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 일이 있어서 일찍 문 닫으려고요.”강서연이 무표정으로 말했다.“그러니 다들 이만 돌아가세요. 여기 당신들이 원하는 게 없어요!”몇몇 동료들은 서로 멀뚱멀뚱 얼굴만 쳐다보다가 결국 강유빈에게 시선을 돌렸다. 강유빈은 팔짱을 낀 채 코웃음을 쳤다.“서연아, 벌써 문 닫게? 그리해서 가게세는 어떻게 벌어?”“가게세?”강서연이 눈썹을 치켜올렸다.“가게세는 내 남편이 내고 있어. 여기 가게 일도 전부 남편이 관리하고 있거든. 우리 남편이 그랬어. 커피숍을 차린 게 날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고. 그러니까 내가 문 닫고 싶을 때 문 닫으면 돼. 돈 걱정 따위 하지 않아도 된단 말이지. 그리고 있잖아!”그녀는 카운터를 닦다가 고개를 들고 강유빈을 쳐다보았다.“여기는 커피를 마시고 디저트를 먹는 커피숍이야. 남을 욕하는 곳이 아니라!”“제대로 경영하지도 못하면서 잘난 척은.”강유빈은 동료들 앞에서조차 강서연에게 밀리는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다.“그래, 우리가 갈 수는 있어! 하지만 인터넷에 악성 댓글이 하도 많아서 언젠가는 문을 닫을 거라는 걸 명심해!”“내가 문을 닫든 말든 언니랑 상관있어?”“나랑은 당연히 상관없지.”강유빈이 대놓고 비웃었다.“네 남편이랑은 상관있잖아. 어휴, 동생아, 커피숍은 분위기가 가장 중요해. 그런 곳에 남편을 떡하니 두었으니 스스로 망하는 길을 찾아가는 거랑 뭐가 달라?”강서연의 낯빛이 확 변하더니 들고 있던 커피잔을 꽉 움켜쥐었다.“우리 남편이 도둑질했어, 뭘 했어? 자기가 직접 일해서 돈을 버는데 그게 어떻게 스스로 망하는 길을 찾아가는 거야?”“왜냐하면 예전에...”“그건 다 지나간 일이야!”강서연이 살짝 흥분했다.“지나간 일을 자꾸 들춰서 뭐 해!”“왜? 화났어?”강서연이 흥분할수록 강유빈은 더욱 우쭐거렸다. 어릴 적부터 강서연과 다퉈서 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강서연이 그녀 대신 구현수에게 시집가면 인생이 망가져 마음대로 짓밟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구현수를 만나고 나서 점점 더
“내 한계를 건드렸다간 절대 가만 안 둬!”“너...”“당장 꺼져!”강서연이 포효하듯 소리를 질렀다. 강유빈은 두려움에 벌벌 떨며 더는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마침 가게 안으로 들어오던 임우정이 그 장면을 목격했다. 난장판이 된 현장만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임우정은 혹시라도 강서연이 괴롭힘을 당했을까 봐 두말없이 앞으로 달려 나가 강유빈을 확 밀쳤다. 그 바람에 강유빈은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테이블 모서리에 부딪혔다. 어찌나 아팠던지 식은땀까지 뻘뻘 흘렸다.“임우정 씨, 당신 미쳤어요?”강유빈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감히 날 밀쳐요?”“왜요? 당신을 밀치면 안 돼요?”임우정이 강서연을 감싸고 돌았다.“지금 한 무리 사람을 데리고 와서는 우리 서연이를 괴롭히려 했던 거 맞죠?”“괴롭히다니요. 난 매출을 올려주려 온 거라고요!”강유빈이 그녀를 째려보았다.“남의 호의도 몰라주고 참... 당신도 서연이처럼 사리 분별을 참 못하네요!”더는 그녀와 쓸데없는 얘기를 섞고 싶지 않았던 임우정은 다짜고짜 강유빈의 뺨을 후려갈겼다.사실 그녀는 일을 크게 벌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강유빈이 어찌나 사람의 화를 잘 돋우는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임우정은 기고만장한 강유빈에게 험한 욕이라도 퍼붓고 싶었지만, 너무 화난 나머지 머릿속이 다 하얘졌다. 평소 언변이 좋던 그녀마저도 이런 순간에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말을 못 하겠으면 그럼 때려야지!서로 머리채를 마구 쥐어뜯는 임우정과 강유빈은 누구 하나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했다.강서연은 두 사람을 말리고 싶어도 끼어들 수가 없었다. 자그마한 커피숍이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고 지나가던 행인마저도 가게 안을 기웃거렸다.육경섭은 요 며칠 최연준을 알아보려고 마당 뒤쪽의 은밀한 구석에서 자주 지켜보곤 했다. 조금 전 임우정이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아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기에 저도 모르게 임우정을 걱정하기 시작했다.그런데 그가 가게 마당으로 들어가 보니 임우정이 드높은 기세
강유빈은 입술을 꽉 깨문 채 자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몸을 최대한 옆으로 돌린 후 머리카락을 축 내리뜨렸다.“괜찮아요.”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늘 정말 재수 더럽게 없네!”“방금 뭐라고 했어요?”임우정이 목청을 높이자, 강유빈은 바로 겁먹었다. 그러더니 벽에 붙은 채 밖으로 걸어 나가며 욕설을 퍼부었다.“강서연, 내가 언젠가는 이 가게를 싹 다 뒤집어엎을 테니까 딱 기다려!”임우정이 또 나서려 하자 강서연이 그녀의 손을 잡고 말렸다.“그만 해요.”육경섭은 넘어진 의자를 바로 세우고 그 위에 앉더니 여유롭게 옷소매 단추를 풀며 웃을 듯 말 듯 한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개한테 물어뜯겼는데 다시 물어뜯으려고요?”“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인데요?”임우정은 그에게 분풀이하는 듯했다. 그녀의 고함에 육경섭은 마음이 움찔했다.