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끊은 구현수는 잠깐 마음을 가라앉힌 후 먼저 강서연에게 전화하여 괜찮은지 확인했다.휴대 전화 너머로 달리 방법이 없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여보, 오늘 저녁에 총괄 담당자 두 분이 기어코 바이어한테 식사 대접하겠다지 뭐예요... 어휴, 현수 씨도 알겠지만 지금 우리 회사 최대 바이어가 강유빈이잖아요. 난 어쩔 수 없이 가야 할 것 같아요.”“알았어, 괜찮아.”구현수는 강유빈이 그에게 전화했었다는 사실을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약속 장소 어디야? 나한테 주소 보내. 이따가 데리러 갈게.”강서연이 배시시 웃더니 이내 그에게 주소를 보냈다.강유빈이 보낸 주소와 비교해 보니 다행히 같은 주소였다. 처음에는 강유빈이 또 무슨 음모를 꾸미는 건 아닌지 의심했었지만 인제 보니 그를 속이진 않은 모양이다.그런데 왜 일부러 전화까지 하면서 구현수더러 식사 자리에 나오라고 한 걸까?구현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그 이유가 뭐든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참석하는 게 좋겠다....식사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어 갔다. 몇몇 남자들은 강유빈에게 서로 술을 권하며 발림소리를 해댔다.평소 이런 술자리를 싫어했던 강서연은 벌써 슬슬 피곤이 몰려왔다.쉴 새 없이 시간을 확인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1분 1초가 이상하리만큼 더디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술자리는 아직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영업팀과 마케팅팀의 두 총괄 담당자는 서로 끊임없이 옥신각신했다. 참다못한 그녀가 핑계를 대고 바람 쐬러 나가려던 그때 강유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다들 잠깐 술잔을 내려놓으시죠!”사람들은 일제히 술잔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주목했다.“이따가 한 미스터리한 손님이 오실 겁니다.”강유빈이 강서연을 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서연아, 어쨌거나 우린 한 가족이야. 비록 네 남편이 별로이긴 하지만 이미 결혼한 이상 내 제부란 사실은 변함이 없어. 제부도 이런 자리를 많이 경험해 보면 좋잖아, 안 그래?”“뭐라고?”강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맛 괜찮은데, 왜?”“입맛에 맞으면 많이 먹어. 먹고 말 좀 아껴!”“너...”강유빈이 두 눈을 부릅떴다.“내가 얼마를 먹든 내가 알아서 해! 난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물어본 건데. 그리고 네 남편도 뭐라 하지 않는데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굴 필요 있어?”“아이고, 유빈 씨, 진정해요.”장동민 총괄 담당자가 술잔을 들며 웃었다.“서연 씨가 좋은 뜻으로 많이 드시라고 한 거죠. 자, 이 잔 제가 비우겠습니다.”강유빈이 코웃음을 치더니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원샷했다.강서연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참으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테이블 밑으로 몰래 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덤덤한 얼굴로 앉아있는 구현수를 본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자신을 자책했다.강유빈은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구현수를 부른 게 틀림없다. 사실 구현수는 이 자리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오면 모욕이나 당할 게 뻔하니까... 게다가 이 식사 자리는 지난번 연회처럼 옆문으로 몰래 빠져나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몇 명밖에 없어 대놓고 갈 수도 없었다.“현수 씨.”강서연이 속상한 얼굴로 나지막이 말했다.“정말 미안해요...”구현수는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더니 그녀가 좋아하는 반찬을 집어주었다.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주식을 토론하기 시작했다. 동명 주식, 레이안, 웨스턴 등등...구현수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다들 주식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그의 매력적인 중저음이 사람들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화들짝 놀란 사람들의 시선이 거의 동시에 그에게 향했다.“현수 씨도 주식에 대해 알아요?”“하하, 알 리가 있겠어요?”강유빈은 대놓고 그를 무시했다.“우리가 얘기한 주식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했을걸요?”“누가 그래!”강서연이 버럭 화를 내며 반박했다.“우리 남편 평소 금융에 관한 뉴스도 많이 보고 여러 나라 언어도 할 줄 알아! 그렇죠? 현수 씨?”구현수가 가볍게 웃었다.“방금 말씀하신 주식들이 그리 핫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
