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군형은 코를 긁적거리며 잠깐 망설이고는 강소아의 손을 잡고 가게로 걸어갔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심경이었다. 정말이지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그는 자신이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뛸 듯이 기뻤다. 그 뒤에는 또다시 말로 형용하지 못할 슬픔이 밀려왔다.어릴 때도 그는 이렇게 육소유의 손을 잡은 채 금방 걸음마를 뗀 육소유와 함께 걸었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그녀가 이런 방식으로 자신 곁에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 목소리들은 최군형의 머리에서 되풀이되고 있었다.“형, 형수님이랑 우정 아줌마랑 엄청나게 닮았어!”“저 둘을 봐, 초면일 텐데 친자매 같아!”“소아는 저들 부부가 훔쳐 온 아이야.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잖아.”......생각에 빠진 최군형의 심장이 점점 거세게 뛰었다. 그의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강소아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아파요!”“아, 미안해요. 너무 세게 쥐었나요?”“무슨 일 있어요? 표정이 안 좋은데.”강소아가 붉어진 손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최군형이 숨을 깊이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소아 씨,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진짜요? 나도요! 나도 할 말이 있어요.”최군형이 흠칫했다. 강소아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이끌고 가게에 들어섰다. 마침 손님이 없었다. 그들은 함께 계산대 뒤에 앉았다.“할 말이 뭔데요?”강소아가 최군형의 어깨에 몸을 기대고는 웃으며 말했다.“엄마가 말하는데, 며칠 뒤에 집을 나한테 주겠대요. 이 가게도 나한테 줄 테니 우리 둘이 잘 경영해 보래요.”“네?”최군형이 깜짝 놀라 물었다.“그러니까, 알려주는 게 어때요? 우리 엄마는 이런 것들로 당신을 여기 남기려고 하는 것 같아요. 아직도 당신을 데릴사위로 생각하는걸요.”최군형의 심장이 쿵쿵거렸다. 강우재 부부가 강소아를 아낀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람에게 이 정도로 잘해줄 줄은 몰랐다.강소아가 최군형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그냥 사실대로 얘기
최군형은 인상을 쓰고 입술을 다시며 침묵하다 물었다.“그러니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뭔데요?”“소아 씨, 이 집에서... 행복해요?”강소아가 어리둥절해졌다. 최군형을 향한 시선이 조금 변했다.최군형이 변한 건 눈치채고 있었지만 정확히 어디가 변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눈빛이 조금 어두워지고, 말을 더듬으며 그녀와의 눈 맞춤도 피했다.자신의 신분 외에 감추는 일이 더 있는 건가?“군형 씨, 그게 무슨 뜻이에요?”최군형이 부드럽게 강소아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먼저 대답해 줘요.”“그게 무슨 문제에요! 물어볼 가치가 있어요? 당연히 행복하죠! 뭐 하고 싶은 거예요? 당신한테 시집간다고 친정에는 오지 말라 이거에요? 재벌가에는 그런 규칙도 있나 보죠? 그럼 난 결혼 안 해요!”“아니, 그게 아니라...”최군형이 급히 그녀를 따라가 팔을 붙잡고는 혹시나 도망갈세라 그녀를 꼭 껴안았다.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아내를 잃을 수는 없었다.강소아는 그를 두어 번 치고는 최군형의 눈을 보고 말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요?”“제 친구 얘긴데요, 어릴 적에 가족을 잃어버렸는데 다행히 좋은 양부모님을 만났어요. 그런데 지금 그 친구 친부모님이 그 친구를 찾고 있어요. 나한테 어떻게 할지 물어보는데, 나도 알 수 없어서요.”“그렇구나...”강소아는 반신반의하며 최군형을 한참 쳐다보았다.“소아 씨, 만약 소아 씨라면 친부모님한테 돌아갈 거예요? 친부모님도 정말 좋은 분들이세요. 예전엔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됐고요. 어쩔 수 없이. 정확히 말하면 양부모님이 몰래 그 친구를 데려온 거예요. 그리고... 친부모님은 엄청난 부자라서 아무 걱정 없이 좋은 교육을 받으며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어요. 소아 씨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강소아가 인상을 썼다.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한참 생각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모르겠어요.”그 말을 들은 최군형이 멍해졌다. 강소아가 다시 말을 이었다.“정말 모르겠어요! 제 일이 아니니 감히
