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금수만화란 배윤아의 작업실은 이미 자리를 잡았고 곧 정식으로 영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작가, 편집자, 운영, 심지어 행정과 재무까지 모두 배윤아 혼자가 담당하고 있었다. 배윤아는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바빴고 멀리 해외에 있는 배현진은 도와주고 싶었지만 여력이 없어 최씨 형제들에게 전화를 걸어 돌봐달라고 부탁했다.최군형은 최상그룹을 관리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자연스럽게 이 중책은 별일 없는 최군성에게 떨어졌다. 작은 새끼 고양이들은 점점 자랐고 배윤아는 작업실에 그들을 위한 새로운 집을 마련해 주었다. 배윤아는 고양이들과 함께, 컴퓨터와 그림판을 지키고 막 끓인 커피의 향기가 퍼져 나오는 가운데,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최군성이 처음 작업실에 왔을 때, 그는 이 장면에 매료되었다. 마치 그의 마음속에서 빠진 한 조각이 채워진 것 같았고 그 빈틈을 채운 것이 바로 이 그리던 삶이었다.“배윤아, 네 작업실 정말 좋다.”그는 부러워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내가 이렇게 조용히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배윤아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웃었다.“왜 그렇게 불쌍하게 말해? 최상 별장에 화실 하나 없을 리가 있나?”“에이, 그거랑은 달라.”최군성은 한숨을 쉬었다.그들 최씨 가문에서는 그림을 취미로 여길 수는 있지만 직업으로 삼을 수는 없었다. 인생의 장식품으로는 인정받지만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그의 할아버지 최문혁도 평생 그림을 그리며 전각과 조각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예술가였다.그러나 그런데도 평생 인정받지 못했다. 최씨 가문에서는 아무도 그를 성공한 사업가로 여기지 않았다. 최상그룹의 기둥을 말할 때면, 사람들은 최연준과 최군형을 인정할 뿐이었다.최군성은 할아버지의 화실에 가본 적이 있었다. 그 자신도 화실이 있었고 최군성이 그림을 그릴 때는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다. 게다가 물감과 종이도 최고급이었다.하지
최군성은 참지 못하고 크게 웃어버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열심히 일하던 최연준이 놀라 돌아봤다.얼마 지나지 않아 최군성은 아버지의 싸늘한 눈초리를 받았다.반면에, 늘 영리한 최군형은 허리를 굽히고 꽃을 부지런히 심으며 아빠를 올려다보며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소아도 도와주러 왔다.어느덧 밤이 찾아왔고 마지막 보라색 아이리스가 드디어 심어졌다. 형제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이 순간까지도 최군성의 호기심은 멈추지 않았고 특히 아버지가 엄마에게 어떤 생일 선물을 준비했는지 알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최연준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두 아들을 바라보고 다시 강소아를 보며 말했다. “좋아. 너희들에게 미리 보여주마.” 최군성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손을 흔들며 기뻐했다.“정말요?”반면에 최군형은 더 차분하게 최군성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이미 아빠가 뭘 줄지 짐작했어.” “어?” “분명 그거일 거야... 미리 연습이 필요한 거.”최군형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니면 미리 보여줬을 리가 없지. 이건 분명 우리를 관객으로 삼고 점수를 매겨보려고 하는 거야. 선물이 더 개선될 여지가 있는지 보려고 말이지.” 최군성은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이때 최연준은 이미 멀리 가서 지휘를 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밤하늘에 갑자기 거대한 투영 화면이 나타났고 무수한 조명이 비치며 무지개 같은 길이 펼쳐졌다. 이어지는 화면에는 최연준과 강서연의 젊은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함께할 때의 풋풋함, 서로 사랑할 때의 달콤함, 그리고 그들 사이에 한 마리의 하얗고 통통한 찹쌀떡 같은 아이가 추가된 모습까지... 그 후, 찹쌀떡 같은 아이들이 둘이 되었다.지금은 찹쌀떡들이 모두 멋진 청년으로 자라났고 그중 한 명은 이미 가정을 꾸렸다. 이 투영은 엄청난 비용이 들었고 지금까지의 가장 첨단 기술을 사용해 모든 장면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보였다. 배경