이튿날, 강서연이 회사로 들어오자마자 사람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어찌 된 영문인지 알 리 없는 그녀는 답답하기만 했다. 그녀가 서류 정리를 마치자마자 안이수가 노크하고 들어오더니 흥분한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회사에 소문이 쫙 퍼졌어요... 서연 씨 남편 너무 대단한 거 아니에요?”강서연은 순간 멍해졌다.“그게 무슨 소리예요?”“주식 말이에요.”안이수가 휴대 전화를 흔들었다.“지금 난리도 아닌던데. 못 봤어요?”평소 주식에 별로 관심이 없는 강서연이었지만 안이수의 얘기에 바로 구미가 당겼다.구현수가 주식 시장형세를 제대로 맞춘 것이었다!강서연은 갑자기 밀려든 이상한 기분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마케팅팀 사람들이 주성 산업 주식을 샀는데 지금 엄청 떨어졌대요.”안이수가 고소해했다.“이젠 팔려고 해도 못 팔 거예요. 역시 우리 이 총괄님이 대단하세요. 아침에 증권거래소에 있는 친구한테 몰래 팔라고 하고 다른 주식을 샀대요... 지금 아마 입이 귀에 걸렸을걸요?”강서연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어지러운 안개 속을 거닐 듯 머리가 복잡했다.‘현수 씨 말이 전부 사실대로 됐다고? 그냥 우연이겠지. 평소 주식 시장에 관심이 있었다니까, 경제 뉴스 같은 거 자주 보면서 형세를 분석했을 거야. 그리 희한할 것도 없어.’이런 생각을 되뇜에도 불구하고 강서연은 자꾸만 뭔가 찜찜했지만 정확히 무엇이 찜찜한지 알 수 없었다.점심시간, 그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홀로 식당에 왔다. 그런데 오늘따라 많은 직원이 그녀를 둘러쌌다.“매니저님,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아니에요. 저는...”강서연이 거절할 틈도 없이 강제로 자리에 앉혔다.어떤 이는 그녀의 점심까지 받아다 주었고 게다가 평소 그녀가 먹던 메뉴보다 몇 배는 더 비싼 메뉴였다.주변에 그녀에 대한 아부와 칭찬의 목소리가 가득했고 어떤 이는 다음 주에 어떤 주식들이 오르는지 대놓고 물어보기도 했다.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에 강서연은 밥
강유빈은 밤이 늦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강명원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자, 옆에 있는 어머니를 슬쩍 쳐다보았다.양연은 그녀에게 눈짓하더니 강명원이 보이지 않게 손으로 입을 가리며 나지막이 말했다.“조심해.”강유빈은 순간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그때 강명원이 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싸늘한 눈빛에 강유빈은 등골이 오싹했다.“아빠...”강유빈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빠 오늘 일찍 들어오셨네요? 회사에는 아무 일 없죠?”“흥.”강명원이 그녀를 싸늘하게 쳐다보았다.“내 회사에 관심이 많네?”강유빈이 입술을 앙다물었다.“강진 그룹은 우리 집 건데 당연히 걱정해야죠...”“그럼 내가 죽은 후에 누가 회사를 물려받을지도 관심이 많겠네?”강명원이 책상을 탁 치며 벌떡 일어나더니 그녀를 무섭게 노려보았다.강유빈은 너무 놀란 나머지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가 사색이 된 얼굴로 황급히 설명했다.“아빠, 오해하셨어요. 전 그런 생각 한 적이 없어요...”“어디서 발뺌이야!”테이블 위의 찻잔이 쨍그랑하고 바닥에 떨어지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강유빈은 몸을 움츠린 채 주먹을 꽉 쥐었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양연도 감히 그를 말리지 못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지금까지 수년간 늘 이러했다. 집에서든 회사에서든 강명원이 곧 왕이고 그의 말이 곧 법이었다. 만약 그의 뜻을 거스른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았다.“네가 호정 무역회사에서 협력을 논의할 때 많은 사람 앞에서 우리 회사를 물려받을 거라고 했다면서?”강명원은 그녀를 날카롭게 째려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정말 둘도 없는 효녀야! 내가 아직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벌써 내 돈을 욕심내?”“아빠, 제 말 좀 들어보세요...”“듣긴 뭘 들어!”강명원이 불같이 화를 냈다. 그는 누군가 그의 자리를 몰래 노리는 걸 가장 싫어했다.“오늘 말 나온 김에 똑바로 얘기할게. 내 말을 고분고분 따른다면 나중에 강진 그룹이 네 것이
강유빈의 두 눈이 반짝이더니 심장도 쿵쾅거리기 시작했다.“아빠, 최연희라면... 최씨 가문의 막내딸 맞죠?”“그래.”강명원이 덤덤하게 말했다.“최연희는 올해 금방 18살이 됐고 아직 대학을 가지 않았어. 최씨 가문에서 가장 막내인데다 최연준이 가장 예뻐하는 여동생이야. 최연희랑 가까워지고나서 최연준 앞에서 네 좋은 얘기 몇 마디만 해줘도 최씨 가문에 시집갈 희망이 생기지 않겠어.”“아빠, 제가 뭘 해야 할지 알겠어요!”강유빈이 입술을 꽉 깨물며 잠깐 고민에 잠겼다.“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아가씨의 행방을 알아보게 한 다음 최대한 빨리 파티를 열게요. 자선 파티를 여는 게 가장 좋겠어요. 최씨 가문에서 자선사업을 좋아하잖아요.”“아주 좋아.”강명원이 드디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최연희를 찾아낸 다음에 네가 직접 초대장 써.”“그거야 당연하죠!”“파티는 빨리할수록 좋아. 시간만 길게 끌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니까.”“알겠어요, 아빠.”