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진명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리면서 빌었다.배경원은 생각나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이라 살인 같은 것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배씨 가문의 세력도 어마어마하여 설령 배경원이 그를 죽인다고 해도 실종자가 한 명 더 늘어날 뿐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리소문없이 묻힐 것이다.그리고 최진혁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때 가서 입 싹 닫고 되레 모든 죄를 소진명에게 뒤집어씌울 수도 있다. 어쨌거나 최진혁이 최씨 가문 회장님 앞에서는 좋은 작은 삼촌 이미지를 유지해야 하니 말이다.소진명은 이를 꽉 깨물고 힘껏 머리를 조아렸다. 머리를 조아리면서 바닥에 부딪친 바람에 피부가 벗겨지면서 피가 흘러내렸다.“도련님, 제발 살려주세요! 도련님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무슨 일이든 다 하겠습니다!”“그럼. 소 대표의 어르신은 어떡해?”배경원이 다리를 꼬고 가운데 앉았다.“약속할게요.”소진명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최진혁한테는 절대 아무 얘기도 안 하겠습니다!”“흥, 그 약속을 내가 어떻게 믿어?”배경원이 비수와 총을 옆으로 던졌다.“그렇지만 진짜로 내가 시키는 대로 한다면 목숨은 살려줄 수 있어.”“분부하십시오, 도련님.”“강유빈이라는 사람 알지?”배경원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강유빈이 형수님을 지하실에 가둔 것도 모자라 쥐까지 넣었다는 사실을 형이 알고도 가만히 있을 리가 있겠는가?하여 소진명더러 강유빈을 처리하게 할 생각이었다. 악인은 자기보다 더 악한 악인으로부터 들볶인다고 서로 물고 뜯게 하면 그야말로 일석이조일 것이다.소진명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슬쩍 물었다.“저더러 강유빈을 처리하라는 말씀입니까?”“소 대표, 앞으로 나랑 형이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절대 섭섭지 않게 해줄게. 하지만 이것만은 명심해. 이 사실을 최진혁한테 조금이라도 흘렸다간... 흥, 셋째 형님이 소 대표를 풀어줬다는 건 다시 잡아서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이야. 알겠어?”...며칠 후, 강
“강유빈!” “그만, 그만!”주원효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고 강서연을 가리키며 말했다.“그만 가세요. 오늘 저는 강유빈 씨 하고만 계약 얘기를 나눌 거예요.”강유빈은 예쁘게 웃어 보이며 주원효와 같이 미팅 실로 움직였고, 그 와중에 잊지 않고 강서연에게 경멸에 찬 눈빛을 아낌없이 보냈다.그때는 강서연도 너무 마음이 상하고 억울했지만, 널브러진 서류를 하나하나 주워 담고 절벅거리는 발로 그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그러고 나서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그 주원효가 사기꾼이었다는 사실!강유빈도 그와 계약을 다 하고 나서 주원효의 회사가 겉만 번지르르한, 속은 텅 빈 페이퍼 컴퍼니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강유빈은 강명원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심에 계약을 촉구했고 아예 계약금 일부까지 입금했다고 했다. 그 결정 하나 때문에 강진이 수십억을 허공에 날리게 된 셈이다.그 얘기를 전해 들은 강서연은 한참이나 정신을 못차렸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은 처음이라.그녀는 믿기 힘든 그 얘기를 구현수에게 말해 주었다.“사실 나 그때 한 번 더 설득하고 쟁취하려고도 했었어요. 주원효 그 사람이 꺼내든 조건이 너무 좋은 조건이었어요. 거의 거저먹는 거였거든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약간은 의심해 볼 만도 했어요.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 갑자기 들이닥친 행운은 불행의 씨앗일지도 모른다고 어른들이 그랬는데...”구현수는 옅은 미소를 띠며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 앞으로 당신도 공짜라면 한 번 더 고민하고 주의를 기울여서 결정해야 해. 하늘에서 떡이 떨어지진 않으니까.”“그러고 보면, 이번 일은 유빈 언니가 내 앞을 가로막지 않았으면 내가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어요. 아니면 그 수억을 날려 먹은 게 나였을 수도 있는데.”강서연도 은근히 속이 시원한 듯 해 보였다.‘바보, 그게 당신이 될 수가 없지.'구현수의 얼굴에 미소가 더 깊어졌다.‘강유빈이 타깃인 계획적인 일에, 다른 사람이 당할 일은 없지.’다행히 위험한 상황
