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저기, 오늘 해가 정말 좋네요!”곽보미는 횡설수설하며 두 마디를 대꾸하더니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최연준은 심각한 얼굴로 강서연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며 손으로 턱을 만졌다.그는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강서연은 그가 화가 난 줄 알고 작은 머리를 그의 가슴에 기대어 좋은 말 몇 마디를 하려는데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곽보미는 갈수록 대담해지는 거 같아!”“네?”“누군가가 곽보미를 잡아줘야 할 것 같아!”최연준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순하디순한 눈빛과 마주쳤다.강서연은 그의 깊은 눈동자의 뜻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간 모습이 여우 같다고만 생각했다.그녀는 최연준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유찬혁이 영국에서도 업무가 있는데 그를 불러서 며칠 동안 머물게 할까?나석진도 연수를 받아야 하는데 연극 학원에 자리를 마련해 줄까?아니면... 아예 두 사람을 같이 데리고 와서 시끌벅적하게 만들까?최연준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렸다....작업실 문 앞에서 닷새를 지킨 후, 김유정은 마침내 곽보미를 만났다.곽보미는 그녀의 극도로 열정적인 포옹과 과장된 화장에 깜짝 놀랐고, 그 향수 냄새는 더 자극적이었다.곽보미는 몇 번이나 기침하더니 억지로 웃으며 그녀를 밀어냈다.“곽 감독님!”김유정은 몸을 비틀어 꽈배기로 만들고 억지로 자료를 그녀에게 주었다.“곽 감독님, 이것은 제 이력서입니다. 안에는 제가 출연한 영화 자료가 들어 있습니다!”“네!”곽보미는 억지로 웃음을 짓을 수밖에 없었다.이러한 자료는 이미 그녀의 메일에 대부분을 차지했다.“곽 감독님. 우리 둘이 어디선가 본 적이 있지 않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제가 감독님을 보면 유독 친근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요.”“그래요?”곽보미는 담담하게 말했다.“제가 낯익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 저를 TV에서 봐서 그랬을 거예요. 제가 국제영화제에 여러 번 참가했어요.”김유정은 치켜 올라간 입술이 굳어 더 이상 말
“네가 뭔데!”그녀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우리 김씨 가문에서 기르는 개 한 마리일 뿐인데...”“뭐라고 했어요?”곽보미가 나와 그녀를 노려보았다.김유정은 당황해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고 설명하려고 했지만 입술을 몇 번 움직이고 한마디도 안 나왔다.‘조금 전에 혼잣말했는데 그걸 또 언제 들었데?’“김유정 씨.”곽보미가 냉소하며 말했다.“원래 이렇게 말이 가볍습니까?”곽보미는 본래 약간의 남자다움이 있어서 웃지 않을 때는 더욱 차갑고 위엄이 있어 보인다.“김유정 씨, 이왕 말이 나온 김에 그냥 다 털어놓고 말하는 게 좋겠어요.”곽보미는 손을 들어 옆에 있는 화분을 만지작거리며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제가 출연하는 것을 막은 줄 알아요?”“무슨 소리예요?”김유정이 잠시 멈칫했다.“사실 이것은 투자 측의 뜻입니다.”곽보미는 일부러 투자 측의 세 글자를 강하게 말했다.“제가 캐스팅하지만 투자 측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어요. 지금 제 영화에 엄청난 돈을 투자하는 사람이 있는데 유일한 조건은 김유정 씨가 어떤 배역도 맡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김유정 씨.”곽보미는 그녀와 스쳐 지나갈 때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냉소했다.“도대체 누가 김씨 가문의 개인지 스스로 가늠해 보세요.”“너...”김유정은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다.곽보미가 몸을 돌려 작업실로 들어가자 복도에서 김유정이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말해봐요. 어느 투자 측인데요! 비열하고 파렴치해요!”곽보미는 대답하지 않고 문을 쾅 닫았다.김유정은 온몸을 떨며 주먹을 힘껏 쥐고 손톱까지 살 속으로 들어갔다.투자 측?이 집에는 투자 측이 누가 있겠어! 엔터테인먼트를 관리하는 것은 김자옥이다!그리고 최근 김자옥이 자리를 비운 사이 강서연이 비서실장으로 변신해 회사의 크고 작은 일들을 관리하고 있다...투자 측은 틀림없이 그녀일 거다!김유정은 입술을 세게 깨물며 한 걸음 한 걸음 비틀비틀 건물 밖으로 걸어 나갔다.바깥 하늘에는 먹구름으로 뒤덮였고 공기