강유빈은 남몰래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강명원의 한마디에 그녀의 기쁨도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서연이한테도 알려서 파티에 참석하라고 해.”“네?”강유빈이 고함을 지르다시피 큰 소리로 말했다.“아빠, 그건...”“왜? 싫어?”강명원이 목청을 높이며 그녀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옆에 있던 양연도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지난번 그들 세 식구가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오성으로 한걸음에 달려가 최연준의 환영 파티에 참석하려 했지만, 문 앞에서 가로막히고 말았다. 체면이 깎일 대로 깎였다고 생각한 강명원은 그 후로 양연에게 줄곧 쌀쌀맞게 대했다.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양연은 나서서 강유빈을 도와줄 수가 없었다.“유빈아, 아빠 말씀 들어.”그녀가 눈짓했다.“그냥 파티일 뿐이야. 서연이 걔는 뭘 해도 너랑 비교조차 안 돼.”강유빈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주먹을 꽉 쥐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핏줄이 다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유빈아.”강명원이 가볍게 말했다.“뭐라 해도 서
어차피 그저 자선행사일 뿐이니까...강서연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억지로 미소를 쥐어 짜냈다. 이따가 아무 핑계나 대고 자리를 떠날 생각이었다.그런데 호텔 돌계단에 발을 내딛자마자 아직 연회장 대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눈앞에 누군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어머, 진짜 왔네?”강유빈이 팔짱을 낀 채 거만하고 우쭐한 모습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조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그녀를 본 순간 강서연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오늘 밤 강유빈은 작정이라도 한 듯 예쁘게 꾸미고 왔다. 타이트한 레드 드레스는 그녀의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고 분위기도 한껏 끌어올려 주었다.그런 그녀와 달리 일반적인 블랙 화이트 원피스 차림의 강서연은 왠지 모르게 초라해 보였다.“강서연.”강유빈이 눈살을 찌푸렸다.“오늘 저녁에 귀한 하객 최연희 양이 온다고 했잖아. 이렇게 입고 오면 우리 강씨 가문의 체면이 뭐가 돼! 창피해 죽겠어, 정말!”“오늘 저녁 파티는 자선 파티라며.”강서연이 덤덤하게 말했다.“자선 파티에서 무대 위로 올라가 노래라도 부를 거야?”“뭐라고?”“자선 파티의 주제는 자선 행사이지, 최연희 양이 아니야.”강서연이 그녀를 흘겨보았다.“장소에 맞게만 입으면 된다고 생각해. 너무 화려한 탓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면 오히려 자선 행사의 본질을 잃을 수가 있어.”화가 난 강유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하지만 주변에 손님이 많아 화를 낼 수 없어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천한 년 주제에 지금 날 가르치려 들어?”“내가 어찌 감히 언니를 가르치겠어.”강서연이 코웃음을 쳤다.“파티는 언니가 연 거잖아. 난 그냥 언니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보러 왔어.”강유빈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강서연이 그녀 옆을 스쳐 지나가려던 그때 갑자기 한 걸음 다가와 앞을 막아섰다.“지금 하객들이 한창 안으로 들어가는 중인데 이 차림으로 들어가려고? 창피하지도 않아?”“그래?”강서연이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그럼 그냥 갈게.”“거기 서!”강유빈
강서연은 묵묵히 그녀 뒤를 따랐갔고 그렇게 호텔 건물을 지나 지하 주차장 입구에 도착했다. 그런데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어 컴컴하고 조용했다. 다들 지하 주차장에 가려면 호텔 안의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굳이 먼 길을 빙빙 돌아서 이 길로 오진 않았다.강서연은 불길한 예감에 발걸음을 늦추었다.“뭐 해!”강유빈이 앞에서 재촉했다.“빨리 와! 내 차 저 밑에 있어.”“이 길로 내려가서 찾으면 찾을 수 있어?”“내 차를 어디에 주차했는지 내가 왜 몰라? 설마 지금 내가 차를 여기까지 가져와서 널 태우길 바라는 거야?”강유빈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내가 대놓고 호텔 문 앞에서 널 태웠다간 사람들이 지금 네 꼴을 다 볼 거 아니야! 너 때문에 우리 집안이 망신당하는 걸 보고 싶어서 그래?”강서연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은 마치 블랙홀처럼 밑으로 쭉 뻗어있어 끝이 보이질 않았다.계속 앞에서 종종걸음치는 강유빈을 따라가려니 강서연은 버겁기만 했다. 강유빈은 꾸불꾸불한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대체 어디까지 왔는지 주변에 등도 없어 칠흑같이 어두웠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강서연도 그제야 당황하기 시작했다. 습한 곰팡내가 코를 찔러 불안감이 더욱 엄습했다.“언니...”주변이 메아리 소리로 가득 찼다.“여긴 어디야?”잠시 후, 어둠 속에서 강유빈의 날카롭고 사악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네가 가야 하는 곳이야!”순간 가슴이 움찔한 강서연은 등골이 오싹하면서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녀가 상황 파악하기도 전에 뭔가에 밀려 튕겨 나가고 말았다.그녀는 비명과 함께 울퉁불퉁한 시멘트 바닥에 넘어지면서 무릎을 쿵 부딪쳤다. 곧이어 대문이 굳게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머릿속이 하얘진 강서연은 바닥에서 발버둥 치며 겨우 일어나 달려갔다. 철문 너머로 강유빈이 차갑게 웃었다.“동생아, 오늘 저녁 파티는 참석하지 않아도 돼! 이따가 아빠한테 네가 오기 싫어서 안 왔다고 할게!”“
