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을 보던 최연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새로 선 가게는 일반적으로 이 정도로 높은 관심을 받기 어렵다. 그렇다면 유일한 가능성은 강서연의 말대로 누군가 뒤에서 못된 장난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이 댓글들은 댓글 알바를 찾아서 악의적으로 남긴 댓글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최연준도 육경섭을 의심해봤지만 머릿속에 잠깐 스쳐 지나갔다가 이내 부정했다. 육경섭의 성격과 지위라면 절대 이런 유치한 방법을 쓰진 않았을 것이다.게다가 이 방법은 여자들끼리의 다툼 같았다. 만약 육경섭이 그와 맞서고 싶다면 대놓고 선전 포고를 해도 되었다.그리고 경쟁 상대의 짓인 것 같지도 않았다. 이 근처에 커피숍이 많긴 하지만 가게마다 그 집만의 특색이 있고 고정된 고객층도 있어 서로 다툼 없이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다.하여 댓글 알바까지 구한 걸 보면 목표가 강서연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최연준의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걱정 어린 아내의 표정을 본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책임을 자신에게로 돌렸다.“당신 분석이 맞아. 예전에 나한테 앙심을 품은 사람이 많거든. 그래서 누가 복수하는지도 모르겠어.”그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여보, 쓸모없는 남편이라서 미안해. 또 당신을 신경 쓰게 만들었네.”“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강서연이 그를 진지하게 쳐다보며 그의 두 볼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누군가 자기 남편을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욕하는 걸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설령 그가 스스로 말한다고 해도 안 되었다.“우리 남편은 세상에서 가장 능력 있는 남자예요. 문제가 생기면 과거에 얽매이는 게 아니라 함께 방법을 생각해서 해결해야죠. 내 말이 맞죠?”“하지만 내 과거는 우리를 평생 따라다니는 그림자가 될 수 있어.”“따라다니면 뭐요?”강서연이 히죽 웃었다.“그림자든 폭풍이든 난 현수 씨 아내예요. 모든 걸 현수 씨랑 함께 이겨나갈 수 있어요. 현수 씨랑 결혼한 그 날부터 바로 준비를 마쳤는걸요?”“정말이야?”최연준의 눈빛이 반짝였다.“어이구,
애간장을 태우는 강서연과 달리 최연준은 이 상황이 더 좋았다.그는 커피를 내리고 손님에게 깍듯이 대하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매일 그녀와 단둘이 가게에 있고 싶었다.하지만 강서연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유찬혁에게 알아보라고 했다. 알아본 결과 역시 그의 예상대로였다.“형, 뉴미디어 회사 여러 군데 물어보니까 바로 데이터를 보여주더라고요. 보니까 전부 강진 그룹의 댓글 알바였어요.”“흥, 역시 강유빈의 짓이었구나?”“아무튼 댓글 알바비를 입금한 계좌는 강진 그룹의 재무 계좌였어요.”강씨 가문에 강유빈 말고 이런 생각 없는 짓을 벌일 사람이 또 누가 있겠는가?최연준이 미간을 어루만졌다.그는 강씨 가문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고 강씨 가문도 그를 이길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걱정되는 건 강서연이었다...“연준 형.”유찬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강씨 가문을 해결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 사람이 했던 방법으로 그대로 하면 돼요.”최연준은 아무 말 없이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가게에 여전히 손님이 없어 강서연은 그에게 혼자 가게를 볼 테니까 집에 가서 쉬라고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문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다들 봤죠? 이 집이 바로 제 동생네 가게예요!”강서연은 마음이 움찔했다. 날카롭고 조롱 섞인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강유빈이었다.“큰아가씨, 여기 지금 대중 평론이 엄청 안 좋아요. 제가 인터넷에서 봤어요.”“맞아요. 우리 오늘 여기서 커피를 마셔요?”“마시면 어때요?”강유빈이 피식 웃었다.“뭐라 해도 제 동생 가게인데 많이 좀 도와줘요. 과거에 감방까지 갔다 온 남편이 개과천선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우리 둘째 아가씨는 더 쉽지 않죠. 맨날 그런 남자를 감싸고 도니까요!”몇몇 동료들이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 웃었다.가게 안에서 그들의 대화를 들은 강서연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 커피 머신을 씻고 남은 더러운 물을