“연준 형, 형? 형! 듣고 있어요?”배경원은 연속 몇 번이고 구현수를 불렀고, 구현수는 정신을 놓고 있다가 가벼운 기침으로 대응했다.배경원은 그런 구현수를 놀려대며 말했다.“형님, 나는요, ‘혼이 빠졌다’ 는 게 뭔지 지금 알았잖아요! 전화기 너머로도 형의 시선이 우리 형수한테서 떨어지지 않는 게 느껴지네요.”구현수는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배경원, 요즘 몸이 쑤시면 말해, 그렇게 돌려서 말하지 말고.”배경원은 헛웃음을 지으며 감히 더 이상 뭐라고 하지 못하고 급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이튿날, 임우정은 강진 빌딩의 야외 레스토랑에서 강유빈을 만났다.“유빈 씨.”임우정은 웃으며 계약 해지 협의서를 꺼내 들었다.“사전에 비서를 통해서 연락했었죠. 여기 유빈 씨 사인만 비었어요. 하시죠.”강유빈은 원래도 안색이 안 좋았는데, 지금은 거의 일그러뜨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그녀가 가짜 싱가포르 인간에게 수십억을 사기당한 뒤로, 강진은 업계 비웃음거리가 되어 있었다.강명원은 어디를 가도 고개를 들지 못했고, 그 화를 강유빈한테 풀었다. 이사회에서 호되게 꾸짖는 것도 모자라 그녀가 맡고 있던 여러 수익 나는 사업도 다시 회수했다. 집안에서도 강유빈은 전전긍긍하며 조심스럽게 아버지의 안색을 살피며 살았다.이젠 호정 무역도 흐르는 형세에 따라 다른 회사들처럼 이번 기회에 강진과 관계를 청산하려고 계약 파기를 하러 왔던 거였다.강유빈은 이를 악물고 웃는 얼굴의 임우정을 보며 사인펜을 움켜쥐고 어렵게 서명했다.임우정은 체크해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감사해요.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삼일 안에 귀사에서 계약 해지서를 받아 보실 수 있겠고요, 유빈 씨 협조해 줘서 고마워요. 식사는 제가 살게요!”강유빈은 팔짱을 끼고 앉아서 사양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나 아직 밥을 얻어먹을 정도는 아니니깐요!”“이렇게 도와주는데 당연히 제가 사야죠.”임우정은 자진해서 계산하고 돌아와서 강유빈을 향해 동방예의지국의 미소를 보이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강유빈
그 그림 같은 장면만 보면 그녀들의 손에 들고 있는 아이스크림이 얼마나 달콤한지 알수 있을 정도였다.임우정은 눈썹을 찡그렸고 속은 은근히 불편했다.“에이, 우정 씨만 절친이고 간 쓸개 다 빼주면 뭐 해요. 정작 상대방은 좋은 걸 딴 사람이랑 나누는데! 우정 씨, 저기 강서연이랑 옆에 친구가 누군지 모르죠? 오성에 최상그룹 막내딸 최연희예요. 저번에 우리 집에서 자선 파티 열었을 때도 연희 양이랑 서연이가 서로 팔짱을 끼고 와서는 절친이라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서연이가 당최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참!”강유빈은 일부러 목소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말을 했다.“우정 씨의 절친한 친구는 이제 저렇게 높은데 연줄을 댔으니, 당신을 예전만큼 생각이나 할까요? 참 알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이죠. 씁쓸하네요.”강유빈은 임우정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속을 뒤집어 놓고 자리를 떴다.임우정의 눈길은 강서연과 최연희를 계속 쫓아갔다. 솔직히 그녀도 약간은 질투가 솟구쳤다. 아이스크림 가게 역시 그녀가 강서연한테 자주 사줬던 단골 가게였다.여자들 사이의 우정은 때로 사랑보다 더 미묘하고 더 쉽게 부서졌다. 나는 너를 절친이라고 대하는데, 너는 나를 그저 친구라고 생각할 때, 좋은 걸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즐길 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질투가 임우정의 뇌리로 퍼져갔다.그리고 임우정의 주의력은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의 최연희에게 더 많이 꽂혀 있었다....오후 회사. 강서연과 임우정은 탕비실에서 마주쳤고 강서연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반면 임우정은 그저 가볍게 미소만 지었다. 강서연은 평소처럼 커피 한 잔을 타서 건네주면서 조용히 그녀에게 물었다.“언니, 무슨 일 있어요?”임우정은 빙빙 돌려서 말하는 사람이 아닌지라, 점심에 있었던 일을 그녀에게 직접 말해줬다.“우리를 봤다고요? 봤으면 부르지, 왜 안 불렀어요? 원래 같이 가려고 언니 부르려고 했는데, 자리에 없더라고요.”강서연은 눈웃음을 보이면서 순진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럼 됐어. 설명 안 해줘
임우정 그녀 역시도 본인이 생각이 많은 거면 좋겠다. 하지만 한 번 보면 기억하는 습관은 학교 때부터 익힌 자기 기술이고, 또 얼굴 인식 장애가 있는 것도 아니라 마스크를 썼다 한들 눈매는 변할 수 없기에 틀림없었다.임우정은 생각할수록 찝찝하여 목소리를 낮추며 강서연한테 당부했다.“아무튼, 서연이 너 잘 눈여겨봐 둬. 최상의 막내딸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강서연은 눈을 크게 뜨고 놀라움을 표현했다.“내 말은... 사람을 대할 때 경계심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조심하라고!”“그렇긴 한데요, 언니.”강서연은 한참 머뭇머뭇하다가 말을 이었다.“만약 가짜 최상의 막내딸이라면, 나한테 무슨 목적이 있다고 접근했을까요? 게다가 지난번 자선 파티는 특별히 최연희 양을 위해 마련되었던 거고, 유빈 언니가 직접 신원을 밝혀줬는데. 나를 속인다고 해도 강진 사람들을 갖고 놀 수야 없지 않을까요?”“너의 그 유빈 언니의 정보력을 아직도 그대로 믿냐?”임우정은 실소하며 말했다.“유빈 씨가 사람 잘못 본 게 전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사기꾼한테 당했지.”강서연은 입술을 깨물더니 말이 없었다.“서연아, 난 정말 널 위해 하는 소리야.”임우정은 성격이 시원해서 말도 숨김이 없었다.