강서연은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쿵쾅거렸고 머릿속도 하얘졌다.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한 어린 소녀의 목소리 같았다.이 소녀는 누구고, 또 어떻게 이곳에 나타난 걸까?“어휴, 이 자물쇠 열기가 너무 어려워요.”소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저기... 뒤로 좀 물러서요. 제가 돌로 자물쇠를 부숴볼게요.”강서연은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소녀의 말대로 구석 쪽으로 몸을 피했다.소녀가 문을 부수는 소리가 지하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쾅쾅하고 두드릴 때마다 심장도 함께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잠시 후 덜컹하는 굉음이 들리더니 자물쇠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문이 열렸지만 강서연은 몸이 경직되어 손발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이봐요, 언니?”아담한 소녀가 눈앞에 나타났다.“빨리 안 가고 뭐 해요!”“그쪽은...”“얼른 가요!”강서연이 말을 하기도 전에 소녀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지금 이 상황에 강서연은 정신을 부여잡고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소녀를 따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도망치는 것뿐이었다.문 앞에 죽은 쥐들과 야구 방망이, 그리고 큰 돌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래도 이것들로 쥐들을 죽인 모양이다.소녀의 손이 작고 가늘었지만 한없이 따뜻했고 절망 속의 마지막 지푸라기 같았다. 소녀의 손을 꽉 잡은 강서연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강서연은 소녀를 따라 미친 듯이 뛰었다. 그렇게 어둠 속을 뛰쳐나와 드디어 희미한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됐어요. 이젠 안전해요.”두 사람은 나란히 호텔 복도를 거닐었다. 소녀는 그녀에게 히죽 웃더니 그녀를 잡고 엘리베이터에 탄 후 맨 꼭대기 층을 눌렀다.강서연은 그제야 소녀의 얼굴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예쁘장한 얼굴에 눈웃음을 짓고 있었는데 어찌나 달콤한지 알록달록한 마시멜로 같았다. 그리고...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처럼 낯이 익었다.강서연은 멍한 얼굴로 소녀를 빤히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서 봤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질
“그... 괜찮아!”정승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말했다. 정승우는 이곳에서 권온유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 이때, 공장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곧바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정승우는 재빨리 권온유에게 눈짓했고 권온유도 알아채고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없는 척했다.정승우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았다.“이 아이인가요?”영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맞아.”정대명은 영미를 흘깃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영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희미한 빛 속에 있는 아이를 살펴보더니, 곧 얼굴빛이 확 변했다.“이 아이... 혹시 권씨 집안의 막내딸 아니에요?”정대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훔쳐 올 때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리가 없었다.“정대명 씨.”영미가 차갑게 웃으며 돌아보았다.“제가 최씨 가문 집안 아이를 훔쳐 오라고 했지, 권씨 집안 아이를 훔치라고 했나요? 이러고도 저를 속이지 않았다고요?”“그게...”정대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영미 아가씨, 어차피 목적은 백인서를 곤경에 빠뜨리는 거잖아? 그러니 누구를 훔쳐 오든 상관없지 않아? 아이를 훔치기만 하면 유괴범이 되는 거니까.”이 말은 영미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정승우의 귀에도 또렷이 들어왔다.