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상한 건 구현수가 그 일대에서 증발이라도 한 듯 어디에도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방한서는 강주로 달려와 이 소식을 최연준에게 전했다.“도련님, 저희가 오성을 전부 다 뒤졌는데도 구현수를 찾지 못했습니다.”최연준의 낯빛이 싸늘해졌다.‘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이 왜 갑자기 사라져!’하늘로 올라갔나 땅으로 들어갔나, 생사조차 알 길이 없어 최연준은 가장 나쁜 결과까지 생각하고 있었다.“오성에서 계속 찾아봐!”그가 이를 꽉 깨물었다.“작은삼촌이 나보다 한발 먼저 구현수를 찾은 게 아닌가 싶어. 정말 그렇다면 몰래 뒤에서 손을 쓸지도 몰라.”“도련님, 그럼 어떻게...”방한서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두 눈을 크게 떴다.“이쪽은 신경 쓸 필요 없어.”최연준이 싸늘하게 분부했다.“문제는 서연이야... 믿을만한 애들을 몇몇 불러서 출퇴근길을 지켜보라고 해. 서연이한테 절대 무슨 일이 있어서는 안 돼!”“알겠습니다!”말을 마친 최연준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했다.최진혁이든 최지한이든, 아니면 최씨 가문의 기타 꿈틀대는 세력이든 그들과 정면으로 맞서도 두려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그와 강서연은 노출된 곳에 있었고 그들은 뒤에 몰래 숨어있었다. 최연준을 건드릴 수 없다면 무조건 목표를 강서연 쪽으로 돌릴 것이다...최연준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졌다.“여보!”그때 커피숍 밖에서 강서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한서는 최연준과 눈빛을 주고받은 후 모자를 꾹 눌러쓰고 재빨리 뛰쳐나갔다.그가 옆을 스쳐 지나갈 때 그의 움직임이 수상하다고 생각한 강서연이 자세히 살펴보려는데 최연준이 마침 안에서 걸어 나왔다.“퇴근했어?”“네!”강서연은 눈빛을 거두어들이고 그의 팔짱을 낀 채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가게 안에는 손님이라곤 없이 텅텅 비었다. 지금 마침 퇴근 후의 여유 시간이라 가게 안에 손님들로 붐벼야 할 때다. 커피콩이 담긴 통이 진열장에 가지런히 놓여
댓글을 보던 최연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새로 선 가게는 일반적으로 이 정도로 높은 관심을 받기 어렵다. 그렇다면 유일한 가능성은 강서연의 말대로 누군가 뒤에서 못된 장난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이 댓글들은 댓글 알바를 찾아서 악의적으로 남긴 댓글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최연준도 육경섭을 의심해봤지만 머릿속에 잠깐 스쳐 지나갔다가 이내 부정했다. 육경섭의 성격과 지위라면 절대 이런 유치한 방법을 쓰진 않았을 것이다.게다가 이 방법은 여자들끼리의 다툼 같았다. 만약 육경섭이 그와 맞서고 싶다면 대놓고 선전 포고를 해도 되었다.그리고 경쟁 상대의 짓인 것 같지도 않았다. 이 근처에 커피숍이 많긴 하지만 가게마다 그 집만의 특색이 있고 고정된 고객층도 있어 서로 다툼 없이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다.하여 댓글 알바까지 구한 걸 보면 목표가 강서연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최연준의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걱정 어린 아내의 표정을 본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책임을 자신에게로 돌렸다.“당신 분석이 맞아. 예전에 나한테 앙심을 품은 사람이 많거든. 그래서 누가 복수하는지도 모르겠어.”그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여보, 쓸모없는 남편이라서 미안해. 또 당신을 신경 쓰게 만들었네.”“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강서연이 그를 진지하게 쳐다보며 그의 두 볼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누군가 자기 남편을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욕하는 걸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설령 그가 스스로 말한다고 해도 안 되었다.“우리 남편은 세상에서 가장 능력 있는 남자예요. 문제가 생기면 과거에 얽매이는 게 아니라 함께 방법을 생각해서 해결해야죠. 내 말이 맞죠?”“하지만 내 과거는 우리를 평생 따라다니는 그림자가 될 수 있어.”“따라다니면 뭐요?”강서연이 히죽 웃었다.“그림자든 폭풍이든 난 현수 씨 아내예요. 모든 걸 현수 씨랑 함께 이겨나갈 수 있어요. 현수 씨랑 결혼한 그 날부터 바로 준비를 마쳤는걸요?”“정말이야?”최연준의 눈빛이 반짝였다.“어이구,