하지만...그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은 까맣고, 아무것도 없었다.그는 최근에 육연우과 나눈 채팅 기록을 찾아보았다. 하나하나가 마치 혼자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밥 먹었어?][집에서 뭐 해?][오늘 산책하러 갈래?]이 모든 말들에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하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예전에는 누가 먼저 메시지를 보내든 상대방은 반드시 바로 답장했다. 길에서 작은 꽃을 보거나, 아기가 웃는 모습이 귀엽다거나, 오늘 날씨가 맑다는 등의 사소한 일들조차도 그들은 한참을 이야기하곤 했다.최군성은 약간 울적해지며 고개를 숙이고 밥을 꿀꺽 삼켰다.그때 주씨 아줌마가 손님을 데리고 들어왔다.“군형, 군성.” 이 달콤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누군지 알 수 있었다.배윤아가 웃으며 거실로 들어왔고 뒤에는 최지용과 백인서가 따라왔다.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부끄러움이 살짝 묻어나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왔다.강소아과 최군형은 눈을 마주치고 서로 마음이 통하는 미소를 지었다.“정말 대단해. 너희 셋이 같이 왔네.”최군성은 방금까지의 우울함을 털어내고 활기차게 인사했다.“빨리 와서 밥 먹어. 주씨 아줌마에게 반찬 두 개 더 준비하라고 할게.” “괜찮아.”배윤아는 웃으며 말했다.“나는 이미 먹었고 저 두 사람은 아마 사랑이 담긴 소고기 국수를 먹었을 거야.” “우리는 별장 밖의 길에서 만나서 같이 왔어.”배윤아는 최씨 가문 형제들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늘은 미리 아주머니께 선물을 드리러 왔어요. 저희 아빠가 좋은 옥을 하나 구하셔서 장인에게 모란꽃 모양으로 조각하게 했어요. 부귀를 상징하는 의미로 아주머니께 드리는 선물이에요.” “제 선물은 내일 아주머니 생일 연회 때 드리겠습니다.”“정말 감사해.”최군형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두 가문의 관계에 비하면 별거 아니죠. 우리 아빠가 말씀하시기를, 선물은 가볍지만 정성은 무겁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아저씨, 아주머니께서도 기쁘게 받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그건
“소유 동생.”최지용이 웃으며 말했다.“비록 그냥 스카프 한 장일 뿐이지만 절대 저렴한 건 아니야. 그리고 방금 윤아가 말한 것처럼 선물은 가벼워도 정성은 무거운 법이야.”“물론이죠.”강소아는 백인서의 손을 잡고 배윤아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윤아야, 고마워. 얘기 들었어. 네가 작업실을 구입해서 실적이 전부 인서이에게 돌아간 거라며.”“별거 아니에요.”배윤아은 부드럽게 말했다.“이건 백인서가 직장 첫 번째 거래였잖아. 시작이 좋으니 앞으로 더 잘될 거야.”강소아는 음료를 따라 들고 배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작업실도 점점 더 잘되길 바랄게.”작업실 얘기가 나오자 배윤아는 잠시 찡그리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무슨 일이야?”“휴! 두 번째 작품 마감일이 다가오고 있는데 요즘 영감이 말라서 남녀 주인공을 어떻게 그려도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안 나와.”“출판사에서 많이 재촉해?”최군성이 그녀를 보며 물었다.“그래...” 말하는 도중에 배윤아의 전화가 울렸다.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고 꽤 오랜 시간을 통화하다가 돌아왔다. 돌아오며 거의 기절할 듯한 표정을 지었다.“괜찮아.”최지용이 웃으며 말했다.“군성에게 그림 그리게 해. 공짜로 일하게 하자.”그가 그렇게 말하자, 배윤아의 눈이 갑자기 반짝였다. 공짜 일꾼이 생겼다는 이유가 아니라, 문득 깨달은 것이 있어서였다.“야, 대머리 최.”배윤아가 갑자기 외쳤다.“거기 그냥 서 있어. 그래... 백인서도 움직이지 마.”“너희 둘이 같이 서 있는 모습, 만화 캐릭터로도 딱 맞네.”“잠깐만...”배윤아는 급히 가방을 뒤적였다.이건 그녀가 오랜 세월 동안 길러온 습관이었고 항상 가방에 스케치북과 펜을 넣고 다녔다. 그녀는 각도를 잡고 자리에 앉아 인물 스케치를 시작했다.최군성은 배윤아 뒤에 서서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배윤아는 그림 실력이 뛰어나서 잠시 후 대략적인 윤곽이 잡혔고 조금씩 다듬어 가면서 두 동양풍 만화 캐릭터가 생생하게 종이 위에 나타났다.게다가 딱