“좋아요.”영미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는 잘 지키고 있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한편, 권씨 집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권욱은 조순영을 탓하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고, 조순영은 오열하며 남편을 원망했다. 조순영은 권욱이 바깥에서 여자와 부적절하게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헛소리하지 마!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 잘 알잖아. 결혼 생활 내내 너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정말 떳떳하게 행동했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만 가만두지 않는 건데?”며칠 전까지만
권온유의 질문에 정승우는 당황했다.권온유는 커다란 눈망울로 정승우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슈퍼맨 같은 오빠가, 이제는 먹을 것 하나 구하지 못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정승우는 어색하게 입가를 씰룩이며 권온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갔다.“너, 정말 배고파?”“네!”권온유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작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원래는 엄마랑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 했어요. 엄마가 특별히 고등어조림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엉엉... 엉엉...”“울지 마, 울지 마! 그냥 생선 하나 가지고...”“나 배고파!”정승우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아이와 대화하는 건 그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겨우 권온유를 달래고 나서 정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팔을 걷어붙이며 권온유에게 내밀었다.“너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고프면, 여기 한번 물어볼래?”권온유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정승우를 바라보았다.“우리 집은 가난해서 늘 먹을 게 부족했거든. 그래서 어릴 때 너무 배가 고프면 이렇게 배고픔을 달랠 만한 걸 물곤 했어.”권온유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배고픔을 달랠 만한 것'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정승우는 웃으며 계속 설명했다.“예를 들어 쌀통 같은 거야. 한때 쌀이 들어 있던 쌀통은 비어 있어도 쌀 냄새가 남아 있거든. 그래서 쌀통 가장자리를 살짝 물면서 하얀 쌀밥을 먹는 상상하는 거야. 그러면 배가 덜 고파져.”“그리고 이웃집에서 밥하는 냄새를 맡으며 그 밥을 먹는 상상을 하는 거야. 그러면 그렇게 배고프지 않더라고.”권온유는 정승우의 이야기에 넋을 잃고 입을 벌린 채 있었다. 정승우는 웃음을 터뜨렸다.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한때 정대명이 도박과 술에 빠져 정승우를 굶겼던 시절은 그야말로 비참한 순간들이었다.잠시 후, 권온유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 정승우는 속으로 ‘큰일이다'라고 생
영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최지용을 지켜보았다.최지용은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구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영미는 바로 뒤를 따라갔고 최지용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찾았습니까?”“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만약 납치범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분명 전화를 걸어올 겁니다!”영미의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납치범이라니? 대체 뭘 찾는다는 거지?백인서와 통화한 걸까?그때, 최군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지용이 형, 여기서 뭐 해요?”영미는 얼른 몸을 숨겼고 최군성은 최지용에게 다가가 최지용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형이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서 와서 먹고 즐기자고요!”최지용은 최군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영미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영미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억지 미소로 인사했다.“지용 오빠...”“어, 영미?”최군성도 배윤아처럼 물었다.“여기 웬일이야? 형님이 널 초대한 것 같지 않은데?”“그게...”