쇼핑할 때 김유정은 몹시 자상하고 잘 챙겨주며 계속 그녀를 배려해 주었다.속옷 가게를 지나는데 김유정이 굳이 그녀를 끌고 들어가 보려고 한다.“언니, 이 브랜드는 영국에서 매우 유명해요! 디자인도 좋을 뿐만 아니라 옷감도 편한데 한번 들어가서 입어볼래요?”“유정 씨, 제가 좀 피곤해서요.”강서연은 완곡하게 거절했다.“잠시 후 효연 씨가 저를 데리러 올 거예요. 돌아다니지 않고 그냥 여기서 기다릴게요.”“네?”김유정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언니, 제가 쇼핑하자고 했는데 이효연을 불러오다니, 저를 못 믿으시는 거예요?”“아니에요. 저는 그냥...”“언니,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김유정이 고개를 숙이자 강서연은 그녀가 안쓰러웠다. 이효연이 오기까지 십여 분이 남았는데 차라리 안으로 들어가 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김유정은 기뻐하며 강서연을 부축하여 안으로 들어갔다.그녀는 강서연을 위해 임산부 전용 속옷을 여러 벌 골라주었는데, 원단이 부드럽고 편안하며 임산부를 위해 디자인되어 보기 좋으면서도 실용적이었다.“언니, 한번 입어보세요. 제가 사드릴 거예요!”“아니에요.”“언니에게 선물을 사주고 싶을 뿐이에요!”김유정의 얼굴은 맑고 순수하며 활발하다.강서연은 잠시 오성에 있는 최연희를 떠올렸다.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숨을 크게 쉬고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배가 커지면서 속옷 사이즈가 안 맞는데 딱 마침 이런 속옷이 몇 벌 필요했다.그러나 그녀는 김유정이 돈을 내도록 할 수 없었고 이런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강서연은 속옷을 들고 쇼호스트의 안내를 받으며 VIP 피팅룸으로 들어갔다.그런데 막 웃옷을 벗고 속옷도 갈아입지 않은 상태에서 김유정이 갑자기 쳐들어왔다!“언니, 이런 걸 몇 개 더 찾았는데...”“아!”강서연이 깜짝 놀라 급히 손으로 가렸다.하지만 김유정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고 피팅룸 문은 아직 활짝 열려있었으며 그녀는 강서연의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언니...”강서연의 심장박동수가 올라갔다
김유정은 얼굴이 사색이 된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효연 씨, 허풍 좀 그만 떨어요. 내가 우리 새언니에게 무슨 짓을 했다고 그래요? 좋은 마음으로 언니와 함께 옷을 사러 왔는데 내가 왜 당신에게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하죠?”“좋은 마음이라고요?”이효연이 성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김유정 씨, 계속 그렇게 뻔뻔스럽게 굴었다간 확 다 까발리는 수가 있어요?”“당신...”“당장 이 여자를 끌어내요.”이효연이 유창한 영어로 몇몇 경호원들에게 말했다.경호원은 전부 흑인이었는데 체구가 아주 건장했다. 눈알의 흰자위가 특히 커 보인 탓에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최연준의 부하들이 백화점의 문을 닫았고 속옷 가게의 호스트들은 벽에 딱 붙어선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흑인 경호원들이 김유정을 잡으려던 그때 강서연이 옷을 갈아입고 탈의실에서 걸어 나왔다.“사모님!”이효연이 재빨리 다가가 강서연을 부축했다.강서연의 두 손이 얼음장같이 차가웠고 코끝에 작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두 다리는 천근같이 무거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아주 힘겨워 보였다.“사모님, 괜찮으세요?”이효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제가 모셔다드릴게요.”“혼자 갈게요. 아무도 따라오지 말아요.”강서연이 기운 없이 말했다. 마치 무언가가 그녀의 기운을 전부 빼앗은 듯 축 처진 모습이었다. 그녀는 배를 부여잡고 힘겹게 발걸음을 내디디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김유정의 곁을 스쳐 지나갈 때 강서연은 김유정을 째려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김유정은 그녀의 약점을 진작 알고 있었고 그녀의 자존심을 어떻게 완벽하게 짓밟을 수 있는지조차 알고 있었다.강서연은 가끔 완벽주의자이다. 처음 임신한 거라 불편한 점이 많았지만 다 참아왔고 마음의 변화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그뿐만 아니라 살이 찌고 얼굴에 기미가 생기며 행동이 불편한 점도 적응하려 노력했고 아이를 낳은 후에는 다 좋아질 거라고 자신을 위로했다.하지만 볼록한 배 위의
최연준은 웃으며 그녀의 배를 다정하게 어루만졌다.“아들, 아빠 좀 도와줄래?”아이가 또 한 번 움직였다.“엄마에게 전해줘.”최연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아빠 마음속에서는 영원히 제일 예쁘고 영원히 사랑한다고.”그때 강서연이 몸을 뒤척이자 최연준은 그대로 얼어붙어 숨조차 쉬지 못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이불을 덮어준 후 다시 옆에 누웠다.이튿날 최연준은 장모님에게 전화하여 도움을 청했다.“장모님, 서연이 요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요.”윤문희는 듣자마자 여자의 임신 반응이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요 며칠 절 가까이 가게도 못 하고 옷을 갈아입을 때도 등을 돌려요.”최연준이 낮은 목소리로 하소연했다.“게다가 씻겨주지도 못하게 해요. 장모님이 좀 오셔서 서연이 옆에 있어 주시면 안 돼요?”윤문희는 두말없이 바로 그날의 영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낮잠에서 깬 강서연이 아직 비몽사몽이던 그때 익숙한 카렌둘라 향이 코끝을 스쳤다.“엄마?”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강서연은 윤문희가 정말로 눈앞에 있는 걸 보고는 기쁨의 소리를 질렀다.“엄마, 여긴 어떻게 왔어요?”“바보야, 당연히 널 보러 왔지.”윤문희는 그녀를 안고 등을 토닥였다. 딸의 배가 더 불러온 걸 보자 예전에 자신이 임신했던 때가 떠오르면서 만감이 교차했고 눈시울도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엄마...”윤문희의 눈가가 촉촉해진 걸 본 강서연은 마음이 움찔했다.“엄마, 왜 울어요?”“갑자기 가슴이 울컥해서 주체가 안 됐어.”윤문희는 웃으며 딸을 빤히 쳐다보았다.“너도 예전에는 엄마 배 속에 있던 아가였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네가 엄마가 됐네.”강서연이 가볍게 웃었다. 생명이 한세대 한세대 이어지는 게 참으로 신기했다.두 모녀가 단둘이 얘기할 자리를 마련해주려고 눈치 빠른 집사와 도우미들은 알아서 물러갔다.윤문희는 강서연을 보더니 천천히 자신의 옷을 들어 올렸다.“엄마?”그런 그녀의 모습에 강서연은 화들짝 놀랐다가 엄마의 배에 생긴 튼살을