애간장을 태우는 강서연과 달리 최연준은 이 상황이 더 좋았다.그는 커피를 내리고 손님에게 깍듯이 대하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매일 그녀와 단둘이 가게에 있고 싶었다.하지만 강서연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유찬혁에게 알아보라고 했다. 알아본 결과 역시 그의 예상대로였다.“형, 뉴미디어 회사 여러 군데 물어보니까 바로 데이터를 보여주더라고요. 보니까 전부 강진 그룹의 댓글 알바였어요.”“흥, 역시 강유빈의 짓이었구나?”“아무튼 댓글 알바비를 입금한 계좌는 강진 그룹의 재무 계좌였어요.”강씨 가문에 강유빈 말고 이런 생각 없는 짓을 벌일 사람이 또 누가 있겠는가?최연준이 미간을 어루만졌다.그는 강씨 가문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고 강씨 가문도 그를 이길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걱정되는 건 강서연이었다...“연준 형.”유찬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강씨 가문을 해결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 사람이 했던 방법으로 그대로 하면 돼요.”최연준은 아무 말 없이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가게에 여전히 손님이 없어 강서연은 그에게 혼자 가게를 볼 테니까 집에 가서 쉬라고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문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다들 봤죠? 이 집이 바로 제 동생네 가게예요!”강서연은 마음이 움찔했다. 날카롭고 조롱 섞인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강유빈이었다.“큰아가씨, 여기 지금 대중 평론이 엄청 안 좋아요. 제가 인터넷에서 봤어요.”“맞아요. 우리 오늘 여기서 커피를 마셔요?”“마시면 어때요?”강유빈이 피식 웃었다.“뭐라 해도 제 동생 가게인데 많이 좀 도와줘요. 과거에 감방까지 갔다 온 남편이 개과천선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우리 둘째 아가씨는 더 쉽지 않죠. 맨날 그런 남자를 감싸고 도니까요!”몇몇 동료들이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 웃었다.가게 안에서 그들의 대화를 들은 강서연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 커피 머신을 씻고 남은 더러운 물을
“오늘 저 일이 있어서 일찍 문 닫으려고요.”강서연이 무표정으로 말했다.“그러니 다들 이만 돌아가세요. 여기 당신들이 원하는 게 없어요!”몇몇 동료들은 서로 멀뚱멀뚱 얼굴만 쳐다보다가 결국 강유빈에게 시선을 돌렸다. 강유빈은 팔짱을 낀 채 코웃음을 쳤다.“서연아, 벌써 문 닫게? 그리해서 가게세는 어떻게 벌어?”“가게세?”강서연이 눈썹을 치켜올렸다.“가게세는 내 남편이 내고 있어. 여기 가게 일도 전부 남편이 관리하고 있거든. 우리 남편이 그랬어. 커피숍을 차린 게 날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고. 그러니까 내가 문 닫고 싶을 때 문 닫으면 돼. 돈 걱정 따위 하지 않아도 된단 말이지. 그리고 있잖아!”그녀는 카운터를 닦다가 고개를 들고 강유빈을 쳐다보았다.“여기는 커피를 마시고 디저트를 먹는 커피숍이야. 남을 욕하는 곳이 아니라!”“제대로 경영하지도 못하면서 잘난 척은.”강유빈은 동료들 앞에서조차 강서연에게 밀리는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다.“그래, 우리가 갈 수는 있어! 하지만 인터넷에 악성 댓글이 하도 많아서 언젠가는 문을 닫을 거라는 걸 명심해!”“내가 문을 닫든 말든 언니랑 상관있어?”“나랑은 당연히 상관없지.”강유빈이 대놓고 비웃었다.“네 남편이랑은 상관있잖아. 어휴, 동생아, 커피숍은 분위기가 가장 중요해. 그런 곳에 남편을 떡하니 두었으니 스스로 망하는 길을 찾아가는 거랑 뭐가 달라?”강서연의 낯빛이 확 변하더니 들고 있던 커피잔을 꽉 움켜쥐었다.“우리 남편이 도둑질했어, 뭘 했어? 자기가 직접 일해서 돈을 버는데 그게 어떻게 스스로 망하는 길을 찾아가는 거야?”“왜냐하면 예전에...”“그건 다 지나간 일이야!”강서연이 살짝 흥분했다.“지나간 일을 자꾸 들춰서 뭐 해!”“왜? 화났어?”강서연이 흥분할수록 강유빈은 더욱 우쭐거렸다. 어릴 적부터 강서연과 다퉈서 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강서연이 그녀 대신 구현수에게 시집가면 인생이 망가져 마음대로 짓밟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구현수를 만나고 나서 점점 더
“내 한계를 건드렸다간 절대 가만 안 둬!”“너...”“당장 꺼져!”강서연이 포효하듯 소리를 질렀다. 강유빈은 두려움에 벌벌 떨며 더는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마침 가게 안으로 들어오던 임우정이 그 장면을 목격했다. 난장판이 된 현장만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임우정은 혹시라도 강서연이 괴롭힘을 당했을까 봐 두말없이 앞으로 달려 나가 강유빈을 확 밀쳤다. 그 바람에 강유빈은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테이블 모서리에 부딪혔다. 어찌나 아팠던지 식은땀까지 뻘뻘 흘렸다.“임우정 씨, 당신 미쳤어요?”강유빈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감히 날 밀쳐요?”“왜요? 당신을 밀치면 안 돼요?”임우정이 강서연을 감싸고 돌았다.“지금 한 무리 사람을 데리고 와서는 우리 서연이를 괴롭히려 했던 거 맞죠?”“괴롭히다니요. 난 매출을 올려주려 온 거라고요!”강유빈이 그녀를 째려보았다.“남의 호의도 몰라주고 참... 당신도 서연이처럼 사리 분별을 참 못하네요!”더는 그녀와 쓸데없는 얘기를 섞고 싶지 않았던 임우정은 다짜고짜 강유빈의 뺨을 후려갈겼다.사실 그녀는 일을 크게 벌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강유빈이 어찌나 사람의 화를 잘 돋우는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임우정은 기고만장한 강유빈에게 험한 욕이라도 퍼붓고 싶었지만, 너무 화난 나머지 머릿속이 다 하얘졌다. 