영미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군성은 영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지용을 끌고 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최지용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영미가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사람이, 왜 하필 오늘 온유가 사라진 날에 나타난 걸까?그때, 최군형과 강소아가 가원이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강소아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혔고 아이는 보행기 가장자리를 잡고 작은 발을 내디뎠다. 이 모습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영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리를 떠 교외의 버려진 공장으로 향했다.그 시각, 정대명은 영미의 지시에 따라 승합차를 몰고 공장에 도착해 있었고 영미가 도착했을 때 그는 공장 문 앞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미는 핸드백을 휘둘러 정대명에게 던졌다.“정대명 씨, 감히 날 속여
“너 따위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정대명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결국엔 자기 아들이었기에 정승우에게 감출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때리고 꾸짖어도 떠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정대명은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 들고는 권온유의 양 갈래머리를 단칼에 잘라냈다. 머리카락이 천천히 바닥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다가 막아서려는 순간, 자신과 정대명 사이에 힘의 격차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작정 나섰다가는 역부족일 터였다.정승우는 이를 악물고 정대명에게 다가가 물었다.“아빠, 정말 이 아이를 팔 생각이에요?”“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영미라는 그 여자가 원하는 거야!”정대명은 불만스레 대꾸하며 정승우에게 옷장에 있는 헌 옷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정승우가 옷을 가져오자, 정대명은 손을 뻗어 권온유의 예쁜 드레스를 찢으려 했다. 정승우는 급히 소리쳤다.“뭐 하는 거예요!”“이 자식이!”정대명은 정승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조용히 해! 죽고 싶어?”“아빠, 이건...”“이 애한테 옷을 갈아입히려는 거야! 이렇게 좋은 옷을 입고 있으면 바로 눈에 띄잖아.”정승우는 다가가 정대명을 옆으로 밀치며 말했다.“제가 갈아입힐게요!”“이놈이...”정대명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그는 정승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하, 아빠를 도와주고 싶구나? 역시 아들은 아들밖에 없지! 그래, 네가 손이 빠르니까 빨리 옷을 갈아입혀. 둘이 함께 가자고!”정승우는 속으로 혐오감이 치밀었지만, 지금은 그저 상황을 지켜보며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정승우는 권온유의 드레스를 벗기지 않고, 정대명의 헌 옷을 위에 입혀 단단히 감쌌다. 그런 다음 모자를 씌워 얼핏 보면 남자아이처럼 보이게 했다.“좋아, 이 정도면 되겠어!”정대명은 정승우에게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뒷문에 승합차가 준비돼 있대. 어서 출발하자!”“아빠, 이 소녀는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예요?”“교외지!”정대명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빨리 움직
권온유는 깜짝 놀라며 정대명을 멍하니 쳐다보았다.“아저씨가 맛있는 걸 가지고 왔단다. 배고프지 않니?”권온유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달아나려 했다. 정대명은 급히 권온유 앞을 가로막았다.“아니, 가지 마!”정대명은 두 손으로 권온유를 꼭 붙들며 말했다.“그게... 네 엄마가 나한테 너를 데려오라고 부탁했어!”엄마라는 말을 듣고 권온유는 잠시 멈칫했다.“정말이야, 네 엄마가 부탁한 거라니까!”정대명은 거짓말을 이어갔다.“방금 네 엄마가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렸지? 너 보고 기다리라고 했잖아?”“네... 맞아요.”“그래!”정대명은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네가 여기저기 막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엄마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알 거예요. 저는 여기서 조금 놀다가 다시 휴게실로 돌아갈 거예요!”“오... 그렇구나.”정대명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아저씨가 휴게실이 어딘지 아니까, 내가 데려다줄게!”권온유는 경계하며 정대명에게서 몸을 빼내고 두 걸음 물러났다.“얘가! 난 정말로 네 엄마 친구라니까. 네가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걱정하지 않겠어? 맞지?”“자, 자! 아저씨가 데려다줄게. 착하지!”정대명은 권온유를 갑자기 붙들어 어깨에 둘러맸다. 권온유는 본능적으로 소리치려 했지만, 정대명의 손이 입을 단단히 막고 있어 소리를 낼 수 없었다.