구자영에게 괴롭힘당하면서도 두려움 없이 맞받아치던 그녀를 생각했다. 하수영에게 배신당하고도 금세 슬픔을 뒤로하던 그녀를 생각했다.한 사람의 용기와 자존심은 모두 그 사람의 가정이 준 것이다. 부모님이 지지해 준다면 아이는 한 마리 독수리처럼 하늘을 날아갈 수 있었다.강우재와 소정애가 그녀를 부족함 없이 사랑해 줬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평범한 집안 출신인 강소아가 재벌 2세들이 가득한 학교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최군형이 강소아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웃었다.“방금 그 말, 나 떠보려는 거예요?”“네? 아니요!”“흥, 난 또 뭐라고. 오성에 시집가면 강주에는 평생 못 온다는 말인 줄 알았잖아요!”“네? 아니요! 그럴 리가요...”최군형이 씁쓸하게 웃었다. 강소아가 최군형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최군형 씨, 말은 똑바로 해두죠. 우리가 결혼한 뒤에도 내가 친정에 가는 걸 막으면 안 돼요.”“당연하죠. 굳이 힘들게 왔다 갔다 하지 않아도 돼요. 그때가 되면 장모님과 장인어른을 오성에 모셔 와요. 소준이도 열심히 하면 오성대에 합격할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을 가족들과 갈라놓지 않을게요.”강소아가 웃으며 최군형의 품을 파고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그녀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급한 강우재의 목소리가 들렸다.“소아야! 빨리... 빨리 병원에 와! 엄마가...”“엄마가 왜요?”......최군형과 강소아는 급히 병원에 달려갔다. 그녀는 연속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 소정애의 부상 경위를 알아냈다.오전, 소정애는 공원에서 산책하다가 우미자를 만났다. 얘기를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싸움이 붙었다. 하지만 그 시간에 공원에 있는 사람은 대부분 중노년층이었기에 누구도 말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소정애와 우미자는 서로 머리채를 잡은 채 연못에 떨어졌다. 그곳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솟아있었다. 다행히 우미자는 찰과상만 입었지만 소정애의 부상은 꽤 심했다. 머리를 바위에 부딪쳐 피를
“왜냐면... 왜냐면...”강우재가 우물쭈물했다. 수혈하면 모든 게 들통날 것이었다. 강소아가 그들의 딸이 아니라는 사실이!“직계 친족 사이에는 수혈할 수 없어요.”이때 낮은 소리가 들려왔다. 강우재가 깜짝 놀라 최군형을 바라보았다.“소아 씨, 직계 친족 사이에는 수혈할 수 없어요. 위험 부담이 커지거든요. 그러니 당신뿐만 아니라 소준이도 수혈은 못 해요.”“그럼 어떡해요?”“제가 하죠, 저도 B형이에요.”최군형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옆의 간호사가 거들었다.“이분 말이 맞아요. 먼저 간단한 검사를 하죠. 수혈할 수 있다면 바로 진행해요!”“네.”강우재가 멍해졌다.“군형아, 괜찮아. 내가 할게. 난 O형이야. 누구에게도 피를 줄 수 있어!”최군형이 복잡한 시선으로 강우재를 바라보았다.“아뇨, 제가 할게요. 전 젊고 튼튼해서 이 정도는 문제없어요.”강우재가 말을 잇지 못하며 최군형을 바라보았다. 그는 최군형과 눈을 맞추지 못했다. 그 깊고 서늘한 눈은 모든 가식을 잡아낼 것 같았다.검사 결과가 나왔다. 최군형은 기준에 부합했다. 그는 간호사를 따라 수술실로 들어갔다.강소아가 벽에 기댔다. 마음이 한결 놓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최군형이 걸어 나왔다. 그는 수혈한 반대쪽 팔로 강소아를 가볍게 안았다.“걱정 마요, 아줌마는 괜찮아요.”최군형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강소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품에 안겨 심장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졌다.소정애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모두가 숨을 돌릴 때 우미자가 머리에 붕대를 감고는 비틀거리며 병실에서 나왔다. 강씨 일가를 보고 얼른 지나가려는데, 강소아가 이를 딱 잡아냈다.“우미자 아줌마!”우미자가 흠칫하며 억지로 웃는 얼굴로 강소아를 쳐다보았다.“우리 엄마에게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아니야, 소아야. 내 말 좀 들어봐...”“하루이틀 일도 아니잖아요! 맞다, 내가 우리 부모님 친딸이 아니라는 것도 아줌마가 퍼뜨린 헛소문이죠? 이렇게 하는 이