평소 언변이 좋던 그녀마저도 이런 순간에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말을 못 하겠으면 그럼 때려야지!서로 머리채를 마구 쥐어뜯는 임우정과 강유빈은 누구 하나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했다.강서연은 두 사람을 말리고 싶어도 끼어들 수가 없었다. 자그마한 커피숍이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고 지나가던 행인마저도 가게 안을 기웃거렸다.육경섭은 요 며칠 최연준을 알아보려고 마당 뒤쪽의 은밀한 구석에서 자주 지켜보곤 했다. 조금 전 임우정이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아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기에 저도 모르게 임우정을 걱정하기 시작했다.그런데 그가 가게 마당으로 들어가 보니 임우정이 드높은 기세
강유빈은 입술을 꽉 깨문 채 자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몸을 최대한 옆으로 돌린 후 머리카락을 축 내리뜨렸다.“괜찮아요.”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늘 정말 재수 더럽게 없네!”“방금 뭐라고 했어요?”임우정이 목청을 높이자, 강유빈은 바로 겁먹었다. 그러더니 벽에 붙은 채 밖으로 걸어 나가며 욕설을 퍼부었다.“강서연, 내가 언젠가는 이 가게를 싹 다 뒤집어엎을 테니까 딱 기다려!”임우정이 또 나서려 하자 강서연이 그녀의 손을 잡고 말렸다.“그만 해요.”육경섭은 넘어진 의자를 바로 세우고 그 위에 앉더니 여유롭게 옷소매 단추를 풀며 웃을 듯 말 듯 한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개한테 물어뜯겼는데 다시 물어뜯으려고요?”“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인데요?”임우정은 그에게 분풀이하는 듯했다. 그녀의 고함에 육경섭은 마음이 움찔했다.저도 모르게 혈기 왕성했던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때 그의 옆에 이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자주 지르던 한 이기적인 소녀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아무리 억지스럽게 고집을 부려도 그는 늘 그녀에게 웃음을 잃지 않았다.감옥에 다녀온 뒤로 그렇게 웃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저녁 그녀의 발그스름해진 얼굴과 친구를 위해 기꺼이 나서는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이봐요, 아가씨.”육경섭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젊은 아가씨가 이러면 안 되죠. 여자는 상냥하고 다정해야 하는데 이렇게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못되게 굴면 어느 남자가 데려가겠어요? 아가씨 친구가 남편한테 어떻게 하는지 제발 좀 배워요!”임우정의 표정이 확 변하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째려보았다.“이보세요.”그녀도 그와 똑같은 말투로 또박또박 말했다.“남아일언 중천금이라는 말 들어봤죠? 남자는 내뱉은 말은 약속을 지켜야 하는데 누구처럼 이랬다저랬다 하면 어느 여자가 시집가겠어요? 당신 감방 동기가 와이프한테 어떻게 하는지 제발 좀 배워요!”육경섭의 눈빛이 어두워졌
“형님.”부하가 경멸에 찬 웃음을 지어 보였다.“듣건대 그 아가씨 매번 아주 흥겹게 놀다 간대요.”“그래?”육경섭도 피식 웃었다.“어떻게 흥겹게 노는데?”“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밤에 힘들게 일하는 남자 직원한테 한번 물어보세요. 하하...”육경섭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며칠 후, 강유빈은 킹 나이트의 어느 한 어두운 방에 버려졌다. 처음에는 술기운을 빌어 미친 듯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누구야? 감히 날 납치해? 나 여기 VIP야, 다 눈이 삐었어?”“당연히 우리 VIP 고객인 걸 알지.”그때 누군가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방안이 점점 밝아졌다. 맨 가운데 앉은 남자는 무서운 분위를 내뿜었고 눈빛도 날카로웠다. 특히 미간 사이의 칼 흉터가 더욱 눈에 띄었다.강유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아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강유빈 씨.”육경섭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유빈 씨보다 레벨이 더 높은 VIP 고객님들도 나한테 그렇게 소리를 못 질러!”강유빈은 육경섭이 수단이 잔인하고 악랄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날 강서연의 커피숍에서도 육경섭을 알아봤었다. 하지만 육경섭과 강서연이 무슨 관계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당신... 나한테 무슨 짓 하려고 이래?”강유빈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난 여기 손님이야. 술을 마실 때마다 팁을 두 배로 주는데 왜 나한테 이러냐고!”육경섭이 손뼉을 치자 강유빈 앞에 CCTV 화면이 갑자기 나타났다. 전부 그녀가 킹 나이트에서 술을 마시고 제멋대로 노는 모습들이었다.사람들 앞에서는 한없이 얌전하기만 하던 재벌가 딸이 뒤에서는 가슴이 훤히 다 보이는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클럽에서 남자들과 부비부비하는 모습, 그리고 수천만 원짜리 와인을 마치 콜라를 따듯 아무렇지 않게 따서 사치를 부리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강유빈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고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그녀는 바닥에