“오늘 저 일이 있어서 일찍 문 닫으려고요.”강서연이 무표정으로 말했다.“그러니 다들 이만 돌아가세요. 여기 당신들이 원하는 게 없어요!”몇몇 동료들은 서로 멀뚱멀뚱 얼굴만 쳐다보다가 결국 강유빈에게 시선을 돌렸다. 강유빈은 팔짱을 낀 채 코웃음을 쳤다.“서연아, 벌써 문 닫게? 그리해서 가게세는 어떻게 벌어?”“가게세?”강서연이 눈썹을 치켜올렸다.“가게세는 내 남편이 내고 있어. 여기 가게 일도 전부 남편이 관리하고 있거든. 우리 남편이 그랬어. 커피숍을 차린 게 날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고. 그러니까 내가 문 닫고 싶을 때 문 닫으면 돼. 돈 걱정 따위 하지 않아도 된단 말이지. 그리고 있잖아!”그녀는 카운터를 닦다가 고개를 들고 강유빈을 쳐다보았다.“여기는 커피를 마시고 디저트를 먹는 커피숍이야. 남을 욕하는 곳이 아니라!”“제대로 경영하지도 못하면서 잘난 척은.”강유빈은 동료들 앞에서조차 강서연에게 밀리는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다.“그래, 우리가 갈 수는 있어! 하지만 인터넷에 악성 댓글이 하도 많아서 언젠가는 문을 닫을 거라는 걸 명심해!”“내가 문을 닫든 말든 언니랑 상관있어?”“나랑은 당연히 상관없지.”강유빈이 대놓고 비웃었다.“네 남편이랑은 상관있잖아. 어휴, 동생아, 커피숍은 분위기가 가장 중요해. 그런 곳에 남편을 떡하니 두었으니 스스로 망하는 길을 찾아가는 거랑 뭐가 달라?”강서연의 낯빛이 확 변하더니 들고 있던 커피잔을 꽉 움켜쥐었다.“우리 남편이 도둑질했어, 뭘 했어? 자기가 직접 일해서 돈을 버는데 그게 어떻게 스스로 망하는 길을 찾아가는 거야?”“왜냐하면 예전에...”“그건 다 지나간 일이야!”강서연이 살짝 흥분했다.“지나간 일을 자꾸 들춰서 뭐 해!”“왜? 화났어?”강서연이 흥분할수록 강유빈은 더욱 우쭐거렸다. 어릴 적부터 강서연과 다퉈서 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강서연이 그녀 대신 구현수에게 시집가면 인생이 망가져 마음대로 짓밟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구현수를 만나고 나서 점점 더
“내 한계를 건드렸다간 절대 가만 안 둬!”“너...”“당장 꺼져!”강서연이 포효하듯 소리를 질렀다. 강유빈은 두려움에 벌벌 떨며 더는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마침 가게 안으로 들어오던 임우정이 그 장면을 목격했다. 난장판이 된 현장만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임우정은 혹시라도 강서연이 괴롭힘을 당했을까 봐 두말없이 앞으로 달려 나가 강유빈을 확 밀쳤다. 그 바람에 강유빈은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테이블 모서리에 부딪혔다. 어찌나 아팠던지 식은땀까지 뻘뻘 흘렸다.“임우정 씨, 당신 미쳤어요?”강유빈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감히 날 밀쳐요?”“왜요? 당신을 밀치면 안 돼요?”임우정이 강서연을 감싸고 돌았다.“지금 한 무리 사람을 데리고 와서는 우리 서연이를 괴롭히려 했던 거 맞죠?”“괴롭히다니요. 난 매출을 올려주려 온 거라고요!”강유빈이 그녀를 째려보았다.“남의 호의도 몰라주고 참... 당신도 서연이처럼 사리 분별을 참 못하네요!”더는 그녀와 쓸데없는 얘기를 섞고 싶지 않았던 임우정은 다짜고짜 강유빈의 뺨을 후려갈겼다.사실 그녀는 일을 크게 벌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강유빈이 어찌나 사람의 화를 잘 돋우는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임우정은 기고만장한 강유빈에게 험한 욕이라도 퍼붓고 싶었지만, 너무 화난 나머지 머릿속이 다 하얘졌다. 평소 언변이 좋던 그녀마저도 이런 순간에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말을 못 하겠으면 그럼 때려야지!서로 머리채를 마구 쥐어뜯는 임우정과 강유빈은 누구 하나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했다.강서연은 두 사람을 말리고 싶어도 끼어들 수가 없었다. 자그마한 커피숍이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고 지나가던 행인마저도 가게 안을 기웃거렸다.육경섭은 요 며칠 최연준을 알아보려고 마당 뒤쪽의 은밀한 구석에서 자주 지켜보곤 했다. 조금 전 임우정이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아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기에 저도 모르게 임우정을 걱정하기 시작했다.그런데 그가 가게 마당으로 들어가 보니 임우정이 드높은 기세