저도 모르게 혈기 왕성했던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때 그의 옆에 이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자주 지르던 한 이기적인 소녀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아무리 억지스럽게 고집을 부려도 그는 늘 그녀에게 웃음을 잃지 않았다.감옥에 다녀온 뒤로 그렇게 웃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저녁 그녀의 발그스름해진 얼굴과 친구를 위해 기꺼이 나서는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이봐요, 아가씨.”육경섭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젊은 아가씨가 이러면 안 되죠. 여자는 상냥하고 다정해야 하는데 이렇게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못되게 굴면 어느 남자가 데려가겠어요? 아가씨 친구가 남편한테 어떻게 하는지 제발 좀 배워요!”임우정의 표정이 확 변하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째려보았다.“이보세요.”그녀도 그와 똑같은 말투로 또박또박 말했다.“남아일언 중천금이라는 말 들어봤죠? 남자는 내뱉은 말은 약속을 지켜야 하는데 누구처럼 이랬다저랬다 하면 어느 여자가 시집가겠어요? 당신 감방 동기가 와이프한테 어떻게 하는지 제발 좀 배워요!”육경섭의 눈빛이 어두워졌
“형님.”부하가 경멸에 찬 웃음을 지어 보였다.“듣건대 그 아가씨 매번 아주 흥겹게 놀다 간대요.”“그래?”육경섭도 피식 웃었다.“어떻게 흥겹게 노는데?”“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밤에 힘들게 일하는 남자 직원한테 한번 물어보세요. 하하...”육경섭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며칠 후, 강유빈은 킹 나이트의 어느 한 어두운 방에 버려졌다. 처음에는 술기운을 빌어 미친 듯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누구야? 감히 날 납치해? 나 여기 VIP야, 다 눈이 삐었어?”“당연히 우리 VIP 고객인 걸 알지.”그때 누군가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방안이 점점 밝아졌다. 맨 가운데 앉은 남자는 무서운 분위를 내뿜었고 눈빛도 날카로웠다. 특히 미간 사이의 칼 흉터가 더욱 눈에 띄었다.강유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아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강유빈 씨.”육경섭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유빈 씨보다 레벨이 더 높은 VIP 고객님들도 나한테 그렇게 소리를 못 질러!”강유빈은 육경섭이 수단이 잔인하고 악랄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날 강서연의 커피숍에서도 육경섭을 알아봤었다. 하지만 육경섭과 강서연이 무슨 관계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당신... 나한테 무슨 짓 하려고 이래?”강유빈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난 여기 손님이야. 술을 마실 때마다 팁을 두 배로 주는데 왜 나한테 이러냐고!”육경섭이 손뼉을 치자 강유빈 앞에 CCTV 화면이 갑자기 나타났다. 전부 그녀가 킹 나이트에서 술을 마시고 제멋대로 노는 모습들이었다.사람들 앞에서는 한없이 얌전하기만 하던 재벌가 딸이 뒤에서는 가슴이 훤히 다 보이는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클럽에서 남자들과 부비부비하는 모습, 그리고 수천만 원짜리 와인을 마치 콜라를 따듯 아무렇지 않게 따서 사치를 부리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강유빈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고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그녀는 바닥에
“어머, 실수로 잘못 보냈네.”육경섭의 조롱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렇게 예쁜 사진은 강 회장님한테 보내야 하는데.”“육경섭!”“유빈 씨 클럽에서의 이미지가 아주 매력적이야!”입술을 꽉 깨문 강유빈의 낯빛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유빈 씨, 내가 감방에서 고생 좀 했거든. 특히 쌈박질을 많이 해서 손이 말을 잘 안 들어. 혹시라도 어느 날에 실수로 인터넷에 뭔가를 올린다면... 나야 괜찮지만 유빈 씨 체면은...”“육경섭... 경섭 오빠!”강유빈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원하는 게 있으면 얘기해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할게요.”“다른 건 다 괜찮은데 지금 이렇게 악플을 지우고 좋은 평점을 주는 건 너무 성의 없지 않나?”강유빈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그럼... 그럼 더 어떻게 하면 돼요?”“댓글 알바를 구해서 좋은 평점을 주는 것만으로 일이 쉽게 해결될 것 같았으면 내가 직접 하면 되지, 유빈 씨한테 하라고 했겠어? 잘못을 저질렀으면 사과를 해야지, 안 그래? 유빈 씨?”육경섭이 싸늘하게 웃었다.“초등학생도 다 아는 도리를 유빈 씨가 모르는 건 아니지?”...이튿날 해 질 무렵, 강유빈이 커피숍 문 앞에 나타났다.늘 기고만장하던 재벌 아가씨가 오늘은 어두운 셔츠에 긴바지를 단정하게 입고 왔다. 메이크업도 아주 옅었고 캡 모자를 최대한 눌러썼다. 그날따라 커피숍 장사도 아주 잘 되어 가게에 손님이 꽤 많았다. 마당에 잔뜩 핀 아이리스꽃 덕분인지 이 근처 꼭 가봐야 하는 커피숍으로 자리 잡았다.한창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움직이던 강서연은 천천히 걸어오는 강유빈을 보자마자 또 시비를 걸려고 온 줄 알고 마음이 움찔했다. 최연준도 그녀를 발견하고는 강서연 앞에 선 채 강유빈을 싸늘하게 째려보았다.“여긴 또 무슨 일로 왔어요?”최연준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차갑게 물었다. 강유빈은 최대한 초라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그게... 사과하러 왔어요.”그녀가 힘겹게 한마디 내뱉었다.“서연아,