어린 소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른 남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정대명은 권온유의 머리 뒤쪽을 세게 내리쳐 기절시켰고, 온유가 들고 있던 인형은 땅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익숙하게 호텔로 와서 지난번 일을 핑계로 다시 정대명에게 돈을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방 안에 기절한 어린 소녀가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어른 일에 참견하지 말고 신경 꺼!”정대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방금 정대명은 온유를 데려오며 보안과 호텔 직원의 눈을 피하고자 아이를 어깨에 메고 가지 않고,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속여서 안
“엄마, 우리 오늘도 여기서 밥 먹어요?”“그래.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고등어조림 요리잖아.”“그런데...”권온유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삼켰다. 사실 권온유는 집에서 밥을 먹고 싶었다.어린 권온유도 느낄 만큼 엄마는 요즘 기분이 좋지 않았다.방금 대답조차 어딘가 건성으로 들렸다.권온유는 어른들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걸까? 누군가 아빠와 다른 여자가 함께 찍힌 사진을 보내기만 하면, 엄마는 이렇게 변해버렸다.“엄마...”권온유는 엄마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그러나 조순영은 갑자기 권온유의 손을 놓고는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더니 초조한 표정으로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권온유는 깜짝 놀라 인형을 떨어뜨렸다.“엄마!”“온유야,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조순영은 급히 돌아보며 외쳤다.“엄마 금방 올게!”권온유는 엄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홀로 서 있었다.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엄마는 아빠가 다른 여자가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엄마는 통제력을 잃고 온유를 혼자 내버려두곤 했다. 그러고 한참 후에야 멍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곤 했다.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던 정대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몇 번이나 이 모녀를 본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 여자는 자주 아이와 함께 식사하러 왔는데 가끔 혼자 올 때도 있었다...남편의 외도를 잡으려는 걸까?맞아, 틀림없이 그런 거다!정대명은 매일 호텔에 살면서 듣는 소문도 적지 않았다. 한 회장이라는 사람은 아내와 자식이 있음에도 바람이 잦았다고 하는데 그 회장은 차기 시장의 사위가 될 인물이라는 말도 있었다.정대명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이런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차피 남자가 바깥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니까.정대명은 다시 어린 소녀를 주시했다. 소녀
정대명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얼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며칠을 기다린 결과가 고작 최가원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었다.그럼에도 영미는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왔다.“정대명 씨, 대체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대단한 것도 아니고 아이 하나 훔쳐 오는 게 그렇게 어렵나요?”젠장! 정대명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차라리 보석을 훔치는 게 더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하하... 영미 아가씨.”마음속으로는 욕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여전히 웃음이 서려 있었다.“이게, 그렇게 쉽지 않네요! 제가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그 경호원들이 전부 총을 들고 있더라고요. 제가 무턱대고 나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정말 쓸모없네요.”영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내가 사람들까지 매수해 놨는데, 일을 이따위로 하다니!”정대명은 억눌린 분노를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말해 두겠는데요!”영미는 한발 더 나아가 말했다.“이 일 못 해내면, 화려한 호텔 스위트룸도 더 이상 못 쓰게 될 테고 돈 한 푼도 못 받는 줄 아세요! 다시 그 작은 산골 마을로 돌아가서 평생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하세요!”