강서연은 아무 말이 없었다.한없이 가녀린 엄마의 어깨였지만 기대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마음이 안정되었다. 엄마의 냄새가 그녀의 긴장했던 신경을 풀어주면서 진정하게 했다.“서연아.”윤문희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사실 우리 두 모녀는 운이 아주 좋아. 난 네 아빠를 만났고 넌 최 서방을 만났잖아.”강서연의 입꼬리가 살짝 실룩거렸다.‘그래. 두 사람 모두 엄마와 나에게 진심으로 잘해주고 있어.’“그런 사람 앞에서 왜 열등감이 들어?”윤문희는 강서연의 두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널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너의 그런 작은 흠 때문에 널 미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걱정하고 아껴줘.”“하지만...”강서연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게시글을 봤는데 아이를 낳은 후에 튼살이 많이 생기니까 남편들이 예전보다 무관심해지고 쳐다도 안 본대요. 어떤 남편은 저녁에 집에 들어오지도 않는대요. 엄마, 살면서 이런 자질구레한 것들 때문에 사랑이 식나 봐요.”윤문희는 어이없으면서도 웃음이 터져 나와 강서연의 이마를 툭 쳤다.“대체 어디 가서 그런 쓸데없는 글을 본 거야? 그런 남자도 있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엄마가 장담하는데 최 서방은 절대 그런 남자 아니야. 서연아, 사랑은 식는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더 견고해지는 거야. 너의 다이아몬드 반지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건이 영원히 반짝이고 빛나잖아.”“엄마...”“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널 숨길 필요 없어.”윤문희가 강서연의 머리를 어루만졌다.“너답게 살면서 두 사람의 새로운 생명을 맞이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는 걸 잊지 마.”...윤문희가 맨체스터에 온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윤정재의 전화는 끊이질 않았다. 그 바람에 강서연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아빠, 엄마는 절 챙겨주러 오셨다고요. 누가 납치해 갈까 봐 겁이 나서 그래요?”“딸, 네 엄마는 누구에게 쉽게 납치당하고 그럴 사람이 아니야.”윤정재가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경기는 자선 친선경기야.”최연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설명했다.“지고 이기는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이 경기의 모든 수입을 자선 단체에 기부한다는 거야.”“네...”강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축구 스타들도 많이 와요?”“응. 게다가 다 유명한 축구 스타들이야.”강서연이 활짝 웃었다. 최연준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팀 선수들이 입장하면서 장내는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아니나 다를까 TV에서만 보던 얼굴이 많이 보였다. 강서연은 평소 축구에 관심이 별로 없었고 최연준이 경기를 볼 때만 가끔 들여다보았기에 축구에 관해 잘 알지 못했다.다른 대부분의 여성 팬처럼 선수의 공을 다루는 기술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얼굴만 기억했다.“아, 저 사람은...”강서연은 놀라면서도 기뻐했다.“저 사람도 왔어요?”최연준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강서연이 어찌나 뚫어지게 쳐다보는지 두 눈이 다 튀어나올 지경이었다.하긴, 이렇게나 많은 축구 스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긴 했다.최연준이 입을 삐죽거렸다.이번 친선경기는 김중 그룹에서 주최하였기에 일반 축구 스타만 몇 명 정도 초대하면 된다고 했었다.‘누가 잘생긴 선수를 초대하라고 했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자들에게 엄벌을 내려야겠어!’최연준은 긴 팔을 뻗어 강서연을 품에 안으려 했지만 강서연은 옆에 있는 여자 팬들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치며 응원했다.강서연도 나름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어 옆에 있는 팬들과 바로 친해졌다.“어느 선수를 좋아해요?”“전 10번요.”“10번 선수 너무 잘생겼어요.”“공을 다루는 모습이 너무 남자다워요.”왁자지껄 수다를 떠는 여자들을 보며 최연준은 들고 있던 확성기를 부러뜨릴 정도로 꽉 쥐었다.강서연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녀들의 대화에 끼지는 않았지만 현장에서 축구를 관람하는 기분이 꽤 좋았다.“여보, 선수들만 보지 마.”최연준은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사실... 나도 공 잘 차.”“네?”강