“서연이 너는 사람이 착하고, 진실하고 정말 다 좋은데, 융통성이 없어. 아무리 최연희 그 사람이 너를 구해 줬다고 해서 반드시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간 쓸개 다 빼주지 않아도 된다고.”임우정은 잠시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너랑 현수 씨와의 관계에서도 그래. 남편이긴 하지만 마음을 통째로 남김없이 다 주지는 마.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니까, 사람에게 상처받지 않으려면 너부터 잘 챙겨. 만에 하나 결혼에 있어 문제라도 생기면 너만 뼈도 못 추릴 수 있어. 그때 가서 혼자서도 잘 버티려면 그래야 해.”“우정 언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강서연은 눈을 번쩍 치켜올려 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송곳같이 느껴져 임우정의 얼굴이 빨개질 정
임우정은 힘겹게 발을 움직여 걸어 봤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고통이 하늘을 찔렀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이미 오후였고 산은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등산 경험이 풍부하다고 자신감에 넘친 그녀가 하필이면 오늘 사람이 안 다니는 외진 길을 타서 이 사달이 났다.꼴 좋게 이대로 산에 갇히게 생겼다. 그녀는 서둘러 배낭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고 역시나 신호는 잡히질 않았다.다시 용기를 내 움직임을 시도했지만,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붙잡아도 일어서기가 힘들었다.임우정은 점점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사람의 그림자는커녕 귀신조차 안 보이는 이 외진 곳에서 해가 지면서 어렴풋이 야생동물의 울음소리도 들려왔다.그녀는 머리부터 신경이 곤두섰고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핸드폰을 껐다 켰다여러 번, 신호는 도통 잡히지 않았고 유일하게 구조요청을 할 수 있는 핸드폰마저도 배터리가 다 되어갔다.임우정은 다리를 끌며 땅바닥에서 포복으로 움직여 나갔다. 최대한 야생동물의 이목을 끌지 않도록 최대한 소리를 작게 내면서. 하지만 방향도 분간이 안 되는 이곳에서 혼자 힘으로 산을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았고 그녀는 절망을 금할 수 없었다.바로 그때, 가쁜 발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녀는 급히 숨죽였고, 소름 돋을 정도로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발걸음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그녀 앞에서 멈췄다. 그녀는 겁에 질렸고 곧이어 누군가의 손이 그녀 앞에 놓였다. 가늘고 굴곡이 분명한 흰 피부에 이쁘장한 손이었다.임우정은 어안이 벙벙해서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고, 온화한 눈빛과 마주했다.“당신?”그녀는 깜짝 놀라 말을 더듬었다.“심... 심 의사 양반?”“왜요? 너무 의외라 반갑죠?”신석훈은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 옆에 앉더니 그녀의 다친 발을 만졌다.임우정은 낮게 외쳤다“아! 아파... 아파요!”“힘 풀어요.”신석훈은 몇 번 만져보더니 감을 잡았다.“뼈마디가 어긋났네요. 뼈가 부서지지는 않았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지금 제자리로 돌려놓을게요, 바로 좋아질
임우정의 마음은 쿵 하고 내려앉은 듯 먹먹했다.이런 이상하지만 멈추려야 멈출 수 없는 감정이 그때 그 사람과 헤어진 뒤로 한 번도 없었다.임우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도 모르게 신석훈을 밀쳐냈지만, 그녀의 손은 그에게 더욱 꽉 잡혔다.“당신...”신석훈은 무심한 듯 조용히 설명했다.“아직 상처가 있어서 걷기가 불편할 거예요. 그래도 고집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임우정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가늘고 흰 남자의 손을 보았다. 그 손은 수술칼을 사용하던 손이어서 깨끗하고 아름다웠다.게다가 신석훈이란 사람은 점잖고 잘생기고 매너까지 몸에 배어있었다.오늘 이 사람이 신처럼 나타나 그녀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산속에 갇혀 아직도 절망 속에 있을 게 뻔했다.생각에 잠겼던 임우정은 발목에서 통증이 느껴졌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몸을 가누지 못하고 땅에 넘어질 뻔했다.“조심해요!”신석훈이 재빨리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아 부축했다.그는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찾아 그 위의 먼지를 털어내고 임우정을 살며시 앉혔다.신석훈은 그녀의 양말을 벗기고 자세히 관찰했다.“좀 더 부은 것 같네. 내려가면 우리 병원에 먼저 가서 치료받는 게 좋겠어요.”“네, 감사해요.”임우정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고 갑자기 뭐가 떠올랐는지 그에게 물었다.“그런데 저를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신석훈은 손으로 얼굴을 긁적이더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산기슭에 가까워졌는지 신호가 잡혔다. 임우정은 살짝 의아했다가 그의 핸드폰의 인스타그램 맨 위에 그녀가 산을 오르기 전에 올렸던 사진이 떠 있는 게 보였다.“여기서 봤어요. 그리고 사진 밑에 위치가 있길래 따라와 봤죠.”신석훈은 조용히 말했다.“따라 왔... 따라와서 뭐 하게요?”“여자 혼자서 이런 외진 산을 타는 게 안전하지 못 해요.”임우정은 살짝 마음이 설렜다.신석훈은 그녀를 향해 웃고 나서 몸을 낮춰 등을 내밀었다.“업혀요!”“왜요?”“길이 좋지 않으니까, 제가 업을게요.”임우정은 한순간 그 사람에게 마