그녀는 가까스로 화를 억누르며 계속 강서연 앞에서 가여운 척했다.“서연아, 나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돼?”“여기 언니를 반가워하는 사람이 없어.”강서연이 매정하게 그녀를 내쳤다.“그만 가.”“서연아...”“당장 꺼지라고!”강서연이 주먹을 불끈 쥐고 입술을 꽉 깨문 채 강유빈을 노려보았다.강유빈은 어릴 적부터 쭉 강서연을 괴롭혀왔지만, 강서연이 진짜 화를 낼 때면 그래도 두려워하긴 했다. 게다가 이젠 강서연의 옆에 무서운 남자까지 있으니...강유빈이 이를 꽉 깨물었다. 강서연이 내쫓으니 오히려 더 좋았다. 어차피 사과는 이미 다 했으니까.“서연아, 난 이미 사과했어. 용서하지 못하겠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앞으로 다시는 여기 오지 않을게. 너도 날 만나기 싫어하는 만큼 나도 널 만나기 싫어!”강유빈은 비틀거리며 마당을 나서다가 그만 발을 삐끗하고 말았다.강서연은 끓어오른 화를 다스리려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최연준이 그녀의 등을 토닥이고는 조심스럽게 안아주었다.“여보.”강서연이 걱정스럽게 말했다.“뭔가 이상해요. 진심으로 하는 사과가 아니라 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겠죠?”최연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사실 그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강유빈이 황급히 나가긴 했지만, 아직 멀리 가지 못했다. 최연준은 강서연에게 가게를 맡기고 몰래 강유빈을 따라갔다. 대체 어찌 된 상황인지 제대로 알아보려고 따라갔지만, 마당을 나서던 그때 대문 모퉁이에 누군가의 모습이 잠깐 비쳤다.발걸음 소리에 최연준은 바로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홱 돌아섰다. 그 순간 작은 나무숲에 숨어있던 몇몇 사람들이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최연준은 민첩한 몸놀림으로 그들을 쫓아갔다. 그때 한 익숙한 얼굴이 그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가 차갑게 웃으며 주먹을 날리자 육경섭의 관자놀이를 거의 가격할 뻔했다. 최연준은 육경섭이 미처 피하지 못한 틈에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형님!”몇몇 부하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육경섭은 최연준과 주먹 몇 방을 주고받았다
“경섭 형님!”부하들은 혹시라도 그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걱정되어 자꾸만 꿈틀거렸다. 육경섭이 그들에게 그만 가라고 분부했다.부하들은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떠났다. 최연준은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들고 있던 총을 천천히 내려놓았다.“그래요. 당신이 구현수가 아니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어요.”육경섭이 싸늘하게 웃었다.“알면 안 돼요? 알고 난 후에 당신을 찾아간 적이 없잖아요.”최연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의 말이 사실이긴 했다. 게다가 지난번에 강유빈이 가게로 찾아와 강서연을 괴롭힐 때도 그가 나서서 쫓아냈다. 하지만 최연준은 여전히 육경섭에 대한 커다란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내가 구현수가 아니라는 걸 안다면.”최연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내 진짜 정체가 뭔지도 알겠네요?”순간 멈칫하던 육경섭은 그를 흘겨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당신 여자랑 내 여자가 절친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최연준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육경섭은 건달 기질이 농후했고 얼굴의 칼 흉터 때문에 더 험상궂게 보였다. 이런 사람이 적일지 친구일지는 최연준도 헷갈렸다.“현수 씨!”그때 멀지않은 곳에서 누군가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가게에 있어요?”최연준과 육경섭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는 재빨리 나무숲을 벗어났다.신석훈은 커다란 박스 하나를 든 채 마당에 떡하니 서 있었다. 그런데 육경섭을 보자마자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최연준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아까 금방 들어왔을 때 서연 씨가 다급하게 나가더라고요.”신석훈이 그를 보며 히죽 웃었다.“옆 가게에 커피콩 가지러 간다고 했어요. 바로 올 거예요.”“네.”주변의 여러 커피숍 사장들의 나이가 강서연과 비슷했다. 강서연도 꽤 붙임성이 좋은 성격이라 그들은 짧은 시간인데도 서로 친구가 되었다.새로운 커피콩을 들여올 때마다 강서연에게도 나눠주곤 했다.최연준이 신석훈을 보며 말했다.“오늘은 웬일로 가게에 왔어요