“어머, 실수로 잘못 보냈네.”육경섭의 조롱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렇게 예쁜 사진은 강 회장님한테 보내야 하는데.”“육경섭!”“유빈 씨 클럽에서의 이미지가 아주 매력적이야!”입술을 꽉 깨문 강유빈의 낯빛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유빈 씨, 내가 감방에서 고생 좀 했거든. 특히 쌈박질을 많이 해서 손이 말을 잘 안 들어. 혹시라도 어느 날에 실수로 인터넷에 뭔가를 올린다면... 나야 괜찮지만 유빈 씨 체면은...”“육경섭... 경섭 오빠!”강유빈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원하는 게 있으면 얘기해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할게요.”“다른 건 다 괜찮은데 지금 이렇게 악플을 지우고 좋은 평점을 주는 건 너무 성의 없지 않나?”강유빈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그럼... 그럼 더 어떻게 하면 돼요?”“댓글 알바를 구해서 좋은 평점을 주는 것만으로 일이 쉽게 해결될 것 같았으면 내가 직접 하면 되지, 유빈 씨한테 하라고 했겠어? 잘못을 저질렀으면 사과를 해야지, 안 그래? 유빈 씨?”육경섭이 싸늘하게 웃었다.“초등학생도 다 아는 도리를 유빈 씨가 모르는 건 아니지?”...이튿날 해 질 무렵, 강유빈이 커피숍 문 앞에 나타났다.늘 기고만장하던 재벌 아가씨가 오늘은 어두운 셔츠에 긴바지를 단정하게 입고 왔다. 메이크업도 아주 옅었고 캡 모자를 최대한 눌러썼다. 그날따라 커피숍 장사도 아주 잘 되어 가게에 손님이 꽤 많았다. 마당에 잔뜩 핀 아이리스꽃 덕분인지 이 근처 꼭 가봐야 하는 커피숍으로 자리 잡았다.한창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움직이던 강서연은 천천히 걸어오는 강유빈을 보자마자 또 시비를 걸려고 온 줄 알고 마음이 움찔했다. 최연준도 그녀를 발견하고는 강서연 앞에 선 채 강유빈을 싸늘하게 째려보았다.“여긴 또 무슨 일로 왔어요?”최연준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차갑게 물었다. 강유빈은 최대한 초라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그게... 사과하러 왔어요.”그녀가 힘겹게 한마디 내뱉었다.“서연아,
최군형은 다가가 동생의 뒤통수를 가볍게 튕겼다. 손끝에서 딱 소리가 났다.“아야!”최군성은 고통스러워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눈과 손은 여전히 휴대전화 화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형, 너무한 거 아니야? 이렇게 때려서 내 머리가 망가지면 나중에 형이 내 인생 책임질 거야?”“나중에 배씨 가문이 널 책임질 거야. 난 그럴 능력 없어.”“뭐라고?”그때 최군성의 표정이 바뀌더니 갑자기 낮게 소리치며 소파를 주먹으로 쳤다.게임 클리어를 바로 앞두고 실패한 것이었다.“게임만 하지 말고.”최군형은 동생 옆에 앉으며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오늘 내내 배윤아랑 같이 다니면서 어떻게 됐어? 내 딸을 이렇게 피곤하게 해놓고 아무 성과도 없었다고 하면 안 된다?”“그게...”최군성은 머뭇거리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2년 전까지만 해도 최군성은 과거의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신하고 있었다. 마음은 완전히 정리됐고 새로운 감정을 받아들일 용기도 생겼다. 그런데 문제는, 배윤아가 여전히 자신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지금 두 사람은 함께 일하며 훌륭한 파트너로서 호흡을 맞췄지만 그림을 제외한 사적인 대화는 거의 나누지 않았다.“군성아? 대답 좀 해!”최군형은 미간을 찡그리고 동생의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며 말했다.“내가 물어보잖아, 또 딴생각해?”최군성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급히 화제를 돌렸다.“아, 맞다! 형, 오늘 놀이공원에서 이상한 사람을 만났어.”“뭐?”최군성은 놀이공장에서 만났던 중년 남자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했다.“그 사람이 가원이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관심을 보이더라고. 형, 요즘 가원이를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아. 혹시 이상한 사람이면 어떡해!”최군형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최가원이 태어난 이후, 최군형과 강소아는 딸을 철저히 보호하며 키웠다.다른 가정에서는 아이를 재산처럼 여겨 어린 나이에 각종 방송이나 행사에 데리고 나가기도 했다. 심지어 몇몇
