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그림 같은 장면만 보면 그녀들의 손에 들고 있는 아이스크림이 얼마나 달콤한지 알수 있을 정도였다.임우정은 눈썹을 찡그렸고 속은 은근히 불편했다.“에이, 우정 씨만 절친이고 간 쓸개 다 빼주면 뭐 해요. 정작 상대방은 좋은 걸 딴 사람이랑 나누는데! 우정 씨, 저기 강서연이랑 옆에 친구가 누군지 모르죠? 오성에 최상그룹 막내딸 최연희예요. 저번에 우리 집에서 자선 파티 열었을 때도 연희 양이랑 서연이가 서로 팔짱을 끼고 와서는 절친이라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서연이가 당최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참!”강유빈은 일부러 목소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말을 했다.“우정 씨의 절친한 친구는 이제 저렇게 높은데 연줄을 댔으니, 당신을 예전만큼 생각이나 할까요? 참 알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이죠. 씁쓸하네요.”강유빈은 임우정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속을 뒤집어 놓고 자리를 떴다.임우정의 눈길은 강서연과 최연희를 계속 쫓아갔다. 솔직히 그녀도 약간은 질투가 솟구쳤다. 아이스크림 가게 역시 그녀가 강서연한테 자주 사줬던 단골 가게였다.여자들 사이의 우정은 때로 사랑보다 더 미묘하고 더 쉽게 부서졌다. 나는 너를 절친이라고 대하는데, 너는 나를 그저 친구라고 생각할 때, 좋은 걸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즐길 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질투가 임우정의 뇌리로 퍼져갔다.그리고 임우정의 주의력은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의 최연희에게 더 많이 꽂혀 있었다....오후 회사. 강서연과 임우정은 탕비실에서 마주쳤고 강서연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반면 임우정은 그저 가볍게 미소만 지었다. 강서연은 평소처럼 커피 한 잔을 타서 건네주면서 조용히 그녀에게 물었다.“언니, 무슨 일 있어요?”임우정은 빙빙 돌려서 말하는 사람이 아닌지라, 점심에 있었던 일을 그녀에게 직접 말해줬다.“우리를 봤다고요? 봤으면 부르지, 왜 안 불렀어요? 원래 같이 가려고 언니 부르려고 했는데, 자리에 없더라고요.”강서연은 눈웃음을 보이면서 순진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럼 됐어. 설명 안 해줘
임우정 그녀 역시도 본인이 생각이 많은 거면 좋겠다. 하지만 한 번 보면 기억하는 습관은 학교 때부터 익힌 자기 기술이고, 또 얼굴 인식 장애가 있는 것도 아니라 마스크를 썼다 한들 눈매는 변할 수 없기에 틀림없었다.임우정은 생각할수록 찝찝하여 목소리를 낮추며 강서연한테 당부했다.“아무튼, 서연이 너 잘 눈여겨봐 둬. 최상의 막내딸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강서연은 눈을 크게 뜨고 놀라움을 표현했다.“내 말은... 사람을 대할 때 경계심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조심하라고!”“그렇긴 한데요, 언니.”강서연은 한참 머뭇머뭇하다가 말을 이었다.“만약 가짜 최상의 막내딸이라면, 나한테 무슨 목적이 있다고 접근했을까요? 게다가 지난번 자선 파티는 특별히 최연희 양을 위해 마련되었던 거고, 유빈 언니가 직접 신원을 밝혀줬는데. 나를 속인다고 해도 강진 사람들을 갖고 놀 수야 없지 않을까요?”“너의 그 유빈 언니의 정보력을 아직도 그대로 믿냐?”임우정은 실소하며 말했다.“유빈 씨가 사람 잘못 본 게 전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사기꾼한테 당했지.”강서연은 입술을 깨물더니 말이 없었다.“서연아, 난 정말 널 위해 하는 소리야.”임우정은 성격이 시원해서 말도 숨김이 없었다.“서연이 너는 사람이 착하고, 진실하고 정말 다 좋은데, 융통성이 없어. 아무리 최연희 그 사람이 너를 구해 줬다고 해서 반드시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간 쓸개 다 빼주지 않아도 된다고.”임우정은 잠시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너랑 현수 씨와의 관계에서도 그래. 남편이긴 하지만 마음을 통째로 남김없이 다 주지는 마.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니까, 사람에게 상처받지 않으려면 너부터 잘 챙겨. 만에 하나 결혼에 있어 문제라도 생기면 너만 뼈도 못 추릴 수 있어. 그때 가서 혼자서도 잘 버티려면 그래야 해.”“우정 언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강서연은 눈을 번쩍 치켜올려 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송곳같이 느껴져 임우정의 얼굴이 빨개질 정