“내가... 방해한 건 아니죠?”강서연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우리 남편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매력이 넘치는가 보네.’남자 셋 중에 누구 하나 밝은 표정이 없었다. 특히 최연준은 마치 원수를 쳐다보듯 양쪽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둘이 싸우려면 나가서 싸워요!”그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와이프가 온 게 안 보여요?”두 사람은 동시에 움찔했다.신석훈은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강서연을 향해 웃어 보이고는 알아서 자리를 떠났다. 육경섭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최연준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고는 그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이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두 사람이 나간 후에야 강서연이 마음 놓고 크게 웃었다.“왜 웃어?”최연준은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박력 넘치는 남성미가 그녀를 덮쳤다. 강서연은 그의 품에 살포시 기댄 채 손가락으로 가슴팍을 쓱 어루만졌다.“동성끼리야말로 진짜 사랑이라던데... 어휴, 아무래도 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내가 세 사람 사이를 갈라놓은 건 아니죠?”최연준은 그녀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확 덮쳐버리고 싶은 욕구가 강렬하게 밀려왔다.“난 그런 취향이 아니야.”그가 얼굴을 가까이 대자 그녀의 따뜻한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앞으로 또 그런 소리를 했다간 벌을 내릴 거야!”“벌이요?”최연준이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그녀의 빨개진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강서연은 쑥스러운 듯 주먹으로 그를 마구 두드렸다. 두 볼이 마치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그스름해졌고 넋이 나간 눈빛으로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가게 문 앞의 종이 딸랑하고 울리면서 두 여학생이 까르르 웃으며 들어왔다.강서연은 재빨리 그를 밀쳐내고 손님을 맞이하러 갔다. 최연준은 얼굴을 움켜쥔 채 한숨만 연달아 쉬었다.지금, 이 순간 그는 누구보다도 이 가게가 문을 닫길 바랐다. 문을 닫으면 두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할 수 있으니까.카운터로 돌아온 강서연은 화끈거리는 볼
“아줌마,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럼, 제가 알아낸 사실을 전부 말씀드릴게요!”영미는 입가에 교만한 미소를 띠며 백인서를 차갑게 한 번 쳐다보았다.“백인서 씨의 친어머니인 백홍은 인신매매범이었다는 사실, 모두 아셨나요? 백인서 씨의 어머니는 백인서를 정대명의 집에 맡겼고... 흥! 정대명의 아내도 백홍이 납치해 왔다는 소문이 있어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잖아요. 제 생각엔... 인신매매범의 딸이라면 그런 일쯤은 익숙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권온유의 실종이 정말로 백인서 씨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시나요?”“영미!”강소아가 나서며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허위 사실을 퍼뜨리지 마!”“소유 아가씨, 억울하네요!”영미는 강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이렇게까지 조사한 건 다 아가씨를 위한 거예요! 딸도 있는 사람이 백인서를 곁에 두고도 마음이 놓이세요?”“그만해!”최지용이 크게 소리쳤다.백인서는 몸을 떨며 믿기지 않는 눈으로 최지용을 쳐다보았다.그러나 최지용의 얼굴에는 의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최지용은 굳건한 눈빛으로 뒤에 있는 백인서를 지키고 있었다.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백인서를 아끼고 있었다.백인서는 코끝이 찡해지며 본능적으로 최지용의 손을 꼭 붙잡았다. 최지용의 따스한 손은 백인서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그 온기가 어둠의 두려움을 잊게 해주었다.최지용은 백인서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고 다시 영미를 바라볼 때는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영미야.”최지용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두 집안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저 넘어가는 거야. 더 이상 선을 넘지 마.”최군형도 나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요, 백인서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모르겠어요? 영미 아가씨, 우리 최씨 가문 사람들을 바보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영미는 순간 긴장했다. 최군형의 말 속엔 어딘가 숨은 뜻이 있는 듯했다.최군형의 깊고 복잡한 눈빛을 파악하기 어려웠다.표아정은 천천히 일어나 어깨에 걸친 숄을