“젊음은 정말 좋구나.” “다들 애송이들이지.”최연준은 아내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그래도 우리 나이가 제일 좋지.” “정말 다행이야. 반평생을 지나오면서 내 곁엔 항상 당신이 있었으니.”강서연은 남편의 손을 잡고 가볍게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군형이랑 소유도 열매를 맺었으니, 이제 손자만 남았네.” “음... 나는 손녀를 원해.” 손자가 있으면 물론 좋지만, 최연준은 특별히 예쁘고 귀여운 손녀를 원했다.나중에 부부가 공주처럼 꾸민 손녀를 안고 거리를 걸으면, 가장 멋진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 것이라고 상상했다. “좋아, 손녀.”강서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지용이도 이제 백인서랑 잘 됐으니, 우리 군성은...” “군성이 왜?” 강서연은 말을 망설이다가 잠시 멈추고 나지막이 말했다.“요즘 군성이 연애를 하는 게 좀 답답하지 않아?” “네가 말하는 건...”사실 최연준도 약간 느끼고 있었지만, 나이가 들다 보니 나쁜 쪽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응.”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였다.“난 연우가 변한 것 같아. 연우의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로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있어. 이대로 가면 군성이 손해를 볼까 봐 걱정이야.” 최연준은 조용히 아내를 바라보았다. 강서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눈을 내리깔고 부드럽게 물었다.“여보,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걸까? 내 아이만 생각하고...” “바보야, 그건 어머니로서 당연한 본능이야.”최연준은 아내를 끌어안고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하지만 연우도 너무 험난한 삶을 살아왔잖아. 우리가 연우를 홀대하는 것도 말이 안 되지.” “하지만 연우의 불행한 과거 때문에 우리 아이를 상처 입히는 것을 그냥 봐줄 순 없어.”최연준의 눈빛이 깊어졌다.“경섭이랑 우정과 얘기를 나눠봐야겠어.” ...강서연의 생일 파티는 성대하면서도 따뜻하게 열렸다. 최연준은 그 거대한 공중 투영 화면 외에도 값
육연우는 계속해서 저쪽을 지켜보고 있었고, 마음이 복잡해졌다. 마치 마음속에 매듭이 생긴 것처럼 불편했다.육연우의 하얀 진주 핸드백은 언니가 선물한 것이었지만, 백인서는?도대체 왜 똑같은 가방을 쓰고 있는 거지?육연우는 입술을 꽉 깨물고는 손에 든 가방을 한 테이블 밑에 숨기고, 테이블보로 덮어버렸다.“연우?”최군성이 샴페인 한 잔을 건네며 그녀의 상기된 얼굴을 보고 의아해했다.“무슨 일이야?”육연우는 살짝 고개를 저었지만 얼굴빛은 좋지 않았다.“우리 엄마를 찾아가자.”최군성은 웃으며 말했다.“우리 엄마가 너를 보고 싶어 했거든! 그리고 오늘 반지도 꼈잖아. 같이 가서 보여주자.”육연우는 잠시 멍해지다가, 최군성이 육연우의 손을 잡으려는 순간 손을 홱 빼버렸다.손가락에 낀 금옥량연 반지가 조금 커서 그만 땅에 떨어질 뻔했다.“연우, 왜 그러는 거야?”최군성은 육연우의 얼굴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아무것도 아니야.” 육연우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는 말했다.“나 백인서를 봤어.”“아.”최군성은 육연우의 기분을 풀어주려 안고는 말했다.“괜찮아, 네가 백인서를 상대하고 싶지 않다면 우리가 무시하면 돼. 그래도 지용형의 여자인데, 형의 체면을 봐서라도 조금은 신경 써야지... 게다가 오늘은 우리 엄마 생신이니까, 나는...”“너 무슨 생각하는 거야.”육연우는 얼굴을 돌려 최군성을 보며 웃었다.“내가 백인서를 괴롭히겠다고 말한 적 있어?”최군성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육연우를 멍하니 쳐다보았다.“군성, 나는 그렇게 옹졸한 사람이 아니야.”육연우는 부드럽게 말했다.“나중에 만약 지용형이랑 진짜로 이어진다면, 우리도 가족이 될 텐데, 계속 싸우면서 지낼 수는 없잖아.”“연우.”최군성은 기쁨에 차서 말했다.“네가... 진짜로 생각을 바꾼 거야?”육연우는 그를 바라보았다. 눈에는 항상 복잡한 감정이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사실 내 생각이 바뀐 건 아니야.”육연우의 목소리는 작았다.“하지만 널 위해서