후반전 경기가 시작되었다.최연준은 경기장에 나오자마자 맹공격을 펼쳤다. 미드 라인의 패스를 받은 최연준은 상대 진영으로 돌격하더니 상대 팀의 수비수를 가볍게 제치고 한 골을 넣었다.현장이 삽시간에 들끓었고 강서연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최연준은 유니폼을 벗어 손에 들고 흔들었다. 탄탄한 상반신이 드러나면서 남자다운 매력을 한껏 뽐냈다.“와!”강서연의 옆에 있던 상류층의 여자들은 숙녀의 이미지고 뭐고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강서연이 고개를 돌려보니 여자들의 두 눈이 하나같이 반짝였다. 당장이라도 경기장으로 뛰어 들어가 최연준을 잡아먹을 기세였다.더 멀리 내다보니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 팬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섹시한 춤을 추고 있었다.“저기요.”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봤어요? 봤어요? 최연준 씨 너무 대단해요.”“그러게 말이에요. 축구 스타들도 아예 비교가 안 된다니까요.”“와! 또 상대 진영으로 쳐들어갔어요.”강서연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환호 소리를 들으며 겉으로는 애써 웃는 척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이미 질투가 폭발했다.‘이 여자들 왜 이렇게 귀찮게 굴어? 그리고 연준 씨는 축구만 잘할 것이지, 옷은 왜 벗어?’강서연은 씩씩거리며 제자리로 돌아와 최연준의 얼굴이 닳도록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경기는 아주 치열하게 진행되었고 양 팀 선수 모두 최선을 다해 뛰었다. 경기가 거의 끝날 무렵 최연준이 미드 라인을 돌파하여 먼 거리 슛을 때렸다. 골이 상대의 골문에 들어간 동시에 심판이 호루라기를 불어 경기 종료를 알렸다.커다란 경기장에 있는 수만 명의 관중들이 동시에 환호했다.강서연이 고개를 들어보니 최연준이 또 옷을 벗고 승리를 축하하고 있었다.“최연준 씨!”강서연이 한국어로 소리를 질렀다.“옷 좀 입어요!”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환호성에 파묻혀 전달될 리가 없었다.경기장에 있는 최연준은 웃옷을 훌렁 벗은 것도 모자라 두 팔까지 벌려 카메라가 마음껏 찍도록 했다.강서연이 발끈하려던 그때 경기장
“여기는 시장님의 연회 자리입니다. 우리가 여기 있어서는 안 되겠죠.”정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지만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건 우리의 책임입니다. 이곳에 인신매매범이 있다면, 반드시 체포해야겠지요!”“아니에요, 저는 인신매매범이 아니에요!”영미가 격렬히 몸부림치며 외쳤다.“아이를 납치한 건 제가 아니에요! 그건 정대명이 했어요, 모든 게 그의 짓이라고요! 제발 믿어주세요!”하지만 영미의 몸부림은 허공에 흩어졌고 그녀의 비명은 점점 희미해지다 이내 호텔 밖으로 사라졌다.정대명은 이 광경을 보며 무릎이 풀리고 말았다.지금 정대명은 최씨 가문의 경호원들에게 붙잡힌 상태였다. 곧 자신도 영미와 같은 처지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얘졌다.정대명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대며 간절히 애원했다.“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정말 몰랐어요, 그 여자가 이런 사람이었는지! 저는 그냥 돈 받고 시킨 대로 했을 뿐이에요... 이런 일인지 몰랐다고요!”“그 말은 경찰서에 가서 하시죠.”정호가 손짓하자, 사람들이 정대명을 데리고 가려 했다.그 순간, 정대명의 시선이 한쪽 구석에 있던 정승우를 향했다.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승우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고 칼날처럼 날카로웠다.그 눈빛에는 끝없는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고 아버지가 아닌 원수를 바라보는 듯했다.그러나 정승우는 정대명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혈육이었다.정대명의 마음속에는 분노와 초조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정승우의 그 적대적인 눈빛은 그의 내면 깊숙한 곳을 찔러버렸다. 정대명은 자신이 정승우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분통이 터졌다.몇 대 때리긴 했지만, 아버지한테 감히 원한을 품다니?정대명의 상처받은 자존심과 자격지심이 뒤엉키며 그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이 자리 잡았다. 죽더라도 누군가를 끌고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그리고 그 분노의 대상은 다름 아닌 그의 친아들이었다.정대명은 눈빛을 돌리며 표정을 바꾸더니 큰 소리로 울며 말했다.“좋습니다... 따라가겠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호텔 후문에서 촬영된 영상이 대형 스크린에 선명히 비쳤다. 화면 속에는 영미와 정대명이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뚜렷이 담겨 있었다.그리고 그들의 대화는 음향을 통해 그대로 흘러나왔다.“제가 이미 최씨 가문의 경호원들을 매수했어요. 당신은 그저 그 아이를 훔쳐내기만 하면 됩니다.”