“서연아. 이건...”“식기 전에 빨리 먹어요.”강서연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라면을 너무 많이 먹으면 몸에 좋지 않다고 전에 몇 번 말해줬는데.”임우정은 코끝이 찡했고 눈시울이 붉어졌다.강서연은 그녀를 쭉 지켜보다가 더 참지 못하고 히죽히죽 웃어버렸다.“내가 처음으로 도시락을 해준 것도 아닌데, 이게 눈물이 나올 상황이에요?”임우정은 입안의 밥을 꿀꺽 넘기고 붉어진 눈으로 강서연을 바라보며 말을 할 듯 말 듯 하다가 끝내는 세 글자를 뱉었다.“미안해.”강서연은 마음이 찌릿했다.임우정이 자존심이 얼마나 센 사람인지, 누구랑 싸워도 지지 않을 뿐더러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그녀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임우정이 그녀를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사실 그날은 그냥 친구 사이에 흔한 말다툼이었을 뿐, 이렇게 심각할 필요까지 없었다.강서연은 웃으며 임우정의 손을 잡고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형제끼리도 싸우고 그러는데 우리가 길게 싸울 필요가 있겠어요?”“그래!”임우정도 시름을 놓고 웃었다.“서연아, 그래도 네가 만든 돈가스가 제일 맛있어!”“그러니까 라면은 적게 먹고 내가 도시락 쌀 때 언니 것도 같이 싸 올게요.”“헤헤...”임우정은 고운 치아를 다 내보이며 웃었다. 그녀는 몇 숟가락 더 들고 나서 손을 들어 맹세하였다. 얻어먹는 자는 감사할 줄 알았다.“서연아, 내가 다시는 현수 씨 나쁜 말을 하지 않을게. 맹세할게! 이제부터 현수 씨는 나의 제부로 모실게. 모든 일에서 두 사람의 편을 들게!”강서연은 그녀의 모습이 기가 차고 웃겼다. 그녀를 한참 지켜보다가 박장대소를 하였다.“그런데 말이 나와서 말인데. 왜 내 남편이 그렇게 눈에 거슬렸어요?”“그런 게 아니라...”임우정은 머쓱해서 웃었다.“그냥 난 네가 아까워서, 너의 짝에 대한 기대가 너무 높았나 봐. 너는 더 좋은 남자를 만날 거라 믿었어!”“현수 씨, 좋아요.”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래그래, 너만 좋으면
“그... 괜찮아!”정승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말했다. 정승우는 이곳에서 권온유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 이때, 공장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곧바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정승우는 재빨리 권온유에게 눈짓했고 권온유도 알아채고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없는 척했다.정승우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았다.“이 아이인가요?”영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맞아.”정대명은 영미를 흘깃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영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희미한 빛 속에 있는 아이를 살펴보더니, 곧 얼굴빛이 확 변했다.“이 아이... 혹시 권씨 집안의 막내딸 아니에요?”정대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훔쳐 올 때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리가 없었다.“정대명 씨.”영미가 차갑게 웃으며 돌아보았다.“제가 최씨 가문 집안 아이를 훔쳐 오라고 했지, 권씨 집안 아이를 훔치라고 했나요? 이러고도 저를 속이지 않았다고요?”“그게...”정대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영미 아가씨, 어차피 목적은 백인서를 곤경에 빠뜨리는 거잖아? 그러니 누구를 훔쳐 오든 상관없지 않아? 아이를 훔치기만 하면 유괴범이 되는 거니까.”이 말은 영미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정승우의 귀에도 또렷이 들어왔다.“좋아요.”영미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는 잘 지키고 있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한편, 권씨 집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권욱은 조순영을 탓하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고, 조순영은 오열하며 남편을 원망했다. 조순영은 권욱이 바깥에서 여자와 부적절하게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헛소리하지 마!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 잘 알잖아. 결혼 생활 내내 너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정말 떳떳하게 행동했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만 가만두지 않는 건데?”며칠 전까지만