최가원은 겁먹은 듯 남자를 올려다보았다.작은 머릿속이 순식간에 수많은 질문으로 가득 찼다. 엄마가 항상 예의를 지키라고 했으니, 이분을 ‘아저씨'라고 불러야 할까?하지만 나이가 삼촌보다 훨씬 많아 보이는데... 그러면 ‘할아버지’라고 해야 하나?내가 먹던 아이스크림이 이 남자의 외투에 잔뜩 묻었는데, 먼저 사과를 해야 하는 걸까?이건 내가 좋아하는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이고 아직 몇 입 먹지도 못했는데...“꼬마야.”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마치 첼로 소리처럼 깊었다.“네가 최가원이지?”최가원은 깜짝 놀라며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남자는 신비로운 미소를 띠며 자신의 외투에 묻은 아이스크림 자국을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그때, 뒤에서 다급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원아! 괜찮아?”최군성과 배윤아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두 사람은 가원이가 다치지 않았는지 확인한 뒤, 남자의 검은 외투에 묻은 하얀 아이스크림을 발견했다.“정말 죄송합니다!”최군성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옷을 더럽혔네요. 혹시 연락처를 남겨 주시면 제가 새 옷을 사서 보내드리겠습니다.”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깊은 눈빛은 무언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했다.최군성은 남자를 자세히 살폈다.비록 중년이지만 여전히 강인한 체격과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있었지만 그만큼 중후한 매력이 풍겨 나왔다.최군성은 만화가로서 젊고 화려한 미소년들만 그려왔고 이런 중년 멋쟁이 스타일은 늘 시도하고 싶었었다. 하지만 늘 도전하지 못했었다.이 멋진 중년 남자는 계속해서 최가원만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아까 물었던 질문, 내가 맞췄지?”최가원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속으로 생각했다.삼촌도 이 남자를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그런데 이 이상한 아저씨는 가원이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엄마는 낯선 사람에게 함부로 말하지 말고 항상 조심하라고 했다.최가원은 턱을 당당히 들어 올리고 힘 있는 목소리로 단
결정적인 순간에 배윤아가 나서서 둘 사이를 중재했다.“뭐 어때? 가원이가 그렇게 타고 싶다잖아. 그냥 타게 하자!”배윤아는 웃으며 가방에서 미리 준비해 온 작은 바지를 꺼냈다.“이것 봐, 역시 소아는 다 알고 있었어. 자기 딸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나한테 바지를 챙겨가라고 한 거였어!”최가원은 기뻐하며 환하게 웃었다. 최가원은 배윤아와 함께 여자 화장실로 향했고 잠시 후 당당하고 씩씩한 모습으로 뛰어나왔다. 즐겁게 말을 타며 음악에 맞춰 손을 흔들고 흥겨운 몸짓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삼촌! 나중에는 진짜 말을 타보고 싶어요!”“그래, 그래!”최군성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다른 집 공주님들은 다 얌전하고 우아하던데, 넌 정말...”“저 공주라고 부르는 거 싫어요! 앞으로는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그럼, 뭐라고 불러줄까?”“음... 여자 전사로 불러주세요!”최군성과 배윤아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한참을 웃었다.이 성격으로 보아 정말 친할머니를 쏙 빼닮았다.보아하니 가원이는 앞으로도 여리고 약한 소녀보다는 할머니처럼 강렬한 존재감을 가진 멋진 여성이 될 것 같았다.회전목마를 다 타고 난 뒤, 최가원은 큰 아이스크림콘을 사서 맛있게 먹고 있었다.최군성과 배윤아는 최가원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세 사람은 놀이공원 속 조용한 숲길을 따라 산책하며 햇볕을 만끽하고 있었다.“여기 정말 예쁘다!”배윤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작은 자갈이 깔린 길은 운치가 있었고 작은 숲에는 오동나무와 은행나무가 가득했다. 가을이 되면 황금빛으로 물드는 곳이었다.“그러게. 좋은 곳이긴 한데 운영이 예전 같지는 않네.”최군성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시설이 낡고 첨단 기술도 없는 걸 보면 오래 유지되긴 힘들겠네.”“그건 몰라!”배윤아가 최군성을 쳐다보며 말했다.“보기엔 이 놀이공원, 만화적인 매력이 있어. 그렇지 않아?”“음, 확실히 그렇네.”최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만약 만화 영화의 촬영지로 쓰인다면 정말 괜