백인서는 복잡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그때 최지용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표아정이었고 다급한 목소리로 서둘러 돌아오라고 재촉했다.최지용은 결국 어머니의 말에 따라 백인서를 데리고 최씨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넓은 거실에는 최군형과 강소아도 나와 있었고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백인서가 들어서자, 표아정이 백인서를 올려다보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다.강소아는 백인서와 눈을 마주치며 단호하게 미소 지었다.백인서가 의아해하던 찰나, 영미가 천천히 밖에서 걸어 들어왔다.“아줌마, 지용 오빠. 제가 권온유의 행방을 알아냈어요.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뭐라고?”최지용이 놀라서 물었다.“네가 어떻게 아는데?”영미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지용 오빠,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정보가 우리보다 더 빠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최씨 가문은 만능이 아니에요, 최씨 가문도 모르는 정보가 있다고요.”표아정은 가볍게 기침하며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았다.최군형과 강소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주목하고 있었다.최지용의 이마에는 점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미의 눈에는 한 줄기 교만한 빛이 번졌다.영미는 오는 길에 이미 모든 계획을 짰다. 정대명의 말이 맞았다. 누구를 훔치든 상관없었다. 인신매매범의 딸인 백인서가 아이들을 해치러 다닌다는 누명을 씌우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하면 백인서는 모두의 신뢰를 잃게 될 터였다.영미는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강소아가 인신매매범을 곁에 둘 리 없다고 믿었고, 최지용 역시 이 사실을 알면 더는 백인서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영미는 정대명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영미는 권온유를 넘기고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한패가 되어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주장할 계획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인서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궁지에 몰릴 것이었다!“지용 오빠.”영미는 고개를 돌려 최지용을 바라보며 한 글자씩 천천히 말했다.“권온유는 정승
“그... 괜찮아!”정승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말했다. 정승우는 이곳에서 권온유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 이때, 공장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곧바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정승우는 재빨리 권온유에게 눈짓했고 권온유도 알아채고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없는 척했다.정승우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았다.“이 아이인가요?”영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맞아.”정대명은 영미를 흘깃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영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희미한 빛 속에 있는 아이를 살펴보더니, 곧 얼굴빛이 확 변했다.“이 아이... 혹시 권씨 집안의 막내딸 아니에요?”정대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훔쳐 올 때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리가 없었다.“정대명 씨.”영미가 차갑게 웃으며 돌아보았다.“제가 최씨 가문 집안 아이를 훔쳐 오라고 했지, 권씨 집안 아이를 훔치라고 했나요? 이러고도 저를 속이지 않았다고요?”“그게...”정대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영미 아가씨, 어차피 목적은 백인서를 곤경에 빠뜨리는 거잖아? 그러니 누구를 훔쳐 오든 상관없지 않아? 아이를 훔치기만 하면 유괴범이 되는 거니까.”이 말은 영미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정승우의 귀에도 또렷이 들어왔다.“좋아요.”영미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는 잘 지키고 있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한편, 권씨 집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권욱은 조순영을 탓하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고, 조순영은 오열하며 남편을 원망했다. 조순영은 권욱이 바깥에서 여자와 부적절하게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헛소리하지 마!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 잘 알잖아. 결혼 생활 내내 너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정말 떳떳하게 행동했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만 가만두지 않는 건데?”며칠 전까지만