권온유의 질문에 정승우는 당황했다.권온유는 커다란 눈망울로 정승우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슈퍼맨 같은 오빠가, 이제는 먹을 것 하나 구하지 못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정승우는 어색하게 입가를 씰룩이며 권온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갔다.“너, 정말 배고파?”“네!”권온유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작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원래는 엄마랑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 했어요. 엄마가 특별히 고등어조림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엉엉... 엉엉...”“울지 마, 울지 마! 그냥 생선 하나 가지고...”“나 배고파!”정승우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아이와 대화하는 건 그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겨우 권온유를 달래고 나서 정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팔을 걷어붙이며 권온유에게 내밀었다.“너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고프면, 여기 한번 물어볼래?”권온유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정승우를 바라보았다.“우리 집은 가난해서 늘 먹을 게 부족했거든. 그래서 어릴 때 너무 배가 고프면 이렇게 배고픔을 달랠 만한 걸 물곤 했어.”권온유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배고픔을 달랠 만한 것'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정승우는 웃으며 계속 설명했다.“예를 들어 쌀통 같은 거야. 한때 쌀이 들어 있던 쌀통은 비어 있어도 쌀 냄새가 남아 있거든. 그래서 쌀통 가장자리를 살짝 물면서 하얀 쌀밥을 먹는 상상하는 거야. 그러면 배가 덜 고파져.”“그리고 이웃집에서 밥하는 냄새를 맡으며 그 밥을 먹는 상상을 하는 거야. 그러면 그렇게 배고프지 않더라고.”권온유는 정승우의 이야기에 넋을 잃고 입을 벌린 채 있었다. 정승우는 웃음을 터뜨렸다.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한때 정대명이 도박과 술에 빠져 정승우를 굶겼던 시절은 그야말로 비참한 순간들이었다.잠시 후, 권온유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 정승우는 속으로 ‘큰일이다'라고 생
영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최지용을 지켜보았다.최지용은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구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영미는 바로 뒤를 따라갔고 최지용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찾았습니까?”“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만약 납치범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분명 전화를 걸어올 겁니다!”영미의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납치범이라니? 대체 뭘 찾는다는 거지?백인서와 통화한 걸까?그때, 최군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지용이 형, 여기서 뭐 해요?”영미는 얼른 몸을 숨겼고 최군성은 최지용에게 다가가 최지용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형이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서 와서 먹고 즐기자고요!”최지용은 최군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영미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영미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억지 미소로 인사했다.“지용 오빠...”“어, 영미?”최군성도 배윤아처럼 물었다.“여기 웬일이야? 형님이 널 초대한 것 같지 않은데?”“그게...”영미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군성은 영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지용을 끌고 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최지용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영미가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사람이, 왜 하필 오늘 온유가 사라진 날에 나타난 걸까?그때, 최군형과 강소아가 가원이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강소아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혔고 아이는 보행기 가장자리를 잡고 작은 발을 내디뎠다. 이 모습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영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리를 떠 교외의 버려진 공장으로 향했다.그 시각, 정대명은 영미의 지시에 따라 승합차를 몰고 공장에 도착해 있었고 영미가 도착했을 때 그는 공장 문 앞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미는 핸드백을 휘둘러 정대명에게 던졌다.“정대명 씨, 감히 날 속여