그때, 배윤아가 멀리서 허둥지둥 달려왔다.“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배윤아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검은 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가원아, 정말 미안해! 정신없이 그림을 그리다가 시간을 놓쳐버렸어... 그래서 이제야 오게 됐어. 나 용서해줄 수 있을까?”배윤아는 숨을 헐떡이며 허겁지겁 사과했다. 손끝에 묻은 물감 자국도 미처 닦아내지 못한 모습이었다.하지만 최가원은 환하게 웃으며 작은 새처럼 배윤아의 품에 뛰어들었다.최군성도 배윤아 옆으로 다가가며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가원아.”체육 선생님이 배윤아를 가리키며 물었다.“이분도 네 가족이니?”“네!”최가원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배윤아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고 무심결에 최군성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내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그 순간, 최가원은 갑자기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윤아 이모를 오게 한 이유가 선생님에게 소개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최가원은 둘째 삼촌이 더 좋았다.평소 삼촌이 자신을 자주 놀리곤 했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언제나 든든히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었다.최가원은 작은 이마를 찌푸리며 잠시 고민하다 부모님의 말씀을 어기고 체육 선생님에게 이모를 소개하지 않기로 결심했다.체육 선생님은 언제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지만 세상에 단 하나뿐인 둘째 삼촌만큼은 절대 바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최가원은 한 손으로 최군성의 손을, 다른 손으로 배윤아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고는 뽐내듯 고개를 들고 귀여운 목소리로 외쳤다.“선생님, 잘 보세요! 이쪽은 우리 둘째 삼촌이고요, 이쪽은... 우리 둘째 이모예요! 앞으로 둘이 저를 자주 데리러 올 거예요!”체육 선생님은 가볍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하지만 최군성과 배윤아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고 얼굴은 동시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애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네?”최가원은 어리둥절했다.두 사람은 말투부터 표정까지 완벽히 똑같았다.“그만하고 빨리 집에 가자!”최군성은
“저는 이 아이의 둘째 삼촌입니다!”체육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무릎을 굽혀 부드럽게 최가원에게 물었다.“가원아, 이 사람 알아?”최군성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불만스럽게 말했다.“아니, 선생님! 저를 못 믿으시겠단 건가요?”“정말 죄송합니다.”체육 선생님은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건 유치원 규정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저희는 모든 아이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거든요. 평소에 가원이는 보모나 경호원, 때론 부모님이나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데리러 오셨죠. 가끔은 지용 삼촌이나 인서 이모도 오셨는데, 둘째 삼촌이라는 분은 없었던 것 같아서요... 그래서 다시 확인한 겁니다. 아이를 모르는 분께 맡길 순 없잖아요.”최군성은 말문이 막혔다.사실 최군성이 유치원을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만약 ‘경쟁자’를 확인할 일이 아니었다면 이곳에 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가원아, 이 사람 알아?”체육 선생님은 다시 물었다.최군성은 조카에게 눈짓을 보내며 도움을 요청했다.하지만 최가원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최군성은 조카를 놀리듯 평소처럼 귀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면서 목을 조르는 시늉을 했다.평소에도 삼촌과 조카는 이런 유치한 장난으로 서로를 놀리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서로 장난감을 뺏거나 간식을 두고 자주 다퉜다. 심지어 그림 도구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다 서로 몸싸움까지 하는 모습은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최가원은 늘 삼촌에게 밀려 속상해하며 발을 동동 굴렀었다.오늘, 드디어 복수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최가원은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장난스럽게 미소 짓더니 천천히 말했다.“모르는 사람이에요!”“뭐?”최군성은 당황한 나머지 거의 뛰어오를 뻔했다.“이 꼬맹아!”최군성은 조카의 머리끈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체육 선생님은 아이를 납치하려는 줄로 오해해 재빨리 최군성의 손목을 붙잡아 힘껏 비틀었다.“아!”최군성은 고통을 느끼며 몇