권온유의 질문에 정승우는 당황했다.권온유는 커다란 눈망울로 정승우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슈퍼맨 같은 오빠가, 이제는 먹을 것 하나 구하지 못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정승우는 어색하게 입가를 씰룩이며 권온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갔다.“너, 정말 배고파?”“네!”권온유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작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원래는 엄마랑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 했어요. 엄마가 특별히 고등어조림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엉엉... 엉엉...”“울지 마, 울지 마! 그냥 생선 하나 가지고...”“나 배고파!”정승우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아이와 대화하는 건 그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겨우 권온유를 달래고 나서 정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팔을 걷어붙이며 권온유에게 내밀었다.“너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고프면, 여기 한번 물어볼래?”권온유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정승우를 바라보았다.“우리 집은 가난해서 늘 먹을 게 부족했거든. 그래서 어릴 때 너무 배가 고프면 이렇게 배고픔을 달랠 만한 걸 물곤 했어.”권온유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배고픔을 달랠 만한 것'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정승우는 웃으며 계속 설명했다.“예를 들어 쌀통 같은 거야. 한때 쌀이 들어 있던 쌀통은 비어 있어도 쌀 냄새가 남아 있거든. 그래서 쌀통 가장자리를 살짝 물면서 하얀 쌀밥을 먹는 상상하는 거야. 그러면 배가 덜 고파져.”“그리고 이웃집에서 밥하는 냄새를 맡으며 그 밥을 먹는 상상을 하는 거야. 그러면 그렇게 배고프지 않더라고.”권온유는 정승우의 이야기에 넋을 잃고 입을 벌린 채 있었다. 정승우는 웃음을 터뜨렸다.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한때 정대명이 도박과 술에 빠져 정승우를 굶겼던 시절은 그야말로 비참한 순간들이었다.잠시 후, 권온유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 정승우는 속으로 ‘큰일이다'라고 생
영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최지용을 지켜보았다.최지용은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구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영미는 바로 뒤를 따라갔고 최지용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찾았습니까?”“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만약 납치범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분명 전화를 걸어올 겁니다!”영미의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납치범이라니? 대체 뭘 찾는다는 거지?백인서와 통화한 걸까?그때, 최군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지용이 형, 여기서 뭐 해요?”영미는 얼른 몸을 숨겼고 최군성은 최지용에게 다가가 최지용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형이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서 와서 먹고 즐기자고요!”최지용은 최군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영미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영미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억지 미소로 인사했다.“지용 오빠...”“어, 영미?”최군성도 배윤아처럼 물었다.“여기 웬일이야? 형님이 널 초대한 것 같지 않은데?”“그게...”영미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군성은 영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지용을 끌고 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최지용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영미가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사람이, 왜 하필 오늘 온유가 사라진 날에 나타난 걸까?그때, 최군형과 강소아가 가원이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강소아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혔고 아이는 보행기 가장자리를 잡고 작은 발을 내디뎠다. 이 모습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영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리를 떠 교외의 버려진 공장으로 향했다.그 시각, 정대명은 영미의 지시에 따라 승합차를 몰고 공장에 도착해 있었고 영미가 도착했을 때 그는 공장 문 앞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미는 핸드백을 휘둘러 정대명에게 던졌다.“정대명 씨, 감히 날 속여