정대명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호사에 길든 사람이 다시 가난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최근 정대명은 오성에서 살아가며 화려한 삶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이 잘 먹고 살게 도와줬고 돈까지도 넉넉히 주니 점점 체면이 생기기 시작했다.호텔에서 정대명이 매일 스위트룸에서 지내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부자로 착각했고 그에게 예의를 갖추며 인사했다.이런 삶은 초라했던 지난날에선 꿈도 꾸지 못한 것이었다.고작 아이 하나 때문에 이 모든 걸 잃기엔 너무 아까웠다.정대명은 급히 전화기를 붙잡고 외쳤다.“영미 아가씨, 너무 흥분하지 마!”영미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내가...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정대명은 어영부영 답했다.“겨우 아이 하나 가지고, 뭐 대단한 일도 아니지! 내가
백인서는 웃으며 정승우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정승우는 전혀 망설임 없이 백인서의 그릇에 고기가 많은 걸 보자마자 젓가락을 뻗었다.“너 지금 내 소고기를 뺏어 먹는 거야?”“사장님이 누나만 편애하는 거 아니에요? 고기를 이렇게나 많이 주다니!”“안 돼, 내 거야. 뺏어 먹지 마.”백인서는 웃으며 말했다.“이건 사장님이 특별히 주신 사랑의 소고기야!”“저는 성장기 남자애라 많이 먹어야 해요!”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면을 거의 다 비워가고 있었다. 백인서가 정승우에게 국수를 한 그릇 더 가져다주려고 일어서려는 순간, 달콤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고모!”백인서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예쁘고 앙증맞은 작은 공주가 백인서에게 달려왔다.“온유야?”권온유는 백인서에게 달라붙어 작은 머리로 백인서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정승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정승우는 이렇게 예쁜 여자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두 갈래로 묶은 머리에 공주 같은 퍼프 드레스를 입고, 마치 아까 놀이공원에서 본 백설 공주처럼 보였다.이 아이는 정말 동화 속에서 나온 공주일까?작은 소녀는 고개를 기울여 정승우를 한 번 바라보더니 달콤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백인서를 보며 물었다.“고모, 이 사람은 누구예요?”“이 사람은...”백인서가 대답하려던 찰나, 문밖에서 권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오빠는 학교에서 우등생이야. 공부도 엄청 열심히 하거든. 온유도 나중에 커서 이 오빠처럼 열심히 공부해야 해.”백인서는 권욱을 올려다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여긴 어떻게 오셨어요?”“왜? 딸과 단둘이 외식하러 나오는 게 이상해?”“아니요.”백인서는 고개를 저었다.“그냥 권욱 씨가 이런 작은 가게에서 식사하실 줄은 몰랐어요...”“여기도 꽤 유명한 맛집이야!”권욱은 의자에 앉으며 사장에게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오늘 주말이라 온유를 데리고 나왔는데, 이 녀석이 배고프다고 해서 핸드폰으로 근처 맛집을 검색해 보니 이곳 평이 좋더라고.
정승우의 머릿속엔 여전히 어린 시절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그 시절, 백인서는 낮에는 그를 등에 업고 다녔고 밤에는 재워주며 보살폈다. 따뜻함이라고는 거의 없었던 그의 삶에서 백인서는 유일하게 빛을 밝혀 준 존재였다.누가 세 살, 네 살 아이에게 기억이 없다고 했던가? 그 기억은 정승우의 성장 내내 곁을 지켜 주었고 다시 누나를 찾을 수 있도록 지탱해 주었다.“누나, 제발... 울지 마세요. 백 선생님!”백인서는 깜짝 놀라 정승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인서는 정승우의 미소에 눈물을 멈췄다.두 사람은 작은 음식점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우연히도, 이곳은 예전에 최지용이 백인서를 데리고 와 소고기 국수를 먹던 곳이었다.이번에도 그 가게 주인이 반갑게 맞이하며 다가왔다.“오, 이게 누구야! 귀한 손님이 오셨네!”그의 시선이 정승우에게로 멈췄다.“이 아이는?”“동생이에요!”정승우가 먼저 씩씩하게 대답했다.백인서는 미소를 지으며 주인에게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주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한번 보고는 주방으로 돌아가 푸짐하게 고기가 올라간 소고기 국수를 내왔다.“얼른 먹어!”백인서는 젓가락을 건네며 말했다.“여긴 정직하게 장사하는 곳이라 양도 푸짐하고 맛도 아주 좋아. 지용 씨가 나를 데리고 왔던 곳인데...”최지용을 언급하자 백인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정승우는 장난기 어린 미소로 백인서를 바라보며 물었다.“그 남자, 누나한테 잘해 줘요?”백인서는 모르는 척하며 대답했다.“무슨 남자?”“그러니까, 방금 말한 그 지용이란 사람 말이에요!”정승우는 더욱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숨기지 않아도 돼요. 산에 있을 때, 두 사람이 포옹하는 것도 봤고 그 사람이 누나한테 키스하는 것도 다 봤어요!”“정승우!”백인서는 정승우를 노려보았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쏠렸다.“그만해!”백인서는 테이블 아래로 정승우의 다리를 가볍게 툭 차며 말했다.“애가 무슨 이상한 소릴 하고 있어!”“저