강유빈은 입술을 꽉 깨문 채 자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몸을 최대한 옆으로 돌린 후 머리카락을 축 내리뜨렸다.“괜찮아요.”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늘 정말 재수 더럽게 없네!”“방금 뭐라고 했어요?”임우정이 목청을 높이자, 강유빈은 바로 겁먹었다. 그러더니 벽에 붙은 채 밖으로 걸어 나가며 욕설을 퍼부었다.“강서연, 내가 언젠가는 이 가게를 싹 다 뒤집어엎을 테니까 딱 기다려!”임우정이 또 나서려 하자 강서연이 그녀의 손을 잡고 말렸다.“그만 해요.”육경섭은 넘어진 의자를 바로 세우고 그 위에 앉더니 여유롭게 옷소매 단추를 풀며 웃을 듯 말 듯 한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개한테 물어뜯겼는데 다시 물어뜯으려고요?”“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인데요?”임우정은 그에게 분풀이하는 듯했다. 그녀의 고함에 육경섭은 마음이 움찔했다.저도 모르게 혈기 왕성했던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때 그의 옆에 이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자주 지르던 한 이기적인 소녀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아무리 억지스럽게 고집을 부려도 그는 늘 그녀에게 웃음을 잃지 않았다.감옥에 다녀온 뒤로 그렇게 웃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저녁 그녀의 발그스름해진 얼굴과 친구를 위해 기꺼이 나서는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이봐요, 아가씨.”육경섭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젊은 아가씨가 이러면 안 되죠. 여자는 상냥하고 다정해야 하는데 이렇게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못되게 굴면 어느 남자가 데려가겠어요? 아가씨 친구가 남편한테 어떻게 하는지 제발 좀 배워요!”임우정의 표정이 확 변하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째려보았다.“이보세요.”그녀도 그와 똑같은 말투로 또박또박 말했다.“남아일언 중천금이라는 말 들어봤죠? 남자는 내뱉은 말은 약속을 지켜야 하는데 누구처럼 이랬다저랬다 하면 어느 여자가 시집가겠어요? 당신 감방 동기가 와이프한테 어떻게 하는지 제발 좀 배워요!”육경섭의 눈빛이 어두워졌
“형님.”부하가 경멸에 찬 웃음을 지어 보였다.“듣건대 그 아가씨 매번 아주 흥겹게 놀다 간대요.”“그래?”육경섭도 피식 웃었다.“어떻게 흥겹게 노는데?”“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밤에 힘들게 일하는 남자 직원한테 한번 물어보세요. 하하...”육경섭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며칠 후, 강유빈은 킹 나이트의 어느 한 어두운 방에 버려졌다. 처음에는 술기운을 빌어 미친 듯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누구야? 감히 날 납치해? 나 여기 VIP야, 다 눈이 삐었어?”“당연히 우리 VIP 고객인 걸 알지.”그때 누군가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방안이 점점 밝아졌다. 맨 가운데 앉은 남자는 무서운 분위를 내뿜었고 눈빛도 날카로웠다. 특히 미간 사이의 칼 흉터가 더욱 눈에 띄었다.강유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아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강유빈 씨.”육경섭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유빈 씨보다 레벨이 더 높은 VIP 고객님들도 나한테 그렇게 소리를 못 질러!”강유빈은 육경섭이 수단이 잔인하고 악랄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날 강서연의 커피숍에서도 육경섭을 알아봤었다. 하지만 육경섭과 강서연이 무슨 관계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당신... 나한테 무슨 짓 하려고 이래?”강유빈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난 여기 손님이야. 술을 마실 때마다 팁을 두 배로 주는데 왜 나한테 이러냐고!”육경섭이 손뼉을 치자 강유빈 앞에 CCTV 화면이 갑자기 나타났다. 전부 그녀가 킹 나이트에서 술을 마시고 제멋대로 노는 모습들이었다.사람들 앞에서는 한없이 얌전하기만 하던 재벌가 딸이 뒤에서는 가슴이 훤히 다 보이는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클럽에서 남자들과 부비부비하는 모습, 그리고 수천만 원짜리 와인을 마치 콜라를 따듯 아무렇지 않게 따서 사치를 부리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강유빈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고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그녀는 바닥에