임우정은 힘겹게 발을 움직여 걸어 봤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고통이 하늘을 찔렀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이미 오후였고 산은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등산 경험이 풍부하다고 자신감에 넘친 그녀가 하필이면 오늘 사람이 안 다니는 외진 길을 타서 이 사달이 났다.꼴 좋게 이대로 산에 갇히게 생겼다. 그녀는 서둘러 배낭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고 역시나 신호는 잡히질 않았다.다시 용기를 내 움직임을 시도했지만,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붙잡아도 일어서기가 힘들었다.임우정은 점점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사람의 그림자는커녕 귀신조차 안 보이는 이 외진 곳에서 해가 지면서 어렴풋이 야생동물의 울음소리도 들려왔다.그녀는 머리부터 신경이 곤두섰고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핸드폰을 껐다 켰다여러 번, 신호는 도통 잡히지 않았고 유일하게 구조요청을 할 수 있는 핸드폰마저도 배터리가 다 되어갔다.임우정은 다리를 끌며 땅바닥에서 포복으로 움직여 나갔다. 최대한 야생동물의 이목을 끌지 않도록 최대한 소리를 작게 내면서. 하지만 방향도 분간이 안 되는 이곳에서 혼자 힘으로 산을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았고 그녀는 절망을 금할 수 없었다.바로 그때, 가쁜 발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녀는 급히 숨죽였고, 소름 돋을 정도로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발걸음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그녀 앞에서 멈췄다. 그녀는 겁에 질렸고 곧이어 누군가의 손이 그녀 앞에 놓였다. 가늘고 굴곡이 분명한 흰 피부에 이쁘장한 손이었다.임우정은 어안이 벙벙해서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고, 온화한 눈빛과 마주했다.“당신?”그녀는 깜짝 놀라 말을 더듬었다.“심... 심 의사 양반?”“왜요? 너무 의외라 반갑죠?”신석훈은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 옆에 앉더니 그녀의 다친 발을 만졌다.임우정은 낮게 외쳤다“아! 아파... 아파요!”“힘 풀어요.”신석훈은 몇 번 만져보더니 감을 잡았다.“뼈마디가 어긋났네요. 뼈가 부서지지는 않았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지금 제자리로 돌려놓을게요, 바로 좋아질
임우정의 마음은 쿵 하고 내려앉은 듯 먹먹했다.이런 이상하지만 멈추려야 멈출 수 없는 감정이 그때 그 사람과 헤어진 뒤로 한 번도 없었다.임우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도 모르게 신석훈을 밀쳐냈지만, 그녀의 손은 그에게 더욱 꽉 잡혔다.“당신...”신석훈은 무심한 듯 조용히 설명했다.“아직 상처가 있어서 걷기가 불편할 거예요. 그래도 고집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임우정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가늘고 흰 남자의 손을 보았다. 그 손은 수술칼을 사용하던 손이어서 깨끗하고 아름다웠다.게다가 신석훈이란 사람은 점잖고 잘생기고 매너까지 몸에 배어있었다.오늘 이 사람이 신처럼 나타나 그녀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산속에 갇혀 아직도 절망 속에 있을 게 뻔했다.생각에 잠겼던 임우정은 발목에서 통증이 느껴졌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몸을 가누지 못하고 땅에 넘어질 뻔했다.“조심해요!”신석훈이 재빨리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아 부축했다.그는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찾아 그 위의 먼지를 털어내고 임우정을 살며시 앉혔다.신석훈은 그녀의 양말을 벗기고 자세히 관찰했다.“좀 더 부은 것 같네. 내려가면 우리 병원에 먼저 가서 치료받는 게 좋겠어요.”“네, 감사해요.”임우정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고 갑자기 뭐가 떠올랐는지 그에게 물었다.“그런데 저를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신석훈은 손으로 얼굴을 긁적이더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산기슭에 가까워졌는지 신호가 잡혔다. 임우정은 살짝 의아했다가 그의 핸드폰의 인스타그램 맨 위에 그녀가 산을 오르기 전에 올렸던 사진이 떠 있는 게 보였다.“여기서 봤어요. 그리고 사진 밑에 위치가 있길래 따라와 봤죠.”신석훈은 조용히 말했다.“따라 왔... 따라와서 뭐 하게요?”“여자 혼자서 이런 외진 산을 타는 게 안전하지 못 해요.”임우정은 살짝 마음이 설렜다.신석훈은 그녀를 향해 웃고 나서 몸을 낮춰 등을 내밀었다.“업혀요!”“왜요?”“길이 좋지 않으니까, 제가 업을게요.”임우정은 한순간 그 사람에게 마