“너 따위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정대명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결국엔 자기 아들이었기에 정승우에게 감출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때리고 꾸짖어도 떠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정대명은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 들고는 권온유의 양 갈래머리를 단칼에 잘라냈다. 머리카락이 천천히 바닥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다가 막아서려는 순간, 자신과 정대명 사이에 힘의 격차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작정 나섰다가는 역부족일 터였다.정승우는 이를 악물고 정대명에게 다가가 물었다.“아빠, 정말 이 아이를 팔 생각이에요?”“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영미라는 그 여자가 원하는 거야!”정대명은 불만스레 대꾸하며 정승우에게 옷장에 있는 헌 옷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정승우가 옷을 가져오자, 정대명은 손을 뻗어 권온유의 예쁜 드레스를 찢으려 했다. 정승우는 급히 소리쳤다.“뭐 하는 거예요!”“이 자식이!”정대명은 정승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조용히 해! 죽고 싶어?”“아빠, 이건...”“이 애한테 옷을 갈아입히려는 거야! 이렇게 좋은 옷을 입고 있으면 바로 눈에 띄잖아.”정승우는 다가가 정대명을 옆으로 밀치며 말했다.“제가 갈아입힐게요!”“이놈이...”정대명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그는 정승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하, 아빠를 도와주고 싶구나? 역시 아들은 아들밖에 없지! 그래, 네가 손이 빠르니까 빨리 옷을 갈아입혀. 둘이 함께 가자고!”정승우는 속으로 혐오감이 치밀었지만, 지금은 그저 상황을 지켜보며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정승우는 권온유의 드레스를 벗기지 않고, 정대명의 헌 옷을 위에 입혀 단단히 감쌌다. 그런 다음 모자를 씌워 얼핏 보면 남자아이처럼 보이게 했다.“좋아, 이 정도면 되겠어!”정대명은 정승우에게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뒷문에 승합차가 준비돼 있대. 어서 출발하자!”“아빠, 이 소녀는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예요?”“교외지!”정대명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빨리 움직
권온유는 깜짝 놀라며 정대명을 멍하니 쳐다보았다.“아저씨가 맛있는 걸 가지고 왔단다. 배고프지 않니?”권온유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달아나려 했다. 정대명은 급히 권온유 앞을 가로막았다.“아니, 가지 마!”정대명은 두 손으로 권온유를 꼭 붙들며 말했다.“그게... 네 엄마가 나한테 너를 데려오라고 부탁했어!”엄마라는 말을 듣고 권온유는 잠시 멈칫했다.“정말이야, 네 엄마가 부탁한 거라니까!”정대명은 거짓말을 이어갔다.“방금 네 엄마가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렸지? 너 보고 기다리라고 했잖아?”“네... 맞아요.”“그래!”정대명은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네가 여기저기 막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엄마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알 거예요. 저는 여기서 조금 놀다가 다시 휴게실로 돌아갈 거예요!”“오... 그렇구나.”정대명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아저씨가 휴게실이 어딘지 아니까, 내가 데려다줄게!”권온유는 경계하며 정대명에게서 몸을 빼내고 두 걸음 물러났다.“얘가! 난 정말로 네 엄마 친구라니까. 네가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걱정하지 않겠어? 맞지?”“자, 자! 아저씨가 데려다줄게. 착하지!”정대명은 권온유를 갑자기 붙들어 어깨에 둘러맸다. 권온유는 본능적으로 소리치려 했지만, 정대명의 손이 입을 단단히 막고 있어 소리를 낼 수 없었다.어린 소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른 남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정대명은 권온유의 머리 뒤쪽을 세게 내리쳐 기절시켰고, 온유가 들고 있던 인형은 땅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익숙하게 호텔로 와서 지난번 일을 핑계로 다시 정대명에게 돈을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방 안에 기절한 어린 소녀가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어른 일에 참견하지 말고 신경 꺼!”정대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방금 정대명은 온유를 데려오며 보안과 호텔 직원의 눈을 피하고자 아이를 어깨에 메고 가지 않고,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속여서 안