“아... 아!”우미자는 비명을 지르며 벽에 기대 자리에 주저앉았다. 최군형이 어리둥절해졌다. 우미자를 부축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몸을 덜덜 떨며 자신을 피했다.우미자가 더듬거리며 말했다.“미... 미, 미안해! 미안해,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 나나... 나 다시는 말 안 할게. 다시는 말 안 할게!”최군형이 인상을 썼다. 직감이 왔다. 우미자는 분명 뭔가 다른 걸 알고 있을 것이다.그는 천천히 몸을 숙이고 차가운 눈빛으로 또박또박 말했다.“아줌마, 나한테 또 숨기는 거 없어요?”“응?”“두 분 싸운 거... 강소아 씨 출신 얘기하다 그런 거 맞죠?”우미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제 생각이 맞았다면, 소정애 아줌마한테 강소아 씨는 주워 온 자식이라고 비아냥대다가 싸움이 난 거죠?”한참이 지나 우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군형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왜 그렇게 말한 거예요?”“구... 군형아. 사심이 있었던 거 맞아. 우리 딸을 네게 소개해 주고 싶어서... 그래서 소아가 훔쳐 온 아이라고 한 거야! 그런데 군형아, 내 말은 사실이야! 너 그거 알아? 소아 출생증명서는 위조한 거야!”최군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지금까지 그는 미로를 헤매는 것 같았다. 이미 출구를 찾은 상태였다. 우미자의 말은 그가 출구를 향해 가는 시간을 단축했을 뿐이었다.“강우재가 오성에서 돌아온 뒤 우리 남편과 술을 마셨었어. 잔뜩 취해서 별의별 이야기를 다 했었어... 돌아올 때 탔던 배가 가라앉았대, 영원호 말이야! 다행히 그들 부부가 소아를 안고 내려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군형아, 이거 다 진짜야! 강우재에게 직접 들은 말이니까 이렇게 말하는 거야!”최군형의 얼굴은 마치 얼어붙은 산처럼 딱딱하고 표정이 없었다. 우미자는 낑낑거리며 일어나 최군형을 몇 번 불렀지만 최군형은 반응이 없었다. 이를 확인한 우미자가 급히 자리를 떴다.최군형이 서서히 몸을 일으켜 창가에 갔다. 강주의 여름은 덥고 습했다. 공기 속에는 수증
최군형이 두어 번 기침하고는 똑똑하게 말했다.“그러지 좀 마!”“형, 소유가 이걸 알고 힘들어할까 봐 그러는 거야? 그 가족들도 소유한테 잘해준다며.”“응, 그게 걱정되긴 해. 또 한 가지 걱정되는 건... 소아가 육씨 집안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하면, 경섭 삼촌과 우정 아줌마가 힘들어할까 봐.”“응, 그것도 그렇네. 이 일은 천천히 하는 게 좋겠어.”......육명진은 별장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창문가의 장식품이 마음에 들지 않자 그는 냉큼 그 장식품을 집어 벽에 힘껏 던졌다.“미친X!”고용인들은 모두 자리에 가만히 선 채 다가가지 못했다. 그가 말하는 미친X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육명진이 숨을 몰아쉬었다.이 일은 다른 사람을 탓할 수 없었다. 자신이 딸을 얕잡아본 탓이었다. 육연우도 제 엄마처럼 순진무구한 얼굴 뒤에 무시무시한 칼을 감추고 있을지 몰랐다. 지금 그녀는 최 씨 형제를 도와 육소유의 행방을 찾고, 하수영의 신분까지 알아냈다. 이제 자신의 차례였다.육명진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이마에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그는 핸드폰을 잡고 그 번호에 전화를 걸고는 한 글자 한 글자 말했다.“방법을 생각해 내... 육소유의 신분이 오성에 알려져서는 안 돼!”하수영이 잠깐 침묵하다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최씨 가문 도련님 두 분이 모두 강주에 있어요. 육소유도 육연우도 제가 접근하기엔 어려워요.”“난 몰라! 이 일은 다 너 때문이야! 네가 알아서 해결해!”육명진이 핸드폰을 부숴버릴 기세로 말했다. 하수영이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육명진이 차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하수영 씨, 돈 때문에 날 도와주는 거잖아. 돈을 받고 일을 안 해서야 되겠어? 그러니까... 당신이 처리하든지, 내가 당신을 처리하든지 둘 중 하나겠지.”“육명진 씨!”“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해! 어떤 방법을 쓰든 난 신경 안 써. 당신이 최군형을 유혹해서 그 두 사람을 갈라놔도 돼! 어쨌든, 강소아가 오성에 나타나서는 절대 안 돼!”하수영의 심장