하지만 배윤아와 최군성은 지금의 관계에 매우 만족스러워 보였다.지난 2년 동안, 두 사람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저작권을 판매하며 작품을 각색했다. 나아가 함께 애니메이션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두 사람은 함께 바쁘게 뛰어다니며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일상의 소소한 기쁨을 함께 나누며 예술적 영감도 서로 나눴다.두 예술인이 함께 지내는 만큼, 각자의 예술적 견해를 두고 종종 불꽃 튀는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최군형과 강소아는 몇 번이나 두 사람의 관계가 정말 끝나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그러나 방금까지 싸움닭처럼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화해했고 화실 안은 금세 따스한 온기로 가득 찼다.강소아가 딸에게 물었다.“엄마가 알려준 말, 다 전했어?”최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대답했다.“삼촌 반응은 어땠어?”“음...”최가원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삼촌한테는 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아요!”“뭐라고?”강소아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옆에서 듣고 있던 최군형은 강소아를 끌어안으며 웃었다.“찮아, 천천히 풀어가자. 군성이는 생각보다 고집이 센 편은 아니니까.”“그래도 이렇게 질질 끌고 있으니까...”강소아는 여전히 답답한 표정이었다.“걱정하지 마.”최군형은 딸을 바라보며 물었다.“가원아, 내일 유치원 끝나면 누구 손잡고 나올 거야?”최가원은 크림 케이크를 한입 먹던 중 아빠의 말에 신이 나서 고양이 같은 얼굴로 대답했다.“체육 선생님!”“정답이야!”부녀는 힘차게 손뼉을 마주쳤다.다음 날, 최군성은 유치원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유치원 정문에 나타났다.최군성은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늘 폴로셔츠와 청바지 같은 편한 옷만 입던 그가 오늘은 세련된 정장을 입고 머리까지 깔끔하게 손질했다.평소 화실에서의 부스스한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최군성의 외모와 체격은 최씨 가문의 젊은 세대 중에서도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외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남양 제일 미남’의
최군형은 방금 다 먹은 닭 날개 꼬치를 들고 최군성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꼬치를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엄마가 항상 옳다니까. 넌 정말...”최군성은 당황스러워하며 물었다.“뭐가?”최군형은 이를 악물며 한 마디로 대답했다.“유난이야!”그 말을 내뱉고는 최지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최군성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어리둥절했다. 멀찍이서 바라보니 저쪽은 꽤 북적거리고 있었다. 최군성의 내면 깊은 곳에서 ‘흥겨운 분위기를 즐기는 본능’이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최군성은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스케치북을 펴고 빠르게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다른 사람들은 대충 윤곽만 그린 반면, 특정 인물을 그릴 때만큼은 세심하게 한 획 한 획 공들여 그려내어 풍경 속에서도 돋보이게 했다....모든 일이 마무리되었고 이제 남은 건 최지용과 백인서의 결혼식이었다.최군형도 두 사람의 결혼을 돕고 싶어 최근 며칠 동안 집에 머물며 부모님과 함께 세심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지용이와 인서는 둘 다 조용한 걸 좋아하니, 웅장한 것보다는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결혼식이 더 잘 어울릴 것 같구나.”최연준은 상자에서 온갖 보물들을 꺼내며 결혼 선물로 줄 것을 고르고 있었다. 그중 강서연은 분홍빛 진주 세트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이게 딱이겠네! 인서에게 정말 잘 어울릴 거야.”“엄마.”최군형은 살짝 놀라며 말했다.“그건 외할아버지께서 엄마에게 주신 거잖아요. 남양 주변 해역에서만 나는 진주라면서요.”“맞아, 그런데...”강서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분홍색은 젊고 사랑스러운 느낌이잖아. 이제는 엄마한테 조금 안 어울릴지도 모르겠어.”“누가 그래!”최연준은 즉각 반박하며 손을 뻗어 진주 세트를 집어 들려 했다. 그러자 강서연은 그의 손등을 톡 치며 진주를 되찾아왔다.“인서에게 줄 거니까 당신은 끼어들지 말아요!”“우리 다른 선물을 하자고! 이건 당신이 간직해야 할 물건이야!”두 사람은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