“어머, 실수로 잘못 보냈네.”육경섭의 조롱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렇게 예쁜 사진은 강 회장님한테 보내야 하는데.”“육경섭!”“유빈 씨 클럽에서의 이미지가 아주 매력적이야!”입술을 꽉 깨문 강유빈의 낯빛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유빈 씨, 내가 감방에서 고생 좀 했거든. 특히 쌈박질을 많이 해서 손이 말을 잘 안 들어. 혹시라도 어느 날에 실수로 인터넷에 뭔가를 올린다면... 나야 괜찮지만 유빈 씨 체면은...”“육경섭... 경섭 오빠!”강유빈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원하는 게 있으면 얘기해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할게요.”“다른 건 다 괜찮은데 지금 이렇게 악플을 지우고 좋은 평점을 주는 건 너무 성의 없지 않나?”강유빈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그럼... 그럼 더 어떻게 하면 돼요?”“댓글 알바를 구해서 좋은 평점을 주는 것만으로 일이 쉽게 해결될 것 같았으면 내가 직접 하면 되지, 유빈 씨한테 하라고 했겠어? 잘못을 저질렀으면 사과를 해야지, 안 그래? 유빈 씨?”육경섭이 싸늘하게 웃었다.“초등학생도 다 아는 도리를 유빈 씨가 모르는 건 아니지?”...이튿날 해 질 무렵, 강유빈이 커피숍 문 앞에 나타났다.늘 기고만장하던 재벌 아가씨가 오늘은 어두운 셔츠에 긴바지를 단정하게 입고 왔다. 메이크업도 아주 옅었고 캡 모자를 최대한 눌러썼다. 그날따라 커피숍 장사도 아주 잘 되어 가게에 손님이 꽤 많았다. 마당에 잔뜩 핀 아이리스꽃 덕분인지 이 근처 꼭 가봐야 하는 커피숍으로 자리 잡았다.한창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움직이던 강서연은 천천히 걸어오는 강유빈을 보자마자 또 시비를 걸려고 온 줄 알고 마음이 움찔했다. 최연준도 그녀를 발견하고는 강서연 앞에 선 채 강유빈을 싸늘하게 째려보았다.“여긴 또 무슨 일로 왔어요?”최연준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차갑게 물었다. 강유빈은 최대한 초라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그게... 사과하러 왔어요.”그녀가 힘겹게 한마디 내뱉었다.“서연아,
그녀는 가까스로 화를 억누르며 계속 강서연 앞에서 가여운 척했다.“서연아, 나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돼?”“여기 언니를 반가워하는 사람이 없어.”강서연이 매정하게 그녀를 내쳤다.“그만 가.”“서연아...”“당장 꺼지라고!”강서연이 주먹을 불끈 쥐고 입술을 꽉 깨문 채 강유빈을 노려보았다.강유빈은 어릴 적부터 쭉 강서연을 괴롭혀왔지만, 강서연이 진짜 화를 낼 때면 그래도 두려워하긴 했다. 게다가 이젠 강서연의 옆에 무서운 남자까지 있으니...강유빈이 이를 꽉 깨물었다. 강서연이 내쫓으니 오히려 더 좋았다. 어차피 사과는 이미 다 했으니까.“서연아, 난 이미 사과했어. 용서하지 못하겠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앞으로 다시는 여기 오지 않을게. 너도 날 만나기 싫어하는 만큼 나도 널 만나기 싫어!”강유빈은 비틀거리며 마당을 나서다가 그만 발을 삐끗하고 말았다.강서연은 끓어오른 화를 다스리려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최연준이 그녀의 등을 토닥이고는 조심스럽게 안아주었다.“여보.”강서연이 걱정스럽게 말했다.“뭔가 이상해요. 진심으로 하는 사과가 아니라 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겠죠?”최연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사실 그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강유빈이 황급히 나가긴 했지만, 아직 멀리 가지 못했다. 최연준은 강서연에게 가게를 맡기고 몰래 강유빈을 따라갔다. 대체 어찌 된 상황인지 제대로 알아보려고 따라갔지만, 마당을 나서던 그때 대문 모퉁이에 누군가의 모습이 잠깐 비쳤다.발걸음 소리에 최연준은 바로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홱 돌아섰다. 그 순간 작은 나무숲에 숨어있던 몇몇 사람들이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최연준은 민첩한 몸놀림으로 그들을 쫓아갔다. 그때 한 익숙한 얼굴이 그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가 차갑게 웃으며 주먹을 날리자 육경섭의 관자놀이를 거의 가격할 뻔했다. 최연준은 육경섭이 미처 피하지 못한 틈에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형님!”몇몇 부하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육경섭은 최연준과 주먹 몇 방을 주고받았다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