강소아가 멍해졌다. 이는 하수영의 차였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따지려 했으나 그 차는 붕 하고 꼬리를 뺐다.소리를 들은 최군형이 금세 달려 나왔다. 그는 물에 젖은 강소아를 보고는 마음 아픈 듯 말했다.“병원에 데리러 갈 걸 그랬어요!”“괜찮아요. 대낮에 그런 차가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차 번호는 똑똑히 봤어요?”“하수영 차에요.”강소아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최군형이 흠칫했다. 기분이 이상했다.강소아와 한번 해보자는 건가?하지만 물을 끼얹는 것 같이 유치한 일을 누가 하겠는가?다른 원인이 있을 게 뻔했다.“군형 씨, 난 정말 모르겠어요... 나한테 왜 그러는 걸까요?”이제 슬프지는 않았지만 그 일은 아직도 강소아에게 상처였다. 누구보다 진심으로 대한 친구의 배신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너무 깊이 생각 마요. 들어가서 샤워하고 옷도 갈아입어요. 그리고...”최군형이 말을 멈췄다. 강소아가 팔을 들자 그녀의 허리가 드러났다.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 피부였다.최군형은 멍하니 강소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강소아가 고개를 돌렸다.“군형 씨? 거기서 뭐 해요?”최군형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하수영이 강소아를 흠뻑 젖게 한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군형 씨?”“아, 왜요?”그는 정신을 차리고 강소아의 손을 잡고는 웃으며 말했다.“빨리 들어가요. 옷 갈아입고 한숨 자요. 아줌마한테는 제가 가볼게요.”강소아는 별다른 생각 없이 집에 들어섰다. 며칠 동안 너무 힘들었기에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침대에 눕자마자 금세 잠들어버렸다.최군형은 조용히 문을 잠그고 골목에 나갔다. 붉은 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차 가까이 다가갔다. 이때 하수영이 갑자기 벽에서 튀어나왔다.“도련님.”하수영이 선글라스를 벗고 환하게 웃었다. 최군형은 그녀를 슬쩍 보고는 냉랭하게 물었다.“대체 뭘 하고 싶은 건데요?”“알려줄 게 있어서 왔어요. 연우 씨가 당신과 손잡았다는 거 알아요. 이번에 강주에 온 것도 날 조사하고 진
"늦었으니 그만 쉬자."남자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강서연의 주의를 끌어당겼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그의 깊은 눈동자와 바로 마주쳤는데, 그 안에는 그녀가 종잡을 수 없는 정서가 뒤섞여 있었다.강서연은 긴장한 듯 원피스를 움켜쥐었고, 심장 박동도 빨라지는 것 같았다.그녀는 방에 들어온 후부터 줄곧 침대의 가장 끝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오랫동안, 이 자세를 유지하다 보니 등줄기가 뻣뻣해졌고, 아직 웨딩드레스 차림 그대로였다. 남자가 샤워하고 욕실에서 나오자, 그녀는 비로소 오늘 밤이 바로 눈앞의 이 남자와의 신혼 첫날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하지만 그녀는 새 남편과 어떻게 지내야 할지 전혀 몰랐다. 게다가 언니 대신에 시집온것이니...재벌집 사생아 신분으로 언니를 대신하여 빈털터리 남자에게 시집온 것은, 단지 양가 어른들이 정한 혼약을 완성하고 상당한 액수의 혼수를 얻기 위함이었다.돈이 있어야 엄마의 병이 나을 수 있고, 동생이 학업을 계속할 수도 있으며, 온 가족이 잘 살 수 있을 것이다.강서연은 심호흡을 깊게 하더니 겁먹은 토끼처럼 조마조마한 모습으로 화장실을 향해 갔다."저… 저도 씻고 올게요."남자의 숨소리가 더욱 잠잠해졌다.강서연은 재빨리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려는데, 이 낡은 널빤지 문에 자물쇠 하나 없는 것을 발견했다. 비록 그녀도 어려운 삶을 살아왔지만, 이 정도로 가난한 삶을 경험한 적은 없었다.그녀는 눈시울을 약간 붉히더니 화장실에서 머뭇거리며 한참이나 드레스를 벗지 못했다. 문밖의 남자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갑자기 입을 열었다."난 밖에 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올 테니 천천히 씻어."강서연은 가슴을 졸이며 문에 엎드려 바깥의 기척을 엿들었다. 그의 발걸음은 점점 멀어지더니 대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더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얼룩덜룩한 벽은 조금 창백해 보였다. 결혼을 하루 앞두고 태풍이 도시를 휩쓸면서 도로 곳곳에 떨어진 광고판과 허리가 잘린 나무들을 남겨뒀다. 강서연은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