“너 따위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정대명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결국엔 자기 아들이었기에 정승우에게 감출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때리고 꾸짖어도 떠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정대명은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 들고는 권온유의 양 갈래머리를 단칼에 잘라냈다. 머리카락이 천천히 바닥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다가 막아서려는 순간, 자신과 정대명 사이에 힘의 격차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작정 나섰다가는 역부족일 터였다.정승우는 이를 악물고 정대명에게 다가가 물었다.“아빠, 정말 이 아이를 팔 생각이에요?”“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영미라는 그 여자가 원하는 거야!”정대명은 불만스레 대꾸하며 정승우에게 옷장에 있는 헌 옷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정승우가 옷을 가져오자, 정대명은 손을 뻗어 권온유의 예쁜 드레스를 찢으려 했다. 정승우는 급히 소리쳤다.“뭐 하는 거예요!”“이 자식이!”정대명은 정승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조용히 해! 죽고 싶어?”“아빠, 이건...”“이 애한테 옷을 갈아입히려는 거야! 이렇게 좋은 옷을 입고 있으면 바로 눈에 띄잖아.”정승우는 다가가 정대명을 옆으로 밀치며 말했다.“제가 갈아입힐게요!”“이놈이...”정대명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그는 정승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하, 아빠를 도와주고 싶구나? 역시 아들은 아들밖에 없지! 그래, 네가 손이 빠르니까 빨리 옷을 갈아입혀. 둘이 함께 가자고!”정승우는 속으로 혐오감이 치밀었지만, 지금은 그저 상황을 지켜보며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정승우는 권온유의 드레스를 벗기지 않고, 정대명의 헌 옷을 위에 입혀 단단히 감쌌다. 그런 다음 모자를 씌워 얼핏 보면 남자아이처럼 보이게 했다.“좋아, 이 정도면 되겠어!”정대명은 정승우에게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뒷문에 승합차가 준비돼 있대. 어서 출발하자!”“아빠, 이 소녀는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예요?”“교외지!”정대명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빨리 움직
권온유는 깜짝 놀라며 정대명을 멍하니 쳐다보았다.“아저씨가 맛있는 걸 가지고 왔단다. 배고프지 않니?”권온유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달아나려 했다. 정대명은 급히 권온유 앞을 가로막았다.“아니, 가지 마!”정대명은 두 손으로 권온유를 꼭 붙들며 말했다.“그게... 네 엄마가 나한테 너를 데려오라고 부탁했어!”엄마라는 말을 듣고 권온유는 잠시 멈칫했다.“정말이야, 네 엄마가 부탁한 거라니까!”정대명은 거짓말을 이어갔다.“방금 네 엄마가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렸지? 너 보고 기다리라고 했잖아?”“네... 맞아요.”“그래!”정대명은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네가 여기저기 막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엄마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알 거예요. 저는 여기서 조금 놀다가 다시 휴게실로 돌아갈 거예요!”“오... 그렇구나.”정대명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아저씨가 휴게실이 어딘지 아니까, 내가 데려다줄게!”권온유는 경계하며 정대명에게서 몸을 빼내고 두 걸음 물러났다.“얘가! 난 정말로 네 엄마 친구라니까. 네가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걱정하지 않겠어? 맞지?”“자, 자! 아저씨가 데려다줄게. 착하지!”정대명은 권온유를 갑자기 붙들어 어깨에 둘러맸다. 권온유는 본능적으로 소리치려 했지만, 정대명의 손이 입을 단단히 막고 있어 소리를 낼 수 없었다.어린 소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른 남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정대명은 권온유의 머리 뒤쪽을 세게 내리쳐 기절시켰고, 온유가 들고 있던 인형은 땅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익숙하게 호텔로 와서 지난번 일을 핑계로 다시 정대명에게 돈을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방 안에 기절한 어린 소녀가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어른 일에 참견하지 말고 신경 꺼!”정대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방금 정대명은 온유를 데려오며 보안과 호텔 직원의 눈을 피하고자 아이를 어깨에 메고 가지 않고,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속여서 안