“영미 아가씨, 여자애를 훔쳐서 뭘 하려는 건데? 여자애는 값도 안 나가잖아!”“제가 하라는 대로 해요.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영미의 얼굴은 순간 새하얗게 변했다. 온몸의 기운이 빠진 영미는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아니, 저 여자가 최씨 가문의 딸을 훔치려고 했다고?”“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매년 이상한 일이 생긴다지만, 올해는 더하네. 최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보배 같은 아이를 훔쳐려했다고?”“말도 안 돼...”영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급히 변명했다.“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최 도련님, 제 말을 들어봐 주세요!”“음성이 이렇게 뚜렷한데, 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강소아는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영미를 꿰뚫어 보며 입을 열었다.“설마 저 영상 속의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겠지?”“영미 씨, 정말 어리석군요.”최군형이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발걸음 소리는 공간을 가득 메웠고 그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우리 최씨 가문의 경호원들이 그렇게 쉽게 매수될 거라고 믿었습니까?”“뭐라고요?”영미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문밖에서 두 사람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영미가 매수했다고 믿었던 바로 그 경호원들이었다.두 사람은 무표정한 얼굴로 영미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차가운 눈빛에 영미는 몸이 떨렸다.“당신들... 날 배신한 거예요?”영미는 멍한 얼굴로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영미야, 무슨 농담을 하는 거야?”강소아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이분들은 최씨 가문의 경호원이야. 이분들이 한 행동은 단지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 것뿐이야
그 순간, 조순철의 묵직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오늘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매우 기쁩니다. 온유가 돌아왔다는 이유만은 아닙니다. 여러분과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는 이유만도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드디어 백인서 씨의 결백을 밝혀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뭐라고요?”영미의 귀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났다.“알고 있습니다. 요 며칠, 외부에서 떠도는 소문이 많았습니다. 온유의 실종이 백인서 씨와 연관되었다는 말까지 나돌고 있었죠.”조순철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힘이 실려 있었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또렷하게 공간을 메웠다.“심지어 경쟁자들이 저를 음해하기 위해 이런 추문을 이용하려 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조순철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시선을 돌려 영미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렇죠, 영미 아가씨?”영미는 얼어붙었다.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영미에게 쏠렸다. 그 시선은 바늘처럼 날카로워 영미의 온몸을 꿰뚫는 듯했다. 영미는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조... 조 시장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영미 아가씨, 제 말을 정말 이해 못 하시겠습니까?”조순철의 미소 속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빛이 서려 있었다.그리고 권욱의 시선은 더욱 살기를 띠고 있었다.부모는 자신에게 닥친 모든 일은 어떻게든 참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아이에게 손을 댄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가만히 둘 수 없었다.강소아와 최군형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부하들이 정대명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영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영미는 본능적으로 정대명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정대명은 그녀를 보자마자 구원의 손길이라도 찾은 듯 온몸을 흔들며 다급히 외쳤다.“아니, 영... 영미 씨! 영미 아가씨! 제발 나 좀 도와줘!”“뭐 하는 짓이에요?”영미는 분노에 차 외쳤다.“제가 왜 당신을 도와줍니까?”“영미 아가씨가 나한테...”“그래요, 제가 당신에게 돈을 줬죠.”영