백인서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가방을 꽉 쥐었다. 한편, 최지용도 무언가를 눈치채고 백인서를 바라보며 복잡하고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그런 게 아니야...”“알아.”최지용은 백인서의 손을 꼭 잡고 확고한 눈빛으로 백인서를 바라보았다.“괜찮아, 내가 같이 가서 설명할게.”“설명할 필요조차 없어.”백인서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육연우가 나를 모함한 거야."“난 떳떳하니까, 경찰이 와도 내가 그런 일 했다고 절대 인정하지 않을 거야.”“인서...”최지용은 가슴이 아픈 듯 백인서를 바라보며 말했다.“하지만 지금은 일이 더 커지지 않도록 하는 게 좋아. 오늘은 우리 숙모 생신이잖아. 육연우도 군성의 약혼녀고, 만약 일이 커지면 네가 불리해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야 할 수도 있어...”“난 두렵지 않아.”“인서.”최지용은 백인서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네가 소문이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건 알아. 하지만 소아 언니가 오해하는 건 두렵지 않아?”백인서는 멍하니 서서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최지용은 씁쓸하게 웃었다.다른 말은 다 필요 없었고, 강소아만이 백인서의 약점이었다.그 자신도 남자 친구로서 자세를 낮춰 기꺼이 강소아 뒤에 서 있어야만 했다.“네 기분을 이해해.”최지용은 백인서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하지만 지금은 정면으로 부딪칠 때가 아니야. 상황을 보고 대처하자.”백인서는 그를 바라보았다. 최지용의 눈에는 자신을 향한 믿음과 확고함이 담겨 있었다.그 순간 백인서는 확신했다.온 세상이 자신을 비난하더라도, 최지용만은 언제나 자신 곁에 서 있을 사람이라는 것을...백인서는 최지용을 향해 미소 지었다. 이 순간, 인생에서 처음으로 견고한 품이 자신에게 따뜻한 항구가 되어 주는 것을 느꼈다.반지 분실 사건은 결국 강서연과 최연준을 포함한 다른 어른들에게도 알려졌다.모두가 모여서 사건의 전말을 물었다. 육연우는 최군성 옆에 기대어 고개를 숙인 채 계속 울며 강서연에게 거듭 사과했다.
“연우야, 너무 조급해하지 마.”강서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집에 이렇게 손님들이 많은데, 경찰을 부르는 건 적절하지 않아. 걱정하지 마, 아줌마가 반드시 반지를 찾아줄게.” “아줌마, 그러면 추궁하지 않으세요?” “왜?”강서연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육연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찾을 거라고 믿지 않니?” “그런 건 아니고...” 육연우는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의심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 말은 강서연의 의도에 딱 맞아떨어졌다. 강서연은 못 들은 척하면서 눈썹을 찡그리고 조용히 물었다.“의심하는 사람이 있다고? 누구니?” “아줌마, 마지막으로 저와 화장실에 간 사람이 바로 백인서였어요!” “어?” 강서연이 무슨 말을 하기 전, 최지용이 백인서의 손을 잡고 멀리서 다가왔다. 백인서의 손에는 육연우의 것과 똑같은 가방이 들려 있었다. “더 이상 의심할 필요 없어요.”백인서는 사람들 앞에 서서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백인서는 가방에서 반지를 꺼내 손가락 사이에 끼우며,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빛은 매우 담담했다. “반지는 여기 있어요. 제 가방 안에 있었어요.” 모두가 놀랐다. “하지만 이건 제가 가져간 게 아니에요!” “흐흐, 아니라고?”육연우는 냉소하며 말했다.“네 손에 있는 가방은 내 것이고, 반지도 내 것이며, 마지막으로 화장실에 간 사람도 너였잖아. 그런데 이 모든 게 너랑 상관없다고?” 백인서는 차갑게 육연우를 바라보며 눈동자에 감정이 스쳤다. “백인서.”육연우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우리 사이에 오해가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난 계속 너와 관계를 개선하려고 했어. 네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믿어. 네가 이 가방이 마음에 든다면 가져가도 돼. 하지만 반지는 돌려줄 수 있겠니? 이건 나와 군성의 약혼반지라서...” 육연우의 목소리가 떨리며 말하다 보니 목이 메기 시작했다. 최군성은 육연우의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다소 당황스러워했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