“서연아. 이건...”“식기 전에 빨리 먹어요.”강서연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라면을 너무 많이 먹으면 몸에 좋지 않다고 전에 몇 번 말해줬는데.”임우정은 코끝이 찡했고 눈시울이 붉어졌다.강서연은 그녀를 쭉 지켜보다가 더 참지 못하고 히죽히죽 웃어버렸다.“내가 처음으로 도시락을 해준 것도 아닌데, 이게 눈물이 나올 상황이에요?”임우정은 입안의 밥을 꿀꺽 넘기고 붉어진 눈으로 강서연을 바라보며 말을 할 듯 말 듯 하다가 끝내는 세 글자를 뱉었다.“미안해.”강서연은 마음이 찌릿했다.임우정이 자존심이 얼마나 센 사람인지, 누구랑 싸워도 지지 않을 뿐더러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그녀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임우정이 그녀를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사실 그날은 그냥 친구 사이에 흔한 말다툼이었을 뿐, 이렇게 심각할 필요까지 없었다.강서연은 웃으며 임우정의 손을 잡고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형제끼리도 싸우고 그러는데 우리가 길게 싸울 필요가 있겠어요?”“그래!”임우정도 시름을 놓고 웃었다.“서연아, 그래도 네가 만든 돈가스가 제일 맛있어!”“그러니까 라면은 적게 먹고 내가 도시락 쌀 때 언니 것도 같이 싸 올게요.”“헤헤...”임우정은 고운 치아를 다 내보이며 웃었다. 그녀는 몇 숟가락 더 들고 나서 손을 들어 맹세하였다. 얻어먹는 자는 감사할 줄 알았다.“서연아, 내가 다시는 현수 씨 나쁜 말을 하지 않을게. 맹세할게! 이제부터 현수 씨는 나의 제부로 모실게. 모든 일에서 두 사람의 편을 들게!”강서연은 그녀의 모습이 기가 차고 웃겼다. 그녀를 한참 지켜보다가 박장대소를 하였다.“그런데 말이 나와서 말인데. 왜 내 남편이 그렇게 눈에 거슬렸어요?”“그런 게 아니라...”임우정은 머쓱해서 웃었다.“그냥 난 네가 아까워서, 너의 짝에 대한 기대가 너무 높았나 봐. 너는 더 좋은 남자를 만날 거라 믿었어!”“현수 씨, 좋아요.”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래그래, 너만 좋으면
구현수는 자상한 미소를 띠고 품 안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현수 씨.”강서연은 귀엽게 그의 품 안에서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아니면 우리가 좀 도와줄까요?”“도와준다고?”구현수은 이런 일은 경험이 없어서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몰라 되물었고 그녀는 진지하게 답했다.“신 의사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도 함께 하지 못했을 거잖아요. 우리도 그분께 감사해야 해요! 이번에 우리가 도와 우정 언니와 잘 되게 하면 너무 완벽할 것 같아요.”구현수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고 눈빛은 어둡고 깊었다.그는 그녀보다 더 많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자신이 이런 일에 아무 생각 없이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꺼렸다. 게다가 임우정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고 또 신석훈은 그에게 있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기에 더욱 신중하게 되었다.하지만 강서연은 이미 신나서 오작교를 하고 싶어 했고 구현수는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강서연은 고양이처럼 귀엽게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댔다.“현수 씨. 나 좋은 수가 떠올랐어요. 우리 넷이 같이 여행가요. 저랑 우정 언니도 마침 휴가가 있고, 놀러 가고 싶었던 곳도 있어요.”그녀는 신나서 핸드폰을 꺼내 보여주었다.아주 아름다운 온천 민박이었다. 오성의 외각에 위치한 명황산의 최상 빌라와 마주하고 있는 곳이었다. 강서연이 진작부터 가보고 싶어서 소장했던 곳이라 아름다운 풍경 사진을 보니 두 눈에서 빛이 어렸다.“왜 여기야?”구현수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이곳을 좋아해?”“여기 엄청나게 이름 있어요!”강서연은 흥분해서 설명했다.“검색해 보면 온천 민박 중에 여기가 평점이 제일 높아요. 주말은 육 개월 전부터 예약해야 한대요. 평일에 휴가 내서 가면 사람들로 붐비지는 않을 거예요. 조용하고 놀기도 좋고.”“당신은 계획이 다 있었구나.”구현수는 가볍게 웃었다. 보아하니 그녀가 여기를 매우 좋아하는 것 같았다. 만에 하나 그녀가 이 민박의 진짜 주인이 최연준인 걸 알게 되면 그래도 좋아할까?강서연은 그의 얼굴색이 이상한 걸 보았