연회는 여전히 그 4성급 호텔에서 열리고 있었다.손님들 사이에서 소곤소곤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시장님이 정말 청렴하셔서 연회도 대단하게 하지 않고 이렇게 간소하게 한다는 대화였다.“무슨 소리야? 새로 취임했으니 당연히 이미지 관리를 하는 거겠지!”“하지만 권씨 가문이나 조씨 가문 정도라면 연회를 더 화려하게 할 수도 있잖아? 아무리 시장이라고 해도, 사위는 사업가 아닌가?”“맞아. 게다가 사대 가문과의 관계를 생각해 봐도, 좀 더 사치스럽게 해도 문제 될 건 없지.”“혹시... 이 호텔을 선택한 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영미는 한쪽에서 조용히 이 대화를 듣고 있었다.특별한 이유라... 글쎄, 그런 건 없을 것 같았다. 영미는 그저 자신만 무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조순철은 무대 위에 서서 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음악이 멈추고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조순철에게 집중됐다.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조순철은 여전히 허리를 꼿꼿이 펴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무대에 섰다. 그의 목소리는 힘 있고 우렁찼다.“먼저, 오늘 연회에 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선거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여러분의 지지 덕분입니다. 여러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오성 시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오성을 더 밝은 미래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청중들은 힘찬 박수로 화답하며 잔을 들어 축하의 뜻을 전했다.“또한, 여러분께서 제 외손녀 권온유를 많이 걱정해 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조순철의 말이 끝나자마자 권온유가 무대로 달려 나와 외할아버지에게 안겼다. 조순철은 권온유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무대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사람이 권온유가 납치당한 일을 알고 있었고 권온유가 이렇게 빨리 돌아온 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이 모든 행운이 가능했던 건 정승우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그 순간, 정승우는 한쪽 구석에서 권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부
“정 선생님, 아직도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으신가요? 영미가 대체 얼마나 좋은 조건을 내걸었기에, 백인서를 모함하는 데 가담한 거죠?”정대명은 눈동자를 굴리며 머뭇거렸다. 어디까지 입을 열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당신이 인서의 양아버지라는 말은 사실입니까?”“그...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진실이야!”“그렇다면 딸을 키운 정도 있을 텐데 왜 모함하려 하신 거죠?”정대명의 몸이 떨렸고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정 선생님, 이제 영미조차도 당신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으신다면 감옥에서 나올 수 없게 될 겁니다!”그때, 바깥에서 소연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소아는 정대명을 매섭게 노려본 뒤, 사람을 시켜 문을 잠그도록 지시했다.소연화는 최군형과 최지용을 데리고 들어왔다.“여보!”최군형은 강소아를 보자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권온유와 정승우, 두 아이 모두 찾았어!”“정말인가요?”“그래.”최지용도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드디어 인서의 억울함을 풀 수 있게 됐어.”“인서는 원래부터 결백했어요!”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누가 아이들을 찾았나요?”“아이들이 어찌나 영리하던지, 스스로 빠져나왔더군.”최군형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그날 밤, 우리가 정대명을 찾았을 때, 정대명의 머리가 다쳐 있었던 거 기억하지? 그 틈을 타 도망쳤대. 길에서 착한 운전사분을 만나 도움을 받았고 그 운전사가 집까지 데려다줬어. 차 안에서 정승우가 휴대전화를 빌렸는데 다행히도 권온유가 자기 엄마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어서 덕분에 바로 연락할 수 있었어. 아마 20분 후면, 두 아이 모두 안전하게 권씨 집안에 도착할 거야.”“정말 놀랍군요...”강소아는 감탄이 담긴 눈빛으로 답했다.“이렇게 어린아이들이 그런 상황 속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니. 역시 아이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어요! 저도 이제부터 가원이에게 제 전화번호를 외우게 해야겠어요!”“그런 말 하지 마!”최군형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집으로 돌아온 영미의 마음속엔 불안이 가득 찼다. 