연아... 시간이 얼마나 지나든, 무슨 일이 있든 당신의 이름은 영원히 내 가슴에 새겨져 있어. 이 자리는 영원히 당신 것이야.”최연준은 강서연의 작은 얼굴을 받쳐 들고 입술에 진한 키스를 남겼다.뒤로 불꽃이 하늘로 솟아올라 아름답게 펼쳐졌고 반짝이는 하트 모양을 이루었다.불빛이 강서연의 아름다운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녀는 두 눈을 감고 최연준과 진한 키스를 나누었다.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볼을 타고 뚝 떨어졌다....휴대 전화를 들고 있는 김유정의 두 손이 파르르 떨렸다. 친선경기 생방송을 보던 김유정은 화가 난 나머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안색도 창백해졌다. 홧김에 휴대 전화를 던지려던 그때 손미현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뭐 하는 거야? 비싼 휴대 전화가 망가지면 어쩌려고?”“엄마.”김유정이 히스테릭하게 울부짖었다.“그깟 휴대 전화 망가지면 망가졌지, 뭐가 대수라고요. 왜요? 우리 인제 휴대 전화도 못 사는 신세가 됐어요?”“이게 휴대 전화 문제야?”손미현이 의미심장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휴대 전화를 망가뜨린다고 해도 안에 있는 사람은 여전히 존재하잖아.”김유정이 하도 씩씩거린 바람에 얼굴이 다 일그러졌다.“딸.”손미현이 영상을 힐끗 보았다.“최연준 그 녀석이 남의 호의를 무시한다면 너도 죽어라 매달릴 필요 없어. 엄마가 최연준보다 만 배 더 좋은 남자를 찾아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김유정은 소파에 엎드린 채 목청이 터져라 울었다.“됐어, 그만해. 그냥 나대게 내버려둬.”손미현이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아직 조급해하지 마. 쟤네 얼마 나대지도 못해. 엄마에게 다 방법이 있어.”“또 무슨 방법이 있어요?”김유정이 높은 목소리로 떠들어댔다.“지난번
손미현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족히 십여 초 동안 넋을 놓았다.“사모님, 사모님? 듣고 계세요?”손미현이 심호흡을 크게 한 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주문은 내 거야. 여러 브랜드와도 이미 얘기를 마쳤고 마지막으로 계약서에 사인하는 일만 남았다고. 그런데 어떻게 최연준에게 뺏겨?”“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그게 참 이상해요.”비서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하지만 방금 전해 들은 소식에 따르면 여러 브랜드 측에서 셋째 도련님과 계약했고 또...”“또 뭐?”“주문을 누군가 셋째 도련님께 준 것 같아요.”“뭐라고?”손미현이 손을 내려놓자 휴대 전화가 바닥에 툭 떨어지면서 화면이 와장창 깨졌다.“엄마, 무슨 일이에요?”김유정의 말이 끝나자마자 김성주가 한 손에는 새장을, 다른 한 손에는 밀랍 염주를 들고 베란다에서 비틀거리며 걸어왔다.“미현 씨, 무슨 일이야?”“아빠.”김유정이 재빨리 도움을 청했다.“엄마가 준비했던 패션위크 주문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어요.”“주문?”김성주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뭔가를 떠올렸다.“아, 국제 패션위크 말하는 거야?”“네.”“하하, 그거 내가 연준이에게 넘겼어. 당신이 자료를 저기에 둔 걸 알고 연준이더러 가져가라고 했어.”김성주는 솔직하고 당당하게 말했다. 손미현은 잘못 들은 줄 알고 귀까지 의심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김성주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방금... 뭐라고 했어요?”“내가 주문을 연준이에게 넘겼다고. 왜?”김성주는 화난 얼굴로 새장을 옆에 던져놓더니 팔짱을 꼈다.“지난번 연회에서 유정이가 그런 식으로 나에게 말하고서는 지금까지도 사과하지 않았어. 그리고 당신도 요 며칠 이상해. 맨날 날 볼 때마다 얼굴을 찡그리기나 하고. 예전처럼 나에게 잘해주지도 않아. 흥, 유정이는 날 아빠 취급 안 하고 당신은 날 남편 취급 안 했잖아. 그래서 작은 복수를 한 거야. 하하, 어때?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거 알
“엄마가 꺼지라잖아요. 못 들었어요?”김유정이 두 눈을 부릅뜨고 앞으로 다가가 그를 확 밀쳤다.“바보! 멍청이! 꺼져요!”김성주는 순간 멍해졌다. 엄청난 굉음이 귓가에서 폭발하는 것 같았고 마음을 칼로 도려내듯 아팠다. 그는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알지 못했다.분명 먼저 태도가 나쁘게 달라진 건 두 사람인데 복수하면 뭐 어때?그런데 지금은... 아내가 그를 탓하고 딸도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이 집안에서 자신이 쓸데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김성주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꽉 쥔 두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그렇게 천천히 몸을 돌려 비틀거리며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엄마, 우리 인제 어떡해요?”김유정이 다급하게 묻자 손미현은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이 바닥 사람이라면 손미현이 그 프로젝트를 담당할 거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최연준에게 빼앗겼으니 어찌 얼굴을 들고 다닌단 말인가?하지만 만약 최연준과 손을 잡는다면... 그녀의 몫도 있게 된다.손미현이 눈알을 굴리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분부했다.“유정아, 얼른 가서 선물 준비해. 비싼 걸로. 우리 아무래도 내일 최연준을 또 찾아가야 할 것 같아.”...오전, 서재에 앉아 계약서를 내려다보는 최연준의 입가에 미소가 새어 나왔다.국제 패션위크의 주문을 이렇게 쉽게 손에 넣었다는 걸 누가 믿겠는가?손미현이 별의별 궁리를 다 써서 어머니에게서 빼앗은 것을 외삼촌이 다시 해결해 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게 바로 이익을 탐하여 뒤에 올 위험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건가?최연준은 씩 웃으며 계약서를 서랍에 넣었다.그때 강서연이 문을 열고 들어와 방금 내린 드립 커피를 테이블 앞에 내려놓았다. 최연준은 그녀의 작은 손을 잡고 슬쩍 잡아당겨 다리 위에 앉혔다.그러자 강서연이 그의 목을 감싸 안고 얼굴을 코에 대고 비비적거렸다.“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최연준은 계약서를 꺼내 강서연에게 보여주었다. 자초지종을 듣던 강서연은 화들짝 놀랐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