“엄마, 우리 오늘도 여기서 밥 먹어요?”“그래.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고등어조림 요리잖아.”“그런데...”권온유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삼켰다. 사실 권온유는 집에서 밥을 먹고 싶었다.어린 권온유도 느낄 만큼 엄마는 요즘 기분이 좋지 않았다.방금 대답조차 어딘가 건성으로 들렸다.권온유는 어른들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걸까? 누군가 아빠와 다른 여자가 함께 찍힌 사진을 보내기만 하면, 엄마는 이렇게 변해버렸다.“엄마...”권온유는 엄마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그러나 조순영은 갑자기 권온유의 손을 놓고는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더니 초조한 표정으로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권온유는 깜짝 놀라 인형을 떨어뜨렸다.“엄마!”“온유야,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조순영은 급히 돌아보며 외쳤다.“엄마 금방 올게!”권온유는 엄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홀로 서 있었다.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엄마는 아빠가 다른 여자가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엄마는 통제력을 잃고 온유를 혼자 내버려두곤 했다. 그러고 한참 후에야 멍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곤 했다.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던 정대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몇 번이나 이 모녀를 본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 여자는 자주 아이와 함께 식사하러 왔는데 가끔 혼자 올 때도 있었다...남편의 외도를 잡으려는 걸까?맞아, 틀림없이 그런 거다!정대명은 매일 호텔에 살면서 듣는 소문도 적지 않았다. 한 회장이라는 사람은 아내와 자식이 있음에도 바람이 잦았다고 하는데 그 회장은 차기 시장의 사위가 될 인물이라는 말도 있었다.정대명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이런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차피 남자가 바깥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니까.정대명은 다시 어린 소녀를 주시했다. 소녀
정대명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얼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며칠을 기다린 결과가 고작 최가원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었다.그럼에도 영미는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왔다.“정대명 씨, 대체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대단한 것도 아니고 아이 하나 훔쳐 오는 게 그렇게 어렵나요?”젠장! 정대명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차라리 보석을 훔치는 게 더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하하... 영미 아가씨.”마음속으로는 욕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여전히 웃음이 서려 있었다.“이게, 그렇게 쉽지 않네요! 제가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그 경호원들이 전부 총을 들고 있더라고요. 제가 무턱대고 나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정말 쓸모없네요.”영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내가 사람들까지 매수해 놨는데, 일을 이따위로 하다니!”정대명은 억눌린 분노를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말해 두겠는데요!”영미는 한발 더 나아가 말했다.“이 일 못 해내면, 화려한 호텔 스위트룸도 더 이상 못 쓰게 될 테고 돈 한 푼도 못 받는 줄 아세요! 다시 그 작은 산골 마을로 돌아가서 평생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하세요!”정대명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호사에 길든 사람이 다시 가난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최근 정대명은 오성에서 살아가며 화려한 삶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이 잘 먹고 살게 도와줬고 돈까지도 넉넉히 주니 점점 체면이 생기기 시작했다.호텔에서 정대명이 매일 스위트룸에서 지내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부자로 착각했고 그에게 예의를 갖추며 인사했다.이런 삶은 초라했던 지난날에선 꿈도 꾸지 못한 것이었다.고작 아이 하나 때문에 이 모든 걸 잃기엔 너무 아까웠다.정대명은 급히 전화기를 붙잡고 외쳤다.“영미 아가씨, 너무 흥분하지 마!”영미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내가...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정대명은 어영부영 답했다.“겨우 아이 하나 가지고, 뭐 대단한 일도 아니지!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