그러다 문득 시장 선거의 마지막 대결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이 스쳤다.지금이라도 폭탄 같은 뉴스가 터진다면 사람들의 관심은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쏠릴 것이 분명했다.그리고 그 뉴스가 백인서와 관련된 것이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영미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가에 자신감 넘치는 차가운 미소를 띠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기자와의 약속을 잡았다.“조순철 씨의 외손녀가 실종된 사건, 알고 계십니까?”카페의 한구석,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였다. 영미는 얼굴을 거의 가릴 만큼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맞은편에는 기자는 커피잔을 천천히 저으며 영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이건 단순한 어린이 실종 사건이 아닙니다. 누군가 계획적으로 벌인 일입니다.”“영미 씨.”기자가 녹음기를 켜며 말했다.“아시는 내용을 모두 말씀해 주세요. 자료는 제가 정리해 영미 씨 말씀대로 보도하겠습니다.”“좋아요.”영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제가 알고 있기로, 권씨 가문의 어린 딸을 데려간 사람은 바로 그 공익학교 프로젝트에 있던 한 학생입니다. 그리고 그 학생은 백인서의 지시를 받았죠!”녹음기를 쥔 기자의 손이 떨렸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강소아는 방문 앞을 서성이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그 방에는 정대명이 갇혀있었는데 강소아가 아무리 질문해도 정대명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육경섭은 딸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고 희철을 시켜 예전 식으로 정대명을 다루려 했지만, 강소아가 막아섰다.현재 육씨 가문은 이미 정식 사업가로 자리 잡은 상황이었다.과거의 폭력적인 방식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다.강소아는 육경섭을 설득해 물러서게 한 뒤, 다음 수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소연화가 급히 뛰어왔다.“아가씨, 이것 좀 보세요!”소연화는 휴대전화를 내밀었다.화면에는 뉴스가 떠 있었고 제목은 눈에 띌 정도로 충격적이었다.[조씨 공익학교에서 터진 충격적인 추문, 관리직
가끔 차가 지나갔지만, 정승우가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어도 아무도 멈춰 서지 않았다.어둠이 내려앉았고 기온은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며칠 동안 육체와 마음이 지친 권온유는 이제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정승우는 어쩔 수 없이 온유를 등에 업고 비틀거리며 길을 걸었다.“오빠...”권온유는 울먹이며 말했다.“해가 졌어요. 저... 무서워요.”“괜찮아.”정승우는 뒤돌아 미소를 지었다.“오빠가 집에 데려다줄게.”“오빠, 우리 그냥 돌아가요...”“뭐라고?”권온유의 시선이 정승우의 피로 물든 발에 닿았다.“발이 많이 아프죠?”권온유의 작은 얼굴 위로 눈물이 두 줄기 흘러내렸다.“오빠, 저 내려주세요. 그냥 돌아가요...”“온유야?”권온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그 집이 낡고 춥긴 해도... 오빠 발에서 피가 나진 않잖아요!”정승우는 멍하니 잠시 굳어 있다가 그 어눌한 말 속에 담긴 다정함을 깨달았다.이 작은 아이는 납치당했던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라도 정승우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정승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작은 새들이 집으로 향해 줄지어 날고 있었다.정승우는 온유를 데리고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다짐했다.“바보야.”정승우는 온유를 내려놓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난 하나도 안 아파.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그 사람이... 우리를 때릴까요?”“그럴 거야.”정승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어린 시절, 정대명에게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탈출할 때 그의 뒤통수를 내려친 한 방은 그동안의 빚을 모두 갚은 셈이었다.“그런데 오빠, 그 사람은 오빠 아빠잖아요?”권온유는 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하지만 오빠가 아프다고 제가 말했을 때 오빠 아빠가 들어왔었잖아요.”정승우는 쓴웃음을 지었다.자신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정대명이 들어온 것은 아마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죽으면 함께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없어질까 봐서였었다.정대명은 단지