“엄마, 우리 오늘도 여기서 밥 먹어요?”“그래.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고등어조림 요리잖아.”“그런데...”권온유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삼켰다. 사실 권온유는 집에서 밥을 먹고 싶었다.어린 권온유도 느낄 만큼 엄마는 요즘 기분이 좋지 않았다.방금 대답조차 어딘가 건성으로 들렸다.권온유는 어른들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걸까? 누군가 아빠와 다른 여자가 함께 찍힌 사진을 보내기만 하면, 엄마는 이렇게 변해버렸다.“엄마...”권온유는 엄마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그러나 조순영은 갑자기 권온유의 손을 놓고는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더니 초조한 표정으로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권온유는 깜짝 놀라 인형을 떨어뜨렸다.“엄마!”“온유야,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조순영은 급히 돌아보며 외쳤다.“엄마 금방 올게!”권온유는 엄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홀로 서 있었다.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엄마는 아빠가 다른 여자가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엄마는 통제력을 잃고 온유를 혼자 내버려두곤 했다. 그러고 한참 후에야 멍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곤 했다.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던 정대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몇 번이나 이 모녀를 본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 여자는 자주 아이와 함께 식사하러 왔는데 가끔 혼자 올 때도 있었다...남편의 외도를 잡으려는 걸까?맞아, 틀림없이 그런 거다!정대명은 매일 호텔에 살면서 듣는 소문도 적지 않았다. 한 회장이라는 사람은 아내와 자식이 있음에도 바람이 잦았다고 하는데 그 회장은 차기 시장의 사위가 될 인물이라는 말도 있었다.정대명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이런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차피 남자가 바깥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니까.정대명은 다시 어린 소녀를 주시했다. 소녀
정대명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얼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며칠을 기다린 결과가 고작 최가원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었다.그럼에도 영미는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왔다.“정대명 씨, 대체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대단한 것도 아니고 아이 하나 훔쳐 오는 게 그렇게 어렵나요?”젠장! 정대명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차라리 보석을 훔치는 게 더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하하... 영미 아가씨.”마음속으로는 욕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여전히 웃음이 서려 있었다.“이게, 그렇게 쉽지 않네요! 제가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그 경호원들이 전부 총을 들고 있더라고요. 제가 무턱대고 나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정말 쓸모없네요.”영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내가 사람들까지 매수해 놨는데, 일을 이따위로 하다니!”정대명은 억눌린 분노를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말해 두겠는데요!”영미는 한발 더 나아가 말했다.“이 일 못 해내면, 화려한 호텔 스위트룸도 더 이상 못 쓰게 될 테고 돈 한 푼도 못 받는 줄 아세요! 다시 그 작은 산골 마을로 돌아가서 평생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하세요!”정대명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호사에 길든 사람이 다시 가난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최근 정대명은 오성에서 살아가며 화려한 삶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이 잘 먹고 살게 도와줬고 돈까지도 넉넉히 주니 점점 체면이 생기기 시작했다.호텔에서 정대명이 매일 스위트룸에서 지내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부자로 착각했고 그에게 예의를 갖추며 인사했다.이런 삶은 초라했던 지난날에선 꿈도 꾸지 못한 것이었다.고작 아이 하나 때문에 이 모든 걸 잃기엔 너무 아까웠다.정대명은 급히 전화기를 붙잡고 외쳤다.“영미 아가씨, 너무 흥분하지 마!”영미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내가...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정대명은 어영부영 답했다.“겨우 아이 하나 가지고, 뭐 대단한 일도 아니지! 내가