“같이 여행하는 거 현수 씨 아이디어 아니죠?”신석훈은 그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맞아요. 강서연 아이디어예요.”구현수는 낮게 말했다.“서연이가 석훈 씨와 우정 씨가 잘되기를 바라요. 그래서 같이 여행 가자고 제안했죠. 둘이 얘기를 많이 나눴으면 해서.”“서연 씨가 애썼네요.”신석훈은 웃으며 주위를 살폈다.“이곳 정말 좋네요. 그런데 좀 이상해요.”“왜요?”“내가 찾아봤는데 민박집이 엄청 유명하던데. 오기 전에 사람들로 붐빌 거로 생각했는데 우리밖에 없네요? 주말 아니라도 너무 조용하지 않아요?”구현수는 가볍게 기침을 두 번 했다. 오기 전에 그는 이곳을 비워두게 했고 당연히 사람이 보일 리가 없었다.“하하, 보아하니 여기 경영 제대로 못 해서 망하는 거 아닐까 싶네요.”말문이 막힌 구현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뒤집었다.“사람이 많은 게 좋아요?”신석훈는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사람은 그래도 떠들썩한 데가 좋은가 봐요. 하하. 밥 먹으러 가도 가게가 사람이 적으면 나는 절대로 안 들어가요, 핫한 데 가서 줄을 설지라도.”구현수는 어이없어하며 대답했다.“칠성급 호텔도 사람이 적은데, 아무나 먹을 수가 없잖아요?”“허허, 이 사람이 ...”신석훈은 말문이 막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앞전에 밤낮없이 보살펴 목숨을 구해줬었건만 사람 민망하게 말이다.“둘이 뒤에서 뭐 하기에 그렇게 천천히 와요?”앞에서 강서연의 달달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구현수가 바라보니 강서연이 그를 향해 힘차게 손 흔들고 있었다. 강서연과 임우정이 서 있는데 뭔가 다른 사람이 더 있는 것 같았다.구현수는 눈빛이 바로 변하더니 경각을 높였다.‘이미 이곳을 통으로 빌려서 사람이 들어왔을 리가 없는데 이게 웬일이지?’“현수 씨, 빨리 와요!”강서연은 그의 팔을 붙잡았다.“여기 할머니가 손금을 봐준대요!”구현수는 흠칫했다.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절이 있기는 했다. 일부 스님이나 도사들이 여기를 지나다니는 것은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 말에 강서연의 머리가 하얘졌다.당혹스러워하던 그녀가 할머니한테 물으려다 곁의 구현수를 보고 깜짝 놀랐다.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 있고 눈빛은 더없이 매서워서 금방이라도 폭풍우가 몰아칠 것만 같았다.강서연은 그와 깍지 끼면서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할머니도 무슨 얘기를 하시는지 인지 못 하시는 나이라...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예상 밖으로 할머니의 귀가 밝아 듣고는 헤벌쭉 웃었다.“아가씨가 마음씨가 참 좋아, 좋은 사람은 좋은 일이 따를 거야.”“할머니 고마워요.”강서연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저희 남편이 좀 과묵한 데다 부리부리한 외모 때문에 오해를 자주 받지만 그래도 더없이 자상해요.”“허, 아가씨 궁합을 보고 싶은 게지?”강서연은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할머니는 손금을 힐끗 보고는 천천히 주머니에서 빨간 끈 두 줄을 꺼냈다.능수능란한 손재간으로 벼 이삭 같은 매듭에 빚는 동심결마다 정갈한 방울까지 더해 맑고 쟁쟁한 소리가 났다.“이 팔찌를 손목에 착용하거라.”할머니는 한자 한자 타이르듯 말했다.“방울이 울리면 아무리 먼 곳에 떨어져 있어도 서로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야.”“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미간을 찌푸린 신석훈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런 용한 물건이면 휴대 전화도 필요 없겠네요!”어리둥절해 있던 강서연은 돌아서 환한 얼굴로 할머니를 향했다.“할머니, 남편이랑 저는 오래오래 같이 있을 거라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너희 언젠가는 떨어질 거야.”순간 하얗게 질려버린 강서연은 구현수의 손을 꼭 잡았다.“하지만...”할머니는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언젠가는 둘이 꼭 행복한 날이 올 거야.”강서연은 그제야 미간이 풀렸고 작은 보조개가 얼굴에 달려있었다.구현수는 심각한 표정으로 실눈을 떠서 쳐다보고는 그녀를 끌어당겨 자리를 떴다.“허! 이 할머니가 정말!”신석훈이 끼어들어 말했다.“나이 들어서 어떻게 되신 거 아니야? 그래도 마지막 말은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