차 안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영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정대명에게 다가갔다. 그의 머리 아래로 어두운 핏자국이 퍼져 있었고 그 흔적은 이미 굳어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영미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차가운 눈빛으로 정대명을 내려다보다가 거칠게 발길을 휘둘렀다.“일어나요!”강소아와 최군형도 다가와 공장 안을 살폈지만 안은 고요히 비어 있었다.“아이들은요?”“아이고...”정대명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살려줘, 살려줘... 저 괘씸한 녀석이!”“정대명 씨!”영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어쨌든 이번 일은 영미가 자신 있게 권온유의 행방을 안다고 장담한 일이었다.영미는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함께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확신에 차 말했다.그런데 지금... 정대명은 다쳐 쓰러져 있고 두 아이는 사라졌었다.백인서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영미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다.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정대명은 도움을 청하려다 영미가 눈짓을 주는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영미의 눈길을 따라 보니 최군형과 강소아도 함께 와있었다.정대명은 예전에 영미가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는 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정대명은 머리를 살짝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신이 정대명인가요?”최군형이 다가가 물었다.정대명은 말끝을 흐리며 최군형의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백인서의 양아버지시고?”최군형은 다시 물었다.“당신이 당신 아들과 함께 권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게 맞나요?”“아니야, 나 아니야!”정대명은 크게 당황하며 손을 흔들었다.“이봐, 동생, 난 억울해! 내 아들 녀석이 나를 해치려고 했어! 내 머리를 봐, 그 자식이 벽돌로 내리쳤다니까!”“그만해요!”영미는 정대명의 말이 길어질수록 상황이 불리해질 것을 우려해 정대명을 노려보며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했다.강소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들의 서툰 수법이 한심하기만
경찰서 밖에서 최지용은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젊은 경찰관이 안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최지용은 급히 다가가며 말했다.“정호야!”정호라는 젊은 경찰관은 최지용을 보자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 녀석!”최지용은 정호에게 다가가 가볍게 주먹을 툭 날리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거야?”정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방금 최씨 집안에서 백인서를 데려간 사람 중에 정호도 있었다. 최지용도 놀라웠지만, 영미 역시 경찰이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떠나기 전, 정호가 살짝 눈짓을 보냈고 최지용은 그의 의도를 알아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지용이 형.”정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께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하고 계시니 문제없을 겁니다!”“도대체 누구 지시로 백인서를 여기로 데려온 거지?”“소아 아가씨예요!”정호는 어깨를 으쓱했다.“소아 아가씨가 갑자기 지시한 거라 사전에 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최지용은 살짝 놀랐다. 강소아의 지시라니.“형수님께서도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 아이가 실종되기 전에 형수님께서 만난 적이 있거든요. 경찰이 형수님을 데려가서 조사하는 건 당연한 절차입니다.”최지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피식 웃음을 지었다.강소아가 이런 ‘당연한 절차’를 이용해 백인서를 경찰서로 보낸 이유는 경찰서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또 누군가가 음모를 꾸며 백인서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해도 경찰서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경찰서 안에는 일을 봐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백인서가 여기서 며칠 지내는 동안 힘든 일 없이 외부의 소란도 피할 수 있는 셈이었다.최지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강소아는 정말 자매를 위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렇게까지 배려심 깊은 방안을 생각해 내다니!“지용이 형.”정호가 계속해서 말했다.“도련님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