백인서는 웃으며 정승우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정승우는 전혀 망설임 없이 백인서의 그릇에 고기가 많은 걸 보자마자 젓가락을 뻗었다.“너 지금 내 소고기를 뺏어 먹는 거야?”“사장님이 누나만 편애하는 거 아니에요? 고기를 이렇게나 많이 주다니!”“안 돼, 내 거야. 뺏어 먹지 마.”백인서는 웃으며 말했다.“이건 사장님이 특별히 주신 사랑의 소고기야!”“저는 성장기 남자애라 많이 먹어야 해요!”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면을 거의 다 비워가고 있었다. 백인서가 정승우에게 국수를 한 그릇 더 가져다주려고 일어서려는 순간, 달콤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고모!”백인서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예쁘고 앙증맞은 작은 공주가 백인서에게 달려왔다.“온유야?”권온유는 백인서에게 달라붙어 작은 머리로 백인서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정승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정승우는 이렇게 예쁜 여자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두 갈래로 묶은 머리에 공주 같은 퍼프 드레스를 입고, 마치 아까 놀이공원에서 본 백설 공주처럼 보였다.이 아이는 정말 동화 속에서 나온 공주일까?작은 소녀는 고개를 기울여 정승우를 한 번 바라보더니 달콤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백인서를 보며 물었다.“고모, 이 사람은 누구예요?”“이 사람은...”백인서가 대답하려던 찰나, 문밖에서 권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오빠는 학교에서 우등생이야. 공부도 엄청 열심히 하거든. 온유도 나중에 커서 이 오빠처럼 열심히 공부해야 해.”백인서는 권욱을 올려다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여긴 어떻게 오셨어요?”“왜? 딸과 단둘이 외식하러 나오는 게 이상해?”“아니요.”백인서는 고개를 저었다.“그냥 권욱 씨가 이런 작은 가게에서 식사하실 줄은 몰랐어요...”“여기도 꽤 유명한 맛집이야!”권욱은 의자에 앉으며 사장에게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오늘 주말이라 온유를 데리고 나왔는데, 이 녀석이 배고프다고 해서 핸드폰으로 근처 맛집을 검색해 보니 이곳 평이 좋더라고.
정승우의 머릿속엔 여전히 어린 시절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그 시절, 백인서는 낮에는 그를 등에 업고 다녔고 밤에는 재워주며 보살폈다. 따뜻함이라고는 거의 없었던 그의 삶에서 백인서는 유일하게 빛을 밝혀 준 존재였다.누가 세 살, 네 살 아이에게 기억이 없다고 했던가? 그 기억은 정승우의 성장 내내 곁을 지켜 주었고 다시 누나를 찾을 수 있도록 지탱해 주었다.“누나, 제발... 울지 마세요. 백 선생님!”백인서는 깜짝 놀라 정승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인서는 정승우의 미소에 눈물을 멈췄다.두 사람은 작은 음식점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우연히도, 이곳은 예전에 최지용이 백인서를 데리고 와 소고기 국수를 먹던 곳이었다.이번에도 그 가게 주인이 반갑게 맞이하며 다가왔다.“오, 이게 누구야! 귀한 손님이 오셨네!”그의 시선이 정승우에게로 멈췄다.“이 아이는?”“동생이에요!”정승우가 먼저 씩씩하게 대답했다.백인서는 미소를 지으며 주인에게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주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한번 보고는 주방으로 돌아가 푸짐하게 고기가 올라간 소고기 국수를 내왔다.“얼른 먹어!”백인서는 젓가락을 건네며 말했다.“여긴 정직하게 장사하는 곳이라 양도 푸짐하고 맛도 아주 좋아. 지용 씨가 나를 데리고 왔던 곳인데...”최지용을 언급하자 백인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정승우는 장난기 어린 미소로 백인서를 바라보며 물었다.“그 남자, 누나한테 잘해 줘요?”백인서는 모르는 척하며 대답했다.“무슨 남자?”“그러니까, 방금 말한 그 지용이란 사람 말이에요!”정승우는 더욱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숨기지 않아도 돼요. 산에 있을 때, 두 사람이 포옹하는 것도 봤고 그 사람이 누나한테 키스하는 것도 다 봤어요!”“정승우!”백인서는 정승우를 노려보았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쏠렸다.“그만해!”백인서는 테이블 아래로 정승우의 다리를 가볍게 툭 차며 말했다.“애가 무슨 이상한 소릴 하고 있어!”“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