강소아가 손짓하자 최지용은 더는 망설이지 않고 백인서에게로 달려갔다.“이제 딸을 보러 가야겠네요!”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저 대신... 인서 좀 돌봐줄 수 있을까요?”최지용은 그 말에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아까는 주저하며 다가가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주변에 권욱과 강소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은 백인서의 오빠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녀의 절친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섣불리 다가가면 괜히 이상하게 보일까 봐 망설였다.최지용이 어깨를 펴고 당당히 백인서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뭐 해요?”최지용은 깜짝 놀랐다.“너야 말고 뭐해?”권욱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감히 내 눈앞에서 내 동생한테 손대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어?”“...”최지용은 당황해서 말을 잃었다.생각해 보면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뭔가 삐걱거렸던 것 같았다. 서로 영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땐 권욱이 백인서의 오빠라는 사실을 몰랐기에 오히려 잠재적 경쟁 상대로 여기기도 했었다.그리고 지금...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 되어버렸다.“쓸데없이 귀찮게 하지 말고 물러나!”권욱은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최지용을 흘겨보며 말했다.“동생과 나에겐 나눌 얘기가 산더미처럼 쌓였으니 방해하지 마!”“할 얘기가 뭐가 그렇게 많은데요?”“예를 들면... 인서가 권씨 가문에서 맡게 될 직책 같은 거?”“그나저나!”최지용은 그제야 떠오른 듯 고개를 치며 말했다.“아까 권욱 씨 입으로 직접 말했어요. 최상 그룹과 권오 그룹이 협력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권씨 가문이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동생을 우리 최씨 집안에 시집보내겠다고요!”“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권욱은 태연하게 모른 척하며 말을 돌렸다.“내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이 안 나네.”“저기요, 권욱 씨!”두 남자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백인서는 살짝 뒤로 물러나 두 사람의 시야에서 벗어났다.백인서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잔잔히 미소 지었다. 과거에는
손님들이 웅성거리며 비명이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백인서?”배윤아가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큰 소리를 질러?”“아니야... 난 백인서가 아니야!”백시연은 목이 쉬도록 외치며 갑자기 강소아를 돌아보았다.“말해봐! 아까 다 알고 있었던 거잖아? 내가 백인서가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 수 있게 똑똑히 말하라고!”“인서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강소아는 담담하면서도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차분히 백시연의 손을 밀어냈다.“혹시 술이라도 마신 거야? 취한 것 같아.”“강소아 씨!”백시연은 분노에 치를 떨며 외쳤다.강소아는 백시연의 손을 잡고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인서야, 우린 자매잖아. 여기서 소란스러운 모습 보이지 말자. 오늘은 어쨌든 육씨 가문의 중요한 날이기도 하고 내 딸도 여기 있어... 그러니까, 제발 진정해 줘.”“아니야...”“인서야!”“아니라고! 아니라고!”백시연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한 발짝씩 뒤로 물러섰다.“난 백인서가 아니야! 몇 번을 말해야 믿을 거야?”배윤아는 피식 웃으며 백시연의 팔짱을 끼고 태연히 말했다.“어머, 백인서. 왜 그래? 백인서가 아니면, 왜 백인서 얼굴을 하고 있는 건데? 그런데... 굳이 너와 백인서의 다른 점을 꼽으라면... 손목에 그림이 있다는 거?”“비켜!”백시연은 배윤아를 거칠게 밀어내고 다급히 무대를 향해 뛰어갔다.백인서는 고요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마침내 기다리던 이 순간이 왔다.백인서는 천천히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눈앞의 백시연을 바라보았지만,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의 이 사람은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백인서는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백시연은 진짜 악마일지도 모른다고.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 얼굴을 지니고 있다. 한쪽은 천사, 다른 한쪽은 악마. 그리고 자신과 백시연 같은 쌍둥이의 운명은 그런 인간의 본성을 극대화해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